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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skc Movement와 Conference

2004. 4.26~4.30


Nyskc Movement와 Conference



시편 27:8(Psalms)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When thou saidst, Seek ye my face; my heart said unto thee, Thy face,

LORD, will I seek.”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배를 아무리 강조해도 무리(無理)가 없습니다.

사실 교회하면 예배가 생각나야 하고 예배를 생각하면 하나님께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젖어있는 습관과도 같은 것입니다.

출애굽기 말씀을 보면 놀라운 기적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 중에서도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광야에서 태어났거나 혹은 광야에서 자란 세대들입니다.

이들은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하늘에서 만나(manna)가 내려 새벽에 부모님들이나 혹은 자기 윗형제들 중 누군가 나아가서 하루에 일용할 양식을 거두어 오기만 하면 되었고, 저녁에는 메추라기(quail)가 날아와서 줍기만 하면 고기를 먹을 수가 있었으며, 낮이면 구름기둥이(a pillar of cloud) 밤이면 불기둥(a pillar of fire)이 성막 위에 떠오르면 그것을 보고 지도자 모세가 가자고 하면 가고 여기서 머물라 하면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 살며 전쟁 중에도 모세가 손을 들고 있으면 승리를 거두고 손을 내리면 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모든 백성들이 성막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으며 대제사장(a high [chief]priest)인 아론의 말에 따라 하나님께 예배는 이렇게 드려라 하면 그 방식대로 따라 하였기 때문에 그것도 아무런 의견을 내놓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1.습관적인 신앙

모세가 죽고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이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때도 하나님에 의해 모세가 정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법궤를 제사장에게 메게 하고 요단을 건너가자고 하였을 때 물이 넘쳐 감히 사람의 생각으로는 갈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순종(obedience)하면 그대로 되었던 것처럼 광야의 출신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아멘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1세대들은 가나안에 들어가면 정탐꾼(spy)들의 말처럼 덩치가 크고 귀골이 장대한 아낙자손들이 각종무기를 들고 우리가 요단강을 건너올 것을 대비하여 경계에 경계를 하고 있고, 또한 철옹성(an iron-clad bastion)과 같은 여리고 성에서 전투태세를 하고 있는 것이 두려워 불평을 하며 차라리 광야로 나가겠다고 하였을 때도 1.5세나 2-3세대는 부모나 친지를 따르지 않고 여호수아를 따라 요단을 건너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거의 습관적인 것 같은 신앙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사람들과 광야로 돌아갈 사람들이 이렇게 두 패로 나뉘게 될 때 여러분은 어느 쪽을 따를 것 같습니까?

광야로 가겠다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광야로 가겠다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이 땅에서 결코 버릴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고 부인할 수 없는 나의 부모와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의 출신(birth)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따라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오직 순종으로 무너뜨리고 승리를 하게 됩니다.

광야의 출신들은 습관적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습관처럼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습관화되고 의식화(意識化)되는 것보다 형식화(形式化)될까봐 우려하는 말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형식화되어 중심에는 아무런 의미부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만 형식에 따라 습관적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거부(refusal)하셨습니다.

중심에서 드려지는 예배만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므로 예배가 형식화되는 것은 아주 무서운 영적인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예배는 드리는 것

가인은 자기가 땀을 흘려 얻은 곡식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수고로 얻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벨이 드린 어린양을 받으셨습니다. 창세기 4:3-4(Genesis)


아벨은 어미 양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새끼 양을 하나님께 드렸더니 기뻐하셨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a righteous man)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벨은 가인보다 중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제사를 형식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드렸다”라는 모습을 봅니다.

'예배를 본다'라는 표현이 맞는가 아니면 드린다는 표현이 맞는가 하는 것은 예배자의 자세에 대한 것입니다. 예배의 참여자(participant)인가 아니면 참관자(audience)인가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극장을 가고 쇼를 보는 것은 말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방청객이며 관람자이며 참관하여 어찌하나 보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배는 내가 들고 간 제물만 드리고 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예물과 더불어 나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과 물질과 정성과 나의 중심까지 그리고 내 몸까지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태어났으며,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주님이 아니 였으며 오늘까지 살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축복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 여호와의 사랑과 예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성령께서 인도하신 그 놀라운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살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보는 것은 '눈으로만 보는' 결과로 예배를 가치 하락시키는 것 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정성이 언어로 표현되고 또 표현되는 언어가 우리의 무의식적 사고를 지배한다면 좀 더 정성이 담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옳은 것 입니다.

