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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skcian의 비젼

출3장 1-12절


서론

Nyakcian 에게 있어서 비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행복론자 칼 힐티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생에 있어서 비젼은 한 인간의 행복, 더 나아가서는 한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기에 더 없이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다.


한국의 어느 시골에서 두 父子가 소에 쟁기를 메워 밭을 갈고 있었다.

두어 시간 동안 밭을 갈던 아버지가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아들에게 쟁기를 넘겨주었다. 아들이 쟁기를 잡고 밭을 갈지만 경험이 부족하여 아버지가 갈아놓은 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밭이랑이 비뚤비뚤 엉망이었다.


생각대로 잘 안 되자 아들은 아버지에게 밭을 곧게 잘 갈 수 있는 비결을 묻게 되었고,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옆을 보지말고 앞만 바라보고 갈아라." 아들이 아버지의 지시대로 했는데도 역시 밭이랑이 곧지 못하여 다시 물으니, 아버지께서 이번에는 "앞을 바라 볼 때 목표를 정하고 바라보라"고 지시했다.

아들은 다시 아버지의 지시대로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앞을 바라보면서 밭을 갈았으나 역시 밭이랑이 곧지 않았고, 다시 아버지께 묻자, 아버지는 "전방의 목표가 무엇이었느냐"고 물었고, 아들은 "제 앞에 있는 소꼬리를 목표로 정하고 바라보며 밭을 갈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아버지는 "앞을 바라보되 움직이지 않는 목표를 정하고 그것만을 바라보면서 소를 몰아라"고 지시했고, 그 지시대로 전방에 서있는 버드나무를 곧바로 바라보면서 소를 몰아가자 밭이랑은 곧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 예화에서 아들이 바라본 '움직이지 않는 목표'가 곧 비젼이고, 이 목표를 발견하는 것이 곧 비젼을 발견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비젼을 찾기까지 인생은 이 아들의 밭이랑처럼 뒤틀리고 아름답지 못한, 방황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젼(vision, 보는 것, 시력, 환상, 꿈, 미래의 삶의 목표, 영감, 이상, 先見)이 없는 백성이나 개인은 방자하고 망하게 된다(잠 11:14; 29:18).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겪었던 비극의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이 있어도 (하나님의 비젼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우맹과 몰지각성에 있었던 것이다.


인류역사는 비젼이 있는 백성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하나님께 크고 귀중하게 쓰임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위대한 비젼을 경험/소유한 사람들이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는 바울과 같이(빌 3:10-12) 부활과 영생과 천국이라는 엄청난 비젼을 바라보며 환희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현 시점에서 Nyskcian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개인/교회/국가적) 비젼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비젼을 매일의 삶속에서 확인하고 실현하는 길은 무엇인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가졌던 비젼을 고찰하고 연구하면서 우리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롭게 결단해보자.


본문에 대한 문학적 접근


본문은 주석가들이 문학양식에 따라 '예언자의 소명 설화/이야기'(Prophetic Call Narrative)로 분류하는 하나의 우수한 문학으로서, 예언자가 자기 정체성("나는 누구인가?")을 확인하고 백성들이 제기하는 예언자로서의 정통성에 대한 질문("누가 당신을 보내었으며 그 소명의 근거는 무엇인가?")에 답변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인증받기 위한 일종의 변증적(apologetic) 문학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의 거의 모든 예언자들은 각자의 '하나님 체험'을 기술하는 소명기사를 갖고 있고(사무엘/삼상 3; 엘리사/왕상 19:16-21; 왕하 2:1-14; 이사야/6:1-8; 예레미야/1:4f; 에스겔/1:1f; 2:1-4; 3:1f), 이 소명설화의 공통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곧 비젼 체험과 소명자의 겸양이었다.


예언자에게 있어서 그만큼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현상을 보는 것(비젼)은 중요했고, 엘리의 시대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비젼이 희귀한'(삼상 3:1) 현대 21세기 쾌락/물질만능 시대를 예언자적으로 살아야하는 Nyskcian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비젼은 더욱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본문의 내용 분석


A. 모세의 비젼 체험(1-6절)

a. 비젼의 때와 장소(1절):

a) 때:(모세 나이 80세 쯤); 장인(제사장=이드로)의 양떼를 칠 때(업무 중)

b) 장소:광야 서편/끝, '하나님의 산' 호렙

b. 비젼의 내용(2절):

a) 천사가 떨기나무 불꽃의 '모습으로 나타남'

b) 비젼의 특이성: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나무가 소멸되지 않음

c. 모세의 반응(3절):호기심/경이감/환희('이 큰 광경')와 의문('어찌하여')

d. 하나님의 부르심과 모세의 대답(4절):

a) 친히 부르심:"모세야, 모세야/○○야" (Nobody를 Somebody로 바꿔주심)

b) 모세의 대답:"내가 여기 있나이다"(자기 정체의 시인과 감사/감격)

e. 하나님의 지시사항(5절):

a) 가까이 말 것

b)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을 것

f. 하나님의 자기 정체 표현과 모세의 반응(6절):

a) 조상(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마 22:32)

