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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skc Symposium'16

환 영 사

회복의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회복의 신학연구학회가 지난 2000년에 설립되어 첫 Nyskc Forum으로 Goshen, New York로 문을 열었다 그 때는 컨퍼런스와 함께 열렸기 때문에 하루 4강좌를 가졌다 주제는 예배회복이었고 에배와 관련된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2001년도 마찬가지로 같은 장소 같은 주제로 열렸기 때문에 소박하고 간소한 자리였다 이어 2002년에도 똑같이 열렸고 이후 2003년에는 New York를 떠나 Out of State California에서 처음으로 컨퍼런스가 Big Bear Mountain Playhouse에서 갖었다. 이때 처음으로 학회장 장상선목사님이 맡아주셨고 그리고 2004년 Dekalb, Illinois University에 컨퍼런스와 별도로 디켈브 한인장로교회(안영철목사)교회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부학회장 윤사무엘목사가 맡게 되었다 그 이후 2005년 워싱턴 DC.2006년 Tawooson University에서 갖었으며 Atlanta, GA 제일장로교회(서삼정목사)에서 갖었다

2007년 Colorado YMCA에서 개최되었고 2008, 2009,까지 계속 같은 장소에서 갖었다 그리고 2010년 Nyskc Empire Conference가 열리면서 New Jersey Princeton Seminary를 2014년까지 갖었고 2015년에는 Nyskc Family Conference 20주년기념으로 Delaware University에서 열렸으며 2016는 Ohio에 위치한 Nyskc University에서 갖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2010년부터 현 학회장 윤사무엘목사가 맡게 되었으며 2014년 학회실장 최기성목사가 맡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긴 시간을 달려올 수 있게 하셨음은 참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하지만 그동안 이렇다 할 만한 자료집을 낸다든지 학술지를 변변히 내지 못했던 것을 아쉬움으로 남는다

세계 유일에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회복의 신학에 대해서 깊이 연구가 있어야 함에 부족했던 것은 하나님 앞에 송구함을 표현할 길이 없으며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도 자신있게 내 보이지 못함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앞으로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연구학회이기에 기도하며 성령에 도우심으로 달려가고자 한다 우리가 연구하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회복의 신학 중에 예배를 중심으로 연구하면서도 그 첫째로 구원론을 연구한다 둘째는 성령론을 연구한다 셋째는 교회론을 연구한다 이것이 회복의 신학적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온전하게 예배를 드려야 할 본분을 가지고 있다 칼빈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왕국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직 자신의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제도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칼빈은 성례(세례와 성찬)와 말씀사역과 권징을 신자들의 모임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구인 교회의 표지로 삼았다. 그리고 칼빈은 말씀과 성례와 권징은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맡겨진 사역이라고 강조한다. 칼빈에게 있어 교회의 직분은 말씀과 성례와 권징을 올바르게 시행함으로써 교회의 존재를 드러내는 봉사를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교회를 ‘직분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로 정의하고 있다. 칼빈의 교회론은 필연적으로 교회의 직분을 필요로 한다. 이 직분과 관련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 제31문답에서는 교회 직분의 기원을 그리스도의 삼중 직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이 삼중 직에 근거하여 교회는 교회의 직분 제도를 도입했다.

사도 시대부터 교회는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딤전 5:17-18) 이때 그리스도는 가르치는 직분자인 목사를 사용하여 교회를 인도하시는 선지자가 되신다. 그리고 다스리는 장로를 사용하여 교회를 통치하시는 왕이 되신다. 사도들이 복음을 설교하는 일에 전념하기 원하였기에 예루살렘 교회는 교중 가운데서 일곱 집사를 선택했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집사들을 통하여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게 하셨다. 이때 그리스도는 직분자인 집사들을 사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시는 자비로우신 대제사장이 되신다. 이런 이유에서 교회는 언제나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교회의 항존직이라고 한다.

