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skc Creed - 주성철 목사, GRI Leader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한없이 사랑하시면서도 때때로 이들을 심하게 심판하실 때도 있었다. 하나님은 늘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번영을 허락하시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이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살았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에 가증한 것들을 가져다 놓고 이방신들을 섬긴 것이다. 이런 것을 보신 하나님은 이방 민족을 사용하셔서 이들을 경책하시고 이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보여 주신 것이다.


다윗의 무너진 천막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주님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란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예배란 것을 가르쳐 주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를 만드신 것이다. 이런 예배 (제사)를 통해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 후에는 성막의 시대가 찾아왔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거기서 내거 너와 만나고 너희가 할 일을 가르쳐 보이겠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궤”를 만들어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고 장막속에 있게하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거기에서 만났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의 상징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계획과 방법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을 떠나면서 광야 생활을 하는 가운데, 또한 심지어는 가나안 땅에 살면서도 이들을 하나님을 외면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각으로 이방신들을 하나님 대신으로 섬기면서 그 이방신들이 마치 자신들을 노예에서 해방시킨 신이라고 하면서까지 우상숭배를 한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을 세우고 레위인들을 세워서 예배를 인도하고 집례하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 말씀을 받고 있을 때에 모세가 더디 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여서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다. 이 때에 아론은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이면서도 불구하고 금으로 송아지 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송아지 상이 애굽에서 인도해낸 신이라고까지 한 것이다. 출애굽기 32장 4절부터 6절에,“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튼 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라고 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그 이후로는 수시로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방신들을 섬기게 되었고, 아론의 아들들, 즉 홉니와 비느하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들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께 향한 근본적인 예배의 자세는 무너져 버린 것이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보니 백성들도 영적인 분별력을 잃게 되고 결국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고 계시던 하나님은 어떻게해서든 이들을 돌이키려고 말로도 해보고, 가믐과 질병으로도 다루어보고, 심지어는 주변 국가들을 사용해서 경고도 했지만, 마지막 노예로 잡혀갈 때까지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암울한 시대를 우리는 사사시대라고 부르는데, 이 때에도 사람들이 곤경과 어려움을 당하고 나서는, 그것도 잠시 하나님을 예배하였지만, 곧 그들은 미혹되어 다시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이다.


그 이후에 왕정시대가 시작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분명 그들이 어떻게 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사는지를 말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요구하는 죄를 지었다. (삼상 12장)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께서는 하솔 군장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압 왕의 손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징계하셨는데 이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이들을 권케 하셨고, 하나님이 만왕의 왕 되심을 나타내심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계속 주님께 등을 돌린 것이다 (삼상 12:8~12).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상징인 “하나님의 법궤”를 잘못 사용하여 성막에 있어야 할 법궤를 전장터로 가지고 갔다가 결국 블레셋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법궤를 원수들에게 빼앗긴 이스라엘은 다윗이 왕이 될 때가지 찾지 못하고 결국 다윗 때에 하나님의 법궤 즉 하나님의 상징을 도로 찾아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전으로 다시 옮겨놓게 된 것이다. 이 일이 얼마나 즐겁고 기뻤던지, 다윗이 아랫도리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추었던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이다. 그 후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그가 하나님 앞에서 득죄하여 결국에는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남 왕국은 남 왕국대로 북 왕국은 북 왕국 대로 하나님 앞에서 득죄한 것이다. 특별히 북 왕국의 여로보암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에 초대 왕이 된 여로보암의 이야기이다. 그는 솔로몬이 죽고 난 후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때 북 왕국의 초대 왕이 된 자다. 그는 에브라임 사람인데 그 부친은 느밧이고 솔로몬 왕의 심복이었다. 그자 젊었을 때에는 그의 부지런함이 인정받아 솔로몬으로부터 요셉 족속의 노동을 감독할 수 있도록 임명되었다 (왕상 11:28). 그가 어느 날 길에서 실로사람 선지지 아히야를 만아게 되었다. 아히야는 그가 입던 새 의복을 열 두 조각으로 찢어 그 중 열 조각을 여로보암에게 가지게 하고 그가 이제 10지파를 지배하는 왕이 될 것을 예언 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했고, 그 이유로 여러보암은 애굽으로 도망가서 시삭에게 그의 몸을 맡긴 것이다 (왕상 11:29~40).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보다는 사람의 왕, 즉 애굽의 시삭을 의지하게 된 것이다. 만약에 르호보암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예배하는 자 였다고 하면 아마도 이스라엘 어느 곳에서 숨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보다는 사람을 더 의지해서 결국 애굽으로 몸을 피신한 것이다. 이것부터 그의 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었던 것이다. 솔로몬의 사후 그는 애굽에서 돌아와 회중과 더불어 르호보암 왕에게 가서 중세(重稅)와 노역(勞役)의 경감(輕減)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마침내 10지파와 함께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왕으로 옹위되었다. 그래서 아히야의 예언은 실현되었다. 아히야의 예언이 가시화 된 것은 사실이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북이스라엘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여로보암은 아히야의 예언에 있던 권고를 무시하였다. 그는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유다 왕의 꼬임에 자시의 백성을 잃게되고 그 백성을 잃게 되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을까! 백성이 없은 왕이 과연 왕이 될 수 있을까!란 염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서 떨어져 나가는 행동을 자행했던 것이다. 첫째로, 백성이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자기의 왕위가 위태로워 지지 않을까 하여 나라의 남북 양단(벧엘과 단)에 예배 중심지를 설치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숭배하였던 것이다(왕상 12:26-30).


