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skc Mission Family Conference SA'17

환영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예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목사님이 되었던 선교의 일선에서 애쓰시는 분이든 성도들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혹은 참된 예배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선교를 하던 전도를 하던 목회를 하고 신앙생활을 하든지 간에 예배에 관심이 있는 것은 당연하며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릴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늘 마음 속에 있음을 발견합니다

Nyskc Movement는 언제나 이런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연구하고 신학적으로나 목회학적으로 그리고 선교적으로 예배에 관련된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선교의 목적이 무엇입니다 Donald A. McGavran이 주장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혀 모르는 저들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와 구주로 받아들여 그의 교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되게 하는 것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복음전도와 정의실현을 위해 일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위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일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부름을 입은 사람들(ekklesia)이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선교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그 보내는 일을 감당하며, 동시에 교회의 구성원들이 그 일에 동참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상시에 하나님께 먼저 우리의 삶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산제사로 자기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가정의, 교회의 중심에 주님께서 계시며, 우리의 구분된 마음으로 주님을 예배드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원래 교회의 목적에는 선교와 교육과 구제라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들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예배자로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의 방향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복음을 듣지 못한 자를 찾아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하셨습니다

여기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신 말씀은 곧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자로 세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없는 곳에 예배를 심는 것이며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Rev. John Piper는 “선교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말을 하면서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선교가 아니라 예배다”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저서 "열방을 향해가라"에서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예배가 그 목표다. 예배가 없기 때문에 선교가 필요한 것이다. 이 시대가 끝나고 구속받은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게 될 때 선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일시적으로 필요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예배는 영원히 남는다. 예배는 선교의 연료요. 목표다. 예배가 선교의 목표라 함은, 선교할 때 우리가 오로지 열방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의 목표는 열방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고 기뻐하게 하는 것이다. 선교는 예배로 시작해서 예배로 끝난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배가 선교의 불꽃을 위한 연료가 되게 하소서 우리는 당신 이름의 열정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우리는 당신의 찬양을 위해 나아갑니다.

우리를 보내소서 예배가 선교를 겨냥한 마음(심장)이 되게 하소서

온 세상이 당신의 명성을 알 수 있도록 모든 족속과 방언이 당신을 찬양할 때까지 우리를 보내소서 당신은 모든 입술의 찬양이 되셔야합니다

당신은 모든 마음들의 기쁨이 되셔야합니다

그러나 당신 나라가 온전히 임하기까지 마지막 계시가 피어오르기 까지 우리를 보내소서

모든 족속, 모든 방언, 하늘과 땅의 모든 생물들 모든 마음, 모든 영혼은 당신을 찬양 할 것입니다. 당신을 찬양 할 것입니다.

모든 음과 모든 가락, 모든 멜로디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 모든 입술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하모니 우리는 당신을 찬양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찬양할 것입니다

Mission's Flame Matt Redman이 Rev.John Piper의 열방을 향해 가라 책을 보고 작시 작곡한 찬양입니다

성경의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일관되게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 마음의 중심은 호세아가 호소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를 힘써 아는 것’입니다(호6: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도 땅의 모든 민족이 여호와를 알고 섬기게 하려는 것이었고(창 12:1-3),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도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서 모든 나라에 여호와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출 19:5,6). 에스겔서에서는 무려 52번이나 이스라엘 가운데 어떤 일을 행하심은 모든 사람이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겔6:10).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여호와를 알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이유는 모든 민족들이 여호와께 돌아와서 여호와를 예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시 22:27).