벨직신앙고백서(1561년)는 제30장에서 참 교회는 교회의 표지(말씀선포, 성례, 권징)와 직분이 정당하고 정상적으로 행사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고 고백하고 있다.그런데 교회의 본질적 특성을 규명하는 교회의 표지와 직분이 온전하게 구현되는 형태는 교회의 조직이 아닌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구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표지들과 직분들이 전적으로 온전하게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어 완성된 것이 바로 ‘교회의 예배’여야 하는 것이다.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예배는 말씀선포, 성례, 권징이 동시에 동반되어야 하며 아울러 이 표지를 위해 봉사하는 직분, 즉 목사와 장로들과 집사들이 협동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의 예배는 교회의 표지와 직분으로만 구현이 가능하다. 이 중 어느 한 요소가 빠지거나 어느 한 직분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결코 온전한 예배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참된 교회의 표지를 드러내고 직분자들이 함께 봉사하는 예배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 회복의 신학을 근거한 예배의 제사를 세워나가야 한다. 그리고 온 교회는 이 아름다운 예배의 자세를 가지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것이다. 그 결과 교회의 예배가 새롭게 되고, 성령과 진리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본질이 회복되기를 기대하며 2016년 회복의 신학연구학회 주체로 Nyskc Symposium(회복의 신학 정기학술대회)이 열리게 된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때를 위함이 아닌가” 하는 믿음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 (요4:24) 이 말씀은 성경전체에서 예배에 관하여는 이것보다 명료하고 강력한 선언은 없을 것이다. 예배는 기독교의 꽃이며 성경의 주제이며 삶의 정수이며 인생의 절정이며 영혼의 잔치이며 최고의 사건이며 복 중의 복이다. 이러한 예배의 관건은 무엇보다 누구에게 예배를 드릴 것이냐에 달려 있다. 진실로 예배의 본질과 내용과 방식은 예배의 대상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온 세상에 인간의 종교성이 발휘된 온갖 종류의 예배를 일별해 보자.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 근거하여 우상숭배 가능성 측면에서 본다면 숭배의 대상이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물속에 있는 것들일 수 있겠고 거기에 그것들을 숭배하는 주체의 다양성을 더한다면 예배의 종류는 천문학적 수치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며 예배의 대상을 하나님 한 분으로만 제한하고 있다. 우리에게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 뿐이다.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할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속성은 하나님이 육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는 요구되는 예배의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빈곤하면 비록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한다 할지라도 "알려지지 않은 신"(Ἀγνώστῳ θεῷ)에게 경배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경배의 진정한 개념도 애매해질 것이고 예배의 합당한 방법에도 무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 경배하는 아테네 지성들의 빈곤한 신개념과 재단을 쌓고 사당을 세우는 그들의 인위적인 방식에 엄중한 일침을 가한다. 그리고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의 손으로 지어진 전에 계시지 않으시며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 아테네 이방인의 무지와는 달리 유대인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에 대한 오해가 있었는데 예배의 유일한 처소가 예루살렘 지역에만 있다는 것이다. "백 투 더 예루살렘" 운동도 어떤 특정한 지역에 과도한 종교성을 부여한 지역주의 맹신의 희생물이 아닐까 싶다. 사마리아 여인도 유대인의 '지역주의' 오해를 듣고 예루살렘 지역을 예배의 처소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답변을 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는 "여기서도 말고 저기서도 말고" 즉 물리적인 장소에 매이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는 예루살렘 같은 특정한 장소에 특별하고 신비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도 계시며 누구와도 만나시며 언제든지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이다.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순서가 구비되지 않으면 예배가 불가능한 것처럼 어떤 인위적인 조건에 의존하는 분이 아니시란 말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분이다. 이러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지구상의 어떤 지점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진리 안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일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영적인 예배와 올바른 예배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신앙은 점진적으로 깊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컨게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냐되는 권세를 얻었지마는 주님의 나녀로서 온전해 지기까지는 시간이 상당히 소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화라고도 하고 혹는 구원의 완성을 이룬다는 말로도 표현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들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어렸을 때는 부드러운 음식을 취하고 장성하여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첫 발은 가시적인 교회로부터 출발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말은 먼저 몽학선생에서 출발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곧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교회가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또한 예배에 있어서도 시작은 예식에 따른 예배로 진행되어가다가 점점 주님을 만나는 것으로 예배가 세워져 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영적이라는 말로 실제적 생활 속에서 보여지는 것을 무시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면 결국 삶에 있어 예배자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하나로 섬겨야 하는 것처럼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은 영혼 차원에서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시다. 그런데 영혼은 어떤 식으로도 꾸며지지 않는 곳이다. 