예배회복을 주창하는 분들은 한두 분이 아닙니다. 인류의 모든 목사님들과 사역하시는 분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사를 보면 예배회복운동이라든가 갱신운동 성령운동 말씀운동 경건의 운동 등등 많은 이슈를 가지고 대단한 성과를 올린 기록들이 있습니다. 성과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한 세대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지속되는 Movement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신앙의 가장 기초인 예배회복운동이었을 것입니다. 모양과 형태는 달라도 지금도 많은 분들에 의해 영적각성운동이란 이름으로 혹은 열린예배 운동으로 예배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음은 귀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보게 하는 운동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멀 것 입니다.

아마 가인의 제사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 예배를 볼 수는 없다는 것 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이 의미는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예배자를 찾으신다고 하신 말씀과 함께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의 택한 백성이며 그분의 피조물이며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태어난 존재라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예배는 기본 신앙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기본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고 하는 것은 뜻을 아주 쉽게 이해한다면 아벨의 제사인 것입니다.

아벨은 보다 더 나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보다 더 나은 제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아벨은 형식에 메이기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령한 중심으로 진정한 마음으로 새끼 양을 드렸습니다.

예배는 일회용이 아닙니다.

예배는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드린다는 말은 나의 겸손과 부족을 인정하고 다만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예배할 때가 오나니 “바로 이때라"고 하셨습니다.

'예배한다'는 영어표현은 "I worship God"입니다. Worship은 worth에서 파생된 언어로 하나님의 가치를 인정해 드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행위"가 예배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Offer yourself as a living sacrifice". 이것은 우리 몸을 제사같이 제물로 비유한 말씀입니다.

제물은 당연히 드려지는 것처럼 우리도 예배를 '드리다'가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드릴 때를 “영적 예배니라" "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과 마찬가지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듯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배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예배'라는 말보다는 '집회'나 혹은 '만남'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 표현이 아닐까요?

예배는 하나님만을 초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영화롭게 하는 것 외에 다른 요소들은 배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경건을 뒤로하고는 결코 성립될 수 없습니다.


4.광야교회는 예배의 훈련소

출애굽기 40;34-38의 말씀을 봅니다.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Then a cloud covered the tent of the congregation, and the glory of the LORD filled the tabernacle. And Moses was not able to enter into the tent of the congregation, because the cloud abode thereon, and the glory of the LORD filled the tabernacle. And when the cloud was taken up from over the tabernacle, the children of Israel went onward in all their journeys: But if the cloud were not taken up, then they journeyed not till the day that it was taken up. For the cloud of the LORD was upon the tabernacle by day, and fire was on it by night, in the sight of all the house of Israel, throughout all their journeys.”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바로의 통치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과 신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애굽의 10가지의 재앙을 내리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케 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목적은 “광야 사흘 길을 나가”하나님께 예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땅 즉 아름다운 땅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신 그 땅으로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긴 세월을 광야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하나 바로 이런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택한 백성이요, 사랑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자고 하신 것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이 광야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수 있도록 훈련시켜주셨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사랑하며 순종하는 백성들로 세우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7:38절에 보면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출애굽의 광야의 생활을 신약의 말씀에서는 광야교회라고 하셨습니다.

광야교회의 교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긴 세월을 이방 나라인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잊었고 예배가 무엇인지 몰랐으며 섬기는 방법도 다 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조상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겼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예의 생활로 인한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습관처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하며 고통 중에 하나님을 불렀던 것 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나 이와 같은 노예에서 해방되고 회복될는지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였습니다. 우선 그들에게는 지도자도 없었고 물어 볼만한 인도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을 불쌍히 여기사 모세를 사용하셔서 애굽에서 해방시켰던 것입니다.

그 때 저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있었습니다.


5.예배는 신분의 회복이다.

첫째는 신분(status)과 예배의 회복입니다.

광야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가 아니요,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과거에는 진흙을 이기고 벽돌을 굽고 애굽 군사들의 채찍에 맞고 자고 일어나면 이런 노예생활의 반복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것에서 해방 받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을 수 있는 신분으로 그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만세 전에 택함을 입은 우리들도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 속하여 살았던 자들이었으나 이제 하나님께서 찾아주셨고 불러주셨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하나님의 택함을 입고 부르심을 받아 광야교회에 나왔지만 아직도 과거 애굽의 노예시절의 죄성이 있어서 조금만 불편하면 원망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봅니다.

430년을 노예로 살았기에 노예생활과 습관이 체질화 되어서 그 노예근성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분명 우리는 광야로 부름을 받았고 광야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며 말씀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는 신분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확신하고 살아야합니다.

