1. 사상의 형성(1842-1872)
만주 개신교의 설립자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험과 인내성 및 외국 문물에 대해 정확한 식견을 가진 자로서 19세기 가장 중요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끼친 영향만큼 그 당시 사람들에게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큰 영향을 주었으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흔히 그와 같이 활동성 있는 개성을 가지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는 성급함은 없었다. 그와 수 십년간 같이 일했던 제임스 웹스터(James Webster)목사가 말하기를 "무레한 군중들에 대한 그의 놀라운 인내와,끊임없는 예의와 재치를 보았다. 여러 주간 매일 같이 있었으나 아무리 어려운 경우를 당해도 그가 자제력을 잃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의 성격 중에서 어려운 상태를 직면했을 때 인내와 관용은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개재를 가진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만주와 한국의 개신교의 설립자 및 한국을 서양에 소개한 사람으로서 중요시된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또한 그의 조상은 누구였던가?
존.로스(John Ross,중국명 :나약수(羅約翰)는 휴.로스(Hugh Ross)와 캐더린 서더런드(Catherine Sutherland)의 맏아들로서 1842년 8월 9일에 태어났다. 그때 로스가족은 크로마티 하구(Cromarty Firth)의 어귀에 있는 인버네스(Inverness)의 북쪽 닉(Migg)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이 작은 농촌지역에서 존.로스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영향을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세기 중엽까지도 이 지역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대부분 갈릭어(Gaelic Lnanuage)를 사용하는 지역이었다. 존.로스는 갈릭어를 사용하면서 성장했고, 편(Fearn)교구의 힐턴(Hilton)마을에 있는 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영어를 처음 배웠다. 말할 나위 없이 두 언어-영어,갈릭어-를 배운 경험으로 중국어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바다에 접해 있는 고향도 또한 틀림없이 로스목사에게 일찌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로스목사의 고향은 북서 스코틀랜드와 같이 거대한 산맥도 아니고, 로디안 카운티(Lothian County)와 같은 풍부한 농작물 지대도 아니었다. 그의 고향지역은 낮은 언덕이 있는 작은 농촌지역 이었다. 농업,어업 및 바다무역의 종합경제로 비교적 국제적인 분위기를 띠었다. 로스목사가 어렸을 때부터 바다 건너 편에 있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으므로,성장한 후에 해외로 나가고자 하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로스목사의 어릴 때 성장발전에 영향을 주었던 또 하나의 요소는 교회였다. 해외에서는 스코틀랜드 교회를 커다란 하나의 조직으로 생각했으나,18세기부터 스코틀랜드 교회는 여러 파로 갈라졌다. 이들 중에 하나가 '부속노회(Associate Synod)'였다.이 단체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나 지방노회와는 무관했다. 결과적으로 1847년에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가 되었다.닉에 이런 연합 장로교회가 있었고, 거기에 로스목사 가족이 속하게 되었다. 연합 장로교회를 창설케 했던 신앙 전통은 로스목사의 신학사상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그는 가끔 그 때를 스코틀랜드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영광스러웠던 한 순간으로 회상하곤 했다. 회귀한 사상을 가졌던 교파에 속했으므로,로스목사는 독특하고 비범한 것을 할려고 했다는 것은 있음직하다.
닉지방은 갈릭어 통용지역일뿐만 아니라,갈릭문화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존.로스는 라리키(Rarichie)부락의 브룸턴 카터지(Broomton Cottage)에서 자랐다. 집 근처에는 덴마아크 통치시대의 성이 있었고, 또 클라크 아카리드(Clach a'Charridh)라는 신비스러운 비석이 있었다. 그 비석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닉교구의 묘지에 그와 비슷한 비석이 있었다. 그 지방에 많은 우물에는 선녀들과 요정들에 대한 얘기가 있었는데,그 중에 제일 유명한 것은 설.나.바(Sul na Ba)였는데, 거기에서 선녀들의 왕 앞에 제사를 드렸다.그는 그러한 얘기들 중에 깔려 있는 미신적인 감정을 수긍할 수 없었찌만, 농민들이 가졌던 그러한 신앙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로스 목사가 문화와 중교 및 지리에서 받았던 영향에 대해서 알 수 있으나, 그의 어렸을 때 영향은 더 강하게 그에게 작용했을 것이다. 로스 목사의 가족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 로스목사가 라리키에서 무역을 하면서 살고 부자가 됐던 '폴란더(Polander)'로스의 후손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그의 아버지가 그 지방에 주요인물이었음을 알수 있다. 예를 들면 휴.로스(Hugh Ross)는 1832년에 설립된 콜레라방역회 회원이었다. 또한 그는 양복업자1)였다. 현대인에게는 이것이 특별한 직업으로 알려지지 않으나, 19세기 초 북 스코틀랜드의 농촌사회의 경우엔 달랐다. 양복업자들은 교구 밖의 사람들과 자주 접촉했다. 행상인과 여행자, 부락인들은 그 상점에 와서 바깥 세게의 소식을 전했다. 또한 양복업자가 우선 얼마만큼의 자본을 가져야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사회 중류계급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발린토어(Balintore)마을2)에 전해 오는 얘기 중에 로스목사는 편에 있 지방학교로 가기 전에 어머니로부터 먼저 교육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그의 남편과 마찬가지로 로스목사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교육을 받았고,가족들은 그 마을에서 식자층에 속했을 것이다.
로스목사는 여덟 아이들 중에 맏아들이었다. 그의 형제는 도널드(Donald),휴(Hugh),윌리암(William),알렉산더(Alexander),캐더린(Catherine),엘리자(Eliza)와 메리(Mary)였다.
이들 중 둘을 제외하고는 고향을 떠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확보했다. 도널드는 1878년 글라스고우(Glasgow)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와 장차 자기 형 존과 선교활동을 할려고 계획했다. 휴는 라리키에서 농업을 계속했으나, 윌리암은 에딘버러(Edinburgh)의 항구인 리츠(Leith)에 가서 방앗간을 했고, 알렉산더는 에딘버러의 경찰국에 들어갔다. 캐더린은 1873 말에 만주에 있는 오빠 존에게 가서 그 후에 그의 동료인 존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와 결혼했다. 엘리사는 에딘버러에 있는 왕비 스코틀랜드 미술학원(Royal Scottish Academy of Art)에서 공부하고 거기서 미술전시회를 가졌다. 메리는 브룸턴 카티지에서 머물다가 후에 자기 언니 엘리사와 합류했다. 휴.로스가족은 바깥사회에 잘 적응해서 더 좋은 지위를 확보했다.
1860년대 중반 존.로스는 에딘버러에 있는 연합장로교의 신학대학에 가서 신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에 인버네스에 있는 조오지 브라운(George Brown0목사의 전도사로서 봉사했다. 1868년 가을부터 선교활동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해서 해외 선교부 총무인 윌리암 맥길(William McGill)박사와 접촉했다. 맥길박사는 로스목사의 초청을 쾌히 승락하여 인도나 중국은 어떤지 의향을 물었다. 존.로스는 동시에 선교활동에 대해 두 의학도와 접촉해서 질문했다.
로스목사는 그후 4년간 해외로 나가는 문제에 대해 두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국내 선교부는 로스목사가 좋아하는 갈릭어 사용 지역인 하일랜드(Hithlands Region)에 머물러 있도록 권유했다. 그때 갈릭어를 사용하는 목사가 드물어서 가능한 국내 체류를 원했다. 반면에 해외 선교부는 로스목사의 언어능력을 인정해서 해외에서 봉사하기를 원했다. 인버네스에서 목회를 마친 다음 로스목사는 아일 오브 스카이(Isle of Skye)의 포오트리(Portree)에 있는 교회에서 잠시 봉사했다. 그는 거기서 2년간의 목회가 여의치 않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는 아우터 헤브리디즈(Outer Hebrides)에 있는 아일 오브 루이스(Isle of Lewis)의 스토너웨이(Stornoway)에 갔다. 그때 그는 맥길박사에게 "아마 스토너웨이가 국내와 해외선교에 어떤 실마리를 풀어 줄 것이다"고 했으나,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때 쓴 편지를 보면,영국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해외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했다. 또한 목회에 미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1881년 말 중국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해외 선교부에 서류를 제출했지만, 1882년 1월 그것에 대한 걱정을 맥길박사에게 편지로 전했다. 그는 급히 답장을 보내면서 그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동족 스코틀랜드의 화염보다 해외 선교의 불꽃이 더 낫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런 강력한 언어에서 용기를 얻은 후에 그런 사명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1882년 2월 27일에 해외 선교부는 그를 중국선교사로 선택했고,3월 20일에 엘진(Elgin)과 인버네스의 노회는 그에게 안수했고,3월 25일에 엠.에이.스튜아트(M.A.Stewart)와 결혼했다. 30세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거대한 모험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2. 선교활동 초기(1872-1879)
1872년 늦은 가을 로스목사 부부는 영국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그들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기차로 북미대륙(캐나다)을 통과해서,뱅쿠버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다. 일본에 있는 동안 몇몇 선교사들을 방문하고 상해로 가서 8월 23일에 산동에 있는 지부에 도착했다. 극동으로 가는 길 중에서 이 방법이 제일 빠르고 경제적이었다. 다른 길 중에는 홍해를 경유해서 수에즈 운하로 가는 길이 있었으나,에딘버러에 있는 선교회는 미국 북장로 교회에 의해 그 방법을 사용치 않도록 부탁 받았다. 철도를 사용하는 것은 극동을 경유하는 증기선 요금의 1/3이 절감됐다.
1850년대에 중국은 몇몇 항구를 외국인에게 개방했다. 이런 도시에 선교부들은 대표들을 파견했고, 연합 장로교는 1862년에 정국 남부 항주만 입구의 영파에 첫 선교 지부를 설립했으나 여의치 않아 1872년에 문을 닫았다. 1871년부터 연합 장로교는 스코틀랜드 성서협회(National Bible Society of Soctland)대표였던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지도하에 산동반도에 있는 지부,연대에 지부를 운영했다. 그들이 그때 로스목사를 지부로 보내어 늘어나는 선교사들의 집단에 참가시킨 것은 에딘버러에 있는 외국 선교회가 중국의 한 지점에서 그들의 노력을 집중할 바로 그때였다. 지부에 있는 선교사들 중에는 앞에 나온 윌리암슨 목사를 위시하여 존.맥킨타이어 목사,루이스 니콜(Lewis Nicol)과 윌리암 헨더슨 의사(Dr.William A.Henderson)가 있다.
윌리암 목사의 경험에 이해 로스목사의 선교활동은 완전히 방향이 달라졌다.