예배의 무늬만 갖추는 가식이나 연출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타락과 비참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곳이 예배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자로 발견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영혼의 추한 실상을 생각하면 우리에겐 도무지 예배자의 자격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망의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를 하나님 의로 삼으시고 영원토록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가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의 내주 때문에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가슴에서 터지는 감격과 눈물을 쏟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히는 크고 무한한 은혜가 바로 예배인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만 강조하는 분들은 대체로 어떤 신비로운 황홀경을 예배의 지고한 경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모든 것이 정지된 고요한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엘리야가 보여준 주님과의 신비로운 조우와 연합의 사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이시라 할지라도 영혼의 신령한 상태만이 예배의 전부가 아님을 예수님은 "진리 안에서"란 문구를 추가하며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영혼과만 결부되지 않고 삶을 의미하는 우리의 몸과도 분리될 수 없다.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 육체로 오신 예수시며 성경 전체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란 방식은 결코 예사롭지 않으며 성경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이는 예배가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면서 동시에 성경 전체와 관계된 것이라는 말이다. 나아가 성경은 그 전체가 우리의 신앙과 인격과 삶의 규범이기 때문에 우리의 전인격과 전 생애가 예배와 결부되어 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다"(롬12:1)는 바울의 권고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비해서 볼 때 자칫 바울이 예수님의 예배 관에 무례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 아니냐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몸과 영을 서로 대립적인 쌍극으로 이해한 이원론적 사유에의 무의식적 적응이 빚은 선입견일 뿐이다. 영혼과 몸을 과도하게 분할해서는 안 된다. 영과 몸은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서로 조화하고 상응하여 한 인격체를 구성하고 있다. 예배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배제될 수 없다. 바울은 몸이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지는 것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와 무관한 다른 예배가 아니라 "영적 예배"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몸의 배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몸은 삶을 의미하고 바른 삶은 진리와 분리할 수 없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이 12장에서 밝힌 몸의 산제사를 가능하게 하는 성경 전체의 영적인 구속사적 가르침을 요약하고 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말씀은 영이다. 말씀은 우리의 몸과 영에 모두 관여하고 있다. 그리고 몸은 삶입니다. 몸이 없으면 삶도 없다. 몸이 거하는 모든 곳에서는 어디서든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어디나 보다는 구별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루살렘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배에 대해 원천봉쇄 당하시는 분이 아니다.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온 세상에 흩어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과 진리 안에서만 경배를 받으신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거하시지 않고 진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예배는 거룩한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드릴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믿고 알고 몸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만이 진정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이처럼 최고로 복된 삶이다. 삶이 예배이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살았어도 죽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 전체가 거룩하고 영적인 예배라는 바울의 권고를 빌미로 삼아 모이기를 힘쓰고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하는 기독교의 장구한 전통을 무시하고 소멸하는 것은 주님의 다른 말씀을 핑계로 자신의 기호를 슬그머니 표출하는 야비한 극단인 것 같다.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은 성경에 뿌리를 둔 것이다. 그리고 주일이나 다른 날들에 드려지는 구별된 예배를 통해 우리는 영과 진리 안에서 몸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의 본질과 범례를 배우고 익히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삶의 모든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영적 예배로 드려지고 있는지도 점검할 수 있다.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아무데나 아무때나 적용하는 고질적인 악습은 근절해야 할 것 같다. 모순처럼 보인다고 버리면 기독교의 진리는 남아나는 게 거의 없을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않으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의미도 모르고 어떠한 삶이 바른 것인지도 모를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예배하고 진리를 깨닫고 딱 그만큼만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 영이신 분이심을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예배를 드리고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가 살아 있고 회복되어 있는 주의 백성이다 우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개혁주의가 말하며 주장하는 예배가 무엇인가 혹은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은 개혁주의 예배가 성경적 예배다 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교회의 예배는 과거 전통적인 교회의 예배와의 연속성이 결여돼 있는 전혀 새로운 예배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유행처럼 지나갔지만 과거에 없었던 소위 열린 예배 혹은 구도자 예배 형태가 기존 예배와의 분리 형태로 번져가고 있던 때를 기억한다

