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SKC SYMPOSIUM 2013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회복신학의 성경해석: 모형(Typology)과 원형(Archetype)”
윤사무엘 목사(학회장)
1) 이레니우스의 해석 방법
리용(Lyons)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우스(Irenaeus, 140~200, 어릴 때 폴리캅의 순교를 지켜보았던 것으로 미루어 서머나 태생일 것임)는 정경(canon)의 범위를 확정하고 표준적인 주석을 씀으로써 신앙의 규제와 교회의 규범을 삼고자 했다. 그는 영지주의와 마르시온에 강력하게 대응하여 이단 퇴치에 심혈을 기울였다(Against Heresies).
그는 영지주의가 선호한 알레고리(allegory, 풍유)적 해석을 거부했다. 대신에 모형론(typology)을 해석 방법으로 채택하여 구약의 사건과 가르침이 신약에 일어날 사건의 예표가 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15장 27절(민 33:9)에 나오는 엘림의 샘물 열둘은 신약의 12사도를 예표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0-22절에 나오는 제2의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해석도 모형론이다. 출애굽 사건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대한 예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유에 대한 해석에서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모형론적 중심의 해석을 하고 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 20:1-16)의 경우, 첫 번째(이른 아침) 부름을 받은 농부는 태초에 부름을 받은 사람, 두 번째(오전 9시) 부름을 받은 농부는 구약시대에 부름을 받은 사람, 세 번째(정오) 부름을 받은 사람은 예수 당시에 부름을 받은 사람, 네 번째(오후 3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이레니우스 당시에 부름을 받은 사람, 마지막(오후5시)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마지막 때에 부름 받을 사람으로 해석하고 있다. 포도원은 의로움을,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의 영을 그리고 삯으로 지불된 데나리온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지식을 각각 나타낸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비유의 중심은 하나님의 공평한 사랑을 말해 준다. 밭에 감추인 보화(마 13:44) 비유에서는 밭이 성경이고, 보화가 그리스도라고 하여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한다.
또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성령과 예수의 관계를 논하는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는 관찰하기를 사람은 하나의 고발자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하나의 지지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 사람을 성령에 맡기셨다. 사람이 강도를 만났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연민을 느껴 그의 상처를 싸매어 주고 두 데나리온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상을 받아서 우리에게 위탁된 데나리온을 충실히 감당하여 증가된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비유들을 설명하여 기독교 신앙을 위한 호교론(apologetics)으로 발전시키려고 했다. 어거스틴도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했다. 누가복음 10장의 참된 이웃 비유에서 ‘어떤 사람’을 아담으로 보고, ‘예루살렘’은 평강의 하늘의 도시이며 아담이 여기서 떨어졌다고 해석한다. ‘여리고’는 달을 뜻하고, 우리는 죽어야 할 운명이라고 해석했다.‘ 강도들’은 마귀와 그 부하들이고,‘ 옷을 벗다’는 것은 아담이 영생을 상실한 것을 말하며,‘ 때렸다’는 것은 그를 죄 짓도록 설복했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는 것은 사람이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에 억압되어 살고 있는 한 그의 영혼은 죽은 것이어서 거반 죽은 것이라고 했다. ‘제사장과 레위인’ 은 구약의 제사 제도와 그들의 활동을 말하는 것으로 구원을 위해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함을 뜻한다고 했다. ‘사마리아인’은 보호자를 뜻하므로 주님 자신을 말하고, ‘상처를 싸매준다’는 것은 죄를 억제한다는 것이며, ‘기름’은 선한 소망의 위로이며, ‘포도주’는 뜨겁게 열심히 일할 것을 권면한 것이라고 하였다. ‘짐승’이란 예수님의 육체를 말하고, ‘짐승에 태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신앙이라고 했다. ‘주막’은 교회로서 나그네 인생들이 쉬어 가는 곳이라고 했다. ‘이튿날’이란 주님의 부활 후를 뜻하고, ‘두 데나리온’은 사랑의 두 계명이거나 이생과 오는 세상에서의 생명에 대한 약속이며, ‘주막 주인’은 사도 바울이라고 했다. 이는 본문의 정황을 완전 무시한 위험한 해석이다.