1850년대 외국인들에게 열려진 항구들 중에는 영구(營口)인 우장(牛庄)이 있었는데,어떤 사람에게는 선교의 가능성을 주어 중국의 이웃인 조선에 간접적인 영향을 준 것 같았다. 만주의 첫 선교사 중에는 윌리암 찰머즈 번즈(William Chalmers Burns,1815-1868)가 있고,그는 외유 선교사로서 스코틀랜드,아일랜드 및 카나다에서 크게 활동하고, 잉글랜드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England)는 중국에서 선교를 시작하기로 결정했을 때 번즈 목사는 첫 선교사로서 선택되었다. 번즈는 1847년 중국으로 건너가서 만주에 오기 전 거의 20년 동안 중국에 살면서 활동했고, 1867년 영구에 정착했는데 거기서 병에 걸려 1868년에 죽었다. 그는 임종 때 유럽 선교회에게 만주에서 선교하도록 부탁했는데, 이 일은 맨처음 아일랜드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Ireland)가 시작했다. 아일랜드의 장로교회는 의료선교사 요셉 몰리뉴 헌터(Joseph Molyneux Hunter)와 휴와들(Hugh Waddell)이라는 두 후보를 보냈다. 벨페스트(Belfast)출신인 헌터 의사는 1853년 에덴버러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그후 몇년간 영국해군에서 군의관으로서 일했다. 1864년 1월 15일 벨페스트 장로회는 그들 장로로 임명하여 의료선교사가가 되도록 위촉했다. 그는ㄴ 1869년 만주로 가서 봉사하다가, 1884년 5월 8일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던 도중 홍해에서 죽었다. 헌터 의사와 같이 갔던 휴 와들은 1840년 북 아일랜드의 글래남(Glenarm)에서 나서, 1869년 1월 19일에 벨페스트 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1872년 심한 병에 걸려 그해 7월 8일 요양겸 스페인으로 갔다. 2년 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선교사가 되었고, 1901년 6월 20일 벨페스트에서 죽었다. 1872년 8월 23일 로스목사가 지부에 도착했을 때 헌터 의사만 영구에 살았고,연합 장로교회의 지부에 있는 연합 장로교회의 회장인 윌리암슨 박사에게는 특수한 의미를 주었다.
알렉산더 윌리암슨은 1863년부터 스코틀랜드 성서회를 대표했고, 1866년부터 1868년까지는 윌리암 번즈와 같이 순회전도를 했다. 1867년 가을 그는 조선과 중국 국경을 인접한 세관인 봉황성(Corean Gate)을 방문했는데,연중 보고서에서 몇몇 조선 상인들이 거기서 성경을 몇권 샀고, 휴 와들목사가 최근에 떠났으므로 선교사 몇 명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로스목사와 나누고 겨울이 오기 전에 영구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겨울엔 요동만이 얼어 갈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 그 시간엔 언어학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로스목사는 모험적인 생각으로 응답하고, 9월에 지부에 도착한 뒤 한달 지나서 로스목사 부부는 영구로 옮겼다.
영구에서 첫겨울에 에딘버러로 보낸 편지를 보면, 로스목사 부부가 집과 예배당을 구하기가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그때 그는 중국어와 사서삼경을 배워 봄이 오기 전 간단한 설교를 할 수 있었다. 그때 로스 목사 부부에게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는데,하는 흑한이었고, 다른 하나는 헌터 의사와의 다툼이었다. 헌터는 성미가 급했다. 또한 아일랜드 선교사의 아성에 스코틀랜드 선교사의 도착은 틀림없이 바람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후가 큰 문제였는데,영하 25도 이상되는 일은 없었다. 로스목사 부인은 임신 마지막 달에 여행하면서 몸이 불편했는데, 그와 같은 기후는 건강상태를 더 악화시켰다. 늦은 2월 그의 아들 드러몬드(Drummond)를 낳았으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됐다. 그녀는 3월 31일 죽어서 번즈선교사 무덤 엎에 묻혔다. 로스목사는 마음이 몹시 아팠으나, 계속해서 중국어를 배우고 설교활동을 위한 준비를 했다. 5월 11일에 처음 20분간 설교했고, 5월 13일 개주로 처음으로 긴 순회전도를 나섰다. 그의 아들은 중국 여인이 길렀다. 이리하여 로스목사의 선교활동은 기틀이 잡혔다.
1873년말 로스목사는 영구지방을 순회전도했는데, 이때 그의 선교방법이 성립되었다. 그것은 두가지 였는데,하나는 그 나라의 가치관이나 신앙을 버릴 필요가 없고,그보다는 그 문화를 바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설립하도록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비기독교 지역에 있는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의 활동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기독교인들의 생활과 전도활동을 통해서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선교사가 필요 없고 몇 명만 몇군데 있으면 그 지방 신자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로스목사는 사서삼경을 열심히 익혔고, 전도할 때 그것을 많이 이용했다. 그는 유교를 한번도 비판하지 않았고 사회의 훌륭한 가치관으로 칭찬했으며, 설교시에는 이 윤리적 가치관을 중국인에게 그리스도를 믿게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 한번도 길가에서 설교하지 않았고, 일부러 구입했던 교회당에서 강연했다. 그는 먼저 모월 모일에 어떤 교회당에서 기독교에 대해 토의한다고 공표하곤 했는데, 먼저 간단한 강연을 하고 난 다음 어떤 사람이 질문하거나 주(註)를 달았다. 이 방법을 순회전도라기보다 중국 토착문화와 더 밀접했다. 3세기부터 중국의 청담이라는 방법이 있었고, 그것을 광범위한 철학적 문제들을 논하던 것이었다. 이 청담식 전도 방법을 중국인에게 쉽게 적응되었고,결과적으로 기독교 사상은 더 잘 전파되었다.
만주에 있는 교회 성장이 그의 주요한 임무였으나,로스목사는 윌리암슨 박사의 조선에 대한 관심사를 결코 잊지 않았다. 1877년에 만주 선교에 대해 개척하면서 동시에 조선에 대해 몇 가지 계획을 착수한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두가지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그의 자녀를 양육할 사람이 필요했고, 다른 하나는 만주에서 그를 도와줄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동년 7월에 외국선교부에 있는 맥길박사에게 편지를 써서 아들을 기르기 위해 그의 여동생 캐더린을 보내도록 요청했다. 1873년 12월 말 캐더린은 런던에서 글라마트니(Glamartney)호를 타고 중국으로 갔으나, 아직 만주에서는 그와 같이 선교활동을 할 동력자가 없었다.
이 기간에 로스목사가 에딘버러 선교회를 보낸 편지에서 그가 관용성과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76년 1월 그는 1873년 2월에 썼던 기사를 보냈는데, 그가 만주에 머무른지 첫 석달 안에 중국 새해 기념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1873년 7월 맥길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구에 있는 집을 지을 때 노동자들에 대한 표현에서 중국인에게 느꼈던 사랑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회고하면 그의 아내의 죽음으로 그는 선교방향을 바꿨고, 그의 모든 수단과 감정을 중국인을 위해 사용했따고 할 수 있었다.
1874년 로스목사는 태평산과 개주현에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을 살 때, 지방민들이 반발했고 그 주인은 구속됐다. 왜냐하면 지방장관은 외국인이 그 지방에 있는 천주교와 내통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개주현에서 그가 나타나면 분위기는 쉽게 흐려질 수 있었다. 태평산에 있었던 개신교 집단에 의해 운영될 때, 그것을 깨달았다.
로스목사는 천주교를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의 편지에서 가끔 천주교회의 치외법권 사용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외국인이나 그들의 조력자들이 외국 정부나 중국 조정의 힘에 의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느끼기를,그렇게 하면 반서양 감정이 일어나 기독교의 발전은 어렵게 될 것이라 했다. 천주교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이런 점에서는 개신교 선교사도 비판했다.
1874년 봄과 여름 모교회로 보낸 편지에서 그는 중국인 기독교인의 선교책임을 나타냈다. 대부분의 설교는 그가 훈련시킨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고,로스목사는 필요시 그가 설립했던 곳을 순회설교했으며 학습과 세례를 베풀었다. 로스목사는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고, 6개월이나 그 이상된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었는데, 그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파악할 때까지는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
같은 해 여름 아일랜드 선교사와 만주지역을 나누었는데, 아일랜드 선교사는 서쪽을,스코틀랜드 선교사는 북쪽과 동쪽을 맡았다. 이 계약은 세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로스목사는 두 교단이 중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모든 교단의 갈등을 없애도록 하고 싶었고,특히 헌터박사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재 로스목사는 일찌기 스코틀랜드 설교의 중심지는 영구시이어서는 안되고, 만주의 수도이고 청나라의 둘째 큰 소시인 봉천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셋째 로스목사는 그때 한국선교를 위해 많은 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었기 때문에,스코틀랜드 교회는 동만주에서 선교할 수 있고 조선 국경선에 전도자를 보낼 수 있다고 했을 것 같다.
같은 해 10월 9일 로스목사는 영구를 떠나 순회전도를 나섰고, 첫 번째로 고려문(Corean Gate)을 방문했다. 그 기록을 그해 11월,12월에 나오는 격월지 '중국기록과 선교보고(Chinese Recorder and Missionary Journal)'에 썼고,1875년 5월 '연합장로선교보고(United Presbyterian Missionary Record)'에 간추려서 기고했다. 왕복여행은 약 3주일 걸렸고, 로스목사가 고려문으로 간 길은 조선의 사신이 북경으로 가는 길과는 방향이 달랐다. 10월 9일에 영구로 떠나 첫날밤은 대석교(도시이름)에서 보냈는데, 거기 있는 여관은 북중국에 있는 여관 중 가장 좋다고 했다. 대석교를 떠나 동쪽으로 여행을 하면서 천산(千山)의 산맥을 지났는데, 무수한 산맥들이 북 스코틀랜드의 산맥들처럼 생각이 들었다. 로스목사와 그의 동행인은 양하를 12번이나 건넜다.그의 보고서에서 로스목사는 그 지방의 식물과 동물 및 지리를 살펴 보았고, 또한 그 지방의 풍속도 살펴서 기록했다. 대석교를 떠나 그들이 처음 도착한 큰 도시는 수암주이었고, 거기에서 북동쪽으로 가면서 봉황성으로 곧장 가는 길이 아니었으나,로스목사와 그의 동행인은 그 도시로 갔다.
그는 6일간 세관이 개방되기를 기다리면서 그 지방의 상업과 산업을 시찰할 기회를 가졌는데, 그곳 상품의 대부분은 다른 지방으로 수출되도록 대고산의 항구로 보내졌다. 그는 또한 봉황성에서 조선산배를 샀는데, 그것을 제일 맛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서도 설교했고 한문성경을 팔았다. 그가 수암주와 봉황성에서 보낸 보고서에서 그 두 곳에 이슬람교인들이 있었다고 적었다.
