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skc Teachers Colloquium

Nyskc Teachers Colloquium

NT는 Nyskc Teachers의 약자입니다

Nyskc는 신앙생활의 5대원칙으로 만들어진 신조를 통해서 예배회복을 이루려는 한편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 있는 곳으로 예배가 없는 곳에서 예배가 있는 곳으로 가며 교회가 없는 곳에서 교회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한 인도자 곧 교회 Teachers를 뜻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직분 중에는 목회자 다음 교사일 것입니다

어린아이로부터 중고등부 청년부에 이르기까지 미래의 교회를 책임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야 말로 하나님이 주신 확실한 사명자요 소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교사들의 재교육이라든지 교회 안에서의 교사들의 경건과 거룩성(영성) 그리고 성경에 대한 지식과 말씀에 재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떠나고 교회의 고령화가 심각한 수준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미국교회만이 아니라 유럽의 교회 한국의 교회들에게서 급속하게 나타나므로 교회의 존속의 미래가 회의적이라는 의견이 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 발생은 무엇보다도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지며 나라와 가정이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은 성경이 너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교사들의 예배의 실태와 또한 교사들이 맡고 있는 학생들의 예배 역시 무너져 있는 심각한 상태가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Nyskc Wolrd Mission에서 펄치고 있는 Nyskc Movement에서는 교사들만을 위한 Conference를 비롯하여 Seminar & Workshop 등을 통하여 주일학교 교사는 물론 교회학교 교사들에 예배회복을 위한 신학과 이론 성경공부 교사의 사명과 소명등 예배회복으로 주일학교의 부흥을 이룰 수 있도록 자료의 공개 및 재교육을 Vision으로 삼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성공은 교회의 성공이다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시 34:11)

주일학교 교사는 큰 일을 하는 사람이다

다윗은 맨 먼저 아이들에게 무엇을 격려해 주었는가?

그는 먼저 신앙심을 북돋아 주었다.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다윗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특출한 사람이었다. 거룩했다.

그러한 다윗의 본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어린 목자, 거인을 죽인 자. 이스라엘의 위대한 시인, 강력한 군주인 그를 따르는 것은 떳떳한 일이다. 당신이 만일 다윗과 같이 될 수만 있다면 당신은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다윗보다 더 고상한 본을 따르려 한다면,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가복음 10:14). 만약 당신이 주님의 이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긴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겨우 주일학교 교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주일학교 교사는 사실 고귀한 신분이다. 명예로운 직책이며, 저명한 선배 교사들도 많이 있다. 우리는 사회 저명인사 가운데 주일학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 우리 많은 교회가 저지르고 있는 큰 실수 가운데 하나는 우리 어린아이들을 너무 젊은 사람들에게만 맡겨 놓는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고 좀더 많은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거의 돌보지 않고 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마치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은 그들의 특별한 사업이 아니라는 듯이(사실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들의 교육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나는 미래의 이스라엘 용사들이 이적과의 싸움에서 도움을 줄 날을 기대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들이나 법관들, 국회의원 등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겸손해서가 아니라(나는 그런 말을 쓰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싶다) 명예롭기 때문에, 주일학교에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일학교 교사란 훌륭한 직책이다. 나는 석사나 박사, 그 밖의 사람들이 주는 어떤 영예보다도 주일학교 교사란 직위를 갖고 싶다. 당신이 맡은 일이 그렇게 명예로운 만큼, 용기를 가지라. 왕이 된 다윗이나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아이들을 대하셨는가 보라. 그것을 생각해보면 당신은 다시 한번 새롭게 용기를 얻고 열심을 낼 수 있으리라. 확신과 인내로 나아가라.

그 일은 당신에게 내린 축복이다. 그 일을 계속하라.

다윗이 말한 것처럼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라고 하라.

Nyskc의 TEACHER의 7 법칙 (하워드 헨드릭스)

T. eacher(가르치는 자의 법칙)

“학교를 졸업하면 배움을 멈추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자라는 만큼 가르칠 수 있다. 가르치는 자는 근본적으로 배우는 자다.”

“가르치는 자의 최대 위협은 만족이다. 지식은 너무나 아는 것이 많아 교만하지만 지혜는 너무나 아는 것이 적어 겸손하다.”

“가르치는 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거룩한 불만족을 품고 끊임없이 배우며 나아가려 하는 자는 그 모습 자체가 영향력이 된다. 자신도 모르게 영향력이 뿜어져나와 사람들이 변화받게 되는 것이다.”

“젊을수록 성경 연구와 독서에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하라. 반드시 나중에 큰 영향력을 주게 된다. 특히 성경은 신구약의 각 장에 대한 대략적 개요는 물론 큰 그림을 그리면서 정리해나가는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해야 한다.”

“평생에 걸쳐 계속적인 공부, 독서 프로그램을 가져야 한다. 1주일이나 한 달에 책을 몇 권 읽는다는 식으로 규범을 정해두는 게 좋다. 한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30분은 책을 읽고 30분은 읽은 것에 대해 생각하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길 원하신다. 우리가 배우기를 멈추고 무지해지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로 인해 제한받게 된다.”

“경험 자체가 나를 개선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그 경험이 평가된 경험, 곧 올바른 경험이 아니라면 나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엄격하게 자신을 평가하라.”

E.ducation(교육의 법칙)

“교육이란 배우는 이가 스스로 활동하도록 흥미를 불러 일으키고 방향을 잡아주는 과정이다. 교육의 열쇠는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배우는 이들이 무엇을 하느냐이다. 교육의 목적은 가르치는 이의 만족이 아니라 배우는 자의 변화다.”

“사람들은 생각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자꾸 생각하면 지혜가 나온다. 한 사람이 계속적으로 변화하기를 원한다면 그의 행동이 아닌 생각을 변화시켜라.”

“학습과정의 3요소는 전체(큰 그림)-부분(조각그림)-전체(조합, 통합된 그림)이다. 배움은 발견의 과정이다. 학생들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대신해주지 말라.”

“질문을 던지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라. 그리고 개인적으로 귀한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두 가지 질문을 하라. 그분이 읽고 영향받은 책이 무엇인지, 또 그분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어보라. 거기에 그 사람의 생애의 핵심이 들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영육간에 유익이 있다.”

A.ctivity(활동의 법칙)

“최대의 배움은 언제나 최대의 참여의 결과이다. 단 그 활동은 의미있는 것이어야 한다. 참여가 높은 만큼 배움의 잠재력이 커진다.”

“중국 속담에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본 것은 기억하고 해본 것은 깨닫는다’고 했다. 기억에 대한 임상실험에 따르면, 오직 듣기만 했을 때는 10퍼센트만 기억하고, 보고 들었을 때는 50퍼센트, 보고 듣고 해보았을 때는 90퍼센트 기억했다고 한다.”

“청소년, 청년 사역에서는 기회 있는 대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 공휴일이 되면 야외수련회를 떠나라. 단기선교하러 나가라. 그들은 직접 몸으로 참여하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단기선교는 참가자가 은혜 받기 위해 떠난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의 지성은 말씀으로, 감성은 긍휼로, 영성은 기도와 금식으로 개발된다.”

“자신에게 정립되지 않은 적용은 배우는 자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교육의 목적은 그 가르침을 통해 배우는 자가 구체적인 순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오늘 나의 메시지나 가르침을 통해 배우는 자가 무엇을 적용해야 할지가 계속해서 기억에 남아 있어야 한다.”

“의미있는 활동을 제공하려면 독재하는 일 없이 방향만 제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당신은 교육을 퍼넣을 사람이 아니라 교육을 끌어낼 사람이다.”

“당신이 학생들에게 결과만을 주기로 선택한다면, 당신의 학생들을 당신의 한계로 제한하는 것이다. 당신이 학생들에게 과정을 제시한다면 당신은 그들을 무한대 속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질문할 때 정답만 찾게 하지 말고 항상 ‘open question'을 던지라. 너의 의견은 무엇이냐, 너의 적용점은 무엇이냐를 물어라. 창의성을 격려하고 사고를 자극하는 질문이 좋다.”

