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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skc Family Conference KJJ"17 인사말

인 사 말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온전히 주께 맡긴 내 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2017년 미국 Florida 주 Lakeland Southeastern University에서 지난 6월26일부터 29일까지 열렸던 National Conference에 참가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자 동시에 예배를 사랑하는 자, 곧 Nyskcian들이 모여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렸던 훈련을 마치고 다시 한 달 만에 이곳 한국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전주에서 Nyskc Family Conference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신 성삼위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리며 수고하신 NWM 전주본부 임원목사님들의 힘쓰심과 수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본부장 박재신 목사님과 부본부장 임기수 목사님의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25년 전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Nyskc Movement는 22년째 Conference를 열어 오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서울과 대전, 광주에 이어 네 번째로 이 곳 전주에서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세계적으로 교회성장을 위한 수많은 프로그램의 개발과 함께 부흥을 위한 Movement들이 일어났지만 신앙의 본질에 관한 운동에 있어서는 500년 전 일어난 종교개혁운동보다 더 성경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으며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강조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이 교회의 법칙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것을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권위들은 반드시 성경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의지하고 그 약속들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성경에 복종하기 위해 분투하며, 우리가 아니라 성경이 우리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의 불오성(infallibility)과 무오성(inerrancy)을 말하면서 이는 성경의 모든 문장과 단어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이기 때문으로 이를 “영혼의 양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신적 계시말씀이며, 그 외의 다른 모든 권위들은 그 권위 아래 복종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개혁에 앞장섰던 쯔빙글리, 칼빈과 같은 신학자들은 교회로 하여금 성경과 성령의 조화를 강조했는데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성경의 참된 해석자가 성령”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칼빈이 말한 것처럼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성경”이라고 말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진리와 능력의 말씀으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개혁과 회복을 위한 본질을 성경에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의 전체 사역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SOLA GRATIA)에 기인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주도하시고 완성시키셨음을 강조합니다.

“은혜란 무가치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호의다”라는 말처럼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단순히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절망적인 죄인들이 아니라, 나쁜 마음과 행실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오직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인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성에 따라 그들에게 전적으로 과분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4-5)라고 선언하듯이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을 구원하고 살리고 자유하게 하시며 회복시키시고, 비록 그들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사랑스럽지 않고 오히려 혐오스러울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심으로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심어 주시며, 하나님의 은혜에 신실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주권적이고도 하늘과 땅의 가장 높으신 하나님, 구원의 삼위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징계 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이 변하여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영원토록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도록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적용하십니다.

이것은 태초 곧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에 아무런 공로도 없는 그들을 구원하기로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부르고, 중생시키며, 의롭다하고, 거룩케 하며, 또한 우리를 보호합니다.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 우리의 상한 마음을 고치기 위해, 고난과 영적 전투의 때에 강해지기 위해 은혜가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유롭고도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구원적 관계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 회심과 거룩과 봉사와 고난으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권적 은혜는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은혜를 향하는” 또는 “은혜 위에 은혜를 조각하는 것”을 의미하고 파도가 해안에 연이어 몰려오는 것처럼 은혜 위에 은혜가 계속해서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원리이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한 신적인 공급입니다. 그것은 택함과 부르심과 거듭남을 통하여 표현되는 하나님의 대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고난 받으며 심지어 죽을 수 있도록 만들고 그 안에서 영원히 보존되게 하기 위하여 무조건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임을 강조합니다. 신앙에 있어 은혜는 회복의 표현이며, 은혜는 신앙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SOLA FIDE)을 주장한 루터는 타락한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다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라는 말씀을 통해 “믿음을 통해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의” 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칭의(거듭남)는 죄 사함과 “의”의 전가로 구성되며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서게 만들어 주는 선천적인 의가 없으므로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은혜롭게 전가되는 “낯선 의”(그리스도와 그분의 희생 제사적인 보혈)를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믿음과 은혜는 경쟁 상대가 아닙니다. 은혜는 오직 믿음 안에서만 존중받기 때문에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오직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확증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성경과 은혜와 믿음이 다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한다고 확증합니다. “엄밀히 말해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라고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는 말합니다. 또한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이자 경계선”이라며 비록 하나님의 구원사역 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기표현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을 연합시킬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즉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으로만 만족될 수 있다.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롭고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라고 했습니다.