고려문이란 마을은 청과 조선사이에 있는 세관이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고,그것은 봉황성에서 떨어진 봉황산이라는 산맥 옆에 있었는데, 그 언덕에는 도가의 수사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세관은 일년에 4번씩 열렸다. 음력 3월에 시작해서 3,4개월간 열렸고,음력 8월에 3주간,음력 9월에 약 6주간,마지막으로 섣달에 한달간 열렸다. 로스목사의 말에 따르면 3.9월에 여는 장은 가장 중요했고,그때엔 봉황성의 지방장관이 직접 열었다. 로스목사의 첫 방문은 음력 9월이었는데 그 때는 그 문이 잠겼고,그가 조선 상인들을 만날려고 했으나 한꺼번에 몰려 올 때가 아니라서 실망했다.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 섭섭하게 영구로 돌아왔다. 고려문에 처음 올 때 그는 거기에 왔던 조선 상인 등과 접촉해서 대화할 수 있었으나, 새로운 소식을 전한다거나 성경을 팔 수가 없었다. 그는 여기에 비해 말하기를, 그들이 이런 외국책을 가졌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했고, 바로 몇년 전 조선에 있는 천주굥니들이 가장 극심한 박해를 당했고, 서양인과 접촉하기를 두려워했다고 했다.
영구로 돌아 오자마자 로스목사는 중국기록과 선교보고에 고려문 심방('Visit to the Corean Gate')이란 글을 썼다.
그것을 쓰고 난 직후 영구 서쪽 650킬로미터에 있는 북경으로 떠났다. 이 여행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더 이상 알 수 없고 단지 추정할 수 있다. 두가지의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는 북경에 있는 유명한 W.A.P.Martin(마틴박사)가 있었고, 로스목사와 마틴의 선교 방법과 중국인을 이해하는 방법이 비슷한 점이 있었다. 로스목사가 거기로 가서 만주에 있는 그의 활동에 대해 얘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로스목사가 조선어를 배울 계획을 세웠고, 신약성서를 그것으로 번역해서 출판하도록 도움을 청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후 새해가 되기 전에 영구로 돌아 온 것 같다.
1875년 로스목사가 쓴 기록 등이 많지 않으나,만주의 수도원 봉천에 몇개의 전도관을 설립하려고 무척 노력한 것 같다. 그것을 위해 다섯번씩이나 봉천으로 갔으나 일이 잘 안되었다. 1875년 말 그는 에딘버러에 있는 선교회에 그 장소를 설립하고 왕 징밍,탕 운환 두 전도사를 선택했다고 했다. 그는 또한 영국 주위에서 한 것 같이 대석교에서는 장소를 설립했으나, 해성과 요양에서는 설립하지 않았다고 했다. 같은 해 언제 지부로 배를 타고 갔고, 그 이유는 모르지만 존 맥킨타이어를 만주에 오도록 부탁한 것 같다. 1875년 말기 로스목사가 만주에 온지 3년만에 그는 첫 선교 통역자를 만났다.
존 맥킨타이어는 만주로 갈 때 로스목사보다 네 살 위였으나 아직 총각이었다. 그는 1837년 7월 18일에 스코틀랜드의 록크 로먼드(Loch Lomond)에 있는 러쓰(Luss) 에서 출생해서, 페이즐리(Paisley)에서 교육을 받았고, 독일의 하이델베르그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에딘버러에 있는 연합 장로교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865년에 안수를 받고 베일리스턴(Baillieston)교회에서 목사 취임을 했다. 1871년 중국에 갈때까지 그곳에서 목회했고 일년 후 갔다. 로스목사가 부르기 전에 지부 서쪽 200킬로미터에 있는 유현에서 목회했다. 맥킨타이어가 영구로 옮길 때 로스목사는 미리 만주에서 큰 선교 활동계획을 가지고 있은 듯하다. 1876년 초에 맥킨타이어는 로스목사의 여동생 캐더린과 결혼했다.그녀는 로스목사의 아들 드러몬드를 기르고 중국 여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로스목사와 맥킨타이어는 선교활동을 빨리 계획해서,한 사람이 6주간 영구에 있으면 다른 사람은 6주간 순회전도를 했다.
1876년 4월말과 5월 초에 고려문으로 두 번째 여행을 했다. 이번에는 준비를 미리 잘 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비용은 영국 리즈(Leeds)시에 있는 로버트 아팅톤(Robert Arthington,1823-1900)이 대었다. 그는 유명한 자선사업가였다. 로스목사는 세관으로 갈 때는 2년 전과 같은 길로 갔으나,세관을 지나 압록강과 북쪽 국경 사이에 있는 무인지경까지 갔고, 애하와 압록강의 합류점까지 갔다. 거기에 있는 모래밭과 더 비옥한 곳에 잇는 농장에서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로스목사는 한권으로 된 전도지와 성경을 출판할려고 했고 ,나중에 반도로 들어 오는 방법을 찾을려고 했다. 두 강이 만나는 곳에서 로스목사는 의주시를 볼 수 잇어서 압록강변을 따라 구경하도록 뱃사공을 부르려 했으나, 조선의 변방 군인들이 두려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로스목사가 조선 국경으로 간 두번째 이유는,조선어 선생을 찾고 또 신약성서를 조선어로 번역하도록 그를 도울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로스목사는 동역자에게 성경을 번역할 수 있을 만한 지식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한약장수였고 그는 압록강을 건널 때 모든 물건을 잃어버렸다. 이 응찬은 동력자에게 관심을 나타냈으나,로스목사와 일주일 있은 뒤에 로스목사의 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그런데도 봉황성을 떠날 때 그는 로스목사에게 은밀히 얘기했다. 외국인과의 접촉을 두려워해서 이 응찬의 동생조차도 그가 로스목사의 교사가 된다는 것을 몰랐다. 로스목사가 떠나기 전 이응찬은 하루 먼저 떠났고, 봉천으로 가서 다시 만났다. 봉황성에서 돌아 올 때 천산을 거쳐서 다른 길로 갔다. 관전과 환인을 지나 청나라 황제 조상의 능이 있는 흥경에 갔다. 거리서 그들은 봉천으로 가기 전 며칠 머물렀다. 고려문을 방문한 세번째 이유는 압록강으로 가는 봉천의 동쪽에 있는 지방을 탐색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1876년 9월 로스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는 매달 해성으로 순회전도를 나갔고, 그 해성은 봉천으로 가는 도중에 정류장 하나가 되었다. 또한 동시에 봉천에 거류전도사가 있는데,그것은 만주선교 전략의 중심이 되었다. 이와 같은 양인이 바램으로 기독교 교리가 북중국에 전파될 수 있었다. 1876년 말 로스 목사는 그의 첫 저서를 내었는데, 그것은 '맨드린 프라이머'(Mandarin Primer')라는 선교사들을 위한 중국어 교본이었다. 그해 11월 중순 로스목사는 북경으로 두번째 여행을 떠났는데,가는 도중 며칠간 금주에서 머물었다. 로스목사가 무슨 이유를 갔는지 우리는 모르나,아마 조선어로 신약을 번역하고 인쇄하기 위해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 한 듯하다.
1876년 썼고, 1877년 3월 연합 장로교 선교보고에 썼던 기사에서 그는 자기의 선교방법에 대해 말하긴 "내가 중국으로 갈때 그들의 가치관을 알기 위해서였고, 그것을 그들의 귓전에 깨우치기 위함이었다"했다.
이 적극적인 중국인 편으로의 접근은 그가 그리스도를 전하기 전 공자에 대해 얘기한 듯하다. 중국이들은 불교나 도교는 비판하겠으나, 유교는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로스목사는 기독교를 설명하기 이해 사서 삼경을 공부하고 많은 문장들을 암기했다. 동년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으나 기독교에 대해 가르쳤다. 이 사상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사람들은 잘 받아 들였다. 그 전 해에 비해 불신이 현저히 줄어 들었다.
1877년의 선교보고에서 특히 재미 있는 것은 그의 활동방법이다. 로스목사는 두가지 특성을 가졌는데, 비판하는 사람을 다룰 때 그의 풍부한 관용과 중국문화와 풍습에 대한 지식이었다. 1876-1877년 젊은 학자들 몇 집단이 그를 추방할려고 노력했다. 원망을 많이 들었으나 참았으므로 나중에 여러 학자들은 그의 설교를 잘 수긍했다. 동시에 봉천에서 처음 전도할 때 용왕사에 살았다. 그때 다른 곳에 머무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관용성 있는 수용성은 영국 본부에서 알았더라면 놀랐을 것이다.
동시에 이 응찬 밑에서 조선말을 배웠음이 틀림없다. 그의 두번째 저술인 '조선어 교재'('Corean Primer')는 1877년에 발행됐다. 그 책의 서론을 보면,맨드린 프라이머에 기초해 있는 조선어 문법공부였다. 불란서 드로조니(de Rosny)에 의해 '조선어에 관하여'('Apercu de la Langue Corene')가 쓰여졌는데, 'Corean Primer'는 첫째 영어로 쓰여졌고 조선어 문법을 설명했으며,조선어로서 예문 문장을 들도록 모두 서양어로 썼다. 이 책의 특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한글을 완전히 쓰고 그 사용언어는 표준어가 아니라 북쪽 사투리였다. 이것은 의주 출신 이응찬의 영향을 나타낸다.
1878년 로스목사는 봉천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맥킨타이어목사는 영구를 담임했다. 로스목사의 주소는 봉천 북쪽의 교외였고, 여름엔 쉬기 위해 영구로 갔다. 이때 조선어 성경번역을 계속했었는데 여기에 대해선 제3장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겠다. 그때 로수목사는 안식년에 대해 생각했고,선교회 본부로 편지를 써서 중국교인이 영국을 시찰토록 교통비를 신청했다. 이 신자는 아마 로스 목사가 신임한 왕 징밍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허락지 않았다.