2) 안디옥 학파(Antiochene school)의 모형론 성경해석
소위 ‘황금의 입’(golden mouth)이라 불리는 요한 크리소스톰 (John Chrysostom, 347~407년)은 수리아(Syria) 안디옥에서 자라면서 어린 나이에 수도원 생활을 했고, 법학과 수사학(당시 명웅변가인 Libanius의 문하생)을 배웠다. 장성하여 안디옥 교회의 집사(381~386년), 목회자(386~398년)를 거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본래 이름은 Byzantium, 현재는 Istanbul)의 감독으로 이스탄불의 소피아 교회(St. Sophia Church, 지구상에 남아 있는 교회 중 가장 오래 된 교회요 초대 교회 때 가장 큰 교회, 381년 2차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를 놓음)를 담임했다 (398~407년). 그의 명 설교를 들으려고 매주일 왕을 비롯하여 8천 명 이상의 성도들이 교회당을 가득 채웠다. 소피아 교회는 설교단과 회중석의 높이 차이가 거의 없으며, 크리소스톰은 예배시 회중석에 함께 앉아 있다가 설교 때만 강단에 올라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주로 본문 설교 및 강해 설교를 하였으며, 성경의 한 책을 골라 서론, 강해, 적용(도덕적 훈계, moral exhortations)을 하였다고 한다. 그의 비유 해석은 역사적∙신학적∙문학적 방법에 근거한다. 그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는 심정으로 본문을 철저히 연구하여 영적인 의미를 찾아 목회적인 설교를 했던 것이다. 그의 해석 방법은 후에 루터와 칼빈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안디옥 학파의 데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 350~428년)는 성경 언어의 역사적 의미를 해명하는 데 공헌했다. 그는 문법적이고 언어적인 분석을 심각하게 연구하여 본문의 정확한 뜻을 파악하는 데 노력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선호한 영성적 알레고리(spiritualizing allegory) 해석에 반대하여 성경에 나오는 설화들을 역사로 받아들였다. 영감은 어떤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그의 해석 원리였다. 그는 예수의 비유 해석을 보다
모형론에 근거해 해석하였다. 모형론이란 구약성경이 신약의 사건들을 예시(豫示)하기에 유대적인 역사적 배경에서 비유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By the proper use of typology, one could appreciate both the historicity of the Old Testament passage and its application to the Christian era). 다시 말하면, 구약에 나타난 어떤 인물, 사건 또는 사물이 신약과 일치될 수 있다는 해석 방법이다.
그는 크리소스톰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한때 같은 수도원 생활을 했다. 그리고 길리기아(Cilicia) 지방에 있는 몹수에스티아의 감독으로 여생을 마쳤다. 마리아를‘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로 만든 에베소 회의(the Council of Ephesus, 431년)는 안디옥 학파의 최고 원수인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이 주도하였다. 여기서 데오도레는 네스토리우스의 영적인 아버지로 정죄를 받았으나 동방 기독교에서는 그를 최고의 성경 주석가로 인정하며 존경해 오고 있다.
3) 모형(typology)과 원형(原型 archetype)의 성경해석
이레니우스와 크리소스톰 및 데오도레가 말하는 모형을 성경에서 이해해 보자. 구약성경에서의 “모형”은 “구속”과 같은 신약 성경의 교리가 예시되어 있는 회화적인 표현으로 놋뱀과 십자가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요 3: 14,15).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모형론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설교자나 성경 교사는 신약 성경의 교리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모형”이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0:1-11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제 그들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이 본보기가 되고 또 세상의 끝날들을 당한 우리에게 훈계로 기록되었느니라” (고전10:11). 그 외 롬 5:15, 골 2:16-17, 히 9:8-9, 히 11:17-20 등이 있다.
바울은 앞의 구절들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설명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이 사건들에는 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그것들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구원 계획에 관한 모형들인 것이다. 신화적이거나 은유적이 아닌 실제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신약 성도들의 훈육을 위해 기록된 것이다.