C.ommunication(전달의 법칙)

“전달은 보기보다 어렵다. 그러나 전달이란 우리의 존재 이유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잊지 말라. ‘커뮤니케이션’이란 ‘공통’이란 의미를 가진 라틴어 ‘communis'에서 왔다.”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때 아무것도 꾸미지 말라. 그저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서도 코트를 입는 방법을 알게끔 설명하듯 하라.”

“수십년씩 제자훈련받고도 사람들의 감정은 계속 그 수준인 경우가 있다.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성격,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는데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느끼는 그 감정의 상처는 잘 안 고쳐지는 것이다. 감정적 성숙이 계속 발달되지 않으면 영적인 성숙 역시 발달되지 못한 채 제자리에 머문다.”

“만일 당신이 무엇을 완전히 알고(개념), 깊이 느끼며(느낌), 또 일관되게 행할 수(행동) 있다면, 당신은 탁월한 전달자가 될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가르치거나 설교할 때마다, 누군가는 땀을 흘린다. 강단에 서기 전에 당신이 흘리든지 아니면 당신이 강의하는 동안 청중들이 흘리든지...”

“전달의 목적은 감동(impression)을 주는 것이 아니라 충격(impact)을 주는 것이다. 전달의 목적은 단순히 확신(conviction)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변화(change)시키는 것이다. 의사를 전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학생 혹은 청중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보다는, 전달자로서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H.eart(마음의 법칙)

“충격을 주는 가르침은 머리에서 머리로가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인격은 확신을 가져다 준다. 모든 효과적인 전달의 기초는 안으로부터 뿜어져 나온다. 그러므로 당신은 정기적으로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주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긍휼을 생각하면 감정이 풍부해지고 마음이 열린다.”

“감동을 주려면 멀리 있으라. 그러나 충격을 주려면 가까이 있으라. 당신의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약점을 공개하라. 그들로 하여금 당신 역시 갈등을 겪고 있음을 알게 하라.”

“모든 배움은 느낌의 단계에서 시작된다. 만약 학생이 교사에 대한 강한 부정적 감정을 갖고 있다면 그는 결코 배울 수 없다. 사람들은 당신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E.ncouragement(격려의 법칙)

“오늘날의 교육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동기 부여의 문제이다. 가만히 있으려는 타성을 극복하고 그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가르침은 학생이 적절히 동기 부여가 되었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가르치는 이로서, 동기 부여자로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한 사람을 자기 스스로 시작하는 사람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모든 외부적인 동기 부여가 성공적이었는가에 대한 평가는 그것이 내부에서 동기를 유발시켰는가이다.”

“누군가가 당신의 삶에 세워놓은 것을 당신이 다른 사람의 삶에 세울 수 있을 때 비로소 당신은 완전한 훈련을 마친 셈이 된다.”

“인정하고 칭찬해주는 것은 동기 부여의 좋은 도구다. 이번 주일에 당신이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실에 가서 팔을 벌려 어린아이 하나를 끌어 안아주는 것 한 가지만으로도 당신은 지금까지 해온 것 중에 가장 영향력있는 사역을 할 수 있다.”

R.eadiness(준비의 법칙)

“배움은 교사와 학생들이 적절히 준비되었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관심과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숙제를 사용하면 학생들이 미리 생각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고 가르침의 배경과 기초를 제공해주며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키워줄 수 있다.”

“좋은 숙제의 특징이 몇 가지 있다. 단순히 바쁜 작업이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창조적이어야 한다. Yes나 No의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적용에 중점을 둔 것이어야 한다.”

“아이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터치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측도가 높을수록 충격도가 낮아지고, 예측도가 낮을수록 충격도가 높아진다. 교사와 학생 간에 서로 너무 잘 알게 되면 충격도가 낮아진다. 마음과 태도에서는 항상 친밀감을 유지해야 하지만 너무 가까우면 교육의 효과 면에서 손실이 있다.”

“좋은 교사는 긴 것을 짧게, 지루한 것을 흥미있게,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막연한 것을 분명하게, 무관한 것을 연관되게 만든다. 열등한 교사는 그 반대이다. 교육방법의 스타일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정해진 내용만 전달하는 기찻길 모델과 상황에 따라 강약을 조절하는 가운데 배우는 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변화를 추구하는 돛단배 모델이다.”

“교사에게 가장 큰 기도제목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결코 없어지지 않는 열정을 주시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전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사람에겐 아무런 막힘이나 한계 없이 자신의 목적하는 바를 이루어내는 능력이 있다.”

주일학교의 성공

주일학교의 위대한 성공을 격려해 주었다.

"너희의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고 말했다.

시편 34:11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그는 "가르칠지도 모르겠다"가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리라"고 명확히 말했다. 그는 자신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고 다른 사람들도 성공할 것을 알았다. 주일학교의 성공을! 내가 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끝이 없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다. 책을 쓴다면 많은 책을 다 쓰고 나서도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별같이 많은 무리가 영원히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며, 흰 옷 입은 무리가 주님의 발 앞에 그들의 면류관을 마치는 천국에서 우리는 주일학교가 성공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수백만 명의 어린아이들이 일요일마다 모여 "부드럽고 온유하고 온화한 예수님"이란 찬송을 부르는 그곳에서 우리는 기쁨으로 주일학교의 성공을 볼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거의 모든 설교단에서 설교하는 목사나, 신도 좌석에서 거룩한 예배에 참여 하고 있는 집사나 거룩한 신도들 모두 주일학교의 성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무나 돌무더기 앞에서 절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넓은 바다 건너 멀리 남태평양의 섬이나 대륙에는 주일학교에서 구원받은 선교사들이 있다. 그들이 지금 애쓰고 노력하고 있는 것 자체가 바로 그들에게 내린 축복이다. 그들은 그들이 주일 학교에서 가르침 받은 것을 셀 수 없을 만큼 무한히 부풀리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거룩한 사업을 계속하라. 이미 많은 업적이 쌓였지만 앞으로 더 많은 업적이 쌓일 것이다. 지난 달 당신이 거두었던 승리를 기억하고 더욱 새롭게 열심을 내라. 싸움터에서 구주를 위해 쟁취한 승리의 월계관을 보라. 그것을 마음에 두고, 현재와 미래에 당신이 해야 할 의무에 더욱 정진하라.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4-15)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적을 침묵시키다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복음을 직접 가르쳤다.

그는 디모데에게 교리만 들려준 것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가르침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전달해 주고, 우리의 삶을 우리의 말과 일치시켜 보여줄 수 있다. 진리와 거룩은 과실과 불의의 해독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바울이 또 강조한 것은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젊은 디모데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것은 디모데가 영적인 아픔을 겪을 때 효과적인 치료제였다.

그것은 젊은 디모데를 가장 훌륭하게 보호해준 보호막이었다.

그것을 힘입어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시련을 이겨 냈다.

그것은 영혼의 닻처럼 그를 붙잡아 주었다. 그 때문에 디모데는 나이가 들수록 이 세상의 망망대해에서 무섭게 표류하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릿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우리는 장차 이 세상의 악한 영과 투쟁하기 위해 대비해야 한다.

그를 위해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대로 살아야 한다. 또한 주위를 기울여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이중에서 특히 후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적을 침묵시키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교훈으로 사람을 가르치는데 만족하거나, 마귀가 마귀를 쫓아내야 한다고 상상하는 것은 한심한 생각이다. 아니다! 불뱀이 사람을 무는 곳에 서는 어디서나 놋뱀을 들어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민수기 21:8-9). 아이들을 끌어내어, 그들을 높이 들어서, 그들의 작은 눈이 하나님의 준비해 놓으신 치료책을 보도록 해야 한다.

아직도 그것을 보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지금도 사람의 피에 독을 주입하는 뱀의 여러 가지 독을 물리칠 수 있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밤중에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떠오르는 태양뿐이다. 어두운 세상에 희망은 없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그 빛 이외에는 오, 의의 태양이 비추면, 안개와 구름과 어두움을 사라질 것이다.