Definition of Nyskc


(11) 그 날이 오면 내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고, 그 터진 울타리를 고치면서 그 허물어진 것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 집을 옛날과 같이 다시 지어 놓겠다. (12) 그래서 에돔 족속 가운데서 남은 자들과 나에게 속해 있던 족속을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하게 하겠다. 이것은 이 일을 이루실 주의 말씀이다. (13)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 때가 되면, 농부는 곡식을 거두고서, 곧바로 땅을 갈아야 하고, 씨를 뿌리고서 곧바로 포도를 밟아야 할 것이다. 산마다 단 포도주가 흘러 나와서 모든 언덕에 흘러넘칠 것이다. (14) 내가 사로잡힌 내 백성 이스라엘을 데려오겠다. 그들이 허물어진 성읍들을 다시 세워, 그 안에서 살면서 포도원을 가꾸어서 저희가 짠 포도주를 마시며, 과수원을 만들어서 저희가 가꾼 과일을 먹을 것이다. (15) 내가 이 백성을 그들이 살아갈 땅에 심어서 내가 그들에게 준 이 땅에서 다시는 뿌리가 뽑히지 않게 하겠다. 주 너의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표준 새 번역)


나이스크란 무엇인가? 이미 여러 많은 강사들과 책자들 기리고 인터넷을 통해서 알려진바 된 것이지만, 첫 번째로, 나이스크란? 예배회복을 위한 도구(tool)인 것이다. 아모스서 9장 11절~15절을 중심으로 그 날에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는 말씀을 기초로 회복의 신학을 정립하고 예배 회복을 위한 신앙생활의 5가지 Creed와 Article of Faith로 새벽기도로 영혼의 호흡을, 영혼의 양식을 위하여 성경애독, 성도의 열매를 얻기 위해 개인전도, 성령의 교통을 위해 성수주일, 축복의 도리 곧 헌신을 위해 온전한 예물을 드림으로 예배를 회복하여 교회 회복을 이루려는 뜻이다.


또한 Nyskc는 신앙의 본질로서의 접근이다. 영적 교육 방법 (Spiritual Education Method)로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구원의 도리(Salvation)이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Principle of Action이며 예배로 승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비전이다. 그러므로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는 Nyskc Theme으로서 thought and ensign for the Restoration of Worship이다.


두 번째로, 나이스크의 대표적인 주제는 아모스서 9장 11절~15절에 기초를 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현대교회는 지난 18세기 19세기의 유럽 교회를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의 참다운 말씀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 보다는 교권과 권력, 부귀영화 등등, 즉 세속적인 가치관들을 세상도 아니고 교회 안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예배 속에서 형식과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려는 자세로 진행되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1) 우선 예배시간은 짧아야 된다. 그리고 설교도 역시 길면 안되고,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 속에서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예배가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야 현대 감각에 맞는다는 것이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다른 일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에 시계를 보면서 예배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일전에 미국 친구 목사와 이야기하는 가운데, 교회 안에서 두 부류의 교인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을 자동차 주차한 모습을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 머리를 제대로 주차한 사람과 자동차 머리를 바꾸어 주차한 사람, 즉 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헤드라이트를 출구 쪽으로 향해 주차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인 교회들을 보면 예배가 끝난 후 5분내지 10분이면 파킹장이 거의가 빈 것을 본다. 예배가 주일의 축제가 된 것이 아니라, 형식에 불과하여 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자신