로스목사는 1878년 보고서에서 보면,봉천에 있는 천주교 신부와 다툼이 있었다. 그들은 (신부는) 치외법권을 이용해서 돈을 갈취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은 기독교인을 비판했으니 이런 일이 없도록 막았다. 또한 그의 비세례 신자는 경제적인 획득을 꾀했으므로 추방했다. 로스목사는 천주교도 비판했으나, 천주교 신부들이 일부러 중국법을 파기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1879년 2월,1878년 보고서로 보냈고, 1879년 5월 9일,7년만에 처음 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3. 첫번째 안식년(1879-1881)
1879년 안식년 로스목사는 이 기간 중에 펴 냈던 두 책의 원고와 4복음서,사도행전 및 로마서의 첫 번역원고를 가지고 갔다. 그 이전 선교부로 보낸 편지엔 이와같은 성서번역에 관해 언급이 없었으므로,언제 어떻게 그가 이런 사업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로스목사의 조선어 교사가 이응찬이었으나,김양선과 다른 교인들을 만났던 것은 1874년이 아니라 1876년이었을 것이다. 김양선은 이응찬과 의주에서 온 다른 세사람이 로스목사에게 가서 조선어 선생이 됐고, 로스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믿고 있다. 5월 중순 로스목사는 두번째 고려문 방문이 있었으므로,그해 말이 되기 전에 주로 그의 친구들에게 연락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의 첫 세례는 1876년쯤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 응찬은 맥킨타이어목사에게서,나머지 사람들은 로스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이들은 이성하, 김진기와 백봉춘이다.
김양선의 생각에 성경번역은 1875년에 시작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로스목사가 이응찬을 1874년에 만났으며,1년 후에 성경번역이 시작됐으니 1875년이었을 것이다고 했다. 그런데 자료에 따르면 로스목사가 이응찬을 1876년에 만났으니 성경번역은 1877년에 나왔으니,성경번역은 조선어 공부가 끝날 때 시작됐다고 볼 수 있으므로 1877년에 시작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서상윤이 로스목사의 첫조선어 교사였었다고 하나, 김 양선은 서상윤과 그의 동생 서 경조가 1878년 로스목사를 만났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서상윤은 1879년 세례를 받았다. 아마 이런일은 성경번역 후 2년 지난 다음 있었는 듯하다. 성경번역 시작은 두말할 것 없이 여러 사람이 했던 것이 분명하다.
번역할 때 어떤 방법이 있었는가? 번역은 네번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두번,세번,네번째 번역은 근거로 증명될 만한 것이 있으나, 첫번째의 기록은 없다. 1880년 말 맥킨타이어목사는 선교본부에 편지하기를 첫 원고는 1878-1879년에 시작됐고,두번째 원고는 로스목사가 안식년으로 간 후 시작했다. 한문을 사용해서 로스,목사와 사람들은 번역을 시작했다. 1880년 말 맥킨타이어목사는 새로 성경번역을 시작했고 헬라어 성경을 사용했다. 에딘버러 본부에 편지를 보낼 때,맥킨타이어목사는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을 끝냈고 누가복음을 시작했다. 매일 맥킨타이어목사와 두 사람은 3시간 내지 4시간을 일했다. 이때 세번째 번역했고, 맥킨타이어목사는 세번째 역자에게 1881년 봄까지 번역의 [천로역정]을 완성하도록 부탁했다. 매일 아침 7시에서 9시까지 맥킨타이어목사는 소장역자를 불러서 번역했고,저녁엔 소장역자에게 가서 그의 번역을 수정했는데,처음에는 중국성경을 보고 번역했고, 그 다음에 헬라어 성경으로 수정했다. 1880년 맥킨타이어 목사의 보고서에서 마태복음은 네번 번역했는데, 이것은 그것을 대단히 자세히 번역했다고 했다.
그때 로스목사는 조선에 성서번역에 대한 비용을 여러 단체들에게 부탁했다. 맨처음 스코틀랜드 성서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880년 영국 및 해외 성서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의 주필인 라잇(Wright)박사와 얘기했는데, 그는 번역을 위해 첫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1881년 2월 여러 후원자들에게 인쇄와 출판의 도움을 부탁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성서회가 지원할 수 있었으나,그때 영국의 극심한 불경기로 활자를 위해 130파운드만 제공할 수 있었다. 자선사업가 로버트 아링톤은 1876년 종이와 누가복음,요한복음의 3,000권의 인쇄비용을 돕겠다고 했고,그는 1876년 두번째 고려문을 방문하도록 도왔다. 글라스고우와 던디(Dundee)는 무명의 자선사업가들고,맥킨타이어 목사를 선택해서 5년 동안 첫 조선 선교사의 봉급을 지불하는데 동의했다. 여러 다른 후원자 중 재미 있었던 것은 엘진에 있는 국민학교부와, 랜즈타운(Lansdowne)에 있는 가난한 사람에게 1파운드 15실링과 10실링을 각각 주었다. 조선 내의 번역에 관한 소식이 멀리 전해졌다. 로스목사가 없을 때 맥킨타이어목사가 부쳤던 보고서에서 방문하고 싶은 사람, 기독교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 한문성경을 읽고 세례를 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1879년 여름 그의 조선어 교사와 해성에서 예배를 볼 때, 제 나라 국민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왔다. 1979년 말 "이번 여름에 11명의 한국인들이 영향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1876년에 로스목사가 압록강가에서 조선어 성경을 나누어 주었기에 이 사람들은 모두 영구로 가서 영국선교사를 찾았다. 그해 여름 첫 성경 번역을 몇 달 도왔던 사람이 로스목사와 영국으로 같이 갈려고 영구로 왔다. 같은 해 맥킨타이어목사는 로스목사에게 조선인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전했다. 1880년에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가진 조선인들이 많아졌다. 이 사람들은 5-6명씩 떼를 지어 선교사 집으로 와서 며칠간이나, 일 주일간 성경교육을 받았다. 1880년에는 조선인 30여명이 같은 방법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때 영구로 들어 오는 조선상인들이 많았을 시기인데, 맥킨타이어 목사가 말하길 "거의 한달에 한번씩 조선인 성경반을 가르쳤는데,그것을 광고한다면 더 많이 올 것이다"고 했다.
그의 아들 리드몬드와 영국에 도착할 때 로스목사의 가장 급선무는 1879년 6월 21일에 에디너러에 있는 연합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때 중국선교의 필요성에 대해 강하게 건의하면서 "중국은 미래 아시아 선교의 발판이요, 세계선교를 위해서는 중국선교가 중시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중국선교의 전략적 중요성과 문화수준을 높이 평가해서 주장하기를 "평범하거나 국내에서 그 이하 수준의 선교사 파송은 무의미한 것"이라 했다. 이것은 곧 중국파송 선교사는 최고 수준의 실력자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로스목사는 동북 중국과 조선의 선교 중심지로서 만주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해 7월 로스목사는 페이즐리(Paisley)에서 살았다. 그곳은 존.맥킨타이어 부모의 고향일 뿐 아니라, 로스목사의 동생인 도널드가 1878년 이래 개업했던 글래스고우와 가까운 곳이었다. 같은 달에 도널드가 선교할려고 선교부에 신청했으나 그 뜻이 성취되지 못하였음을 알았다. 또한 페이즐기는 로스목사가 그의 출판사인 제이 앤드 알 파래인(J.and R.Parlane)이 있었던 곳이었으므로 중요시된다. 1879년 말 그 출판사는 로스목사의 첫번째 큰 책을 만들었다. 페이즐리에 있을 때 로스목사는 그들과 이 책의 출판에 대해 얘기하고, 그때 원고를 주었음이 틀림없다. 이 책은 동양학 연구의 이정표였는데, 그 제목은 '조선의 고대 근대사'('History of Corea,Ancient and Modern')였다.
이것은 그의 세번째 작품이나 초기 저술 중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이 책의 영어판은 처음 어떤 서양어로서 출판됐는데,조선사(史)에 대해서는 최초의 저술이었다. 물론 드 할드(de Halde)신부의 청제국에 대한 기록 ('Description...de la Chine et la Tartarie Chinoise'[1735])에서 조선에 대해 한 단원을 썼으나, 그것은 내용이나 분량면에서 로스목사의 그것과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스목사의 기술 중에는 한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는 한국 역사를 중국인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조손에 대한 자료가 없었으므로 중국역사 자료를 사용해야 했다. 이 책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조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로스목사를 거쳐야 됐을 것이다.
1880년 5월 로스목사는 에디너러의 시너드(Synod)4)에 참석해서 중국 선교의 최근 현황을 얘기했다. 그가 조선 고대 근대사를 쓰고 난 후부터 시너드에 참석하는 중간에 각 교회에서 설교 현황을 발표할 기회가 없어서,조선 고대 근대사의 속간인 '만주족:중국의 현대 왕조'('The Manchus,or the Reigning Dynasty of China')글 쓰기에 몰두했다. 시너드가 끝난 뒤 이것은 제이 앤드 앞 파레인 출판사에서 나왔고,9월에 런던에 더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잡지는 이를 칭찬했다. 이것이 중국과 중국인의 가능성에 대해 우호적인 견해를 보였기 때문에 로스목사를 중국에 대한 열광자로 표현했는데 그가 중국인에 대해 친밀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 나왔던 책고 마찬가지로 이것은 그 기언과 자료를 사용하는데 생생한 필체로 썼다고 칭찬받았다. 이 출판은 동아시아와 연구에 훌륭한 학자로서 로스목사의 명성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로스목사는 저술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첫 안식년에 그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고, 또한 영어로 동양역사에 관한 책 등 두 권을 썼고, 연합 장로교인을 위해 중국에 대한 소개의 글도 썼다. 1880년 11월 연합장로교 선교보고에,중국의 지리와 인구에 대해 '中國의 廣大'('The Extent of China')라는 제목을 붙여 썼다. 1881년 1월 같은 잡지에 '중국의 민족'('China's People')이라는 제목을 붙여 그들의 그년성을 찬양했다. 3월과 5월호에 '중국인의 교육'('Chinese Education')이란 제목 하에 중국인 교육제도와 한문과거시험에 대해 설명했다.
1881년 2월 24일 로스목사는 재혼했고,두번째 그의 아내 이사벨라스트랩 맥패디언(Isabella Strapp McFadyen)은 그의 여생의 반려자로 그에게서 8명의 아이들이 출생했으나 그중 넷만 성장해서 성인이 되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난 장자 드러몬드는 4월 중순 영국을 떠나 5월 25일 영구에 도착했다. 이때가 그의 저술의 전성기였다. 39세에 로스목사의 사역은 영광스러웠던 것으로 볼 수 있다.
4.교회의 건설(1881-1888)
로스목사의 첫 선교 기간의 특징은 그의 문학의 성취이며 ,둘째는 교회의 사회내 정착이었다. 특히 로스목사는 만주의 주요 도시에 새로운 선교사를 보내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염려했기 때문에,1881년 6월 선교회 총무는 봉천에 있는 그에게 목사 한 사람과 의사 한 사람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그 교회는 제나나(Zenana)라는 여선교회를 설립하여, 같은 해 9월 14일에 한 사람을 중국에 보냈고, 상해에 10월 31일에 도달했다. 바바라 프리티(Barbara Pritty)라는 여선교사는 11월 13일 영구에 도착되었으나 겨울을 지나서 봉천으로 가게 되었다. 그해 겨울 로스목사는 영구에 머무르면서 왕 징밍(Wang Jing-Ming)및 중국 전도사가 감독하고 있는 봉천교회를 살폈다.