바울은 선교의 목표가 모든 민족으로 주를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롬1:5). 또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고후 10:5) 선교의 목표인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시편 67편에서도 모든 민족이 주를 찬송하게 해 달라는 간절한 열망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선교의 완성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계시록에서도 구속사의 High Right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어린양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종결을 맺고 있으며 (계5:9;7:9,10). 그럼으로 우리는 분명히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배 회복은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지만 또한 선교의 동기와 동력을 제공하는 원천이기도 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모든 열방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그 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소망하는 믿음으로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 까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이르지 못함을 예배 가운데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already) 임하였지만 아직은 아닌(not yet) 것과 같은 긴장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예배 할 때 마다 아직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을 찾는 목자의 심정을 갖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선교의 동력이 되고 다시 예배가 선교의 동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일주일에도 여러 번, 그리고 지금까지 수많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예배를 통하여 선교적 동기나 선교적 에너지가 발휘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들은 일반적인 예배가 아니라 선교사의 선교 보고나 선교 대회에 가서 선교 헌신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선교적인 동기나 모티브를 거의 일으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배에 대한 갱신(renewing)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예컨대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에 대한 출발이 “교회는 과연 무엇인가”에서 시작되었다면 선교적 예배(missional worship)는 출발은 “예배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예배 가운데 무엇이 선교적 DNA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분명히 믿고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매 예배 마다, 어떤 예배 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사모하고 모든 민족이 주를 찬송하게 해 달라는 선교적 예배의 헌신이 계속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4:21-24“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예배에 대한 구약적 의미를 보면 장소적 의미가 크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올바로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성막(Tabernacle)을 보면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곳 지성소 시온좌에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명칭으로 속죄소라고 하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아니하시고 또한 “내가 거기서 너희를 만나리라”하시지 않았다면 성막(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임시 천막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하여 그곳에 임재하시겠다고 하니 그곳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성막의 본질은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말씀 듣고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수가성 여인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아주 중요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산”이라는 장소적인 것을 가지고 예배에 접근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예배란 그런 것이 아니라 대상(become the object)이 중요함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구약시대 예배가 “와서 예배하라(come and worship)”이었다면 신약시대 예배는 “가서 예배하라(go and worship)”로 전환되었다고 한 예배신학자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핵심이 방향에 있지, 방식에 있지 않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7장 9-10절)라고 찬양과 경배를 하는 것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합당한 예배가 드려지는 자를 하나님은 직접 예배자를 찾아다니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b) 그러므로 선교의 목적은 바로 예배자를 세우고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전존재가 하나님의 전존재에 반응하는 것으로 A.W. 토저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그들로 예배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Rev. John Piper는 “선교가 존재하는 것은 예배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명쾌한 선포를 하였던 것처럼 “예배가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성경의 거대담론”임을 분명히 하였던 것같이 선교와 예배는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배의 방향이란 곧 교회의 방향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교회의 목적은 선교가 아니라 예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선교는 교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교회의 사명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교회 기초가 되는 복음이 방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이 방향을 갖고 있다는 것은 결국 복음의 근원인 하나님의 성품, 즉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교에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이었어야 합니다

Dr.Darrell W. Johnson 현재 캐나다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의 목회신학 부교수로 재임 중이며 각종 강좌와 수련회의 강사이기도 한 그는 북미와 필리핀에서 설교 목사로 여러 교회를 섬겼으며 풀러신학교의 목회학 박사 과정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면서 “삼위 하나님의 사귐(Experiencing the Trinity)”이라는 저서에서 “우주의 중심에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이 관계로부터 당신과 내가 창조되었고 구속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관계를 위해서 당신과 내가 창조되었고 구속을 받은 것입니다.”

스스로가 영원한 사랑의 공동체인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하고 친밀한 사귐으로 초대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하자 타락한 만물을 구속하시기 위해 한 민족을 선택하셔서 메시아를 보내시고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는 선교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선교적 방향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방향에서 나온 세계적인 예배회복을 위한 예배사역을 지휘하고 종결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

A.W. 토저가 교회의 보석인 예배가 실종되었다고 말한 지 50년이 지났습니다.