들의 의무를 다 했다는 형식이다. (2) 자녀교육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참석하는 동기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올려 드리는 것 보다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교회를 출석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척교회나 아니면 중소 교회는 사람들이 오지도 않지만, 왔다가도 곧 큰 교회로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곳에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잘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그램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프로그램에 앞서서 본질인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부터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이민 교회에서 학생들이 자신들의 담임 목사가 누구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3) 헌신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로,“예배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는 질문에 현대 교회는 헌신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스크린으로 예배를 봅니다. 헌신할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것이 한국교회나 이민교회에 대명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보고, 오케스트라가 동반된 성가대의 찬양과 독창자의 기교있는 음악 솜씨를 듣고, 또는 드라마의 한 토막의 촌극을 보고, 간단한 말씀을 듣고는 그것이 예배를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보는 관점이 틀릴 수는 있지만, 어떤 이들은,“신약에는 십일조를 하라는 언급이 없기 때문에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니는데,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인색함이 없이 바치라고 한 말을 어떻게 풀어 내려가는지... 아마도 십일조보다도 더 많은 것을 주님께 드리라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성경을 신구약으로 나누어 보는 잘못된 가르침들이 현대 교회들 속에 속속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외에도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겠지만, 일단 현대 교회에서 예배가 무너졌다는 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는 신조가 우리들의 가슴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 21세기의 말세지말에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은 무너진 하나님의 장막을 다시 세우는 일이요, 터진 곳을 수축하고 새롭게 세우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나이스크는 적은 불씨와도 같은 것이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져나가 이제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것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나이스크는 예배 회복을 위한 도구이다. 예배 회복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원리로 되어있다. 나이스크의 5대 강령은 결국 행동 강령 (Principles of Action)을 만들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이 5대 강령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다 해 온 신앙 강령으로 다시 정리해서 새롭게 신앙의 표준을 삼고자 하는 것이다. 이 5가지 신앙 행동 강령은 Nyskc Creed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이 되겠지만, 참 예배자의 기본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어떤 형식으로 끝이 난다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이것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참 예배자의 모습이라고 했을 때, 목회자나 평신도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고, 그런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은총을 받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라고 했다.


믿음이란 기초가 마련되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믿는 자들의 증거가 무엇이겠는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예배를 드리는가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실질적으로 무엇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이 동반된 예배인데, 그 믿음은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다. 믿음이란 Infra가 구축이 되면 결국 집 모양을 달라질 수 있으나 기초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종종 “Do you have enough Chips?”란 말을 잘 한다. 여기에서 “Chips”란 도박할 때 쓰는 모의 돈을 이야기 하는데, 자신이 게임을 할 때에 넉넉함이 있느냐? 라는 말이 된다. 이 말은 종종 어떤 일을 계획하거나 게임에 임할 때에 내게 충분한 힘이 있느냐? 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물론 예배에 대한 믿음을 이런 Chips로 비유한다는 것이 유치한 말인지는 몰라도, 결국 우리들은 가장 기본적인 기초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본질 보다는 현상을 많이 추구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서 나이스크에서는 5가지 신앙의 행동강령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행동 강령을 좀더 구체적이고 실행적인 면에서 고찰해 보면서 행동이 동반된 원리를 강조할 때 우리는 진정한 예배 회복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것이다.

The Nyskc Creed


New Life (새벽기도-영혼의 호흡)


첫째로, 하나님의 능력은 새벽에 역사한다.

(1)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는 거의 모두 새벽에 역사 하였다. (출 14:21~31) 옛 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침(새벽)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에 특별히 적합한 시간으로 생각하여 왔다. 시편 5편 3절에,“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루가 시작되는 은밀한 시간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의무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해야 하는 고유한 특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 나만의 교제의 시간이다. 새벽기도를 통하여 그날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날의 첫 시간을 기도로서 시작하며, 새벽에 주님과 교제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권이고 의무이다.


(2) 새벽에 우리들의 온 영과, 혼과, 육이 하나님께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제일 큰 유익을 주는 행위이고, 사탄 마귀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잠시도 분리시키지 못하게 하는 은총의 순간 인줄 믿고 있다. 새벽 시간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몰두할 수 있는 최고의 좋은 시간이다.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이 없이는 한 순간도 버틸 수가 없다. 이것은 오직 새벽기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와 울부짖어 기도할 때 하루 온 종일 하나님과의 동행을 할 수가 있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또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영적으로 거지와 같은 신세가 되어서 인생의 찌꺼기와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서 날마다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 천국 잔치에 아름다운 영적 옷을 입고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풍성한 만나를 먹고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은 바로 새벽기도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간 입은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고,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생수를 마시면서 광야생활을 잘 하였다.(신8:4) 이와 같이 오늘의 우리들이 하루의 삶 속에서 아니 일생의 삶 속에서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으며, 양식이 핍절치 않는 가나안 정복의 기적의 역사는 바로 새벽 시간에 시작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왜 새벽기도를 해야 하는가? (필요성)

