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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신학연구 학회 개론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는 언제 설립되었습니까?


Nyskc World Mission 대표회장 최고센 목사에 의해서 지난 2003년 뉴욕에서 Nyskc Learned Society(회복의 신학연구학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Gardena, California 대흥장로교회(권영국 목사)에서 Pastoral Forum을 시작으로 그 이듬해인 2004년에 초대학회장에 장상선 박사를, 부학회장에 윤사무엘 박사를 세우고 Deckalb, Northern Illinois Univ. 한인장로교회(안영철 목사)에서 제2회 Nyskc Symposium’04를 열었습니다.

그 후 2005년 Nyskc Family Conference Washington DC.’05 와 함께 제3회 Nyskc Learned Society를 학술대회를 갖었으며 이후 제4회부터는 Atlanta, Georgia 아틀란타장로교회(서삼정 목사)에서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를 독립, 처음으로 Nyskc Symposium 개최하면서 학회의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14회 학술대회가 NYSKC UNIVERSITY에서 열리게 됨을 성삼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또한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허락하여 주셨음에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지금부터 24년 전 1993년 7월25일 예배회복운동(Nyskc Movement)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고자 Nyskc World Mission을 설립하고 그 안에 4개의 핵심적인 사업방향을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가 Nyskc Conference입니다. 예배회복운동의 실질적인 예배훈련인 Conference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매년 진행되고 있으며 훈련은 다음과 같습니다.

Nyskc Family Conference(IST, MH. NS. MS. MAS. NC. NP. NCA. NF)

Nyskc Mission Family Conference

Nyskc Momentum Conference(MAS. NC)

Nyskc Steward Seminar(NS) 훈련입니다.


또 하나는 Nyskc Learned Society(회복의 신학연구학회) 사업입니다.

Nyskc Movement가 세계적인 예배회복운동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학문적 뒷받침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예배회복운동에 바탕이 되는 신학이 없다면 단순한 Event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학회를 설립, 매년 미국에서 Nyskc Symposium(학술대회)을 열고 있습니다.

“받은 것이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이며 회복할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하는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주제가운데 “회복의 도구는 곧 예배다”, “하나님은 인간의 회복을 위하여 가죽옷을 주셨고 가죽옷은 예배로 발전하였으며, 그 예배 곧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의 단절된 교제가 회복되었으며 생명과 토지가 회복될 수 있었다”,”예수 그리스도는 회복자로 성육신하셨으며 완전한 회복을 위해 다시오심”을 신학적으로 규명하고 적용, 실천을 이루기 위한 학회입니다.

회복의 신학연구학회의 3가지 연구 핵심 신학은 “Theology of Restoration , Theology of NYSKC, Theology of Imputation” 입니다.


세 번째 사업으로는 School of Goshen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NYSKC UNIVERSITY와 GTS(Goshen Theological Seminary), Nyskc Leadership Academy, Nyskc Institute( Nyskc Institute of Church Education (교회교육연구소,NICE)

International Nyskcian Leadership Training Center: 지도자 훈련원 INLTC)가 있으며,예배 회복운동을 이어갈 지도자 양성을 비롯해 우리 주님의 명령처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제자를 삼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찾으시는 예배회복을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어가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핵심 사업은 문화사역인 Miclot입니다.

“빛과 소금처럼 혹은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5:15)는 말씀처럼 빠르게 변하는 이 시대의 문화의 변화 속에서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세상 문화가운데 그 영향력을 끼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예배의 문화를 세우고자 설립하였습니다.

Theater Producation(극단 미클랏), Music Chamber Society, Art Society, Media:SKBTV. Publishing:Miclot (도서출판 미클랏), Magazine:Restoration of Worship(계간지), 방송, 출판, 예술분야로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로 그 사역의 범위를 넓혀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4개의 핵심 사업 가운데 Nyskc Learned Society는 매년 학술대회를 열어오는 가운데 아직은 학술대회로서의 규모를 갖추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고 있으며, 현재도 회복의 신학을 연구하고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번 학술대회 역시 참석한 목회자님들께 새로운 도전과 Vision을 갖게 하리라 확신합니다.


지난 13년 동안 NLS(Nyskc Learned Society)는 California, Illinois, Washington DC. Georgia, Colorado, New Jersey, Ohio 등지에서 Nyskc Symposium을 열어왔습니다. 이 학술대회(Symposium)는 미국 외에 다른 나라에서는 열리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개최되어왔고 그러는 가운데 학회의 임원진도 바뀌어 학회장에 윤사무엘 박사(구약학), 학회실장에 James K. Choi 박사(조직신학)가 맡고 있습니다. 또 각 5개의 분과(신학(성경) 연구, 예배학 연구, 교회학 연구, 교육학 연구, 선교학 연구)로 나누어져 회복의 신학, NYSKC 신학, 전가(轉嫁:Imputation)의 신학, 기다림의 신학 등을 연구하며 예배회복운동(Nyskc Movement)을 신학적으로 뒷받침 하고 있으며, 매년 Symposium과 각 나라의 Division HQ를 통해 열리고 있는 목회자를 위한 Forum과 Seminar등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연구하며 발표했던 주제들의 공통점은 “회복”이었습니다.

2003년에는 “NYSKC의 5대 신조와 행동강령”(암9:11-15), 2004년에는 “예배와 교회” (NYSKC Movement 행16:17)라는 주제로 개최되었고, 2005년에는 “회복의 사상(Nyskcism 요4:23-24)” 2006년에는 “내가 포로 된 자를 돌아오게 하리라” (렘32장), 그리고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Colorado에 위치한 YMCA에서 “성령의 불로 태우라”(사4장), “회복의 신학과 설교”(Nyskc Movement의 정체성), “사실과 진실”(하나님의 관점 Theocentric-ism)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이어 2010년에는 “무엇을 회복할 것인가”(HAVE & BE)라는 주제를 통해 소유권과 위임권에 관한 연구발표가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2011년에는 “시각과 변화"(하나님의 관점 & 사람의 관점), 2012년에는 “Think though Thinking”(빌4:8)에서 교회론을 중심으로 “구약성전과 신약교회의 비교”라는 연구가 성경 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013년 정기학술대회의 가장 핵심이 되는 연구발표는 “모형(Typology)과 원형(Archetype)”으로 예배회복운동을 함에 있어 회복의 도구가 되는 성경해석부분과 또 예배회복운동의 성경 신학의 배경 곧 "Nyskc Movement of biblical interpretation background"에 대한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또, Symposium’14 에서는 더욱 깊어진 Restoration of Theology & NYSKC of Theology 를 연구하며 “Restoration form the Loss”(상실에서 회복)이라는 주제로 연구, 발표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New Jersey Princeton의 시대의 막을 내리고 이후 GTS Ohio Campus의 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2015년 “예배는 회복이다” & “회복의 신학”(암9:11-15), 2016년에는 “모형과 원형”(Type and Antitype)의 “옛(Old)”것은 구약 성경의 “모형”이고, “새(New)”것은 신약성경의 “원형”이라는 주제로 NYSKC UNIVERSITY에서 가졌습니다.


세계에 단 하나 밖에 없는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라는 명칭에 걸 맞는 수준에 오르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고 연구해야 할 과제가 많이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NLS의 Vision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Vision과 연구 과제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배회복운동을 시작할 때 가졌던 Vision들이 NLS(회복의 신학연구학회)를 세워가는 동력이 되었고, 그 방향은 지금도 계속진행 중에 있으며, 연구 내용은(Subjects for Study Project) 회복의 신학 연구, 예배회복에 따른 성경 연구와 Nyskcism 연구(성경해석학), NYSKC 연구, Nyskc Movement 연구, 예배론과 교회론 연구, 역동적 목회 사역 연구(PDP), 예배회복에 따른 Method 연구, Urban Mission 연구(예배중심의 선교), 교회 세대간의 Identity 연구, 예배중심의 선교연구, 다중 언어의 선교적 사명 연구 등이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은 연구 활동(Research Activities)으로는 학회와 부속기관(Institute), GTS를 통한 Seminar & Workshop, Forum & Conference 열면서 그 활동범위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북미는 물론 남미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지역과 서남아시아,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일본과 한국, 러시아 등 전 세계를 향하여 목회자들을 위한 Forum들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Nyskc Symposium‘17은 NYSKC UNIV.에서 5월22일부터 25일까지 3박 4일간 “Diaphora. & Adiaphora라는 주제 속에서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John14:6)라는 제목으로 진행됩니다.

*신학을 세운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닌데 어떻게 『회복의 신학』이라는 분야를 연구하게 되셨는지 그 동기가 있었다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동기라면 너무나 간단합니다. 성경을 애독하다가 발견하게 되었고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면서 복을 주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씀을 애독할 때마다 늘 궁금했었습니다.

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에 길에 서지 아니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이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복이 없으면 안 된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라는 확실한 대답을 얻었을 때 그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복이란 무엇일까,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제 복을 주셨고, 그 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 복은 언제 받았을까, 그런데 우리는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가, 복을 받았기 때문에 복을 잃어버린 우리들이 그 복을 다시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복이 우리의 기업이 아닌가, 받은 복은 어디서 어떻게 상실하였나” 등에 관한 답을 성경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애독하는 가운데 우리가 받은 복이 하나이지만 그 안에는 크게 셋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회복의 신학은 요한복음을 연구하기 시작해 창세기로, 다시 성경전체로 연구를 하게 된 연구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회복의 신학”이라는 표현이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고 또 신학의 분야를 연구하며 그 결과를 얻는 다는 것이 세기를 거처 있을까 말까 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허락하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연구에 임하고 있습니다.


*회복의 신학이란 무엇입니까?


회복(4R: recover, restore, reform, redemption)의 사전적 의미는 “처음 것으로 돌아가는 것, 본질로 돌아가는 것, 본질로의 접근,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음, 원형대로 복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속사에서는 회복을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그 중 하나가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죄로부터 의로운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히브리어 히치디크(hidsdik)은 “의롭게 하다”는 뜻이 있고 신약의 헬라어 디카이오(δικαιω) 역시 “의롭게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근거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의롭게 만들어 나간다는 의미보다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으로서 죄 사유(赦宥)의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시32:1, 마12:37, 눅7:29, 롬3:4, 20-28, 롬8:33-34)

부패되어 전적으로 타락했던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원죄가 행위의 죄 이전에 인간타락을 말하듯이 칭의는 본성의 회복을 말합니다.


회복의 신학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상실한 것이 무엇인가.

왜 잃게 되었는가.

그리고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전적으로 부패되었다. 전적으로 타락했다. 전적으로 죽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상실했다.”

사람을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던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부패되고 타락되어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즉 상실에서 회복하는 것이 회복의 신학의 시작입니다.

다시 말해 “잃은 것과 찾은 것” “상실에서 회복”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은총에 신학적으로 접근한 것이 바로 회복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받은 것과 잃은 것”, “잃은 것에 대한 회복”,”회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주제들이 “주신 하나님과 잃은 사람”, “잃은 것을 찾아주고자 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조명한 것이 회복의 신학이며, 그 과정에서 “사람이 잃은 것을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회복의 도구들에 관한 연구가 NYSKC 신학이다”라고 정의하며 이 과정에서 “회복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불가항력적으로 베풀어주신 은혜의 연구”가 “Theology of Imputation”이라고 정의 합니다.


다시 말하면 회복의 신학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연구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왜 잃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회복을 이루게 하시는지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원래 신학이라는 뜻은 신을 뜻하는 "theo-"와 학문을 뜻하는 "-logy"의 합성어로서 말 그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모든 연구이며, 좁은 의미로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회복케 하시고 우리의 구원과 회복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와 회복사에 대한 찬양입니다.

인간이 세계와 우주, 자연과 질서, 우리의 모든 삶에서 보고 느끼고 관찰하는 모든 것들이 결국 신학적 행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모두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특별계시, 일반계시로 배우는 존재입니다.

신학의 참된 본질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시며, 회복자이시며, 위로자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며, 그 분의 은혜를 찬양하며 그의 목적에 맞는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회복의 신학을 어떻게 연구해 가십니까?


신학에서 말하는 방법론에 의거하여 첫 번째로 성경에서 성경을 유추(analogia scripturae)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학이 그렇듯이 신학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에서 부터이듯 회복의 신학 역시 과학적 연구의 학문이나 신비적인 세계를 서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 곧 특별계시를 기초로 하여 그 학문에 타당성을 가지며, 성경의 방법에 따라 신학의 본질과 목적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학의 유일한 원천(fons or principium unicum)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관점에서 사람이 원하는 것만을 찾아 선택하는 것은 (the cafeteria style)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신앙의 원천은 성경이다.” 라는 뜻에서 Sola Scriptura(오직 성경)는 신학의 전제이며, 해석의 시작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므로 하나님에 뜻에 따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성경을 성경 곧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믿음에서 유추(analogia fidei)합니다.

“신학은 믿음의 학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적, 논리적, 과학적인 것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적 논리로 모두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공현(Epiphany)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며, 점차적으로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은 믿음은 인간에게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세 번째는 성령의 내적조명(testimonium spirtus sancti internum)의 방법입니다.

John Calvin은 성령의 내적조명신학이 하나님의 계시와 교통해 가는데 있어서 절대적이라고 한 것처럼, 인간의 이성과 학문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경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회복의 신학 역시 성경과 믿음 그리고 성령의 조명으로 세워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3가지의 신학연구의 방법론을 체택하여 연구하고 있습니다.


*회복의 신학연구학회의 설립목적 혹은 연구목적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Nyskc Learned Society(회복의 신학연구학회)의 목적은 성경에 나타난 “회복의 신학을 연구하여 기업의 회복을 이루는 연구와 이를 통해서 예배회복운동(Nyskc Movement)을 더욱 확산하기 위한 연구학회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복의 신학연구와 NYSKC 신학연구, 기업의 회복을 이루기 위한 예배회복운동(Nyskc Movement)을 확산하기 위한 연구학회입니다.

또한 연구목적 역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찾으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자로 세우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회복의 신학을 연구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 Nyskc Learned Society(회복의 신학 연구학회)는 설립을 최고센 목사님이 하셨는데 왜 학회장이나 부학회장 혹은 연구실장 같은 분을 세우셨나요? 목사님께서 연구한 학문인데 목사님께서 직접 하셔야 맞는 것이 아닐까요?


설립자와 연구자는 얼마든지 따로 있을 수 있고 다만 아디어라고 할까요 하나님이 주신 이 한 가지를 한 사람이 연구하는 것보다 더 능력있는 분들과 함께 연구한다면 더욱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현재 학회장님은 구약학 중에 고대 근동학을 전공하셨습니다. 구약을 하셨기 때문에 제단과 제사, 제사장과 성막, 율법과 언어 연구에 뛰어난 분이십니다. 부학장님이나 연구실장님은 신약학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회복의 신학을 쉽게 받아들였고 그 뒤로 계속해서 연구하시는 분들이라 학회를 맡길 수가 있었습니다. 초대학회장이셨던 장상선 박사님 역시 신약학 전공이었습니다.

귀하신 분들이 학회를 맡아주셔서 저는 다른 사역에 전념 할 수가 있었습니다.


*세계 신학계에 이처럼 학회를 구성하고 Movement를 하고 있는 단체들이 또 있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학회는 학회로만 활동을 하고 있을 뿐 NLS(회복의 신학연구학회)처럼 학회를 넘어 신학을 신앙의 훈련으로 발전시키며 활동하는 단체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복의 신학이라는 연구 분야도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그와 같은 이름의 학회도 전 세계에 유일무이한 단 하나라고 확신합니다.

학회를 세울 때는 그 뒤에 학교가 있든지 아니면 전공한 사람들로 구성을 하고 있지 회복의 신학연구학회처럼 없는 학문의 방향을 세워놓고 연구해 가는 학회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NLS의 경우 현재는 NYSKC University 소속되어 있지 않고 NWM안에 소속되어 있지만 차후에는 결국 학교로 들어가게 되리라 봅니다.


*회복의 신학연구학회의 연구 분야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는 NWM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NWM은 1993년 7월25일 설립되었으며 설립목적은 Nyskc Movement(예배회복운동)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효율적으로 해나가며 또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때 이미 “회복과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상당부분 정리되어 있었고, 회복의 신학이라는 명칭을 제 나름대로 사용하고 있었던 터라 목회의 방향과 신학 연구 방향을 알리고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Nyskc Movement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암9:11-15절의 말씀과 요4:23-24절의 말씀, 롬12:1-2절의 말씀, 또 히11:4절의 말씀, 창1:26-28절의 말씀 창3:21절의 말씀 등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이처럼 성경중심에서 예배회복운동을 시작하게 하였고 회복의 신학을 더 연구하게 된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연구 분야는 당연히 “회복의 신학”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따른 구원론과 성령론, 교회론을 연구합니다.

그 이유는 구원론은 생명기업의 회복을 연구하기 위함이며, 성령론은 교제기업의 회복을, 교회론은 토지기업의 회복을 연구하기 위해서 이렇게 세 가지 성경적 연구와 신학적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무엇보다 예배론이 아주 중요한 Subject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신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학문의 세계라고 생각하며, 절대적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회복의 신학의 근거는 조직신학과 실천신학의 위치에서 연구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목적이 “예배는 곧 회복이다”라고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신앙의 모두를 합친 것과 같고, 신학을 연구하고 신학을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존귀와 영광, 찬양과 경배를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배를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 조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회는 회복의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크게 신학의 3가지의 연구 분야로 나뉘었다고 말씀드렸는데 “Theology of Restoration(회복의 신학)”, “Theology of Nyskc(Nyskcism: 나이스크 신학,” “Theology of Imputation(전가의 신학)”등이 조직신학을 중심으로 연구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분야를 더 구체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 다섯 개의 연구 분과로 나뉘어져 다음과 같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학적 연구 분과입니다. 회복의 신학을 연구하는 것으로 신학에서 회복을 찾아 연구하는 분과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신학을 연구하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학의 모든 근원적인 것이 성경 연구입니다 그러므로 신학과 성경을 한 연구 분야로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배분과로 회복과 예배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분과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배는 곧 회복을 위한 하나님이 주신 Tool이다” 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 속에는 기도와 말씀, 그리고 경배와 찬양, 존귀와 영광이 함께 하므로 그 연구 분야가 매우 방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연구 분과가 있습니다. 단과 성막, 성전과 회당, 그리고 교회라는 것까지 그 범위를 두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하여 부르신 공동체 곧 교회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인 것이 교회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체가 모여 교회를 이루었다고 하는 에클레시아를 연구합니다. 특히 구약에서 보는 성전과 교회, 신약에서 보는 교회와 공동체를 연구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론에 대해 연구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가의 다락방에서 신약신대의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강림 없이는 혹은 성령 충만 없이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론은 신약적으로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므로 성전에 나아가 여호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배와 교회 그리고 성령에 대한 연구는 아주 중요한 과제입니다.


