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고난 주간, 네째 날: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멀찍이 따라와 왔던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예수님의 시인...내가 그 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앉은 것을 보리라,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베드로의 모습이 대비,

예수님은 대제사장 집의 윗뜰에서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심문을 당하고 있었고,

베드로는 아랫뜰에서 대제사장의 여종에게 심문을 당한다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며 강인한 모습으로.

베드로는 연약하여 몇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다.

자신이 저지른 실패와 배반의 무게를 느꼈다.

적대자들 앞에 견고히 서서 자신을 증거한 예수님.

한 여종의 압력에 굴복하여 예수를 부인한 제자 베드로의 차이를 부각하며 고난 주간에 우리의 모습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라면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여야 한다


인간 마음의 부패함을 말할 때 우리는 맹세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신앙은 인간의 의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인간의 의지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길려 하면 절대 그 부담감과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신앙은 내가 내 힘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을 과신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순종은 사랑하는 데서 온전하여 짐으로 주님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날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믿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 하심이 충만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성령으로 충만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기도하므로 주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셨다는 것을 믿게 된다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왔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 나마 남아 있었음을 말해다.

자른 제자들은 없지 않은가,

시간이 한밤중이었고 예수님은 체포되어 붙들려 가는데 따라갔다가는 나도 죽게 된다는 것을 직감한 제자들이다.

사람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환하게 주위를 밝혔다. 불이 더욱 밝아지자 베드로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행여라도 이 밝은 불빛 때문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이런 베드로의 염려에 맞추어 베드로를 주목하여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대제사장의 이름모를 한 여종이었다.


여종은 이 자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휘두르던 그 성미 급한 남자였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녀는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7절)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무척 당황했다.그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베드로는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68절) 했다.

 

사람 잘 못 봤다는 말이다. 자기는 예수와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은 예수라는 이름을 모른다는 말이다.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에 반해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목숨을 걸고 자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대제사장에게 밝힌 예수님과 달리 자신의 안전을 위해 베드로는 단호하게 예수님을 부인했다.

 

이 순간 베드로는 참으로 비겁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70절에서는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를 주목하는 가운데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했다.

윗 뜰에서 예수님이 진실을 말하던 그 시간 아랫 뜰에서 베드로는 진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는 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앞뜰로 자리를 옮기려 했습니다. 이 앞뜰은 거리로 나서는 아치형 출구가 있는 쪽의 공간을 말하는데 이 자리는 예수님 과는 반대 방향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과 더욱 멀어져 간다.

여차하면 그는 이 문을 통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다.


여전히 베드로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남은 사랑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어 그 문을 넘어가지는 않았다.그때 그 여종이 다시 베드로를 보고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했다.도당이라는 말은 ‘한패’라는 말이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려는 베드로의 태도에 더 수상함을 느꼈던 여종이 한 말이다.


이때 베드로는 또 다시 예수님을 부인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의 억양을 듣고 갈릴리 사람인 것을 눈치 체고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기가 더 커져 가고 있다.

여종과 주변 사람들의 거듭된 지적앞에 베드로는 더욱 불안해 하며 사면초가와 같은 위기 상황에 몰리고 말았다.

 

죽기 위해 진실을 말하는 예수와 살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점점 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제 베드로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극도의 수단을 취한다.

이 수단은 저주와 맹세였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1절) 이 

저주는 예수님의 인격과 이름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쉽게 말하면 “만일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어떤 천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 정도의 의미다.

 

그런데 이런 맹세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절대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한 것이다. 베드로의 부인은 너무나 확실하여 빼도 박을수도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이로써 베드로 자신이 입으로 한 예수에 대한 충성 맹세는 철두철미하게 깨져 버렸다.이것으로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기 전 베드로에 대해 이렇게 말한적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저주하고 맹세했을 때, 바로 그 순간 닭이 두 번째 울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시선을 받았다.

누가복음 22장 61절“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닭의 울음소리와 예수님의 시선을 동시에 받았던 베드로는 순간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는 닭의 울음 소리를 통해 예수님의 음성을 기억했고, 자신이 저지른 실패와 배반의 무게를 느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생각하고 울었다. 오늘 누가복음은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를 통해 베드로의 슬픔이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베드로의 울음은 단순한 후회 정도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을 훨씬 뛰어넘은 진지한 참회의 눈물이었다.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키시고 그를 사용하여 주셨다.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발견한다.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만이 두려움을 극복한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은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 인간의 무력함을 실감한다. 베드로는 위험과 어려운 상황이 자신에게 닥치자, 그 자신의 맹세와 결심과는 달리 주님을 배반하게 되었다.

인간 마음의 부패함이 이렇다. 우리는 맹세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해야 한다.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런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되겠다. 성경이 이처럼 어떤 사건을 세심하게 기록해 놓은 데는 다음 세대를 향해 너희는 이런 허물, 실패를 다시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다.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