교사들이여, 사도들의 계획을 계속 실행하라. 사도들과 같은 성공을 확신하라. 그리스도를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할(디모데후서 4:2) 아이들을 가르치라. 하나님이 그의 밭을 가라지에서 지키는 주요한 방법 중의 하나는 밭에 일찍이 밀을 뿌리는 것이다. '아기 때'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하나님이 디모데에게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은 처음 가르침부터였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가르침의 때를 주의하라. "어려서부터"란 표현은 "아주 어려서부터"란 말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또는 개역성경에 나온 것처럼 "아기 때부터"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어린이란 다 자란 어린이나 청년이 아니라 이제 막 아기 티를 벗어난 어린이를 말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디모데는 성경을 알았다.

이 표현은 의심할 나위 없이, 아무리 어린아이에게 성경의 지식을 스며들게 해준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지나치게 이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도 전에 아이들은 어떤 인상을 받는다.

아기의 생애 중 처음 몇 달 동안 아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아기는 어머니의 사랑을 배우고 또 자기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배운다. 어머니가 만일 현명하다면, 아기는 복종의 의미를 배우게 되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자신보다 더 높은 이의 의지에 복종시켜야 할 필요를 배우게 된다. 이것은 사실 아기의 미래의 전 생애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만일 아기가 복종과 순종을 일찍 배운다면, 그로 인해 어머니의 가슴에 멍을 들게 하는 일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고, 아이 자신의 눈에서 눈물 흘릴 일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아직 아기일 때 아이를 잘 교육시키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 아이는 아주 특별한 이득을 잃게 되는 셈이다.

아이들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성경을 배울 수 있다. 내가 많은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분명한 사실 하나는, 어린 아이들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성경으로부터 읽기를 더 잘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언어가 아주 단순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나는 사실이 그렇다고 믿는다. 보통 역사에 나오는 사실들은 종종 잘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어린양이 건널 수 있는 조그만 시내

성경에는 모든 영련의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 있다. 즉 어린아이들에게도 알맞은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종종 저지르는 잘못은, 아이들에게 성경을 직접 읽히기 전에 뭔가 다른 것으로 먼저 아이들을 가르친 다음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성경은 직접 읽기 전에 따로 다른 예비서가 필요한 책이 아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직접 읽을 만한 책이다. 성경의 일부분은 아이들의 정신능력 이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어른 중에 지극히 똑똑한 사람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거대한 바다짐승이 헤엄칠 수 있는 깊이도 있지만, 어린양이 건널 수 있는 조그만 시내도 있다. 현명한 교사는 그들의 어린 제자들을 조용한 물가 옆의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방법을 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 즉, 쉐이프츠베리 백작을 우리가 잃은 것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주 무겁게 짓누르는 슬픈 일인데, 그의 일생에 있어서 그에게 최초로 종교적 감동을 일으켜 준 사람은 한 비천한 여인이었다.

쉐이프츠베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나 사람의 친구가 된 것은 그가 어릴 때 받은 영향 때문이었다. 어린 애쉴리 경에게는 한 경건한 유모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말해 주었다. 그가 7살이 되기 전에 그 유모는 죽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생의 초기에 하나님의 영의 인을 그의 마음에 받았다는 증거다. 그것도 비천한 여인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우리는 그녀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 선택된 어린아이에게 거룩한 가르침을 베풀어주었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여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엄청난 일을 행한 복 받은 한 여인이 되었다. 젊은 유모들이며, 이 사실을 기억해두라.

옛 노래는 우리 입술에, 옛 생각은 우리 마음에

어린아이의 처음 7년을 우리에게 달라.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저 불멸의 영혼을 파괴하는 이 세상과 육신과 악의 세력을 간단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처음 몇 년은 아직 그 육신의 진흙이 부드러워. 그것을 변화시키기 쉬운 때다.

그 그릇의 형태를 우리의 뜻대로 결정할 단계에까지 갈 수 있는 때이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당신의 직책이 더 나이든 사람들을 주로 다루는 우리의 직책보다 조금도 평등하다고 말하지 말라. 아니다.

당신은 이 고귀한 어린 영혼들을 다룰 첫번째 기회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당신에게 처음 나오는 때로부터 당신이 그들에게 주는 감동은 그들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나는 그 감동이 훌륭한 것, 오직 훌륭한 것뿐이길 기도한다.

노인이 천국에 가기 전에 떠오르는 생각 중에서 가장 많이 나는 생각은 전에 그가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 있을 때 그에게 떠올랐던 생각이다.

구스리 박사가 죽기 전에 "어린아이의 찬송가"를 들려달라고 요구했던 것은 우리 본성의 본능이다. 우리의 본성은 생의 처음과 끝을 이음으로써 우리 생의 원을 완성하고자 한다.

어린아이가 좋아하는 것은 노인들도 가장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를 얽어매는 줄을 떨어버리고 좀더 본연의 우리 자신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옛 노래는 우리 마음에 남아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받은 가르침은 예리하고 날카롭게 우리 마음판에 새겨진다. 그것은 70년이 흘러도 그대로 남는다. 그러한 인상이 가장 고상한 목적을 위하여 새겨지도록 주의 하자.

존중할만한 교사들을 선정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누가 어린 디모데를 가르쳤는지 금방 지적할 수 있다.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서 바울은 말한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딤후 1:5)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는 이 어린아이를 가르치는데 의견이 일치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부모가 아니면 누가 아이들을 가르치겠는가?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으며, 아마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아이는 흔히 모든 친족 중에서 어린아이에게 가장 친근하기 마련인 존중할만한 할머니가 있었기에 행복하였다.

그에게 또한 은혜로운 어머니가 계셨다는 것도 축복받은 일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한 때 경건한 유대교인이었으나 후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녀는 매일 그녀의 사랑스런 아이에게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기쁨이었다.

어머니와 모세와 솔로몬

오 사랑하는 어머니들이여, 하나님이 당신을 지극히 거룩하게 신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제발 이해하시오! 하나님은 사실상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출 2:9)

당신은 미래에 하나님의 사람이 될 아이를 잘 준비시키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면 그 아이는 아마도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될 것이다"(디모데후서 3:17) 만약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당신은 나중에 그 예쁜 소년이 자라서 수천 명을 향하여 설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당신의 마음속에서는 달콤함 추억이 떠오를 것이다. 즉 아이 방에서 행한 조용한 가르침이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었다는 것을.

아이 때문에 집안에 남게 된 여인은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과 정반대되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경건한 어머니도 예배당에 가기 위해 집안을 떠나기는 힘든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교회에 봉사할 기회를 잃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와는 정반대로 그녀는 주님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들이며, 당신의 아이를 경건하게 단련시키는 일은 당신이 행해야할 첫번째 가장 필요할 의무이다. 그리스도인인 여인들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주님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과 같은 역할인 것이다.

기독교교육의 원리

I.서 론

기독교 교육의 기초는 하나님이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에 근거한 인간형성의 기능, 즉 복음에 의한 그리스챤 형성의 기능이며 그리스도의 모습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는 그리스챤을 형성하는 주체,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형성하는 주체는 인간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있으며 기독교 교육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히2:6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이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교육은 사람을 취급하며 또한 사람에 의하여 행해진다. 그래서 일반 교육에서는 교육학의 기초 개념으로 서의 교육의 의의를 단적으로 정의하는 가운데 "교육이란 인간을 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으로 형성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활동이다" 라는 개념은 인성 그 자체의 발전과 성장이다. 그래서 사람은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할 존재이며 동시에 교육이념을 실천하는 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인간을 통하여 인간을 교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이념과 실천은 주로 인간 개념의 기본요소인 인간의 기원과 본성, 세계관, 생의 목적 및 운명 문제 등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효과적인 교육에는 역시 인간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는 교육이 적절히 계획되고 행해 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루터가 사람의 정체를 재발견하게 된 종교개혁의 귀중한 공헌 가운데 하나이다. 루터는 죄인을 구원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간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취급하면서 "사람은 외롭고 자족할 수가 있는 존재가 아니며 동시에 어떤 인간 공동체의 한 예속자에 불과한 소망이 없는 존재도 아니다." 했다. 이와 같은 교육이념이 기독교 교육이념으로 출발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인간을 통하여 인간을 교육하신다. 그래서 사람을 이해하면서 사람이 속해야 할 올바른 관심사는 인간 그 자체가 적절한 영역에서 살게 함이니 지금까지 기독교 교육원리를 많이 대하는 중에 깊은 지식이 있을줄을 알고 인간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및 신-인 관계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그 자신은 물론 타인을 이해할 수 없기에 좀 다른 각도에서 기독교 교육론적 입장을 취하면서 기술하려 한다.