또 하나는 교육연구 분과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는 교회교육 혹은 기독교교육은 회복을 위한 Method나 프로그램을 연구함에 있어 아주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될 수 있는 것은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주의 말씀 곧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배우며 또한 그의 백성으로 살아가기에 유익하게 되며 이것이 곧 회복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교육 중에 선하고 인격적이며 사회를 정직하고 아름답게 세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첫째는 믿음이지만 그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필요하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도 교육이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교육연구 분과는 교회교육과 기독교교육에서 교육학자는 물론 성경에 나타난 주님의 가르침과 교육을 연구하고 교회교육에 적용하는 프로그램을 연구하며 기독교교육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들을 연구하는 분과입니다. 교회교육이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이루어진다면 교회는 물론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다섯 개의 분과 곧 신학(성경)연구, 예배연구, 교회연구, 교육연구, 선교연구 분과의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고 지금도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또 하나는 선교연구 분과입니다. Nyskc Movement는 Urban Mission의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Backcountry Mission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Church Movement이기 때문에 도시적 선교를 도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현재까지 각 대도시를 돌며 Family Conference를 가진 것은 바로 선교 활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구원과 회복을 위한 훈련을 해 왔던 것입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는 Nyskc의 Theme를 세우고 그 방향으로 달려 온 것이 곧 선교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말 할 수 있습니다.

선교 연구 분과는 주님께서 내리신 마지막 지상명령인 “땅 끝까지 복음을, 모든 족속과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에게, 주님이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것을 전하라” 하신 것을 연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연구 분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린다면 1.회복의 신학 연구 2.예배회복의 성경적 연구 3.NYSKC & Nyskcism연구 4.Nyskc Movement의 연구 5.예배와 교회신학 연구 6.Nyskc 목회 사역 연구 7.예배회복을 위한 Method 연구 8.Urban Mission 연구 9.교회의 세대간의 Identity 연구 10.다중 언어의 선교적 사명 연구입니다.


*회복의 신학연구학회에서 진행하는 Symposium과 Forum은 각각 어떻게 다른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는 연구원이나 회원이 모두 목회자 혹은 신학자들입니다. 그러므로 Forum의 경우는 목회자를 찾아가서 전하며 강의하는 연구모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불러 모아서 하기 보다는 찾아가서 회복의 신학연구학회가 연구한 것들을 강의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Symposium의 경우는 말 그대로 학술대회입니다. 즉 학회에서 지정된 교수 및 연구원들이 연구한 것들을 발표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며 연구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여 회원 간에 정보를 교환하는 학술대회로서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에서만 열리고 있습니다.


또 Symposium의 경우 일 년에 일 회, 정기적으로 5월 중에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개최되어 열립니다. 하지만 Forum의 경우는 학회의 필요에 따라 시간과 장소와 위치에 상관없이 전 세계에서 열고 있습니다.

특별히 Nyskc Movement의 확산을 위한 목회자들의 강의를 감당하며 “Theology of Nyskc” 나 “Theology of Restoration”에 관련된 내용들을 주로 강의 합니다.


*회복의 신학은 “기업의 회복이다” 여기서 기업의 정확한 뜻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주신 복이 우리의 기업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기업(Inheritance)사상입니다. 일반적으로 기업이라고 하면, 쉽게 떠올리는 단어가 기업체, 중소기업, 대기업 등에서 쓰는 기업이라는 말입니다.

한자로는 企業이라고 쓰고 영어로는 a company, a corporation, a business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기업(基業)이라는 단어는 “기와 산업”을 나타내는 업이라는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基는 “터 기”라고 합니다. 이 한문은 “형성 문자”에 속합니다. 형성 문자란 뜻을 나타내는 부수에 음을 나타내는 부분이 합해져서 새로운 의미를 나타냅니다. 이 글자는 뜻을 나타내는 “흙 토” (土 = 흙) 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기(其)가 합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음을 나타내는 其(기)는 벼를 까부르는 키의 모양과 그것을 놓는 대(臺)의 모양을 합하여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이 글자에 있는 “흙 土”는 흙으로 땅을 높이고 굳혀서 집터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터 기” (基)는 흙으로 땅을 높이고, 굳혀서 집터를 만들고 토담을 쌓아서 집의 토대(土臺)를 만든다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터 기”가 토지나 집 등의 부동산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것입니다.

기업의 업(業)이라는 글자는 직업이나 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업이라고 하면 “대대(代代)로 이어 오는 재산(財産)과 사업(事業)”을 의미합니다.

기업이라는 말을 영어로는 an inheritance 혹은 a heritage라고 씁니다. 영어로도 이 단어는 부모 등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의 기업(The inheritance in the Old Testament), (분깃 혹은 선물 등의 단어도 있음, 아후자, 'achuzzah)이라는 단어는 “부모나 근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나 사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기업을 연구하면 그것은 창세기1:26-28에서 하나님이 주신 복이 그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 기업이 되어 후손들에게 물려준다는 의미에서 유업(inheritance) 혹은 유산(heritage) 곧 기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사람에게 복을 주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사람이 지음을 받을 때 이렇게 복을 받았습니다.

창2:7-8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창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사람에게 주신 복은 어떤 복입니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로, 사람이 된 것이 복입니다.

또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사람이 생령이 된 것이 복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복입니다.

즉 사람이 받은 복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기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는 토지의 복을 받았습니다.

또한 흙으로 지어진 존재가 생명이 된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받은 복은 생명과, 하나님과의 교제와, 땅에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복이 사람의 기업(Inheritance)이 된 것입니다.


레위기서를 보면, “토지를 영영이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매각하거나 소유권을 타인에게 영구히 이전하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땅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25: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근본적으로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에 나그네로, 우거하는 자로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볼 때 우리의 기업은 토지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기업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이 땅 위에 거하고, 함께 살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도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년이 되면 묶였던 자가 해방되어 진정한 사람이 되고, 그리하여 그 사람이 자기 땅에 돌아옴으로서 진정한 자유, 즉 신분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동시에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기업과 분깃으로 삼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의 기업의 의미는(The inheritance in the New Testament) “신령한 복으로 복을 주신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구약의 희년이 자유의 해요, 해방의 해요, 은혜의 해였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to proclaim the favorable year of the LORD)고 하셨던 것입니다(눅 4:19).

우리가 모든 죄로부터 해방되어 원 주인인 하나님 안으로 돌아가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시고, 대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므로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업이 된 우리는 하나님의 영토 즉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롬8:16-18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엡1:10-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also we have obtained an inheritance, having been predestined according to His purpose who works all things after the counsel of His will)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라고 번역되었지만 NASB는 "we have obtained an inheritance" (우리가 기업을 얻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원어 성경에는 The Interlinear Literal Translation of the Greek New Testament는 "We were chosen as [his] inheritance" (우리는 그의 기업으로 선택되어졌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들 중에서도 예루살렘 바이블은 "we were claimed as God's own" (우리는 하나님의 친히 소유하신 존재들로 선언되었다)라고 하였고, 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도 "we were also made His inheritance" (우리는 또한 그의 기업이 되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만들어 주시는 분, 바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는 자”이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인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고, 천국을 기업으로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에 우리에게 신령한 복으로 복을 주시려고 예정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엡1: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to the end that we who were the first to hope in Christ would be to the praise of His glory.)

하나님께서 가지신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송 혹은 찬양 그 자체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기업을 상실했다고 하는 것은 받은 복을 잃었다는 뜻인데 여기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다 지으시는 동안 기뻐하셨고 그 중 사람을 지으시고는 “심히 기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 해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입니다.

심히 기뻐하며 지으신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업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하지만 받은 복 곧 기업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창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신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창3:1-6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 결과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창3:6-10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창3:10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였고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말씀 하셨고,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으며, 토지가 저주를 받게 되었고,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주신 복이요 기업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불순종하므로 곧 그것이 죄를 얻게 되었고 그 죄로 인하여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게 되었고,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덩굴과 엉겅퀴 내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습니다.”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복을 잃어버렸으니 그 하나는 생명기업을 잃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업을 잃었고, 또 하나는 토지기업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회복의 신학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를 회복시킬 하나님의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상실한 것을 어떻게 회복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우리에게 예표로 보여주셨습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여자의 후손” 그리고 “가죽 옷”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이 본질이라면 가죽 옷은 여자의 후손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데 그 사역으로는 그의 가죽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도 있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교제 곧 교통을 이룰 수 있으며 토지도 회복되는 것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성경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회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여자의 후손, 가죽 옷”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은 예수그리스도시며 가죽 옷은 대속의 제물 혹은 화목의 제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사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결국은 우리의 구원자요, 회복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신 하나님입니다.

가죽옷은 동물을 죽여 그 가죽을 벗겼을 때만 얻어지는 것으로 가죽옷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것은 창세기 4:3-5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벨이 동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것은 그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동물로 제사를 드렸다는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아벨이 동물로 드리는 것을 어디서 배웠겠는가 하는 것과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보더라도 가인이 드린 제사는 자기 마음대로 드린 제사였다면 아벨은 그동안 아담과 하와가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열납 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드린 제사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의 제사를 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가죽옷의 사건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예배의 모형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회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복의 도구는 예배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구속사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잘 알다시피 한국에만 유일하게 극단적으로 구원만을 주장하는 일명 구원파라는 이상한 NonChristian 들이 있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보아도 구원파라고 하는 무리들을 찾아보기가 힘든데 그 이유는 성경에는 우리가 구원만 받으면 다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만을 신앙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구원 곧 생명만 얻으면 마치 신앙생활을 다 한 것 같은 착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 곧 생명기업의 회복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 하나로 다 회복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교통, 혹은 교제라는 말은 서로 대화가 통한다는 것을 넘어 “Communion” 즉 “하나 됨”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 분과 하나가 되려면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거룩하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구원받은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교제가 회복되어야 하며 주님 안에 내가, 주님이 내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구원의 백성이 되었으면 교통도 이루어져야 하고 이 땅에서의 삶도 주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즉 구원 받은 자의 행위라고 할까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처럼 크리스챤이라면 말씀이 육신 되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구속사”에서 구속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코페르”에서 온 말로 “덮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의 죄나 허물을 들춰내는 것이 아니라 덮어주고 용서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고발하고, 심판하시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덮어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인류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성경의 주제를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로 보는 것을 “구속사적 성경해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를 관리하고 경영하시는 “경륜” 또한 구속사적으로 볼 때 “구속 경륜” 또는 “구속사적 경륜”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속은 해방과 같은 뜻으로 죄의 속박에서 죄 값을 주고 풀려나 자유롭게 되는 구원을 뜻합니다. 성경상의 죄는 먼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원죄로 이는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죄가 유전되어 원죄를 안고 태어나므로 죄인이요, 그렇게 죄인이기에 세상 가운데서 죄를 짓게 되는 자범죄를 가지게 되므로 인간 스스로는 결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죄 값을 대신 치루는 대속이 필요한 것입니다.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자격자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는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며 사람으로서 죄가 없어야 죄인 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죄를 속하기 위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리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한 것이 바로 구속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구속사라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는 전 역사를 말합니다.

성경을 볼 때 예수 구속사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대속이 예언되고 계시된 것이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자로 오실 것을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종말까지 이어지는 것을 구속사라고 합니다.


다시 정의해볼 때 구속사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구약의 수많은 선지선열을 통해 여자의 후손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준비하시고,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십자가를 통하여 구속하시고, 잃어버렸던 생명의 구원을 위해 인류와 만물이 새롭게 되기까지 계속적으로 구원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사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보혈을 흘려주셨고, 그 피로 말미암아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잃었던 생명을 찾았다고 말할 때 그것이 단지 생명뿐이겠습니까? 구원과 동시에 모든 것이 회복되었겠지요.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구원이 오직 잃었던 생명만 다시 찾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회복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들이 잃은 것이 비단 생명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 그리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토지기업의 회복도 중요한 것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회복은 서로 같이 가는 뜻이기도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신학적 연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 곧 기업을 상실한 뒤에 그 잃은 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회복의 역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원자요, 회복자로 보는 것이 회복의 신학입니다. 즉 회복을 위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가, 가죽 옷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회복을 이루어 가시며 그로 인하여 구약에서는 우리에게 회복의 도구인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로 우리에게 표현해 주셨고 신약에서는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회복의 신학의 핵심 단어는 네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복 곧 기업”, “여자의 후손과 가죽 옷”, “예배와 예물”, “회복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기업을 다시 찾아 회복할 수 있도록 예배를 가르쳐 주셨으므로 ”예배는 회복을 위한 도구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회복의 신학에서의 핵심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말할 때는 회복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시며 회복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주제로 삼을지라도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면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혹은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말하고 신학을 말하는 것이 회복의 신학입니다.

절기의 모든 주인은 예수님이신 것처럼 예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최고의 가치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회복의 신학을 연구하고 발표하며 그 안에서 주장하는 것도 다 예수님입니다.

한국에서 성막을 가장 오랫동안 연구하신 목사님의 글을 보면 “성경은 예수다” 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에 전적으로 “아멘!”합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회복의 신학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면 “기업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주신 복, 곧 생명과 교제와 토지기업의 회복이 핵심가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회복을 “본질로서의 접근 곧 변화”라고 말씀 하셨는데 여기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핵심은 “Back to the Bible” 곧 Diaphora로 회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신학과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면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려고 해도 성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조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특별계시라고 말합니다, 물론 자연계시도 있지만 그것은 자연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방법인데 사람마다 그 느낌과 생각이 다 다르므로 불확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는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므로 영원에서 영원까지 변치아니하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태초의 근원이요, 창조의 시작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기 때문에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질로의 접근”(approach the of essence)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학을 연구하거나 혹은 신앙을 세우고 성숙시킴에 있어 성경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본질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성경으로 돌아가자”며 Reformation을 주장했습니다.

Luther는 “성경을 보고 종교개혁의 동기”를 얻어 종교개혁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추구하는 개혁교회는 “Diaphora로 접근하자”고 말합니다.


*회복의 신학에서 쓰고 있는 몇 가지 약자, 예를 들어 4R, NYSKC, ICRDPM 등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회복을 의미하는 “NYSKCISM”이라는 사상입니다.

철학적이면서도 신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5대 강령 혹은 5대 신조, 곧 NYSKC라고 말하고 이것을 사상으로 또한 행동 강령으로 삼고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을 NYSKCISM 으로 무장된 Nyskcian 이라고 말합니다.

N은 NEW LIFE(영혼의 호흡) 곧 새벽기도라고 부릅니다.

Y은 YIELDING FOR MANNA(영혼의 양식) 곧 성경애독이라고 부릅니다.

S는 SALVATION FOR ONE BY ONE(성도의 열매) 곧 개인전도라고 부릅니다.

K는 KEEPING FOR LORD’S DAY(성령의 교통) 곧 성수주일이라고 부릅니다.

C는 COMPLETE OFFERING(축복의 도리) 곧 일조전납이라고 부릅니다.


NYSKCISM에는 회복의 사상 4R(reform, restoration, recovery, redemption,)과 신앙의 5대 신조 그리고 강령이 보여준 것처럼 “본질로 접근” (essence approach)이라는 진행형 곧 “변화되어 간다” (Transformation)라는 과정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암9:11-15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회복을 이루는 6가지를 ICRDPM이라고 합니다.

I 는 (in that day) 곧 “그 날에” 그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C 는 (close up) 곧 “그 틈을 막으라” 세속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라는 사상을 말합니다.

R 은 (raise up) 곧 “일으키라” 퇴락한 것을 일으키라는 사상입니다.

D 는 (Develop) 곧 “건축하라” 황무한 성읍을 건축하는 사상입니다.

P 는 (plant) 곧 “심으라” 심고, 뿌린다는 사상입니다.

M 은 (make) 곧 “만들라” 만들어간다는 사상입니다.

이 6개의 사상은 사실은 4R에 포함된 하나의 사상입니다 다 설명을 할 수가 없어서 이번에는 이 정도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구속사는 “성경은 대속이라는 관점”이고 회복사는 “성경은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보면 되겠군요.