1881년 보고서를 보면 중국에 도착한 다음 로스목사는 신약성경 번역을 강조했고, 그해 말 누가복음의 출판됐으며 1,000권을 일본에 있는 스코틀랜드 성서회 앞으로 보냈는데, 그 사람들은 조선으로 가지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로스목사는 누가복음은 거의 전부 맥킨타이어목사가 한 일이라고 말했고, 보고서를 붙일 때 요한복음서는 거의 출판되었다고 전했다. 이 복음서들은 출판할 때 이 두선교사가 고백서와 스코틀랜드교회 소문답서(The Scottish Shorter Catechism)를 같이 인쇄했는데, 이 전도지는 누가복음의 입문과 같은 것이다.
로스목사의 1881년 편지를 보면, 그가 번역한 방법을 알 수 있다. 먼저 과거를 치뤘던 조선인이 중국 文理신약5) 번역으로부터 조선어로 옮기고,다음에 로스목사가 각 문장을 헬라어로 번역하고 비교했다. 비교하면서 항상 조서인과 같이 번역했고,문제가 생길 때는 토론했다. 교정한 후 로스목사는 "그 번역한 것이 천연두 환자의 얼굴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후 그 개정, 번역을 백지에 다시 쓰고,그 다음 헬라어 용어 색인과 비교했다. 그 까닭은 될 수 있으면 조선의 단어가 같은 헬라어 단어로 번역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신약 성경은 다시 헬라어 신약과 비교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항상 통역하는 조선인의 노력을 인정하고 감사했다.
1881년 11월이나 12월에 로스목사에게 비극이 닥쳤다. 그의 두번째 부인이 낳은 첫 아들인 휴(Hugh)가 죽었다는데, 그 이름은 자기의 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1882년의 기록은 거의 없으나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로스목사는 늘 조선어 신약성번역의 완성을 위해 걱정하고 있었다. 신약번역에 많은 시간을 썼기 때문에 1881년도 선교사업 보고서를 늦게 부쳤다. 이로 인해 에딘버러(Edinburgh)를 본부로부터 심한 징계를 받았고, 전도여행을 더 열심히 하고 중요한 보고서는 제시간에 부치며, 성경번역 사업을 강조하지 말라고 꾸중했으며,1882년 로스목사는 선교본부로부터 이런 편지를 가끔 받았으므로 언짢아 한 것 같다. 1882년 말 본부에 편지를 쓴 때에 본부가 자기 사업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했다.
그해 여러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그중에 조선인 인쇄자 김 청송은 세례를 받았고, 로스목사는 그를 고향인 간도지역에 성서 판매원으로 보냈다. 1882년에도 맥킨타이어는 에딘버러에 연락할 때에 '白(Pae)'이라는 조선인 저도자가 한반도에 전도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했다. 백자는 한국어 발음으로 '백'이 되나 중국어로는 '배'가 되니까 그 사람은 아마 백홍준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년 만주교회에서 세사람의 집사가 안수를 받았다. 로스목사를 조선으로 가는 선교사를 위해 '조선어문법 및 어휘'('Korean Speech with Grammar & Vocabulary')라는 조선어 교재를 썼다. 그해 10월 26일에 새 선교사인 제임스 웹스터(James Webster)목사와 듀걸드 크리스티(Dugald Christie)의사가 왔고,로스목사 부부와 프리디 선교사는 영구의 부드에서 그를 만났다. 이 사람들은 며칠간 쉰 후,로스목사가 만주와 광활한 선교지역을 구경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 며칠 순회전도를 했고, 이듬해에 크리스티 의사가 로스목사와 함께 봉천에서 일하게 되었으며,웹스터목사는 영구에서 일을 했다. 이 두 선교사가 왔으나 매킨타이어목사가 1882년 3월,11년만의 안식년을 맞아 영구에 왔으므로 만주 선교회는 힘이 조금 약해졌다.
1883년 주일본 스코틀랜드 성서회를 통해 신약이 한반도로 분배되었고, 성서회 대표자 長坂(나가사가)와 和田(와다)씨를 조선으로 보냈다. 그해 봉천에서는 37명이 세례를 받았고, 그중에 5명은 조선인이었다. 그 사람들은 한반도로 들어온 성경을 통해서 처음 기독교에 대해 듣고 봉천으로 가서 세례를 받을 계획을 세웠다. 같은 때 선교회 본부는 처음 지부에 있는 사업을 폐쇄하고 만주에 있는 사업을 강화할 생각이 있었다. 그 전해에 그와 본부 사이에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으나,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로스목사의 사역에 성공과 발전을 나타낸 것 같다. 중국기록과 선교보고에 '조선어 신약'('Corean New Testament')이라는 기사를 썼는데,거시서 신약번역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이 기사가 중국에 있는 선교사에게 로스목사의 명성과 한국 신약성서 번역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 같다. 로스목사가 신약을 번역할 때에 현재 교회가 사용하는 하나님,성령,천사 등의 용어 선택이 제일 어려웠다고 했는데,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용어를 로스목사가 택하고 만들었던 것이다.
1884년 보고서에 만주의 교회가 계속해서 커지고, 조선어 신약의 출판과 배포가 잘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직 신약은 한권으로 묶여진 것이아니라 각 복음서가 따로 따로 배포되고 있었다. 누가와 요한복음서는 각각 3,000여권씩 출판하였으나 1884년 초에 다 나누어졌으므로 ,같은 해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출판하고 같이 5,000여권씩 제본했다. 1884년 말 요한복음서 5,000여권과,마태복음서 5,000권을 출판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동시에 마가복음서와 로아서,고린도 전.후서가 인쇄 중이고,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의 번역을 다시 교정하고 있으며,여러 소론들을 한반도로 보냈다고전했다.
1884년도 만주 교회는 계속 성장했고 6월까지 34명이 세례를 받았다. 또한 중국인 전도자 2명은 요앙에서 일하고 있었고, 봉천에 3개의 예배당이 설립되었는데 그것을 모두 중국인이 감독했다. 철령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봉천 북쪽에 교회가 설립되었다.같은 해 영국 및 외국성서회 대표자들은 각 지역에서 성경 보급이 동이 났다고 전했다. 재미 있었던 것 중에는 로스목사가 그 전 인쇄자인 김 청송의 간도지방 전도에 대해 전했고, 로스목사에게 통화 동쪽 지역에 머무르고 있는 조선 피난민들에게 성서를 많이 팔았고, 물건이 더 공급되면 더 팔 수 있다고 전했다. 그의 전도에서 갑신정변 피난자인 사람은 봉천으로 가서 세례를 부탁했다. 한 사람은 간도지방으로 다시 가서 전도를 시작했고, 또 한 사람은 로스목사가 신약번역의 최후 교정을 할 때에 도움을 주었다. 이때에 이 응찬씨는 죽었던 것 같다.
김 청송을 통해서 간도 전도가 잘 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으므로, 로스목사는 1884년 가을 초 웹스터목사를 그 지방으로 보냈는데, 아마 봉황성에 선교장소를 설립할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웹스터목사와 아일랜드 선교회 하먼(Harmon)목사와 함께 수암과 대고산으로 갔다가 봉황성과 고려문(Corean Gate)으로 갔다.거기에는 관전으로 해서 120리 북쪽에 있는 Corean Valleys(간도)라는 조선인 촌으로 갔다. 영구로 돌아 갈때는 봉황성과 해성을 통해서 갔다. 간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원했기 때문에,로스목사와 웹스터 목사 생각에는 그 지역에서 선교사 한 사람을 지명한 것 같다. 맥킨타이어목사의 1884년 선교보고서를 보면, 봉천 북쪽 및 동쪽지역의 교회 발전과 제일 희망적인 한국인 전도에대해 언급했다. 그의 생각에 봉황성에 임명되면 그가 배웠던 중국어와 조선어를 둘 다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또 만주 선교사는 조선인 전도에 대해 모두 열의를 가지고 있고, 미국과 구라파 선교회로부터 자기의 조선전도 계획에 대해 문의를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이 얘기를 보면 선교회 본부에 봉황성이나 통화 지역과 조선 북쪽의 전도를 탄원한 것 같으나,아마 본부는 산동반도의 선교를 폐지하려고 계획했으므로 맥킨타이어목사는 이런 새 선교계획을 요청했다.
1884년 12월 로스목사와 웹스터목사는 간도로 갔고,봉천을 떠나 왕릉이 있는 흥경을 거쳐 통화로 갔다. 그곳을 새로운 부라 하며 중국과 조선 사이에 있는 女軍 숙영지와 같은 곳이었다. 그 지역의 행정장관이 보냈던 군인 2명을 성 밖에서 만나서 성안으로 호위했다. 거기서 며칠간 머무른 후에 다시 동쪽으로 향했는데,눈이 많이 와서 그 우두머리는 행로에 대해 대단히 걱정했다. 또한 장관이 보냈던 군인을 로스 목사가 다시 통화로 돌려 보냈으므로,산적이나 노상강도에 대해서도 염려했다.
여행의 제일 험난한 산길인 요양 정상에 올라 갔다가,거기서 로스목사가 가지고 있는 사진기로 사진을 찍은 후,중국인이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무사히 산을 내려와 첫 조선인 마을로 들어 갔다. 거기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성겨을 분배했으므로 이 지역의 전체가 기독교촌이 되어 있는 점이 참 놀라운 일이었다. 웹스터목사의 일기를 보면,마을이나 골짜기의 이름은 없고 그냥 첫째,둘째,셋째,넷째 골짜기라 임명했고,선교사들은 12월 5일부터 12일까지 이 지역에서 머물렀다. 거기서 로스목사는 7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시간이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고 말을 했다. 12월 13일에 떠났고,봉천에 19일 도착했고, 성탄 전야에 영구에 도착했다.
1884년도는 로스목사에게 불운이 닥쳤는데, 그때 여름 새로운 부인의 둘째 아들인 Findlay가 죽었다. 그것으로 인하여 간도의 순회전도가 연기되었으나,이런 슬픔은 첫 딸 마가렛 프리티(Margaret Pritty)의 출생으로 씻어졌는데,그것은 프리티 여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1885년 로스목사와 여러 선교사들은 만주의 선교장소를 늘일려고 노력했고, 선교 보고서를 보면 봉천 철령 연대의 전도에 대해 많이 전했다. 같은 해에 로스목사는 중국어 찬송가를 출판했으므로 선교 본부는 15파운드를 지불했고,간도의 조선인촌 학교를 위해 매년 10파운드를 보조했다. 1885년에 104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 외에도 조선인 100명이 또 세례를 받았다. 자세한 내용이 없지만 보고서를 보면,로스목사나 다른 선교사를 통해 언제 조선인 촌으로 갔던 것 같다. 로스목사는 제일 중요한 조수인 왕 징민씨가 죽었으므로 아주 슬퍼했다.
