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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skc Leadership Academy'17 환영사


환 영 사


Nyskc Leadership Academy‘17에 참여하신 MS, MS2, MAS, MAS 후보생 여러분 모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는 우리 NYSKC의 Theme은 우리 사역의 방향이자 목표이고 우리의 사명이며 우리의 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임 곧 Leadership Academy는 이와 같은 Theme를 실천하여 이루려는 훈련이며 이 훈련을 통해 사명자들을 세우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더욱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헌신자가 되고 또한 사명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공로도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사함을 얻고 생명을 얻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NLA’17에 참여한 Nyskcian들 중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우리의 노력과 공로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다』


오직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우리를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영접하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세를 얻게 하신 것이지 결코 우리의 판단이나 노력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때,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예정섭리가운데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 밖에 없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값으로 나의 죄를 대속하여 주신 것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누구든지 구원을 자랑치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거저 구원 받은 인생”, “하나님의 사랑에 큰 빚을 진자” 곧 채무자가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으로 갚으리오.” 하며 살아가야 할 인생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세전에 택함을 입은 백성이니 얼마나 복 있는 주님의 자녀입니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이 땅에 보내 주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시고 아들이 되게 하신 것은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입으로 시인하게 된 것은 복 중의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복을 받고 태어났고 복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우리들은 언제나 축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입으로 “나는 복을 받고 싶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복을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없듯이 하나님을 모르는 저들도 모두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복을 준다고만 하면 별짓이라도 다 해봅니다.

길 가의 돌멩이를 섬기고, 나무를 섬기고, 자기가 만든 것에 절을 하기도 하고 죽은 조상에게 복을 빌며 세상에서 권세를 누렸던 자들의 무덤에 절을 하며 복을 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동물이나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달과 별까지도 섬기며 복을 받기를 빕니다.



『지도자는 기업의 회복을 추구하라』


복의 근원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물론 주님을 믿는 사람들과 구원받아 거듭난 사람들까지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가장 갈급해 하는 것이 “복의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세전에 복을 받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까지도 복에 갈급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복을 잃었기 때문이요, 상실했기 때문이요, 죄인이기 때문에 받은 복에 만족감을 누리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이 회복되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결국 복의 회복이요, 또 다른 하나는 죄에 죽고 생명으로 거듭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복을 받은 줄도 모르고 복을 달라고 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받은 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창세기부터 시작해 요한계시록까지 구원의 역사가 흐르고 있고 또 회복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택한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이 나오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셋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이 하나님이 이 땅에 창조한 자들이요, 택한 자들이라는 것을 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면서 복을 주셨고 복을 받고 태어난 자들입니다.

창세기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기만 하면 복을 누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얻고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불순종 했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불신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기업으로 삼으신 것은 영광과 기쁨을 얻으시기 위함이었음에도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셨던 복이요, 기업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언제나 복에 대한 갈급함이 우리에게 있게 되었고 이것을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자요, 기업의 회복자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기 전에는 구원도 없고 기업의 회복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 주님의 자녀이며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된 자들이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복 받은 인생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만세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에 따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복된 자들입니다.

또한 천지를 지으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 복이요, 그분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일꾼이요, 군사로 사는 것이 마땅함을 고백한 자들이며 만세전에 택함을 입은 백성이요, 구원받은 백성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목자로 삼고 따라 가는 양들 곧 MS, MS2, MAS들이 모여 Nyskc Leadership Academy 훈련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겁고 의욕적이며 긍정적인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 이번 3박 4일간의 훈련에서 예배와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분의 영혼에 불이 붙어서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인생에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신 여러분들은 모두가 보이지 않는 손길 곧 성령님의 손길에 이끌려 인도함을 받고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 섬기는 교회와 내 가정과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웃들에게, 그리고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 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변화는 지도자의 몫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업이며, 비젼이며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나 자신은 몰라도 하나님은 나의 미래를 아십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미래의 소망이 끊어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공이나 행복이라는 것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아무리 소질과 재능이 많아도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행복할 수도,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예배의 핵심, 신앙의 핵심은 다름 아닌 마음의 자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고 극복하리라!”는 이 믿음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극복하리라!”는 이 믿음만 있으면 우리는 더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갈 수가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는 말씀처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Do not be conformed to the patterns of this world any longer...)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변화를 받아'(헬: 메타모르푸스데 현재 수동태 명령형)는 자신이 아닌 타자에 의해 변화되며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인격의 내부에 변화를 일으키는 힘인 성령에 의해 마음이 계속해서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일시적인 변화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변화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의 내부에 변화를 일으키는 성령에 의해 계속적으로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의 뜻이 이뤄지거나, 그의 뜻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새롭게 변화를 받게 되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생을 영위하거나, 피조 세계가 원래 목적대로 진행되면 기뻐하시게 됩니다.