모형의 특성에 관해서는 히브리서에 잘 나타나 있다. 모형은 다가올 선한 것들의 그림자이나 그 자체가 형상은 아니다(히
윤사무엘
회복신학의 성경해석: 모형(Typology)과 원형(Archetype)”
모형의 특성에 관해서는 히브리서에 잘 나타나 있다. 모형은 다가올 선한 것들의 그림자이나 그 자체가 형상은 아니다(히10:1). 즉, 구약 성경에서의 모형들은 단지 그림자들이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생기게 하는 “실체”가 없는 그림자는 있을 수 없다. 그림자 그 자체가 형상은 아니다. 그림자는 부분적인 것이며 그림자가 나타내고 있는 실체의 불완전한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는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셨다. “그러므로 천국에 관한 교훈을 받은 모든 서기관들은 마치 자기 창고에서 새 보물과 옛 보물들을 꺼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마13:52). 성경에서 “그러므로”가 나올 때는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이 구절에서 옛 보물들은 구약 성경의 모형이고 새 보물들은 신약 성경의 모형이다. 흔히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 속에 내포되어 있고,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 속에서 펼쳐진고 한다.히브리서 없이 레위기를, 요한계시록 없이 다니엘을, 복음서의 설명 없이 유월절이나 이사야 53장을 이해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어거스틴 Augustine (A.D. 354-430)는 말하기를, "신약성경은 구약에 감취어 있고, 구약 성경은 신약에 감취어 있다 The New Testament lies hidden in the Old and the Old Testament is unveiled in the New."
구약에 나오는 많은 ‘모형’(模型 types)들이 신약에 나타나는 ‘원형’(原型 archetype, antitype)들로써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형은 미래에 있을 어떤 인물이나 사건, 의식 등에 대해 미리 보여주기 위해 제시되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 의식 등이 될 수 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모형들을 살펴보자.
1. 모형적인 인물들 : 아담, 가인, 아벨, 노아, 멜기세덱,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삼손, 다윗, 요나, 하박국 등2. 모형적인 사건들 : 홍수, 열가지 재앙, 유월절, 놋뱀, 요단강, 예루살렘3. 모형적인 의식들 : 제사, 정결례, 명절, 안식년, 희년,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 부림절4. 모형적인 구조들 : 방주, 성막, 성전. 휘장, 지성소, 새성전5. 모형적인 가구들 : 놋제단, 물두멍, 촛대, 떡상, 향단, 시은소, 언약궤6. 모형적인 색깔들 : 청색, 붉은색, 흰색, 자주색, 주홍색, 녹색...7. 모형적인 숫자들 : 1, 3, 4, 7, 12, 40...모형을 공부함에 있어서는 비교할 때 쓰이는 영어의 두 단어 “as”(-같이, -듯이)와 “so”(-그러하리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as”는 모형(types)에 대해 쓰이고 “so”는 원형(antitypes, archetypes)에 대해 쓰인다. 모형은 역사적인 것이고, 원형은 예언적인 것이다.“이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살게 하려 함이라“(고전15:22).“그러나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마24:37).“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같이 인자도 그렇게 들려 올려져야만 하리니“(요3:14).“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그처럼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을 것이라“(마12:40).위의 구절들에서 원형과 모형은 뚜렷하게 비교되어 제시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모형들은 그 예언적인 의미들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성경을 올바르게 공부하지 않는다면 구약의 많은 사건들 속에서 예언적인 의미는 전혀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이제 창세기에 나오는 이삭과 리브가의 이야기를 읽고 모형들을 찾아보자(창24:1-67).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모형이다.