1886년 보고서에서 로스목사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과 세례자 수가 많아지는 것을 강조했다.이것은 자기의 노력이 중국인 전도자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 했고, 그가 만주에 온 다음에 600명이 세례를 받았고, 이 중 12명만 로스목사의 전도 때문에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중국인 전도자를 통해서만 교회가 발전될 수 있겠다고 했고, 이 결과는 그 생각을 확신케 했다. 1882년부터 로스목사는 선교회 본부와 중국인 전도자 문제에 대해 다루었다. 에딘버러에 있는 본부는 모든 전도자와 대표자를 임명하고 싶었으나, 로스목사의 생각은 환경을 잘 이해하는 선교사들이 직접하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1886년 로스목사가 본부에 대해
"신앙심 깊고 지식 있는 토착 전도자를 이용하는 선교회는 발전이 있고,그것이 없는 선교회는 발전이 없다."는 말을 강조했다.
시간장 간도와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 가서 그 두 곳의 개종자들과 만나 학습문답을 할 수 없는 것이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했다. 서울에서 일하는 전도자가 로스목사를 통해 기독교인들이 아직 새로 온 미국선교사에게 연락을 못해, 로스목사를 그들의 지도자로서 생각했었으므로,로스목사 밑에서 세례를 받고 싶다는 내용을 전했다. 그해 대원군의 동료가 북경으로 갈 때에 봉천에 머무르면서,성서를 번역하는 조선인에게 대원군이 조선은 3년 내에 완전한 기독교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했다. 이것은 지나칠지 모르나 로스목사의 선교방법을 아주 칭찬했다고 생각된다. 1886년 말 조선어로 된 신약번역의 최후 교정이 완성되어서 신약 전체를 배푸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 번역을 이용,중국어 성경은 지성적 文理번역으로부터 현대어로 표현된 성경으로 번역하는 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로스목사의 본부와의 서신왕래 가운데, 아일랜드 장로교 선교회는 봉천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싶다는 내용과 만주의 연합 개신교 선교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1887년에 로스목사가 본부에 편지하기를 만주 교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전했는데, 그것은 7월이나 8월에 만주 교회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전도자로 택했고, 그의 봉급을 보증하겠다고 전했다. 보고서를 쓸 때 교인을 한 사람 더 택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의논 중이었는데, 같은 해 모든 교인을 위해 표준 교리교육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매년 지도자 교리 시험을 실시했다. 1886년 N.E.M.James이라는 탐험가가 로스목사 집에 들렸다가 그후 만주 산맥들을 탐험했다. 1887년 출판된 긴진 산맥:만주의 여행(The Long White Mountain:or a Journey in Manchuria)을 보면, 만주 교회에 대해 칭찬을 많이 했다. 그 해에 본부에서 1888년이 안식년이란 소식을 받고 귀국할 준비를 했다. 이 소식을 받고 봉천 북쪽 지방에서 탐험과 전도할 생각이 있어서, 웹스터목사와 함께 11월 18일 봉천을 떠나 먼 길림으로 갔다. 갈 때는 철령과 해룡성을 거쳐 갔다고 했다. 로스목사는 계속해서 글을 썼고,그해 봄 만주 선교회의 小史와 유교에 관한 글을 본부에 보냈다. 1887년 가을 로스 목사는 배를 타고 서울에 가서, 조선에서 있은 조선인의 세례와 한국 교회의 첫 장로 임명을 보았다.
5. 교회 내에서 영적인 근원들의 심화(1888-1900)
1888년 4월 로스목사는 두 번째 안식년을 맞아 런던 선교 수양회에 참석하여 중국과 한국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불행했던 것은 그가 떠나기 전 그의 어린아들 쟈키가 죽었다.로스목사는 캐나다를 경유, 거기에서 오타와에 있을 때 애도의 편지를 받았다. 그 선교회는 6월 11일에서 19일까지 거행되었고,그후 그 가족은 글래스고우로 돌아 갔다. 8월부터 로스목사는 정열적으로 발표에 몰두했다. 1881년 7월 이전으로 더 거슬러 가서 로스목사는 휴가를 가졌던 선교사들이 그들의 사업과 교회선교에 대해 항거했다. 그는 그때 말하길 교회는 안식년을 가진 선교사들을 대표하여,이 목적을 위해 일련의 발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두번째 안식년 때는 그위원회는 그의 요구에 동의해서 그에 대해 여러가지 협정을 한 것 같다. 9월 중에 그는 아일랜드에 아일랜드 장로교회를 대표해서 순회했다. 이 소개연설은 1888년 11월까지 계속되었다.
1889년 1월까지 그는 자기의 생각을 두가지 문제로 귀결시켰는데, 하나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선교회를 합병해서 만주에서 장로교 선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그의 친구이며 동료인 왕징밍을 기리는 책을 쓰는 것이었다. 지나간 해의 개인적 슬픔은 2월 그의 차녀 캐티제인(Cathie Jane)의 출생으로 씻어졌다.
로스목사는 5월 '왕 징밍'('Old Wang')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그것으로 선교자서전의 모범으로 상을 받았다.6월 로스목사가 가족은 네른(Narin)의 '엉컹퀴 오두막'(Thistle Cottage)에 살고 있었고, 7월엔 (Fearn)에 있었다. 8월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로스목사는 두 선교회의 합병에 대해 방법을 모색했고, 그후부터 11월 말까지 대중들 앞에서 설교하고나 가르쳤다. 10월 그들은 닉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했고,11월 글래스고우에 정착했다. 11월 하순에 그는 지난달 27일 봉천에 있는 중국풍의 교회가 헌당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이 교회에서 맥킨타이어목사가 이르기를
"고대의 용무늬가 아로 새겨지고 전설적인 동물들이 지붕으로 소용돌이 치며,흠이 파인 굴뚝에서 용솟음치는 중국문화의 건축양식보다 더 나를 매료시키는 것은 없었다." 고 했다. 이 건물의 건축은 만주에 있어서 교회성장의 중요한 일면을 나타냈다.
1890년 초 로스목사는 연합장로교 선교보고에 두 강연 내용을 보도했다. 그것은 '만주에서 우리의 사역'('Our Work in Manchuria')과 '조선에 있어서 복음'('The Gospel in Corea')이었다. 첫번째 내용에서 그는 자기의 초기 생활과 사역을 기술했고, 외국 선교사들에 대응한 만큼 자국의 대행인을 두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간도지방에서 일어나는 기독교복음화의 과정을 간단하게 썼다. 그는 또 기독교 지식이 진보할려면 외국 선교사의 노력 없이 일어났음을 강조했고, 또한 그가 믿기로는 조선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 들이는 첫 아시아 국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논점엔 두가지 바탕이 깔려 있는데,첫째는 불교가 민중에게서 멀어졌고, 둘째 조선인은 고등신(Supreme Being)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2월 말까지 로스목사 기록은 만주로 돌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 마아가렛과 어린 캐티제인이 앓고 있어서 갔었는지에 대해 몇가지 의문점이 있다. 그러나 3월 6일까지 그 가족은 런던에 배를 타기 위해 갔을 것이다. 3월 29일 글랜노글(Glenogle)호에 타기전 로스목사가 만주에 가는것에 대해 방해하는 3명의 선교사 즉 더글라스(Douglas),잉글리스(Inglis0,로버트슨(Robertson)의 급파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항해를 기다리며 선창에서 로스목사는 '만주의 마지막 요구,교회를 분열시키는 망언들'('The Needs of Manchuria,Parting Words to the Chruch)이란 글을 썼다. 거기서 그는 만주에 있는 교회의 위치에 대한 그의 관심을 언급했다. 그는 말하길
"아주 중대한 이유로 나는 중국에 있는 많은 유럽 선교사의 주장에 항거하는 것이 분명히 이해되길 원했으므로,안수받은 사람이 증가해 가면서 그 지역이 완전히 복음화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사람들이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두 사람에 의해 배치되어져야 하며,또 그들은 중국기관을 훈련시키고 도우고 지도키 위해 거기 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두번째 요청은 간도지방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한 선교사가 간도지방에 영구적으로 머물기를 원했다. 이 단평에서 로스목사는 비록 자신이 이 임무를 기꺼이 떠 맡을려고 했던 스코틀랜드의 한 신학생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그가 활동하는데 자기네들의 일반적 선교비 외에 추가로 특별 헌금으로서 그를 후원할 사람이 있을까 하는 문제가 남았었다.
1890년 여름,1888년 1월에 나왔던 맥킨타이어 목사와 제임스 와일러(James Wylie)는 간도지방으로 여행해서 많은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로스목사 자신은 선교지에 포함된 대평구 주위의 여러 지역을 시찰키 위해 그해 가을 여행했다. 12월엔 그와 제임스 웹스터가 봉천의 북쪽 전지역을 여행했다. 그들은 철령에서 안식을 가졌고 다음날 개원으로 왔다.하룻밤을 묵고 나서 그들은 서쪽으로 향했고, 마친타이(Machintai)에 있는 세관을 지나 내 몽고의 동쪽지방을 둘러 싸고 있는 평야로 들어 갔다. 그들은 대평구에서 5일을 머물고 나서 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로스목사는 50세가 되어서도 아직 모험가였으며 선교사역을 돌아 보기 위해 넓은 지역을 여행했고,교회가 더 확장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이 없을까 하고 찾아 다녔다. 이 원정보고에서 그는 후에 봉천에서부터 동쪽으로 조선국경선까지 '빈공간을 메꾸기 위해'일하기를 바라며, 또한 그들이 만주 북동쪽 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매매가에 지부를 설립토록 촉구했다.
1890년 여름 로스목사는 상해의 제2차 중국 선교 수련회에 참석했는데 이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한 논문에서 만주인의 제사문제를 다루고 토의에 참석,그것을 제출했다. 그는 또한 세계선교의 재음미(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라는 잡지에 두 논문을 제출했는데, 하나는 '조선에 있어서 기독교의 여명'('The Christian Dawn in Korea')이고,다른 하나는 '중국 선교의 문제'('The Chinese Missionary Problem')이란 제목을 붙였다.