b) 모세가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움


B. 하나님의 성품과 지도자를 부르심과 동행의 약속 (7-12)

a. 인휼의 하나님(Divine Pathos)(7절):백성의 고난을 보고, 듣고, 아심

b. 하나님의 겸비와 구원역사 예고(8절):

a) 내려와…

b) 원주민(6족속)대신 이스라엘에게 가나안/낙원을 주심

c. 인휼의 하나님(9절):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학대를 보시는 하나님

d. 예언자 파송 선언과 사명(10절):바로에게 보냄; 백성을 인도하라

e. 모세의 겸양/겸손(11절):"내가 누구관대"(비젼 체험자의 변화)

f. 동거동행의 약속과 신적 파송의 보증으로서의 싸인 (sign)(12절):

a)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임마누엘의 약속)

b) 이 호렙산에서 너희가 나를 예배하리라


본문의 의미 설명


1) 비젼의 때(1절):모세의 일생은 신분과 삶의 전환점이 분명한 3부 구조, 즉 바로의 양자로서 40년, 광야의 망명자/목동으로서 40년,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 생활 40년으로 되어있다.


호렙산에서 처음 하나님을 만난 때는 제2기가 끝날 무렵, 즉 망명자, 실패자의 고독과 무기력과 절망이 절정에 이른 80세 때였다(출 7:7).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젼 체험 또는 하나님의 소명체험에 있어서 인간의 나이는 무관한 것임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 과정을 거친 사람을 쓰신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2) 비젼의 장소(1절):'광야의 서편/끝' 곧 인간 노력과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는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됨을 가리킨다.

한글 개역성경에서 '아하르 함미드발'은 '광야 서편'으로 번역하였으나, 문자적으로 '광야 뒷 편(back, behind)' 또는 '광야의 맨 끝 변두리(side)'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참조:Jerusalem Bible역­"the far side of the wilderness", 표준새번역­"양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서", New English Bible­"along the side of the wilderness").


'하나님의 산'(the mountain of God),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산' 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산'으로 알려졌던 이 호렙/시내산에 대하여 모세가 이전부터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사건 이후에 이 산을 그렇게 불렀는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으나, 모세가 이 거룩한 산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고, 자신의 내적 고민을 안고 광야의 끝에 있는 이 호렙산을 찾았다는 것을 본문은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호렙'은 '황무지, 황폐/건조한 지역' (desolate/dry place)을 의미한다. 주석가들에 따르면, '호렙산'이라는 명칭은 북이스라엘 사람들(Elohist)이 사용했고, '시내산'이란 명칭은 남유다 사람들(Jahwist)이 사용하였으며, 이 산을 현재 아랍 사람들은 '게벨무사'(모세의 산)라 부른다. 시내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다.


3) 비젼의 내용(2절):천사가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의 모습으로 나타나심

'말르아크 야웨'는 야웨의 '사자' 또는 '천사'로 번역될 수 있다(창 19:1; 민 20:16). 북이스라엘(Elohist) 전승에서는 '신인동형론'을 지양하는 경향에서 야웨 하나님의 임재시에 야웨의 사자/천사가 임재한 것으로 둘러서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야웨의 사자가 나타난 것은 곧 야웨께서 직접 모세에게 불꽃으로 나타난 것이고, 성경의 저자는 빈번히 하나님을 불 또는 불꽃으로 상징화하고 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이 구절(블랍바트 에쉬 미토크 하스네을 표준새번역과 Jerusalem Bible에서는 한글 개역과는 약간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주의 천사가 떨기(나무) 가운데서 이는(타오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The angel of Yahweh appeared to him in the shape of a flame of fire." 이 번역들은 떨기나무에 붙은 불이 야웨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모세가 본 비젼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중요한 해답을 염두에 둔 것이다.

불로 상징되는 하나님(성령)과 떨기나무(가시덤불나무/thorn-bush)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이 동거동행(임마누엘)할 영광스런 미래를 하나님은 모세에게 미리 보여준 것이고, 이 비젼을 바라볼 때 모세는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애굽의 바로에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비젼을 소유했기에 모세는 바로의 아들로서의 영광과 부귀를 기꺼이 포기하고 고난을 자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히 11:24-26).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거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이상은 부분적으로 성막 건축과 솔로몬의 성전건축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실현되며, 최후로 완전하게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행 2장), 그리고 부활과 영생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천국에서의 동거를 통하여 실현될 것이다.


4) 비젼의 특이성(2절 하반절):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나무가 소멸되지 않음


'떨기나무'(스네/ , 여기에서 '시내'산이라는 명칭이 유래한 듯)는 영어로 'thornbush'로 번역된, 가시떨기나무를 가리킨다.

이 떨기나무는 우선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예고하고, 더 나아가 교회와 (애굽에서 200년 이상 종살이를 통해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한, 그러나 가시가 돋혀 까다로워진)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며, 이 가시에 불과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선택하여 동거하시는 하나님의 연민과 사랑(divine pathos)을 상징하고, 더 나아가서 나약한 가시나무이지만 애굽의 불같은 시련/억압 속에서도(신 4:20; 사 48:10) (하나님의 은혜로) 결코 소멸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의 능력과 영광을 상징한 것이라 할 수 있다(랍비들의 미드라쉬 참조).