새벽 한 시간 나의 모든 것이 성령의 지배 아래 사로잡힐 때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세주이신 것”(마16:16)을 고백할 수가 있고 “내게 능력 주시는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하는 영적 자부심과 영적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1) 영적 자부심과 영적 자신감을 위해서 새벽기도를 한다.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로 시작할 때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어 나를 강하게 만들고 나를 붙들어 주신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힘있는 무기는 바로 영적 자부심이다. 물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또는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고 나온다고 해서 교만해 질 수도 있지만, 아침에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자신감을 허락하셔서 하루를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2) 새벽에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이런 말을 할 때에 혹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다. 하나님은 꼭 새벽에 기도해야만 들으시는가? 물론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기도하면 들으신다. 하지만, 말씀에 기록하시길 새벽에 주님께서 깨우셔서 주님께 부르짖게 하신다고 기록하였다. 새벽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새벽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만나를 내려 주신다.“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8) 믿는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치명적인 실수를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살인하고 강도짓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도하지 않는 죄이다. 이것은 가장 어설프고 형식적인 믿음이 되고, 기도 없이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3) 새벽을 깨우는 파수꾼이 되자. 새벽을 깨우면서 우리들은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생존경쟁에 있어서 뒤지지 않으려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본다. 요즘 새벽기도회를 가다보면 새벽 4시부터 교통 체중으로 힘들 때가 있다. 물론 이 모든 사람이 새벽기도회를 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 남보다도 더 일찍 일어나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통계를 보면 미국에서 100명의 천만장자 가운데 하루에 수면은 4시간 이상 자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를 섬기면서 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믿음의 권속들이 해가 중천에 이를때까지 자리에 누워 있어야 되겠는가! 새벽을 깨우는 파수꾼은 결국 가정을 깨우게 되고 국가와 민족을 깨우게 되고, 생동력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새벽기도를 하는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있고, 새벽기도 하는 성도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여호와여 새벽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새벽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셋째로, 새벽기도를 통해서 승리한 사람들

(1) 야곱은 새벽에 하나님께 매달리다가 은총을 받은 사람이다. (서원기도, 소원기도)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은 외삼춘 라반의 집에서 나와 가족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지난날 형 에서와의 관계에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강청한 일이 있다. 그는 가족과 모든 재물들을 얍복 강을 먼저 건네게 하고 혼자 얍복 나루에서 밤을 지세우게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했는데, 새벽녘에서야 그가 응답을 받게 되었다. 야곱은 밤이 새도록 씨름을 한 결과 새벽녘에 응답을 받아 야곱이란 이름에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2) 모세는 새벽에 홍해를 가르고 애굽의 군대를 무찔렀다. (기적, 승리, 위기에서의 구원, 보호)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시기 위해서 바로와 그 백성들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렸다. 그 마지막 재앙을 이기지 못한 바로는 결국에 이스라엘을 놓아 주게 되었는데, 놓아주고 나서 미련이 생겨 이스라엘 민족을 쫓고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매우 난감한 처지에 있었는데, 앞에는 홍해바다요, 뒤에서는 애굽의 군마들이 달려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왕좌왕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출 14:14)라고 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홍해 바다위에 놓으라고 해서 모세가 그렇게 했는데, 그 때가 새벽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새벽에 홍해바다를 가르시고, 그 가르신 홍해 바다 속에 애굽의 병거들을 모두 수장시키신 것이다. (출 14:27)


(3) 여호수아는 새벽에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다. (문제해결, 목적달성, 성공)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여리고 성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여리고성을 이스라엘 민족의 손에 붙이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데 있어서 사람의 방법으로 싸움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는데 그것은 말씀대로 따른 결과였다. 특별히 마지막 일곱 번째 날에 제자상자들이 양각 나팔을 불려고 나간 때가 새벽이었다. 여호수아서 6장 15절은,“제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 일어나...”라고 시작한다. 이스라엘이 당면한 문제 해결과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는 목적이 새벽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4)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시고 전도하셨다. 새벽 기도의 가장 좋은 본 보기는 우리 주님께서 새벽에 일어나셔서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했다. 왜 새벽기도회를 하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하셨기 때문이다.