자유가 없던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바꾸어주신 가장 큰 목적은 예배에 있습니다.

노예로 살 때에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는 노예로 살 때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광야로 교회로 그 백성을 불러내어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광야교회에 나온 자는 이제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의 사슬에서 놓임 받고 사망과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막과 더불어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동행합니다.

하나님과 성령으로 교통하는 생활을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광야교회에서는 예배가 목적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34절에“Then a cloud covered the tent of the congregation, and the glory of the LORD filled the tabernacle.”"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야교회에서는 구름으로 회막을 덮으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셨습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내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광야의 생활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참된 예배에는 주님께서 찾아 주시는 것이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6.예배는 영적인 회복이다

둘째로 영적인 회복입니다.

노예근성에서 해방된 이 백성들에게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과 죄와 싸울 영적인 능력을 주십니다.

사도행전1:8에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가 능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신분이 변화되면 그 신분에 맞는 능력을 주십니다.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도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치뤄야 할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공중의 세력과 싸워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싸워야 할 영적 어둠의 권세가 있습니다.

세속의 문화는 혼란과 음란과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문화입니다. 패역한 문화입니다.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하는 문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한 세상을 이길 힘은 바로 예배회복을 통하여 변화를 받는 곳에서 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6에서“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육으로는 출세하고 성공하고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라고 하시면서 성령으로 날 것을 강조하십니다.

예배를 회복한 사람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권을 주셔서 능력을 받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시며 성령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하여 복음전도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7.예배는 사명의 회복이다.

셋째로 사명의 회복입니다.

광야백성의 목표는 가나안땅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천국을 맛보며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제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사명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것은 우리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계획을 이루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받은 사명입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을 따라 진행하였습니다. 진정한 사명의 회복은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고 하나님의 뜻에 맡길 때 가능합니다.

구름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의 임재가 있을 때 그들은 길을 떠나 가나안을 향한 행진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멈추면 그들도 하는 것들을 멈추었습니다.

순종의 훈련이며 주님의 뜻이 아니면 행하지 아니하는 철저한 훈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교회에 이르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예배 회복(NYSKC)을 위해서 광야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8.예배는 희생이다.

출애굽 5:3“let us go, we pray thee, three days' journey into the desert, and sacrifice unto the LORD our God”“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허락하소서.ꡓ

희생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드릴 제물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희생과 제사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예배와 산 제사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사에는 제물이 있는 것처럼 예배에는 예물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입니다.

제물이 없는 제사가 없고 예물이 없는 예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다 더 나은 제물을 드렸던 아벨은 예배를 성공한 사람인 것입니다.


9.예배는 교회를 설립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제일 먼저 예수님에게 요구한 질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우리가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ꡓ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But the hour cometh, and now is, when the true worshippers sha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in truth: for the Father seeketh such to worship him” “예배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지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요한복음 4장23절에 말씀을 보면서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분위기가 중요하지 않다고들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가장 진실한 맘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영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신앙의 우선순위를 말할 때 하나님을 가장 우선에 둡니다.

천국을 가장 우선에 둡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상에 살고 있으며 천국에 가기 위한 지상에서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약은 보이는 것과 만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신약은 보이는 것과 만질 수 있는 것과 느낄 수 있는 것들로 시작하여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로 들어갑니다. 오직 지상에서는 믿음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영원한 도성의 말씀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천국을 볼 수 있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시작부터 영원한 세계만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원한다면 그렇게 성경에 기록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모형이니 상징이니 예표니 하는 신학적(theological) 언어들이지만 모든 것이 사실적이며, 역사적인 근거로 말씀을 시작하고 그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영적인 의미를 함께 기억케 하시며 우리가 장성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신앙생활 처음 하는 분에게 예배는 아무데서나 드리시길 바랍니다.

장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 두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예배드린다고만 하면 하나님 함께 계십니다’ 라고 권면한다면 교회가 무슨 필요가 있고 목사님을 왜 세워야 하며 예물은 어디에다 드려 사용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분위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들을 합니다.

왜 분위기(atmosphere)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분위기라는 말은 기분이나 주위 상황 등을 표현하는 정서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예배를 잘 드릴 수 있게 하며 세속과 구별된 거룩한 곳으로 지정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무너진 다윗의 천막을 일으켜야 하겠습니까?

In that day will I raise up the tabernacle of David that is fallen, and close up the breaches thereof; and I will raise up his ruins, and I will build it as in the days of old:

무엇 때문에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 틈을 막으며 퇴락한 것을 일으켜야 하겠습니까?