II.기독교 교육의 의의

혹자는 "기독교 교육은 사람으로 하나님과 만날 준비를 갖추게 하고 그 만남이 성령을 통해서 실생활과 상관되고 실제 삶에 편안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일단 정의한 일도 있다하지만 대체로 기독교 교육은 ''그리스도와 같은'' (Christ like) 인격형성을 할 수 있도록 교도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경험과 성경의 인도를 받는 개인들이 모인 집단체 안에서의 교제를 통하여 성장 발달하는 교육과정이라도 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형성을 할 수 있도록 교도한다는 것은 기독교 교육이 ''한과정'' 이라는 말이지 전체 삶에서 분리된 날개의 사건들을 집합시켜 놓은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교도한다는 말은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처럼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교리를 주입시키거나 또는 어깆로 배우도록 강요한다는 말은 결코 아닌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인간이 더욱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의무를 깨닫게 하는 일 이외에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교육시키려 한다면 우리의 교육관은 ''최고의 것'' 일수 없는 것이다. ''하나남과의 관계경험'' 이란 어귀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처럼 형제의 필요에 관심하고 그들의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인간교육을 시키며 남을 돕는 사람이 되도록 육성 발전시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이 필요한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또 그렇게 육성 발전시키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교육적 구속적 성장패턴'' 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결국 기독교 교육의 주요 목적은 교육적 구속적 성장패턴을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을 배출시키는데 있는 것이다. 만약 교육이 구속적인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제거되고 말것이며 또한 그 교육 과정은 하나님이 주신 생애를 성취시켜가는 인격자를 형성시키기에는 너무도 큰 빈혈증적인 세속적 수준으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그 다음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서의 교제를 통한 성장 발달'' 이라는 어귀는 모든 그리스챤의 성장은 교회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곧 하나님의 성령이 그 집단체의 한복판에서 작용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응답적인 삶을 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경험이 밝혀주는 성장발달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교육이 놓여있는 근거인 것이다. 동시에 이것이 기독교 교육의 능력이요 바탕이며 그 승리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이 높은데 계시지만 동시에 현실생활 속에 현존하심과 그의 순간순간 역사하시는 계시에 응답하는 백성들을 관심하시며 돌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촌지라고 잊을 수 없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 되게 한다.

II.기독교 교육의 목적

기독교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신 구속의 뜻의 실현이다. 곧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처럼의 삶 그 자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인격 형성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라" 는 말씀 중의 목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생활 전면에 나타났으며,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신체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상태를 동시에 찾아 볼 수 있다.

이 표준은 곧 사람으로 하여금 인성을 개발하면서 그 사람 속에 신성을 불어 넣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그 은총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길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채워 삶의 전부각 신앙으로 고상한 차원의 승화하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더우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응답하는 일에 점점 성장해 가도록 교도해야 하며 또 하나님 없이는 인간이 죄 가운데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야 하고 또한 인간이 자신의 무가치함과 용서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여 사회생활 전반에 기독교적 요소를 정착되게 하는데 있다.는 곧 비기독교적 문화권을 기독교적인 인간형과 생활권으로 정착시키려는 근본 뜻도 동시에 목적이 되어야 한다.

IV.기독교 교육과 생활의 실재성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교육이 곧 구원받은 자의 실제 생활패턴이 되게 하자는 뜻이다. 오늘 우리의 기독교 교육이 다방면으로 많은 기관과 단체를 통해서 또한 개교회 주일학교로서 교육이 시행되고 있으나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의 숙제는 남아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 이 말은, "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못하느냐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요14:8-9)바로 이것이다. 예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를 알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건만 아직 그런 단계에 들어가지 못한 형편이다. 오늘 우리 기독교 교육이 이런 입장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말씀과 실제 믿는 자의 생활의 거리를 두고 추상적인 것만 가르치었기에 다 생활 속에 예수가 있고 그 예수와 함께 성장케 하는 체험의심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어린이에게 하나님을 사랑과 의와 정의라는 용어로 설명해 주면서 어린이들 스스로가 그런 관계를 경험하도록 자기 성찰과 예민한 느낌을 갖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래서 다윗과 같이 사람 앞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의 연속성을 아이들 마음속에 깊이 형상화해야 한다.

즉 그리스챤으로서 생활방법에 무리가 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져가며 자신의 윤리적 선택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어린이가 되게 하며 책임을 감수하는 실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교회생활 등 넓은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남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임을 실감케 한다. 동시에 이런 아름다운 마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임을 자각케 한다. 그래서 교회에 서 가르치는 말씀과 가정과 사회, 국가생활의 이중 구조적인 모순을 제거해 주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V.기독교 교사상 적립

기독교 교육은 성격상 구체적이어야만 하고 또 구체적일 수 있다. 그것은 성령에 대한 종의 역할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교훈을 통해서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 관계가 수립되고 대화를 할 수 있게 한다. 만약 가르침이 그 주제와 내용을 전달하는 것 뿐 이라면 인간과 하나님사이에 대화적 관계수립은 있을 수 없고 또 하나님이 주신 교육적 임무는 완성 못하고 실패할 것이다.

크리스챤의 가르침은 상호작용의 전달방편이고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의 진리 그리고 그의 구속사업에 대한 그들의 관계를 깨닫도록 돕는 기독교 교육자료와 교육목적을 통하여 연합된 하나의 교제의 반응인 것이다. 교육상황은 대개 학생을 사랑하고 또 그들의 필요한 것을 이해해 주는 교사와 또 그룹생활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또 공통의 요구와 약함과 교육방법과 자료 및 구속의 교제 가운데서 스스로를 나타내신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일 등을 다 포함한 상황인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한다는 것 이상의 일이다. 가르친다는 일은 인격적이고 응답적인 교육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고 또한 주제의 내용 전달 이상가는 응답적인 교육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고 또한 주제의 내용전달 이상가는 친교의 특성에 의해 가르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가르친다는 것은 함께 나누는 일이고 교육하는 일이고 또 기독교 신앙 안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고 기능을 발휘하도록 개인을 돕는다. 또한 교육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응답적인 인간존재로서 성장하게 하며 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또 자신을 주어 타인을 믿고 신뢰하면서 자라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 교육은 그 바라던 바의 목적 달성을 할 수 있게 되며 또 성령이 그 교육 그룹안에 함께 계셔서 교육을 실현시켜 나아가도록 돕고 힘주시는 것이다. 더우기 우리 교육의 촛점은 어떤 주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야만 한다. 기독교 교육은 인간 생활 속에 있는 자만과 자기의존 또는 죄악의 어두움과 무지를 없에 버릴 만큼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은 그룹의 상호작용인 것이다.

기독교 교육의 임무는 사랑과 친절과 신앙과 하나님께의 응답을 증진시키는 것, 그리고 삶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 살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교육목적이고 또 그것은 오직 그리스챤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기독교 교육은 그리스도 신앙에서만 또한 사랑의 관계에서만 태어나야 한다.