여름이 거의 끝나 갈때 로스목사 가족은 또 다시 둘째 딸 캐티제인(Cathie Jane)이 죽는 불운을 맞았다. 1890년 12월과 1891년 1월에 그는 북방으로 여행을 했는데, 아주 놀랍게도 조선반도의 왕국에서 나온 조선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평북지방인 강계에서 온 어떤 최씨라는 사람이 로스 목사를 찾아와 교인들이 있었던 그 시 부근에 많은 사람이 있다는 정보를 제공했는데,또한 로스목사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온 것이었다. 얼마 후 로스목사의 조선인 서적판매원인 김 청송이 강계에서 온 다른 조선인과 같이 봉천에 도착해서 최씨의 얘기를 뒷받침했다. 그후 조정관리의 두번째 직급에 해당하는 강계의 호방에서 온 사자가 도착해서 최씨가 복음서, 신약성서 및 교회 문답서를 가져 오도록 요구해서 이것들을 보냈다. 로스목사는 그때 그 상황을 파악키 위해 그의 조선인 식자공인 공씨라는 사람을 최씨와 같이 보냈다. 그는 관리가 직접 보낸 회답을 받았는데,거기엔 그가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고, 최씨와 공씨가 도착한 후 그는 강계와 자성,후창지방에 있는 교인들에게 신앙을 키워 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쓰여 있었다. 강계에서 서약했던 100명의 교인 중 10명만이 세례를 받기에 적격이었고,자성에서는 90여명중 단지 7명,후창에선 150명중 15명만이 적격이었다.이 32명의 이름이 로스목사에게 전달됐는데,편지는 후창현의 공인이 찍혀 우송됐다. 나아가 그 현령은 최씨가 머무르면서 이 신자들을 가르치도록 요구했고,후창에 있는 교인들이 그 중 한 사람인 최 정홍이란 사람을 로스목사에게 보낸다고 적혀 있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조선의 북방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기독교 사회가 성립되어졌다는 것을 가르킨다.
1891년 2월 로스목사는 철령과 그 주위를 살펴 보려고 여행했고,26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4명의 집사들을 뽑도록 지도했다. 교회가 최초에 설립된 봉천의 북쪽지방에 있어서 조차 자체 독립과 자체 전도의 단계가 이미 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1891년 3월 대평구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47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3월 27일 그의 아들인 존 허버트(John Herbert)가 출생함으로 로스목사에게 기쁨을 더하게 했다. 잉글리스가 봉천에 왔고, 더글라스씨가 요양에 보내졌으며,영박사(Dr.Young)와 로버트슨(Robertson)이 하루빈의 바로 남쪽에 있는 쌍성부에 새 지부를 설립해서 왔다.
이것은 선교부가 사람들이 타지방에서 많이 이주해 오는 지방을 접촉하기 이함이였다. 6월 7일 제임스 와일러는 압록강의 초산지방에서 온 한 조선인의 세례소식을 알렸다. 아마 그 젊은 사람과 초산에서 군인과 리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둘 다 요양에서 웨스터워터(Westwater)박사와 같이 있었을 것이다.
1891년 2월 27일 북미 선교사 중 조선으로 왔던 제임스 게일(James Gale0과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t)은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서 북쪽으로 탐험 여행을 떠났다. 게일은 캐나다인으로 토론토대학교 YMCA의 파송을 받았고, 반면 마펫은 북장로교에서 왔다. 3월 24일까지 그들은 의주에 도착했는데, 로스목사를 통해 믿었던 많은 교인들이 나와서 영접했고,거기서 4월 5일까지 머물렀다. 그달 중순까지 그들은 봉천에 도착해서 로스목사와 4일간 같이 지냈다. 로스목사는 그들에게 강계지방에서 조선인과의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고, 그들 스스로 그 상황을 연구하도록 말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봉천을 출발한 뒤 그들은 통화를 거쳐 간도지방까지 갔다. 그곳에서 자성과 후창으로 갔고, 연안에 있는 장진을 거쳐 5월 9일 원산에 도착했다. 로스목사는 조선과 만주지방에 어떤 선교사가 있어야 하며,젊은 선교사들이 스스로 그 상황을 본다면 그들이나 동료 중 하나가 그곳에 파송되길 바란다고 했다.
1891년 7월 한달간을 로스목사는 순회전도 여행을 하면서 보냈다. 그해 여름 동력하여 활동 중인 에이레와 스코틀랜드 선교회가 단독 장로회 관학구를 만들었는데,그것이 지방교회 연합의 중요한 단계였다. 그것은 하나의 선교회로서 더 이상 간주되지 않았고, 관동 장로교구로서 알려진 하나의 자립교회로 생각되었다. 그 장로교구의 영역을 청나라 시대에 전형적인 만주의 새 지방으로서,만리장성 동쪽으로 조선국경과 남쪽으로는 흑룡강까지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었다. 8월에 로스목사는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 강계에서 왔던 교인 최씨와 있었던 경험을 글로 썼다. 따로 또 그는 선교부에 편지를 보내 최씨가 조선의 그 지역에서 그들의 대행자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원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에딘버러 선교부는 이것을 기각하고 만주 선교회로 다시 문의했다.
단념치 않고 로스목사는 다시 10월 27일 같은 청원을 써서 선교부가 그 지역에 외국 선교사를 보낼 것을 고려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선교부 기록에 주제가 언급되지 않은 만큼 힘 없이 거절되었음이 틀림없다. 9월 23일에서 10월 16일 사이에 로스목사와 잉글리스는 북쪽을 두루 여행했다. 이 여행기간 그들의 진로는 철령과 위원을 거쳐 이통을 방문했고, 이통에서 매매가 지방을 거쳐 최북단까지와 그 지방의 최남단을 왕래할 때 이들을 중심지로 삼았다.그해 겨울 로스목사는 세계선교 재음미(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라는 잡지에서 "선교사 바울"("Paul the Missionary")이라는 논문을 기고했다. 얼마간 로스목사는 바울이 현대 선교사들이 따라야 하고,사도 이후 그 자신을 특정지우도록 시도했던 표본이었다고 느꼈다. 그는 또 고향교회에 편지해서 중국에 사회적 혼란이 비록 있었다 하더라도, 만주의 총독 자신이 외국 선교사들의 안전을 보장했다고 써서 보냈다.
1892년 2월 16일 로스목사와 잉글리스는 또 한번의 여행을 했는데, 이때 봉천의 동서와 개원을 거쳐 처음엔 철령으로,서쪽으로 대평구와 매매가로 갔고, 거기서 동쪽으로 이동,남쪽으로 휘난 즉 오늘의 차오양에 이르렀다. 그 장소에서 떠날 때까지 그들은 통화와 간도지방으로 계속 여행했는데,그들은 2박 3일을 보낸 후 나흘 걸려 봉천으로 돌아 왔다. 5월 17일 아침 그 장로회 관할교구가 봉천에서 모였는데, 외국선교회 본부의 의장인 던칸 맥레런(Duncan M'Laren)이 참석했다. 의장은 에딘버러 신문인 '스캇츠맨(The Scotsman)'에 편지를 보냈는데, 7월 6일 로스목사와 그의 동력자들의 사업을 찬양했다. 던칸 레런은 어떤 선교회도 중국에서 이 선교회가 한 것 보다 더 빨리 성장한 것이 없다고 느꼈다. 이때 2,000명의 신자들이 있었고, 에이레 장로교회를 포함해서 간부진들이 18명이나 되었다. 에이레 사람들은 관성을 받았고, 쌍성부와 두개의 떨어진 지부엔 스코틀랜드인이 있었다. 또 그 회의에는 조선에 있는 성공회 선교사인 찰스 존 콜페(Charles John Corfe)수도원장이 있었다. 아마 주교 콜페의 최소 관할은 조선과 같이 만주도 포함되었고, 그의 영역에 있는 장로교 선교사들과의 접촉의 필요성을 느꼈는데, 특히 그들이 조선에 대해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때 그러했다. 그가 방문하는 동안 조선의 교회에 대해 수련회에서 얘기했다. 11월 말경 로스 목사는 개원 근방 지역을 여행했는데,이 해에 그는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How the Gospel Spreads in China')이라 이름 붙여진 세계 선교보고에 제출한 또 하나의 논문을 썼다.
1893년 4월 로스목사는 봉천의 동쪽으로 순회전도 여행을 했는데, 선왕들의 무덤이 있는 흥경을 거쳐 조선과 중국 사이에 오래된 세관 중 하나인 왕청문에 도착했다. 거기서 통화를 지나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통화와 환첸의 중간인 치안티엔추까지 도달했고, 거의 일주일을 거기서 보냈다. 일행 중 한 사람의 집 근처에 여러 젊은이들이 모여 방탕한 일을 하는 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로스목사는 그들과 긴토론을 벌였으며,그들은 아마 불교와 도교의 한 분파였을 것이고,사일리(Dsaili)로 알려졌다. 로스목사는 이 지역에 있어서조차 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이들 중 한사람은 李씨라는 사람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간도의 서적보급원으로 고용되어 세례를 받으려고 로스목사에게 왔다. 보고서에서 로스목사는 그 시대의 빛나는 화동상을 자세히 기록했고,그가 전생애를 만주에서 보냈던 중요성을 기술했다. 5월 시찰회에서 차기 대회의장에 선출됐다. 여름 동안은 그의 딸 마아가렛(Margaret)이 아파서 그 가족은 그녀의 건강을 위해 연대에 얼마간 머물렀고,9월 5일 영구로 돌아 왔다.
1893년 여름 양자강 계곡에서 사회적 소요가 일어나 식구들이 그들의 안전을 확보키 위해 영국 포함을 사용하리라 생각한데 대해, 로스목사가 말하기를 "중국에서 있는 어떤 작은 문제들을 간섭키 위해 세속적인 힘을 빌린다면,복음이 중국에 전파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황제'나 '영국 포함'에 대한 요구는 애국적인 중국인의 심중에 더욱더 선교사는 정치적 대행자라는 인상 - 모든 다른 복합적 원인보다 더 기독교사상을 감추는 믿음-을 짙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1893년 11월 로스목사는 봉천과 철평 중간에 있는 일루(Ilu)에 지부를 설립할려고 생각했다.
1894년 1월 로스목사는 봉천 전지역 특히 일루지방을 중점적으로 여행했다. 이 지역에 대한 그의 노력은 북쪽으로 선교영역을 넓히기 위해 한 지역을 활성화한다는 뜻이다.