이 땅에서 교회를 세우고 성전을 수리하고 예배를 거룩하게 드리는 모든 예배의 행위나 신앙생활들은 천국에서 드려질 모형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마지막 종말에 이르러서는 아무데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야 합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이신 메시야를 만난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마을로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자기를 찾아주셨음을 자랑 하였습니다.


10.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한번은 미국 대사를 만나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들은 금이 많은 남미로 가느냐, 하나님을 믿기 위해 북미로 가느냐 항해 중에 결단이 필요할 때 하나님을 찾기 위해 이 북미에 왔다가 하나님을 찾았을 뿐더러 금도 찾고 물질의 축복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금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지금 보니 돈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도 찾지 못했습니다.”

왜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이 세계에서 당당합니까?

물질이 풍요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신다면 아주 틀린 생각입니다.

예배를 바르게 드리기 위해 일생을 바친 조상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영국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면 영국에 있을 때는 예배를 못 드리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예배를 드릴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할 예배가 영국이 부흥하기 위한 예배, 영국황실이 잘되기 위한 예배로 전락하였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광되게 하는 예배가 없는 것은 영이 죽은 것입니다.

육신이 고달파도, 정신적으로 고달파도 영혼이 잘됨의 예배를 드려야만 합니다.

믿음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아들 록펠러(Rockefeller)에게 유언을 합니다.

첫째로 너는 예배 30분전에 도착하여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가장 정성껏 예배를 드려라ꡑ는 유언을 했습니다. 록펠러는 그 유언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니는 교회는 대략 800명이 출석하는데 록펠러를 구경하기 위해서 교회 찾아오는 사람이 800명, 그래서 1600명 정도가 항상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교회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해라ꡑ 라고 유언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 록펠러는 목사님이 강단에서 들려주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계획하는 바를 물질로 후원하는데 제일 앞장서야 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 주의 종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헌신하는 마음이 생활의 열정과 통찰력으로 바뀌어서 남보다 먼저 사업에 크게 왕성하게 된 것 입니다.

세 번째로ꡐ십일조(tithes)를 제일 많이 내어라ꡑ

록펠러는 12개의 종합대학을 세웠고 4,928개의 교회를 지었습니다. 86세 되는 해에 시카고 대학과 교회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때 시카고 트리뷴 신문의 경제부기자가 물었습니다.

록펠러씨! 당신이 지금까지 26년 동안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것은 무슨 비결이 있습니까?

“예, 저는 부모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불려 받았습니다.ꡓ

“어떤 유산입니까?ꡓ

“예, 저는 어머니로부터 십일조(tithes)에 대해서 철저히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가난한 농부였기 때문에 물질적으로는 유산을 거의 물려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돈 대신 십일조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고 지금까지 한번도 십일조를 놓친 적이 없습니다. 저는 회사에 십일조부서를 두어서 40명이 십일조를 계산하게 하여 철저하게 헌금했습니다.ꡓ

그랬더니 기자가 말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업을 위해서는 번 돈을 쓰지 않고 아껴서 재투자하여 버는 것인데 십일조하고 돈을 쓰면 언제 돈을 모읍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ꡓ

“그것은 하나님의 경제학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은 장래를 보는 것이요, 미래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농장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축복을 얻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소원을 노래하는 찬양인 것입니다.


11. 예배가 살면 인생이 산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과 드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십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삶에 성공합니다. I beseech you therefore,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hat ye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sacrifice, holy, acceptable unto God, which is your reasonable service. Romans12:1

그러나 예배에 실패하면 삶에 실패합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성령이 충만할 수가 없으며 신앙생활을 잘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곧 예배생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으며 교회생활과 마찬가지입니다.

운동하는 사람도 기본체력이 중요하듯이 신앙인도 기본인 예배가 중요합니다.

구구단을 모르는 사람이 방정식을 풀 수 없습니다.

예배에 실패하는 사람이 은사를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서 내 마음대로 드려도 안 되고 의무와 책임감에서만 드려도 안됩니다.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예배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좋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또 예배를 드리러 나왔어도 죽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혼과 육체의 힘을 다하는 예배가 신령한 예배입니다.

"And whatsoever ye do, do it heartily, as to the Lord, and not unto men;“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3:23(Colossians)


어떤 일이든 신앙인은 주님께 하듯 해야 하는데 예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12.예배에는 예물이 있다.