그런 관계의 문맥에서 인생의 추잡함은 그 힘을 잃고 개인의 죄악은 그 호소력과 지배력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 타인과 함께 나누어 같이 살때 아니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의해서 점령당 했을 때 삶의 승리는 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서 그리스도 교사는 그리스도 신앙에 의해 가르침의 제제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된 가면을 쓴 한낱 가면무도회에 나온 선생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인생을 발견한 교사는 다음과 같은 초대교회의 명령을 느끼게 될 것이다. 즉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것을 가르쳐 기키게 하라" (마28:19-20)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경험한 자이면 누구나 그는 하나님이 행하셨고 또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는 구속사업에 대하여 증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교사는 자기 스스로 기독교 교육의 교사가 될 수 없다. 교사는 정말로 교사되게 하시고 또 정말로 가르치며 또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역사하게 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교사의 헌신적인 지혜와 재능을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말과 행동으로 복음 선포하는 일에 헌신하게 하시며 또 구속적 친교를 갖게 하시는 이는 활동하시는 성령이신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은총으로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함께 나누는 심정을 갖게될 때에 우리는 과연 무옷을 말하고 가르쳤다에 앞서 학생들에게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많은 학생에게 감화력을 끼치었다 할 수 있으니 이것이 곧 산 삶의 현장으로 인도하는 기독교의 교육이라 할 수 있겠다.

VI.결론적으로

기독교 교육의 중심목적은 기독교 교육의 최고 목적이 성경상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신념을 가지게 된 그리스챤이 과거 및 현재를 통해서 얻은 통찰력을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다. 이 결정은 다음으로 요약이 되어지나니,

1)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하나님은 진리와 사랑과 선함과 공의 등 우리의 모든 실재 되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통하여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이는 인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죄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 인간을 늘 찾아다니시며 그의 구원을 인간에게 가져오셨다. 이런 성경적 사상 문맥에서 진정한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 결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사람이 그의 생명과 구원을 진정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을때 거기서만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2) 그리스챤이 되는 방법에 대한 통찰력-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사람들은 그리스챤이 된다. 사람이 모방에서가 아니고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될 수 있는 열린 반응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특색을 취하게 될 때 그는 자기가 그리스챤이 된 것을 안다. 곧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삶과 또 삶의 동기와 진리의 봉사정신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이 된 연후에 기독교 교육은 하나의 목적을 가질 수 있다. 곧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하고 또 그에게 가납될 수 있는 인격이 되게 하는 것이 기독교 교육의 유일한 목적이다.

3) 인격의 점진적 발전에 대한 통찰력-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인간 발전의 층계적 레벨에 관련을 갖고 또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 각기 이해할 수준에 따라 받아드릴 만한 사상 형식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학적 교육목적만은 모든 수준에 동일하게 실현되어야 하지만 그 목적달성을 위한 표현은 계층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방법은 단순히 자연적인 생활과의 관련을 통해서 되고 청년과 어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인격적 관계를 가짐으로서 또 구원과 신뢰를 통한 반응으로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목적을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우리는 인격의 성장과정을 간과해서는 안 되고 또 인격 성장발달의 수준에 알맞는 또 의미가 통하고 이해될 수 있는 표현 형식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4) 신앙의 강박성에 대한 통찰력-초대 그리스챤들은 복음의 내적박력(inner dynamic of the gospl) 에 의하여 활약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한다는 사실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죽기까지 예수를 증거하였다. 타인을 돕는다는데서 그들은 곧 삶과 죽음의 차이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현대인에게 긴요한 생의 전부이다. 어떤 그리스도인 교육자들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성한 강박감(comiulsion) 에 감동되어 예수의 세계를 전하고 있다. 이 교육자들은 기독교 교육을 위하여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교육적 소명감인 것이다.

5) 그리스도 교회와 그 나라의 뜻 실현 통찰-교회는 그 전체 역사로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이름에 있으니 먼저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있고 연합된 사람들의 친교의 집단이 있고, 또 성령에 의하여 능력을 얻으시는 하나님의 가족이 있다. 교회의 목적과 사명은 교회에서 나타난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친교관계를 들어가도록 사람을 육성시키는데 있었다.

이 구원의 공동체는 보다 큰 사회적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증진시키고 또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 가운데로 해방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교회의 목적과 사명은기독교 교육을 위한 신학적 목적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사명완성은 하나님과 구원의 교제를 통해서 오는 교육의 힘으로 실재화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적 교육목적은 한 하나님과의 만남 곧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이 기독교 교육의 유일한 그리고 참된 목적이라고 믿는 깊은 신앙에서 와야 하는 것이기에 깊은 참고와 상고를 바란다.

철학에서 경험론(經驗論, empiricism) 임피리시즘 이란

감각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증거들로부터 비롯된 지식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경험론은 인식론으로 알려진 인간의 지식에 관한 학문들 중 가장 널리 퍼진 관점이기도 하다. 경험론에서는 관념의 형성 과정에서 생득관념이나 관습보다는 경험과 증거, 특히 감각에 의한 지각을 강조한다.

경험론(=Empiricism,경험주의,귀납적 지식획득론)

경험론이란 대체로 감각적 경험에 기초하여 후천적으로 지식이 얻어진다는 주장이다. 즉 인식의 기원이 감각에 있다는 입장이다. 경험론은 고대 그리이스의 여러가지 학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스토아학파,에피쿠로스학파 등이 경험론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였다고 한다.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에 의해 경험론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의 저서 신기관(Novum Organum 라틴어)에서 지식을 얻는데 있어서 귀납적(歸納的) 방법를 주장하였다. 사람들은 먼저 각종의 우상(偶像=선입견)을 버리고 자연을 충실히 관찰함으로서 실용적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는것이 힘이다]라는 그의 말은 너무 유명하다.

베이컨등의 영향을 받은 로크(Jhon Locke 1632-1704)는 경험론의 체계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의 저서 인간 오성론(人間 悟性論)에서그는 과학적 개념(=지식)들의 심리적인 기원을 밝히면서, 인식의 기원,범위,확실성등을 문제삼았다.

그는 지식을 확립하기에 앞서서 지식을 획득하는 우리의 인식능력으로서의 오성(=이성?)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 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데까르뜨가 말한 본유관념(本有觀念=생득관념) 즉 날 때 부터 가지고 있다는 관념의 존재를 부인하고, 우리는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와 같은 오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였다.

경험에 의해 우리의 오성에 관념이 주어짐으로서 비로서 지식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우리의 지식은 관념에 불과한데 그것은 경험에 의하여 주어지며, 경험은 여러 가지 감각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경험은 외적경험으로서 감각(Sensation)과 내적경험으로서의 반성(Reflection)으로 나누어 지는데, 감각은 외부의 단순한 인상을 수용하는 능력이고, 반성은 이 수용된 인상을 비교,반복,결합하는 능력이다.(아마 경험을 감각,지각을 포함하는 인식능력으로 보았던 것 같다.)

관념은 단순관념(simple idea)와 복합관념(complex idea)으로 나누어 진다. 단순관념은 감각을 통하여 일차적으로 갖게되는 관념으로서 제일성질과 제이성질로 나누어 진다.제일성질은 외부세계의 대상들의 본성인 연장(延長), 형상(形狀),운동(運動),수(數)등을 의미하고, 제이성질은 색,음,향등 주관적인 성질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러한 단순관념이 오성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됨으로서 복합관념이 생긴다.

오성은 단순관념들을 합리적으로 결합하고 추상하는 능력이다. 그는 복합관념으로 양태(modes),실체(substance),관계(relation)등을 들었다. 로크는 실체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대한 확실성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정신적 실체에 관한 지식이 물질적 실체에 관한 지식보다 더 확실한 것이라 하였다. 물질적 실체(=물체)는 단순관념을 일으키게하는 모든 성질을 구비한 외부의 알수없는 대상(對象)을 의미하는 주관적 산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반면에 우리의 정신(=오성?)이 정신적인 실체(=복합 관념?)를 파악하는 것은 합리적인 지식이 될 수 있다.그러나 이와 같은 지식도 관념상호간에 결합에 의한 것이므로, 인식(=지식?)은 경험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인식대상(=외부세계)은 우리 자신의 경험적 관념세계이며,초월적인 형이상학적 실체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한 그의 입장은 주관적 관념론으로 가는 길을 열어 놓았고, 한편 모든 인식은 외부의 물질적 실체가 감각에 미치는 감각적 경험의 산물이라한 면은 프랑스 실재론(=유물론)의 기반이 되었다.

흄(David Hume,1711-1776)은 우리의 정신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총칭하여 지각(perception)이라 하였다.

