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skc Leadership Academy'15

인 사 말

Nyskc Leadership Academy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GTS에서의 일정들이 벌써 몇 년이나 되었는지 이제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익숙하고 만나면 반갑고 또 주님 안에 하나임을 확인 할 수 있게까지 될 만큼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들의 모임은 이미 NYSKC 신앙의 무장되어 있고 또 그동안 ‘예배는 회복이다’ 라는 예배회복에 미약하나마 교회에서 그리고 나의 삶에서 헌신하여 달려왔으며 또한 매년 컨퍼런스와 아카데미를 통해서 신앙의 성숙을 가지며 교회에서 헌신자로 세움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증거가 됩니다

헌신자로 세움을 입은 여러분들이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충성하는 것도 아니요 헌신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나 역시 신앙이 어렸을 때 그 형제자매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부족함이 많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때는 충성이 무엇인지 헌신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에 많은 형제자매들이 이처럼 부족한 가운데 교회의 지체로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우리의 몸도 약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감추어진 부분이 있고 잘 사용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충성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모든 부분들이 협력하여 온전한 몸을 이루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헌신과 충성은 이웃들에게 비교하여 그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말씀 중심 곧 성경말씀이 기준이 되어 충성과 헌신하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80/20이라는 말은 경영학에서 쓰는 말이지만 상위 20%에 해당하는 사람이 Leadership를 가진 사람이며 이 사람들로 인하여 세상이 움직여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진정한 Leadership를 가지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외 누가 세상을 움직이겠습니까

그러므로 Biblical Leadership를 정의한다면 만유를 움직이시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사람이 진정한 Leadership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 전적으로 의지하고 붙어 있는 사람이 Leadership를 가졌으니 세상이 말하는 80/20이라는 수치는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Nyskc Leadership Academy는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한나라의 미래를 보려면 젊은이들이 올바른 뜻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면 압니다. 특별히 젊은이들이 살아 있으면 미래가 있다고 말하고 청년들이 죽어 있다면 그 나라는 미래가 없다고 말합니다

어는 정도 국가 적으로 볼 때 맞는 것도 있지만 교회는 조금 다릅니다

꼭 젊은이만 있으면 된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나님께 얼마나 자기를 드리느냐 하는 즉 희생적인 삶 충성과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느냐가 국가의 흥만성쇠를 가늠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에 국가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80세에 부름 받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충성한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히3: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충성한 것이 모세처럼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삶이란 40세까지는 애굽에서 왕자처럼 살며 많은 지식과 견문을 넓혀 세상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왕자의 삶보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왕자의 삶을 포기하고 미디얀 광야에서 양떼를 다스리며 40년의 세월을 보내며 광야의 훈련을 하나님을 의지하고 훈련 받았습니다 그리고 40년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에 의지하여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이끌어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기가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삶을 살면서 80세가 돼서야 주님에게 쓰임을 받아 모세 한 사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백성이 도리 수 있었습니다

나이가 문제이겠습니까 꼭 젊은이들만이 미래이겠습니까 어린아이 젊은이 늙은이 상관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의지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젊은이요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처럼 된 이들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교회와 나라와 가정의 흥망성쇄가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엘서를 인용한 사도행전2:17“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MS, MS2, MAS 들은 근시안적으로 볼 때 Nyskc Movement에서 있어서 구별된 사람들이요 하나님께 희생의 제물로 드려진 헌신자들이요 Nyskc World Mission에 있어서는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예배회복운동을 하면서 이루어진 열매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크게 보면 로마서12:1-2절의 말씀처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받들어 살아가고자 하는 헌신자들로 교회와 나라와 가정의 희망이요 미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나라와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헌신자들로 인하여 미래를 보장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와같이 세상과 구별된 사람 곧 다니엘 선지자가 그 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어린나이에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 나라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며 나이가 많이 들어 죽기까지 구별된 삶을 살며 하나님을 섬긴 사람입니다

다니엘이 처한 주위 환경은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온 나라가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 세력이 급격히 약하여져 북 이스라엘은 이미 망하였고 남 유대도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하여 왕과 신하와 상당수의 백성들이 포로가 되는 비운을 맏이합니다. 이제 다니엘도 그의 세 친구와 함께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새로운 길이기도 하였습니다.

바벨론의 왕은 포로로 잡혀 온 젊은 중에 몇 명을 골라 바벨론의 문화와 궁중예법, 지도자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들을 왕궁에 두어 이스라엘나라를 바벨론에 예속화시키는 정책을 쓴 것입니다. 거기에 다니엘과 세 친구도 뽑혔습니다.

비록 나라는 망하였지만 개인적으로 그들은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출세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문화가 발달된 곳입니다. 엄청난 부유함도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러한 곳에서 궁중에 살며 새로운 귀족 계층이 된다는 것은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개인에게 주어진 출세의 기회를 좋아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이방 신을 섬기는 타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우상에게 절하고 향락에 문화가 만연되어 있는 곳입니다. 마음 한 번 잘못 먹으면 우상숭배와 함께 세속의 향락으로 끝없이 떨어질 수 있는 엄청난 위기에 다니엘은 직면하여 있는 것입니다.

현대화되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세상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세상은 우상숭배와 물질주의와 향락의 물결이 도도하게 흘러 젊은이들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한 발자국만 잘못 디디면 엄청난 죄악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는 세상입니다

다니엘에게는 한 가지 삶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다니엘 1:8“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다니엘의 삶의 원칙이요 기준입니다.

삶의 원칙과 기준이 없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살아갑니다. 교회에서는 열심히 찬송을 부르며 경건한 모습을 하지마는 세상에 나가면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이기적이고 뇌물을 좋아하며 쾌락을 즐기기를 하나님보다 더 즐기게 됩니다.

MS, MS2, MAS들은 삶의 원칙과 기준이 분명하여야합니다. 그 기준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정한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정하여진 기준이라야 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구별된 삶을 살기로 뜻을 정하여 살았습니다

다니엘은 포로 된 자로서 왕의 진미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궁중전골, 갈비, 싱싱한 회는 물론, 상어지느러미, 제비집 등 별별 희한한 음식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신을 교육시키는 환관장에게 고기로 된 음식은 아무 것도 먹지 아니하고 채소만 먹겠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고기 중에 우상에게 드려졌던 음식이나 율법에 금한 고기가 있을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입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마시는 포도주는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러나 혹시라도 우상에게 드려졌던 것일 수도 있고 경건 생활에 해롭다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니엘이 고기나 포도주를 먹지 않았으니까 나도 고기나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따르기를 원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몸을 더럽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니엘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기란 그렇게 쉽지 아니합니다.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인간의 본능적 유혹도 물리치기 어려웠을 것이고 왕이 하사한 음식을 먹지 아니하면 감옥에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러한 유혹과 육체의 안일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깨끗한 생활을 하라 곧 구별된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의 원칙이었고 여러분의 원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환관장은 다니엘의 제안에 대하여 매우 걱정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의 혈색이 좋지 못하면 자신의 책임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대노하였을 것입니다. "이놈의 자식 매우 건방지구나! 포로인 주제에 반항을 해! 그것도 황제의 성은을 거절하겠다고? 여봐라! 이 놈을 당장 옥에 가두어라!"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 1:9절에 보니 하나님이 다니엘 때문에 환관장으로 하여금 은혜와 긍휼로 다니엘을 대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을 따르는 주의 백성을 아주 구체적으로 도와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들의 모습이 초췌하면 왕이 내 머리를 그냥 두지 않을 터인데 어떻게 하나?"

그 때 다니엘은 그에게 하나의 제안을 합니다. 열흘만 시험하여 얼굴을 테스트해 보고 마음대로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채식의 우월성을 깨닫고 이러한 제안을 한 것이 전혀 아닌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와주실 줄 분명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후에 사자 굴에 던짐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구해 주실 줄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헌신자들 중에도 자기의 지식과 능력과 힘을 과신하여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믿고 자신의 주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으라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이러한 자는 반드시 패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다윗과 같이 사무엘과 같이 다니엘과 같이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앞으로 전진하는 헌신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서 6장에 보면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하여 경건하게 기도하는 습관을 이용하여 적들이 다니엘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다니엘은 물론 적들의 계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여전히 기도를 쉬지 아니하였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하여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짐을 받게 됩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기도는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 중요한 일이었고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요? 아마도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일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끊임없는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에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된 것입니다. 헌신자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자기의 믿음을 위하여 교회와 나라와 가정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반드시 회복되어 일어서게 될 것이고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영국 회중교회 파커 목사님은 누구보다 기도를 강조하였는데 기도가 역사와 공동체, 삶과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말하기를 "기도를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얼굴이 증명해 줍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에는 영혼의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풍기는 인상이 기도와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늘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서는 주의 정원에 피어있는 향기로운 꽃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뜻을 정하여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복된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기특한 다니엘과 또 세 친구에게 지식과 명철을 더하게 하시고 다니엘에게는 모든 이상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단 1:20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뜻을 정하여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뜻을 정하여 살아가는 사람 곧 하나님게 구별되어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군사로 일꾼과 종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크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Nyskc Leadership Academy’15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 헌신된 백성들만 모여서 예수님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헌신의 훈련하는 곳입니다

우리들이 입술에서 찬양하는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예배는 회복이다” “예배회복” 이라는 단어는 Nyskc Theme처럼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는 것인데 그 중에 가장 이슈되는 단어는 ‘예배’(Worship)입니다

예배는 사랑한다 로부터 시작하여 드리다 바치다 구별되다 헌신되다 희생 정말 많은 단어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헌신자라는 말에 앞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요 이들은 생명을 거져 얻었으니 하나님에게는 크게 빚진 자이므로 채무자요 은혜를 갚아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크다고 하는 사람들이 헌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넘치는 사람들이 헌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먼저 헌신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셨으며 생명을 주어 살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놀라운 사랑에 감동 감격하여 감사하여 주님 앞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 사람입니다

구약적으로 보면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에게 예배를 주어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여셨다면 신약적으로 보면 우리를 살려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영생을 얻었으니 감사해서 헌신하겠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Leadership Academy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 아름답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시간시간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성령에 충만함으로 가득찬 Academy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교수님들의 강의가 여러분에게 세상과 구별된 헌신자의 삶에 더욱 힘있게 하리라 믿습니다 이번 Academy를 통해서 섬기는 교회와 가정에 더욱 충성하는 일꾼이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예배가 회복되는 시간이요 또 예배회복운동에 한 지체로서 그 역할을 함에 있어 부족됨이 없는 구별된 충성꾼이 되어 주시길 간절히 소원하여 인사를 드립니다

May 19 2015

NWM 대표회장 최고센목사

Theology of Leadership

Ⅰ. Serve in leadership

1.섬기는 리더십

리더십이란 무엇이며, 누가 리더인가? 리더의 의미를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며, 그들의 행동과 가치관,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라고 해석한다면 모든 크리스천이 리더가 되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모든 크리스천들이 위에서 요구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멕그레고 번즈는 “변화를 가져오는 리더십은 리더와 따르는 자 모두의 비전과 가치관, 포부를 새로운 기대치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관계”라고 저서인『리더십』에서 주장하고 있다. 현대의 실업철학자인 피터 코스텐 바움에 의하면 그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즉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인격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질문에 해답은 다음의 세 가지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음으로서 가능하다고 본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은 자라는 이해에서만 찾아낼 수 있다.

둘째, 나는 내일 여기에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오늘의 두려움과 걱정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진리 앞에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셋째, 나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의 존재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그분이 창조하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이러한 정체성에서 안정감과 의미를 갖게 되고, 여기에서 인격자 또는 신뢰할 수 있는 자로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 곧 리더십이 발휘되는 것이다.

리더십의 근원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존한다는 근본적인 원리에 근거할 때 그분과의 관계에 우리 자신을 투자하는 길은 고독(홀로 있는 시간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연구(말씀을 묵상하는 것), 예배(개인적 예배와 함께 드리는 예배), 공동체(가족, 친구나 소그룹에 이르기까지 삶의 부분을 균형 잡는 시간), 사역(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누며, 맡겨진 은사를 사용함으로 변화를 가져오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신약성서 가운데 유다서에 기록되어 있는 리더십의 귀중한 부분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유다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리더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쏟아 부은 ‘사랑의 일관성’을 리더들이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리더십은 평강(shalom)의 관계, 즉 인도받는 자들의 온전한 복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는 관계라고 강조한다.

유다는 헤세드(Hesed)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리더십의 심오한 측면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늘 실패함으로 언약관계에서 우리의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존재인 우리에게 자신을 위탁하신 긍휼과 신실하심을 말하며, 이 긍휼이 바로 위탁한 바를 행하는 섬기는 리더십이 되는 데 필요한 것으로 ‘다른 사람의 미래에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 다른 사람의 미래에 변화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도 그렇게 하는 것, 그가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칠 수 있음을 알고도 그에게 위탁하는 것이다. 이는 그에게 변화할 공간을 주고, 변화의 지점에 있는 그에게까지 위탁하는 것이다.

*섬기는 리더십의 원리

섬기는 리더십은 ‘지도를 받는 이들의 성장과 공동체가 공유하는 사명의 달성’을 위한다. 또한 섬기는 리더십은 비전에 관한 것이다. 이는 따르는 이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현재에 힘을 더해 주고, 내일을 향한 강력한 비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그 사명이 성취되는 것을 본다.

섬기는 리더십은 인격에서 우러나온다. 사람들은 존경하고 신뢰하는 자의 영향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마지막으로 섬기는 리더십은 책임지는 관계이다. 그리고 리더 역시 공동체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리더십의 기본 원리가 제시된다.

2. 섬기는 리더십의 모델

경영적 원칙 1.

리더십은 따르는 자의 성숙도에 맞게 조정되며 변동이 가능해야 한다.

