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복음운동의 조상
1. 영국 최고의 크리켓 선수
챨리는 1862년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삼형제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 버지 에드워드 스터드는 인도에서 황마농장으로 큰 돈을 모은 뒤 영국에 돌아 와 경마를 하며 한가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운동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좋 아하였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스터드는 어려서부터 사냥과 크리켓, 그 리고 멋진 경마를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1875년 스터드가 15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가 무디의 설교를 듣고와서 변화되었습니다. 회심후 경마광이던 그 는 곧 소유했던 모든 말을 팔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집의 큰 홀을 깨끗이 치우 고 의자와 소파 등을 갖춰놓고 런던에서 빼어난 성경선생들을 모셔와 친구들과 친척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그의 세 아들은 특별 전도대 상이었습니다. 그는 밤마다 아들 방에 들어와 "너, 예수님 믿을래? 안 믿을 래?"하고 협박(?)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기도가 결실을 맺어 마침내 1년 후 아버지 친구가 집을 방문하였고 그의 전도로 인해 삼형제 모두 예수님을 그 리스도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년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챨리의 관 심은 점점 스포츠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이튼고등학교때부터 크리켓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켓 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구와 비슷한 경기로써 영국의 대표적인 스포츠입니 다. 그는 1879년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 진학한 후 4년내내 대표선수로 뛰었습니다. 1882년 챨리는 겨우 대학 3학년에 아마와 프로선수를 통틀어 '영 국의 가장 위대한 크리켓선수'라는 격찬을 받았습니다. 그의 투구와 타격은 완벽에 가까왔고 반세기동안 깨지지 않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므로 10대의 우 상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는 마이클 조단과 같은 스포츠스타였습 니다. 그러나 그가 크리켓 세계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6년동안 그는 그리 스도의 사랑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이때 그의 삶의 방향을 turning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의 형, 죠지가 위독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챨리는 그의 곁에 서 삶과 죽음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마음 속에 떠오르게 되 었습니다. "이제, 세상의 화려한 인기가 조지에게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명예와 찬사는 또한 무슨 가치인가? 이 세상의 부가 한 인간이 영원 앞에 서게 될 때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나 역시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 형의 건강이 회복되자마자 챨리는 곧 무디의 설교를 들으러 갔습니다. 거기 에서 그는 다시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크리켓 동료들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대학 졸업후, 그는 장래방향을 결정해야 했 습니다. 이때 그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3개 월쯤 보냈습니다. 그는 이 기간동안에 성경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충만히 받았 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결]이란 책을 통해서 축복은 바로 주님께서 그것을 원하고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사람 들에게 주시는 것임을 깨닫고 그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고자 결단하였습 니다. 얼마 안되어 그는 중국 선교사로 나가고자 결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족 의 심한 반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어머니의 눈물 어린 만류로 인하여 그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 였습니다. 그날밤 그는 잠을 이룰수 없었고 자꾸만 이런 말씀이 귀에 들렸습니 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 로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는 중국으로 가라 는 하나님의 진군명령을 받았습니다. 스터드의 분명한 결심을 알았을 때, 어머 니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의 남은 여생 동안 그의 진심어린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을 위한 믿음의 도박사로!
"크리켓스타 챨리가 중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발표는 대학가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수주일 후에 여섯 명의 청년이 더해졌습니다. 그들에겐 '캠브리 지 세븐'이란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이 캠브리지 세븐은 학생복음운동의 조상 이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삽시간에 그들에 대한 소식은 특종기사감이 되었습 니다. 그들은 중국을 떠나기 앞서 1년동안 국내의 각대학을 다니며 집회를 가 졌는데, 이때 학생들 사이에 부흥의 열풍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1885 년 2월, 이들 7인은 중국으로 가는 항해 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중국에 도착한 직후 구세군 선교사로 일하고 있던 아일랜드 처녀, 브리스길라 스튜워트양과 결혼하여 4명의 딸을 낳았는데 모두 중국식으로 양육했습니다. 그는 유산으로 수십억의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 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 라"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었고 자신은 다른 선 교사들처럼 믿음으로만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그가 중국 북부에서 일한 기간은 어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처음 살게 된 집은 흉가였고, 그들이 5년동 안 문밖에 나서기만 하면 중국인들로부터 양귀라는 심한 저주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점차로 그들과 친해졌고, 생활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브리스 길라는 여자들 사이에서, 스터드는 아편 중독자들 사이에서 주로 일하였습니 다. 그는 7년동안 800명의 마약중독자들이 새 삶을 살도록 도왔습니다. 그 중 에 대표적인 한 사람은 살인자요, 간음자요, 마약 중독자로서 '하나님도 나를 구원할 순 없을거요!'하던자였습니다. 그러나 스터드의 전도를 통해 변화된 그는, 과거 자신이 죄짓던 마을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는 빛의 사자가 되었습 니다.