2.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①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이삭도 약속의 아들이다(창15:4, 사7:14).② 이삭의 출생도 미리 알려졌다(창18:10, 눅1:30-31).③ 이삭의 이름도 태어나기 전에 붙여진 것이다(창17:19, 눅1:31).④ 이삭도 불가능한 조건에서 태어났다. 사라는 불임이었고(창11:30) 마리아는 처녀였다(마1:18-20).⑤ 이삭도 독생자로 불린다(히11: 17, 요3:16).⑥ 이삭도 친족들에게 조롱과 핍박을 받았다(창21:9,10, 갈4:28,29, 마27: 29).⑦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이삭도 자기가 드려질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갔다(창22:6, 마27:24).⑧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이삭도 기꺼이 제단위에 올랐다(창22:9, 요10 :17).⑨ 이삭도 아버지에 의해 버림받은 것이다(창22:12, 요10:17).⑩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이 이삭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이다
(히11:17-19, 마28:6).3. 엘리에셀은 성령의 모형이다.①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얻기 위해 이 땅으로 오셨듯이 엘리에셀도 이삭의 아내를 위해 하란으로 갔다.②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제물로 드려지신 다음에야 오셨다. 엘리에셀도 이삭이 제물로 드려진 다음에 보냄을 받았다.③ 성령이 스스로를 말씀하지 않으시듯이 엘리에셀도 스스로를 말하지 않고 자기 주인의 아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요16:13).④ 성령께서 긴급하듯이 엘리에셀도 긴급했다(창24:53-56, 고후6:2).⑤ 성령께서 우리에게 선물들을 주심으로 교회를 위해 준비된 풍요함을 미리 맛보게 하시듯이 엘리에셀도 귀한 보석을 리브카에게 주어 자기 주인의 부요함을 드러냈다.⑥ 엘리에셀은 리브가의 동의를 얻어냈을 때 즉시 떠났다. 그리스도의 아내도 예비하는 것이 끝나면 즉시 성령에 이끌려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4.. 리브가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모형이다.① 리브가(교회)는 엘리에셀(성령)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를 따랐다.② 리브가는 이삭을 위해서 기꺼이 자기의 가족과 헤어졌다.③ 그리스도의 신부와 마찬가지로 리브가는 이방인이다.④ 리브가는 자기 고향을 떠나 이삭에게로 가는 동안 어떤 환란도 겪지 않았다.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기 전에 대환란은 겪지 않는다.⑤ 예수 그리스도도 신부를 만나기 위해 공중으로 내려오신다(살전4:17). 이삭은 리브가를 만나기 위해 들로 나가 있었다.어떤 모형은 이중적으로 적용할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 요나를 자신이 부활하는 모형으로 설명하셨다(마12:40). 그러나 요나는 이스라엘의 모형도 될 수 있다.1. 요나는 이방 성읍에 전파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고 보내졌다.2. 요나는 불순종하고 타시스로 도망갔다.3. 요나는 불순종함으로 바다에 던져졌다.4. 요나는 고래 뱃속에서 다시 살아났다.5. 요나는 육지로 나오게 되었다.6. 요나는 두번째 부르심을 받고는 순종했다.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적으로 나타내는 인물 중에서 요셉은 대표적인 인물이다.1. 요셉은 자기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였다.2. 그는 형제들에게 보냄을 받았다.3. 요셉의 형제들은 그를 거부했다.4.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팔렸다.5. 요셉은 부당하게 고소되고 정죄 받았다.6. 요셉은 감옥에 갇혔다. 예수님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다.7. 요셉은 감옥에서 다시 나와서 영예를 얻게 되었다.8. 보좌에 앉은 요셉은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는 자가 되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시다.9. 요셉은 보좌에 앉은 후에 이방 여인을 신부로 맞아들였다.10. 요셉이 신부를 얻은 후에 그의 형제들은 기근으로 고통 받았고 요셉에게 찾아왔다. 유대인들도 환란 기간에 예수님께 다시 나아올 것이다.11. 요셉은 처음에 자기 형제들을 알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했다.12. 요셉은 형제들과 두 번째 만났을 때 자신을 형제들에게 알렸다.13. 요셉은 형제들과 가족들을 고센 땅에 살게 했다.놋뱀과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형과 원형이 동시에 제시될 때에는 그 모형이 성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형이 제시되지 않을 때에는 그 모형의 성취는 아직 미래의 일이다. 이집트의 재앙은 대환란 기간에 있을 재앙의 모형이다. 도피 성읍은 “야곱의 고난”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피난처의 모형이다. 두라 평지에 세워진 느부캇넷살의 금신상은 거짓 선지자에 의해 세워지게 될 적그리스도의 형상의 모형이다(계13: 14-15).