리더는 관계 속에서 영향을 준다. 리더십은 영향의 관계다. 리더십은 그들이 따르기로 선택함에 달려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리더는 리더십을 형성하려고 노력할 때 영향을 주고자 하는 사람에게 맞추어 모든 리더십을 조정해야 한다.

폴 허시와 케네스 블랑샤드가 개발한 리더십 모델에서 리더들은 따르는 자들의 성숙도에 맞추어 자신들의 리더십 유형을 조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한 단계의 성숙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가정문제 혹은 직장에 오는 도중 일어난 일들은 그 사람의 자신감의 정도를 낮출 수 있다. 리더들은 이러한 변화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상황이 변하면 성숙도도 변하며, 리더는 관계를 통한 리더십의 적절한 유형으로 상황에 적응시킬 필요가 있다.

리더십이 지향하는 바는 우리가 맡은 모든 사람들의 능력과 자신감을 증가시켜 리더십을 그들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그들을 가장 높은 단계의 성숙도로 올려놓음으로써 특정 부문에서 그들이 리더로서 섬기기를 원한다. 리더십의 성공 여부는 따르는 자들의 성장에 의해 측정된다.

제임스 맥그레고 번즈는 모든 리더십 관계에서는 ‘교환’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번즈는 훌륭한 리더십은 그 과정 안에서 리더와 따르는 자 모두가 성장하는 리더십이라고 주장한다. 변화시키는 리더십은 임무가 완성되는 것을 넘어서서 더 높은 수준의 성숙, 또는 도덕성으로 향상되는 것이며, 리더와 따르는 자의 비전과 가치관, 신념이 ‘변화되고 확대되는 것’이다.

경영적 원칙 2.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고(empower) 성장시키는 전략적 방법

리더십은 사람들을 의존에서 능력의 부여로 옮기는 리더십을 요청한다. 리더들은 능력을 주는 분이 되고, 능력의 부여가 요청된다. 리더는 자신의 지위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양육하며, 따르는 자 안에서 보이는 이상의 잠재력을 보고 그 잠재력을 계발하는 데 자신을 위탁한다.

리더는 멘토링(mentoring)과 코칭(coaching)과 팀 형성(team building)을 통하여 따르는 자들의 성장과 발전에 실질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 형성은 리더와 따르는 자 사이에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합의와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멘토링’은 상호적인 배움의 관계다. 내 생애에서 나는 일련의 중요한 멘토들을 갖는 축복들을 누려왔다. 풀러 신학교의 사무장이던 글렌 바커는 임종 때까지 12년간 나를 의도적인 멘토링 관계에 끌어들였다. 또 지난 17년간 나는 맥스 디프리와 일종의 멘토링 관계를 가져왔다. 그는 내가 본받고 싶어하는 가치관으로 형성된 인격을 지닌 사람이다. 이런 지혜로운 멘토들에게 자문을 구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리더십에 관계된 일에 종사할 수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코칭’은 조직체의 수직적인 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들며, 리더를 사람들 가운데 둔다. 코칭은 사람들 곁에서 나란히 걸음으로써 사람들을 성숙도 발전 선상에서 위로 이동시킨다.

에밀리 그리핀은 『깊이 생각하는 경영자』에서 리더들은 그들의 손 안에 깨어지기 쉬운 것, 곧 그들이 섬기는 사람들의 희망과 꿈, 생각과 수고를 가지고 있다. 리더들은 이러한 것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야 하며 권력으로 짓밟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팀 형성’은 똑같은 관계에 대한 두 개의 관점이다. 전 미국 보건교육 및 복지부 장관인 존 가드너는 “현대의 가장 뛰어난 리더들은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보완해 주는 재능과 기술을 가진 자들과 한 팀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리더십과 경영에 관한 문헌에서도 리더십의 팀 접근법으로 코칭, 참여적 경영, 작업 그룹, 팀 프로젝트 등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다.

팀 형성에 있어 중요시되는 요소들로 사명과 방법에 대한 주인의식, 공유된 비전과 꿈, 정보의 전달, 편한 관계, 가까이 하기 쉬운 리더십, 신뢰하는 관계(신뢰는 조심스럽게 보살펴야 할 깨어지기 쉬운 선물이다), 취약성(팀 리더들은 자신의 약점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배우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 위임(완전한 위임은 사람들을 세워 나간다. 그것은 당신을 신뢰한다는 의미를 전달하므로 그들에게 자신감을 준다)이며 팀원들은 조직체의 성과들을 소유해야 한다.

또한 지위의 평등(각 팀원은 자신이 어느 누구와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될 것을 기대한다), 실수에 대한 관용(효율적인 리더는 팀이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똑같은 실수를 두 번 하고 있다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좋은 팀은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하며, 실패하고 그 실수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안다)이다.

유능한 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유능한 리더의 섬김을 통해 결정을 내리도록 책임을 지는 것 또한 필요하다.

3. 비전과 소망

경영적 원칙 1.

계획

계획은 그 조직체의 존재 목적과 사명과 가치관 또는 문화, 전략들을 검토하고 조정하는 과정이며, 그것은 리더십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리더는 조직체가 갖는 목적과 의미와 소망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

경영적 원칙 2.

비전 선언문, 사명 선언문을 작성하라

비전 선언문, 사명 선언문은 조직체의 사명, 가치관, 조직체의 현실, 미래의 시나리오, 조직체의 향후 5년 계획, 구체적인 전략들 및 통합된 목표․목적․행동들, 시간 계획, 책임의 소재와 담당자, 각 개인에 대한 평가, 사명과 가치관으로 다시 돌아와 체크하는 질문을 담고 있어야 한다.

조직체의 사명과 가치관은 리더의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인 기록해 놓은 가치 기준을 가르치고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강화시켜 조직체가 공유하는 가치관이 되도록 하여 그 문화 속에 깊이 새겨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조직체의 현실은 연구와 조사를 필요로 하며 종종 상황적 분석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때는 계획과정 중 조직체의 모든 분야의 장점과 단점, 기회와 도전을 평가하는 시간이다. 또한 고객과 경쟁자들을 돌아보고 고객의 영향력과 그들의 우리에 대한 인식을 살피는 한편, 경쟁자들의 단점과 약점은 무엇이며, 그들은 어떻게 경쟁하는가를 살피게 된다.

미래의 시나리오는 주위 환경에 대한 감사와 조직체에 대한 감사를 통해 계획이 현재의 연장이 되지 않도록 하며,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의 배경을 마련한다. 이 단계에서 시나리오라 부르는 비전의 초안이 만들어지고 검토된다. 이 시점에서 리더십 팀은 시나리오가 추구하는 목표와 감사 결과 대두된 문제와 재정적, 물질적 계획이라는 현실 사이에 균형을 잡는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앞으로 5년 동안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 짧은 기간 동안 개발하고 싶은 전략들과 함께 현실적인 예산을 책정한다.

5년 동안의 계획을 세운 결과로서 실천하기 위한 필요한 전략과 통합된 목표, 목적, 행동이 선정된다. 이 전략들은 매년 주요 목적에 맞게 규정되어야 한다.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은 위임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계획은 바로 이 점에서 실패한다. 개개의 목적이 책임지워져 임무로 맡겨질 때까지 실제 적용되는 계획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잘하고 있는가? 먼저 전략의 진행과 효율성에 관한 정보가 리더십 팀에게 보고된다. 그리고 이 전략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현재의 위치와 추진하고자 하는 방향을 점검한다. 마지막 질문은 최종적이며 전략적이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그 사명을 이행하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 약속한 가치관을 반영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행하고 있는가?

사명 선언문은 조직체의 모든 결정들을 검토하고 평가하는데 사용되는 마지막 목표, 또는 기준이 된다. 사명 선언문은 일에 대한 가치와 목적을 주고, 그들의 활동에 방향을 제시하며, 소속감을 준다. 또한 조직체가 성숙해가면서 조직체 문화의 중심이 되며, 조직체 밖의 사람들에게 의사를 전달한다. 『조직체 문화와 리더십』의 저자인 에드가 쉐인은 ‘사명 선언문’은 조직체의 최종적인 생존문제를 제기한다고 말한다.

좋은 사명 선언문은 간결하고 읽기 쉬우며, 이해하기 쉽고 한 쪽을 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정기적으로 검토되고 적절한 때 수정될 필요가 있다.

경영적 원칙 3.

시나리오

좋은 시나리오는 ‘사명과 가치관’을 분명히 나타내야 하며,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묘사해야 한다. 시나리오는 10년 내지 15년 앞을 내다보아야 하는 한편 ‘현재’에 닻을 내려야 한다. 또한 시나리오에는 ‘꿈의 측면’이 있어야 한다. 또한 프로그램뿐 아니라 ‘결과도 포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집 없는 사람들을 음식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에서 이 프로그램이 그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당신의 조직체나 공동체가 속한 사회와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인지를 이야기하라.

시나리오는 또한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시나리오는 언제나 토론과 수정이 가능해야 한다. 그것은 당신과 그것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 모두 열정이 형성되어야 한다

4. 가치관을 통한 영향

경영적 원칙 1.

인격, 문화, 그리고 가치관

리더십은 리더 자신의 인격을 통하여 따르는 자들이 지향하는 ‘가치관의 수준으로 문화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전장에서 리더의 첫 번째 책임으로 비전을 분명히 표현하고 조직체의 사명과 가치관을 유지하는 것이었다면 리더십의 두 번째 책임은 ‘문화를 강화하는 것’이다.

리더십에 관한 문헌에서 공동체의 성품과 그 공동체에 속한 개개인의 인격을 합쳐 조직체의 문화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조직체에서 리더십이 제시하는 가치관보다 그 조직의 문화에 따라 살려는 경향이 있다. 리더는 의도적으로 사명에 제시된 가치관을 가지고 공동체의 문화를 강화해야 할 책임이 있다. 지난 10년에 걸쳐 리더십에 관한 문헌에서는 조직체의 문화와 조직체의 가치체계의 중요성이 점차 거론되어 왔다.

MIT대학에 소속된 슬로운 경영학교의 저명한 에드가 쉐인 교수는 리더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는 문화를 창조하고 관리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쉐인은 조직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는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기본적인 가설들과 신념’으로 그 조직체에 대한 관점을 정의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북미주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주일 오전 11시에 모인다. 그 이유는 소젖을 짜는데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교회 구성원들 중에 소를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문화는 그 조직체의 행동과 결정, 정책과 과정을 결정함으로써 조직체의 모든 일을 지배하는 가치관으로 형성된다.

만일 문화가 우리가 지지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은 가치관을 만들어 낸다면 리더는 가치관이 그 문화에 새겨지고 지속될 때까지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강화해야 한다. 리더들에게는 조직체의 문화와 가치 체계를 검토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전략은 문화에 의해 구속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효율적인 조직체의 삶과 생기 넘치는 크리스천 공동체의 삶 둘 모두 합친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라고 보고 있다.

경영적 원칙 2.

리더가 공동체의 문화를 창조하고 강화할 수 있는 방법

리더는 자신의 리더십에 반영되고 있는 가치관이 무엇인지 적어보아야 한다. 조직체의 가치관 문서는 리더의 초안과 구체화 작업, 그리고 공동체의 면밀한 조사를 통과한 후에야 제대로 정비된다. 그리고 이 가치관 문서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적인 변화의 필요성에 대하여 늘 열려 있어야 하며, 리더의 지속적인 위탁과 책임감 있는 헌신을 통해 유지되어야 한다.

문화를 창조하고 강화하는 것은 장기간에 걸친 과정으로 여기에는 리더십의 장기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 리더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사람들과 동행하며, 새로운 문화를 본으로 보여주며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5. 관계를 통한 영향

사람들에게 동기와 능력을 주는 데 관해 유다서의 생생한 묘사는 힘과 목적, 그리고 관계를 포착한다. 자칭 리더들은 거친 물결처럼 물을 많이 튀게 했으나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과 그 리더십에만 관심이 있었고, 막상 섬겨야 하는 사람들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반면 진정한 리더십은 의존의 관계다. 빌레몬서에는 바울이 가진 비전을 두기고가 이행해 간다.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며, 함께 섬기는 자이며, 신뢰할만한 전달자요, 사람들을 격려하는 자인 두기고는 골로새 교회의 드라마에서 매우 중대한 인물이다. 바울은 그가 성취하기 원하는 그 일을 두기고가 성취하기를 바라고 있다.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려면 경영에 관한 책들과 정기 간행물들은 패러다임의 변화와 새 정보시대에 관해 쓰고 있다. 이것은 패러다임의 변화 중 하나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한 회사나 한 직책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조직체는 주위 환경과 함께 배우고 성장하며, 변화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조직체의 변화하는 상황에서 계속 기여하려면 계속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 이것은 리더십에 관한 새로운 도전이다. 리더십은 조직체의 삶에서 계속 그들을 새롭게 하여 조직체의 삶에 다시 들어가게 해야 한다.

경영적 원칙 1.

권한을 위임할 동역자

유급, 무급에 관계없이 리더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일하는 자원하는 마음과 정신을 가진 구성원들을 세워야 한다. 모든 자원하는 관계에서는 교환이 일어난다. 그들이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특히 자원봉사자들이 하는 일이 당연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유급이나 무급으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투자한 시간에 대한 보상을 원한다. 이것은 조직체의 관리에 있어 기본적인 원칙이다.

경영적 원칙 2.

유급 또는 무급 자원자를 뽑기 위한 인적자원 계발 모델은 어떤 것인가

자원자를 모집할 때는 몇 가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것은 ‘우리는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가?’, ‘그것을 성취하려면 어떤 종류의 직원을 둘 필요가 있는가?’, 사명을 구체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우리 조직체는 어떤 부문의 재능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것이다. 나는 자원자들의 고용과정에서 “당신은 왜 여기서 일하기를 원합니까?”라고 묻는데 이것은 이 경우에 적합한 매우 긴요한 질문이다.

