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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배를 지킨 줄 알았는데, 예배가 나를 지켰더라”

퀘렌시아, 영혼의 안식처 교회와 거리두기....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는 투우장에 투우사와 황소는 단 몇 초의 선택에 의해 생과 사의 길이 나뉜다.


투우장의 황소는 극도의 흥분된 상태로 투우사에게 돌진한다. 노련한 투우사라면 황소가 돌진해 오는 동선을 미리 파악하여 자신이 움직여야 하는 길을 미리 결정한다.

황소의 동선을 파악하지 못하면, 투우사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다. 투우사는 빨리 황소의 동선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황소가 돌진해 오려고 쉬는 장소, 숨을 고르고 힘을 모으기 위해 잠시 쉬는 장소를 파악 해야 한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사투를 벌이는 황소는 투우사를 공격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영혼의 힘까지 끌어 모아 투우사에게 돌진한다. 그렇게 마지막 사력을 다하며 잠시 숨을 고르는 안식처가 퀘렌시아(Querencia) 다.

퀘렌시아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퀘렌시아는 투우장에 들어와 마지막 숨을 고르고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자신의 운명의 최후 순간 황소가 안식하며 영혼을 재충전하는 장소다.

퀘렌시아에 들어서면 황소는 지금까지 숨겨왔던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단숨에 재충전하고 투우사에게 달려든다. 이때 황소를 막지 못하면 투우사의 목숨도 위태로워진다.

노련한 투우사일수록 황소가 정해놓은 퀘렌시아를 빨리 발견한다. 투우장에서 황소가 퀘렌시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승과 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그래서 스페인어인 퀘렌시아는 영혼의 안식처 혹은 영혼의 피난처라고 불리운다. 유일하게 죽음의 생과 사에 길에 놓여있는 투우와 투우사만이 퀘렌시아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장소는 경이롭고 신비한 장소이며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안식과 쉼을 주는 곳이다.

티벳 사람들은 세상 인간들의 고민거리와 걱정거리가 전혀 없는 안식의 장소를 샹그릴라(Shangri-La)라고 부른다. 티벳 언어로 ‘마음 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이다.

이 장소는 실제로 중국 윈난성 디칭장족 자치주에 위치한 현의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티벳인들에게 샹그릴라는 쿤룬 산맥 서쪽 끝자락 어딘가 위치해 있는 영적 공간이다. 1933년 영국의 작가 제임스 힐튼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 등장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장소다.

중국과 티벳 국경에서도 가장 오지와 험지로 알려진 지형 어디쯤 끝자락에 샹그릴라도 위치해 있다. 실제로 존재는 하는 곳인지, 정확하게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사람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다.

많은 티벳의 고승들과 순례객들이 지금도 샹그릴라를 찾아 순례의 여정을 한다. 물리적인 샹그릴라를 만나지 못했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영혼의 안식처인 샹그릴라를 찾았다고 말한다.

현대인에게는 퀘렌시아나 샹그릴라 같은 마음의 안식처, 육체의 휴식 공간이 필요하다.


일상을 바쁘게 살아 오던 현대인들이 코로나 사태로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머물러 수업을 들어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이혼률 증가, 가정 폭력 증가, 살인 및 폭행과 같은 중대 범죄가 증가 했다는 기사들이 여기 저기에서 나오고 있다.

삶의 가장 치열한 전쟁터 같은 직장에서, 경쟁의 삶으로 내몰리는 학교에서 돌아와 우리에게 가장 쉼과 안식과 평안을 제공해야 할 가정이, 더 이상 마음의 안식처와 육체의 휴식 공간이 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모든 사람들에게 퀘렌시아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샹그릴라가 필요하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조그마한 원두막이 있었다. 전형적인 농촌 시골에서 자랐기에 원두막은 흔한 것이었다.

그 원두막은 수박을, 참외를, 포도를 지키기 위한 작은 초소와 같은 것이었지만, 때로는 마을 어른들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는 장소이며, 아이들이 술래 잡기를 하고 지나던 아낙들이 모여 수다를 떨던 장소이기도 했다. 나도 개울가 곁 바람이 시원하게 들이치는 집앞의 원두막을 좋아했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었고 모든 이들이 부담없이 들려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읍네 장을 보고 돌아오시는 부모님을 기다리는 장소였고 학교에 가기 위해 이른 아침 이웃한 친구들을 기다리는 장소였다.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자연 스럽게 만나는 장소였고, 그곳에 가방이며 옷가지를 모두 벗어 놓고 물놀이를 하던 공간과 장소이기도 했다.

부모님께 혼이나 울며 집을 뛰쳐 나가 원두막 처마 밑에 앉아 훌쩍거리며 속상한 마음을 달래던 곳이 바로 그 조그마한 원두막이었다.

현대인들에게 안식처가 각각의 모든 장소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퀘렌시아나 샹그릴라 같은 쉼과 안식을 주는 곳은 필요하다. 어느 한 곳이라도, 외부의 스트레스와 어려움으로부터 자유롭고 안식하며 위안을 주는 곳이 필요하다.