모형 Type 원형 Archetype, Antitype
아담 Adam 그리스도 Christ
하와 Eve 마리아 Mary
아벨의 제사 Abel's sacrifice 십자가 Christ's Sacrifice, pleasing to God
노아방주 Noah's Ark 교회 the Church
멜기세덱 Melchisedech 그리스도 Christ
이삭의 제물 Sacrifice of Isaac 그리스도의 제물 Sacrifice of Christ
바로가 히브리 남아들 살해 Pharoah's slaying of the 베들레헴에 2세 이하 아이들 대학살
Israelites' male children The Massacre of the Holy Innocents
모세 Moses 그리스도 Christ
만나 manna 성만찬 the Lord’s Table
언약궤 Ark of the Covenant 새언약궤 (십자가)Ark of the New Covenant
시바여왕The Queen of Saba (Sheba) 동방박사The Magi
안식일 Sabbath 새안식일 New Sabbath(부활절)
제사장 Old Testament priesthood 목회자 New Testament pastors
지상의 삶life on earth 영생의 삶 life in the world to come:
4. 모형론적 성경 해석 방법 고광필(광신대, 조직신학 교수), “칼빈의 성경해석,”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교육부 자료), 2003. target=_blank>http://edu.ubf.or.kr/xe/?document_srl=580
i) 역사적 문법적 성경 해석(historical grammat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Kemper Fullerton은 그의 저서 『예언과 권위』 (Prophecy and Authority)에서 칼빈의 성경 해석 방법은 문법적, 역사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여기서 문법적이라는 말은 성경의 문법적인 구조와 언어를 중요시하며 역사적이라는 말은 성경 콘택스트의 역사적인 상황을 중요시하며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말한다. 그러면서 칼빈은 신학적인 전제와 석의적인 방법의 조화가 아니라 석의적인 방법이 신학적인 전제를 컨트롤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는 전제가 성경 해석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 역사적인 성경 해석 방법이 주도한다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루터와 다르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신학적인 전제가 성경 해석의 방법을 인도하는 원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경을 문법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방법을 컨트롤하는 것은 신학적인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위적으로 루터처럼 모든 성경 구절에서 예수를 찾는 것은 아니다. 환언하면 칼빈은 구약을 해석할 때 모형론적으로 해석하지만 그 가운데 있는 루터처럼 문법적 역사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해석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씨는 루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칼뱅은 여자의 “씨”(ערז)는 삼인칭 여성 단수이지만 집단 명사로써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없다. 칼빈에 의하면 집단적 단수 명사가 한 사람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때문에 직접 여자의 씨를 예수님이라고 말하지 아니했다. 교회사를 보면 본문은 Protoevangelium(원시복음)이라고 해석한 것이 통례이다. 칼빈은 이들의 해석에 동의하면서도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사탄과 인간 사이의 계속적인 갈등이 있을 것이며 결국은 인류가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제시한다고 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오심을 말한 것이지 직접 여자의 씨를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CC, Vol. 1, 170.
여기서 우리가 칼빈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칼빈은 얼마나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의 문법적 역사적인 방법에 투철하였으며 동시에 성경의 핵심은 그리스도라는 신학적인 전제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배울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루터처럼 모든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지나친 예수님 중심의 성경 해석은 구약의 역사적인 의미를 약화시킨다. 구약의 메시지는 구약 시대의 언약 백성에게 약속과 희망을 주며 동시에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미리서 맛을 보게 하는 것이다. CC, Vo1. 이사야 45:1 주석. 칼빈은 성경에 알레고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알레고리를 알렉산드리아 학파처럼 역사적인 콘택스트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그 알레고리에서 문자적인 의미, 즉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칼빈은 고후 3:6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의 주석에서 알레고리의 부당성을 말한다. 알레고리칼 성경을 해석한 자에게 의문은 성경의 문법적 문자적인 의미를 말하며 영은 알레고리칼 의미를 말했다. 따라서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의문과 같으며 알레고리칼 의미는 영적인 의미로 봤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본문은 오리겐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본문의 의미가 왜곡되었다. 그들은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불순하게 하며(germanum scripturae sensum adulterandi) 알레고리칼 해석을 성경 해석의 규범으로 만들게 했다고 말한다. CC, Vol. 20,172-75.
그리고 주석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입으로만 전하면 그것은 죽게 하는 것이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마음에 받아들이므로 전하면 생명을 준다는 말이라고 주석했다. CC, Vol.20, 175.
따라서 칼빈은 고후 3:6은 성경의 해석 방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결과를 말하며 사도 바울이 알레고리를 해석하는 키를 제시했다고 봤다(Paul here furnishes us with a key for expounding Scripture by allegories).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칼빈은 알레고리칼 해석과 알레고리를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 James Barr는 알레고리칼 해석은 성경의 콘택스트를 무시하는 하는 해석이라고 했다. “The literal context, the cultural background and the historical setting,”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44(1989), 14.