넷째로, 새벽기도가 주는 도전

성도가 마지막 붙들고 의지해야 할 것이 바로 새벽기도이다. 새벽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도와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왜 새벽기도를 해야 하는가?>

◈ 예수님께서 하셨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처음 것을 기뻐하시므로 해야 한다.

◈ 새벽은 만나를 거두는 시간이다.

◈ 새벽은 난관이 무너지는 시간이다.

◈ 새벽은 전도의 능력을 받는 시간이다.

◈ 새벽은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받는 시간이다.

◈ 새벽은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막2:11, 요5:8) 고 하셨다. “참으로 의로운 나의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Yielding for Manna (성경 애독-영혼의 양식)

예배는 예배시간보다 삶 자체가 중요하다. 예배는 예배의 형식보다 예배자의 삶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은 틀렸다라고 하는 뜻은 아니다. 형식적인 예배 형식에 메인 예배 형식을 앞세우는 예배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예배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경배이다. 그것이 하나님이길 하나님은 바라신다. 그러나 예배를 드려도 실패할 수도 있다. 또, 성공할 수도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예배 속으로 들어가 보면 이 형제의 예배는 성공과 실패라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근본적으로 가인의 예배가 실패작이고, 아벨의 예배가 성공작인 이유는 무엇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제물이 차이가 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믿음의 차이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듣기의 차이였다.


첫째로, 무엇이 달랐던가?

(1) 하나님의 생각대로 제사를 드린 아벨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맘에 안 드시고, 아벨의 제물은 맘에 들어 하신 것으로 보일 수 있다.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인의 제물은 자신의 생각을 드린 것이고,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의 생각을 드린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과 같은 제물을 드린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이다.


(2)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즉, 가인은 믿음이 없이 드렸고 아벨은 믿음을 가지고 드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가지시는 생각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가진 자의 예배는 성공할 수 있다. 결국,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제물이 아니고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드린 예배는 성공할 수 있다. 반대로, 믿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실패하고 만다. 아벨이 드린 제사가 믿음으로 드린 것이라면, 가인이 드린 제사는 믿음이 없는 제사이다.


(3)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롬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믿음의 차이는 바로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의 차이이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4) 믿음대로 산다는 것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고, 믿음이 없다는 것은 자기 맘대로 산다는 것이다. 믿음의 반대는 자신의 생각이나 고집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고 자기의 고집이나 생각대로 제사를 드린 것이다. 반대로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생각대로 제사를 드렸다. 다만 그들이 드린 제물은 이런 생각들을 겉으로 드러낸 모습일 뿐이다. 제물의 차이가 아니라 믿음의 차이이다. 순종의 차이이다.


둘째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 차이점은 무엇인가?

(1) 제사로 인하여 가인과 아벨의 운명일 달라졌다. 실로 그 차이의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제사로 인하여 가인과 아벨의 운명이 달라졌다. 생각의 차이가 이렇게 사이를 갈라놓는다. 믿음의 차이가 영혼의 죽고 사는 문제를 낳는다. 순종의 차이가 하나님께 인정받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결과를 낳는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평가와 가치가 달라진다. 진정한 예배를 드린 자와 예배에 실패한 자는 그 결과가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만약 달라지지 않는다면 예배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2)예배는 아주 중요하다. 예배는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이 말씀은 진리이다. 예배에도 마찬가지의 원리가 적용된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고 높이는 것인데, 그런 예배를 드린 자가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가 바로 보상이다. 이것은 믿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이것보다 더 고상한 것이 있겠는가?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셋째로,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다.

(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2) 성경은 전체가 감동으로 되어 있다.

(3) 성경은 축자영감으로 되었다.

(4) 성경은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다.

(5) 성경은 절대로 모순이 없다.

(6)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은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을 통 하여 온다.


넷째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가인과 아벨에게서 얻을 수 있는 예배의 결론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며 그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보게 된다. 아벨이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자신을 드러낸다. 가인이 자신을 드러낼 욕심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면, 결코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것 때문에 아우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Salvation for One by One (개인전도-성도의 열매)


첫째로, 왜 전도를 해야 하는가?

(1)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이다.“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말씀하셨던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마28:19)는 지상명령은 모든 교회의 모든 성도에게 구속력이 있는 것이다.”(죤 스토트) 영혼구원은 하나님의 열심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지상과제 이다. 우리는 조금도 이것에 소홀할 수 없다. 이 지상과제는 목사와 선교사 뿐 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해야할 사명이다. 윌리암 에반스(William Evans)는 그리스도인의 영혼구원 사역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알파와 오메가는 영혼구원이며, 또 그 처음 문자와 마지막 문자 사이의 모든 문자도 잃은 영혼을 찾으려는 정신으로 흥건히 젖어 있어야 한다.