가장 천하고 무가치한 가시떨기나무로 자처할 때 그때부터 하나님과의 임마누엘(동거동행)은 시작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5) 비젼 목격자의 반응:경이감('이 큰 광경')과 환희와 의문('어찌하여')

비젼을 체험하는 Nyskcian들의 공통된 반응은 놀라움과 함께 느끼는 기쁨과 환희와 의문이다.

Nyskcian이 시시때때로 경험하는 하나님의 손길은 성도만이 느끼는 환희와 행복으로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만족스럽고 영원한 것이다(찬송가 102장 참조).


6) 하나님의 부르심(소명)과 모세의 응답(4절)

'모세야, 모세야':일꾼을 부르실 때 두 번 연속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의 행동 양식이다(삼상 3:10). 하나님의 소명시의 음성은 결코 애매하거나 불분명한 법이 없다.

이러한 부르심을 통하여 모세는 (40년 목동생활의) '별볼일 없는 인간'(Nobody)에서 '하나님께 의미있는 인간'(Somebody) 즉 하나님께 인정받는 인간으로 변화되는 감격을 맛보았고, 이것이 비젼 체험자의 또다른 환희요 기쁨이다.

세상 모두 몰라줘도 하나님이 인정해주시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만 확인되면 세상에 부러울 것 없다. 이것이 비젼의 진수다.


7) 하나님의 지시사항(5절):가까이 말라;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어라


성역에서 신을 벗는 것은 고대 중동의 관행이다.

신의 영역에 들어가기에 앞서 인간은 신 앞에서 종의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고, 과거의 모든 자존심/기득권/소유권/보화를 포기해야 한다.

야웨의 종으로서의 환희 가득한, 그리고 먼지 묻은 세상을 초연한 지도자로서의 새 삶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8) 모세의 겸양(11절):'내가 누구관대…'


비젼을 보는 Nyskcian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자기 정체성 고백과 겸손/겸양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이 비젼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뒤에 자신을 가리켜 "죄인 괴수,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딤전 1:15; 고전 15:8)라 부른 것처럼,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뒤에 깨닫게 된 자신의 정체는 "죽은 개만도 못한 놈"이었다


9) 동거동행의 약속과 신적 파송의 보증으로서의 싸인(12절):


'내가 정녕 너화 함께 있으리라':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약속을 보장받을 때 지도자는 생명을 걸고 소명에 충실할 수 있다.


'너희가 이 (호렙)산에서 나를 예배하리니':모세의 일차적 소명과 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 성소까지 인도하여 그곳에서 야웨와 언약을 맺고 야웨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 야웨을 경배하고 찬양하게 하는 것이었다.

모든 비젼의 진정한 동기와 목표는 그런 의미에서 선교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교육과 구제적이어야 한다


적용과 결단


1) 질문:Nyskcian들이 (엘리의 시대처럼) 비젼과 환희를 상실한 이유는 무엇이며, 모세처럼 비젼을 보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대답:

(가) 모세처럼 광야의 끝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 대하여 철저하게 절망해야 하고, 자신의 모든 소유와 꿈과 미래의 계획에 대한 포기가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나) 하나님의 산/은혜의 장소를 찾아 나아가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자신이 한낱 무가치한 가시덤불 나무처럼 쓸모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고, 이 가시나무에 성령/하나님이 임재할 때 놀라운 능력의 존재가 됨을 알게 되며, 이 비젼을 볼 때 놀라움과 환희가 가득한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 교만의 신발을 벗고 주님 앞에서 종/노예의 자세를 취하자.

이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대 가운데서 우리에게 고귀한 사명을 위탁하시는 영광스런 비젼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2) 질문:내가 과거에 가졌던 비젼은 무엇이었으며, 현재 성령의 감동 속에서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보는/발견하는 비젼은 무엇인가?



대답:

육체의 욕심에 기초한 비젼과 주께서 보여주는 거룩한 비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 추구한 과거의 나의 비젼은 그것이 물질이든, 명예든, 권세든, 쾌락이든 간에 하나의 우상에 불과하고 마귀의 유혹에 미혹된 것으로써 이러한 헛된 비젼의 결말은 후회와 절망과 어둠과 사망이며, 그러한 육체적 비젼은 (인간의 노력으로) 달성한다 해도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과는 상관이 없는 무가치하고 허무한 것이다.


이 헛된 비젼으로 인하여 한 인간과 한 국가는 그 정력과 시간과 재물을 무가치한 것에 낭비하게 되고, 인간은 방황하고 국가는 비틀거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또는 꿈으로, 또는 기도 가운데서 주시는 환상이나 영감이나 깨달음을 통해 (모세의 비젼을 통하여) 터득하게 되는 (현재의) 비젼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직결된 것이고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참되고 영원하고 거룩하고 가치있는 비젼으로서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게 행복과 평안을 안겨주는 비젼이 될 것이다(롬 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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