이 지각은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으로 나뉘는데, 인상은 우리의 외적 감각이나 내면적 감정에 최초로 나타나는 표상으로서 생생하고 강열한 지각이며, 관념은 이러한 인상들을 반성할 때 갖게 되는 것으로 비교적 희미하고 약한 지각이다.

따라서 모든 관념은 인상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관념들은 연상법칙(聯想法則,principles of association)에 의하여 결합되어 지식을 형성한다. 그런데 이 연상법칙은 서로 일정한 법칙에 의하여 서로를 불러 세우는 힘이 있는데, 그 법칙들은 유이성(resemblance)의 법칙,접근성(contiguity)의 법칙,인과성(causation)의 법칙을 말한다.

그는 그러한 연상법칙은 객관적인것이 아니라 관습으로 부터 나오는 주관적인 신념에 불과하다고 하여, 진리(=지식)은 상대적이며 개연적(蓋然的)이라는 회의론(=불가지론)에 도달하였다. 외부세계의 어떤 원인에 의하여 우리 마음속에 관념이 생겨난다는 인과율(因果律)을 인정하는데서, 외부세계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데, 흄은 인과율도 확실하게 믿을만한 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인과율을 분석하면서 인과율이란 두가지 사실이 과거에 항상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을 경험한 후에야. 이 두가지 사실에 인과적 관계가 있다고 습관적으로 또는 상상적으로 추측하는데 불과하기 때문에 인과율도 진정한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J.S.Mill,1806-1873)은 귀납적 논리를 더욱 철저히 함으로써 경험론을 극단화 하였다. 그는 인과율은 물론이고 수학적 지식까지도 단지 경험의 누적에 불과한 것으로 개연성 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경험론은 회의론(=불가지론)에 빠지는 경우가 있었다. 주로 영국에서 번성했고 지식(=진리)의 획득에 있어서 경험을 강조했던 이 이론은 미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 실용주의(progmatism) 학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하겠다.

그러한 미국의 실용주의 학설은 중극의 공산주의적 실용주의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등소평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 너무나 유명하다. 즉, 검은 고양이든 힌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이 이야기는 현대 중국의 실용주의를 대표하는 말일 것이다.

어원

경험론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 어원을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경험이라는 단어를 끌어올 수 있는, 라틴어 experientia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μπειρ?α에서 유래하였다. 이 단어는 또한 empirics에 대한 고대 그리스 또는 로마에서의 보다 구체적인 활용 용례로부터 유래하였는데, 이 용례에 의하면 이 단어는 이론에 등장하는 설명과 상반된, 실용적인 경험들로부터 우러나온 기술을 축적한 의사를 의미하였다.[

경험론과 철학

영국에서의 경험론을 창시한 존 로크.

경험론이라는 단어는 독단적인(dogmatic) 원칙(Dogmatic school)을 고수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경험으로 얻어진 현상(phenomena)에 대한 관찰에 의존하였던 몇몇 고대 그리스의 의료직 종사자들(Empiric school)을 가리키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개개인은 어떠한 정신적인 내용 없이 태어나며 이들의 지식은 경험과 지각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타불라 라사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정립되었으며 이븐 시나[2] 에 의해 그 의미가 개량되었다. 이븐 투파일은 이 단어의 뜻을 사고 실험으로 표현하였다. 경험론이 담는 원칙은 후일 17세기 존 로크에 의해 명쾌하게 표현되었다.

존 로크에 따르면 마음은 타불라 라사(그는 '백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와 같아서 경험이 이 위에 흔적을 남기고 간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경험론은 인간의 생득관념이라든지 경험을 참조하지 않고 알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부정한다. 경험론자의 관점에 의하면 그 어떤 지식도 적절히 추론되거나 유추되려면, 궁극적으로 누군가의 감각에 기초한 경험으로부터 얻어져야 한다.[3]

역사적인 맥락에서, 철학적인 경험론은 일반적으로 많은 지식들이 감각과는 독립적으로 이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강조하는 합리주의와 배치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대조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와 같은 많은 합리주의자들이 동시에 경험에 기초한 "과학적인 방법"의 옹호자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들 이론이 포함하는 개념들을 과도하게 단순화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더 나아가, 로크는 신의 존재와 같은 것의 지식과 같은 몇몇 지식들은 직관과 추론만으로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경험주의 <經驗主義, Empiricism> 경험을 통해서만 지식(진리)을 얻을 수 있다는 근대 철학

경험주의는 신과 같은 초경험적 존재나 선천적인 인식 능력보다 구체적인 사실을 경험함으로써 어떤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인식론에 근거한다. 이는 오직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합리론과 대립된다.

경험은 어떤 현상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직접 느끼는 등 외부 세계를 관찰하는 감각적 경험 혹은 외적 경험과, 자신의 말이나 행동, 과거 경험에 대해 돌이켜보는 반성과 같은 내적 경험으로 나뉘어진다. 즉, 감각과 내성을 통해 얻게 되는 주관적 의식이 경험인 것이다.

이는 개개의 사실 혹은 현상들이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고 인간의 경험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는 인식론에 근거한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인간의 관념(생각, 사고, 의식 등)을 통한 진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경험주의는 이처럼 경험을 초월한 존재나 선천적인 능력보다 인간의 감각을 통하여 얻은 구체적인 사실을 중시하기 때문에 지식의 근원을 인간의 이성적 마음에서 찾는 합리주의에 대립된다.

경험주의는 17세기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의 사상에서 시작되었다. 베이컨은 인간이 현상을 인식할 때, 마음의 주관적 편견이라는 우상에 의해 잘못 인식하기 때문에, 우상의 파괴를 주장한다. 따라서 베이컨은 개개의 현상에 대한 관찰과 실험이라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일반적 진리(혹은 지식)를 이끌어 내자는 귀납법을 제창하였다. 베이컨은 감각과 같은 외적 경험을 토대로 자연적 관찰을 통한 진리의 획득을 주장하였다.

이 사상은 후에 토마스 홉스를 거쳐 존 로크, 버클리와 데이비드 흄에게 계승되어 영국 경험론을 성립시켰다. 로크는 영국 경험론을 완성한 학자로,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선천적인 지식은 하나도 없고 오직 후천적인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 상태인데, 오직 외적 경험인 감각과 내적 경험인 반성을 통하여 사물을 알아보고 지식을 얻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복잡한 지식도 모두 개개의 사물 혹은 지식의 경험을 통한 단순 관념들의 복합체인 것이다.

로크의 경험론은 외적 경험이 아닌 내적 경험, 주관적 관념에 근거한 인식론을 주장하는 버클리와 흄으로 이어졌는데 버클리는 오직 인간의 내적 경험, 즉 주관적 관념을 통해 지식을 얻으며, 따라서 모든 지식은 모두 주관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책상'이라는 것은 본래 객관적인 사물이라기보다는, "네모나다. 각이 졌다. 단단하다. 나무로 되어 있다." 등과 같은 주관적 관념들을 한데 묶어서 책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객관화시킨 것이다.

흄은 모든 인과적 지식은 개개인들의 과거 경험을 통한 습관과 신념에 의해 생긴다고 주장함으로써 보편적인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흄의 이러한 입장은 모든 지식을 주관적으로 보아 절대적인 지식을 부정하기 때문에 회의론에 빠지는 문제점을 낳았다.

흄 이후 경험론은 공리주의 철학자인 밀에게 계승되었다. 또한, 19세기 프랑스의 계몽 사상과 유물론에 영향을 미쳤으며, 19세기 후반에는 과학적 방법을 철학에 적용시키는 실증주의로, 20세기 들어서는 논리 실증주의 형태로 이어졌다. 또한, 미국으로 건너가서 실제 행동에 유용한 관념이 진리임을 주장하는 실용주의(프래그머티즘)라는 형태로 미국 철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체험 (體驗) experience 체험:

체험주의 (體驗主義) empiricism(임프리시즘 경험(經驗)객관적 대상에 대한 감각이나 지각 작용에 의하여 깨닫게 되는 내용, 자기가 몸소 겪다.