일단 자원자가 조직체의 새 멤버로 고용되고, 새 직원이 그 조직체에 흡입되었으면 그 다음에는 리더십 관계가 크게 부상한다. 이때 좋은 지침서는 자원자들을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키는 데 귀중한 도구로 쓰인다.

좋은 지침서 및 직무내용 설명서의 요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대하는 직무의 내용과 업무 수행기준을 명확히 규정하라(Clarify expectation).

둘째, 그들이 해야 하는 업무의 목적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라(Agree on objectives).

셋째, 판단과 비평이 아니라 계발과 성장을 위해 그들의 성장을 검토 평가하라(Review progress).

넷째, 더 나은 임무수행을 위해 교육과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라(Equip for performance and growth).

직무내용 설명서 또는 지침서는 그 직책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요구조건에 대해 문서로 작성된 기록으로 구체적이고 간결해야 한다. 일의 질에 대한 기대나 어떤 수준의 임무수행이 기대되는지에 대한 기준이 있다면 이것 또한 분명히 설명되어야 한다. 동시에 리더는 자원자의 요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리더는 팀원들의 성공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리더는 자원자가 그 사명에 기여하도록 목적의 설정과 검토과정을 통해서 조직원이 사명에 대한 공헌을 통해 계속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조직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들의 성장과 발전에 대한 조직체의 최소한의 투자로서 ‘임무수행 검토’를 받을 권리가 있다. 일 년에 한번 하는 평가는 충분치 않다.

조직원이 그 일에 대해 여전히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동안 평가가 주어질 필요가 있다. 베스트셀러였던 『1분 매니저』는 계속적인 검토와 평가를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그 제안된 방법이 지니고 있는 조금은 기계적인 면에 대해 『59초 고용인 : 당신의 1분 부장보다 1초 앞서 있는 방법!』이라는 또 다른 책이 발간되기도 했다. 나는 위 저자의 원칙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계발의 마지막 원칙은 조직원들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훈련과 성인교육을 제공할 것을 강조한다. 임무수행 검토의 목적이 조직원으로 하여금 더 큰 책임을 감당하도록 준비하고 계발하는 것이라면 검토결과 이를 위한 어떤 행동이 있어야 하며, 추가 교육은 그 행동을 지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6. 책임을 통한 영향

경영적 원칙 1.

책임과 취약성

리더는 책임을 지기 때문에 상처 입기 쉬운 취약성을 지닌다. 다른 사람과의 상호의존의 관계에서 사명과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자기자신을 내어 준다는 일은 리더에게 커다란 도전이며 모험이다.

경영적 원칙 2.

책임과 용서

우리에게 리더십을 맡기시는 하나님의 위탁 뒤에는 우리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비전을 성취하시겠다는 용서의 희망이 있다. 또한 하나님의 용서를 바탕으로 따르는 자들은 자신의 리더 역시 연약하다는 것을 헤아리고 용서하며, 리더들 역시 스스로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가운데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나는 리젠트 대학에서 리더십의 책임을 맡았을 때 그 일이 내 능력을 초과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 리더십에 맡기신 사명과 공동체에 대한 중대한 책임을 느끼며, 이 절대적인 의존성과 필요로 인해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을 섬기고 지혜와 비전과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할 시간을 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성경책 앞에 종이와 펜을 두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는 동안 어떤 착상들이 떠오르면 잠시 중단하고 그것들을 기록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중보기도 가운데 올려드리고 내 자신의 안건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이 시간이 오히려 하나님의 관점으로 일을 보는 시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듦으로써 하나님과의 시간을 계획하라. 리더십은 섬김의 관계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되며, 그 관계에서 나오는 힘으로 남들을 이끌게 된다. 또한 리더들은 스스로 배움과 성장을 위한 시간을 내야만 한다.

이것은 그들이 이끄는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과 동일하다.

연구하며 배우며, 계속해서 새롭게 되는 것은 리더십에게서 필수적이다. 피곤하면 비전을 유지하기 힘들게 된다.

또한 리더는 사고를 풍부히 하며, 인생에 대한 관점을 넓히기 위해 양육받을 수 있는 조직체 밖에서의 관계들이 필요하다. 리더들에게 올바른 시각과 에너지를 주고, 또한 그들이 무언가를 가져와 조직체와 나눌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리더들이 조직체 밖에서의 위탁과 관계 형성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가족에의 위탁과 친구들과의 관계와 우정을 통해 리더십 관계와 삶과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비전과 가치관에 더불어 취약성은 리더십의 결정적인 요소들이다. 오늘날 경영에 관한 문헌에서 용서에 관한 부분은 거의 없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리더십의 위기일 수 있다. 리더십은 용서를 필요로 하며, 용서는 리더십을 양육한다. 리더는 자신의 실수를 통해 배움으로써 남들을 이끈다. 그리고 리더는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패하고 배울 기회를 줌으로써 다른 리더들을 계발해 낸다. 리더는 자신의 취약점을 포용하고 조직원들을 용서해야 한다.

지식은 능력이다. 정보 또한 능력이다. 개인적인 성실성과 정직, 그리고 비전의 확신 역시 능력으로 간주된다. 당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갖는 안정성은 주위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이다. 효율적인 리더는 그들이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한 능력을 주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리더십은 비전과 가치관, 그리고 섬김을 함께 추구하며 각 사람을 돌보는 적절한 방안들을 소유한다.

섬기는 리더십은 소망과 비전을 제공하며 그 약속한 바를 이룬다. 더불어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며, 변화를 가져온다. 리더는 따르는 자들의 성장과 발전에 투자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 되도록 능력을 주는 변화시키는 관계다. 훌륭한 리더십은 그 과정 안에서 리더와 따르는 자 모두가 성장한다.

이러한 관계 중심의 리더들은 그 공통사명에 자신이 ‘기여할 책임’을 진다. 리더십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를 두며,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안에서 현재 보이는 이상의 잠재력을 보고 그 잠재력을 계발하는데 자신을 위탁하는 것, 섬기는 리더십은 바로 이것에 관한 것이다.

Ⅱ. Biblical Leadership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로서 “어떻게 우리의 리더십을 향상시킬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다양한 리더십 이론과 모델들이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지도자로서 우리가 따라야 할 유일하면서도 완벽한 모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릭 워렌 목사님이 강의 하신 바탕으로, 성경적 리더십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자.

1. 자기 이해(Identification)

리더로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역사상 위대한 지도자들은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다. 우리 모두는 강점과 약점을 함께 가지고 있다. 강점만 있는, 약점이 전혀 없는 리더는 없을뿐더러, 그런 리더가 되기 위한 노력은 우리에게 짐만 지울 뿐 우리의 성장을 돕지는 못한다. 리더로서 우리는 자신의 강점과 약점, 모두를 인정할 줄 아는 솔직함이 필요하다. 좋은 리더는 약점이 없는 리더가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리더이다.

예수님께서는 18번이나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셨다. 리더로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라.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 하나님에게 있어 당신은 가장 귀중한 존재이자 당신의 시대에 당신의 자리에 꼭 필요해서 세워진 리더임을 잊지 말라.

2. 명확함(Clarification)

리더는 자신이 성취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당신의 삶의 부르심이, 당신을 리더로 세운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당신의 삶의 방향은 당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만약 지금 당신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방향을 전환하라. 그 누구도 당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지 않다. 누구도 당신을 희생자로 만들지 못한다. 그 누구도 당신이 지금 섬기고 있는 방식으로 섬기도록 강요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명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그분은 분명한 목표를 설정한 솔직한 리더였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계셨을 뿐 아니라, 그의 삶을 무엇을 위해 투자해야 할지도 알고 계셨다. 그분은 분명히 목적이 이끄는 리더셨다.하나님은 당신의 삶과 사역의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소홀히 하거나 다른 무엇을 이보다 중히 여긴다면, 결국 당신의 삶은 낭비되고 말 것이다.

리더란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목적, 하나님이 자신이 섬기는 조직을 세우신 목적을 분명히 깨닫고 열정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3. 동기(Motivation)

리더는 누구를 기쁘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의지나 바램과는 달리 우리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없다. 우리는 한 사람을 기쁘게 하는 반면, 다른 사람에게는 실망을 안겨다 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기쁘게 해야 할까?

예수님은 한 사람의 청중을 위해서 사셨다. 그분의 모든 목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대중의 만족이나 지지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했다. 이것이 바로 리더로서 우리가 받아야 하는 교훈이다.

당신의 사역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서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의견에 집중하시기 바란다. 여러분에게 갈채를 보내는 사람들이나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 이런 것들은 여러분을 곁길로 빠지게만 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사역을 하라.

4. 협력(Collaboration)

동역자와 함께 사역하라. 리더십은 당신 혼자 있을 때 발휘되지 않는다. 항상 팀이라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리더들은 위대한 팀을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당신이 팀을 이루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더 이상 리더라고 할 수 없다.

리더십이란 무엇일까?

리더십은 영향력이고, 누군가가 당신을 따르고 있는가, 아닌가로 평가된다.

예수님은 팀 사역에 있어서도 모범을 보이셨다 주님은 절대로 혼자서 사역하시지 않으셨다.

마가복음3장14절에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다른 사람들의 협력을 허락 하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사역을 위한 비전을 주셨다면, 주님께서는 그 비전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함께 붙여주실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당신의 비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5. 집중(Concentration)

중요한 일에 집중하라. 삶은 중요한 것으로부터 여러분의 관심을 빼앗고 흩어지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때로는 좋은 것들로 인해서 우리의 주의는 흩뜨려진다. 사탄은 나쁜 일이나 안 좋은 일로 당신의 삶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데 실패한다면, 반드시 좋은 일들로 도전해 올 것이다.

예수님은 집중력의 대가이셨다. 주님께서는 삶을 마치 레이저와 같이 한 곳에 온 힘을 집중하셨다. 자신의 삶이 산란되어지는 것을 거부하셨다.

누가복음 9장 51절에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 주님은 굳은 의지로 이 일을 행하셨다. 주님은 중요한 일을 향한 의지를 분산시키는 어떤 것도 허용치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에 엄청난 잠재력을 심어주셨다. 하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현실화되지 못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방식으로 당신의 삶을 사용하실 것이다.

6. 묵상(Meditation)

하나님께 귀 기울이라.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는 것을 여러분의 삶의 습관으로 만들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기도는 주님의 삶에 있어서 규칙적인 부분이었다. 마가복음 1장 35절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요하셨다면, 우리 역시 필요하다. 당신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새롭게 하고 재충전할 묵상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당신에게는 홀로 잠잠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

7. 휴식(Relaxation)

재충전할 시간을 가지라. 리더십은 우리의 힘을 고갈시키는 일이다. 이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우리는 단순히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휴식을 취할 것을 권고하셨다.

마가복음 6장 31절에 예수님께서는“(예수께서)이르시되 너희(12 제자들)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주 힘든 사역을 했고, 그래서 그들이 지쳐있다는 것을 아셨다. 그들은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서 휴식을 취할 것을 명하셨다. 휴식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도 말씀하신 것이다.

네 번째 계명은 일곱째 날에는 아무 일도 말라고 하셨다. 일주일에 하루 동안은 당신의 사역으로부터 잠시 물러날 필요가 있다.

매일 관심을 돌리고, 매주 물러나고, 매년 버리는 습관을 가지라. 매일 관심을 돌린다는 것은 매일 재미있는 무엇을 한다는 것이다. 긴장을 풀어줄 수 있는 취미를 가지라. 매주 물러난다는 것은 매주 휴식을 취하고 회복하기 위해서 하루의 쉼을 가진다는 의미이듯 매년 버린다는 것은 매년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의미이다.

당신의 리더십은 당신의 교회가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잠언 11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현명한 리더십 없다면 그 리더십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는 의미다. 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진리다. 현명한 리더십 없이는, 여러분의 교회가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예수님께 리더십을 배우십시오. 우리에게는 더 나은 인도자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Ⅲ. 레위기 Leviticus

레위기는 모세 오경의 세 번째 책이다. 히브리어 표제는 와이이크라(wayyiqra),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레1:1)이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막을 준비하는 것에 대하여 많은 것을 다룬다면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에 대하여 규정하시고 어떻게 죄를 용서하시며, 어떻게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피하도록 도우시는지를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뜻이 백성들에게 계시되며, 하나님의 임재(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심)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를 가르쳐준다. 레위기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백성으로서 선포될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민족이 되는지를 설명해준다(풀 하우스).

우리는 레위기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입은 자들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며 섬기며, 십자가 앞에 나아가므로 날마다 정결케 되며, 죄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또한 레위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을 계시하시고 임마누엘이 되심을 가르치며, 새언약의 백성으로서 세상에 선포되며,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세상에 나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게 된다.

1-7장: 언약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리는 제사

이 장들에서는 희생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관점에서 희생제사를 다루고 있으며, 예배하는 자가 자신의 희생제물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제사에 대한 규례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에 대한 것이다.

1) 번제는 죄와 관련이 없는 경우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죄와 관련된 경우에는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제거되는 것 이다. 이 제사는 그 누구도 대속을 위해 자기를 대신할 동물이 없이는 언제라도 거룩하 신 여호와께 나아갈 수 없음을 계시한다.

예물을 드리는 자는 이 희생제사를 통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이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신 것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드리시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신 것을 의미한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서 하나님께 헌신된 자들이다.

2) 소제는 짐승의 피흘림이 없이 곡식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로서 희생제사에 더하여 바치던 제사이다. 자기의 육신의 소산물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헌납하는 상징이다. 이 제사는 이스라엘의 예배자에게 이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서 첫 열매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풍성하신 선하심을 입증하는 증표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범사에 감사하는 백성으로 삼으셨다.