(2) 예수님의 중심적 사역이다. 영혼구원 사역은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사역 기간 동안 중점적으로 감당하신 사역이다. 또 그의 사도들이 몸숨을 아끼지 않고 일생 감당한 사역이다. 또 우리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오지의 땅에서 질병으로 죽어가면서도 감당한 사역이다. 이 사역은 우리 구주 예수님과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에 의해 오늘날 우리들에게 계승된 사역이다. 이 사역을 계승 받은 것은 너무나 큰 영광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3) 구원 받은 무리들의 사명의식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 수많은 구원 받은 무리들은 이 주님이 주신 영혼구원 사역을 감당하고자 몸부림 치고 있다. 목회자는 강단에서 메시지의 선포로 이 사역을 감당한다. 또 길거리에서 메시지를 선포한다. 선교단체들은 자신들이 가진 독특한 방법으로 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특히 교회들은 총동원 주일 이라는 것을 만들어 이 사역을 감당하려고 하고 있다.


(4) 참다운 신앙인 없다. 그러나 문제는 교인의 수는 불어나며 신자라고 말하는 무리는 불어나는 데도,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비행기 위에서 보이는 교회의 종탑이 공동묘지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본회퍼는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의 값비싼 피의 대가를 싸구려 은혜로 바꾸어 버리는 자들 이 말은 예수님이 피의 대가로 우리를 사신 것은 거룩한 삶(제자의 삶)으로의 초청인데도, 신앙인은 구원의 표만으로 양심을 무마시키며 죄를 계속해서 짓는다는 것이다. 왜 신앙인이 이러한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교회의 현실의 문제는 무엇인가? 이것은 전도 인들이 교회로만 이끌고 오는 것에서 전도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양육하고 키우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돕지 못한다는데 있다.


둘째로,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1) 먼저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12제자를 사도로 양성한 완전한 일대일 성경선생이었다. 또 성경선생의 주 텍스트가 예수님 자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좋은 성경선생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을 잘 배워야 한다. 모든 성경선생은 예수님을 잘 알고 배운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지 않고는 성경선생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요한복음 15장 4,5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제자란 스승의 사상과 인격과 생활을 배우고 생활화 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스승의 버릇까지 흉내 내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어느 시인의 싯말 처럼 내 핏줄 가득 가득히 당신이 꿈꾸는 모습, 아니 꿈꾼다고 하기보다, 그 황홀함에 내가 취하는 것이다. 라는 고백이 나올 정도로 그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양성은 어떠했는가?>

본 논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양성 방법을 다 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주제만 해도 하나의 논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단하게는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일대일 성경선생으로서의 예수님은 분명한 교육목표가 있었다. 이 말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분명한 주 텍스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는 가르치는 자에게 없어서는 않될 중요한 요소다. 예수님은 영혼구원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 재생산 할 수 있는 완전한 제자로의 삶을 가르치셨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가, 대화의 방법이다. 둘째가, 강화적방법이다. 이 방법에 사용된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비유를 통한 방법, 귀납적인 방법, 사물을 통한 방법, 교육현장을 통한 방법 등이다. 셋째는, 생활을 통한 방법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직접 동거 하시면서 그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이셨다. 또 사건 사건을 통하여 그들을 교육하셨다. 또 질문을 하시며 그들의 생각을 정리하게 하셨다. 이렇게 제자를 양육하신 예수님의 교육원리는 지극히 인격적이요, 개인적이요,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또 영적인 권위를 갖고 하셨다. 예수님의 교육방법은 특별한 교재가 없고 그 상황과 사람에 따라 자유로우셨다. 일대일 성경선생은 무엇보다 이러한 예수님을 잘 배워야 하고 좋은 제자가 되어야 한다.