제사에는 제물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처럼 예배에는 예물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 드릴 사람은 제사장에게 제물이 될 양이나 염소를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제물을 죽여 각을 뜨고 피를 뿌리며 제사를 드립니다. 이러한 희생이 없이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영적 예배가 몸을 산제사로 드린다는 말은 진정한 예배는 희생이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희생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희생입니다.

희생하는 예배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새벽기도를 위하여 희생하고 있습니까?

성경애독을 위하여 공부나 잠이나 혹은 먹을 것을 희생하고 있습니까?

개인전도를 위해서 나의 욕구를 충족할만한 것들을 희생하고라도 힘쓰고 있습니까?

성수주일을 지키는 것은 순교입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세상이 나를 내버려두지 아니합니다.

주일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수요일이면 꼭 중요한 콘서트가 열리고 모임이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더욱 심합니다.

어찌 예배가 있거나 기도회가 있거나 교회에 모여야 하는 날은 왜 그렇게 일이 많이 생기는지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다른 날은 바쁘니 꼭 이 날 모여야 하는 가족 친지의 모임도 주일에 있습니다.

같은 업종의 가게들은 다 문을 열고 손님을 유치하고 있는데 우리 가게만 문을 닫을 수는 없습니다.

주일날이면 매상이 두배나 세배나 오르는데 어떻게 문을 닫습니까 하며 괴로워합니다.

전쟁 중에나 과거 초대교회시대나 이제 복음이 들어가는 나라와 같은 곳이라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서는 경제적인 것이 순교이며 나의 욕구를 억제하는 것이 순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조전납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희생입니다.

현대는 외상의 삶입니다. 미리 크레딧카드로 결재하여 쓰고는 갚아야 하는 삶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메꿔야 할 것들은 있는데 그 중에서 십일조를 드리고 성전건축헌금이나 선교헌금을 드리며 감사의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의 예배를 드렸습니까?

아마 대부분 받으러 오는 예배를 좋아할 것입니다. 은혜 받으러 오고, 말씀 들으러 오고, 문제 해결 받으러 오는 것은 진정한 예배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예배는 여러분이 원하는 예배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희생하는 예물과 예배를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희생이란 아픔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무엇인가 누리기 위하여 교회에 다니진 않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아직 구원받은 확신이 없을 때야 구원받기 위해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그 구원이 감사하여 자신이 일하기 위해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예배는 받는 것이기 보다 드리는 것입니다.

주일에 일을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생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일에 생일잔치에 가고 결혼 축하하러 가면 좋은 사람이란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따돌림을 받을 각오를 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지킴으로 아픔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할 각오를 한 사람이 진정한 예배자가 됩니다.

희생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13.예배에는 기쁨과 감사가 있다.

남에게 선물을 줘도 기쁜 마음으로 주는 것과 억지로 주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신령한 예배, 영적 예배는 기쁜 마음으로 희생하는 자의 것입니다.

헌금을 드려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과 억지로 하는 것은 다릅니다.

Every man according as he purposeth in his heart, so let him give; not grudgingly, or of necessity: for God loveth a cheerful giver"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9:7(2 Corinthians)

고 말씀하십니다.

기쁜 마음으로 자신은 몽땅 드린다는 심정이 필요합니다.

구약시대 제사도 온전한 제물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눈먼 것, 병든 것, 저는 것들을 제물로 삼는 이들이 있었는데 호된 질책을 들었습니다.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이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말라기1:8-9(Malachi)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온전히 드리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온전한 제물이 되는 Nyskcian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배에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참예자, 희생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로 나와 바쳐지는 예배를 드리십시오.


14.예배는 생명의 연장이다.

그리스도인의 오해 중에 가장 크고 흔한 것이 예배는 주일에 한 시간 드리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예배는 삶입니다.

예배시간에 제대로 예배를 드렸어도 그 삶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으면 예배 시간 한 시간은 무의미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12:2(Romans)

하셨습니다.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

유행을 따르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하며 세속을 싫어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배의 삶이 되면 자연적으로 없어지게 됩니다.

세속을 단절하려고 하는 것보다 예배를 우선하는 삶이 되시는 Nyskcian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인 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곡식과 양의 제물의 종류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삶이 문제입니다.

제사에서 실패한 가인의 이후 태도를 보면 압니다.

가인의 삶은 미움과 질투와 증오의 삶이어서 결국은 동생을 죽이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런 중심을 가진 자가 드린 예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리 없습니다.

여러분의 예배는 성공하고 있습니까?

예배에 성공해야 삶도 성공합니다.

희생의 제물이 되시고, 기쁘게 모든 것을 드리는 예배로, 삶의 현장에서도 그런 예배적 삶이 이어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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