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을 성수(聖守)하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찌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언 3장 5절-10절>
1.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 주신다.
Nyskc의 네번째 성수주일(K = Keeping's Lord's Day)은 예배회복에서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회복에서 성령을 받는다든지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을 빼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예배의 성립에서 성령의 역사를 빼놓고는 예배가 드려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라야 하나님이 찾아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일반 다른 종교에서처럼 사람이 신을 찾아 나선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는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기를 원하여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 라고 하고, 한편 '임마누엘'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또한 약속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고, 그 약속을 한번도 번복하지 않고 그대로 지킨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이 약속은 변치않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종족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는 세계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 위에 오셔서 사람들을 만나시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시킬 뿐만 아니라, 저들과 계속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만남의 형식은 여러가지이지만, 제사(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하였습니다.
이 제사(祭祀)의 행위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와 연결되었습니다.
제사에는 반드시 <찬양>과 <감사>와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성된 마음으로 드려질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셨고, 형통의 날을 보게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곳곳에서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바르게 제사의 행위가 진행되는 동안은 나라가 부강했고, 백성들은 평안했고, 군왕들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경외(敬畏)란 공경할 경(敬)자와 두려워 해야할 외(畏)자입니다.
문자풀이를 해보면, 공경함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뜻입니다.
즉 지극히 존경하는 대상 앞에서 갖는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가령 일반 가난한 서민이 대통령을 만날 때 어려워하는 것은 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를 경외하기 때문이라 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도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예배의 행위에서 만나게 됩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뜻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날을 구별되게 지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정성된 마음의 표현을 의미합니다.
대수롭게 대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도문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존경심을 갖는 아들딸들이라면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이라면 부모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요즘 마지막이 가까운 세상이 되어 그런지 몰라도 세상의 아버지들의 권위가 상실되었지만, 그래도 자녀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본분은 부모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아버지께 존경심이 없는한 그 가정은 보나마나하고, 그런 자식이라면 역시 보나마나한 자식일 것입니다. 아무리 민주화된 가정이요 대화가 있는 가정이라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무질서한 가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기를 원하고 있기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그 날을 하나님의 날로, 주님의 날로 지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주일을 성수는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것을 법으로 명령하였습니다.
그것이 안식일 제도이었습니다. 엿새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제 칠일은 안식의 날로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엿새동안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제 칠일은 쉬었습니다. 그런 연유에서 하루는 구별되게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를 기쁘게 하며 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것이 주님 오신 이후 안식일의 개념은 바뀌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이제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님의 날>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또 안식교에서는 우리를 보고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이제 유대교회에서 기독교회로 전환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모세의 율법을 완성시킨 주님의 날이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사람들은 이제 안식 후 첫 날을 주님의 날로 즉 주일(主日)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세계 달력을 보시기 바랍니다.
토요일엔 청색으로 주일은 빨간색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즉 이것은 주님의 피 흘린 거룩한 날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또 빨간색은 주의를 환기시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에는 반나절만 일하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뜻으로 토요일은 반나절만 일하고 일찍 직장에서 내보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의 형편을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본 뜻과는 달리 주일이 없어져가고 있습니까?
이제는 주말(週末)이라는 용어가 더 실감이 나고, 일요일(日曜日)이라는 말로 통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주님의 날>(Lord's Day)에 도리어 죄를 더 많이 범하는 날이 되어가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왜 성수주일을 하라고 하십니까?
3. 성수주일 하는 자는 형통의 은혜 주신다
성수주일의 기본 틀이 무너지면 신앙생활이 무너지는 것이며 그것은 곧 예배생활이 무너진 것이며 이것은 모든 생활 분야에서 하나님이 밀려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생활의 변두리고 밀리기 시작하면, 사람이 먼저이고, 내가 먼저이고, 경제가 먼저이고, 육신의 일이 먼저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렇게 되면 가치관이 전도되어집니다.
하나님 보다 내가 먼저이고,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일이 먼저이고, 하나님 믿는 신앙보다 물질이 앞서게 됩니다.
이런 삶 속에서는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탐심과 스트레스와 미움과 갈등과 욕망이 있을 뿐입니다.