쯔빙글리는 “그리스도는 그의 몸 된 모든 신자들의 머리이시다. 그분이 없는 몸은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누구든지 다른 잘못된 길을 추구하거나 제시하는 사람은 영혼의 살인자이며 탈취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해서 선지자, 제사장, 만왕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로서의 예수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의도하고 목적하셨던 것을 계시하실 수 있는 즉 “만세 전부터” 구약의 “선지자들의 글”의 참 의미를 가르치고 나타내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며 우리는 오직 그분의 교훈과 가르침에 주의할 때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보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개혁주의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중보를 강조합니다.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며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존전에 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며,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이 되시어 그의 몸을 드린 단번의 제사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또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계속해서 하나님께 중보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제사장이십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분의 성령을 방편으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영적이고도 영원한 영역에서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의하여 그분을 믿으라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순종”을 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백성들이며 그분의 왕국에 합당한 시민들입니다. “영원하신 왕이 되어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또 우리를 변호하고 보존하시어 그 구속을 확보”하실 것이며 우리가 온갖 괴로움을 다 견디며 이 땅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싸움이 끝나 개선할 때까지 우리 왕께서는 결코 우리를 궁핍한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으로 우리를 무장시키시고, 그분의 아름다움과 웅대함으로 우리를 꾸미시며, 그분의 부귀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는 것이다”라고 칼빈은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1-23)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DEO GLORIA)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광이라는 히브리어는 “카보드(kabod)”로 “무겁다”(가치나 값을 지닌다)라는 어근을 지닌 단어의 파생어이며 헬라어는 “독사(doxa)”로 “견해”(어떤 대상에 대한 가치나 값을 매기는 우리의 생각)를 뜻합니다. 이로 볼 때 영광이란 히브리 사상으로 “하나님 안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그분의 본질적인 가치나 값”인데 반해 헬라 사상으로는 “그들이 보는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하심에 있는 가치나 값에 대한 지성적이고도 도덕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피조물들에게 자신의 도덕적 탁월하심과 아름다움을 나타내십니다. 또한 그들에게 복을 주심으로써 찬미를 불러일으키심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의 도덕적 탁월성은 그분의 창조, 섭리, 구속의 위대함과 가치를 통해 빛납니다. 이 탁월함을 경험한 예배자는 오직 찬미와 감사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라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회복된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배가 회복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선을 위해 합력하여 역사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1문에서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에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또 인간의 제일 되는 기쁨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삶과 말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때 하나님이 조금 더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은 그분 존재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미할 때 최고의 행복을 느낍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했던 순간은 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신경 썼던 순간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의 교제에 이끌리어 그분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목도하던 순간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충만해질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자신이 텅 비고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시다.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그분은 만물이 기동하며 살아가는 동인이 되시며 그 존재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방편이시며 그분은 자신의 모든 영광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마지막 목적이 되신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개혁운동은 잠자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부흥이 일어난 곳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칭의론”이 강도 높게 선포되었습니다.

그 이후 부흥운동은 미국 청교도와 경건주의 시대에 이르러 현대적인 의미로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고 청교도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었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인간의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확신했으며, 철저한 회개를 통한 죄 사함은 이들이 강조한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경건주의 운동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성경대로의 삶을 실천에 옮겼으며, 양로원과 고아원, 학교와 병원 등을 설립해 대 사회적 책임을 충실하게 감당함으로서 교회에 생명력을 더해주었습니다. 이처럼 경건주의에서 강조하는 경건과 청교도에서 강조하는 영적인 실천은 서로 맥을 같이했습니다.