예배 없는 선교가 존재한다면 인간의 전략과 의가 앞서는 인본주의적 선교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배와 선교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행13:2)’이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의 ‘입맞춤’과 ‘엎드림(마28:9)’이며 또한 ‘삶의 제사(롬12:1)’입니다. 예배는 24시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자 교회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목적으로 주기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정해 드립니다

선교는 타 문화권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구체적이고 의도적인 행위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만물을 화해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로 이 땅에 진정한 샬롬을 이룰 때까지 하나님 나라 복음을 구현하는 총체적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교회’를 통해서 이뤄지는데, 결국 인종과 신분의 차별 없이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예배자가 모든 민족가운데 생겨나기 위해서 선교는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의심할 나위 없이 예배가 선교의 원인이자 platform 그 자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 로마 문화의 저녁식사와 공동체 모임의 영향을 받아 교회는 가정에서 모였습니다. 따라서 저녁식사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성만찬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고(고전11), 그리고는 기도와 말씀 그리고 교제가 이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때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은사를 질서 있게 사용하여 믿지 않는 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합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모임 자체가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증거로 선교적 사명을 감당했고 핍박과 여러 환경적 제한 속에서도 계속해서 놀라운 수의 믿지 않는 자들의 변화를 이뤄내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초대교회는 급격히 늘어나는 믿는 자들로 인하여 가정 예배가 여러 한계에 봉착하면서 공공시설에서 모이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기독교가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공인되기까지 합니다.

321년부터는 주일이 공휴일이 되면서 성직자들은 예배를 예전화하고 화려하게 만드는데 온 힘을 집중하게 됩니다. 기독교제국이라 일컬어지는 유럽의 크리스텐덤(Christendom) 시대에 접어들면서 예배는 선교와 더욱 더 분리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는 예배를 통해 진정한 구원받은 자들이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제국 시대로 들어가면서 의무적인 예배참석과 성직자 중심의 화려한 예전의 발달, 그리고 진정한 구원을 기다리기 보다는 개종을 강요하는 예배의 변질과 선교의 변질이 일어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예배와 선교는 더욱 더 멀어져만 갔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신비를 드러내지 못한 채 화려해지기만 하는 예배는 점차 화석화 되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A.W. 토저는 예배를 ‘교회의 잃어버린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예배가 선교에서 분리 되면 선교만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불꽃도 시들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배라는 ‘종교적 예전’과 ‘의식(Liturgy)’이 넘쳐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불꽃이 하나님의 말씀(Word Narrative)로 타올라야 합니다.

예배 신학자인 Robert Weber는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배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에서 주의 말씀이 나눠지고 구현되는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의 이야기를 나누며 교제하는 시간으로 나갔습니다 그러한 예배는 곧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하는 강력한 동인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려지는 예배가 더욱 화려해가지만 말씀이 사라지고 오히려 이벤트적인 행사만으로 꾸미고 있으며 또한 선교에 원대한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썩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의 예배가 바로 선교적 삶인 것입니다.

예배는 포장과 열심보다 방향이 중요한데 예배의 방향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찾으시는 것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예배가 없는 곳에서 예배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설정하면 선교는 더욱 왕성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선교를 전문으로 하는 단체들은 전략과 논의, 성과에 집중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기 보다는 더욱 예배하는 기회를 늘려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성직자 한 두 명이나 사역선언문이 아닌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모이고 흩어지는 모임이었습니다.

Eugene H. Peterson은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는 예배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는 예배모임이 없다면, 우리의 육신은 분명히 우리의 소욕과 본성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시간과 공간이 육체를 갖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러한 구별된 시간과 공간, 모임은 우리의 전존재를 하나님의 전존재에 조율하는 반드시 필요한 시간입니다.

예배는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소통하시는 시간인 것입니다. 모든 전략을 세워놓고 주님께 예측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라는 강압적 예배와 기도가 아닌, 성령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겠다는 겸손한 태도와 순종은 예배로 시작하고 예배로 끝날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예배에 관심 없는 선교사, 선교에 관심 없는 예배자란 모순입니다.