어느 단체나 어느 조직을 보더라도 변화에 앞장을 서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을 일명 Leader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한 시대, 한 역사가 바뀔 때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고 그 변화를 따라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새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어도, 아무리 성경구절을 많이 기억하고, 아무리 기도를 잘해도 신앙의 관념에만 잡혀 있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종교꾼에 불과한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찾아볼 수 없는 종교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종교꾼들을 통해서는 아무 일도 못하십니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가 갖고 있는 아픔입니다.

의인 10명만 있으면 그 도성은 살아납니다!

의인 10명이 있으면 그 시대는 살아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스스로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는 변화를 스스로 주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이나 고난을 저주라든가 징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훈련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더 나은 장래, 더 나은 앞날을 만들기 위해서 내게 주신 사랑의 채찍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표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변화의 흐름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내 생활의 방식이 어떠했든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과거 지향적인 본능들은 모두 버리시기 바랍니다.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향해 깨어 버리십시오.


변화를 거부하는 이 마음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질병입니다. 변화를 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반응의 단계가 나타납니다.

조건 거부하는 단계입니다. 무관심의 단계입니다. 그리고 탐색의 단계입니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다가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니까 그제야 움직이게 되는 단계, 즉 소극적으로 따라가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분리의 단계, 곧 배척의 무리와 헌신의 무리로 갈라지는 단계입니다.

NLA에 참여한 헌신 자들이여!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와 감동과 은혜를 힘입고 하나님이 일으키는 새로운 변화의 역사에 앞장서며 변화를 주도하시기 바랍니다.

변화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에는 언제나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바른 사명을 가진 사람 속에는 언제나 변화의 물결이 일어납니다.

변화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사명을 붙든 사람에게는 감당할 수 있는 변화의 힘도 주십니다.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시각의 변화는 지도자의 지혜다』


삶의 모든 표현은 대개 시각 곧 관점에서 옵니다.

인생을 답답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넓지 못할 뿐 아니라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어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각만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시각은 각각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라보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차이점을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바라보는 시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시각의 차이를 통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관점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멍청하게 만들고,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나를 제한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관점일 뿐입니다.


인생의 커다란 변화란 결국 시각의 전환에서 옵니다.

사람은 어쩌면 시각의 종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보는 것만큼 표한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위대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보는 시각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위대한 지도자란 누구입니까. 시각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이 Leader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지고 창조적인 발전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나와 같지 않으면 전부가 원수입니다. 나의 시각과 같지 않으면 무조건 무너뜨려야 할 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라는 단어를 씁니다. 분명 문제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문제를 보는 시각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를 얻기 위해서 왔습니다. 우리가 달라지기 위해서 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고 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꿀 수 있다고 하면 돌아가는 길에 문제는 변할 것입니다.

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꿀 수 있다고만 하면 문제는 항상 변합니다.

과거에 일어난 어떤 문제를 과거의 시각으로 풀려고 하면 절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그 일은 오늘의 시각으로 풀어야만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 이상으로 믿고 나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붙잡고 몸부림치는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래, 곧 믿음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Nyskcian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자의 고질적 질병을 제거하라』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이 우리들을 이곳에 모이게 하고 이 자리에 앉게 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이곳에 참여하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신 것임을 믿습니다.

지도자의 질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든, 아버지든, 국가의 지도자이든, 교회의 지도자이든 지도자가 질병에 걸리면 큰일입니다.

무변화라는 병, 창의력이 없는 병, 우울한 병, 핑계와 변명의 병, 분노라는 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질병에 걸리겠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 온전히 접붙임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인데 가지는 그 나무에 온전히 붙어 있을 때만이 마르지 아니하고 그 가지에 열매가 열리게 되어있습니다.

가지로서 영양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은 나무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과 하나가 되고 함께 할 때만이 기쁨이 샘솟고 아름다운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재능이 있어도 열정이 없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재능이 있고 기회가 와도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가 있는 사람보다 부족하지만 성령에 충만하여 주님의 일이라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열정이 있는 헌신자를 통해서 일 하십니다.