“성경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한다면 “성경은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같이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위한 구속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회복사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구원은 생명”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것은 잘못 적용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생명을 구원받으면 교제나 토지도 다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생명이 없는데 교제나 토지가 무슨 필요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이 땅에서 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교제와 토지의 회복은 지상과 천국을 동시에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속사는 생명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속사를 주장하는 신학자와 회복의 신학은 서로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단지 하나는 구원, 하나는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에 접근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며 또한 회복의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 받은 복은 세 가지요, 잃은 것이 세 가지 곧 생명과 교제와 토지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 해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세 가지 곧 생명, 교제, 토지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업이 되었고, 그것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셨고 그분이 우리의 회복을 위해 가죽 옷이 되어 주셨으며 그 가죽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제사 곧 예배를 회복의 도구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회복의 신학을 연구하시면서 “예배가 회복의 도구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먼저 예배의 사전적 의미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배(Worship)라는 말은 “가치(Worth)있는 지위”(신분, Ship)에게 적절한 영광과 존경을 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오직 창조주이시며 구속주 되신 하나님께만 그 합당한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는 시96:8에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찌어다”라고 하였고 이를 기초로 Covenant Seminary의 레이번 교수는 “예배는 진실로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와 존귀와 찬송과 사랑과 복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으로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려드리는 수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그 대상이 확실하며,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약속을 변개하고 식언하는 불완전한 인간이나(민23:19) 혹은 아무 이성도 없는 짐승 또는 밝혀지지 않은 어떤 외계적 존재는 결코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사람을 친히 그 형상대로 빚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그 예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송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당연한 창조 질서이자 법칙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사람 된 그 존재적 의미를 바로 찾는 것이요, 창조주의 그 창조 목적을 바로 실현하는 것이며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고 하셨고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150:6)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배 용어들을 보면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곁에 나타났을 때 아브라함이 “저희가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영접한다”(창18:2), “욥이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욥1:20) 등에서 사용되어진 “샤하이(Shahai)”라는 단어로 “굴복하다”, “머리를 숙이다”, “엎드리다”는 뜻으로 구약성경에만 무려 120회 이상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행위를 나타냄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순복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섬긴다는 뜻의 “아바드(Abad)"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예배가 단순히 어떤 예식이 아닌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삶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종(에베드)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예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말은 ”봉사한다“, ”섬긴다“라는 뜻이며,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의 종교생활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일관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예배를 의미하는 용어는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프로스퀴네오(Proskuneo)”라는 단어인데 신약 성경에 약 60회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고 하신 말씀과, 예수께서 수가성의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고 말씀하실 때에 사용된 용어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 뜻은 “무릎 꿇다”, “허리를 굽힌다” 등으로 존경을 표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둘째는 “라트레이아(Latreia)”인데 이는 예수님께서“...다만 그 분만 섬기라”고 말씀하시며 유혹하는 사단을 향해 최종 선언을 하실 때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나타냅니다.

셋째로는 “레이투르기아(Leitourgia)”로 이는 일반적으로 예전과 의식에 관계되며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섬기고(빌2:30), 예루살렘 교회에 연보로 섬기는 일(고후9:12),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구제하는 일(롬15:16,27) 등이 바로 “레이투르기아”로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奉事)를 뜻합니다.

넷째는 “호모로기아(Homologia)”인데, 이는 죄의 고백과 찬양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10:32)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가운데 시인(Confess)이 이에 해당됩니다.


또한 교회적 예배의 용어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교회적용어를 살펴보면 우선

“예배(Worship)”라는 말은 “존경과 존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의와 권위를 인정할 때 사용되는 이 말은 영국에서 시장(市長)을 호칭할 때 “Your Worship", 미국에서는 ”Your Honour"등으로 쓰이는 것을 통해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이 종교적 용어로 예배를 지칭할 때는 바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경의와 권위가 함축되는 것입니다.

종교의식을 나타내는 용어 “컬트(Cult)”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어떤 것을 숭배한다”는 의미와 이교적 배경의 주술적 요소가 내포됩니다. 이 말이 기독교에서 사용되었을 때는 거의 외형적 예배 의식을 나타내며, 주로 로마 카톨릭의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면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를 번역하면 “제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종교 의식뿐 아니라 심지어 이단 종파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워십”에 비해 “컬트”는 정형화된 어떤 틀과 형식을 생각게 합니다.

또한 예전적 의미를 가리키는 용어 “리터-얼지(Liturgy)”는 대부분이 정해진 프로그램에 의해 치뤄져야 할 하나의 행사를 가리킵니다. 세례식, 성찬식 등의 어떤 예식을 가리킬 때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보다 넓은 의미로는 예배의 모든 것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예배의 신학적 의미는 항상 하나님과 관련되어서 이해되고 집행되어야만 하고 예배가 곧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존경과 찬송을 드리는 것이므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방법을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의 신학적 원리를 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의 “코람 데오(Coram Deo)”가 종교개혁의 한 구호가 된 것은 바로 이 예배 신학적 원리를 적시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사40:25)라고 하였습니다. 또 주님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0)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도 제한될 수가 없다는 뜻으로서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오직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은 그 마음을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창조주이시며 구속주 되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신전 인격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한 것은 예배자의 요건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인 예배를 드리는 자가 믿음이 없이는 참 예배를 드릴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라는 말씀은 예배자로서의 요건을 상정하는 말씀입니다. 곧 예배는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에 따라 드려야 됨을 말합니다. 이방인의 제사는 감정이 그 기준이 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말씀 곧 진리에 따라 예배하는 “하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만이 드릴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곧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는 자(롬8:9)들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또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하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은 “영”(in spirit)과 “진리”(in truth)라는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지식이 없이 마음으로만 드리는 예배를 드렸고 유대인은 지식은 있었지만 신령이 없는 예배를 드렸습니다(요4:22).

참된 예배가 되려면 신령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신령과 진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말씀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또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였습니다.

진리란 곧 말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령”은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말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8: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from) 예수님을 통하여(through) 하나님께(unto)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컨대 오직 예수의 영을 가진 자들만이 드릴 수 있는 예배가 바로 온전한 예배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고 하신 말씀이 곧 예수를 통한 예배인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람의 응답이다”라고 하였고 또 “예배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의사소통이다”,“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말합니다.

예배하는 자와의 만남을 통한 교제입니다.


무엇보다 신구약을 통해서 예배의 정의가 가장 잘 표현된 부분은 요한복음 4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 신령과 진리의 예배”에 대한 말씀이 요한복음 4:23-24절에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제사로 가인과 아벨을 봅니다. 아벨은 양의 새끼를 제물로 삼고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

양의 어미로 드린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으로 드렸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더 좋은 것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가죽 옷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나무 뒤에 숨어 있어야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죽 옷을 입은 다음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 동물을 드리며 나간다면 하나님이 만나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모습을 가인과 아벨에게 교육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된 후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배 밖에는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 보여준 것입니다.

단을 쌓고 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인데 그것은 믿음으로 인한 행위가 하나라는 것으로서 “예배를 드리는 자는 그 예물과 하나”라는 것입니다.

가죽 옷을 의지하고 “아담아”하고 부르신 하나님께 응답하며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곧 회복이다”라고 주장하며 예배가 성공하면 인생이 성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배라는 말 안에는 회복이라는 뜻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성공하면 모든 것이 성공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까?


“예배는 예식이 아닙니다.”

예배는 예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형식이지만 그 예식이 예배를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형식적인 예배에 빠지지 말라는 말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배가 형식적으로 변질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가 형식에 메인 채로 진실하지 못하게 드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같은데 진정 내 속사람은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고 겉 사람만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12:1-2에서는 “새 사람,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4장에서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고 무엇을 발견합니까? 구약을 보면서 예배가 하나님 앞에 열납 되는 시대에는 교회가 살고 나라도, 가정도 살지만 예배에 실패한 시대는 모든 것이 불통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신약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 즉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형통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보더라도 예배드림이 즐거운 사람들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삶이 평안합니다. 호들갑을 떠는 일도 없고 설령 대성통곡을 할 만한 사건이 생긴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가 예배하면 모든 것에 승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서 예배가 회복되면 모든 일이 형통하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배가 회복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화목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나로 인하여 기뻐하셔서 찾으시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회복의 신학의 내용을 들어보면 “예배와 회복은 같다”는 관점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예배와 회복이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예배자체가 회복을 위한 것이라면 회복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회복은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서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회복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의 뜻으로 사용되어 집니다.

건강의 회복, 삶에 대한 회복, 직업에 대한 회복, 무너진 건물의 복원, 죽었던 강을 다시 살릴 때의 회복,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였을 때의 회복, 신앙생활의 회복 등 수많은 사건과 상황에 적용되는 회복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복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생명을 찾았을 때, 하나님과의 단절이 다시 열리게 되었을 때, 또 광야 같은 땅이 회복되었을 때 등 많은 것들로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오직 예배를 통해서만 회복되기 때문에 “예배는 곧 회복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뿐 만이 아닙니다.

예배에는 죽은 자를 회복시키는 두 가지의 본질이 있는데 그 하나는 기도이며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우리가 죽은 자가 된 것은 호흡이 끊어졌기 때문이며, 양식을 먹지 못하면 살아 있다고는 하나 그는 죽은 자인 것입니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기도와 말씀으로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복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자는 회복 될 수밖에 없고 또한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3-24)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신령과 진정은 신령과 진리라는 것이며, 그것은 기도와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 곧 새롭게 된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보면 예배자가 새롭게 되지 않고는 예배에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이며 예배를 성공하는 사람이 되려면 기도와 말씀으로 훈련되어야 한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사람은 아벨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곧 회복입니다. 회복된 사람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나라를 보기도 합니다.

잃었던 것을 다 찾으며, 상실했던 복을 회복하는 놀라운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회복의 신학에서 구원론, 성령론, 교회론을 중점적으로 연구하시는 이유를 알 것 같은데요. 여기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회복의 신학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성경적인 근거를 통해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그 중 구원론은 생명기업으로 목회학적으로 보면 “생명이 없는 곳에서 생명이 있는 곳으로”라고 말하며 방향과 목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성령론은 교제기업을 뜻하는 것으로 “성령이 없는 곳에서 성령이 있는 곳으로”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교회론은 토지기업을 말합니다. 이는 “교회가 없는 곳에서 교회가 있는 곳으로”라고 표현되며 목회학적인 절기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입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세 가지의 복인데 그것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해 절기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절기를 만들어 주신 목적은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3대 절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유월절 (Passover)인데 히브리어 “페사흐”로 “건너뛰다, 뛰어넘다”라는 뜻을 가진 “파사흐”에서 유래하였습니다(출12:13,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면서 애굽에 내리신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은 사람부터 짐승까지 처음 난 것을 치신 장자 재앙이었습니다(출12:29-30, 13:15). 이 때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심으로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그냥 넘어 가게 하신 것입니다.

출12: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그렇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로 유대 민족에게 있어 최대의 축제일입니다. 이 날은 구원받은 날이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날이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구원 받은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가(출 12:13-14, 21-23, 27)된 것입니다.

어린 양은 1월 10일에 준비했다가(출12:3) 1월 14일 해 질 때에 잡으라고 말씀하셨는데(출12:6) 이날 제물로 사용되는 어린 양은 1년 된 수컷으로(출12:5) 1월 14일까지 보관하면서 제물로서 합당한지의 여부를 시험하도록 합니다.


만일 이때 준비한 양이 흠이 있거나, 제물로서 합당하지 못한 다른 요소들이 발견되면 유월절 어린양으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유월절 양을 1월 14일 해 질 때에 잡으라고 하셨는데(출 12:6) 해 질 때는 오후 3시부터 6시 사이를 가리키며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요 1:29, 고전 5:7) 사람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때가 바로 유월절 양을 잡기 시작하는 오후 3시였습니다(마 27:46-50).


한편 유월절은 니산월(태양력 3-4월) 14일에 지켜졌는데 특별히 성경에서는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통해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멸하신 유월절, 니산월(1월) 14일 밤(유대 달력으로 15일이 시작되는 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월 14일 저녁에 양을 잡아 피와 고기를 분리시켰는데 고기는 고기대로 피는 피대로 사용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또한 양의 죽는 모습을 통하여 죽음의 고통과 대가를 크게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양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피는 양을 먹는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12:7, 22) 이 피를 바름으로 양을 잡은 집을 표시하고 양의 피 냄새를 풍겨 양의 희생을 느끼게 했던 것입니다. 어린 양의 고기는 그날 밤에 불에 구워 먹되 무교병, 쓴 나물과 함께 먹었습니다(출12:8-9).


여기서 몇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출12:9-11, 46).

날로 먹어서는 안 됩니다.

물에 삶아 먹어도 안 됩니다.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도 안 되며, 남은 것은 불에 태웁니다.

뼈를 꺾어서도 안 됩니다.

머리 뿐 아니라 정강이와 내장도 남김없이 다 구워 먹게 되어 있습니다.

먹을 때의 자세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습니다.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은 그 밤에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시기 때문입니다(출12:22-23).

이처럼 성경 속의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모형이자 예표이며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유월절과 어린 양 예수와의 관계성을 모르는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의 어린양은 온전하고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유월절 어린양은 먼저 가족대로 취해야 합니다.(출12:3) 어린양의 고기는 각 사람이 아닌 각 집이요, 가정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눅19:9),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이 어린 양 예수님으로 인하여 유월절 곧 십자가의 사건은 물론 창세기에서 보여준 가죽 옷의 사건도 함께 보여주는 생명기업의 회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어린양의 고기는 우리의 생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출12:8-10).

예수님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다”(요6:55),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속을 위해 어린양의 피와 생명을 공급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한해의 첫 달로 삼은 아빕월에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를 높이고 예배하는 축제의 절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의 7대 절기가 3대 절기로 줄어 들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을 좀 듣고 대화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레위기 23장을 보면, 7개의 절기가 나옵니다. 유월절(4-5), 무교절(6-8), 초실절(9-14), 칠칠절(15-22), 나팔절(23-25), 속죄일(26-32), 초막절(33-44)까지 이렇게 일곱 개의 절기가 있는데 이 절기들은 사람의 절기가 아니라 여호와의 절기입니다.


이러한 절기는 하나님이 사람을 언제 어떻게 구원하시려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시간표입니다. 또 신약은 구약에 포함되어 있고, 구약은 신약에 의해 설명됩니다. 모든 절기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장래 일의 그림자이고 모형이자 예표가 되는데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첫 번째 절기는 유대력으로 1월 14일로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양을 잡아 피를 뿌렸는데 그 피를 볼 때 죽음의 사자가 지나갔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날이요,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해방을 맞이한 날”입니다.


두 번째 절기는 무교절(The feast of Unleavened Bread)인데 출12:15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고 하셨습니다.

무교병(無酵餠)은 히브리어 “맛죠아”, 헬라어 “아쥐모스”로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넓적하고 얇은 빵입니다(창19:3). 무교병은(출12:15) 주로 긴급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 먹었으며(출12:33-34,39, 삼상28:24-25) “고난의 떡”으로도 불렸습니다(신16:3).

예수님은 아무 흠도 없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내어주셨고 생명의 떡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절기가 그렇듯 무교절은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했으며, 이는 죄 사함은 우리의 노력이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예표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 초실절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수확한 첫 열매를 안식일 이튿날 드리는 절기입니다. 초실절에는 곡물을 제물로 드리게 되는데 첫 열매를 단으로 묶어 성소에 가져와서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열납 되도록 흔들어 드리며 행하는 절기였습니다.

이 초실절 절기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되었습니다(고전15:20). 예수님은 유월절(1월 14일 금요일)에 죽으셨고 무교절(15일 토요일)에 무덤 속에 계셨고 초실절에(주일) 부활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봄에 속한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네 번째, 나팔절은 유대력으로 7월 1일인데 절기 사이가 가장 긴 4달입니다.

이 4달의 기간을 농사기간이라 부르며 나팔절의 특징은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나팔을 불면 백성들은 다 같이 모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된다는 의미가 됩니다(마24:30-31).

재림 때 성도들은 구름 속으로 들림을 받아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살전:16,17). 마지막 나팔 때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계10:7, 11:15).


다섯 번째, 속죄일은 유대력으로 7월 10일로 대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덮는 날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인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하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고 있기에 민족적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속죄일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십니다(슥12:10-12, 13:1). 그래서 속죄일이 되면 성령께서 임하셔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방인의 때가 차면 유대인에게 회개의 영이 임하여 민족 공동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1:25-27).


여섯 번째는 초막절인데 유대력으로 7월 15일로 추수를 거두고 기뻐하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완성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추수를 마친 후에 영원한 새 예루살렘에서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절기는 하나님이 제정하시고 이미 이루셨고 현재도 이루고 계시고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는 초막을 짓고 살지만 언젠가는 초막, 장막을 벗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일곱 번째 절기는 칠칠절입니다. 칠칠절은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흔들어 드린(초실절) 날부터 7번째 안식일의 이튿날 곧 50일째 되는 날을 말하는데 이 칠칠절을 오순절, 맥추절이라 부릅니다(출23:14-17, 34:18-23, 신16:1-16).

이날을 하나의 추수감사제로 기념하고 회당에서 룻기를 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 씨를 뿌리며 농사를 지어 그 소산을 거두었을 때 하늘에서 내리던 만나가 멈추었고 그 해 추수한 열매로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들과 교제하며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7대 절기를 3대 절기라고 부르는 것은 그 의미적 공통점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앞서 유월절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여주셨는데 마지막 두 가지 칠칠절과 초막절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칠칠절(Pentecost)은 맥추절 또는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일곱으로 된 일곱” 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가진 칠칠절은 유월절을 지내고 첫 안식일 후 50일째 되는 날에 첫 열매를 봉헌하는 절기로 봄에 수확할 수 있도록 곡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지키는 절기를 말합니다(레23장, 신16장).

칠칠절은 유대력으로 3월(태양력으로는 5, 6월경)에 지키는데 보리의 첫 열매를 바치므로 맥추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에 이 절기에 과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신약 교회에서는 이 절기에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있습니다(행2장). 그러므로 칠칠절을 성령강림절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120문도가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기다리다가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임하면서 성령 충만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들은 이제 주님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며 하나 되어 주님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다니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복음을 위해서라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담대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칠칠절은 복음이 땅 끝까지 확산되어서 퍼져나감을 보여줍니다(행1:8).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며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다 성령이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칠칠절, 오순절은 속죄일과 더불어 초대교회로 성취되었습니다.

성령의 강림과 충만은 모두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놀라운 교제의 회복이 이루어지게 되어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적 공동체였다면 이제부터는 민족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나라와 민족과 족속이 주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초막절(수장절, 장막절Tabernacle)은 유월절, 칠칠절과 함께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지켜야 하는 절기였습니다. 초막절이 되면 온 민족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간단한 나뭇가지를 주워 광야에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을 그곳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먹고 자는 절기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시며 사랑하셨는가를 서로 나누며 보내는 절기였습니다.