그러나 챨리는 건강이 악화되어 가족과 함께 중국에 온 지 10년만인 1894년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후로부터 6년동안 건강이 안좋은 상태에서도 그는 미국과 유럽 전 지역 캠퍼스를 순회하면서 학생들에게 선교비 젼을 심는 선교 부흥집회를 가졌습니다. 가는 곳마다 수천명의 학생들이 그의 집회에 모여들었는데 때로는 하루에 여섯 번이나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회를 통해 수백명의 학생들이 해외 선교사로 자원하였습니다. 1900년이 되자 그는 인도에서 농장주로 일했던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가족과 함께 인도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6년후 다시 본국으로 돌 아왔습니다. 영국에 돌아온 그는 순회 강연을 계속하였으나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분명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생애에 또 한번 일대 방향 전환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1908년 리버풀에서 그는 길을 가다가 "식인종들도 선교사를 기다린다?"는 이상한 광고 문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칼컴박사 라는 외국인이 붙인 것 이었습니다. 스터드는 그를 통해서 "수십만의 중앙 아프리카 사람들이 복음 을 들어 본 일도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상인, 무역상들이 황금을 찾으러 몰려오지만 그리스도를 전하러 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는 말을 듣게 되 었을 때, 그순간 그는 '부끄러움이 마음 속에 가득찼다'고 회고하였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대답 은 "네가 가는게 어떠냐?"는 것이었습니다. "의사가 못가게 할 겁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하나님의 답변은 이러하셨습니다. "내가 좋은 의사가 아니더냐? 내가 너와 함께 하지 않겠느냐? 그곳에서도 내가 너를 지켜주지 않겠느냐?"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스터드는 마침내 아프리카로 가고자 결단하였습니 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였습니다. 그는 병약하여 의사로부터 아프리카로 가 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를 받았고 재정적인 뒷받침도 없었습니다. 게다 가 아내 브리스길라도 심장쇠약으로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강력히 반대했습니 다. 그러나 스터드는 "황금을 찾기 위해 도박하는 불신자들도 있는데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도박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젊 어서는 직업을 걸었고 중국에서는 재산을 걸었으며 이제는 목숨을 건, '위대 한 믿음의 도박사'였습니다.
그는 1910년 단신으로 아프리카 정탐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본국으 로 돌아와 "아프리카 선교 중심부"라는 선교후원회를 만들고 이 선교회의 파 송으로 1913년 후일 사위가 된 알프레드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이때 부터 그는 18년동안 아프리카 중심부에 위치한 벨기에령 콩고강에서 복음사역 을 섬겼습니다. 스터드는 영국 최고의 운동선수 출신답게 자기와의 싸움에서 절제하며 열정적이고 쉴 새 없이 일하는 선교사였습니다. 그의 사위 노먼은 장 인 스터드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휴식도, 오락도, 휴일도, 레크레이션도 없 이 일만 하는 선교사였다"고 힘들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억척스럽게 일 한 것이 결실을 맺어 5년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프리카 원근 각 처에서 몰려와 매주일 세례를 주어야했고 선교사를 보내주고 교회를 세워 달라 는 추장들의 요청이 늘어갔습니다. 외모와는 달리, 식인종 부족들 가운데 회개 하는 역사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을 때 이렇게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 습니다. "저는 악한 죄인입니다.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는데 아버지가 혼자 먹기 힘들어할까봐 같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흑! 흑!" 아프리카 사람들은 사 람을 먹을 뿐 아니라 간음을 예사로 하고 이것을 전혀 죄로 생각지 않았습니 다. 또한 스터드가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죄는 게으름이 었습니다. 그들은 의자에 앉아서 한가롭게 노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습 니다. 스터드는 이런 그들에게 일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가르치고 사람이 왜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검은羊들이 진심 으로 회개의 열매를 맺기까지 사랑으로 책망하고 근심했던 선한목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브와나 무쿠바(위대한 하얀 추장)라고 부르며 존경 하였습니다. 스터드는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했기 때문에 항상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의 육체는 질병-박물관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1931년 7월. 71세를 일기로 스터드는 콩고 아밤비에서 지병인 담석증으로 소 천하였습니다. 이때 7천명이나 되는 아프리카인들이 그의 장례를 보러왔습니 다.
스터드가 가장 좋아했던 성경구절은 히브리서 11장이었습니다. 그는 히브리 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과 같이 영국 최고의 크리켓선수로서 세상의 인기와 명예와 부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온전히, 그의 육체 가 질병 박물관이 될 정도로 헌신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세상의 보화보다 그리 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더 큰 재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상급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셨습니다. 만약 그가 영국 최고의 크리켓 선수로서 생을 마감했었더라면, 그의 이름은 당시에 는 유명했을 지언정,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았을 것 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크리켓 선수로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 였을 때, 그의 인생의 열매는 상상할수 없을만큼 맺혀지게 되었습니다. 한 사 람으로 말미암아 중국과 인도 미국 그리고 아프리카의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또한 그의 영향력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고자 결단하였고 자원하여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유럽과 미국의 캠퍼스 영혼들이 자기를 위하여 살지않고 세계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 을 돌아보고 미지의 땅 척박한 볼모지에 와서 그들의 젊음을 바쳐 복음을 전하 고 무지한 백성들을 가르쳤 흑암에서 빛의 세계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의 일생을 헌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