각종 전도집회 혹은 부흥회와 같은 집회의 특성은 음악과 악기 사용에 대한 강조, 죄인 회개를 위한 초청 메시지와 전파되는 메시지를 듣고 믿고 작정한 자들이 강단 앞으로 나오라는 제단초청에 있다. 이와 같은 집회의 주 목적은 교인 생산이지 회개한 심령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서 올바로 섬기게 하는 것이 아니다.여기에서 위험한 것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견지해오고 있는 구원론의 무용화 또는 성경적인 교회 론의 파괴를 조장하는 요소들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예배가 실험의 대상인가 그래서 도입한 것이 유년부 청소년 청년 예배와 일반적인 예배로의 분리에 대한 신학적 근거는 없다 다만 교회편리 교인편리를 위한 방법일 뿐이다 성경적 근거가 전무한 상태로 행하여지고 있다

또한 세상의 가치관이나 혹은 사상들의 영향으로 교회가 그동안 강조해 온 절대적 가치를 무시하고, 상대주의적 가치관에 치중되어서 심지어 성적 구분과 결혼관, 진리와 비진리, 참과 거짓,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사라져가고 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의 가르침보다 신약에서의 가르침, 율법보다 은혜를, 의보다 긍휼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보이고 있으며 조금만 구약의 말씀을 앞세우면 율법적이라고 거부감을 드러나는 것을 보기도 하고 “형식을 타파”하고 예배자의 임의로운 선택에 맞추는 자유분방함이 예배의식에 영향을 주어 신학적 및 실천적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인간이 창조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높이 들어낼 수 있는 방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표출되는 예배와 지음받은 것들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노동이다. 그러나 노동의 신비는 하나님과의 교통에서만 성취된다. 즉, 예배를 통한 신비로운 창조주와의 교통이 노동의 신성함을 유지하게 하고, 그 뜻하신 바를 달성하게 한다.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의 본질이다” 라고 말 할 수 있다사람들이 디자인 하고 아디어를 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중심되어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되어야 함은 그분이 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에 근거한 것임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예배 역시 사람들이 얼마나 모이든, 또 경제 규모가 어떠하든 헛된 인간들의 종교적 욕구충족 외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이 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성경의 충족성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의 대상자가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한다. 십계명은 인간이 누구를 경배해야 하는지,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 경배할 것인지 규정하고 있다. 예배의 대상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경외하는 자가 됐다. 그러므로 지음받은 존재이며, 무엇보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을 받은 자들은 누구든지 하나님만을 경외함이 마땅한 것이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는 최고의 방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음을 받았고, 구속함을 받은 인간 누구도 높임을 받는 말이나 행위는 용납해서는 안 된다. 천사들이라 할지라도 경배의 대상자가 아니다.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오직 그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도 만들어 섬기는 것을 금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는 명령은 예배의 내용과 동기 및 목적이 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나답과 아비후의 최후는 오직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는 다른 불로 분향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나아감이 예배자의 임의적 선택이나 결단에 의해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자들은 그에게 나아가는 방도를 예배자의 임의대로 하지 않는다. 더욱이 예배자의 안목에 따라 예배 성공의 여부를 가늠한다고 헛소리 하지 않는다. 십계명의 제2계명을 주목해야 한다. 2계명은 세 가지 요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하나님의 말씀이 통제해야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둘째,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말씀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예배를 통제해야 한다. 셋째,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지하심과 엄숙하심은 그 분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경고하시는 그 분의 위협들 속에 드러나 있다. 하나님만이 예배방식을 규정할 수 있고, 그 잣대 또한 기록된 계시의 말씀 안에서 찾아지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그대로 수용했다. 말씀에 기초한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 따른 예배 모범은 보편성과 공교회성을 유지하는 좋은 방편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예배신학이 제시하는 예배의 요소는 말씀과 성경적 기도와 성경적 찬송의 회복, 성례(세례와 성찬) 거행, 헌금, 축복선언 등이다. 이와 같은 요소들은 철저하게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한 분임을 드러내는 방식이어야 하며, 온 백성들 중에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 예배 참여자들의 자기 정성과 헌신의 분출은 헛된 예배가 되게 할 뿐이다. 아무쪼록 이번 학회에 참여하신 여러 목회자와 신학자분들에게 환영하며 감사를 드린다 여러 가지 미천한 가운데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에서도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연구와 의견이 나누어졌으면 하고 감사를 드린다

주후 2016년 5월16일

NWM 대표회장 최고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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