초막절의 의미로는 첫째로 광야에서 고생한 과거를 “기억하려는 것”(remembrance)이었습니다. 광야의 어려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큰 사랑으로 임하였는지를 기억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신8:4).


둘째로 이 어려운 고난의 기억은 이스라엘을 현재에 대한 “감사”(thanksgiving)로 이끌어갑니다. 초막절은 농작물의 수확으로 인한 풍성한 감사의 절기였습니다. 초막절은 거룩한 달력으로는 7월 15일부터 22일에 이르는 8일 동안의 절기로서 감사가 충만한 절기였습니다. 지금의 달력으로는 10월에 해당하는 절기로 추수의 기쁨과 감사가 있는 절기였습니다. 이때는 밀 추수를 마친 후 포도, 올리브, 종려 등 여름 과실의 수확과 저장을 마치고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를 종결하는 때였기에 수장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예수님의 재림으로 구원의 역사가 “완성”(culmination)에 이르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에서 시작된 영적인 해방이 오순절을 거쳐서 첫 열매로 나타나고 초막절에 이르러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은 3대 절기 중에서 가장 마지막 절기로 초막은 이 세상의 집에서 사는 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처소를 바라는 종말과 재림의 절기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도서”를 읽으면서 세상의 헛되고 헛됨을 미리 맛보는 절기였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초막절의 주인으로서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시는 재림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 땅의 회복을 말하며 그것은 주님 나라의 완성을 말합니다.


초막절은 이처럼 과거의 광야생활을 돌아봄으로 감사하고 현재의 추수에 대한 감사와 미래의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뜻 깊은 감사의 절기입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의 성도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을 바라보며(애3:22-23) 감사하고,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시37:9) 곧 이 땅의 회복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하는 절기입니다.


*여호와께서 정한 절기가 이처럼 회복을 위한 제사 곧 예배로 연결되고 그 절기가 회복의 신학에 중요한 연구 과제라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렇다면 절기를 신학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유월절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이 해방되는 날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절기입니다. 여기서 애굽을 세상이라고 하며 그들이 광야로 해방된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천국으로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애굽이 세상의 모형이라면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씀처럼 생명을 구원받은 것을 의미하고 생명기업의 회복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래서 유월 절기를 만들어주신 하나님은 너의 집과 후손까지 반드시 지킬 것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구원론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칠칠절이 신약에서는 오순절로 성취되었다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열매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구약적 의미로는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초실과 관련되어 있듯이 성령의 강림은 하나님의 나라의 첫 열매로 맺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적으로 주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확증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의 첫 열매였다면 그를 따르고 사랑하는 자들이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이로서 주님과의 교제기업이 회복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저들이 이제는 교통할 수 있도록 회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칠칠절은 성령론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초막절은 광야생활을 기억하며 광야에서 우리조상들이 초막(장막)을 짓고 하나님을 섬겼던 것처럼 그것을 기억하고 지키는 절기입니다. 레23:43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초막절을 지키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후 광야 생활 가운데 초막에 거주하게 하신 것을 이스라엘 대대로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풍성한 결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광야 40년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자손 대대로 기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신16:15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풍성한 수확을 감사하며 즐거워하도록 초막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 땅의 삶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언제, 어느 때든지 장막을 걷고 또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떠나야 하는 나그네 삶임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구원의 역사가 “완성”(culmination)에 이르는 절기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초막절의 주인으로서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시는 재림의 주님이십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의 성도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을 바라보며(애3:22-23) 감사하고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시 37:9)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은 땅의 회복과 교회의 본질에 관한 상징임을 보여주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은 토지기업의 회복일 뿐 아니라 광야교회에 대한 신학적 교회론을 연구할 수 있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절기를 대대로 지키라고 명하셨고 지금도 이 절기는 유대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절기처럼 지키고 있음을 봅니다.


*초막절이 토지기업의 회복, 곧 신학적으로는 교회론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우선 양해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우선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내용이 너무나 방대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그것을 다 성명할 수는 없다는 것과 또 하나는 교회라는 단어와 성전이라는 단어의 사전적의미를 따라 살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과연 신약적 교회가 구약적 성전을 대신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느냐는 관점과 또 구약의 성전의 개념이 신약의 교회의 개념으로 이해하여도 되는냐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먼저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가지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성경적 지식과 신학적인 연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에 약간에 회복의 신학적 입장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에서 교회론은 주로 교회의 존재에 관한 부분과 은혜의 방편에 관한 부분 이렇게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전통적인 조직신학에서 교회론은 상당히 발전되지 못한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 당시에 로마 카톨릭과 가장 많은 충돌을 보였던 부분이기 때문에 주로 카톨릭에 대한 변증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적인 이해보다 성경적인 것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치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제단과 제사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만났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이는 주님과의 단절된 교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며 이것으로 살아있다는 증거를 얻었고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성막은 광야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찾아주시는 단으로 발전되었고 이어 예루살렘 성전으로 되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개인에서 족속으로 또 민족이라는 공동체로 발전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고, 또 단을 쌓았던 것이 성막이라는 제단으로, 또 성전이라는 지정된 장소로 발전하였으며 이후 성전이 허물어졌을 때는 회당이라는 것으로 발전하였다가 다시 헤롯성전으로 이어졌으며, 그것을 허물고 삼일 만에 다시 세우신 예수님의 몸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공동체와 장소와 건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된 몸으로 정리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동물의 제사에서 시작된 아벨의 제사에서 택함을 입은 자의 제사가 되었고, 민족의 제사가 되었으며, 백성의 공동체가 드려지는 제사가 되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내어준 어린양의 죽음으로 인해 동물의 제사는 폐하여지고 예수님의 공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드려지는 예배로 발전되었습니다.

동물로 드리는 제사에서 흠 없는 동물, 정성을 다하여 준비한 제물을 드렸던 그 중심과 자세가 하나 되어 드려졌던 제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벽을 허물고 화목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드려지는 예배로 발전하였습니다.

형체가 있는 제사에서 형체가 없는 영적인 예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제물과 제단 그리고 제사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어린 양 그리고 예수님이라는 지정된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면”으로 되었고 제사는 형식과 예식을 넘어 “신령과 진정, 신령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로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것을 버리고 취하는 문제가 아니라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예배와 교회 그리고 예물을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삼일 만에 세우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부활의 몸, 예수님 자신의 몸을 제물처럼 드림으로 동물의 제사를 완성시킨 인자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 예배자, 제사자로서의 그 중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철학적인 입장에서는 형이하학에서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성경적으로는 율법적인 것이 복음적인 것으로, 육적인 것이 영적인 것으로 발전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론이나 예배론이나 신학적으로 가시적인가 아니면 비가시적인가 하는 것을 나누되 두 가지를 완성하신 예수님을 중심하는 것이 성경적인 뜻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완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제물이나 제사나 제단의 완성이나 예수님으로 완성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예배는 한 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전체를 조망해야 할 만큼 방대합니다.

그중에 구약에 나타난 가시적인 교회의 모습은 광야에 장막을 짓고 초막을 짓고 살던 때를 기억하며 영원한 도성, 영원한 나라 천국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며 초막에서 그 절기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 땅의 회복이 가나안이라고 한다면 영적인 의미로 이 땅의 완전한 회복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광야에 초막으로 지은 집은 광야교회이며 광야생활이 교회생활이라는 것이고 여기서 소망하는 것은 이 땅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속히 들어가는 것이며 그것은 장막을 벗고 천국에 속히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신학적으로 절기를 통해 교회론을 연구할 때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칠칠절을 교회의 탄생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성령강림이 곧 교회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모여 성령 충만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들은 모이기에 힘쓰는 공동체가 되어 교회의 시작을 에클레시아의 관점에서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편협한 관점입니다. 왜냐하면 완성된 관점에서 교회론이나 예배론, 성령론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가 하나가 될 때 비로소 교회론이 완성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죠라는 조직신학자는 무교회를 주장하는 무교회주의자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무교회주의"는 "교회주의"(조직화된 제도로서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견해)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신앙이나 신학사상을 말하지만 그는 가시적인 교회에 대한 거부감을 강조하였고, 또한 종교개혁을 이루는 과정에서 카톨릭교회의 성전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진정한 하늘도성의 교회는 비가시적교회임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으로 돌아가서 보거나 많은 신학자들이 연구한 것을 참고해 보면 가시적 교회는 지상에서의 신앙생활에서 비가시적교회로 나가야 하는 방향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가시적 교회의 필요성이라고 할까요?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가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갑니다. 이 내시는 에디오피아 국왕인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고관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빌립을 내시에게 보내서 세례를 주고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가 돌아가 복음을 전함으로 인해 에디오피아가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는 유일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초막절을 교회론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충분한 성경적 근거와 더불어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동안 연구한 결과물이도 합니다.

광야교회, 광야생활이라는 모형의 실체는 교회와 교회생활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성경에 근거한 생각입니다. 예컨대 광야교회는 언젠가 초막을 버리고 장막을 거두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 가시적인 것은 한시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순간 그 초막이나 장막은 기념할 뿐이지 실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광야교회는 우리 공동체의 중심이며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며 또한 그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 광야 같은 세상에 살며 가시적 교회 생활 속에서도 비가시적 교회 생활을 향하여 방향을 잡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시적 교회나 비가시적 교회를 나누면서도 두 가지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교회가 바로 세워졌을 때 이 땅의 토지의 회복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구원 그리고 성령, 교회는 핵심 중의 핵심으로 우리들이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데 교회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라는 교회의 본질은 성령 안에서 모일 때이며 주님 안에 있을 때입니다.

따라서 초막절과 교회론, 그리고 토지기업의 회복은 함께 연구하고 있는 회복의 신학의 한 부분입니다.


*초막절은 광야교회 즉 이 땅의 회복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광야교회를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공동체와 초막절에 대해 반드시 이해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광야교회에 관해 좀 더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특징 중에 하나는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길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속도 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방향이 틀린데 속도를 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길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방향을 잘 잡아야 진리에 이르고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모세 5경 가운데 무려 4권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광야로,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라고 하는 등식은 우리의 갈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애굽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땅 가나안으로 가는 과정 중에 광야를 통과하게 됩니다. 이 광야의 과정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택하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만 하지 않았어도 광야의 생활을 아주 짧게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죄인 된 악함으로 인하여 불순종과 좌절과 낙담, 그리고 원망과 불평과 대적으로 무려 40년이나 광야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 마땅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과정을 우리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어 주신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예컨대 이러한 과정을 광야훈련이라고 합니다. 이 훈련 과정이 없었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겠는가 하는 차원이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죽을 만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광야에서 저들에게 혹독한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교회라고 합니다.

행7:37-38에 “광야교회”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스데반이 “광야교회”라는 말을 합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광야교회”로 보고 있었습니다. 광야생활을 신앙생활로 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광야 40년의 생활을 끝내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간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나와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상징되는 천국에 갑니다.

예수를 믿은 후부터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의 삶이 광야생활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갔듯이, 우리도 광야와 같은 세상을 지나 천국에 갑니다. 우리는 지금 광야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 광야교회의 성도들입니다.

광야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옛날 애굽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소수민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선택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에서는 “Calling out”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출애굽해서 광야교회를 세웠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의 성도들이 된 것입니다.


신명기 7장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여러 신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택하고 여러 종교 가운데서 기독교를 선택해서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레미야 1장을 보면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에 선택하셨습니다. 바울은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면 예레미야도 바울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광야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했던 네게브 사막은 지금도 끝이 없는 사막입니다. 물도 없고 농사 지을 땅도 없고 목초지도 없습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낮에는 사막의 지온이 너무 뜨거워 맨발로 다니면 발이 타버릴 정도입니다.


낮에는 더위로, 밤에는 추위로 죽을 수 있는 곳이 사막입니다. 시편 121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낮의 해가 너를 상치 못하게 하시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게 지키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시원하게 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따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자연적인 현상으로 인해 사막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지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이것이 광야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을 받았다는 것은 지금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국토는 95%가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자라지 못하는 산악과 사막지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해야만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한 것입니다.


욥기 8장에는 “세상을 의지하는 자는 거미줄을 잡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거미줄을 의지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행진할 때에나 전쟁에 나갈 때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앞에 세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한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하는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광야교회의 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전진하는 것이 광야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힘이 들어도 가야하고, 더워도, 추워도 잠자리가 불편해도 참고 가야 합니다. 참지 못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말씀에 보면 르우벤과 갓 지파, 므낫세 반지파가 요단 동편 땅이 너무 좋고 탐이 나서 목적지인 가나안을 포기하고 정착했다가 후일에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도 이 세상은 정착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길에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들어도 참아야 하는 광야교회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어려움이 있고 기도와 봉사를 많이 해도 시험과 환난을 당할 수 있고 마음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참아야 소망하는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 7절에 “여호와 앞에서 불평하지 말고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그러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소유가 많아지고 삶의 지경이 넓어진다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초막절을 통해서 교회론을 강조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유럽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이나 독일, 영국 같은 나라들을 보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교회 곧 예배당은 빈자리뿐이며 이곳을 빌려서 무슬림들이나 힌두교가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복음이 왕성했던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유럽은 크리스챤이 2% 미만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텅 비게 된 이유 중의 하나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신앙이 너무나 개체화 되었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공동체적이 되려고 하면 구심점이 있어야 하는데 그 구심점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모두들 눈에 보이는 예배당에도 모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과 더불어 모여야 합니다. 그런데 모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이 보이지 않습니다. 120명의 문도가 없는데 예수님은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신앙 고백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 안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보이는 현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그래서 유럽의 교회가 무너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물질계에 살고 있음에도 물질계에서 보이고 만져지는 가시적인 것을 너무나 무시하고 비가시적 교회만을 주장함으로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하지만 비가시적 교회로 가야 한다고 하였더라면 그렇지 않을텐데 너무나 한쪽으로만 편중되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함께 한다”는 말씀을 나무토막처럼 잘라서 그 부분만 강조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와서 중국은 선교사들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아서 많은 분들이 선교를 접고 중국을 떠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에는 지하교회와 국가교회를 포함해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현재 3억 5천 정도나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실로 놀라운 부흥이입니다. 금세기 최고의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중국의 인구를 15억이라고 하면 그중 30%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7일을 걸어와 부흥회에 참석 한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처럼 예배당으로 모이는 것을 본 중국의 지도자는 겁을 먹었을 것입니다. 체제의 붕괴는 시간문제이며 정치적으로 두렵다고 생각하였기에 비자 발급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흥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구심점이 교회, 바로 예배당입니다. 가시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과정일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다음 과정은 가나안 땅, 천국입니다.

장막을 벗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막은 이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복의 신학에서 교회론의 연구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회복의 신학은 저로 하여금 제게 있는 신앙의 조각들과 성경의 조각들이 마치 퍼즐조각이 맞춰지는 것처럼 많은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분산되어 산제되어 있는 성경지식들을 하나로 만드는 역할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신학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신학은 실용적이지 못하고 실제적이지도 못하며 낭비적이라는 냉소를 퍼붓습니다. 또 신학과 신앙을 아주 다른 것으로 여기고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하며 인간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실제적인 해답을 주지 못하는 것이 신학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또 일부에서는 극단의 체험을 내세우면서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경향이 있는 신학을 경시하고 무시하면서 기도에만 매달리고 어떤 분들은 성경만 읽으면 된다면서 “신학 무용론”을 외치기도 합니다. 이는 매우 단편적이요, 좁은 시야에 갇혀 있는 무지함과 경솔함이 불러오는 폐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배우고 이해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서 이 세상과 국가와 교회와 가정을 섬기는 균형 잡힌 성도로서 나아갈 지혜를 갖추게 해준다고 봅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이론 체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먼저 신학은 하나의 학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학문이란 어떤 연구의 대상을 가지고 있고 그 연구 대상을 독특한 방법론을 가지고 연구하고 접근하는 방식을 일컫습니다.

그러면 신학의 연구대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신학의 일차적인 대상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 이외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이 아니기에 오직 하나님만이 신학의 연구대상입니다.


그렇다면 신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입니까?

신학의 대상은 무엇보다 살아 계신 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대부분의 학문은 그 대상에 대한 정밀한 관찰로부터 시작됩니다. 신학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관찰의 방식은 상당히 판이합니다. 보통은 대상을 고정시켜 놓은 뒤에 그 대상을 주의 깊게 (필요하다면 현미경이나 망원경의 도움을 빌어가면서) 관찰하지만 신학에서 연구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그 대상을 연구함에 있어서 독특한 방법론을 취해야 함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theology)은 너무나 중요한 학문이며 교회를 위해 일하고자하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딤후2:3-4)가 되려는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일생동안 열심히 닦아야 할 훈련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신학을 어원적으로 보면 라틴어 “theologia”에서 왔는데 이 말은 헬라어 “θεολογειον”의 번역으로 하나님(theos)에 대해서 진술하는 것, 혹은 말하는 것, 혹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하나님이 주어로서(subject)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원래 학문이란(logos) 논리적인 진술, 설명, 해설인데 이미 플라톤의 철학에서 정립되었던 학문 방법론이었습니다.

따라서 헬라어를 사용하던 고전적인 시대에 있어서 규정된 전통적인 신학의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논리적인 진술,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설명(speaking of or about God)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신학을 종교학의 분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9세기 이전까지 종교라는 말은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라고 생각되었지만 불행하게도 지금은 더 이상 종교라는 말을 성경의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신학”은 매번 새롭게 채색되고 풀이 되어졌다고 말합니다. 반틸 박사 역시 당대의 신학변화에 깊이 주목하면서 바르트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을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이단”이라고 비판하였고, 에드워드 카르넬 (Edward J. Carnell)의 신복음주의를 역사적 개신교의 신앙으로 부정하였으며, 또한 동시대 화란의 신학자 벌카워 (G. C. Berkouwer)의 조직신학 전체에서 인간중심의 성경관이 드러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반틸 박사는 조직신학의 개념을 정의하면서 “하나님에 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대한 질서 있는 진술을 제공하려고 힘쓰는 학문이다”(Cornelius Van Til,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경은 사람의 구원과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으므로 신학은 인간의 구원과 회복에 관한 설명을 기본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신학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말하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신학도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신학은 여러 과목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리겐은 첫 번째 원리(first principle)를 추구했고, 어거스틴은 Enchiridion(핸드북이란 뜻)에서 wisdom를 추구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Summa에서 체계적인 신학의 전체 구성과 종합, 즉 신학대전을 추구했습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주로 해석에 치중하여 견해서, 또는 의견서(sententiae)를 내 놓았으며, 피터 롬바르드의 강해서(Exposition)는 종교개혁자들의 저술이 나오기까지 신학의 유일무이한 교재였습니다.