3) 화목제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굴복하고 희생제물이 흘린 피에 근거해 그분께 나아간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공동체 식사 가운데) 축하할 수 있다. 화목제는 하 나님과 인간과의 화평과 동시에 인간 대 인간의 화평을 상징하는 제사이기도 하다. 그리 스도는 우리의 화목제물이심을 상징하는 제사이다(요일4:10).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흘리신 피로써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로서 세상에서 복음으로 화목케 한다 (마5:9).

4) 속죄제는 하나님 앞에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으로서 고범죄(고의성을 띤 죄) 가 아닌 것이어야 한다. 고범죄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민15:30). 이 제사는 하나님 과의 관계에서 수직적인 성격을 갖는다.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친교를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영적인 정화제(cleanser) 역할을 한다.

속죄제는 정규적인 죄에 대해 그 죄로 인한 오염과 타락을 씻음으로써 용서를 베풀고, 죄인이 하나님과 충만한 교통을 회복할 수 있도록 계획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속 죄제로 드림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셔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루셨다.

5) 속건제는 성물(聖物)을 사취하거나, 사람에게 적법하게 속한 것을 무단으로 점유하거나, 그것에 대해 거짓 맹세함으로써 그들의 것을 가로채는 죄로서 인간 대 인간의 죄를 속하 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이 제사는 개인적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속건제로 드리시 므로 많은 씨를 보게 되었으며(사53:10), 먼 데 있던 우리들을 화평을 이루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셨다(엡2:17-18).

8-10장: 제사장법(교회의 영적 리더들)

8장은 여호와를 섬기는 가운데 영적 리더의 자리에 서도록 구별된 사람들이 사역에 임명되거나 섬김에 봉헌될 때 항상 공개적이고 모든 회중에 의해 증거되어야 하는데, 그럼으로써 그 부르심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증할 수 있게 된다. 죄의 용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섬김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성령님에 의한 하나님의 능력 주심이 있어야 한다.

사역하는 이들은 속죄의 근거로 그 일을 행한다. 여호와를 섬기는 이들은 자신을 그분께 온전히 구별하여 드려야 한다. 여호와를 섬기는 일은 평생의 헌신이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어떤 것을 할 수 있게 되기 전에 그들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아들들이 어떤 것을 할 수 있게 되기 전에 그들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 자신을 위하여 어떤 일들이 먼저 행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그들을 향하여 역사하셔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하여 성령으로 역사하셔야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섬길 수 있다(모세오경. 빅터 헤밀턴).

9장은 새로 임명된 대제사장 휘하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제사의 시무식을 기록하고 있다. 이 제사는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임재를 체험하는 가운데 믿음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제사 의식의 극적인 시작을 제공해주었다. 제사장이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에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의 사역이 헛되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하다.

비록 제사장이 성스러운 임무를 띠고 있고 성스러운 직위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끊임없이 죄 씻음을 받아야 하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이 하나님을 본 자, 믿음으로 그분의 뜰에 들어가 그분을 예배한 자에게 확실히 보장되었다.

10장은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는 이들, 곧 영적 리더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행동 가운데 규율을 따르므로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순종, 혹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길을 떠나는 것은 재난을 가져온다. 하나님에 의하여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을 받은 그리스도는 죄없으신 분으로서 성령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신 분이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로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앞에 나아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신다. 교회의 영적 리더들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복음을 순종하며, 주님의 양들이 거룩함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예배하는 왕같은 제사장의 삶으로 이끌어야 한다.

11-16장: 정결과 부정에 관한 법

인간의 삶에는 자연스럽게 더럽혀짐과 질병이 빈번히, 거의 매일 일어난다. 그래서 율법은 이것을 해결할 방법을 제시했다. 차단이나 격리, 정결 의식을 통한 정화, 성화 의식을 통한 거룩해짐 등이 그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베푸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의 율법에 순종하고 규정된 의식을 준행함으로써 믿음을 보여야했다. 옛 언약에서 성전, 제사, 정결케 함, 절기, 제사장 등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레위기 제사 제도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종결된 것은 율법의 의식이지, 그 율법이 계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규례들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계시와 그것이 요구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여전히 적용될 수 있다. 거룩함이 없이는 여호와를 볼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성화되거나 혹은 거룩하게 되었고, 따라서 거룩한 백성이라고 바르게 고백할 수 있다(벧전1:2, 2:9-10).

그러나 그들의 고백은 거룩한 삶의 실체를 통해 반드시 확증되어야 한다(골1:22, 벧전1:15). 신약은 도덕적 불완전함과 부정함, 즉 구약에서 우리를 부정하게 만들었던 범죄 행위는 여전히 새 언약 안에서도 범죄한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회개와 고백 그리고 용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종결된 것은 (1) 백성들이 성소에 오는 것을 가로막은 더럽혀짐과 질병에 대한 분류, (2) 부정함을 제거하는 의식이다. 신약에서 부주의와 무지에서 온 죄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모든 죄는 여전히 죄로 불리며 주님을 향한 예배와 섬김에 참여하기 전에 용서와 치유를 필요로 한다.

둘째, 피부병이나 신체의 유출과 같은 인간의 더럽혀짐은 죄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신체적(지상적) 조건이었다. 신체의 유출과 더럽혀짐을 위한 제사 의식이 규정될 때 죄의 고백이 요구되거나 제사장이 용서의 말을 전한 적은 결코 없다. 유일하게 요구되는 것은 정결하게 되는 때까지 성소로부터 떨어지는 것이다.

셋째, 고백과 용서를 필요로 하는 것들은 또한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죄였지만, 덜 뻔뻔스러운 죄(부지중에 저지르거나 알지 못하고 지은)는 속죄제를 통해 바로잡을 수 있었다.

넷째, 사람들이 저지른 중대한 범죄(도덕법을 위반한 것처럼 계획되고 고의적으로 율법을 위반한)는 이스라엘에서 속죄제를 통해 해결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개입을 통한 용서하심을 필요로 했다.

11장 - 음식 규정에 대한 주된 구상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서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밑바탕에 놓인 동기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이 이웃에 있는 민족들의 신앙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막아주고, 그들을 가나안 족속의 저속한 더러움과 악들로부터 보존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이 정한 음식 규정을 따름으로써 이교도 이웃들과 동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거룩이라는 것은 사람이 밥상 위에서 취하는 그의 태도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사람이 부정한 것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가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부정한 것을 또 하나의 성전, 곧 자신의 몸에 집어넣는 것 역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고전3:16, 6:19-20). 음식의 문제는 가족 구성원들과 집 안에서 행해지는 거룩의 문제이다. 이것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신실하게 삶으로 실천하는 거룩의 문제이다(빅터 헤밀턴).

왜 배로 기어 다니는 짐승들이 인간이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으로 규정되었는가? 이것은 일종의 죄책감의 연상 작용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뱀은 인간을 유혹해서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도록 만든 것 때문에 종신토록 “배(가혼)로 다니라”(창3:14)는 저주를 하나님께 받은 바가 있다. 그런데 먹는 것이 금지된 짐승들도 역시 배(가혼)로 밀고 다닌다(레11:42).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한다(롬12:2).

12장 - 정결에 관한 규례는 부정한 것은 어느 것이라도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 진리는 영광에 들어가는 것도 주관할 것이다. 산모가 “부정하다”(현대 의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감염되기 쉽다”)고 선언함으로써 레위기는 산모와 태아를 혹시 있을지 모르는 각종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주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결혼과 출산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 계속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영광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막12:25, 요일3:2-3).

13장 - 피부병으로 인한 더러워짐과 의식들은 세상으로부터의 깨끗이 씻김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 환경으로부터 옮기시고 그들을 영원히 정결케 하실 미래의 성화(혹은 영화)에 대한 필요성을 상징하고 있다. 곰팡이와 진균 감염은 세상에 들어온 죄의 영향을 다룬다.

즉 오염과 타락, 더럽혀짐과 죽음의 저주가 평생 동안 온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들로부터 구별되기 위하여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곰팡이를 죄의 영향력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하여 세상으로부터의 영적 오염을 피하라는 개념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의복(슥3:3-4, 유23절, 계3:4)은 사람의 죄나 의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반점이 생긴 옷을 제거하고 멀리하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와 그들에게 미혹된 사람들의 영향력을 제거해야 함을 말한다. 반점이 생긴 옷을 제거하고 흠 없는 옷을 입는 것은 거짓 가르침과 죄로부터 순결을 지키고 의의 행동 가운데 포함되는 것을 의미한다.

14장 - 민12:9-11과 대하26:19등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벌로써 나병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출15:26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심판으로 병을 내려주실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들 가운데 맹인이나 절름발이들은 치유를 받았지만 문둥병자들은 깨끗케 됨을 받았다. 이 단어가 다른 문맥들에서 사용된 예를 살펴보면 이 단어는 아주 뚜렷한 도덕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행15:9, 고후7:1, 엡5:26, 약4:8, 요일1:7, 9).

정결은 육체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피부병 이후의 정결 의식은 정결해진 사람조차도 속죄의 제사 의식을 통해서만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려준다. 새 한 마리는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한 마리는 놓아주는 가운데 예배자는 자신의 병 역시 이렇게 혹은 저렇게 끝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마치 다시 하늘을 날개 된 새처럼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깨달았다.

곰팡이와 진균에 감염된 이후의 정결 의식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거룩함을 요구하시며, 그 거룩함은 정결, 건강, 깨끗함을 포함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부정함은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을 영원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또한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시는 언약 공동체로서의 역할로부터 분리시킨다.

표피의 질병과 그 처방은 죄와 그 결과에 대한 상징이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의 교제와 회복은 죄와 그 결과에 대한 치유를 요구한다.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치유와 죄사함과 교제가 회복된다.

15장 -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것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주제는 만성 감염, 생식과 관련된 유출, 월경 그리고 신체적 배설 등과 같은 매우 개인적인 문제에서도 계속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이며, 따라서 거룩한 범주 안에 포함되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질병과 감염을 막는다. 육체적인 불결함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불결함 역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벽을 만든다.

하나님의 치유는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정결하게 만드시는 것이다(빅터 헤밀턴).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모든 육체적 문제로부터 자유함을 얻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벽을 만드는 것에서 정결함을 얻도록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며, 하늘에 있는 성소에 들어갈 때 모든 육체적 도덕적 문제로부터 자유를 얻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16장 - 속죄일 의식은 완전한 속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규정이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모든 죄와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 정결하게 하는 길을 마련하셔서 그들로 그분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셨다. 자비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삶 속의 잡동사니들과 쓰레기들을 처분할 수 있도록 한 날을 따로 떼어 놓으셨다.

6, 11, 17, 24절에 일곱 번이나 사용된 “자기를 위하여”란 표현은 높은 위치에 있는 성직자가 먼저 자기 자신의 잘못들을 바로잡는 것이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해 주고 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과 진 밖으로 끌려 나가는 속죄염소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위한 의미심장함으로 가득 차 있다.

17-26장: 거룩함을 위한 규례

17장 - 피의 신성함. 피를 먹는 것의 금지를 크게 강화시키는 것은 이런 피흘림의 고귀한 용례다. 하나님께서는 피로 속죄를 삼으려고 계획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실하게 예배하는 자는 생명(피가 가리키는)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깨닫고 제물이 갖는 피의 신성함을 보존해야 한다.

이 교훈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속하기로 계획하신 것을 거짓 신에게 제물로 바치거나, 경쟁 신당에 바치거나 속화되거나 평범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믿는 자인 우리는 그분의 피를 ‘마시라’는 가르침을 받는다(요6:53-54). 결국 이것은 속죄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그분의 피를 실제로 마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위한 그분의 제사를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함을 의미한다.

18장 - 육체관계의 신성함.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에 대한 충성과 계명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적 경계를 침범함으로써 창조 질서를 위반하지 말아야 한다(친족간의 성관계, 모든 불법적인 성행위). 이 율법들은 여성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안전과 존엄을 보존한다.

여성이 남성의 욕망의 무차별적인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한 가정에서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누구도 그 힘을 성적 충족을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된다. 존경과 존엄은 가정 안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는 성적 친밀함이 결혼을 위해서만 주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모든 악함에 대한 심판을 요구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9장 - 거룩한 민족은 그들의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보이기 위해 모든 인류를 사랑해야만 한다(풀하우스). 사랑을 통한 거룩함.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며(율법의 정신), 세상과 구별된 그분의 기준을 따라 살고, 이웃에게 친절과 공의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분의 거룩하심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을 본받고, 복음(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순종하므로 삶의 모든 영역에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레 19:2을 인용하면서, 핍박의 절정에 직면서 그의 독자들이 계속해서 거룩을 지켜나갈 것을 당부한다(벧전1:13-16).

20장 - 타락한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백성은 이교 신앙(거짓 종교)을 그치고, 이교 관행(부모를 저주, 비정상적 성적 행위)을 멀리하고, 여호와를 향한 거룩한 삶을 개발해야 한다. 신약 역시 간음, 근친 상간, 동성애, 수간, 우상숭배, 하나님의 거룩함에 우선하는 자기 만족에 대해 정죄한다.

바울 사도는 그런 죄를 범하는 사람은 ‘사형에 해당한다’고 선언한다(롬1:18-32). 그러나 그는 처벌을 하나님께 맡겨야 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해 죽으려고 세상에 왔으며, 진정으로 뉘우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21장 - 거룩한 명령들. 여호와 앞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은 슬픔의 순간에도 언약의 소망을 유지해야 한다. 결혼 가운데 언약의 순결함을 보여야 한다. 자신의 의무를 책임져야 한다. 공적인 예배를 인도한다면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적 지도자로 부르신 사람들은 행하는 모든 일 가운데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며, 회중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한다.