칼빈은 비유(알레고리)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비유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자 하는 비유의 목표(finis, scopus)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 비유의 의미는 분명해진다고 했다. 크리소스톰도 마태복음 20:1절 주석에서 우리는 비유에서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말고 비유의 목표(skopon)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We should not waste labour to explain all the details in a parable but having learned the aim[or mark :Greek skopon] for which the parable was constructed, to get hold of that and not to bother oneself with anything further). 칼빈에 의하면 비유는 비교와 같은 것이다. 마태복음 13:34-35 말씀을 잘 보면 비유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I will open my mouth in parables, I will utter things hidden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 주님은 창세 때부터 감추어진 것을 비유로 진술한다는 말이다. 창세 때부터 감추어진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 주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했다. 비유란 이 말씀에서 보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to show) 것이다. 이것이 비유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천국은 “이다”(the kingdom of heaven is)가 아니라 이와 같다(the kingdom of heaven will like(NIV;KJV;shall be compared to(RSV))이다. 천국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비유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유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진리를 보여준다. 비유(παραβολη)이다. 나는 선한 목자에서 “나”는 비유이다. 여기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목축 업자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말은 확대된 은유(extended metaphor or metaphorical saying, παροιμια)이다. 진실된 은유는 알레고리가 아니라 실제에 기초하고 있다. 비유는 첫째, 비유를 듣는 자를 도전하며 책임감을 갖게 한다. 둘째, 비유는 자기 자신을 그 비유에 의해서 들여다보도록 한 거울과 같다. 셋째, 비유는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이다. 넷째, 비유는 적대감이 있는 사람에게 간접적으로 쓰는 경우가 있다. 다섯째, 비유는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많은 메타포를 써서 거룩한 순례자가 천성을 향하여 순례 길을 감에 있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를 통해서 묘사한다. 꿈속의 이야기지만 깨닫는 자에게는 금과 같이 중요하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하나의 꿈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우리 주님도 비유를 말씀하시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했다. 들을 귀가 없을 때 우리 주님의 말씀은 번연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비유의 중요성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영적인 깊은 진리를 보여준다는데 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메타포를 통하여 묘사하고 있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I am the door of the sheep; 요10:7) 나는 선한 목자이다( I am the good shepherd; 요10:11)에서는 천국 비유와는 다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선한 목자인 경우는 보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잘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천국 비유는 “이와 같다”라는 말을 썼고 선한 목자의 경우는 “이다”인 것이다. 언어의 사용에 따라서 그 언어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언어의 사용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야 한다. 칼빈은 은유적인 표현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은유적 해석은 알레고리칼 해석이 아니다. 알레고리는 믿음의 규칙을 벗어나지 아니하는 방향에서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 칼빈은 요한복음 1:1-5에 대한 설교에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의 언어가 어떻게 문장에서 사용되는가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을 모르면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For it is important to know how Holy Scripture uses words. Surely we need not stop simply at words, but we cannot understand the teaching of God unless we know what procedure, style and language he uses.). John Calvin,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Trans. Leory Nixon,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Michigan, 1950, 13.
여기서 성경 언어의 사용은 문맥과 문법적인 구조를 살피는 것이며 언어의 스타일이라는 말은 성경의 장르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성경의 장르와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은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현대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이러한 사항은 아주 중요하다. 칼빈이야말로 현대 성경 해석학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ii)모형론적 성경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 Gerhard von Rad는 “구약의 모형론적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Old Testament)에서 모형론(typology)에서 중요한 것은 반복이 아니라 상관관계(correspondence)에 있으며 이 상관관계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라 했다. 여기서 일시적이라는 말은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 있어서 일시적이라는 말이다. 환언하면, 원시적인 사건은 마지막에 이루어질 사건의 모형이라는 말이다(the primal event is a type of the final event). Essay on Old Testament Hermeneutics, ed. Claus Westermann(John Knox Press, 1979), 20.