마음 속에 퀘렌시아였고 샹그릴라 였던 한국 고향 시골 원두막처럼 생활 반경에서 너무 떨어져 있으면 찾아갈 수 없기에, 마음을 붙이고 살아가는 미국 땅에도 마음 속의 원두막 한두 곳쯤은 마련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너무 가까워도 식상하기 쉽고, 너무 멀어도 접근성이 떨어진다. 나만 알고 있는 은밀한 장소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가장 친근한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공간 정도만 되어도 좋다.

서로 죽기살기로 싸우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서 적과 동침하며 살아 내야 하는 현대인의 일상에서, 영혼의 안식처가 없다면 힘겨운 삶이다.

투우장에 가지 않아도, 티벳의 고원에 등반하지 않아도, 일상의 삶의 장소를 퀘렌시아와 샹그릴라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매일 지지고 볶는 가정의 일상에서도 나만의 퀘렌시아와 샹그릴라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는 그 의미를 조금은 알 만하다. 시어머니와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살았던 엄마는 뒤꼍 불을 지피는 아궁이에 가면 가장 마음이 편하다고 하셨다.

3대가 모여 살던 시골의 기와집 가장 후미진 사랑채로 쓰던 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불을 지피던 아궁이는, 숨바꼭질을 할 때 우리 형제들이 종종 이용하던 장소다. 누가 생각해도 숨기 좋고 다른 이들의 왕래가 없던 장소였다.

엄마는 종종 그곳에 가서 불을 지펴야 할 일이 생기면 그곳이 가장 마음 편한 곳이라고 하셨다.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를 모시고 시집살이를 하셔야 했던 엄마에게 마음의 퀘렌시아와 샹글릴라 뒷마당의 아궁이였다.

출근을 위해 만원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던 한국에서의 일상에서 만원버스 맨 뒤쪽 끝 좌석과 버스 공간을 분리해 주던 손잡이가 있던 그곳에 서면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 했다.

출근 지하철을 타고 일터로 향할 때도 출입문 계단이 바로 나오는 지하철의 출입구 손잡이 부분에 서면 지옥철 안에서도 마음의 평안이 있었다. 목회를 하고 있는 미국의 삶 속에서 목회의 스트레스와 어려움이 닥쳐오면 가끔 물멍(물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는)을 하던 산타모니카 해변이나, 집 앞 오래된 목조 건물의 스타벅스의 구석자리도 나에게는 퀘렌시아와 샹그릴라의 장소였다.

이민자들은 모두 고향을 마음에 품고 산다. 미국에 적응하며 살아가지만, 마음에 품고 사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가 있다. 지친 이민사회에서 영혼의 쉼을 위해 고향을 찾아가고 방문하는 것이 쉬울 수 없기에, 이민자의 마음에 아픔과 고통을 해결해줄 만한 우리의 퀘렌시아와 샹그릴라가 필요하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동안 일상의 삶과 일상에서 누리던 삶의 자리를 잃게 되었다. 일터와 학교, 공원과 해변가 산책로 여행지가 폐쇄되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일상에서 만났던 열린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되었다.


“일터가 그립네요. 일을 하다 중간 휴식시간에 휴게실에서 함께 나누던 커피가 이렇게 그릴울 수가 없습니다.” “학교를 갈 때는 학교 가는 게 힘들었는데, 지금은 다시 학교로 돌아 가고 싶어요.” “교회도 갈 수 없고 친구들도 만날 수 없어 힘들어요.”

일상에서 누렸던 삶의 자리가 때로는 힘든 곳이었지만, 우리 영혼에 삶의 안식과 쉼을 제공하는 곳이었음을 이제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 일상의 삶의 회복되고 있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에게 퀘렌시아였을, 또 누군가에겐 샹그릴라였을 우리 일상이 평범한 열린 공간이 회복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퀘렌시아는 회복의 장소이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얻는 곳, 본연의 자기 자신에 가장 가까워지는 곳이다. 산양이나 순록이 두려움 없이 풀을 뜨는 비밀 장소, 독수리가 마음놓고 둥지를 트는 거처, 곤충이 비를 피하는 나뭇잎 뒷면, 땅 두더지가 숨는 굴이 모두 그곳이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류시화)>, 12쪽

교회는 예배의 장소다. 교회가 예배의 장소라는 것은 물리적인 장소로써의 의미다. 설교가 전달되고 찬양이 있고 종교적인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다.

그런데 교회가 폐쇄되고 보니,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로써의 역할보다 더 중요한 역할이 교회의 기능임을 알았다. 교회는 결국 회복의 장소다. 내가 기도할 수 있는 곳,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와 친밀함을 다시 회복 하는 곳이었다.

우리가 예배의 장소를 만들고 세워 왔다고 생각했는데, 교회가 우리의 일상을 지켰고 세워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다시 거리두기 단계가 회복되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잊고 있었던 우리 영혼의 안식처, 공동체의 회복 장소, 나의 본질을 지켜주었던 영혼의 안식처 교회를 회복하고,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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