3월에 로스목사는 글래스고우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는데,그 공적으은 만주에서의 선교에 대한 노력뿐만 아니라 그의 두저서인 'A History of Corea' 및 'History of the Manchus'때문이었다. 이 때까지 선교부는 만주에서 20년간 활동해 왔고 끊임없이 고요한 성장을 지속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해 여름 조선의 영주권 문제를 둘러 싸고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주된 격전지는 만주와 조선의 북쪽 지방으로 교회와 선교의 모든 방면에 타격을 주었다. 청.일전쟁은 일본과 서양인 사이를 구별치 않았던 중국인에게 강한 애국심을 자극시켰다. 모든 외국인들은 중국을 공격하고 중국의 종주권 박탈에 대항하는 집단에 속하는 것 같았으며, 이런 감정 때문에 많은 폭도들과 훈련 안된 여러 집단의 군사들이 기독교 단체와 중국신자들을 공격했다. 8월10일 요양에 있는 한 폭도가 쳐 들어와 제임스 와일러를 아주 심하게 때려 6일 후 그 상처를 죽었다. 비록 8월 말 범인들이 붙잡하여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으나,그 분위기가 너무 거세어져 선교사들은 내륙지방에서 영구로 가는것이 좋다고 여겨졌다.
소요 중반에 이르러 로스 목사는 세계일주 여행을 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부인의 내방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8월 20일 떠나 25일에 영구에 도착해야 했는데, 봉천을 떠나기 전 비숍 부인은 진료소를 세우는데 쓰도록 멕시코 은화 200불을 선사했는데, 후에 그 진료소는 그녀의 사별한 남편 이름을 따서 죤 비숍(John Bishop)이라 명했다.
로스목사와 크리스티(Christie)박사는 그들이 그 시를 떠나도록 정해진 10월 10일까지 봉천에 머물렀다. 이때까지 그는 건강의 악화와 체력을 소모하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해 왔다. 10월 중순 그와 가족은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타고 상하이에 들렸고,1월 22일 고향에 남아 예배와 거기 정박 중인 영국 및 미국전함들의 명사들을 위한 다른 활동들을 집행했다. 로스 목사가 영국의 고향에 돌아 오기 전, 글라스고우에 있었던 드러몬드 (Drummond)와 발린토어(Balintore)에 있었던 그의 숙모는 가족에 대해 마음을 졸이며 편지를 보냈으나 그들의 안전엔 이상이 없었다. 로스목사가 영국에 도착했을 때 그의 건강은 거의 환자에 가까왔다. 스코틀랜드에서 약간의 여유를 가졌고, 1895년에 가족들은 펀(Fearn)에서 요양과 친족을 방문하면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와 선교부는 그가 소요 기간 중 영국에 남아 계속 활동할 것인가 혹은 현지로 선교사로 돌아 갈 것인가에 대해 다투었다. 또한 여선교사들이 만주에 돌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토론했다. 8월 로스목사 가족은 9월 13일 런던에서 '피 엔드 오우(P & O;Peninsular and Orient)'회사 기선인 로마호를 타고 갈려고 했으나, 로스목사의 건강 때문에 영국에서 그해 겨울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 해 여름이 다되어 갈 무렵, 만주에서 전보가 도착했는데 여성들을 축출할 것이라 했다. 이 전보를 받고 도착했는데 여성들을 축출할 것이라 했다. 이 전보를 받고 로스목사는 갑자기 그의 생각을 바꾸고 혼자 9월 19일 영국을 떠나 제노아(Genoa)에 가서 23일 북독일 로이트(Lloyd)기선인 프린스 하인리히(Prinz Heinrich)를 타고 영구에 도착했다. 11월 4일에 영구에 가사 11월 31일 봉천에 도착했다. 그때의 보고에서 봉천에 아직 약간의 소요가 있었으나 얼마간의 반외국인 감정폭발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인명손실이 없었다고 알렸다.
로스 목사는 한번 더 중국 내부의 문제에 서양의 무력이 참견해서는 안된다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인들의 노력에 결정적으로 해를 끼친다고 느끼는 전함의 출동에 대해 단호했다. 그가 주둔지로 돌아 왔을 때,제임스 웹스터는 사업이 해룡성에서 시작되어 개우너지역의 사업이 확장되기를 기대했다.
1869년 초 일반교회 활동은 정상을 되찾았고, 외국선교사들은 가장 멀리 떠러진 곳에서까지 원상을 회복했다. 멀리 남쪽과 북쪽의 지부에서는 외국인들에 항거하는 소동의 소식은 하나의 결과로서,교회나 선교사들 어느 쪽도 청.일정쟁의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을 만큼 그곳의 주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4월 16일까지 로스목사 부인과 두딸이 그와 같이 있기 위해 만주로 돌아 왔고, 6월 14일 교회발전의 획기적인 사건이 봉천 출신의 첫 목사와 장로를피택함으로 이루어졌다. 중국 양식의 두번째 교회건물이 그 해 여름과 가을 동안 철령에 세워졌고,처음으로 새 부속예배당이 봉천의 한 교외에 건축됐다. 9월 로스목사는 만주 수도 북쪽의 선교지부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로 그가 생각했던 일루의 교회에 열중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이 도시에만도 300명 이상의 세례받을 사람이 있고,그것이 확설화와 가능성을 방해했던 교회의 공포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9월 말인가 10월초에 상해로 여행한 적이 있는데 이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12월 성탄절 바로 전에 로스목사는 흥경과 영릉 동쪽으로 순회전도 여행을 하면서 44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897년 1월 그는 일루로 여행을 계속해서,이 시장 주위 몇몇 마을에서 158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2월 그는 동쪽으로 또 여행했고 그 때 약 50마일을 선회했는데,그가 관할했던 가장자리에서 개원의 서쪽인 파짜쯔우로 가서 그 후 영릉,흥경,통화와 치앙티엔쯔우 남부까지 갔다. 여행 중 159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동화에 있을 때 그가 남긴 말은 "내가 마음과 손에서 멀리 떨쳐 냈던 조선인들이 우리에게 다시 밀려 온다"라고 한 것이었다. 그가 통화에 갔을 때 50명의 한국인이 참석해 21명이 세례를 받았다.이유는 이들이 그에게 거대한 조선 사회에서 그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선사를 보내 달라는 청원을 또 한번 피했다.
1897년 4월 일루 부근 지역을 순회 전도했고,5월 로스목사와 맥킨타이어목사를 위해 동북 중국선교 25주년으로 만주 선교부가 잔치를 베풀었다. 7월 중순부터 로스목사는 여름을 상해에서 보내면서 성서주석협의회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나온 나온 결론은 로스목사가 욥기 주석, 이사야(절반),마태복음(절반),야고보서와 몇몇 서신의 주석을 쓰기로 되었는데, 후에 성서의 완전한 중국어 주석의 부분으로서 출판되었다.
이 해에 새로 안수받은 목사 류첸야오는 영국을 여행하여 스코틀랜드에 있는 로스목사의 모교회를 방문할 수 있었다. 류목사의 방문은 로스목사의 오랜 숙원인 중국 교인들이 서양교회의 사정이 어떤가를 알아 보기 위해 스스로 서양으로 갈 수 있음을 실증했다.
10월 로스목사는 봉천 북쪽을 잡지인 만주교회지 (Manchurian Church Magazine)를 내도록 활동했다. 그 외 한국인 서적 보급원이 이 때 도착해 간도에 있는 한국촌으로 다시 오도록 독촉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이때 만주교회를 위한 전략은 교회의 성장을 증명했다. 즉 한 사람의 중국인 목사, 17명의 장로,165명의 집사와 105개의 예배당 및 예배소,전체 세례받은 자가 5,802명에 달했고,학습자가 6,300명이나 되었다.
로스목사는 불굴의 여행자였다. 1898년 1월 다시 동쪽으로 여행했는데 흥정까지 여행했고,먼 산골에 있는 작은 마을을 거치면서 북쪽으로 파치아쭈까지 갔다. 이 여행을 끝내고 2월에 다시 더 동쪽에 있는 마을들을 방문했고, 한 달 후 영릉,흥경에 다시 갔으며,그후 통화 서도강,예쉬호쭈,치앙티엔쭈,라클리큐,쟈오징고우와 리쉬짜이를 방문했다. 여기에서 중국인 122명,조선인 9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여행과 특히 조선인의 세례를 회고하면서 "모든 조선인의 문제는 나에게 무겁게 지워져 있다"라고 술회했다. 만주 전체의 두배에 해당하는 인구가 서울에 있었으나, 이 중요한 지역에는 한 사람도 배치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의 모교회에 편지를 보내, 통화지방에 머무를 수 있는 그들에게 선교사를 보내는 것을 고려해 보도록 간청했다. 신앙을 숙련시키러 온 많은 조선인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렸고, 그렇지 않으면 이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인이 될 것이고 사실 그렇게 되었었다. 로스목사는 이것에 대해 그러한 사람들이 그와 맥킨타이어 목사가 번역했던 신약서서의 보급을 통해 그리스도 사상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그것이 특히 절박함을 느꼈다.
영국 및 해외성서회(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의 트러리(R.H.Turley)는 이 마지막 여행에 로스목사를 동반했고 4월 그는 외국선교부(Foreign Missions Committee)에 강력한 편지를 써서 압록강 기슭을 따라 사업을 시작하도록 촉구했는데,교회는 그들이 도전하는 환경에 직면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드러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그는 더 이상은 할 수 없었다.
가을에 로스목사의 주의가 집중된 것은 교회의 가장 밀접한 관련 중 하나인 숙련된 성직자의 교육이라는 견해였다. 로스목사가 초보적 평신도 교육기관은 이미 설립했으나,좀더 조직적이고 복잡한 신학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더 절박하게 요청되어졌다. 로스목사와 에이레교회의 필턴(T.C.Fulton)은 교수들을 불러 들이고 로스목사가 새 기관의 학장이 되었다. 다른 데 선교사들은 강사로 강의를 맡게 했다. 교육과정은 6개월에 매 4장과 이상을 짜고, 강좌는 10월에 시작해서 4월에 마쳤다. 고등학교 졸업자격이 없는 네 학생에게는 입학시험이 부과되었다.
1893년 12월 세 사람이 로스목사의 부탁으로 간도지방을 여행했는데,그들은 2월 여행에 동반했기 트럴리,복음서 보급협회(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스프랜트(Sprent)씨와 요양의 선교사인 그레함(J.Miller Graham)이었다. 스프랜트가 온 것은 아마 간도지역 상황에 관계된 조선의 주교 코프씨의 제안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 셋은 12월 13일 봉천을 떠나 1899년 1월 16일 집으로 돌아 왔다. 그의 보고에서 그레함이 언급하기를 "이 지역은 명백히 최소한 한 사람의 안수받은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하고, 거기의 많은 새 신자들은 돌 보아줄 사람이 부족해서 많은 사람들이 장로교와 가까운 천주 교인이 된다는 로스목사와 트러리의 견해를 강조했고, 또 지방집회를 표시하는 자립적 태도를 칭찬했다.
이 세사람이 갔던 진로는 흥경,황청문,영액과 통화전체 지역이었다. 그들은 26일까지 통화에 머물렀고,거기서 성탄절을 지내면서 그 교회의 헌금으로 생활했다. 또 성찬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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