루터파 종교개혁자 필립 멜랑톤은 최초의 조직신학이라고 일컬어지는 통합된 주제별 연구서“신학총론”(Loci Communes)을 발간하였습니다. 1525년 간행된 이 책은 “서로 연관된 주제”(topics of shared concern)를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 후에 요한 칼빈은 기독교 교훈집의 형태로 성경의 기초교리를 간략하게 진술하면서 개신교회의 신앙을 변호한 “기독교강요” (Institutio)를 집대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7세기 개신교 신학자들은 신학의 근본 뼈대를 추구하면서 교회가 믿고 고백하고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교리(doctrine)중심의 명확한 체계를 시도했습니다. 이로서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이 좀 더 세분화되었고 다양한 부제들을 중심으로 신학이 발전되었던 것입니다.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근대 구미, 미국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계몽주의이후로 영향을 입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면서 분석적인 방법을 통해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라는 학문을 구성하였으며 신학은 학문적 노력과 실용성 때문에 점차 다음의 내용으로 세분화되고 정립되어 왔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거룩한 신학의 원리”라는 책에서 다음으로 신학의 분과들을 나눌 수 있다고 정의하였습니다.


첫째는 성경신학 입니다. 여기서는 신구약의 본문과 그 배경, 문맥, 역사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고 말합니다. 이에 해당하는 학과목들은 신약개론, 총론, 구약개론, 총론, 신약신학, 구약신학, 각 성경 권별 연구입니다.

둘째는 조직신학입니다. 이는 가장 중요한 신학의 분야로 주제를 중심하여 체계화 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신학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성령론), 교회론, 종말론, 변증학, 종교철학, 현대신학 등이 있습니다.

셋째 분야는 역사신학입니다. 신약 성경이 완결된 뒤,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와 성도들의 역사를 다룹니다. 즉 교회사, 초대, 중세, 종교개혁, 근세, 현대, 한국 교회사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네 번째 분야는 실천신학입니다. 목회 현장을 위한 구체적인 적용이 연구대상입니다. 목회학, 예배학, 전도학, 설교학, 상담학, 기독교교육학 등이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선교신학이 새로운 독립분야로 인식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실천신학의 한 분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경신학은 구약과 신약성경의 내용들, 성경의 각 절에 대한 주해에 근거하여 이를 각기 다른 계시의 시대를 따라서 추적해 들어가는데 이것은 서술적 접근방법(Krister Stendahl)과 규범적인 접근법(Johann Philip Gabler)으로 나누어집니다.

또한 역사신학은 신약 성경 이후로 여러 세기의 교회 역사를 통해서 발전되어온 신학에 대한 연구입니다. 동시적인 접근(the synchronic approach)과 통시적 접근(the diachronic approach)으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은 매우 광범위한 신학의 내용을 포괄합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의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제시해 보려는 학문이며(as a whole, as a unified system) 따라서 4분과의 주된 분야가 있다하더라도 신학의 통합된 연구는 조직신학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학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신학의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의 모든 것은 당시 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을 떠날 수 없으며 성경적 교훈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어떤 신학자들과 주제들이 있었는지를 분석함으로서 신학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에 교리사의 도움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시대에 직면한 신학의 주요 쟁점은 당시 가장 위험한 신학경향을 보인 영지주의 (Gnosticism)와의 논쟁과 싸움에서 드러났습니다.

초대교회의 신학은 이들을 분리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때의 신학은 체계화된 신학대학이나 혹은 교단을 배경으로 형성된 신학교들이나, 도서관, 각종 단체들이 세운 연구소에서 전문인들이 집중적으로 연구에만 매달려 신학의 체계를 세우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우 제한된 성경 사본을 가지고 이교도가 지배하는 제국에 살면서 전도하고 선교하는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처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학은 절실하게 그 필요성이 대두된 문제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초대 교회가 이교도의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거하고 살아남는가의 문제를 숙의하고 논의했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에 자주 논의된 주제는 삼위일체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인간의 죄,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논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325년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시작해서 여섯 차례의 중요한 종교회의가 소집되었고 여기서 신학의 주제들이 토론되었으며 정립되었습니다.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아다나시우스, 어거스틴 등이 손꼽히는 신학자들이자 주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중세시대는 신학의 절정기라고 불리지만 교회가 세속적으로 권력을 갖게 됨으로써 일반 학문은 암흑기이자, 쇠퇴기였습니다.

이 시대의 주요 신학자들이 깊이 심취한 신학들은 모두 다 헬라사상의 영향아래 있었고 특히 스콜라주의 신학이 형성되었는데 이성과 신앙이 혼합된 신학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이 헬라철학의 삼단논법과 논리를 따라서 분별되었고 그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혼합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e Theoligiae)에는 이성과 신앙, 자연과 은총이라는 이원론이 근본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성경과 전통이 서로 양립되었고 믿음과 인간의 행위가 서로 협동해야만 했습니다.


종교개혁시대(1500-1650)에 들어서서 이런 원리와 개혁주의 원리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는데 오직 성경만이(Sola Scriptura) 최고의 권위로 강조되면서 교황의 권위와 전통의 권위를 대치시켰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론에 관해 깊은 연구를 하게 되면서 종교개혁자들은 sola fide(오직 믿음으로만)와 sola gratia(오직 은혜로만)를 강조하였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 믿음을 통해서 그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요, 신앙과 행위의 복합적 산물이 아니라고 주장되었습니다.

루터파와 츠빙글리, 칼빈주의가 모두 이 근본교리에 동의했고, 성만찬에 대한 해석과 기독론에서 서로 갈라짐으로 인해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1549년 스위스 동맹으로 츠빙글리파는 칼빈주의에 가담함으로서 결국 루터파와 칼빈주의자들로 대별되었고 이때부터 같은 개혁주의라도 루터파와 재세례파에 대한 세밀한 주의와 분별이 요청되었고, 후기 개혁주의 시대에는 자연스럽게 정통신학의 형성을 둘러싼 논쟁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신학의 제4세대는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과 계몽주의의 영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과 현대신학의 등장이었습니다.

18세기 초엽, 전 유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신학이 지배하던 로마 카톨릭조차도 데카르트의 영향을 입은 부세트(Bossuet)에 의해 시들해지고 말았습니다.

독일에서는 라이프니츠와 볼프가 위세를 떨치면서 신학의 내용이 매우 달라졌으며 정통루터파의 시대가 지나가고 경건주의와 합리주의가 함께 병행하면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합리주의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볼프의 철학에 근거해서 판명성과 수학적 확실성을 제일원리로 삼고자 했습니다. 성경을 고대 셈족의 종교경험을 기록한 것으로 취급하였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진화론의 영향으로 참된 종교와 거짓종교의 구분법은 고등과 열등으로 해석되었고 따라서 이런 영향을 깊이 받은 교회들은 분열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화란과 미국을 제외하고는 개혁신학이 교회내의 신학으로 위축되어갔습니다.


차디찬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순수이성이 잃어버린 것을 실천이성을 통해서 회복하려했던 임마누엘 칸트가 나왔으나 이성에 대한 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순수이성의 한계 내에 있는 종교”로 취급되었습니다.

계몽주의를 거부한 또 다른 반응은 감정을 중시하는 F. Schleiermacher에 의해서 제기되었습니다. 주관주의에 입각한 그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문호 여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인간의 자율주의에서 모든 신학의 출발점을 정한 이들은 이성을 제한한다는 구실로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인간의 종교경험을 최고 기준으로 의존하였으며 루터파 신학자 A. Ritschl은 초대 교부들의 신학과 종교개혁자들의 고백을 거부하고 도덕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신학의 제5세대의 흐름은 제1차 대전의 패망과 이로 인한 서구유럽의 낭만주의가 사라진 시대에 나온 신정통주의에 의해서 새롭게 대두되었습니다.

칼바르트는 개혁신학으로 복귀하는 듯 했으나 결코 종래의 개혁신학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지 않고 계시의 증거로만 인정하려 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 계시가 된다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불트만의 비신화화 방법론과 고등비평 등은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이 깊이 반영된 혼잡한 신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60년대 이후로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에큐메니즘 운동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추구하는 종교박람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신신학(death of God theology), 흑인신학, 1970년대에는 여성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이 위세를 떨쳤고 1980년대에는 포스트모더니즘, 종교다원주의, 과정신학 등이 새롭게 시도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이나 교파, 혹은 각 신학사조들에게서 가장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신학의 방법론입니다. 19세기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의 챨스 핫지(Charles Hodge)시대까지만 해도 신학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그 중 하나는 선험적 방법론(a priori), 다른 하나는 후험적 방법론(a posteriori)으로 말합니다.

이를 다시 한 번 세분화 하여 사변적 방법(the speculative method)과 신비적 방법 (the mystical method), 연역적 방법 (the inductive method)으로 나눕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 간에 서로 개념이 달라짐으로 인하여 혼란이 오게 되었습니다.

영국 성공회 신학자인 피터 툰(Peter Toon)박사는 피터 버거(Peter Berger)의 신학 유형론을 근거로 해서 신학 방법론을 다음의 네 가지 유형으로 대별합니다. 첫째는 연역적인 접근방법(the Deductive approach)입니다. Peter Berger는 “현대 세속적인 표면 중에서 종교적인 전통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 즉 현대사회 이전의 시대에 기준으로 제시된 것들을 종교적인 확신으로 재생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한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가라사대”, “교회가 가르친다”, “전통이 선포한다”는 식의 표현을 쓰는 것은 모두다 연역적인 형태의 신학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권위의 최고봉으로 놓는다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Athanasian Creed와 개신교의 여러 신앙고백을 근거로 해서 삼위일체 교리에 가장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좀 더 경험론적인 유형의 자연신학을 이용하며 순수 이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런 유형의 대표자로는 Karl Barth의 "Church Dogmatics" 등 신정통주의, 형태는 다르지만 희랍 동방 정교회 (Greek, Russian, Antiochene)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도 여기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회와 침례교회의 신학방법론이자 근래에 초교파주의를 표방하는 복음주의 진영의 기독교 대학에서 주로 교재로 사용하는 Charles Ryrie의 Basic Theology (1986)와 Millard J. Erickson의 Christian Theology(1986), Carl F. H. Henry, God, Revelation and Authority (1979-83)도 여기에 속합니다.


두 번째 방법론은 귀납적인 접근방법(the Inductive approach)입니다. 아래로부터의 진리를 체계화하는 경험적인 방법입니다. 인간의 경험을 종교적인 해석과 명증의 출발점으로서 사람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현대신학의 거의 대부분이 이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Schleiermacher는 종교적 체험, 신앙의 경험을 중시했는데 문제는 이것이 “인간의 자의식 (human self-consciousness)이상 아무것도 아니다”고 하는 점입니다. 모든 판단의 중심에 인간의 종교적 경험이 우선으로 제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역사를 연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나 교회의 기원에 대해서도 그리스 로마 문화를 먼저 설명해야만 이해가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은 변화하는 역사와 상황 안에서 종교적인 경험의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먼저 역사와 상황을 점검합니다. 이들의 시조인 Schleiermacher의 방법론을 기조로 하여 점차 “종교사”(history of religion)(Religionsgeschichte)의 방법으로 발전되었고 이는 후에 종교현상학(Edmund Hesserl 1859-1938, Rudolf Otto)이라는 비교종교학으로 번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유주의 종교사학파의 결정체가 Adolf Harnack, "What is Christianity"(1901)이며 20세기 거의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채택해온 방법론이었습니다.


이런 방법론은 여성신학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영국 성공회의 설교에서 맹위를 떨쳐 급기야 1994년 3월 여성의 안수를 허용하기까지 각 시대의 문화와 종교적 체험을 중시하는 풍조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현대 설교자들은 먼저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합니다.

여성들은 교육 받았고 의사, 변호사, 수상, 각종 뛰어난 기술자들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왜 성직자만 안 되는가 하는 반문이 이제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동등하다는 의식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인간이라는 공통점과 하나님의 창조적인 입장에서는 차별이 없어야 하며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와 교회 안에서도 동등해야한다는 의식으로 발전되었습니다.


Paul Tillich의 실존적 조직신학, Wolfhart Pannenberg의 계시로서의 역사 접근등도 모두 이 방법론에 속합니다. 로마 카톨릭 쪽에서 Hans Küng, David Tracy, the Dutch theologian Edward Schillebeechs 등은 현대 세상과 기독교 전통, 하나님을 상호 연결시키고자 합니다. Karl Rahner이 주장하는 ‘“익명의 그리스도” 이라는 논의와 Bernard Lonergan이 내세우는 ”Theology in its new Context"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Schbert Ogden, W. N. Pittenger, John Robinson의 “Honest to God", "The Human Face of God" Moltmann, "Trinity and Kingdom" 등의 저술들이 모두 다 이런 방법론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가 환원론적 방법론(the Reductive approach)으로 이는 연역적 방법론과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현대 인간들의 인지적인 도전(the cognitive challenge)을 토대로 과거 전통이나 진리체계를 종합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입니다.

1960년대 이후로 이 방법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Nietzsche가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을 Thomas Altizer와 William Hamilton이 신학의 방법론으로 받아들여 “사신신학” (Death of God Theology)을 제창하였습니다.


Bultmann의 기독교의 비신화화라는 신약원문비평 방법론도 역시 이런 환원론적 방법론의 대표적인 실례라고 봅니다. 신화는 사고의 한 방식이라고 간주하고 거기에는 초자연 세계가 실제 세계 속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분석하면 그 속에 고대 시대의 세계관이 있고 3차원 구조의 우주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 인간은 더 이상 고대 신화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19세기 조직신학자인 Augustus Hopkins Strong도 “합리적 직관을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님의 관념이 첫 번째 진리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또 1960년대에는 “흑인신학”(Black Theology)이 등장했는데 이는 미국의 흑인운동가 마틴 루터 킹의 영향이 컸습니다. 대표적인 신학자로는 James Cone이 있으며 “A Black Theology of Liberation”(1970), “Black Theology and Black Power”(1969)를 저술하였습니다.


이런 연속적인 자극을 통해서 1970년대에는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등장합니다. Gustavo Gutierrez of Peru, Leonardo Boff and Hugo Assmann of Brazil, Jose Miranda of Mexico, Juan Luis Segundo of Uruguay, John Sobrino of El Salvador등을 대표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고, 한 사람의 감리교 신학자, Jose Miguez Bonino of Argentina가 있습니다. 이들 신학자들의 방법론이 대부분 환원론자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며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연역법적인 방법론과 환원론적인 방법론을 혼합한 자들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 정치, 경제적인 분석에서 비롯하여 성경과 전통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1980년대에는 여성신학(Feminism theology)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으며 현대 여성론이 신학에 침투하여 기독교 여성주의, 종교적인 여성주의로 확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통신학은 모두 다 가부장적이고 족장시대의 신학이며 남자에 의해서 주도되고 작성되었으며 남자를 위한 신학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전통신학은 여성과 여성의 경험을 무시하고 왜곡되었으며 여성은 오직 남자의 그늘 속에 존재하고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서구전통은 사회와 교회 속의 여성의 종속에 공헌했다”라고 말하면서 “여성들도 신학자, 성직자가 되어야한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규범적 접근법(The Regulative), 혹은 설명적 (Narrative approach)접근법입니다.

성경 각 권의 내용을 볼 때 이는 근본적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설명적이거나 혹은 이야기(story)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야기로서 설명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먼저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 다음은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라고 봅니다. 이 관계는 역사적 사건들과 인간성 속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이야기를 가진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계시라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Story of Theology”의 대표적인 주창자는 예일대학의 George Lindbeck으로 “The Nature of Doctrine”(1984)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의 이야기에서 문화 간의 상호적인 교섭의 차원을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내세우는 “intratextual theology"라는 개념은 성경이 사람들을 말하기에 앞서서 현재의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성경의 의미를 살려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가 성경에 파묻히지 말고 성경이 세상에 의해서 나의 세계 혹은 너의 세계로 흡수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신학의 접근방법은 전혀 다른 결과를 도출해 내게 되므로 매우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신학의 방법론들은 마치 일반학문을 이성으로 세워 나가듯이 각자의 체계를 세워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을 다른 일반적 학문 즉 물리학이나, 생물학, 사회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학문으로 다루고자 한다면 이는 매우 경계해야만 할 일입니다. 신학은 경험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진 일반학문의 도식자체가 신학에서는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분별하게 경험과학적인 방법론을 신학에 차용하는 것으로는 신학의 문제를 풀 수도 없고 결코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I, p .3.)


*마치 신학의 세계를 한 바퀴 돈 것 같습니다. 신학과 신앙은 같이 가야 한다는 뜻인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만약 어느 한쪽만 택한다면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신앙만 강조한다면 체계가 없어 사람의 생각으로 치우칠 수가 있고 신학만 강조한다면 사랑과 은혜가 없는 하나님만을 주장하는 인본주의적 학문의 체계와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신앙과 신학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신학의 정의와 연구방법론이랄까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회복의 신학의 체계와 방법론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회복의 신학은 연역적 관점과 귀납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연역적이라고 하는 철학적 의미,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연구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성경을 해석함에서 있어 세 가지의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먼저 첫 번째로는 성경은 한 권이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물론 칼립을 비롯하여 핫지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그와 같은 주장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한권이라는 것은 주제의 통일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성경으로 해석하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고 사건을 보는 것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셨고 계획하셨으며 섭리가운데 운행하신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한 어떤 사건을 놓고 보면 하나님의 계획과 운행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로 구원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심에 따라 택하셨고 부르셨고 세우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하는 주장과 함께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성경 공부를 할 때는 귀납적인 방법론을 택하여 사람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방향을 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변증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성경은 먼저 결론을 맺고 난 뒤에 그 결론에 관해 설명을 함에 있어 결론을 보완 변증하는 것으로 짜여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6일째 되는 날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에서 남자와 여자를 지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어떻게 지었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처럼 성경은 앞서 있는 말씀을 변증하며 전개되고 있음을 성경전체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변증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변증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성경의 정확무오성과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 진리임을 위한 변증으로 구약의 말씀을 신약이 변증하고 신약의 말씀이 변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하나다”라는 것과 “성경의 통일성”, “성경은 하나님 한 분의 말씀이다”라는 것입니다.