또한 변명과 핑계, 불평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는 Leader로 세움을 입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혹 내가 이해되지 않고 깨닫지 못할지라도 말씀에 의지해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던 베드로가 되어야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무슨 일을 만나든지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심각한 영적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은혜 충만, 예수 충만한 사람, 화를 내기 보다는 참고 인내하는 사람이 되어야 Leader로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도전할 수 없는 병, 안주하려는 안일함, 또 담대하지 못한 병도 뺄 수 없는 지도자의 고질병입니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땅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본토 친적 아비의 집을 박차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 곳에 이르기까지 지키시며 보호시고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담대함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나오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담대하지 못하거나 불안하여 자기 방어적인 사람은 지도자로서 무서운 큰 질병에 걸린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언제나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시각 안에서 생각하는 병은 중증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 보다는 언제는 자신을 방어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다보니 불안할 수밖에 없어 공동체에서 Leadership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지도자로서의 영적인 질병에 걸리면 그가 담고 있는 조직이나 공동체는 결코 변화가 불가능할 것이며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믿음의 열매는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화가 없는 것, 창의력이 없는 것, 우울한 것, 핑계와 변명을 앞세우는 것, 인내 없는 분노, 도전에 대한 두려움, 안주하려는 안일함, 믿음의 부족으로 인한 담대함의 결여, 불안한 상태 이 모든 것들이 지도자로서의 영적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도자이기 때문에 “내가 가면 변화가 일어난다.”는 생각은 교만이 아니라 “나는 빛이요, 소금이다”라고 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내가 가면 변화가 일어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의 꿈은 현실이다』


장래를 예견할 수 있은 유일한 길은 장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의 몫이며 고유 영역입니다. 꿈과 사명은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특별한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만들어냅니다.

지도자는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가지 않으려는 그곳으로 저들을 데려다 주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변화의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굴복하는 사람들이 아닌 상황을 극복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찾고 계십니다.

Nyskcian들이여! 하나님의 일에 앞장서 보십시오. 왜 세상의 일에는 앞장서기를 좋아하면서 하나님의 일은 싫어하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주관자요 주권자시며 인도자이신데 하나님의 일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소서.”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도우시겠습니까?

이 순간 아니 영원토록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만입니다.


이와 같은 지도자가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 년에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합니다. 그리고 그토록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하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왕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무너져 있던 성벽을 중수하고 성전사역과 함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그들의 정체성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 12년 동안 유다의 총독으로 임무를 수행한 후 페르시아로 돌아갑니다.

만약 인간이 역사를 썼다면 느헤미야의 믿음의 승리로 영광스럽게 마무리 했겠지만, 하나님은 13장의 에필로그를 한 장 더 소개하심으로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는 인간의 연약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십니다.


『지도자는 개혁과 회복의 아이콘 되라』


느헤미야 13:6절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 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느헤미야가 왕의 허락을 받고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을 만큼 유다 백성들의 영성이 무너져버렸습니다. 한 때 부흥하고 뜨거웠어도 우리는 언제나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13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도록 허락한다.(23-27절, 1-3절)

성벽복원 사역을 앞장서 반대한 도비야에게 성전에 큰 방을 내어준다.(4-9절)

성전사역을 위해 약속한 예물과 십일조를 백성들이 바치지 아니한다.(10-14절)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한다.(15-22절)

성직자들의 타협과 타락함이 보인다.(28-30절)

물리학의 열역학 법칙 중에 “엔트로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쇠퇴해 가는데 질서에서 무질서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때 무질서에서 질서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에너지가 밖으로부터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예로 들면, 우리의 몸은 가만히 놔두면 쇠약해지지만 운동을 하고, 좋은 음식과 비타민을 섭취하고, 좋은 생각을 하면 쇠약해지는 몸을 바꿀 수 있습니다.

신앙의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우리의 영성도 쇠퇴해 가고 무너져 가지만 계속적인 영적 각성과 부흥의 노력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승낙을 받아 자신이 없는 사이 타락과 무질서 상태로 되돌아가 버린 유다 백성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다시 돌아와서 백성들을 상대로 일으킨 개혁은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금지시키고, 성전의 정화를 위해 도비야를 성전에서 내쫓고, 성전사역을 위해 약속한 예물과 십일조를 바치게 하고, 레위인 들을 다시 모아 성전에서 봉사하게 하며, 안식일을 지키게 하며, 성직자들의 타협과 타락을 질책합니다.

개혁(Reform)은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실패하고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한 부흥과 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회가 정치와 연합한 중세기 때 가장 부패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스윙글리, 마틴 루터, 칼뱅, 위클리프, 럭스 등 개혁가들의 목숨을 건 개혁운동(Reformation Movement)이 일어납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중요한 또 한 가지는 “개혁은 계속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새롭게 개혁해야 합니다(Ever reforming ourselves). 교회가 힘을 잃은 것은 나 자신을 개혁하는 열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집을 청소하기 위해서는 이사를 가든지 집을 뒤집어엎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청소할 수 있도록 맡겨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고 나를 날마다 새롭게 함으로 영적인 엔트로피에 새 에너지를 공급해야 합니다.