그리고 17세기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난 부흥운동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좀 더 강력한 형태의 영적각성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시대에 일어난 가장 강력한 부흥운동 가운데 하나가 18세기 웨일즈 부흥운동과 1734∼1736년, 1740∼1742년 사이에 일어난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일 것입니다. 이 운동들은 이전의 크고 작은 부흥운동을 하나로 엮어 폭발한 성령의 강력한 역사였습니다.

웨일즈 부흥운동은 1735년 “능력의 세례”를 받은 하월 해리스와 다니엘 로랜드에 의해 일어나 여러 해 동안 계속 되었고, 거의 같은 시대 조나단 에드워즈, 길버트 테넨트, 조지 휘필드, 프릴링하이젠 등이 이끈 미국의 1차 대각성 운동은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강하게 일어나 근대 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1734년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부터 웨슬리부흥운동이 정리되는 1790년까지의 기간은 넓은 안목으로 볼 때 “부흥의 시대”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미국에서의 부흥운동은 19세기로 이어졌습니다. 1787년 미국 버지니아의 장로교 대학인 햄프던 시드니 대학과 워싱톤 앤드리 대학 등 조그만 두 개의 대학에서 영적 각성이 일어나 곧 동부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802년에는 예일대학 학생 3분의1이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고, 그 후 50년간 제2차 대각성운동으로 알려진 일련의 각성운동이 주기적으로 일어나 동부의 대학들과 교회들이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또한 근대 부흥운동의 선구자 찰스 피니가 등장하여 미국인의 부흥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준 것도 바로 이 때였습니다.

한 때 중단되는듯했던 영적각성운동이 1857년 미국에서 또 다시 놀랍게 발흥했습니다. 1857년 9월23일 제레마이어 람피에르가 뉴욕 풀턴가 북 화란개혁교회 3층에서 가진 정오기도회는 불과 4개월 만에 보스턴과 워싱턴, 시카고를 비롯하여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수많은 도시에서 매일 정오기도회가 열렸습니다. 그 결과 1857∼1859년 미국 전체 인구 3000만 명 중 200만 명이나 되는 이들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곧 영국으로 확산됐습니다. 1858∼1859년 로이드 존스가 참된 부흥이라고 말한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영적각성을 경험한 웨일즈는 1859년 험프리 존스와 데이비드 모건을 통해 또다시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1873∼1875년, 1881∼1884년 두 번의 강력한 영적 파장을 동반한 무디 부흥운동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깊은 잠에서 깨웠습니다. 그의 메시지를 통해 형식적인 신앙인들, 술주정꾼들, 회의론자들, 탕자들, 대학생들, 상인들, 부자와 가난한 자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웨슬리와 휘필드 이래 런던이 그렇게도 깊은 감화를 받은 때가 없었다.”고 간증했습니다.

또한 무디 성경학교와 학생자원운동을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세계 선교를 꿈꾸며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전 세계로 흩어졌으며 이 시대 은둔의 나라 조선에 도착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모페트, 게일을 비롯한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은 19세기 영적각성운동의 산물이었습니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이 휘필드 풍의 회개와 웨슬리의 열정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잠에서 깨우며 부흥운동에 불을 지폈던 것도 이 시대였습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 여러 곳에서 놀라운 영적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이반 로버츠로 대변되는 1903∼1904년의 웨일즈부흥운동, 그의 영향으로 발흥한 1905년 호주부흥운동, 인도 카시아에서 일어난 1905∼1906년의 인도부흥운동, 하디와 길선주에 의해 주도된 1903년부터 1907년의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 1906년 아주사 오순절부흥운동, 1908년 만주·중국부흥운동이 그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사도행전 이후 이 시기만큼 전 세계가 부흥을 경험한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감히 이 시대를 가리켜 “부흥의 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후반 빌리 그레이엄의 출현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복음주의 부흥의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0년대 대중 전도운동으로 특징되는 한국교회의 부흥 역시 빌리 그레이엄이 점화, 널리 확산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16세기 이후 21세기 가운데 인류를 바꿀만한 부흥운동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어가고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 Church Movement나 Para Church Movement 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운동들 중에는 그 목적이 오직 성장만을 위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적인 접근보다는 현상적인 것에 목표를 두고 있는 듯 교회성장이나 혹은 구원만 받으면 된다는 식의 운동들이 프로그램화 되어 진행되었으며 또한 감정을 앞세운 감성목회들이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본질을 잊어버린 채 현상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종교개혁은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하였고 신앙의 본질을 강조함으로서 신앙의 순수성을 되찾고 기도와 말씀, 성령과 말씀에서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충만, 말씀, 은혜 충만 가운데 교회 중심적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Nyskc Movement는 프로그램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본질로의 접근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 말씀대로 행할 뿐 그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진 신앙생활을 회복하자는 운동입니다.