변증의 주된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변증학(apologetics)은 “사과하다”라는 말의 뜻이 함의된 “어폴로지”(to apology)가 아니라 “변호하다”(to defend)라는 변론의 의미입니다. 헬라어 “어폴로기아”(apologia)라는 단어는 행위나 절차를 “변호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어폴로기아”라는 말은 벧전 3장 15절, 행 22장 1절, 고전 9장 3절, 빌 1장 7절 그리고 빌 1장 16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벧전3:16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reason)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gentleness)와 두려움(respect)으로 하고”

행2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defense)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고전9:3-4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my defense)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발명이란 변명하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무엇인가 문제를 제기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믿음을 변호하는 것을 말합니다.

빌1: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defending)과 확정함(confirm!ing)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빌1: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for the defense)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회복의 신학에서는 왜 변증이라는 방법을 말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기독교에서 변증법적 신학(dialectical theology)이라는 학문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로데스텐트 신학 내부에 등장하여 당시 신학적, 철학적 논쟁들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활발하게 다루어진 학문입니다.

이러한 학문은 변론이라는 의미에서 시작했고 그것은 바울이 지적하듯이 “온유와 존경으로” 행하라는 충고처럼 단지 공격하는 답변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확증이나 논증의 형식을 가지고 답하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봅니다.

한편 회복의 신학에서의 변증은 맹목적 맹신의 신앙을 거부할 뿐 아니라 우리가 믿는 신앙은 비인격적인 형태의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진리에 근거된 합리적 신앙입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Jesus replied: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뜻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는 말에서 뜻이란 정신 혹은 이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감정과 대립되는 어휘로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감정에 휩싸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사랑하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를 사랑하라는 말의 의미는 헬라어 ‘누스’(nous-mind), 즉 이성을 가지고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언제나 지(mind), 정(emotion) 그리고 의(will)의 삼중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면 우리에게 합리적 신앙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학자 폴 리틀이 지적하듯이 “기독교 신앙은 증거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합리적 신앙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이성을 초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거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는 것입니다.


또한 회복의 신학에서의 변증은 기독교를 변론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진리라는 명제에서 그것을 변호하는 것이며 이러한 변론을 위해 논증의 형식을 배우고 논리성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증거에 의한 논증이거나 아니면 경험에 의한 증거이거나 우리는 어떤 근거에서 기독교가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증을 전개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요일1:1-3에서 진리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 행1장 1-3절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convincing proofs)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눅 1장 1-2절에서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fact)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사실 그대로의 진술의 의미)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고 하였습니다.

회복의 신학의 변증에서는 철학적 방식을 받아들입니다.

로날드 내쉬는 “세계관의 많은 요소는 본성상 철학적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철학의 중요성을 좀 더 의식할 필요가 있다. 철학과 종교는 많은 경우에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둘 다 같은 문제를 다룬다. 예를 들어 존재한다는 것(존재론, 형이상학)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윤리학)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아는가(인식론)에 관한 물음이 있다. 철학은 중요하다. 기독교 세계관은 철학이나 관념 세계와 내적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철학은 중요하다. 기독교에 반대하는 체계가 철학의 방법과 논증을 사용한다.”고 주장합니다.


회복의 신학에서의 변증은 신앙의 반지성적 태도에 저항합니다. 모든 지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못된 믿음과 신념 혹은 신앙에 대항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지성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스며든 것 가운데 하나인 영적인 생활을 위해 지성을 포기하는 행위에 대항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배교하는 행위와 흡사하거나 아니면 기독교 신앙을 반쪽 진리로 만들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진 에드워드 비스는 “지성으로의 초대”에서 이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은 지성을 계발하고 사용해야 한다. 인간의 정신적 기능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다. 지식을 추구하고, 학문을 닦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기독교적 소명을 이루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지성이란 사고하고, 발견하고, 관찰하며, 상상하고, 의문을 품는 속성이자 능력입니다. 이와 같은 지성이 영성을 위해서 포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지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열정만으로 세계를 변화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영성만을 추구한 사람들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행 7장 22절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했노라” 애굽 교육은 당시 시대에 앞선 선진교육이었습니다.


모세는 앞선 시대의 학술을 배웠기에 하나님의 사역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에 대해 사자 굴에 빠진 다니엘과 풀무 불 가운데 던져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용맹한 신앙적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들의 신앙이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궁궐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히브리 청년들로서 바벨론의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학문을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대를 선도하기 위해서 세속적 학문의 필요성을 멀리하고 신앙만을 주장하는, 그것도 매우 맹목적이고 맹신적인 신앙의 형태만을 따르려고 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회복의 신학은 기독교 지성을 강조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변증(Apologetics)은 기독교에 대한 여러 가지의 지성적 반대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이를 방어하거나 신앙의 어떤 요소를 참되다고 증명하는, 또한 최소한 틀렸다고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학의 한 분야를 말하는 것입니다.

회복의 신학에서 말하는 변증은 “케리그마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후에는 디다케를 통하여 성장해야만 하는 또 다른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복음은 케리그마로 분류되고 변증학은 디다케의 부분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William L. Craig의 말처럼 “변증학은 믿는 자들의 신앙을 더욱더 견고하게 해주는 보조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가 지혜롭게 말했듯이 우리의 일은 “영원한 무엇(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동일한 것, 히13:8)을 우리 시대의 특정 언어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특권과 의무는 청중에게 맞는 언어와 이미지를 활용해 영원한 복음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변증가는 믿음의 실체를 문화적 토착어로 번역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생각”을 세밀하게 구분해야 해야 합니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청중에게 복음이 아니라 자신이 어쩌다가 중요하고 재미있다고 여기는 부분을 제시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거나 동의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려는 유혹은 복음을 빈약하게 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리스도를 높여야 할 때 자신을 높이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우리는 복음을 개인적 취향에 맞춰 제시해서는 안 되며 인간 실존의 더 없이 깊은 부분, 마음이나 생각, 영혼까지 파고 드는 복음의 능력을 밝히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회복의 신학에서 말하는 변증학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변증의 개념과 방식”을 일상에 적용할 줄 알아야 하고 성경에서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변증학은 학문이자 기술이며 지혜입니다.


변증학의 최초 인물로는 클레안테스 (Kleamthos, BC. 331~232)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파 철학자로 철학을 변증학, 수사학, 윤리학, 정치학, 자연학, 신학 등 6개 부문으로 나누었습니다. 이 때 변증학이 등장되었으며 초기 기독교 변증가로는 미누키우스 펠릭스, 디오그네투스에게 준 편지로 “초대 교회의 변증서한”(작자미상)이 있는데 이는 놀랍고도 명쾌한 설명서입니다. 또한 타티아노스(Tatianos, 120~ )는 2세기경 순교자인 유스티노스로부터 그리스도교를 배우고 그 당시 교양 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변증하는 “그리스인에게 주는 말”(165)을 저술하였으며, 고드라투스(Quaratus)는 기독교도들이 핍박을 받고 있을 때 하드리안 황제에게 그리스도를 옹호한 글을 보냈습니다.

또한 스데반의 묵시는 니케아 이후에 일부 변증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외경 묵시 중 하나로 마니교 이단자들이 더 많이 사용하였으며, 로고스 기독론은 순교자 저스틴을 대표적으로 하는 변증론자들에 의해 도입된 기독사상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위기신학은 제1차 세계대전이후 창시한 신학으로 칼 바르트는 변증법적 신학(dialectical theology)이라 불렀습니다.


Hegel의 변증법은 유물론적 마르크스주의의 근간이 되는 철학적 입장을 말하였고 “샹데진리”는 언더우드가 번역, 1891년 발행한 전도문서 신(上帝)에 대한 해설집으로서 유일신 하나님 사상을 변증했습니다.

현대의 변증가들로는 J.P 모어랜드(Moreland), 윌리암 레인 크레그(William L. Craig), 스캇 레(Scott Rae)등이 있습니다.

*신학에서 변증학이 중요한 것처럼 회복의 신학에서 변증을 말할 때 결국은 성경의 구조와 해석의 방법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는데요. 성경의 변증에 대해서 조금만 더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선 첫 번째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의 유일성과 연속성입니다.

성경의 유일성은 이렇습니다.

1,500년에 걸쳐 45명 이상의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각각 다른 장소, 다른 시대에, 다른 환경과 분위기에서 기록되었습니다. 3개의 대륙에서, 3가지 언어로 기록되었고, 다양한 문화양식을 포함하였으며, 서로 상충되는 수백 가지의 주제를 다루면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으며 모든 내용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또한 보급상의 유일성은 그 어떤 책도 성경의 보급 및 판매부수를 능가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예를 들면 1998년 미국 연합성서공회(Unityed Bible Society)에서 단일기관 성경배포 숫자를 보면 성경전서 2,080만부, 낱권 2,010만부, 부분성경까지 포함 총 5,850만부가 배포 되었으며, 성경은 그야말로 슈퍼 스테디셀러였습니다.

또 번역상의 유일성을 언급해보자면 세계 6,500개 언어 중 현재 2,200개 언어로 번역

되었고 현재 속도로 번역되어진다면 2,022년 까지는 거의 모든 언어그룹에게 성경이 전달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에서는 50개국, 6천 명의 사람들이 850개 이상의 언어로 일하면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생존상의 유일성의 예를 보겠습니다. 인쇄술이 발견되기 전까지 필사(筆寫)하고 또 필사하여 원본이 훼손치 않고 보존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본문을 의심하는 사람은 모든 고전적인 문헌들을 다 불확실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문서도 문헌학상 성경만큼 철저히 검증을 받은 문서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성경신학자 몽고메리는 말합니다.

또한 "누가 한 번이라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세네카나 키케로가 쓴 글들의 철자나 음운 단어를 세었는가, 성경만큼 그렇게 철저하게 모든 장마다 줄마다 교의마다 공격을 받은 책이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지금 성경은 수백만 명으로부터 사랑받고 읽히고 있고 강의되고 있다."고 신학자 버나드 램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악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한 점도 훼손됨이 없이 살아남았습니다.

AD 303년 로마황제 디오클레시안은 기독교인들의 예배를 금지하고 성경을 파괴하라는 칙령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25년 후, 콘스탄틴 황제는 칙령을 발표해 정부의 돈으로 성경 50권을 구입하라고 명했습니다.

또 1778년에 죽은 프랑스의 저명한 이교도인 볼테르는 “향후 100년 이내에 기독교가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성서공회는 50년도 채 되지 않아서 볼테르의 집과 인쇄소를 수많은 성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13;31)


“고등비평이 내놓은 확실한 결과”도 한 때 위력을 떨쳤습니다. 일명 문서가설이라는 것으로 많은 지식인과 비평가들이 이에 동조하여 성경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오경은 모세시대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에 의해 기록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다가 몇몇 사람이 Black stele(검은 돌 비문)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모세보다 약 3세기 이전시대에 기록된 함무라비법전의 내용이었습니다. 또 헷(Hittites)족속의 기록은 구약이외의 다른 기록은 없기 때문에 그 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신화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고학 조사결과 1,200년도 더 된 헷족속의 문명의 흔적들이 발견되어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한 개인이나 또는 어떤 그룹에 의해 만들어진 책 가운데 개별 국가들과 이스라엘, 이 땅의 모든 족속, 어떤 도시들,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 등과 관련된 상당 분량의 예언이 포함된 유일한 책이자 하나님의 특별계시입니다.


"모하메드 주의자들은 그가 탄생하기 전에 모하메드가 태어날 것이라는 어떤 예언도 내세우지 못하고 있고 그 어떤 이단 종파의 창설자도 고대 본문이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출현을 얘기하고 있다는 걸 밝혀낼 수 있는 인물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노만 가이슬러, 윌리암 닉스가 말하듯이 “코란이나 몰몬경, 힌두교의 베다경전, 불교의 불경 등 다른 책들도 거룩하게 영감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이들 가운데 그 어떤 책도 앞날에 대한 예언을 포함하고 있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약 5세기 간의 이스라엘 역사가 사무엘상에서부터 역대하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히브리민족의 전통과 부족, 가문의 기원에 대한 선명한 묘사는 그 어느 고대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선명합니다.

애굽, 바벨론, 앗시리아, 헬라, 로마에서 게르만, 심지어 인도와 중국에서도 이에 필적할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민족과 나라의 것은 지배자에 의해 왜곡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에 대해서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족장들에 대한 죄(창12:11-13, 49:5-7 등)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고, 백성들의 죄가 고발되고 있으며(신9:24), 다윗의 간음과 범죄(삼하11-12장) 역시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고, 사도들의 결점이 기록(마8:10-26, 26:31-56, 막6:52, 8:18, 눅8;24-25, 9:40-45, 요10:6)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교회내의 무질서를 폭로하고(고전1;11, 15:12, 고후2:4)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종교가 그들의 경에 이런 부족하고 미련한 죄들을 짓고 있는 것을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비단 그뿐만이 아닙니다. 문학에 끼친 영향력도 대단해서 “만일 어떤 도시에서 모든 성경을 파괴한다고 하더라도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다른 책들이 인용한 부분들만 발췌해도 성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복구될 수 있다”라고 말한 신학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일출과 일몰, 약속과 성취, 탄생과 죽음, 인간의 전 드라마가 그 책 속에 담겨 있다”라고 성경을 정의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언어학을 공부한 사람조차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 상당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의미조차 잘못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조차 감당하지 못하며 말씀의 내용도 파악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놀라운 사실입니다.


가이슬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도덕적, 종교적 작품도 기독교의 사랑의 원리의 깊이를 뛰어넘지 못하며,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보다 더 고상한 영적 개념은 없다”고 말하였고 장자크 루소도 “그렇게 단순하면서도 그렇게 정교한 책이 인간의 손으로 단번에 만들어진다는 게 가능한 일이겠는가”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회복의 신학에서 변증적인 성경해석과 설교, 성경공부를 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66권은 어떻게 확정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정경이며, 그 기준과 역사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 역사의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회복의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 목회자에게 중요한 원칙입니다.


성경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흔하게 말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성경은 자기들이 유리한 증거를 위해 조잡하게 수집된 책이다"라는 주장입니다.

이 근거로 “많은 외경이 존재한다. 무엇이 사실인지 어떻게 아는가? 외경이 사실일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또한 모든 신학연구에 있어 무엇보다 성경을 가장 우선으로 말하는 것은 “성경은 신학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복의 신학 역시 성경 66권의 확립에 대하여 먼저 정리되어야 합니다.

일단 광범위한 주제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몇 가지로 중점 과제를 설정합니다. 그 이유는 불필요한 분쟁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언급한 중점 과제를 다음의 두 가지로 설정합니다.

첫째, 성경은 원본이 없고 사본만 있는데 내용이 변질의 문제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 정경은 무엇이며,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의 확립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본이란 원문의 언어를 그대로 필사하는 것으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역본과는 다른 것 입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사본들은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원본을 손으로 직접 베끼는 필사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인쇄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성경을 보존하고 전파하며 가르치기 위해서 필사하여 사본을 생산하였으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사본 제작, 즉 성경을 필사할 때는 성경 원본의 내용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신중하게 필사를 하였습니다.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을 “탈무디스트”라 하는데 이들은 성경을 필사할 때 항상 같은 복장을 입어서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하였으며 줄과 줄 사이는 머리카락 한 올 정도의 여백만 주어 누군가 추가시키거나 변조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가 흔히 숙제를 할 때 속도를 높이기 위해 외워서 옮겨 적는 것과는 다르게 절대로 외워서 적지 않고 한 단어씩 소리를 내어 읽으면서 적었습니다. “하나님” 또는 “여호와” 라는 단어를 적기 전에는 펜을 깨끗이 닦고 목욕을 하고 적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단어를 적을 때에는 왕이 오더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 필사를 마친 후에는 단어와 글자의 수를 원본과 대조해 보아 그 숫자가 일치하는지 확인을 했습니다.


현재 가장 오래된 사본은 사해사본이라고 불리는 B.C.150년경의 것입니다. 이 사해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맛소라사본이라고 하는 A.D.900년경에 필사된 성경이 가장 오래된 것 이었습니다.

사해사본의 발견 전까지는 마지막에 기록된 B.C.400 경의 구약성경 말라기서와 맛소라라는 사본 간에 1300년이나 연대차이가 나서 성경의 신빙성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사해 사본이 발견 되면서 구약의 변질에 대한 많은 의혹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사해사본이 발견되자 많은 성경학자들은 맛소라사본과 비교를 하였으며 성경의 내용이 1000년의 세월동안 보존되어 왔는지 그리고 그 내용에 확실하게 변질이 없는 것인지에 관한 의문이 해결 될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습니다.

당시 발견 된 사해사본의 이사야서와 맛소라사본의 이사야서를 비교해 보았는데 그 내용이 동일했습니다. 다시 말해 약 1000년 동안 거듭 필사가 이루어졌는데도 그 내용이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이 보존되고 있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 입니다. 사해사본은 그 원본과의 간격을 1000년이나 좁혔을 뿐만 아니라 성경이 아무런 변질 없이 보존되었음을 입증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세계 곳곳에서 번역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약 2,300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같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하더라도 다양한 종류의 번역본이 있습니다. 한국어로도 개역한글성경, 개역개정, 표준성경, 우리말성경, 현대어성경, 킹제임스성경 등 많은 수의 성경이 있고, 영어 번역본에도 KJV, NIV, TEV, NASB 등 많은 번역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용에는 어떤 문제도 없으며,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경이란 단일한 저자가 쓴 책이 아니며 66권의 개별적 성경이 모인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전서"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성경이라 주장되는 책은 66권외에도 많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성경이라 주장되는 다양한 책들이 발견되었습니다만 이것들과 구분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경이라고 합니다.