알레고리(한국인 성경은 비유로 나와 있음)는 예표된 것과 이루어질 사건 사이에 인위적인 관계를 설정하지만 모형론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관계이다. Rad에 의하면 칼빈은 구약을 모형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유지했다고 했다. Rad는 모형론적인 해석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한 한 하나님이 구약의 언약 백성들의 역사 속에 그의 발자취를 남겼다는 상관관계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신구약은 한 하나님의 계시로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그래서 신구약은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따라서, 모형론적인 해석은 그리스도와 관계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신구약의 통일성을 이루는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이라는 두 개의 찬양대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두개(신구약)의 찬양대는 양편에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Rad에 의하면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지식은 구약 없이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했다. Essay on Old Testament Hermeneutics, 37-38.
동시에 신약 없이는 구약의 이해는 의미가 없다. 칼빈에게 있어서 모형론은 진정한 에언이다. 모형론은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라는 역학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구약의 제사 제도를 주석하면서 칼빈은 모든 제사 제도는 모형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그 의미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The whole cultus of the law, taken literally and not as shadows and figure[umbras et figuras] corresponding to the truth, will be utterly ridiculous). ICR, II.VII.1.
칼빈은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열조에게 명함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렘17:22)를 해석하면서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도록 하기 위해서 명해졌으며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에서 말함과 같이 안식일이나 절기나 월삭은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types) 혹은 그림자(umbras/shadow)이며 그리스도는 모형과 그림자의 본체라고 했다. 여기서 그림자라는 말과 본체라는 말은 서로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그림자란 본체(substance)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본체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며 그림자는 본체가 그대로 드러나면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 제도나 예식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하여 진 것이다. 칼빈은 로마서 5:14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επι τω ομοιωματι της παραβασεως Αδαμ ος εστιν τυπος του μελλοντος)는 주석에서 알레고리칼 해석을 반대하면서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했다. 어떤 점에서 모형인가? 유사성의 모형이 아니라 대조적인 모형이라고 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온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처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회복되고, 그리고 생명이 의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 『칼빈성경주석』, 존 칼빈 성경주석 출판위원회 역편 (성서교제간행사, 1990), 로마서. 빌립보서, 173.
아담 한 사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한 사람으로 의가 회복되고 생명이 의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 이 점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는 다르지만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기서 아담이 죄의 모형이라거나 그리스도가 의의 모형이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칼빈은 복음은 율법이 모형 아래 감추어진 것을 손을 가지고 지적해 준다고 했다( the gospel points out with finger what the law foreshadowed under the types). ICR, 2.9.3.
Bates는 칼빈의 모형론적 해석은 칼빈 신학에 중요하다고 했다. Ed. Richard Gamble, Calvin and Hermeneutics,. 146-61.
칼빈은 강요에서 강요의 목표는 성경을 올바로 일고 공부하는데 도움을 주는 안내서라고 했다. 1560 불어 판에는 강요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을 여는 키라고 했다( a key to open a way for all children of God into a good and right understanding of Holy Scripture). 강요는 성경 주석에서 다루는 토픽을 좀더 자세하게 다루지만 주석은 그렇지 않는다. 이점에서 강요는 성경 주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칼빈에 있어서 강요 와 주석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는데 있다. 칼빈은 창세기 1:16을 주석 하면서 “모세는 철학자로서 혹은 과학자로서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언어로 썼다고”했다.칼빈의 모형론적인 해석을 안디옥학파의 Theoira라고 비교한다면 칼빈의 theoira의 의미는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텍스트를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의 진정한 의미란 성령의 내적인 조명에 의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이며 동시에 영적인 의미이다. 성경의 문저적인 의미는 여러 의미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하나의 의미이다.
5. 나이스크의 회복의 신학 성경해석
이상과 같이 우리는 성경해석사에서 모형과 원형을 살펴보았다. 회복 신학에서 모형론적 성경해석을 하여 원형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회복한다. 모든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형론적 구약해석을 통해 원형되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kaiomene는 한정동사이며 분사로서 ‘불로 태워짐’ burning with fire뜻). 모형과 원형의 바른 이해를 통해 나이스크의 회복의 신학은 바른 방향을 찾게 됨을 확신한다.
참고문헌
고광필, “칼빈의 성경해석,”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교육부 자료), 2003.
월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모형과 원형,” 1995년 4월호 (통권 37호),
pp. 36ff.
윤사무엘, [예수님의 천국 비유들], 서울: 쿰란출판사, 2011.
R. E. Clements, 강성렬 역, [구약성서 해석사], 나눔사, 1983
C. G., Psychological Types.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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