체험주의 신앙 어떻게 볼까?

주최하는 [성령세미나]라는 광고 내용을 살펴보면 미공개된 새로운 성령 사역을 소개한다는 명분으로 [특히 뼈가 붙는 기적, 각종 치유역사, 성령의 희한한 임재 현상, 예언들이 열림, 은사들이 구체적으로 열림, 지식의 말씀의 은사, 귀가 열림 표적이 떨어짐, 20여명 동시 입신, 금니로 변함, 놀라운 새 표적들이 시작됨, 가난의 귀신들이 정체를 박히고 떠남] 이라는 집회 내용과 함께 새 은혜와 능력이 기름 부음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라는 글들로 성도들을 현혹하고 있다.이러한 불건전한 집회들이 전국적으로 열리고 있어서 하나님이 오해되고 성경이 곡해되며 성령의 사역을 무속화 시키는 오류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청교도신앙과 신학의 성격은 체험적 신앙과 실천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구원받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체험과 실천이 구원의 필수적 증거이고 결과이기 때문에 청교도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그리고 예정론과 연결을 시킨다.

그리고 실천은 역사적 종말에 확실하게 이루어질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을 지금 현실화 한다는 각도에서 종말론과 연결을 시킨다.

성경의 권위는 성도들의 삶의 법칙인 "Rule of Faith and Life"라는 차원으로 청교도는 이해 한다.

이러한 청교도신학의 서구 중심의 흐름을 창조적으로 개발하여 미국적인 청교도신학을 세우는데 공헌한 죠나단 에드워드가 말한 신앙체험의 신빙성 문제에 대하여 말함으로써 교회에 불고 있는 잘못된 체험 신앙의 바로 잡고 싶은 심정으로 글을 쓰고 있다.

Nyskc Movement의 가장 큰 관심사가 바로 신앙 경험의 신빙성 즉 진실 된 신앙 체험과 참된 토대가 없는 신앙체험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에드워드는 Religious Affecaions라는 책에서 신앙체험의 '징표'(sign)를 열거 하면서 "의존 할 수 없는 징표들"과 "믿을 수 있는 징표들"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심미적 감각"과 크리스챤의 실천을 포함한 12개의 믿을 만한 징표들을 논하고 있다.

에드워드는 균형 된 신앙으로서 말씀과 성령이 동시에 역사 하시는 신앙체험을 강조하여 청교도 신앙의 신앙체험을 분석하고 이를 개혁주의의 신학 테두리 안에서 재 정리 하였다.

[의존 할 수 없는 징표들]

(회심의 신실성을 증명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점들)

1. 회심했다는 사람이 아주 강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

2. 회심이 그들의 몸에 육체적으로 무슨 영향을 주었다는 것

3. 신앙에 대해서 많은 말을 열심히 하는 것

4. 회심체험이 자기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5. 회심체험이 어떤 성경구절이 생각나는 것과 동반하였다는 것

6. 회심했다는 사람이 이웃 사랑을 행하는 것이 보이는 것

7. 여러 가지의 감정을 경험한다는 것

8. 회심체험이 어떤 특정한 단계를 거쳤다는 것

9. 교회에 시간을 많이 드리고, 교회의 여러 가지 봉사를 열심히 한다는 것

10. 그들이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

11. 자기회심의 진실성에 대하여 깊은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

12. 그들의 간증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는 것

의존할 수 있는 표징들

1. 성령의 직접적인 임재에 토대하여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마음의 감각

2. 신앙체험의 객관적 토대가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 자신(예수 그리스도에 나타난)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우리의 유익과 관계없이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

3. 모든 신앙의 감정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토대를 두었을 때

4.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참으로 이해하고 인식하는 마음의 "앎"이 믿음의 감정과 동반 할 때

5.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리가 참된 진리라고 마음이 진실되게 판단할 수 있을 때

6. 믿음의 감정들이 복음에서 오는 겸손을 동반할 때

7. 회심한 사람의 성격, 인격 자체에 변화가 있을 때

8. 회심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신 태도를 닮았을 때

9. 믿음의 감정이 부드럽고 관용성 있는 마음과 동반할 때

10. 믿음의 감정에 아름다운 균형이 있을 때

11. 현재의 영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영적 발전을 추구하는 노력이 있을 때

12. 신앙감정이 실천의 열매를 맺을 때

믿음이란 무엇인가

롬4:18-21절, 엡2:8,

믿음이란 무엇인가? 너무 쉬운 질문이다. 말 그대로 믿음은 믿는 것, 신뢰(trust)이다.

내가 누구에게 일만불을 담보도 없이, 차용증도 없이 꾸어주었다고 하자.

다른 사람이 물어볼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거액을 그런 식으로 꿔주었나요?

나는 대답할 것이다. 믿으니까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믿음”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특정 지식이나 사상이 진리라고 인정하고 동조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저는 불교를 믿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신뢰를 뜻하지 않는다. 불교의 철학이 진리라고 인정한다는 뜻이다. Trust가 아니라 believe가 되어버렸다.

무엇이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가?

Faith or Trust / Believe

놀랍게도(아니면 전혀 놀랍지 않게도) trust이다. 아마 헬라 철학이 기독교에 들어오면서 “믿음”은 believe의 의미로 축소된 것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헬라 철학은 지식 중심이고, 기독교는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 중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이다.

헬라 철학이 들어오면서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 신앙에서, 쓸데없는 지식 논쟁이 중심이 된 신학으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믿음”은 주로 faith라는 영어단어로 번역된다. 물론 “I have faith in him.”에서는 신뢰의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faith 또한 “특정지식이나 사상이 진리라고 인정하고 동조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 faith가 full을 만나서 faithful이 되면 “신뢰”의 의미를 되찾는다.

faithful은 한국어로 “신실”이라고 번역된다.

한자를 보면 믿을 신에 가득찰 실이다. 믿음이 가득찼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은 완전히, 100%, 뒤통수 침을 당할 염려가 전혀 없이 퍼펙트하게 믿을 수 있는 분이시다.

그래서 신실, 믿음이 가득찬 분이신 것이다. 만약 faithful이 “특정지식에 대한 인정이 가득찼다”는 의미로 쓰여졌다면 웃기는 일이다.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특정지식을 인정했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믿음, 또는 신뢰는 행동이 반드시 따라주어야 한다.아니, 행동이 믿음을 증명한다. 또는,행동은 믿음의 일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의 행동을 보여주어야 진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흔히 하나님에 대한 신뢰 또는 믿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근심 걱정을 안 하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새와 들풀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하물며 사람을 굶기시랴는 말씀이 보통 단골로 인용된다. 사실 먹고 사는 문제를 근심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는 정도의 믿음도 흔하지 않다. 그만큼 많은 성도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는 “이방인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께서 이 정도의 믿음만 요구하시는가? 그저 내 뒤에 든든한 빽이 있다는 믿음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히브리어 원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믿음”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원어는 emunah이다. emunah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가 행동, 인생으로 표출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믿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행동들이 다 그 믿음에 기반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시며 인자하심의 끝이 없고 그 죄대로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시며 그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능히 구원하시는 분이시고 그 모든 행위가 의로우시며 모든 일이 은혜로우신 분이시며 자기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선대하신다(시편 103편, 145편 참조).

emunah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행동, 모든 인생의 하나하나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다 하나님께 드려서 다 하나님께서 좌지우지하시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emunah는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고부동 요지부동한 신뢰가 아니고서는 생길 수가 없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조금만이라도 있다면 그런 행동을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emunah의 좋은 예는 바로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는 살던 곳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나아갔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사라를 통해서 후손을 주겠다는 약속을 확고하게 믿었다. 얼마나 확고하게 믿었는지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는 비록 후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리라는 약속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죽는 날까지 그는 그 약속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브라함은 그의 온 인생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히브리서 11장을 펼쳐들고 “믿음”이라는 단어를 모조리 emunah로 바꿔서 읽어보자.

emunah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emunah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emunah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믿음, 신뢰, emunah의 깊이를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이신칭의 – 오직 믿음으로서 의롭다고 칭함받는다–의 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게 되었다.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고 말한다. emunah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이다.

