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S (Nyskc Steward) Seminar'2022, Opening Worship
첫째 날 내게 주신 은혜가 무엇일까
둘째 날 받은 은혜 생각할 때 마다 무엇으로 보답할꼬
셋째 날 내게 주신 직분이란 무엇인가
마지막 날 직분을 어떻게 감당할까
세미나 즈음하여...
NS Seminar가 변함없이 2022년 교회와 NWM의 사역을 위한 직분자 곧 청지기를 세우는 훈련을 갖습니다.이는 교회의 사명인 선교와 교육 구제를 감당하며 주님이 특별하게 주신 예배회복운동(Nyskc Movement)을 함에 있어 Staff로 쓰임받기 위하여 4일간의 일정으로 갖는 신앙훈련입니다.
매년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갖는 NS Seminar가 참 우리들 자신에게 유익되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함과 진리로 무장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NS란 '하나님을 예배함을 사랑하는 성도들이다'.라고 말할 수 있고 또 '신령과 진정의 예배자들이다"라고도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세대'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정의 한다면 "예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성도들을이 곧 NS(Nyskc Steward)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중심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으며 습니다.
고후 5:9절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여기서 “거하든지 떠나든지”는 바울이 “육체에 거하여 세상에 머물든지 아니면 육체를 떠나 주님께로 돌아가든지”라는 뜻으로 “살든지 죽든지”라는 말입니다.
빌1: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살고 죽는 문제를 떠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그의 가장 고상한 목표요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곧 “자신의 몸을 통해 예수님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함은 “지당한 말씀”이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어떤 삶일까 또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 자신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지는 의문입니다.
성경 속의 많은 인물들이 그랬습니다.
왕하 16장에서 유다 왕 아하스는 여호와의 전에 있던 작은 놋 단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큰 단”(왕하 16:15)을 세웁니다. 이것은 그가 다메섹에서 본 이방신의 제단의 최신 스타일을 본떠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는 크고 화려한 제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풍속을 기뻐하고 따르는 아하스와 그 백성들에게 대해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라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사8:6,7a).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모델은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설명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귀한 말씀은 마 3:17절”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기쁨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온전한 기쁨이시며,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며 동시에 한 분이십니다 그분 안에는 “사랑과 기쁨”이 끊임없이 흐릅니다. 정말 완벽한 관계이며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많은 말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곧 “사랑”입니다.
나나 무스꾸리(Nana Mouskouri)라는 그리스 가수가 부른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이렇지만 가사는 이렇게 시작하고 끝이 납니다.
“사랑의 기쁨은 순간이지만 사랑의 슬픔은 영원합니다.” 가사로 보자면 오히려 “사랑의 슬픔”이라고 해야 맞을 듯한 노래입니다. 이 가사는 아마도 모두가 공감하는 사실일 것입니다. 사랑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해 기쁨보다 더 격렬하고 더 오래 가는 고통을 느낍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그리움, 불안, 실망, 조바심, 아쉬움, 욕망 등으로 얼룩진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리 기쁘지 않은 사랑입니다. 순수한 “사랑의 기쁨”을 맛보기 참 어렵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노래 가사처럼 “보고 있어도 그립고 같이 있어도 외로워” 합니다. 아픕니다.
왜 우리에게 사랑은 기쁨보다 훨씬 큰 아픔일까요
그것은 “신실함 (faithfulness)”의 문제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변하거나, 욕망 때문에 만족해 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기대로 실망합니다. 많은 이유로 신실하고 영원한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기쁨은 잠깐이고 그 사랑이 남긴 고통과 상처는 오랫동안 계속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매우 다릅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사랑이 신실하다는 것 곧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시136편은 반복해서 하나님 사랑의 신실하심을 노래합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His love endures forever).”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 신실하실 뿐 아니라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며,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히 3장에서는 하나님의 종 모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대조해서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들 되신 예수님”을 “종인 모세”와 구별합니다. 하지만 이 둘은 매우 중요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충성됨(being faithful)”입니다.
히3:5-6a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신실함” 또는 “충성됨”입니다. 이들은 모두 “끝까지 충성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크리스천의 신실함을 가장 잘 묘사한 말씀은 아마도 요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실해야 하는 것은 “가지로서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요15: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곧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실하기 위한 첫 번째 요구사항은 곧 예수님의 사랑 안에 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고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늘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John Owen이라는 청교도 신학자는 “하나님과의 교제 (Communion with God)”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안식과 만족과 기쁨(rest, contentment, and delight)이다.” 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사랑에는 사람들의 사랑에서 흔히 나타나는 불안이나 실망이나 슬픔이나 고통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참 쉼과 평화와 만족함과 환희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가졌을 때 기쁘고 평안합니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젖을 충분히 빤 후 빙긋이 웃는 얼굴로 잠이 든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으로 인해 기쁘고 만족해야 합니다. 다른 무엇이 없다고 징징거리거나 불안해하거나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하여 더 이상 불평할 일이 없는 사랑입니다.
복음성가 스바냐 3:17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못된 죄인을 감당하고자 피눈물 나게 몸부림을 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셔서 즐거이 노래를 부르시는 그런 사랑입니다.
나 자신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러실 수 있을까 정말 신기한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또한 “너를 잠잠히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영어 성경(NIV)은 이를 “He will quiet you with his love” 곧 “그가 그의 사랑으로 너를 잠잠하게 하실 것이다”라고 번역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가 더 이상 불평하거나 불안해할 일이 없이 조용히 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는 아기에게 젖을 배불리 먹여 재우는 엄마와 같은 그런 사랑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은 신실하시며 완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 대해 신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사랑하며, 주님께 충성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우리 몸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름대로 하는 사랑은 자주 앞에서 말한 유다 왕 아하스가 저지른 것과 같은 실수를 초래합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드려져야 합니다.
특히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의(self-righteousness)”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에 대한 “감사함”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의는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신 “의”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이며 제단입니다. “크고 화려한 제단”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로 세워진 참 사랑의 제단”을 통해 드리는 헌신과 사랑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2022년을 향한 Christian으로서 Nyskcian이란 닉네임을 가진 우리들은 예배회복운동을 사명을 받았음을 믿습니다.
교회로는 제직이며 주의 일꾼으로 Nyskc Steward 직분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께“충성됨(being faithful)”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처럼 모든 일에 신실함(faithfulness)으로 나가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늘 은혜 주시는 주님과 함께 교제(Koinonia)하며 교통(Communion with God)하면서 사명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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