22장 - 제사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신실한 예배자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을 갖고 나아간다. 영적 섬김이 오직 여호와께만 드려지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를 따라야 한다.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받으실 만한 제물과 함께 그분의 임재 안에 들어가야 한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에 근거해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장 좋은 것, 곧 자기 독생자를 주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도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23장 -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감. 매주 노동으로부터 쉼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며, 또한 자신의 노동의 노예가 아님을 말해준다. 또한 안식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머무르도록 인도해 준다(Vrizen. An Outline of Old Testament). 안식일의 안식은 세상 일의 완전한 중단을 요구한다. 성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노동을 멈추고 여호와의 안식일의 안식을 축하하는 믿음의 공동체에 참가함으로써 언약에 대한 동참을 증거한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는 불신앙과 함께 약속된 안식의 성취가 미루어지는 것으로 가득 차게 된다. 약속의 성취가 시작되는 것은 메시야이신 예수님과 함께 왔다.

그분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초대하실 때 그분은 오랫동안 기다려졌으며, 새 언약 가운데 약속되었던 종말론적 안식을 제공하고 계셨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장래의 안식도 확증받았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 곧 자신의 시간, 자신의 재능, 자신의 활동, 자신의 우성순위를 하나님께정결하게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가운데 더 큰 축복과 더 큰 성취를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안식일의 안식 안에서 계획하셨던 것을 누리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구원과 따라야 할 순결한 삶의 기념을 통해 영적 유산을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월절(무교절)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절기로서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성취되었으며,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은혜를 기뻐한다. 즉 영적 명절을 지킨다.

초실절(맥추절)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초실절을 오순절(칠칠절:유월절 후 7주를 지난 50일만의 절기)이라고 한다. 오순절은 성도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질 교회 형성의 예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영생에 필요한 것을 베푸셨다는 것과 주님 안에서 죽은 모든 이에게 위대한 추수가 올 것임을 알게 된다.

초막절(수장절)은 광야 여정 속에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이다. 또한 한해의 추수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기도 하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광야와 같은 세상의 여정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구원의 완성을 기뻐할 것을 바라본다.

거룩한 절기력에 따르면 칠 월의 속죄일(26-32절) 다음에는 바로 칠 월의 초막절(33-44절)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 절기에는 “너희 하나님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즐거워하도록” 되어있다(40후반절). 이 말씀들을 통해 레위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그분에게 반하는 모든 것들, 네가 망쳐버린 모든 것들을 네 삶에서 제거하라. 그리고 나서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말씀한다(빅터 헤밀턴).

그렇다면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하나님과 관계를 무너뜨린 것을 내려놓고 제거하므로 영적 명절, 즉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풍성히 누려야 한다.

24장 - 하나님의 백성(즉, 제물을 드리는 백성, 행동을 취하는 지도자)이 드리는 헌신된 예배(즉, 신실하고 올바르게 가져온 제물)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밝게 비춰지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공급하심이 계속 될 것임을 확증한다(1-9절).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히 보존해야 한다(즉, 여호와의 거룩하고 주권적인 성품이 세상 가운데 보존되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공의는 신성모독자를 심판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신성모독자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다만 그분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신성모독의 죄를 저지른 것이다.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장차 올 세상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25장 - 안식년(매 칠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희년(매 오십 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에 대한 율법. 안식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그들은 모든 백성들이 그분의 풍성함을 함께 나눌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책임을 갖고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성경에 안식년이 지켜졌다는 증거는 별로없다. 그러나 역대하 36장 21절은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 그 땅이 안식, 곧 칠십 년간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백성들이 지키지 않은 안식년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시행하셨음을 암시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안식년을 지키므로써 삶이 단순한 노동, 돈, 권력, 성공 및 욕망에 있지 않음을 진실로 믿어야만 했다(빅터 헤밀턴). 안식년은 또한 모형론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그것은 앞으로 올 커다란 안식의 시간을 알리는 징조였다. 종말론적인 안식일에 대한 소망이 백성들의 구원 안에서의 해방과 안식을 의미하는 반면, 안식년은 신음하는 가운데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롬8:1-22) 땅의 성취와 번성을 의미한다.

안식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청지기로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것이라는 원리에 비추어 항상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함을 인정하여야 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돌아보아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공동체와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하여야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오랜 기간 노예가 되거나 빚을 지지 않게 막는 것이다.

희년,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십 번째 해를 구속된 공동체 안에서 여호와께서 모든 땅의 생명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방법의 하나로써 모든 사회적 압제로부터의 해방, 모든 가정적인 빈곤으로부터의 회복, 모든 땅에 대한 안식의 시기로 삼았다. 희년에는 기업무를 자(고엘:구속자)가 친족의 땅(기업)을 회복시키며, 친족의 빚을 갚아주며, 종된 자에게 자유를 주며, 죽은 자의 기업을 이어야 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61:1-3에서 자유, 즉 희년을 선포할 장차 오실 선지자를 언급한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했다고 말씀하셨다(눅4:21). 예수님은 희년을 성취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업무를 자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시며, 우리의 빚을 갚으시며, 죄의 종된 자리에서 자유를 주셨으며,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권속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이 기업무를 자아신 그리스도의 희년의 은혜를 입었다면 사회의 소외되고 억업받고, 빚진 자, 가난한 영혼들을 돌보아야 한다.

26장 - 언약의 순종에 따르는 보상.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언약의 요구들을 신실히 지키면 그들에게 영적인 복과 물질적인 복을 모두 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불순종은 고통(14-17), 고갈(18-20), 고생(21-22), 침해(23-26)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부터 추방을 초래한다.

죄의 고백은 심판을 저지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회복하도록 해 준다(풀 하우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죄를 막고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에 대해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에서 심판을 내리시겠다고 경고하신다. 신약은 바울 사도의 증거와 같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22)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물질적인 복을 주실 수 있고, 또한 주시지만 그분은 항상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최우선 순위는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신실하게 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신뢰하며, 그로 인하여 만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복의 근원이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현시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을 받는 즉각적인 방법에는 가난, 겸손, 궁핍, 고통이 포함된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복음을 순종하는 신실한 자들에게는 대적에 대한 승리, 영광 가운데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는 것, 새하늘과 새 땅을 누리는 것에 대한 약속이 계속된다.

하나님앞에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촛대,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증거를 그들에게서 옮기시는 것이다(계2-3장). 신실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상을 잃어버림이 있을 것이다(고전3:10-15, 고후5:10). 하나님은 오래참으시므로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심판에 이르지 않기를 원하신다(벧후3:9).

세상 끝날에 복음을 끝까지 불순종한 자들에게 심판이 내려지게 될 것이다.

27장 - 서원과 약속의 이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자기 백성이 스스로 서원하거나 약속한 것을 신실히 이행하고, 그 서원과 약속이 합당한지 주의할 것을 요구하신다. 여호와께서는 말씀을 신실히 행하시고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 역시 자신의 말에 진실해야 한다.

신약에서는 서원보다는 자신의 말을 지키는 것을 더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서원과 맹세를 쉽게 어겼기 때문에 바로 그 점을 경고하셨다(마5:33-37). 힘든 서원을 지키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예수님은 다른 의무를 피하기 위해 서원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마15:5-9, 막7:11-13. Allen Ross).

레위기 전체

레위기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찬양과 헌신의 행위가 가진 무한한 특권에 대한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오직 하나님과 그의 성소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그러한 찬양과 헌신의 행위가 가진 무한한 특권에 대한 내용이다(빅터 헤밀턴). 하나님은 레위기 전체를 통해 그에게충성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상을 피해야만 하며, 애굽과 가나안의 제사의식을 반드시 거절하여야 한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구원하시며, 인류와 언약을 맺으신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구체적이고 납득할 만한 거룩한 규정들을 그 백성들에게 계시해 주시며, 이스라엘을 거룩한 족속을 삼기 위해 위험하고 수치스런 영역으로부터 그들을 불러 세우시며, 무한히 용서하시며, 공평하게 판단하시며,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찬양과 충성과 헌신의 삶을 살며, 그것이 무한한 특권과 영예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며, 자기 탐닉의 우상을 피해야 하며,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 하나님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며, 새언약을 맺으시며, 복음을 주시며, 흑암과 사망의 자리에서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왕같은 제사장으로 불러 세우시며, 무한히 용서하시며, 공평하게 판단하시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기업으로 세우시며, 새하늘과 새땅을 허락하신다.


Ⅳ. Tithing is not a law

십일조는 하나님의 계명이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계명인 십일조를 부정하고 폐기된 율법이라 하여 비성경적이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십일조가 성경적으로 합당하다는 것이다 용어약속을 해보면요, 율법이란 구약시대에만 유효했던 하나님의 법도를 지칭하고, 계명이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오늘날도 포함) 지켜져야 할 하나님의 법도를 칭하는 것으로 하겠다.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라는 명분하에 십일조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십일조 폐지뿐만 아니라 주일성수도 부정하며 대형교회의 성전건축 및 교회 안에서의 목사체계도 강력히 부정하다. 물론 그들은 성경을 근거로 주장한다. 이에 많은 여린 성도들이 그들이 주장하는 여론몰이의 십일조 폐지론을 보고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결심들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계명은 바로 온전한 주일성수와 온전한 십일조이다. 온전한 주일성수는 우리의 모든 영적 주권은 주님께 있음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다. 온전한 십일조는 우리의 모든 물적 주권은 주님께 있음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이에 온전한 주일성수와 온전한 십일조는 그 믿음에 대한 최소한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십일조가 율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십일조는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증거 해 주시기 바랍다.


"십일조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가장 근본적인 성경 근거는 신약에는 십일조를 내라는 구절이 없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드렸다, 라는 구절이 없는 것이다, 구약에 그렇게 숱하게 기록된 십일조는 성전제사용 율법이었다, 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의 십자가 구속으로 이제는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는 바, 더 이상의 율법인 십일조를 지키는 것은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 구속사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들 하시는 것이다.


특히나 십일조는 세계적으로 극소수만이 지켜오고 있으며 십일조로 인하여 교회의 온갖 폐단이 발생하였고, 십일조보다는 사실 연보(구제)가 더 성경적이며 십일조의 폐단을 떠나서 성경적으로 십일조는 율법이었기에 오늘날에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신약에 한 구절만이라도 십일조를 드려야 함을 제시하였다면 오늘날 이런 갑론을박의 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십일조를 수호하는 주의 종이나 우리들이 제시하는 구절이 있는데, 근거 구절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말라기 3장 8-10절과 마태복음 23장 23절이다.


말 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러나 십일조를 부정하는 사람들 앞에서 위 성경구절을 섣불리 제시하다가는 되레 뒤통수를 맞을 것이다. 얼굴이 빨개질지도 모른다. 속상할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연구를 많이 하였는지 모른다.


먼저는 말라기 3장 8절을 보시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9절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셨다.

이와 같이 MS, MS2, MAS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요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도둑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런데 위 말라기 구절에는 심각한 번역의 오류가 있다.


오류 1

이것은 오류라기보다는 오해인데, 말라기 3장 8절~10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당시 부패한 제사장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말라기 선지자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느헤미야 선지자의 13장 14장을 보시면 이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시 부패와 타락의 길로 치닫던 제사장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8절의 십일조 도둑은 백성이 아니라 제사장들이였던 것이다!


오류 2

말라기 3장 10절의 내용 중에는 "나를 시험하여 보라" 하였다. 주의 종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면서도 십일조만큼은 시험하여 보라 허락하였으니 헌신자들이 정 의심나면 시험하는 마음이라도 한번 실천해보라고 강권들 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시험하여 보라"는 것은 명백히 번역의 오류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고 숱하게 강조하고 있다.

대표적인 몇 구절만 보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출 17:2)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신 6:16)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고전 10:9)


구 신약을 통틀어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을 시험하면 아니 되며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바인데, 유독 말라기 3장 10절만큼은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고 하신 것이다. 도대체 이 십일조가 무엇이 길래 우리 피조물이 하나님을 시험해볼 만큼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말라기 3장 10절에서 제시된 "나를 시험하여"의 시험하다, 라는 히브리어 원문은 "빠한"이다! 별개의 의미로서 성경에 기록된 "시험하다"의 히브리어 원문은 "나싸"이다. 나싸는 영어로 말하면 "test", "tempt" 가 되는 것이요, "빠한"은 "prove"가 되는 것이다.


10 Bring the whole tithe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food in my house. Test me in this," says the LORD Almighty, "and see if I will not throw open the floodgates of heaven and pour out so much blessing that you will not have room enough for it. <NIV>


10 Bring ye all the tithes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meat in mine house, and prove me now herewith, saith the LORD of hosts, if I will not open you the windows of heaven, and pour you out a blessing, that [there shall] not [be room] enough [to receive it]. <KJV>


즉, 말라기 3장 10절에 제시된 "나를 시험하여"의 히브리어 원문은 "빠한", 영어로는 prove(증명하다)인데, 유독 우리나라 성경번역에서는 이것이 test(시험하다)로 번역이 된 것이다.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 모두 이 두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며 번역하고 있으나 우리 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라고만 번역함으로써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다시 성경구절, 에베소서 5장 10절을 보시면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하셨다. 이것도 우리 성경번역의 오류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시면 "도미카조"인데 이것은 영어로 prove(증명하다)이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는 이것을 test(시험하다)라고 번역을 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십일조나 기타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결국 성경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은 모두가 마음으로 그리고 삶으로 입증하고 확증하라는 뜻이지 하나님을 향해 뭔가를 흥정하라고 사용된 경우는 한 번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면 복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는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십일조로 하나님을 흥정하고 시험하라고 가르치거나 부추김을 받았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론을 말한다면 말라기 3장 8절~10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선 제사장들을 향해 그들이 십일조를 바르게 관리, 사용하며 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온전하게 드림으로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며, 섬기기를 원하는 그들의 마음을 증명해 보이라고 촉구하고 계신 것이다.