우리들은 심었고,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라는 말씀처럼 성경은 곧 길이요 진리며 생명이라는 것을 그대로 따라가자고 주장합니다.

성경에 많고 많은 주제 가운데 Nyskc Movement 가 택한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께 예배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배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 곧 생명을 내어 주신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으로 나타나셨으며,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성령의 운행하심에 따라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하나님이 기뻐 찾으시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예배를 정의 해보면 “예배는 회복이다”, “예배는 기업의 회복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함의 표현이다”, “예배는 이웃을 사랑함의 자세이다”, “예배는 섬김이다”등등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구약에 보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볼 때 예배 없이는 하나님과의 교제나 성령의 교통이 있을 수가 없었으므로, 율법은 “하나님을 예배하라, 이웃을 예배하라” 하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신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며 이렇게 사랑하는 자를 기뻐하시며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이처럼 강조하신 것은 곧 예배는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기본이 흔들리면 다른 모든 자세가 흔들리게 됩니다. 성도의 기본은 예배에서 시작됩니다. 예배의 자세가 흔들리고 예배를 승리하지 못하면 신앙생활 전반의 자세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편의 주의적 발상, 자기중심적 사고는 예배의 기본 동작을 취하지 못하도록 죽이는 만행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성령의 교통을 이루는 성수주일의 신앙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복음이 들어갔던 나라들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신앙의 다른 관점에서 보면 형식적인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개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형식은 중요하지만 우리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경계하여야 할 뿐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께 예배드림이 온전한가를 항상 점검하며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요한복음 4장의 몇 구절들을 들 수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어떻게 예배한다는 뜻입니까. 우리는 실제로 이 말을 많이 쓰고는 있지만, 이 말씀의 의미를 알고 사용하고 있는지 하는 의문을 가져 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라는 말은 원어로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떼이아”입니다.

“엔”은 영어의 “in” 에 해당하는 전치사이고, “프뉴마티” 와 “알레떼이아”는 각각 “성령” 과 “진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출현빈도가 낮은 단어가 아니라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헬라어에서 “영”, “성령” 등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프뉴마”입니다.

단어 자체에 대한 상세한 뜻을 주해하지 않고 그냥 단순하게 말해도 이 단어는 “성령”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알레떼이아” 역시 자주 나오는 단어로서 성경에서 보편적으로 “진리”라고 할 때 “알레떼이아”를 씁니다.