정경(Canon)에 해당하는 원어는 카논(χανων) 입니다. 카논은 원래 갈대, 긴 나무 가지라는 뜻입니다.


정확한 자(尺), 즉 길이를 재는 도구가 없었던 고대에는 이런 것들을 자의 대용품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카논은 결국 어떤 것을 재는 기준, 척도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정경과 외경으로 구분하여 부르는 것은 바로 정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도의 행동의 기준이며 잣대가 된다는 의미에서 카논이라는 표현을 부여한 것입니다.


이렇게 정경을 확정하는 데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정경은 사실 확정하기 이전부터 인정되던 책들을 확정하여 "정경" 으로 공포한 것뿐입니다. 일단 이후에 구약과 신약을 개별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지금은 그 확정 기준이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영감성인데 본문 전체가 하나님의 계시로서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사실, 즉 그 내용의 신적 기원이 인정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목적성인데 말씀의 내용 자체와 그 기록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데 기본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신뢰성으로 하나님의 영감을 받고 쓴 인간 저자의 신실성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저자의 하나님에 대한 진실성과 성경의 기록자로서 하나님께서 흔연히 인정하셨는가의 의문에 관한 문제입니다. 구약의 경우 하나님의 소명과 기름 부음, 신약의 경우 사도성이 바로 이에 속합니다.

네 번째는 보편성입니다. 이는 본문의 내적 속성에 근거하여 구체적으로 어느 한 책이 정경성을 갖고 있다는 교회의 보편적 확증입니다.

다섯 번째 보존성입니다. 성경 원본의 권위에 근거해 그 본문이 신적 간섭에 의하여 훼손됨 없이 전달되어졌는가 하는 보존과정의 완전성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기준이 적용된 것이 성경 곧 정경이라는 확증입니다.


이에 따라 많은 학자들은 구약이 세 단계를 거쳐 정경화 되었다고 합니다. 즉 목록으로 체계화 되었다고 하는 것 입니다.

먼저 토라, 즉 모세 오경이 정립되고 이후 예언서, 마지막으로 성문서 들이 정경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여기서 논란이 되는 것이 바로 성문서 입니다. 이 성문서의 확립에 대하여 많은 비방자들은 “얌니아 회의에서 인위적으로 확정한 로마교의 산물에 불과하다”라고 비방합니다.


그 얌니아 회의는 주후 90년경에 있었던 것으로 단지 성문서 중 두 권 "전도서와 아가서에 대하여 정경으로 인정할 것인가" 를 결정 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확립에 대하여는 얌니아 회의에서 어떤 권력적 개입이나 조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지위에 대한 간접적 증거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눅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은 히브리 정경의 세 부분에 대한 전통적인 명칭입니다.


신약의 기록을 보면 구약의 책들 대부분을 인용하고 있으며 그러한 인용의 출처에 대하여 “ 성경” 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모든 문서를 다 성경이라고 인용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록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은 성경으로 인용되고 어떤 것은 고대 문서로 취급할 수 있는 성경에 속하는 목록에 대한 기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입니다.


행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사도행전을 보면 클레안테스를 인용하였으나 성경이라 밝히지 않았습니다.

고전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메난더의 인용 또한 성경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유1:14~15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서 역시 성경을 인용하였다고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외경으로 존재하는 것들로 이런 외경들이 신약에서는 정경으로 인용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근거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 됩니다.

구약의 정경화에 대한 의문입니다.

70인 역(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 본) 사본들은 외경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과연 이것이 정경으로서 인정 될 수 있는가 입니다.

또 사해사본에서 일부 외경이 발견 되었습니다. 이것은 외경도 정경이라는 증거가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구약 정경화에 대한 의문의 답변을 신학자들은 이와 같이 하고 있습니다.

70인 역으로 라틴어 불가타역을 번역한 제롬 자신도 성경에 외경을 포함시켰으나 제롬은 “이 외경이 신자들에게 유익한 교회의 책이지 정경의 책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레어드 헬리스의 저서 “성경이란 무엇인가” 57-60 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지금의 외경들이 70인 번역에서 포함되었다고 해도 이것은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하여 번역한 것이지 성경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본들은 4~5세기의 것으로 1세기의 팔레스틴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는 아무런 증거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해사본에서 일부 외경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종말론을 주장하던 공동체적인 엣세네파였습니다. 또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에서는 성경을 모세와 선지자라고 표현하고 있었지만 외경을 성경이라고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쿰란동굴에서는 외경뿐 아니라 위경도 발견되었고 공동체 지침서와 다른 문서들도 발견되었습니다. 만일 쿰란에서 발견된 일부의 외경이 정경에 포함된 증거라면 위경과 공동체지침서도 정경에 포함되었다고 주장하여야 합니다.


더욱이 쿰람사본에서 주류를 이룬 사본은 칠십인 역이 아니라 맛소라 본문 계열의 본문이었으며 약간의 칠십인 역도 발견되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맛소라 계열의 본문과 다른 본문도 결국 동일한 맛소라 본문의 원문에서 파생된 본문이었습니다. 주후 1000년의 맛소라 본문과 그 내용이 거의 일치하였던 것입니다. 즉 쿰란에서 발견된 성경은 외경이 포함된 약간의 칠십인 역으로 그 주류가 아니며 주류는 맛소라 본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신약 정경의 확립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겠습니다. 고전14:37~38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은 많은 외경이 존재하나 그 중 27권만이 성경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의 기록을 보면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대한 정리를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초대교회가 신약 문헌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일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신약 문헌들의 최종 공인은 AD.397 카르타고 회의에서 이루어졌으나 이미 권위는 그 이전부터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13개의 바울 서신, 베드로 전후서와 요한 일서는 이미 권위가 있는 성경으로 공론화 되어 특별한 이견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27권은 이미 4세기 초 유세비우스 시대에 정리가 된 상태였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확립을 위한 초대교회의 동의 기준은 근본적으로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사도성입니다. 사도나, 혹은 사도들과 직접 접촉이 있었던 누군가가 쓴 문헌이 아니라면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는 배후에 베드로의 증거가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가능성을 논의하면서 위명의 혐의가 있는 문서는 어떤 것도 배격하였습니다.


둘째는 신앙의 척도입니다. 정경에 대한 기본조건은 신앙의 척도 즉 교회 사이에서 규범으로 인정해 왔던 기본적이며 정통적인 기독교와 일치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성경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교회들이 그 문서를 광범위하게 읽고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유용성을 입증할 시간의 경과를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정경의 결정이 확정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일단 공식적으로 인정이 되기 이전에도 신약 성경의 권위가 인정되고 있었음을 확증하기 위해 당시 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르키온(AD.144)은 신약 12권을 인정하였고, 이레나이우스(AD.144-190)는 신약 25권을 인정하였고, 무라토리언캐논(2세기)은 신약 21권을 인정하였고, 터툴리안(AD.160-220)은 신약 24권을 인정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AD.2-3세기)는 신약 24권을 인정했고, 오리겐(AD.285-254)도 24권을 인정하였고, 유세비우스(AD.260-339)는 신약 24권을 인정하였으며, 아타나시우스(AD.369)는 신약 24권을, 불가타역(AD.382)은 신약 24권을 인정하였고, 카르타고 공회(AD.387)에서는 신약 24권을 전부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성경 66권의 정경에 대하여 "권력의 개입"이나 "자의적 기준으로 끼워 맞추기"라는 의혹이나 주장을 제기 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이 변증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제1원리는 성경은 하나님 한 분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여러 사람이 기록하였지만 성령으로 감동되어 기록하였기 때문에 하나라는 것을 변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구약과 신약 66권이 하나라는 것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제2원리는 성경은 그림자와 실체, 혹은 모형과 원형이라는 짝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라고 말한 것은 곧 변증이 된다는 뜻입니다.

제3원리는 자연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완전하시나 인간이 이것을 깨닫기 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경 곧 특별계시를 주심으로 계시의 변증을 하셔서 우리에게 완전함으로 주셨습니다.

제4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의 계시는 신약의 성취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구약을 신약에서 신약을 구약에서 변증하고 있습니다.

제5원리는 성경의 대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나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예수님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제6원리는 성경의 문맥은 구약과 신약에 걸쳐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야기로는 단락이 있지만 그 의미는 모두 연결되어 각권 각장의 말씀들이 서로 변증하므로, 나타난 모든 계시적 사건들이 예언되고 성취되어 변증됨으로 완전합니다.

마지막 제7원리로 성경의 문맥의 원리를 보면 결론을 말씀하시고 그 결론을 전개하면서 변증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변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변증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미 하나님을 변증하고 있기 때문에 변증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NLS 에서 변증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일점일획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왜 그렇게 정확하고 무오한 말씀인가 하는 이유를 찾는 과정을 변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한 분 곧 하나님 한 분만의 말씀이다”, “성경은 성경이 해석한다”, “성경은 그림자가 있고 실체가 있다”, “성경은 모형이 있고 원형이 있다”, “성경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 된다”, “하나님은 약속과 언약을 반드시 행하신다”라는 것을 변증하는 것입니다.


앞서 해석의 원리를 언급한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한 분의 말씀인데, 66권으로 나뉘어져 있고 시대와 기록한 자가 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들이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며 변증하고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예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서는 그 말씀은 태초부터 계셨으며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예수님이요, 하나님이 육신의 옷을 입고 오신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빛이라고도 하셨고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가죽옷을 만들어주어 벌거벗어 부끄러워 나무 뒤에 숨었던 저들을 불러내어 주셨던 그 가죽옷으로 오셨으며 그 동물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주 단편적이지만 예수님을 성경이 변증하며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와 같은 것은 영적이라는 것으로 표현하지만 영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관련된 내용들 혹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영적이라고 함은 성령, 하나님의 신,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신비적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성경은 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것을 우리의 삶에 맞추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이야기로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애독하다보면 성경이 성경을 변증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뿐 아니라 확신을 갖게 됩니다. 정확무오하다는 것은 오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니까요.


또한 성경의 문맥을 보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시고, 그 다음 창조의 세계를 하나 둘씩 지어나가는 것을 보게 되고, 그 후에 만들어진 것에 구체적인 과정이 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중 하나는 흙으로 지었다고 하시고,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고 하시고, 다시 남자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오고, 그 여자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서 남편에게도 주고 자기도 먹었다고 하는 내용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보통 서론으로 시작해 본론을 거쳐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성경은 결론부터 먼저 밝히신 뒤 본론과 과정을 상세히 말씀하시면서 서론적이고 본론적인 것이 함께 진행되다가 끝납니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에게 그를 보내시면서 애굽 왕이 강퍅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왜 강퍅하게 되는지를 차례차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애굽의 왕에게 재앙이 내리고 또 내려 10번의 재앙이 내릴 때까지 재앙이 내릴 때마다 강퍅하게 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결론을 변증해 가는 구조적 문맥으로 되어 있음을 보면서 성경을 성경으로 변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복의 신학에서 말하는 변증이 혹시 다른 변증학자들의 주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선 변증학이라는 말과 변증법적 신학(dialectical theology,독일어: Dialektische Theologie)을 곧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neo-orthodoxy)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를 먼저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스위스의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1914년~1918년) 이후에 발전한 개신교 신학의 접근방식이며, 프로테스탄트 신학 내부에 등장하여 당시 신학적, 철학적 논쟁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비신화화와 실존적 해석이 주류를 잇는 가운데 변증법적 신학이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상운동에 붙여진 명칭이었습니다.

이러한 변증법적인 학문을 주도한 신학자들은 1921-22년 사이에 칼 바르트(1886~1968년), 고가르텐(The Religious Decision), 에밀 브루너(1899~1966년Experience, Knowledge and Faith), 투르나이젠(Dostoievsky), 폴 틸리히, 루돌프 불트만, 몰트만에 의해 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니부어 형제, 즉 라인홀드 니부어(1892~1971년)와 헬무트 리처드 니부어 (1894년~1962년)가 미국 교회의 신정통주의 보급에 앞장섰다고 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했으며, 자유주의 신학은 관찰과 이성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칼 바르트는 이러한 자연신학을 완전히 반대하였습니다. 신학자 브루너는 자연신학은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던 것에 반해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신다”(Deus Dexit)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변증법적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으며 하나님과 인간은 절대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실존주의의 개념을 이용했습니다. 루돌프 불트만은 1920년대에 바르트, 브루너와 영향을 주고받았고 그는 마르부르크 학파, 특히 독일의 철학자 말틴 하이데거에게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라인홀트 니부어와 칼 바르트는 19세기 덴마크의 유신론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키르케고르는 자유주의 모던니스트 기독교가 이성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이성적인 결단이 아니며, 믿음에 의한 도약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고 목회적인 사역의 필요와 전쟁 때문에 생긴 영적 위기에 의해 부룸하르트, 쿠터, 케에르케고르, 오페르베크,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저술에서 새로운 기초를 추구하게 됩니다. .

이들의 주장은 “전통적인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비록 그것이 종교와 경건에 중심을 두었고,인간의 심리학과 역사에서 표명되기는 하였지만 실제로는 인간에 관해서 말했을 뿐이며 그러면서도 신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고 늘 착각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종교를 포함한 모든 인간적 지식과 인간적 업적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적 계시의 주권, 성경의 권위 등을 확증해 가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정통성에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칼바르트의 “Episte to the Romans”에서 보면 이 변증법이 “비판적 부정”이라는 명칭 하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선고하시는 부정 또는 부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중심성과 역사주의에 기초를 둔 문화적, 종교적 경향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정통주의적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복귀하려 하여 그의 신학운동은 '신정통주의 신학' 또는 '위기신학'(Crisis Theology)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초월성, 신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적 유토피아(Utopia)의 질적 차이를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 모든 인간적, 역사적인 자기 성취적 도취를 심판하고 갱신한다는 것입니다.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라는 신학원리를 다시 회복하려 했습니다. 신정통주의 신학을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고 명명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인식과 신앙의 가능성이 인간의 주체적 인식능력, 종교성, 윤리적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근원적 계시 사건에 근거한다고 강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이요, 삼위일체론적 구조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주의적인 바르트의 신학은 20세기 최대의 기념비적 신학작품인 “교회교의학”( Kirchliche Dogmatik:13권, 1932)에 체계적으로 서술되었고,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신학적 객관주의를 극복하려는 점에서 바르트와 공동전선을 폈으나 불트만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더 많이 계승했습니다.

이것이 변증법적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변증학(apologetics)은 어떤 것입니까?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증법적 신학(dialectical theology)과 변증학(apologetics)은 회복에 신학에서 말하는 변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다시 밝히지만 변증법적 신학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밝힙니다. 회복의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으며 Calvinism을 기초로 두고 있기 때문에 신전통주의 신학이라든가 혹은 위기 신학,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증학(apologetics)은 회복의 신학에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회복의 신학에서는 “성경은 성경이 변증한다”라는 기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우선 성경 해석을 위한 도구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성경 해석을 위한 도구로는 크게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성경 해석을 위한 첫 번째 도구는 다양한 번역 성경입니다. 물론 성경 연구자에게 제일 좋은 성경은 원어 성경입니다. 헬라어, 히브리어 성경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원어 성경을 텍스트로 삼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렇지만 원어를 읽을 수 없는 해석자라면 가능한 한 다양한 번역 성경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번역 성경은 아주 단순하게 구분하면 직역 성경과 의역 성경이 있습니다. 물론 둘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직역과 의역의 중간쯤에 위치한 번역도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 성경 가운데 주로 참고하는 것은 개역한글판과 표준새번역, 그리고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개역한글판, 개정판이 직역 성경이고 현대인의 성경이 의역 성경이라면 표준새번역은 둘의 장점을 취하기 위해 직역과 의역의 중간 정도에 자리를 잡은 번역 성경입니다.


영어 성경 가운데 주로 참고하는 성경은 KJV, NASB와 NIV 입니다. NIV는 우리말 성경 가운데 표준새번역과 유사한 성경이라고 보면 됩니다. 현대의 젊은 영어권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직역과 의역의 장점을 살려 현대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NASB는 원전의 구조까지 최대한 살려서 직역한 성경입니다. 원어 성경과 비교해 보아도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원전을 정확하게 직역하였습니다.

간혹 어느 번역이 제일 좋으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은 우문입니다. 물론 질적인 측면에서 수준 차이가 나는 번역도 있습니다. 그러나 각 번역본은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른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NASB는 원어의 의미를 잘 살린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영어권 독자들조차 어려워한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원어의 구조까지 가능한 그대로 살리다 보니 현대의 젊은 독자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영어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Living Bible은 읽기는 쉽지만 원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성경 번역은 마치 서로 크기가 다른 두 개의 톱니바퀴를 연결하는 것과 같습니다. 서로 크기가 다른 톱니바퀴를 연결하려면 한 쪽의 크기를 조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성경 번역자는 원어의 구조를 해체하고 의미만 포착하여 번역될 언어의 구조에 맞출 것인지, 아니면 번역될 언어에 잘 맞지 않더라도 원어의 구조를 그대로 살려서 번역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번역, 특히 성경 번역은 고도의 전문성과 함께 치열한 고뇌가 필요한 작업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이나 성경 프로그램을 통하여 다양한 번역 성경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번역을 고집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번역을 서로 비교하면서 성경을 읽는 것이 문맥을 파악함에 있어 좋습니다. 다양한 번역을 서로 비교하면서 읽다 보면 원전의 의미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 해석을 위해 필요한 두 번째 도구는 여러 사전류입니다. 성구 사전, 성경 원어 사전, 신학 사전, 낱말 사전 등 다양한 사전을 구비하고 참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 원어 사전을 읽을 수 없다면 최소한 원어에 기반 한 스트롱 사전이라도 참고해야 합니다. 최근에 스트롱 사전을 우리말로 번역한 사전이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전을 참고하면 원어를 몰라도 원어적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스트롱 사전의 머리말을 참고하면 스트롱 사전의 활용법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원어의 의미를 보다 깊이 알기 위해서는 킷텔 사전을 참고하는 것도 좋습니다. 영어로 된 킷텔 사전이 너무 방대하여 부담스럽다면 우리말로 된 요약본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킷텔 사전은 단어의 의미를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킷텔 사전의 장점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입니다. 단어의 의미를 그토록 방대하게 정리해 놓은 책이 있다는 것은 성경 해석자들에게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단어의 의미는 언제나 그 단어가 위치한 문맥 속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것만 조심하면 좋습니다.