오류 3

10 절의 온전한 십일조에 대해서도 번역의 오류가 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온전한 십일조에 대해서 오늘날 주의 종들은 whole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요, "온전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콜"인데 영어로는 모든(all)에 해당 된다. 분량을 다 채웠다는 의미의 whole(온전함)로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 단순히 "모든(all)"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일반 백성에 대한 책망이라는 것은 자의적이고 잘못된 해석인 것이고, "온전한 십일조"는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떼어 먹지 말고 다 드리라는 의미에서 강조된 것이 아니라 바로 제사장들을 향하여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도적질하지 말고 "모두 다" 성전 곳간에 들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오류 4

또 10절에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에서 <쌓을>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의 후반에 나오는 말씀 중 "쌓을"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는 글이다. 어떤 성경번역에는 <쌓을>을 작은 글씨로 써놓은 것도 있는데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원문에는 없는, 아니 작은 글씨로 적은 이 단어가 언제나 가장 큰 소리로 읽히고 강조되면서 마치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쌓을 곳이 없을 만치 복 받는 것으로 외쳐지고 있다, 라는 것이다.


결국 말라기 3장 8~10절의 잘못된 번역과 외침으로 인하여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십일조로 인하여 도둑이 되어 버렸고, 십일조만 드리기만 하면 복을 엄청 받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기복주의 신앙으로 흐른 분위기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께 물질만 드리면 복을 받는다, 라는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물질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번제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단어적으로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웜문에 상응하는 뜻으로 얼마든지 그 뜻을 전할 수 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실 때는 반듯이 영계의 공의가운데 채워야할 공의의 조건이 있다. 그중에서 물질은 하나의 표현, 통로일 뿐이다.


마태복음 23장 23절도 보시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하셨다.


십일조 수호의 많은 사람들이 위와 같이 신약구절에도 주님께서 십일조를 언급하셨으니 십일조는 신약에서도 유효하다, 라고 주장을 하지만, 십일조 반대론자들은 이런 주장을 일축해 버렸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이므로 그 때까지는 율법에 속한 신앙생활을 하여야 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먼저는 이 구절의 의미를 살펴보겠다.

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가 언급되어있는데, 이것은 무슨 말이냐 면요, 당시에 지배계층들은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부과함에 있어서 자생식물에게도 십일조를 부과하였다. 즉 산이나 강, 바다 같은 곳에서 자생(自生)으로 자라나는 식물(박하, 민트 등)을 얻었을 때에도 십일조를 내야 한다, 라고 계명을 만든 것이다. 자신들도 또 그러하게 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하여 지켜온 것이다.


이에 주님께서는 바로 뒤 구절 24절에 보시면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하셨다. 당시 지배계층들이 십일조를 거두고 드림에 있어서 얼마나 위선과 거짓이 가득했는지 단적으로 책망을 하시는 말씀이다.


즉, 당시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자생식물이나 일상에서의 작은 수입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드림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고 자만적이었다. 푸성귀 몇 포기도 십일조 한다, 라는 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찼고 이에 그러한 것들도 백성으로부터 거두어들이려는 탐욕이 가득하였던 것이다.


이에 주님께서는 십일조를 드리려는 정신에는 의와 인과 신이 있어야 하거늘 그러한 정신은 져버린 채, 표면적으로는 하루살이도 걸러내어 십일조를 드리는 거룩함을 보이나 뒷단에서는 약대는 꿀꺽 삼켜버리는 그런 거짓과 위선의 마음을 책망을 하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구절의 의미를 놓고 볼 때, 단지 신약에 명시되어 있다하여 이것은 십일조를 드리라는 의미다, 라고 주장하기에는 다소 설득력이 부족하다, 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반대론자들도 이 구절의 의미는 십일조를 드리라는 명이 아님을 제대로 알고서 덤비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십일조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 십일조의 근원을 파헤쳐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십일조가 무엇인지(본질)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율법 전의 아브라함과 야곱의 십일조


성경의 십일조 기록 중 가장 앞선 것이 아브라함(창 14:20)과 야곱(창 28:20-22)의 십일조이다. 이를 근거로 하여 십일조는 율법을 뛰어 넘는 행위로 오늘날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율법이 선포되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법칙으로 십일조가 존재했다는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십일조 반대론자들에게 있어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종종 십일조 수호론자들 안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땅의 소산이 아니요, 전쟁의 승리에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라는 것이다.

전리품도 수입인데 왜 이에 대한 십일조가 인정받지 못할까? 민수기 31:25-30에 전리품은 500분의 1 또는 50분의 1을 여호와께 바치라고 되어 있는데,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십일조(10분의 1)와 전리품은 그 성격이 다르다, 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단 일회성으로 기록되었고 그 이후로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렸다, 라는 정황을 찾을 수가 없다, 라는 것이다.

야곱의 십일조도 드린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서원하였을 뿐이라는 내용이다.

창세기 28:20-22를 보시면, 야곱의 경우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는 “조건부 십일조”를 서원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본래 정신과는 달라도 한참이나 다른 것이며 오히려 야곱의 이와 같은 행위는 결코 본받아서는 안 될 모습이기에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요, 십일조는 고대사회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널리 행해지던 보편적이고 일반화된 종교관습이고 조세제도였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과 야곱의 경우도 그 연장선에 있을 뿐, 율법 이전에도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었다, 라는 증거로서는 미약하다, 라는 것이다. 아무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분명 성경은 창세기에 아브라함과 야곱의 십일조 사건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음은 우리가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일이다.

율법에서 말하는 십일조란?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본질은 3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하에서 제시된 성경구절은 여러분들이 직접 찾아보자.


첫째 가장 잘 알고 있는 유형으로 “레위인과 제사장과 함께 나눠먹는 십일조“다.

레위인과 제사장의 십일조는 레위기 27:30-33에서 언급된 후, 민수기 18:21-32에서 좀 더 확장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땅과 거기 속한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며 그 모든 소산들은 여호와의 은혜’임을 고백하면서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주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스스로 취하시는 십일조라 하겠다.


레 27:30-33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32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민 18:21-32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내가 너희의 거제물을 타작 마당에서 받드는 곡물과 포도즙 틀에서 받드는 즙같이 여기리니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 너희의 받은 모든 예물 중에서 너희는 그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하게 한 부분을 취하여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 이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그 중에서 아름다운 것을 취하여 드리고 남은 것은 너희 레위인에게는 타작 마당의 소출과 포도즙 틀의 소출같이 되리니 31 너희와 너희 권속이 어디서든지 이것을 먹을 수 있음은 이는 회막에서 일한 너희의 보수임이니라 너희가 그 중 아름다운 것을 받들어 드린즉 이로 인하여 죄를 지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성물을 더럽히지 말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또한 이것은 구별되어 성전을 섬길 직분을 맡음으로 인하여, 땅 분배에서 제외된 레위인들을 위한 생계의 대책이기도 했다. 그리고 레위인들 역시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다시 떼어 제사장들에게 주어야 했다. 이 십일조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 주의 종들과 교회 직원 내지 봉사자들에 대한 사례비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함께 나누는 십일조이다.

즉, "축제에서 가족과 함께 나눠먹는 십일조"로서 신명기 12:5-19, 14:22-27로 언급되고 있다.


신 12:5-19 “5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6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7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8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지니라 9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10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1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 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12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13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든지 번제를 드리지 말고 14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 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15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복을 따라 각 성에서 네 마음에 즐기는 대로 생축을 잡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나니 곧 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무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음같이 먹으려니와 16 오직 그 피는 먹지 말고 물같이 땅에 쏟을 것이며 17 너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네 우양의 처음 낳은 것과 너의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너의 낙헌 예물과 네 손의 거제물은 너의 각 성에서 먹지 말고 18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19 너는 삼가서 네 땅에 거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


신 14:22-27 “2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27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이 십일조는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나와 온 가족이 함께 먹고 즐기라는 명령이 주어져 있다. 이는 구약 제사의 큰 주제인 "여호와 앞에서의 음식 나눔"에 내포되어 있는“거룩한 축제와 식사”라는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공동체가 함께 축제하고 또 함께 나눠먹는 정신은 신약의 애찬(love-feasts)과 성찬으로도 이어지고 있어서 언약공동체내에서 영속적 가치와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 십일조는 유월절 등 절기축제에 쓰이는 경비와 또 함께 음식 나눔을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일조를 제사장과 레위인만이 아니라 백성이 가족들과 함께 즐기며 나누어 먹음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십일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의 생계만을 위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편협 된 생각의 틀을 깨트려주는 의미도 있겠다. 현대적으로 본다면 교회 안에서 친교와 봉사, 그리고 교육을 하는데 필요한 경비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구제를 위한 십일조다.

“이웃과 나눠먹는 십일조”로서 신명기14:28-29, 26:12-15에 말하고 있다.


신 14:28-29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26:12-15 “12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13 그리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고하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14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 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15 원컨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하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지니라”


이 십일조는 매 3년마다 가난한 이웃과 나눔을 목적으로 하는 십일조인데 수혜대상은 레위인들과 객(이방인, 개종자들)과 가난한 과부들이었다. 나눔과 구제의 대상이었던 객과 고아와 과부 등 약자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용도로 실시되었던 십일조였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하나님의 복에 대한 선포가 오직 이 세 번째 십일조를 지키는 것에만 국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신 14:29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을 바치는 것이기에 당연히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구제용 십일조"를 잘 지킬 때에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9)는 축복의 약속이 선포되고 있다. 만약 십일조를 하시는 분이라면 복을 받기위해서는 전략적이든, 의도적이든 오히려 구제의 십일조를 하는 것이 복을 받는데 훨씬 더 성경적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상 구약의 율법에 명시된 십일조에 대한 3가지 유형을 살펴보았다.

아마 많은 분들이 십일조는 그저 교회 안에서 주의 종들이나 교회직원(봉사자등)에게 쓰이는 것으로만 알았지, 정작 십일조 안에는 교회 안에서 서로 나누어먹는 것과 구제의 십일조도 있다, 라는 것은 미처 모르신 분들이 많을 것다.


왜 우리는 지금껏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그렇게 해오면서도 정작 온 가족(믿음의 형제자매들도 포함)과 함께 나눠 먹거나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삼 년마다 한 번씩 따로 십일조를 드려야 했는가는 몰랐을까요? 정작 3가지 유형 중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을 받기 위한 십일조는 바로 구제의 십일조라는 사실이다! 정작 둘째와 셋째 십일조도 강조되어야 했고 실행 ?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교회에서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만이 편협 되게 강조되어 가르침 받았던 면도 다분한 것이다.


십일조는 성전유지를 위해서 쓰이지 않았다.

십일조와 관련하여 또 하나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에 십일조는 처음부터 성전유지를 위해 단 1불이라도 사용되지 않았다, 라는 것이다. 성전 유지를 위해서는 성전세(Temple tax)가 있어서 그것으로 충당되었고, 건축을 할 때는 주로 자원하는 특별 헌금이나 헌물이 따로 드려졌다. 성경에는 성막을 만들었던 기록과 성전을 두 차례 건축하는 모습과 또 몇 번 성전을 보수를 했던 기록이 있지만 그 목적을 위해 십일조가 사용되었다는 언급이나 정황증거는 전혀 없다.


십일조는 성전유지와는 무관하며 성전세가 그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성전세는 출애굽기 30:11-16에 나타나 있는데 성전을 위한 속전으로 20살 이상 된 성인 남자가 반 세겔씩 드리도록 법으로 제정되었으며 출애굽기 38:24-31에서 처음 거둬들인 성전세의 세목과 또 그 성전세가 성막 건축에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주님께서도 신약기록에 보시면 베드로에게 물고기 입에서 돈을 가져다가 성전세를 내도록 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십일조와 성전세의 또 다른 차이는 바로 십일조는 토지와 가축의 소산으로 드렸지만, 성전세는 돈으로 드렸다, 라는 사실이다!


역대하 24장에 보면 요아스 왕이 여호야다 제사장 생전에 성전보수를 위해 성전세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요시야 왕은 성전 보수를 하다 율법 책을 발견하고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는데 그때에도 성전세로 거둔 은으로 성전을 보수하였다(왕하 22:4).


느헤미야의 시대에도 십일조의 회복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성전을 위해서는 십일조와는 다른 별도의 성전세를 거뒀음(느10:32)을 알 수 있는데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대에는 그 세를 감면하여 1/2세겔에서 1/3세겔로 성전세를 내도록 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십일조와 성전 유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십일조를 주장하시는 분들 중에는 성전유지를 위해 필요하니 십일조를 내야 한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십일조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있으나 여기까지만 하겠다. 대략 이정도 이야기만으로도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 고찰과 십일조 반대론자들의 주장의 요지가 무엇인지 간파하셨다.


지금부터는 너무나도 중요한 이야기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거나 구원받았다 해도 부끄러운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먼저는 "십일조는 하나님의 계명이다(1)"의 서두를 보시면, 율법과 계명의 간단한 차이를 설명 드렸다. 개념이 정립이 안 되신 분들 다시 한 번 살짝 들여다보시고 오시기 바란다


율법은 크게 "도덕법"과 "의식법"과 "재판법"으로 나뉘어진다. 의식법과 재판법은 주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으로 완전히 폐하여졌다. 이 두개의 법은 율법에서나 유효했던 것으로서 오늘날에는 폐하여졌고 지킬 의무가 전혀 없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돼지고기 먹고 안 먹고는 자유이다 주일성수 안한다고 돌로 쳐 죽임 받지 않는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은 의식법이요, 안식일 안 지키면 돌로 쳐 죽이라는 것은 재판법에 해당되기에 오늘날 그러하게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법"은 다릅니다. 십계명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유효하다. 그 이유는 십계명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도덕법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윤리요, 도덕이기 때문이다. 이 윤리와 도덕은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가령, 율법에서 말하는 간음하지 말라는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면 오늘날도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법에 해당되는 계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와 첫 열매를 "의식법"으로 생각하여 신약시대에는 폐지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십일조와 첫 열매는 "의식법" 아니라 "도덕법"이라는 것이다. 이에 성경적으로 증명해 보겠다. 만약 십일조와 첫 열매가 "의식법"이 아닌 "도덕법"이라는 것이 성경적으로 증명이 되면,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요, 하나님의 계명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지켜져야 할 하나님의 계명이 되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죄를 범하는 것이요, 이에 대한 심판은 반듯이 있다, 라는 것이다. 잠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자.