다시 말해 “성령과 진리 안에서”가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할 때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진리 안에서”라는 의미이지, “진심으로”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을 번역이 틀렸다고 보기보다는 그만큼 하나님 앞에 진실 되고 성실하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를 사전적 의미로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진리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변치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말씀이요, 진리로 오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는 진리 곧 말씀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보다는 “진리와 진정”의 연관성으로 이해하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예컨대 “진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말은 사실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매우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라고 보여주신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면, 모델이 없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면 “신령한 예배”를 상상하는 사람들은 어떤 신비적 체험을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프뉴마 호 떼오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엔 프뉴마티). 헬라어 단어로 두 단어는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예배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에 두었습니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이 영이시니까 너희도 영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의미는 대단히 명확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은 “육체가 아니시다”, “인생이 아니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 안에서 놓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너희도 “영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말씀이며 육체적 방편들로는 예배드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내용은 신비적인 차원에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인간이 원하는, 인간이 좋아하는, 인간의 방편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와 달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신학자 칼빈 역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주해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예배야말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인 예배라기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육체가 원하는 것으로 가득 찬, 눈에 보이는 것을 만족케 하는 예배”라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로마 가톨릭은 말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나쁜 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1항에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대해 정확하게 정립해 두었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그 자신이 친히 제정하셨고, 그 자신의 계시된 뜻에 의해서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가견적(可見的)인 구상(具象)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탄의 지시에 따르거나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다른 방법을 따라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우리가 예배를 위해 “무언가를 고안해 내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오로지 “성경에 규정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 뿐”, “말씀 중심” 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Aiden Wilson Tozer 시리즈 제2권]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라는 저서에서 “성경을 읽어도 아무 기쁨이 없고, 찬송을 불러도 감격이 없고, 설교를 들어도 아무 설레임이나 감동도 없는 형식적인 신앙인들에게 꿈과 목표를 잃고 그저 종교로 안주한 신앙을 개혁하라”고 외치며 “형식적 습관을 깨고 새로운 영적 부흥을 체험하라”고 외칩니다.

또한 예배를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쇼처럼 관람하는 관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며 거짓된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이다. 인류역사상 예배를 드리지 않는 인종이나 종족에 대해 이제까지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예배는 너무나 불완전하고 잘못된 방향에 빠져있고 순수하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전 인격을 다 바쳐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들을 번제로 드려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만일 내 안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수천 번 반복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우리의 마음대로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동쪽을 보고 기도한 후 서쪽으로 가면서 마음이 편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믿는 것은 착각입니다.

제사장이 향기로운 제사의 요소에 악취를 풍기는 요소를 덧붙인다면 어떻게 올바른 제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예배자의 마음속에 향기가 아닌 악취를 풍기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훈련되지 못하고 교정되지 못하고 정화되지 못하고 순화되지 못한 것이 우리의 본성에 남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온전한 예배를 방해하고 또 마음속에 불순한 요소를 가진 사람이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올바른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말씀이 육신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온전한 예배자가 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주 즉, 7일간 매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일주일에 단 하루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일성수하고 예배를 드린 자라면 하루하루의 삶이 예배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한 주간 중에 하루 그것도 교회에 한두 번 가는 것으로 예배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예배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무엇보다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저들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예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예배합니다.

그러나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한 후 그 다음 주일이 돌아오기까지 6일 동안 계속해서 우리의 예배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진리의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까지 쉬어서는 안 됩니다.