(2) 상대와 좋은 관계성을 맺어라. 일대일 개인전도의 시작은 한 사람과 관계성을 맺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좋은 관계성이란 한마디로 인격적인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죤 스토트는 우정까지는 못되어도 먼저 신뢰성이 형성되지 못하면 그의 영혼을 구원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공부가 전도를 한 즉시 이루어지지 않아도 관계성이 잘 맺어져 있으면 피전도자의 마음이 바뀔 때 언제든지 성경공부를 할 수 있다. 또 관계성이 잘 맺어져 있으면 피전도자가 영적인 소원이 없어 떠나 갔다 하더라도 언젠가 영적인 소원이 생기면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러므로 떠나는 사람일지라도 좋은 관계성을 유지하여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상대방과 좋은 관계성을 맺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예로 삼으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에 곧 바로 복음으로 들어가지 않으셨다. 먼저 여인의 관심사인 물에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물에서 부터 계속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도록 주의를 환기시키셨다. 마침내 여인이 남편 문제에서 예수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랄 때 메시야이신 자신을 보여주셨다. 오늘 날도 이러한 예수님의 지혜로 한 영혼에게 접근해야 한다.


(3) 상대방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상대방을 모를 때 상대방에게 알맞는 메시지를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상대를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피전도자의 성격과 그의 내면의 어두움 등을 깊이 파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며 상대방을 배우려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자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상대를 이해 할 수 있게 되고 자연스럽게 피전도자에게 맞는 복음을 전해 줄 수 있다. 성경공부 선생들이 잘 빠지기 쉬운 문제가 듣을 줄은 모르고 이야기를 할 줄 만 안다는 것이다. 이때 피전도자의 관심사와 주제가 빗나가고 이야기는 따분한 교훈에 치우치고 만다.


(4) 상대에게 맞게 치료를 해야 한다. Broad Spectrum (광범위 치료)라는 치료 요법이 있다. 즉, 병명을 정확히 모를 때 무조건 항생제를 투여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항생제가 거의 모든 병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다 그 항생제가 맞아 떨어져 병이 낫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잘못될 경우 그 항생제에 내성이 생겨서 더 강한 다른 약을 투여해도 듣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상대를 모르면 자연히 광범위 치료를 하게 된다. 혹 한 말씀에서 은혜를 받지 않을까 해서다. 그러다가 은혜를 받으면 좋지만 아무런 말씀도 그의 심령에 들어가지 않으면 오히려 상식과 지식만 생겨 신앙생활을 중단하게 하기 쉽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깊이 연구하여 정확한 말씀으로 그를 찾아야 한다. 또 도식화 된 성경공부 방법이나 공식적인 성경공부 방법은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양의 신앙에 맞도록 돕지 못하고 양을 성경공부방법에 양을 끼워 맞추려다가 양에 마음에 오히려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양을 잘알고 그의 문제에 알맞는 말씀을 제시할때 그는 결코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셋째로, 개인전도가 그 해결책이다. 우리는 이상에서 일대일 개인 전도의 정의와 중요성,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이 시대에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교회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일대일 개인전도의 방법으로 해결 할 수 있다. 일대일 개인 전도를 할때 성숙하고 건실한 신앙인으로 키울 수 있다. 이것을 연구하면서 느끼는 간절한 마음은 한국교회가 참으로 새로워지기 위해서 목회자들이 숫자 중심의 교회를 벗어나 일대일 성경공부 중심의 교회로 나아야 겠다는 것이다. 본회퍼의 말처럼 피로 산 값비싼 은혜를 싸구려 은혜 로 바꾸어 버리는 죄를 범하지 않는 교회들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의 지혜요, 예수님이 직접 모범을 보이신 인격적인 일대일성경공부로 참 제자를 양육하는 교회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소원이며, 하나님의 열심이다. 이것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일대일 성경공부 방법으로 우리는 이 시대에 복음의 일꾼을 키우고 복음을 섬기는 복된 자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말씀하신다.“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Keeping for the Lord's Day (주일성수-성령의 교통)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 주신다.

Nyskc의 네번째 성수주일(K=Keeping's the Lord's Day)은 예배회복에서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예배회복에서 성령을 받는다든지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을 빼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예배의 성립에서 성령의 역사를 빼놓고는 예배가 드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1) 그러므로“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라야 하나님이 찾아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첫째로 기독교는 약속의 종교이다. 일반 다른 종교에서처럼 사람이 신을 찾아 나선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는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기를 원하여 찾아오신 종교이다. 이것을“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라고 하고, 한편 '임마누엘'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또한 약속의 종교라고도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고, 그 약속을 한 번도 번복하지 않고 그대로 지킨 하나님이시다. 오늘도 이 약속은 변치 않고 진행되고 있다.“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이다. 둘째로, 이 약속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종족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는 세계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 위에 오셔서 사람들을 만나시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시킬 뿐만 아니라, 저들과 계속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시다.