요일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우리 주위에는 주님 영접하여 믿는다는 고백으로 구원받는 줄 알고 아직도 착각하시는 분들이 많다. 믿음다음 그 믿음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 행함이 나와야 한다. 그 행함은 바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요일 2: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주님을 믿고 안다, 하면서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라 하였고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저 입술로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하였다. 이 외에도 성경은 누누이 계명을 지켜야 함을 강조하다.


그런데, 율법은 내 자신이 믿음이 적든 크든 상관없이 반드시 지켜야 했다. 그것은 법으로 제도화 되었기에 내 믿음이나 형편에 상관없이 법대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지키지 않으면 그에 대한 징계가 옵니다. 즉시 돌로 맞아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계명은 그렇지 않다. 계명은 내 믿음의 분량 안에서 자발적으로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계명의 큰 차이다. 그렇기에 신약에서도 보시면 헌금이나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해서 율법처럼 의식화, 재판화하여 기록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믿음과 마음으로 행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1) 영의 세계에서는 십일조를 계속 받고 있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의 십일조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이 반대론자의 주장대로 단지 사회적인 고대풍습이었고 일회성으로 끝난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십일조와 멜기세덱의 이야기가 히브리서에 재등장한다. 이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무언가를 전하고 싶었다.


히 7: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여러분들 이 구절을 눈 똑바로 뜨고 보셔야 한다! 영적인 심오한 뜻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드리는 십일조를 과연 하늘에서 받는지 안 받는지 명백히 제시되어 있는 구절이다. 성령시대에도 십일조를 드렸다. 보시면 현재형으로서 "또 ... 십분의 일을 받으나"라고 하였다. 이에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는 받았다(받았느니라)라고 하셨다. 즉, 우리가 이 땅에서 십분의 일을 드리면 하늘의 주님께서는 받으신다, 라는 것이다.


또한 구절 더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하셨다. 이 구절을 보시면 주일에 각 사람에게 헌금을 하도록 권유하는데, 단순한 감사헌금, 연보헌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도바울은 헌금에 대해서는 인색한 마음이 아니요, 억지의 마음이 아니요 자신의 믿음대로 즐겨내라고 하셨다. 그런데 위 구절에 보시면 각 사람마다 이(利)를 얻은 대로 그에 대한 헌금을 하도록 하셨다.


이것은 지금껏 사도바울이 성도들에게 말한 단순한 자발적인 헌금개념이 아니다. 각 사람마다 이를 얻은 대로 그에 대하여 계수하여 드리도록 하게 하신 것이다. 즉,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저마다의 이를 얻는 정도와 재산정도가 달랐을 것이다. 특히나 아직 여린 신앙을 가진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이야기 하는 것은 자칫 교회안의 또 다른 분란과 이간이 되었을 것이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성도들에게는 십일조 개념이 무척이나 부담되고 낯설었을 것이다.


이에 사도바울은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십일조, 그리고 위와 같은 이를 얻은 대로 정확히 계수하여 헌금을 드리는 것을 말하였던 것이다. 이 헌금이 바로 십일조다!

그럼 십일조가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면 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이렇게 빙빙 둘러서 이야기를 했을까?


그것은 바로 먼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하여 무조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여린 신앙의 소유자들에게는 아직 더 말씀을 먹어야 하고 하나님의 체험을 통해 믿음성장이 필요한 것인데, 사도바울의 믿음을 기준으로 해서 십일조(헌금) 이야기를 한다면 우수수 성도들이 실족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2) 율법이전에도 드려졌던 첫 예물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이제 증명이 되었다. 그럼 야곱은 과연 서원만 하고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을까?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 라는 기록이 없으니 안 드렸을까? 아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으며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것을 성경이 말하는 바, 야곱의 믿음으로는 능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렸다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담 이후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도 첫 열매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4장 3~4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하나님께 드리는 첫 열매, 십일조, 헌물은 율법에서 말하는 의식법이 아니라, 바로 도덕법이기에 율법이전에도 드려졌던 것이요, 오늘날에도 드려져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3) 예수님도 십일조를 드렸다

십일조 반대론자들은 예수님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예수님도 드리지 않은 십일조를 우리가 왜 드려야 하냐고 반문한다. 신약에 십일조 드렸다, 라는 기록이 없으니 아주 자신만만하게 목에 핏대를 세우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은 십일조를 안 드렸을까?

아니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드렸으며 그 구절도 성경에 있다.


요일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죄없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자 나타나셨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요, 마귀의 종이라고 하셨다.

요한일서 3: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그렇기에 죄를 가진 자는 결코 남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영계의 공의다. 그러나 주님은 요일 3:5절에서 보시듯 죄가 없는 분이시다. 여기서 죄가 없다, 라는 것은 원죄도 없으시고 어떠한 자 범죄도 없다, 라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도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을 따라 율법을 지켜 행해오셨고 성경 곳곳에 보시면 십자가 사역을 이루시기 전까지는 율법의 절례에 따라 예루살렘도 오고가고 하셨던 것이다.


즉, 주님께서 십자가 사역을 이루시기 전까지의 그 시대는 여전히 율법을 행해야 하는 시대였다. 만약 주님이 구세주라는 이유로 율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정죄된다. 그렇기에 주님도 율법을 준수하셨다. 그런데 십일조는 어찌되었든 율법에 명시된 조항이다. 십일조 반대론자들의 말대로 주님은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라고 한다면, 당시 율법시대에서 주님은 율법을 어긴 자요, 죄인으로 정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가 없다, 라는 구절과 상충이 되는 것이다. 고로 주님은 십일조를 드렸다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그렇지요? 직접적인 기록은 없어도 명백한 것이다.


십일조는 율법에 명시된 조항이지만, 율법이전에도 하나님께 드렸던 내용이 나올 뿐더러 신약에서도 멜기세덱과 더불어 무려 5장~7장까지의 내용으로 넌지시 기록이 되어 있다. 십일조 관련 구절들을 보시면 땅의 모든 것, 그리고 그 소산들은 다 주님의 것인즉 너희들은 그것을 인정하여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신 것을 보게 된다. 그렇기에 십일조는 영적인 의미로서 하나님께 물적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말라기에서도 제사장들에게 십일조를 모두 들이지 않는 것에 도적이라 하셨고 저주가 임한다 하셨듯이, 하물며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나. 그러니 십일조는 도덕법으로서 오늘날 우리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이기에, 내 믿음이 안 되는 고로 드리지 않는다하여 당장 징계가 오고 저주가 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만큼 믿음이 있다하는 자녀들이 마땅한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날에 이르러서는 주여~ 주여~ 내가 주를 아나이다 하여도 주님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 하시는 엄중한 저주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거나 또는 받는다 해도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는 것들 명심하여야 한다.


Ⅴ. The 5 Offerings in the Old Testament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제단에서 친히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셔서 사람의 죄를 대속하셨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계시들은 이 일의 예표들로 완전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형은 예배이며, 이 예배의 원형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5대 제사이다.

레위기 1-5장에 기록된 구약의 제사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이를 일컬어 소위 5대 제사라고 한다. 그러나 레위기 7장 27절에 의하면 제사들은 여섯 가지인데, 즉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제와 화목제의 규레라”고 했다. 물론 위임제사는 단회적이기 때문에 5대 제사와 구별이 된다.

여기서는 다섯 가지 제사의 특징과 그 교훈들을 고찰함으로써, 예배의 신학적 원리와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기초하여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과 예배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찾고, 오늘에의 적용을 시도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구약은 십자가를 통하여 읽을 때에 성경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다.

① 제사 제도는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신 뜻에 따라 발원된 것이다(창4;1-4, 히11;4).

② 제사 제도의 하나님이 기뻐하신 뜻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제정되었다.

③ 제사 제도의 언약은 상징과 예표로 영적 사실들을 대신하여 나타난 이름이다.

④ 제사 제도의 뜻이 신약의 실체로 들어 났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죄를 대신한 모든 제사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것들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20:26)을 나타낸 것이다.



1 장 번제(The Burnt Offering, 레 1:1-17)

레위기에서 번제를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은 이 제사가 가장 흔한 제사이며, 아침 저녁으로 드려지고, 성일에는 보다 자주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이다.1)번제는 다섯 종류의 제사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이요, 중심적인 제사이다.

가장 기본적인 제사가 번제이다.

“번제”란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올라”인데 ‘단상(제단)에 올라온 물건’ “올라간다”의 뜻으로, 온전히 헌신함을 의미하기에 적합한 명칭이다. “번”이란 ‘굽는다’는 뜻이다. 단 위에서 불사르는 것은 멸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제물을 태워서 더욱 고상하게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이와 같은 동사의 개념은 번제가 헌신(Consecra-tion)을 비유함을 보여준다. 이 제사는 전적인 헌신을 비유하기 때문에 “온전한” 제사를 뜻하는 명칭으로도 표현된다.

번제는 완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제물을 전부 태우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번제는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드리는 자유의지적인 제사이다. 그런데 그것은 동일한 조직적인 방법으로 드렸다. 첫째로, 신하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경우처럼 일반적인 경우, 그리고 자기 헌신과 감사의 관념을 표현한다. 끝으로는 화해를 나타낸다.


1). 번제의 의미

(1).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는 제사이다(레1:9, 13, 17).

(2). 예물을 드리는 자의 열납을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레1;3)

(3). 한 생명이 드려지는 제사이다(레1;5).

(4). 온전히 불태워 드리는 제사이다(레1:9).


2). 번제물

(1). 하나님께서 선정하신 것이어야 한다(레1:1-2).

* 소는 숱한 어려움과 고난을 참는 가축이다.

* 양은 온유하고 순종하는 짐승이다.

* 비둘기는 순결하고 겸손한 짐승이다.

(2). 모든 사람들이 구별할 수 있는 생축이어야 한다.

(3). 제물은 흠이 없는 것으로 드려야 한다.

(4). 제물은 수컷으로 드려졌다(레1:3, 10).

(5). 제물은 피 먹는 짐승은 드리지 못하였다(호랑이, 개, 기타).

(6). 제물은 깨끗한 짐승 중에도 사람이 먹는 짐승이라야 한다.


3). 번제의 절차.

(1). 헌납자의 손에 의하여 드려진다(레1:3-5).

* 짐승을 끌고 와서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한다.

* 속죄할 목적으로 끌고 와야 한다.

* 하나님이 작정하신 처소인 회막문 앞에 끌고 와야 한다.

* 주인이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였다(레1:4).

* 짐승을 잡아 죽였다(레1:5).

(2). 제사장의 손에 의하여 드려진다.

* 그 제물의 피가 뿌림이 되었다(레1:5).

* 그 희생 제물을 불태웠다(레1:8-9).

* 그 재는 진밖 정결한 곳으로 가져갔다(레6:11).


4). 번제의 목적.

(1). 영원한 속죄에 있다.

(2). 영원한 화목이다.

(3). 영원한 헌신이다.


5). 번제의 종류.

(1). 집단적 번제- 매일 조석(상번제)

(2). 개인의 번제- 절기, 평소(임직식, 산후결려, 문둥병자가 정결케된 후, 나실인의 서원 이 끝난 후).


6). 번제가 주는 영적 교훈.

(1). 기쁨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2). 최상의 것을 드리는 제사이다.

(3).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제사이다.

(4). 하나님은 힘에 맞는 헌신을 요구하시고, 같은 효과로 받으신다.


일반 이스라엘 자녀들과는 별도로 제사장은 아침 저녁으로 늘 번제를 드려야 했다. 그리고 번제단에는 언제나 불을 보존해야 되었다.상번제의 제물은 오직 흠 없는 수양이어야 하며(민 28:3,4), 또 일년된 어린 것이여야 한다(출 29:38). 그 이유는 양은 소나 염소나 비둘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양은 온유, 겸손뿐만 아니라 순결과 인내와 순종을 나타내는 동물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제물로서는 가장 완전히 나타내는 것이었다.

속건제가 특수한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라면, 번제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죄의 용서를 뜻한다.더 나아가서 번제는 죄의 용서 이상, 복종이나 감사의 행동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전적인 헌신을 뜻한다.Keil은 번제가 “여호와께 완전한 복종이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길을 걷겠다”는 약속의 제사라 하며, “예물에 의해 존경을 표시하는 것” 이라 한다.(常燔祭, 민 28:1-8, 출 29:38-42)

2 장 소제(The Cereal Offering, 레 2:1-16 6:14-23)

상번제 후에는 항상 소제를 드린다(민 28:3-5). 번제와 소제가 전선지서(the former prophets)에서 번번히 같이 언급된다. 그러므로 레위기에서 소제가 번제 후 곧 설명되어 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소제”란 히브리어로 החꘁꗬ인데, “선물”이란 뜻이다.

이 말은 비종교적인 측면에서 소군주가 대군주에서 충성심의 표시로 드리는 조공을 가리킨다.15)이런 세속적인 의미의 말이 종교적인 의미로 바뀌어 사용된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 듯 하다.소제도 믿음의 사람이 그의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일종의 조공이이기 때문이다.

소제를 히브리어로 민카인데 이 뜻은 “선물, 증물, 헌물”등으로 일명 감사제 혹은 수은제이다.