주안에서 예배하라는 것이나 주님이 내안에 내가 주님 안에 라는 말씀은 주님이 우리의 성소이며 나는 하나님이 거하실 성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예배함이 하나는 주님의 성소에서 또 하나는 삶에 성소에서 예배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어떤 부분도 그분의 영광을 해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한 발짝 내디딜 만한 작은 땅까지도 전부 거룩하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시간과 장소를 하나님께 반납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을 올바르게 예배할 것이고, 예배를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쳐 예배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아신다면, 일시적으로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긴다 할지라도 순수한 동기에서 피어나는 향기를 흠향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며 그 말씀 곧 진리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속죄, 사랑, 은혜, 약속, 그리고 성령님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굳게 결심하여 그분을 찾고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성소가 될 것이며, 그 성소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성찬과 예배를 통한 교제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며,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향기로운 예배의 회복을 이루게 될 것이며, 우리는 모두 주님을 위해 기꺼이 일할 자세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고 하는 자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줄 아는 자가 주를 위하여 일하면 그의 사역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일하는 자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불태우시는 날, 그때 타버리고 말 나무와 건초와 그루터기를 쌓아놓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다”고 하신 말씀과 같이 예배의 회복을 이루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전심으로 예배를 드린 후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지겹다고 한다면 아직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형식적으로 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신자라면 누구나 형식적인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되어버린 경우가 많이 있음을 우리는 이웃들을 통해 경험적으로 발견하게 되거나 나 자신도 그렇게 되었음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다”라는 말씀처럼 누가 하나님을 예배함을 실패하고 싶겠습니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의 첫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된 것인지 은혜도 없고 성령의 감동도 없으며 예배를 드리기는 하는데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려오지 않는다거나 혹은 기쁨과 감사가 없다거나 은혜가 없어 무감각한 상태로 예배의 형식에 따라 행할 뿐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앉아서 시간만 보낼 뿐인 상태가 되어버린, 즉 예배가 무너진 상태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아직 죄 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늘 기도와 말씀으로 깨어 있어야 하며, 내 입술이 예수님을 주를 시인하고 전하고 증거 하면서, 성령님과 교통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며,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순종하여 말씀대로 살아가며,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육신에 넘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따라가면 멸망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형식적인 신앙으로 빠지지 않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좋아하는 예배자로서의 삶을 반납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기를 기도하며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말하기를 “우리는 실용적인 예배가 좋다”고 하는데 그것은 육신을 좇아가고, 세상을 좆는 예배가 좋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신다는 것은 성경의 그 어느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이것을 추구하고자 갖가지 방법으로 예배를 디자인하고 새로운 방법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므로 성경대로 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생각으로 최상의 것을 드리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가고 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할 때 자기의 마음과 생각에 가장 귀한 방법으로 모시고자 새 수레 준비하고 법궤를 그 위에 실었다가 웃사라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됩니다. 그러자 다윗은 선지자와 제사장들에 물어 답을 얻은 후에 비로소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안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랴 사람을 위하랴 하는 말씀처럼 성경에서 벗어나면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성령이 그 속에 계신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해 봅시다. 즉 불신자는 예배가 불가능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려면 반드시 성령 안에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예배라는 것이 철저하게 “신자에게만” 가능한 것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예배 안에 불신자가 많을수록 더 좋아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이는 불신자가 교회에 오는 것을 막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자는 뜻이 아니라 다만 그런 불신의 마음으로 예배함은 온전한 예배자의 자세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 회복자로 오셨다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의지와 계획에 따라 죄로 인하여 타락한 그의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원하실 일을 계시(성경)하시고, 교회운동을 통하여 성취해 가시는 역사적 진행과정(History of Redemption) 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고 부활승천하게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세상을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고 하셨습니다. 또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컨대 역사의 주인이며 주관자, 운행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라도 통달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고 하셨고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혹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니 불신자들도 구원에 이르러 하나님을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신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물과 피, 성령으로 거듭나서 말씀이 육신 되어 예배하여야 하고 또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들도 언제나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여야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유월절이라는 이스라엘 최대의 명절을 맞이하여 그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의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의 명절을 잘 마치고 다시 고향인 나사렛으로 떠날 무렵 사건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 친척들과 함께 있으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없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은 12살의 소년이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 교외 시골 마을의 거리와 골짜기마다 찾았지만 그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 시내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이번에는 시내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찾아보다가 마침내 찾았습니다. 어디에서 찾았습니까. 바로 성전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예배자로서의 우선순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어머니 마리아가 묻습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찾았노라”(눅2:48) 이 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 성경학자들은 이 대목에서 두 가지의 놀라움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이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때까지의 유대 문화에서 결코 익숙하지 못한 표현이었습니다. 구약 39권 가운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기한 것은 겨우 14회 정도이고 이것도 문서상의 표기일 뿐 언어로 하나님을 부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예배하는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신약학자인 데럴 보크(Darrell Bock)는 이 대목, 이 구절에서 사용된 희랍어 단어 “dei”(it is necessary)를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살려서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필요한 우선순위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의미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것이 큰 성전이든, 작은 회당이든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집은 모두 그분의 아버지의 집이었고, 그 아버지의 집에 그가 삶의 중심을 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그분의 우선순위적 습관이요, 실천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어떤 장소를 구별하시고 그곳에 자신의 거룩한 영광을 집중적으로 계시하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성전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이고 신약에서 예배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또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는 일을 보며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보았다고 제자들은 증거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과연 주의 전을 사모하는 예배의 열심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과연 아버지의 집에 대한 거룩한 갈망을 안고 매 주일 예배의 장으로 나아오는 거룩한 습관이 있습니까.