(2)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하셨다. 그 만남의 형식은 여러 가지 이지만, 제사(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 제사(祭祀)의 행위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와 연결되었다. 제사에는 반드시 <찬양>과 <감사>와 <제물>이 있어야 한다. 첫째로, 형통한 날을 보게 하신다. 이것이 정성된 마음으로 드려질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셨고, 형통의 날을 보게 하였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곳곳에서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라고 하였다. 여호와 앞에서 바르게 제사의 행위가 진행되는 동안은 나라가 부강했고, 백성들은 평안했고, 군왕들은 존경을 받았다. 둘째로, 경외(敬畏)란 공경할 경(敬)자와 두려워해야 할 외(畏)자이다. 문자풀이를 해보면, 공경함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뜻이다. 즉 지극히 존경하는 대상 앞에서 갖는 마음의 자세를 말한다. 가령 일반 가난한 서민이 대통령을 만날 때 어려워하는 것은 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를 경외하기 때문이라 본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도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이 예배의 행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예배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이다. 세 번째로, 이러한 행위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뜻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날을 구별되게 지킨다는 뜻이다. 이것은 정성된 마음의 표현을 의미한다. 대수롭게 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도문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아버지에게 존경심을 갖는 아들딸들이라면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이라면 부모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요즘 마지막이 가까운 세상이 되어 그런지 몰라도 세상의 아버지들의 권위가 상실되었지만, 그래도 자녀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본분은 부모에 대한 경외심이다. 아버지께 존경심이 없는 한 그 가정은 보나마나하고, 그런 자식이라면 역시 보나마나한 자식일 것이다. 아무리 민주화된 가정이요 대화가 있는 가정이라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무질서한 가정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기를 원하고 있기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그 날을 하나님의 날로, 주님의 날로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1)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것을 법으로 명령하였다. 그것이 안식일 제도이었다.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제 칠일은 안식의 날로 지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도 엿새 동안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제 칠일은 쉬었다. 그런 연유에서 하루는 구별되게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를 기쁘게 하며 쉬라고 하였다.


(2) 안식일의 개념으로 바뀜. 그런 것이 주님 오신 이후 안식일의 개념은 바뀌어졌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이제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님의 날>로 지키게 되었다. 아직도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

(3) 유대교회에서 기독교회로 전환되어야 할 때이다. 또 안식교에서는 우리를 보고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한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이제 유대교회에서 기독교회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모세의 율법을 완성시킨 주님의 날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사람들은 이제 안식 후 첫 날을 주님의 날로 즉 주일(主日)로 지키게 되었다.


(4) 달력이 주는 의미. 여러분! 모든 세계 달력을 보면 토요일엔 청색으로 주일은 빨간색으로 표시하였다. 즉 이것은 주님의 피 흘린 거룩한 날을 지키라는 뜻이다. 또 빨간색은 주의를 환기시키는 뜻이 있다. 그래서 토요일에는 반나절만 일하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뜻으로 토요일은 반나절만 일하고 일찍 직장에서 내보낸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의 형편을 보면, 얼마나 하나님의 본 뜻과는 달리 주일이 없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주말(週末)이라는 용어가 더 실감이 나고, 일요일(日曜日)이라는 말로 통용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주님의 날>(Lord's Day)에 도리어 죄를 더 많이 범하는 날이 되어가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그러면 왜 성수주일을 하라고 하는 것일까?


셋째로, 성수주일 하는 자는 형통의 은혜를 주신다.

(1) 성수주일의 기본 틀이 무너지면 신앙 생활도 무너진다. 성수주일의 기본 틀이 무너지면 신앙생활이 무너지는 것이며 그것은 곧 예배생활이 무너진 것이며 이것은 모든 생활 분야에서 하나님이 밀려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생활의 변두리고 밀리기 시작하면, 사람이 먼저이고, 내가 먼저이고, 경제가 먼저이고, 육신의 일이 먼저로 자리를 잡게 된다.


(2) 하나님보다 더 먼저 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보다 내가 먼저이고,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일이 먼저이고, 하나님 믿는 신앙보다 물질이 앞서게 된다. 이런 삶 속에서는 안식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탐심과 스트레스와 미움과 갈등과 욕망이 있을 뿐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이다. 시편 119편 165절에,“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로다.”진실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항상 최우선 순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비록 사망과 같은 인생의 좌절의 골짜기를 통행할 때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잠언 22:4절에“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였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 주일을 잘 지키는 나라는 번영하고 주일을 안 지키거나, 주일에 전쟁을 일으킨 나라들은 모두 망해버렸다. 나폴레옹이 1813년 10월 17일 주일에 영국을 침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