단어의 형태를 따라 의미를 분류한 킷텔 사전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로우(J. P. Louw)와 나이더(Eugene A. Nida) 같은 학자들은 단어의 형태가 아니라 의미를 따라 분류한 새로운 사전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영어로 된 이런 사전들을 활용할 수 있는 해석자라면 서로 다른 장점을 가진 사전들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성경 해석을 위해 필요한 세 번째 도구는 주석입니다.

영어로 된 주석 가운데는 좋은 주석이 많지만 우리말로 된 주석은 아직도 그 종류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한어 학자들이 쓴 좋은 주석과 새롭게 번역된 최신 주석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습니다. 내용이 좀 어렵고 딱딱하더라도 주석은 전문적인 학자들이 쓴 것을 구입할 것을 추천합니다.

어떤 주석이 좋은 주석인지 쉽게 찾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석을 살펴볼 때 그 책에서 가장 어렵다고 생각되는 난해 구절에 관한 해설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뛰어난 주석가일수록 어려운 난해 구절을 성실하게 주해합니다. 난해 구절 한 구절에 대한 해설만 읽어 보아도 그 주석의 수준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학문적인 주석을 기피합니다. 읽어도 설교에 어떻게 활용할지를 잘 모르겠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주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 읽듯이 읽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전처럼 필요한 부분을 참고하는 것입니다.


전문 학자들이 방대한 자료를 참고하여 저술한 주석들은 당연히 성경 해석자들에게 필요한 방대한 자료를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문에 은혜라는 단어가 나온다면 그 단어의 풍부한 배경을 가르쳐 주기 위해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같은 단어가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때로는 신약에 나온 단어의 구약적 배경을 알려 주기 위해 70인 역을 참고하여 구약의 용례까지 제시합니다. 성경 해석자는 주석을 통하여 그런 자료들과 그런 자료들에 대한 전문 주석가의 해석을 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경 해석자는 그런 정보들을 사용하여 해당되는 본문을 찾아 읽으면서 그 단어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있는 중요 단어에 대해 풍성하게 이해하면 당연히 해당 본문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회복의 신학적 관점에서 설교(PDP)나 성경공부(PDP bible study)를 할 때는 크게 7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하나, 본문 문맥(fact)을 살피기

하나, 본문 구조 분석하기

하나, 본문 주요 단어 의미 파악하기

하나, 본문의 원형과 모형을 찾기

하나, 본문 개론 연구

하나, 본문 관련 역사적 배경 조사하기

하나, 본문 핵심 메시지


물론 항상 일정하게 이런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종합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때로는 이 일곱 가지 단계 가운데 어떤 단계에 더 집중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본문을 해석할 때는 이런 단계를 거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본문이 위치한 문맥(fact)을 살피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해석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경 본문을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점일획이라도 바뀌거나 혹은 더하거나 빼거나 해서는 안 되며 성경은 정경이며, 정확무오한 말씀이므로 본문(fact)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때문에 회복의 신학 특히 성경해석과 PDP라고 하는 설교와 성경공부에서 이것을 가장 첫 번째로 생각합니다.

물론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일곱 가지의 순서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가장 우선시해야 합니다. 설교에서 전달하는 과정은 우선순위가 바뀔 수 있을지라도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맥(fact)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에 나온 것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앞 뒤, 더 나아가 책 전체를 여러 번 읽어야 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본문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어떤 본문의 경우는 별도의 구조 분석이 없어도 본문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구조 분석을 철저하게 해야 하는 책은 구약의 시편과 신약의 서신서들입니다. 시편은 다양한 시적 구조에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서신서는 매우 치밀하고 정교한 문법적, 수사학적 구조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시편을 연구할 때는 시적 구조를 잘 살펴야 하고, 신약의 서신서를 연구할 때는 문법적, 수사학적 구조를 철저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또 어떤 본문은 문학 장르상 이야기에 해당됩니다. 그런 경우는 본문의 구조를 치밀하게 분석하는 것보다 이야기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 더 유익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본문에 나오는 주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부분은 바로 주요 단어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떤 단어가 주요 단어인지 찾으려면 본문을 여러 차례 읽으면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파악하면 됩니다.

물론 그럴 때는 당연히 앞 단계에서 조사한 것에 기초하여 파악해야 합니다.

이제 단어들을 자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주로 살펴보아야 할 단어입니다.


단어를 연구할 때는 단어 사전과 함께 성구 사전을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말 성구 사전만 보면 인자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번역된 “인자”가 원어에서는 어떤 단어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원어 성구 사전을 보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지만 원어를 모르는 경우를 가정하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런 경우 먼저 로고스사에서 출판된 “스트롱코드성경”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스트롱코드성경에는 각 단어마다 스트롱 번호가 있습니다. 그 번호를 보고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스트롱코드 히브리어 헬라어사전”을 보면 인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를 번역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그 헤세드가 구약성경의 어느 곳에서 사용되었는지 그 용례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용례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의미를 정리하면 됩니다.

우선 이 본문과 가까운 곳에 나온 용례들을 먼저 찾아보고 그 다음에 창세기 전체, 혹은 용례가 많지 않다면 구약 전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용례들을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본문이 원형이라면 모형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짝이 있고, 실체와 그림자가 있다고 하는 것을 성경이 변증해 주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모형론적 성경해석의 논리”(typ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모형론적인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구약의 정점으로 하는 종말론적인 구속사에 기초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형론적인 해석은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키를 제시합니다.

창3: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 하셨는데 여기서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모형이지만 그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형론이란 구약성서에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을 기념하며 유월절 어린 양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과 히브리서를 통해 볼 때 그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모형이고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빵과 포도주를 제공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 것의 모형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가죽 옷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모형이고 성막의 각종 기명들도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에 대한 모형들이 됩니다.


또한 로마서 5장이나 고린도전서 15:22 등에서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 올려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치유되었던 것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모형이고,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같은 시간 동안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사건에 대한 모형입니다. 즉 애굽이 세상의 모형이므로 홍해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한 것은 죄인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고, 광야 생활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고난과 영적인 투쟁의 삶을 나타내며,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성도들이 죽은 후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는 것에 대한 모형입니다.

모형이란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모형론은 다음에 다시 다루기로 합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본문이 속한 책에 대한 개론을 먼저 공부하는 것입니다.

구약 개론서나 주석의 서론을 보면 저자, 독자, 연대, 목적, 신학적 주제 등 다양한 개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데 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책의 기록 목적과 중심 주제(핵심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신학적 주제를 네 가지로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지속되는 하나님의 창조와 사역, 소명, 언약의 주권적인 이행 등 이런 주제를 파악하고 본문을 살펴보면 본문의 메시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단계는 본문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사건과 관련한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론서나 주석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본문의 경우는 성경 역사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주석을 참고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단계는 지금까지 연구한 것을 종합하여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찾는 것입니다.

창세기 39:21에서 하나님은 요셉에게 바로 그 헤세드를 베풀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인자를 더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언약을 맺은 적이 없습니다. 굳이 따지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사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수없이 깨뜨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 언약을 지켜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또한 요셉이 어렸을 때 꿈을 꾸게 하신 것도 역시 하나님 편에서 그것을 이루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계약관계에서 벌어지는 의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베푸시는 헤세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헤세드를 베풀고 계신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결국 헤세드는 하나님의 본질적 성품입니다. 그분은 단순히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의무감으로 헤세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그분이 헤세드가 풍성하시기 때문에 그 헤세드를 요셉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1단계에서 7단계를 거치면 이렇게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주석들을 참고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성구 사전을 활용하여 성경의 여러 용례들을 연구하며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렇게 여려 용례들을 찾아볼 때 좀 더 풍부한 이해를 위해서 주석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긴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를 할 때는 성경 자체를 가지고 예를 들면서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면 그 다음 단계에서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면 됩니다.


성경 각 책들에 대한 개괄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신구약 개론이나 각 책의 주석에 있는 서론은 그 책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합니다.

서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저자, 독자, 연대, 장소, 기록 배경과 목적, 신학적 주제 등을 다룹니다. 각 책에 대한 서론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본문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기록 목적과 신학적 주제 등입니다. 그 책을 기록한 목적과 그 책에 담긴 주요 주제들을 알면 해당 본문의 메세지를 다양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기록 목적과 신학적 주제 등을 알지 못한 채 본문을 해석하면 해석자의 주관에 따라 본문을 해석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본문과 관련된 배경 지식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성경 배경에 관한 책이나 역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주석, 혹은 성경 배경 사전을 참고하면 됩니다.

또한 주석을 보면 많은 학자들이 교차대구법 같은 난해한 구조 분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차대구법은 본문의 구조를 분석하는 데 매우 유익한 구조 분석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긴 단락 전체를 교차대구법으로 분석하는 것은 학자들에게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학문적인 주석에서 주로 그런 구조 분석을 다루다 보니 많은 목회자들이 구조 분석, 혹은 구문 분해를 무조건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구조, 혹은 구문을 파악하는 일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단계입니다.


모든 언어는 다 특유의 구조가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자신의 언어 속에 담긴 구조를 활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국어의 경우는 굳이 구문을 분석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글쓴이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글쓴이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어를 해석할 때도 문법과 구문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더구나 우리말 성경은 고대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쓴 것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성서 해석자들은 반드시 본문의 구조와 구문을 분석해야 합니다. 구문을 분석할 때는 원어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만약 원어를 해독할 수 없다면 NASB같은 영어 성경을 활용하면 됩니다. NASB는 원어 성경을 거의 그대로 직역한 성경이기 때문에 원어 성경 대신 참고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 문장 구조 속에 담긴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복의 신학의 구조 속에서 성경을 보는 관점은 어떤 것입니까?


앞서 질문하신 것을 다 답 할 수가 없지만 같은 맥락에서 회복의 신학의 성경 해석적 입장을 밝힌다면 전통적인 신학에서의 해석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석가들이 흔히 말하는 구속사적 해석이라고 할까요. 구원이 중심된 입장에서의 해석인데 그것은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복의 신학에서 성경적 해석은 우선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즉 연역법적인 해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귀납적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연역법적 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정의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성경의 Fact를 그대로 전하는 강해적 설교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관찰하고 적용하며 나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보려는 귀납적 해석 곧 사람의 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NLS 에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고 모형적인 해석법을 적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방법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공부 곧 교육을 할 때는 귀납적인 방법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다”라고 어느 한 가지 만을 단정 짓지 않고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구약은 그림자요, 신약은 실체라고 하신 것처럼 성경은 모형과 원형, 본질과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모형과 원형이라면 서로가 변증을 하게 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정확하게 보신 것입니다. 그림자와 실체가 성경에 따로 있지만 그것이 하나가 되고 서로를 변증할 때 성경의 온전한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한 예로 모형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매우 비현실적이고 과거적이며 또한 상징적인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본질에만 치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를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깊고 오묘하며 신비롭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침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참혹한 전쟁에 노출되어 사람들이 고통 속에 빠져듭니다.

성경에 Fact는 그렇지만 이것만을 가지고는 그 사건을 통한 교훈만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인 것을 사용하시지만 그렇다고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축소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이스라엘 침공을 당했는지,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블레셋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이처럼 전쟁에 빠졌을 때 백성들은 무엇을 어떻게 감당하고 대처하였는지 등을 통해 본문에 나타난 것만 가지고 교훈적인 것에만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이스라엘은 누구며, 블레셋은 누구인지 알고자 한다면 이스라엘과 블레셋이라는 모형에서 실체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요, 블레셋은 세상이라고 하는 것을 찾는다면 이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사람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 지상의 사건에서 영적인 사건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성경을 변증함으로서 성경이 완전하신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며 신앙의 진리를 주장하고, 세상에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시며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것이 성경의 말씀과 일치함을 변호하는 지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변증학이라는 말에는 “변호(defense), 공식적 비난에 대한 답변”이라는 헬라어 어근 “apolg”에서 파생했으며 이 어근은 동사, 명사, 형용사형태로 헬라어 신약성경에 약 20회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에서 “어떤 이의 신념이나 입장을 변호하고 정당화하는 설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발전을 하였습니다.


알렌 킬린은 변증학을 “좁은 의미에서 개인의 신앙의 변호를 의미한다”고 했고 그러면서 “넓은 의미로는 교리, 신앙, 그리고 성경에 주어진 계시에 대한 공격에서 답변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회의론자들과 불신자들의 공격에 대해서 기독교 신앙과 성경과 주어진 계시를 변증하고 정당화하는 것이며, 성경에 주어진 사실들, 하나님의 계시의 합리성, 그것으로 영적필요를 온전히 충족시킬 수 있다는 충족성에 대한 적극적 진술을 성경에 의지해서 발전시키는 것을 말하며 소극적, 변호적일 뿐만 아니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작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회복의 신학에서 말하는 변증은 “성경을 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Fact를 가장 우선시하여, “그림자와 실체를 원형과 모형, 본질과 현상”을 찾아 변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둘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셋째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넷째 하나님의 선하시며 인자하시며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며, 자비하시며, 무소부재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며, 세계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계획하심에 따라 지금도 역사하시고 있다는 전제의 믿음이 있을 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변증하셨듯이,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메시아 됨을 변증하셨고(마22:41-46), 사도바울도 자기의 사도권을 변증하였으며(갈1, 2장), 베드로는 변증이라는 학문의 특성을 벧전3:15-16절에서 잘 표현을 하였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logos)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apologia)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이러한 변증의 목적은 신자나 불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실체와 적합성을 보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신앙이 부족하거나 하나님을 아직 온전히 믿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고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라도 통달 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에 부응하려는 방향으로 변증한다면 매우 깊은 신앙에 도달하고 믿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성경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요즘 본질회복이라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사실 신앙의 본질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말씀은 인격이며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곧 구세주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본질이라고 하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본질회복이란 “말씀으로 돌아가자”, “말씀을 회복하라” 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한 점, 한 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를 조금 배운 분들은 당연히 이 일점일획을 히브리어의 모음부호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어의 모음부호는 대부분 점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점이 잘못 찍히면 전혀 다른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를 좀 더 알고 나면 이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는 모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음부호는 맛소라 학자들이 기원후 7-8세기 이후에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자음만으로 성경이 쓰여 있었고, 맛소라 학자들도 읽을 때 편의를 위해 모음부호를 붙인 것일 뿐 자음을 변화시키기 위해 모음부호를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맛소라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자음의 글자 수를 세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음이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오히려 자음을 지키기 위해 자음을 바르게 읽기 위해 모음부호를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모음이 완벽하더라도 임의로 문자를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맛소라 피날리스라고 해서 각 권이 끝날 때마다 각 권의 절의 수, 단어의 수, 글자 낱개의 수, 세데르의 수를 권말주기(맛소라 피날리스)에 기록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레닌그라드 사본의 권말주기에는 오경의 글자 수가 400945개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음만 있고 모음은 없습니다.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하나의 이오타, 또는 하나의 케라이아라는 말을 우리가 1점 1획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이오타는 가장 작은 글자입니다.

요오드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굉장히 작습니다.

그냥 쓱 하고 모른 채 지나갈 수도 있는 작은 글자이지만 작은 글자 하나도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또, 케라이아라는 말은 뿔, 고리, 글자의 부분, 혹은 획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는 혼동하기 쉬운 문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레쉬와 달렙, 카프와 베트, 눈과 기멜 등은 언뜻 보면 굉장히 혼동하기 쉽습니다.

어떤 것은 모서리가 각이 져 있는 반면에 어떤 것은 갈라져 있고 어떤 것은 곡선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음 하나 하나, 자음들로 정확하게 그 말씀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말씀들이 소중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요,하나님의 인격이시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영원한 진리요, 하늘에서 내리는 떡이요,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요, 영혼의 양식이 되고, 우리가 그 말씀으로 지어진 존재이므로 그 말씀을 따라 살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본질을 회복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회복의 신학연구학회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바램이며 소원이 있다면 회복의 신학연구학회인 Nyskc Learned Society가 세계적인 학회로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의 모든 신학자들이 함께 모여 회복의 신학을 연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회복의 신학은 세계 신학의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또한 회복의 신학을 연구하며 발표하여 실제적으로 회복의 신앙으로 적용되는 3가지 곧 연구, 발표, 신앙이 하나로 이루어지는 학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에 따라 학회의 Vision을 제시합니다.

첫째. 세계적인 회복의 신학을 더욱 깊이 있게 세워가는 것입니다.

둘째. 회복의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되었으면 합니다.

셋째. 더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참여하는 학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쉽습니다. 회복의 신학의 성경적 구조나 회복의 신학 연구학회의 각 분과연구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더 많은 것을 듣고 싶지만 시간 관계로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오랜 시간 수고 하셨습니다.

19th 회복의 신학연구학회 정기학술대회 개최 공지

Nyskc Symposium '21 개최 Main Subject: “Spirituality of Nyskc Movement" Nyskc Learned Society는 회복의 신학연구학회 입니다. 회복의 신학연구학회 주최로 열리는 제19차 Nyskc Symposium (정기학술대회)가 5월24-27일까지 미국 뉴욕을 중심해 열리게 됩니다. 이번 학술회는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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