이 얼마나 깊고 진중한 믿음인가.그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는 복이 무할례자들에게도 부어졌으니 그 얼마나 감사한가.

믿음, 신뢰, emunah의 깊이를 깨달았을 때 나는 정말로 겨자씨만한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로 우리는 겨자씨만한 emunah도 없다.

믿음, 신뢰, emunah의 깊이를 깨달았을 때 나는 행함과 믿음을 언급한 야고보서의 말씀도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믿음을 “특정 지식에 대한 동조”로 본다면 믿음과 행함을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여러분도 이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어요”라는 캠페인성 구호 밖에 외칠 수 없다. “행함과 믿음 둘 다 중요하지요”정도의 개념 밖에 가질 수 없다. 그러나 emunah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함이 없으면 emunah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 emunah도 없고,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고 칭함 받을 수도 없다. FAITH IN ACTION 정도가 아니다. FAITH IS ACTION이다.

1. 믿음의 본질

믿음의 첫째 가는 본질은, 믿음이란 “인격적 관계”라는 것이다. 성경적인 믿음은 어떤 개념이나 비인격적인 대상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다(요 1:12, 3:16; 갈 2:16; 엡 3:12; 빌 3:9; 히 12:2; 약 2:1; 계 2:13, 14:12).

그러나 또한 요한복음 14:1 구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리고 이 말씀 뿐만 아니라 다른 말씀들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정확한 형상이시며,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셨기에(요 17장; 롬 3:22; 딤전 1:14; 딤후 1:13, 3:15)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믿음은 바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고전 2:1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관계에 들어가 있음”인 것이다(요 5:24; 벧전 1:21; 엡 3:12; 히 10:23).

또한 이것으로 우리는 믿음 안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가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단코 불가능하다. 삼위일체를 믿는 믿음이어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온전해진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믿음은 당연하게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연결된다. 이로써 온전한 믿음은 삼위일체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 자명해진다.

또 하나 믿음의 본질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롬 5:8; 요일 4:19; 엡 2:8; 벧후 1:1).

아담의 타락 이후에 사람은 본성상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고 의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도 시편 51편에서 자신이 죄 중에 태어났기에 죄인일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고, 사도 바울도 엡 2:1~3 말씀에 사람은 본질 상 진노의 자식일 수 밖에 없으며 또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본질 상 하나님을 믿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불가능하도록 타락해 버렸던 것이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사랑해 주셔야만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 사랑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 보여 주셨으며, 예수님의 부활 및 승천 이후에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다(요14:26, 15:26).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고 은혜로 다가오셔서 사람이 믿도록 해주셔야 사람이 비로소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는 것이다.

엡 2:8 말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선물은 믿음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 물론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이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 이 구절에서 구원만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믿음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이 구절에서 분명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기록되었는데, 만일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애써서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라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수고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이 구절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에, 결론적으로는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패키지로 사람에게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도에게는 한 믿음만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든 성도에게 공통된 믿음이라는 것이다(엡 4:5, 롬 1:12, 딛 1:4). 이 믿음의 주이며 창시자(author)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이 모든 성도에게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믿음은 아직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지 못했더라도 말이다.

2. 믿음의 속성(5가지)

하나님의 선물로서 성령님을 통해 주어지는 믿음은 믿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많은 선한 것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만 드러나는 특성들이며, 세상의 다른 모든 믿음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러한 속성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1) 지식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믿음을 받을 수가 없는데 이는 믿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지식’에 기초하기 때문이며, 그 기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는 로마서 10:14 말씀에서도 동일하게 증거되는데, 듣지 못한 분을 어찌 믿으리요? 하고 사도 바울은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사도 요한 역시 우리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기록하여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요 5:24)”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믿음은 듣고 앎으로써, 곧 지식으로써 시작되지만 또한 믿음이 없으면 영적인 일을 분별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으며(고전 2:13),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더하라는 말씀(벧후 1:5)이나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알 수 있다는 말씀(히 11:3)은 분명히 믿음으로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지식과 매우 특이한 관계를 갖고 있어서, 알아야 믿을 수 있지만 또한 믿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지식이 바로 영적 지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반지성주의와 같이 지식을 무시하고, 믿음은 마치 지식과는 무관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올바로 알지 못한 까닭이다. 참된 영적 지식을 알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또한 믿음의 분량 만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이 있어야 믿음을 가질 수 있으므로 믿음은 지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2) 생명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주는데(요 7:38, 11:25; 고후 5:17; 갈 2:20; 엡 2:5) 이는 예수님께서 바로 생명이며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죄와 허물로 죽었고 본질 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연합되어 예수님께서 살아나심과 같이 우리도 살아났으니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할렐루야~~)

그리고 이 생명으로 인하여 다시 태어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지녔으니 (요 1:12)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할렐루야~~)

믿음을 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믿음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어서 새 생명을 주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러한 사람은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기 보다는 자기가 만들어 내거나 자기 안에서 계발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분명히 믿음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증거한다(눅 17:5~10).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께서 믿는 자의 믿음을 통로로 삼아 그에게 새 생명을 부어주시며 그의 믿음대로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3) 사랑

믿음은 또한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서 이웃과 그 사랑을 나누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로 시작되는 믿음은 그 안에 이미 사랑과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롬 5:8),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 주셨는데, 믿음은 우리를 바로 이 예수님과 연합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말씀도 기록하기를, 믿는 자에게서는 거짓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며(딤전 1:5),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형제들에게 믿음을 겸한 사랑이 있기를 기도하였다(엡 6:23).

또한 고전 13:2 말씀,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에서 알 수 있는 듯이 사랑이 없는 믿음은 결코 올바른 믿음이 아닌 것이다. 이 구절을 마치 사랑이 없는 믿음도 가능하다고 이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서 그런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4) 순종

우리가 흔히 믿음장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포함한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음은 반드시 순종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히 12:2)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빌 2:8). 따라서 우리 주님과 연합된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해야만 한다.

또한 성경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표현으로써 믿음은 곧 순종임을 기술하고 있다(요 14:21, 15:10; 요일 5:3; 요이 1:6). 이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믿음에 관한 표현을 신약성경에서 동일하게 이어받은 것이다(출 20:6; 신 5:10, 7:9, 11:1, 13, 22, 19:9; 수 22:5 …).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드러나며 또한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5) 확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성령님의 인치심에 힘입어 확신에 이르게 된다(엡 1:13~14). 성령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내주하시어(요 14:17; 고전 2:12; 고후 1:21~22)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고전 2:13~14)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준다(롬 5:5; 갈 5:22). 그래서 로마서 8:35~39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된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성도의 영과 더불어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롬 8:16) 분이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확신을 얻게 되는 것이다(요일 3:24, 4:13).

이 확신은 언제나 믿음의 현재성을 보장해 주며, 하나님께 대한 소망으로 충만케 한다. 그러므로 이 확신은 믿음이 단지 지식이나 지식에 대한 동의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함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성도는 믿음의 확신을 겸손하게 확인하고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의 확신을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생각은 순전히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다. 성도는 성령님을 통하여 반드시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반드시 자기 스스로 살펴 보아 믿음을 입증하여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월명(月名)의 유래

1월 : January ( Jan.) : the month of Janus (로마신화에서 머리의 앞뒤에 하나씩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대문의 수호신인 Janus 의 달을 의미한다.) 2월 : February ( Feb, ) : the month of the feast of cleansing ( 청정의식의 달이라는 뜻으로 cleansing을 뜻하는 라틴말의 f

정서 발달 영역 Ⅱ

1. 자폐의 정의 1943년 Kanner의 연구에 의해서 처음 밝혀진 이후로 자폐(autism)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가장 최근의 진단 기준은 DSM-Ⅳ(표 1)로 이 장애는 언어적/비언어적 의사소통 및 사회적 상호작용에 있어서 심각한 결함을 가지며, 특징적인 행동 특성으로 비정상적이고 손상된 의사소통, 반복적인 활동과 상동 행동적인 움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