깊은 곳으로 가면 예배와 선교는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선교가 없는 예배는 이제 회복되어야 하고 예배가 없는 선교는 예배하는 교회가 선교보다 우선되고 선교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라.” (롬12:1)“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살아있는 희생물로 드리라”하신 것처럼 예배하는 자나 선교에 앞장서는 자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예배나 선교는 교회의 핵심적인 사역이자 사명 혹은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라기서를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건만 백성들과 사회적 지 도자외에 영적 지도자들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책망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희생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릴 때 경건함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백성들이 그들의 죄 사함을 얻기 위한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성전으로 나아올 때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희생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나오고, 제사장들이 이 짐승들을 검사한 후에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렸는데, 흠 없고 살진 것은 자신들을 위해서 빼돌리고, 병든 것과 흠 있는 것과 약한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한 마디로 중심이 썩었던 것입니다 제사 곧 예배의 형식은 있지만 그들이 주님을 예배하는 행위를 볼 때 온전한 예배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드리는 예물을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것만 골라서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과, 물질, 몸과 마음이 가장 귀한 것이나 흠 없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책망을 면할 수 없으며 예배의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그런데 이런 말씀을 듣다보면 물질이 앞서 있는 듯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이 표현될 때 물질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예물은 그 마음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1:6) 이 당시 하나님의 뜻이 전파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가 멸망하고 백성들이 깊은 시름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시대를 신약의 시대로 바꾸어 말한다면 복음이 전파되겠습니까 선교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되면 선교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를 아비와 자녀, 상전과 종의 관계에 비교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대할 때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경청(listening closely)할 뿐 아니라 잘 지켜 행하라는 뜻입니다. 종이 상전을 대할 때,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하고, 단 마음으로, 진심으로 상전을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애굽에서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항상 이렇게 순종 하였다고 하면 광야에서의 방황은 없었을 것일지도 모릅니다

분열왕국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렇게 하였다면 앗수르와 바벨론에 각각 멸망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가 이렇게 하나님을 부모로서 상전으로서 순종하고 공경하고, 성실과 단 마음으로 섬겼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침묵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하나님을 이러한 마음으로 순종하고, 공경하고, 섬긴다면 하나님이 교회에 크신 축복으로 함께 하시며,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 성장하며 맡은 바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유다와 그리고 우리들의 교회는 이 말씀대로 하나님을 대함에 영의 부모로서, 상전으로 대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변명할 때,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말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교회의 부흥 없이 선교가 더 왕성할 수 없고 참된 예배가 드려질 때 비로소 교회가 부흥되고 선교가 저 열방을 향하여 불꽃을 붙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말1:7-8)

어차피 잠잠하신 하나님 앞에 태워서 번제로 드리는데 그것이 눈이 멀었으면 어떻고 병들었으면 어떻습니까

드리는 행위가 중요하지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만홀(漫忽)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장소에 모여, 동일한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일지라도 동일한 은혜를 주시지 않음을 우리들은 체험합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그들의 제사를 보시고 거기에 합당하게 기뻐 받으시기도 하고 물리치시기도 합니다.

예배에 성공하지 않고 교회의 부흥을 이룰 수 없고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恩惠)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말1:9)

눈에 보이는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 자들에게는 잘 보이기 위하여 온갖 귀한 것으로 드리면서도, 하나님께는 아무렇게나 아무 것이나 드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과 제사를 기뻐 받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면서 얻기는 하늘에 축복을 받고자 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며 간구하지만, 주님은 이러한 사람에게 긍휼(矜恤)을 베풀지 아니하시므로 신앙생활의 실패요 예배회복을 이루지 못하므로 선교를 하겠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요 선교를 꿈도 꿀 수 없는 것입니다 혹 비슷하게는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선교라는 말보다는 사회봉사라고나 해야하겠지요