『거룩한 습관은 지도자의 지도력이다』

패턴은 “양식”, “형식”, “모델”을 뜻하며 습관적으로 되풀이하여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매일 되풀이 하는 것이 바로 나의 신앙입니다.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다”라는 말도 있듯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일 제도와 십일조 제도를 거룩한 패턴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때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변하여 세상과 같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거룩한 습관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그분은 기도가 삶의 호흡이었고, 사역의 호흡이었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셨기 때문에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마4:4)이라고 하셨으며 그 분 자신이 말씀이기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행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은 우리가 세상과 다르게 사는 패턴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거룩한 믿음을 만드는 축복이 됩니다. “너의 십의 일을 내게 바쳐라”는 명령도 우리가 세상과 다르게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패턴입니다. “모든 것은 다 내가 준 것이지만 네가 십분의 일을 바치면 모든 것을 다 내게 바친 것으로 알겠다. 돈에 묶이지 말고 돈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기여하라”는 뜻입니다.

이 십일조는 나의 신앙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해서 그 물질을 갖으시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분이 모든 것을 갖고 계신 분인데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고 계시겠습니까?

거룩한 습관을 통해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집니다. 세상의 패턴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패턴을 따르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교회생활을 통해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환경에 묶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하고 그 포커스를 잃고 살 때 느헤미야만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비젼을 보았고 영광의 도구가 되어 성벽을 중수했으며 유다 백성들의 개혁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중심은 늘 하나님 앞에 있었고, 사람들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박수를 더 원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의 Leadership의 비결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느3:14)라고 기도했으며,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느13:22)라고 기도했으며, 13:31절에서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라고 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간구했습니다.



『지도자는 생명보다 사명을 귀하게 여긴다』


느헤미야처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된 것”임을 고백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지킴이 다 헛것이 되고 만다”는 확신을 가진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마6:33)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사는 Nyskcian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손길에 잡히려는 몸부림을 치시기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


내게 주신 사명을 선언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재능이 있는 사람보다 귀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기회가 있는 사람보다 중요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지식이 있는 사람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재능이 있는 사람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보다도 사명이 있는 사람 속에서 역사 하십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명이 생명보다 귀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포로 된 느헤미야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연약한 자를 들어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명을 붙잡기만 한다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사명의 힘은 저항의 힘보다 훨씬 강하며, 사명의 힘은 고난의 힘보다 훨씬 강합니다.”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사명을 가지고 하는 사람과 사명 없이 하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는 일은 사명입니다.

“나는 사명적 존재다!”라고 하는 자기의 사명선언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너절한 것들이 자기를 주장하는 줄도 모르고 삽니다. 너절한 것들이 소중한 시간을 다 빼앗고 맙니다. 그러나 사명에 사로잡힌 사람은 질서가 있어 소중한 것들로만 가득하게 됩니다.

누군가 “나는 사명을 가질 만큼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요하지 않은 생명을 이 땅에 보내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모인 MS, MS2, MAS, MAS 후보생들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명에는 고통이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사명에는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까.

인간의 행복이나 기쁨, 보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팁(은혜)입니다. 사명은 절대로 고통이 아닙니다.

“사명은 보람입니다.”

“사명은 삶의 의미입니다.”

“사명은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사명이 위대한 삶을 만듭니다.”

사명이 있을 때 하나님이 지도력을 주시고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명을 주셨을 때에는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위대하게 태어난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생명 속에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사명을 깨닫는 순간 위대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더 위대한 삶을 살았는가. 위대한 삶의 사명을 끝까지 실행하는 사람이야 말로 위대한 삶을 산 것입니다. 사명 없는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삶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도자는 결단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인생이 무엇입니까? 인생이 속도입니까? 방향입니까?

무능하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현재의 상황과 환경과 어려움 때문에 사명을 이루지 못할 거라고 미리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세도 바꾸어 놓으셨고 사무엘도 다윗도 베드로도 사도바울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Nyskcian들이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근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셔서 내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우리들을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할 일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을 바라보면 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붙잡기만 하면 됩니다. 이 부족한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해달라고 나를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잊어버렸거나 생활 속에 묻어두었던 사명을 다시 회복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이곳에 모여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비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고 잊었거나 상실한 사명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 있는 자로 택하여 주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보내주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으니 복 있는 자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 주신 사명이요, 이를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2017년 Nyskc Leadership Academy에 찾아온 사명자들이여, 헌신자들이여, Nyskcian들이여,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을 때 이루어질 줄로 믿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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