시편119:165절에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항상 최우선 순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비록 사망과 같은 인생의 좌절의 골짜기를 통행할 때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잠언 22:4절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 주일을 잘 지키는 나라는 번영하고 주일을 안 지키거나, 주일에 전쟁을 일으킨 나라들은 모두 망해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이 1813년 10월 17일 주일에 영국을 침공하였다가 웰링턴에게 망했고,
일본이 1941년 12월 8일 주일 미국을 침공했다가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고 망했고, 북한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주일에 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해방시키겠다고 하였지만 유엔군에 의해 폭탄 세례를 받았고 결국 이밥에 고기 국을 먹게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오늘까지 주일을 지키지 못했기에 굶어죽는 현상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잘 사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 삶에는 형통과 즐거움이 없이 지나게 됩니다. 즉 안식이 없습니다. 쉼이 없습니다. 늘 분주하게 일하고 바쁘게 살지만, 전도서의 말처럼 바람을 잡는 것 같이 다 빠져나갑니다.
평안남도 중화에 김천덕장로님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장사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주일에도 겉으로는 문을 닫고 안에서는 물건을 팔았습니다. 또 명절 대목장에는 문을 열고 장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장로가 된 후로는 정말 문을 닫고 장을 보지않고 대목장도 보지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지만, 일년 매상고와 수입을 조사해 본 결과 장로가 된 후 문을 닫고 대목장도 보지않은 해의 수입이 남몰래 팔던 때 보다 5분의 2가 더 많았습니다" 라고 간증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일을 지킨다는 것을 현대 산업사회에 들어와서는 지키기 어려운 경우들이 있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격일로 일하는 경우나, 아니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에 근무하는 분들이나,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나, 특수공무를 집행하는 공직자들이나, 이런 저런 경우에서 물리적인 시간관념에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일성수를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
성수주일의 개념을 그렇게만 생각하기보다는 생활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주일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엿새 동안은 육신의 일을 도모했다면 하루는 주님의 날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의 소득 중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십일조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모든 수입이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모든 소득을 나 자신만을 위해 쓰지 말고 이웃과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와 과부를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주일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생활 속에 주일이 없다는 것은 즉 다시 말하면, 생활 속에서 주님의 날이 사라지면, 모든 날이 자기 날 밖에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기 시작하면, 주말이 있을 뿐, 주일은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날자적 개념에서 보다, 내 생활 속에서 예배가 사라지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예배가 없는 생활은, 즉 주일이 없는 생활에서는 오직 나 자신의 날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복을 내리겠습니까? 주일을 지키는 자들에게, 지금도 하나님은 물질의 복, 건강의 복, 그리고 명예의 복을 허락하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백화점 왕 <죤 워너메이커>에 대한 일화를 다 알고 있습니다. Keeping for Lord's Day 그는 성수주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재물의 부자이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에서도 부자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일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주일학교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주일이면 일찍 교회에 나가 학생들의 신을 정리하는 일을 맡아 봉사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람으로 여기면서 봉사했습니다. 사람들은 돈이 좀 벌어지면, 그런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워너메이커는 변함없이 그 일에 충실하였습니다.
어느 해 대통령으로부터 장관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거절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장관이 되면 교회에 나와 교사의 직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이었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으로부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이 났습니다. 그래서 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장관의 일이 아무리 바쁘고 분주했어도 주일에는 꼭 고향 필라델피아에 있는 교회로 돌아가 주일학교 교사의 일을 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나가는 말
우리들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장관은 커녕 조그마한 이해관계에서 주일을 범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아니 한 걸음 더 떠서,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내 자신의 건강과 오락을 위해, 그리고 자녀들이 우상이 되어 그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 경우들이 더 많지는 아니합니까? 만일 그렇게 키운 자녀들이 이후에 인류를 위해, 세계를 위해 얼마나 공헌하며 살 수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생활 속에서 주일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모든 날에서 주님의 날이 없다면, 그렇게 분주하게 보낸 생애에서 무슨 보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 이것을 후세에게 전해주는 부모들이 되기를 바라고, 이런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Nyskc (예배회복운동)에서 주님의 날이 거룩되게 지켜지는 교회 나라,가정이 되도록 하여야 할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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