자신이 예배에 실패한 사람인데 어떻게 삼위일체 주님을 보았다고 저들에게 곧 열방 모든 민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배회복과 선교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교회에 중요한 사명과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B.C. 444년 제3차 바벨론 포로 귀환 때로부터 B.C.430년까지 주로 활동한 말라기 선지자입니다. 제3차 포로 귀환을 주도한 유대 총독 느혜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 첫 번째 사명으로 생각한 것은 먼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통해 제1차 포로 귀환(B.C.537년) 이후로 재건되기 시작한 신정 국가의 정치적 위상을 드높이고 또 종교 개혁을 통해 선민의 면모를 쇄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말라기 선지자는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의 부패와 십일조와 헌물규례의 정비, 이방 여인들과의 통혼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거론하여 책망함으로써 부흥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흥과 선교도 함께 움직이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또한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귀히 여기는 마음 없이 하나님의 단에 나와 백성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을 하나님은 물리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

이와 같이 하나님께 대한 두렵고 떨림 없이 되는 대로 예배를 구경하려고 온 관객처럼 주께 나오는 것을 하나님은 못마땅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향하여 “그렇게 예배보려거든 차라리 ‘예배드리러’ 나오지 말라”고 금하고자 하십니다.

그 일을,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번제단으로 통하는 성전 문을 닫음으로 대신해주기를 원하시기까지 합니다. 더 큰 탐심을 이루기 위하여 작은 것을 헛되이 드리는 인간의 마음을 견디실 수가 없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2-13)고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면 병든 것과 눈먼 것과 저는 것으로 제사 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제사를 폐하시고 하나님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 백성을 삼으시고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에 이르기까지 이제까지 하나님을 찾고자 하였지만 하나님을 찾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 찬양을 받으시고, 깨끗한 제물을 드리게 하시고, 그 이름이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이시지만 기존의 하나님 백성을 폐하지 않으심은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오래 참으심의 하나님이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과 오래 참으심에도 종국이 있음을 그 제사장들과 백성으로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하나님의 제사상을 부정하고 병든 것과 눈먼 것으로 더럽혀 놓고도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상이 원래부터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었다고 말하므로 자신들이 아무렇게나 정성 없이 드리는 제사와 예배에 대한 변명거리를 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은 물리치시고,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한 사람을 귀히 보시며 이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사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그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주변을 탓하거나 변명거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교회의 예배와 주변을 개선시키는 주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煩弊)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詐欺)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14)

하나님의 책망하심은 뒷전으로 돌리고 하는 말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은 너무 어렵고 번거롭고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며 그들의 잘못되고 소홀한 제사와 예배행위를 전혀 고치고자 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훔친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여호와의 단에 가져오고 이로서 제사를 드리지만 하나님은 이를 물리치십니다.

하나님은 천지 중에 크신 임금이시요 하나님의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이름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고 나의 제사와 예배를 필요로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 “나는 너의 저는 것과 병든 것과 눈먼 것으로 만홀히 드리는 제사가 도무지 필요 없다. 차라리 내 앞에 예배드리러 나오지도 말라”고 물리치십니다.

예배회복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배에 실패하면 교회가 바로 설 수 없고 예배가 실패하면 부흥은 어려우며 예배가 실패하면 선교 또한 실패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선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기도와 눈물과 기쁨으로 드린 주님의 백성들과 헌신자들의 예배를 통해서 새워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받은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선교를 하는 공동체입니다

바라기는, 교회에서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찾으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자가 되어 선교에 앞장서는 Nyskcian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2015년 북인도에서 한인교회 중심으로 Nyskc Mission Family Conference SA.를 열도록 인도하신 성령의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참여하신 모든 분들을 환영하고 인사드립니다

Oct. 1 2015

NWM 대표회장 최고센목사

6 Powerful "I WILL" Promises of Jesus

praying in the spirit Christians are quite familiar with the “I AM” statements in Scripture. They are powerful and share much about the character of Christ. They share God’s will for His son and for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