또한 소제란 육신의 소산물을 하나님 앞에 헌납하는 제사이다. 즉, 짐승의 희생을 수반하지 않고 주로 토지의 소산으로 구성되어 노동의 열매를 뜻하는 유일의 제사이다(레 2:1-16, 16:14-23).

여호와께서 베푸신 모든 자연 은혜에 대하여 그 권능의 은혜를 기념하여 함께 응식하는 제이다. 옛날에는 동물 헌납이나 식물 헌납은 막론하고 모든 감사의 예물은 민카(הꗏꘁꗬ)였다(창32:21-22, 43:11. 15).

그러던 것이 모세의 율법 이후 피 흘리지 않는 제사(식물 제사)에만 쓰여졌는데 소제를 표시하는 말이 되었다.


소제는 “피 없는 제사, 부속된 제사”라고 한다.

그 이유는 소제는 짐승을 잡지 않으며 또 짐승의 피를 뿌리지 않고 다른 피 제사를 드린 후에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32장 13절에서 야곱이 형 에서에게 드린 예물(선물)에 대하여 이 말을 민카 가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이 예물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드리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제사장들이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다.


1. 소제의 의미.

1). 하나님의 받은바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2).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상 생활에 적당하게 공급하여 주신 은혜와 축복인 의식주에 대 한 감사와 찬송과 경배라 할 수 있다.

3). 주신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의 기뻐하시는 일에 쓰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봉사할 것을 의미한다.

4). 민카는 “선물, 증물, 헌물”등으로 피없는 제물에 사용하게 되었다. 피 없는 곡물 제사이다.

5). 소제는 제물을 받으시고 드리는 자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사도행전 10장 4 절에 고넬료의 기도, 구제 자체가 예물과 같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것, 즉 제물, 헌금, 충성, 봉사, 구제, 선행 등이다.


2. 번제와 소제와의 구별.

1). 번제는 안수함으로 자기 대신 내어 주는 제사(동물)이며, 소제는 감사하는 제사이다.

2). 번제는 피 흘림의 제물(동물)이요, 소제는 피없는 제물(고운가루 예물)이다.

3). 번제는 속죄의 뜻이 있으나 소제는 그렇지 않다.

4). 번제는 모두 불 태웠지만 소제는 조금만 불 태웠다.

5). 번제는 주인이 직접 가져 왔지만 소제는 제사장에게로 가져가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 였다(레2:8)


3. 소제물.

1). 고운 가루(가는 밀가루)로 드렸다(레2:1).

2). 화덕에 구운 떡으로 드렸다(레2:4).

3). 번철에 부친 고운 가루로 드렸다(레 2:5).

4). 솥에 삶은 고운 가루로 드렸다(레2:7).

5). 첫 이삭을 쌓아 볶아 찧은 것으로(바싹 마른 첫열매) 드렸다(레2:14).

6). 처음 익은 것(과실)은 요제로 드리고 제사장이 먹는다.


4. 소제의 절차.

1). 고운 가루로 되어야 한다(레2:1-3).

2). 그 위에 기름을 부어야 한다.

3). 그 위에 유향을 두어야 한다.

4). 소제물에는 소금을 쳐야 한다(레2;13).

5). 소제물에는 누룩과 꿀을 넣지 말아야 한다.(레2;11).

6). 번철에 부쳐 드려야 한다(레2:5-6).

7). 솥에 삶아 드려야 한다(레2:7).

8). 소제물에는 소금을 쳐야 한다(레2;13).

9). 첫 이삭으로 불에 볶고 찧어서 소제물을 드린다(레2:14).


5. 소제의 목적.

1).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레1:15).

2). 제사장의 몫이었다(레6:16).

3). 소제는 예언적 의의가 있다.

(1) 소제의 요소 중에는 복음적 상징들이 풍부하다.

(2) 감람유의 기름은 성령의 상징들이다(고후7:1).

(3) 유향은 기도의 상징으로 성도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나타낸다(계5:8, 8:4).

4). 소금을 섞어 부침으로 복음의 유독성(유일성)과 화목성과 그 진의를 나타낸다

(민18:19, 대하13;5, 슥4:1).

5) 항상 드려야 할 소제는 고운가루로 만든 떡을 기름과 향과 소금이 합심으로 복음앞 에 일어나는 신자들의 순백한 감사를 나타낸다.

6) 이 소제를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온갖 성실하고 의로운 노력의 산물임을 뜻 한다.

소제는 소출의 ‘첫 이삭’ (레 2:14)이나 고운 가루로 만든 무교병(레 2:1, 4)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이다. 떡과 누룩을 사용할 수 없으며, 항상 개인이 드리는 소제물은 고운 가루이며 그 전체를 다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한 움큼만을 취하여 소제로 드리고(레 6:15), 또 구운 것이나 삶은 것인 경우도 그 일부만을 드리고(레 7:9), 나머지는 제사장들에게 배분되어 회막에서의 약식으로 사용되었다(레 6:16). 이 소제는 번제와 같이 드려졌는데 그 때는 반드시 포도주의 전제를 같이 드려야 했다.

소제에 누룩과 떡은 사용하지 말고 기름과 유향과 소금을 쳐서 화제로 드리라고 했는데, 이는 누룩과 떡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나 기름은 성령을, 향은 기도를, 소금은 하나님께 대한 신자의 순결성을 상징하는 깊은 뜻이 있다.

소제는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다.20)소제를 번제 후에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번제를 통해 죄를 용서해 줄 때, 그 제사 드리는 자는 그 답례로 소제를 통해 그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 또한 소산물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율법에 복종하고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3 장 화목제(The Peace Offering,레3; 1-17)


번제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화목제는 하나님과 깊은 영교의 진리를 나타내는데 하나님과의 화평을 말하고 교통을 말하는 것이다.

“화목제”란 말의 히브리어로는 화평의 제사란 의미이다. 이 말은 “감사제(thanks-offering) 혹은 ”구원제(saving-offering)"라 불리운다.

히브리어로 쉘렘의 뜻은 완전한 축복과 능력을 뜻하는 말로써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구원, 혹은 완전함을 얻는 것을 말한다. 또한 “평안제” 또는 “화평의 제사”란 뜻이다.

이것은 감사, 서원 등을 위한 것으로(시107:22). 화목제의 목적은 변함없는 구원을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다. 떄떄로 구원을 소망하는 자가 이 화목제를 드린다. 그러므로 탄원의 제사(supplicatory offering)와 감사제를 포함하여 불운을 당했을 때나, 혹은 하나님의 도움을 기원하는 날에 드려진다(삼상 13:9, 삼하 4:25 참조)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지만 모든 다른 제사처럼 피를 제단에 뿌리는 속죄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화목제는 앞서 언급한 번제나 소제와는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화목제는 감사드리는 자가 필요할 때 드리는 선택적인 제사이다.

둘째, 제물 일부를 먹을 수 있다. 화목제는 제물 일부를 불사른 후 일부를 제사장이 먹고, 일부는 제사 드리는 자에게 먹도록 드려 보내진다. 그러므로 화목제는 하나의 축제 형식의 제사였다. 화목제는 피를 뿌려 드리는 제사이며, 번제나 소제와 같이 불태워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를 나타내는 제사이다(레 3:5, 16 참조, 레 1:9, 2:2 등)

이 제사는 소, 양, 염소의 기름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과 드리는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이러한 화목제는 아브라함 이전부터 있었다.

야곱과 라반이 이 제사를 언약의 표로 바쳤다(창31:54).

그 후에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이 제물로 대접하였다(출19:22).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 제사를 드리면서 잔치한 일이 있다(출32:6).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1. 화목제의 의미.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 제사이다.

1) 서원 제사 : 서원 예물.

2) 자원 제사 :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낙헌제).

3) 감사 제사 ; 구원과 축복 감사.

화목제물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함께 먹으면 서 즐거워했다(신12;6, 7, 11-12, 18).

그러므로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 인간과 인간과의 화평을 상징하는 제사이다.


2. 화목제물.

1). 짐승 중에 소가 있다(레3:1).

2). 짐승 중에 양이 있다(레3:6).

3). 짐승 중에 염소가 있다(레3:12).

4). 짐승들은 정결한 것이어야 한다(레3;1, 6).

5). 짐승들의 성의 구별이 없었다.


3. 화목 제물의 절차.


1). 그 제물을 헌제자인 주인이 끌고 와서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

2). 그 예물을 헌제자가 머리에 안수하여야 한다.

3). 그 예물을 회막문에서 잡아야 한다.

4). 그 예물의 피를 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5). 그 예물을 헌제자는 가죽을 벗기고, 콩팥과 모든 기름으로 제사장에게 준다

6). 그 예물의 기름을 여호와께 불살라 바쳐야 한다(레3;3-5, 9-10, 14-16).

7). 그 예물의 헌제자는 짐승의 내장과 더러운 것을 회막 밖에 버리고 가죽과 앞, 뒷다리 를 제사장에게 드린다.

8). 그 예물을 제사장은 가슴을 흔들어 온제로, 우편 뒷다리는 거제로 드린다.

9). 그 예물을 제사장과 가족들은 제물을 먹는 순서가 있다

(레3:3-5, 9-11, 14- 15 , 신12:6-7, 17-18).

10). 그 예물을 서로 나누어 먹었다.

(1) 고기는 신선할 때 먹었다(레7:15-17).

(2) 고기는 정결하게 먹었다(레7:1-21).


4. 화목제의 요의.


화목하는 잔치이다. 그러므로 온 권속이 즐거워하며 기뻐한다.

그러므로 제물을 먹는 순서가 있다. 특별히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화목제의 목적이다.


5. 화목제의 종류.

1). 감사함으로 드리는 감사제(레7:15).

2). 서원함으로 드리는 서원제(레7:16).

3). 자원함으로 드리는 낙헌제(레7:15-16)이다.

6. 화목제가 주는 영적 교훈.

1). 구약의 화목제와 같이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과 더불어 성도 상호간 의 즐거운 시간을 상징한다.

2). 그렇다면 성도 상호간의 깊은 사랑과 화평이 요구된다.

화목제의 제물로 쓰였던 동물은 번제와 같이 흠이 없는 소, 양, 염소 등이다. 번제와는 달리 수컷과 암컷이 다 사용되었으나 새는 드려지지 않았다.

레위기 3장 2절에 보면 제사 드리는 자가 제물을 여호와께 가져와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한 후 잡아서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라고 했다. 여기에 특히 피를 뿌린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레 3:2, 18, 13). 피를 뿌리는 제물 소와 양과 염소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나타내는 그림자이다.23)이 제물의 피와 하나님과의 화평은 밀착되어 있다.

화목제를 잡아 피를 뿌리기 전에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잡을 것이며”(레 3:2)라고 헸는데, 여기서 안수는 곧 기도를 의미한다. 특별히 제사장이 안수할 때는 그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고백하면서 안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피뿌림이 있기 전에 먼저 회개함이 있어야 했다. 모든 죄를 회개할 때 그 피를 뿌려 사하고 그 후에 하나님과 깊은 은혜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화목제는 절기와 또는 집단적인 경사가 있을 때(레 23:19, 삼상 11:15, 삼하 6:17), 그리고 화목제물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 바로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즐거워하며, ‘자녀와 노비와 레위인들과 함께’ 먹으며, 기쁘게 드려졌다(신 12:6, 7, 11, 12, 18). 이것은 화목제가 하나님과의 화평은 물론 구원받은 성도들 사이의 화목을 위한 교제임을 가리킨다.

화목제를 드릴 때에는 세 가지 예물을 드리는 순서가 있다. 즉, ①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일(감사제), ②서원의 예물을 드리는 일(서원제), ③자원의 예물을 드리는 일(자원제)이다(레 7:15, 16). 이것들은 문자 그대로 감사와 즐거움과 서원을 제물로 표현하는 제사이다. 오늘의 예배에도 이러한 정신을 언제나 반영해야 할 것이다.

4 장 속죄제(The Sin Offering, 레 4:1-5:13)


속죄제는 네 번째 소개되었지만 제사의 순서는 그 성격상 제일 우선적이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구별은 매우 모호하여 분명치 않은 데가 있지만 속죄제는 하나님께 대한 죄, 특별히 그의 계명에 분명히 나타난 것(레 4:1, 13, 22, 27)에, 또는 성물(삼상 6:3)에 대하여 범한 죄를 사함받기 위함이었다.

1. 어원적 용어

속죄제는 히브리어로 תאꖯꖎ인데 죄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속죄제의 의미는 하나님이 주신 명령과 법규의 과녘을 벗어난 죄에서의 청결과 자유를 얻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2. 제사의 성격

속죄제는 부지중에 혹은 실수로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레 4:13, 22, 27). 그러므로 이 제사는 앞에 설명했던 번제나 소제나 화목제와는 달리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드려야 할 제사이다.속죄제는 속건제와는 달리 범죄한 일을 배상할 수 없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린 제사이다(레 5:1-13).

속죄제는 히브리어 하타트인데 하타에 유래된 말로서 “과녁을 못 맞추다” “빗나가다” “과오”란 뜻이다.

옛 죄는 모든 사함을 받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해 가는 도중에 허물을 사함받기 위하여 드려지는 제사에 해당된다(레4:20, 26, 31, 35).

말하자면 그릇 범죄함을 위한 제사이다(레4;2, 13, 22, 27).

다른 말로 부지중에 범죄한 죄를 위한 제사이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하였다.

모든 죄는 그 경종을 막론하고 모두 피로 씻음을 받아야 한다.


3. 속죄제의 의미.

1). 이 제사는 죄를 속하고 사함을 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2). 하나님의 백성이 범죄했을 때 죄사함 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4. 속죄제의 종류.


1).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레4:1-12).

(1) 제물

(2) 제물을 드리는 절차.

* 수송아지를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끌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