혹시 이 습관이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일들로 인해 빈번하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으십니까.

하나님의 집을 찾아 예배하는 일, 이 일이 우리의 평생에 양보할 수 없는 우선순위의 습관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성도의 신앙의 기본입니다. 이 기본이 무너지면 우리의 인생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두 세 사람 성도의 모인 곳에 주께서 그들 중에 계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경학자 프레드릭 브루너(Frederick Dale Bruner)는 여기서 두 세 사람은 신약 교회의 성도의 공 예배가 성립하는 최소단위라고 지적합니다.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공 예배의 최소 단위를 장년 남자 10명이라고 전통적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의 거듭난 성도만 있어도 예배는 성립할 수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할 목적으로 모인다면 주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할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부르너 교수는 주님이 함께 하실 것임을 약속한 내용에 대해 예수님이 거기에 임재 할 것을 미래형으로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현재형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표현해 보면 “I will be in their midst” 가 아니라 “I am in their midst"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몇 사람이 모였든 진지한 예배가 진행되는 곳에 예수님은 이미 " I am"으로 함께하십니다. 그것은 얼마나 고귀한 특권입니까.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우리를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사랑하신 주님을 예배하는 순간 이미 찾아주신 주님을 실제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예배는 그분과의 만남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아버지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 속에 찾아주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찬양하며 만나야 합니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봉헌하며 드리는 헌물을 받으시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말씀의 유일한 초점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배의 성공의 열쇠는 “집중”입니다. “집중”은 “Concentr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con과 center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함께” “중심으로”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함께 우리의 예배 그 한복판에 영으로 함께하시는 그분 앞으로 나아가 그분에게 예배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요, 목적인 것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주님의 만나 그분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성공은 집중입니다. 집중하여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또한 예배의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배의 장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수 없는 거룩하지 못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이 이사야의 체험이 아닙니까. 이사야 6장에 보면 선지자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성전에 들어가 엎드려 하나님을 예배하던 순간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의 찬양소리를 듣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바로 그 순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 순간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 왕이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는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도구로 새롭게 보내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예배의 축복입니다.

주님도 산상수훈에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과 마태복음 18장의 교훈도 같은 맥락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두 세 사람의 예배와 기도의 교훈은 사실상 마태복음18:15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죄를 범한 형제를 교회 안에서 다루는 문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땅에서 풀리면 하늘에서 풀리고, 해결이 안 되면(매인바 되면) 우리의 기도도, 예배도 응답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교정하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배할 때마다 변화되고, 성숙하고,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본능적으로 바라보는 대상을 닮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사랑하는 W(worshiper)세대가 되도록 개혁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하고 이런 세대가 되자고 하는 것이 바로 Nyskc Movement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함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예배가 거룩한 습관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기도와 말씀이 영혼의 호흡이요, 양식인 것처럼 매일 매일 반복하는 신앙이 아주 중요합니다. 또한 늘 모이기에 힘쓰고 자신을 주님께 드리며 반납함으로서 전도의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즉 반복은 살아 역동하고 있는 힘이며, 이는 행동을 만들어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합니다. 또 그것이 습관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습관의 구조를 살펴보면, 호기심은 반복의 행동을 만들고 보상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인생이 바뀌는 것처럼 삶에 있어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늘 주님만을 바라보고 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가 매일 주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주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2017년 한국 전주 Nyskc Family Conference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이 신앙의 중심을 하나님을 예배함에 둘 수 있도록 3박 4일간의 집중적 예배 회복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Nyskcian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안하며 인사드립니다.

July 31. 2017

NWM 대표회장 최고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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