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
몰몬교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이었다고 한다. 성경구절을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아래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고 할지라도, 그 뜻은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
이 하나님의 "우리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매우 다양한 견해가 있으며, 오랫동안 많은 연구가 있어왔다.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의 "형상"(히:체렘, 헬:에이콘)과 "모양"(히:데무트, 헬:호모이오마)은 닮음, 유사성같은 구체적인 외형적인 의미를 수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며, 또 하나님의 외형이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설명은 인격성, 자의식, 불멸성, 도덕성, 자유성같은 다양한 영적인 개념으로 해석되어 왔으며, 신체적인 외형의 형상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는 주장도 있어왔고(참고. 창1:27. 고전11:7), 특히 우리가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대표적인 기능(창1:26)을 하나님 형상의 연관적 의미로 찾으려는 주장도 있어왔으며, 또한 오직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장도 있어왔으며, 인간의 어떤 이성과 지적이며 영적인 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찾으려는 견해도 있어왔는데, 많은 주장과 논리들이 모두 상당한 동감이 가는 견해로 이해되어진다. 또 어떤 학자들은 인간의 언어성을 형상으로 보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구체적으로 오직 한가지만의 주장이 정답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모든 견해는 임의적이며 단편적이며, 부분적인 정답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영"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신체형상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속성이 아니며, 하나님이 곧 인격적인 존재임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볼 수 없는 영이시지만, 오시기도 하시며, 가시기도 하시고, 인간과 말씀도 하시며, 계시도 내리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요14:9)
예수님의 그 말씀은 예수님의 외형적인 형상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다는 의미라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하여 어떤 단순하고 간단한 "형상"의 주관적인 해석은, 그 개념을 한 마디로 통괄하여 설명할 수가 없다고 보여진다. 그 개념은 어쩌면 육체적인 형상의 개념까지도 배제할 수 없는, 또한 구체적이며 다양한 성질의 본성적이며 영적인 개념까지 모두 총괄하여 수반한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아담이 일백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왜 셋은 아담의 모양과 형상과 같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을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다고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아들 아담의 아들 셋은 아담의 형상과 같았기 때문이다. 창세기 5장3절은 그 "형상"의 개념이 "죄성"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쨋든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되며, 셋이 하나님의 형상 대신 아담의 형상을 닮게 되었다는 것은 이 형상의 개념이 외형적인 개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더욱이 살인을 금지시킨 이유가 하나님의 형상을 범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창9:6) 인간은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고 보아야만 한다.
"무릇 사람이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라"(창9:6)
그렇다면 그 "형상"의 개념은 생명의 존엄성과 신적인 창조성에서 비롯된다는 추상적인 개념이 포함되어 있으며,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외형적인 모양과 아직까지는 유사하다는 것을 제외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고전11장7절같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는다"는 구절은 외형적인 유사성을 전혀 배제시킬 수가 없다.
또한 잘못 놀리는 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한다"는 약3:9도 마찬가지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하여야만 한다.
웨슬레목사는 "타락한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선재적 은총안에 있다"고 하였으며, 그 말의 의미는 인간에게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이 선재적 은총에 의하여 부분적으로나마 회복되어있다고 보며, 그리스도인은 거룩성의 회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거룩하게 만들어졌으나, 그 형상을 잃고 자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 완전히 타락한 자연인이라는 존재는 사실 이론적인 것일 뿐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선재적 은총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그 형상을 회복하여 자유의지, 양심, 선악의 개념, 소망등을 부분적으로 갖게 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이 웨슬레목사의 주장이다.
특별히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정의가 되어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며(골1:15) 하나님 본체의 형상이시고(히1;3) 하나님의 형상(고후4:4)이시다. 이러한 구절에서의 "형상"이란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 즉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되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충만이 거하시며(골1:9), 하나님의 본체안에 선재하셨다(빌2:6)
예수님은 가시적인 성육신의 몸으로 오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질 수도 있다는 점, 또한 그가 하나님 본체의 형상이라고 설명되었던 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을 동일하게 가지셨다는 뜻이며, 예수님의 외형적인 형상이 하나님과 같다는 뜻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예수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죄있는 육신의 모양(롬8:3)과 종의 형체(빌2:7)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외형적인 형상은 인류의 외형적인 형상과 동일하였으며, 그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장래에 우리의 낮은 몸이 그의 영광된 몸의 형체와 같이(빌3:21) 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마침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다(고전15:49)라고 하였다.
그것은 타락한 인류의 구속과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새 피조물(고후5:18)을 말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되어지며(롬8:29) 결국 그리스도의 본성을 닮아감으로 인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벧후1:4)을 내포한다.
또 바울은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다"(골3:10))라고 하였다. 결국 그 말의 의미는 형상이라는 개념이 지적인 의미도 포함한다는 것이며, 그 형상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점진적인 성화"을 의미한다.
그런데 창조주의 형상을 좇아 지식까지 새롭게 한다는 것은 삶과 성품까지도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의미가 된다. 닮아간다는 개념은 동일인격이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이러한 형상적인 개념을 존재적인 인격체의 의미로 오해하여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주장을 하는 지방교회같은 이단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아들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여,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존재, 동일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이단적인 견해일 뿐이다.
성격과 감정까지 같은 일난성 쌍둥이조차, 그들의 인격은 동일존재가 아니며, 그들의 영혼은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점을 우리는 잊으면 안될 것이다.
또한 몰몬교처럼 하나님의 형상이란 용어를 단지 외형상의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은 수준이 낮은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인간이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았음을 대부분 동의하고 있으며, 또한 그 개념이 영적이고 추상적인 것과 신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개념을 전혀 배제하지 못하고 있음도 유의하여야만 한다.
또 그 개념은 외형적 유사성, 도덕성, 창의성, 불멸성, 무죄성, 진실성, 존엄성같은 다양한 견해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복합적이며 다양한 내적, 외적 개념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그 개념은 매우 어렵지만, 인류가 처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재조명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3:8)
인류의 타락 이래,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얼굴이란 곧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 대신 등을 볼 수가 있었다고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면을 할 수가 없었으며, 그러나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자유롭게 그 모습을 드러내실 수가 있었다.
이사야도, 사도요한도, 하나님과 대면한 극소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출33:20). 요한복음1:18에서는 "하나님을 본 자가 없다"고 하였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한 분"(딤전6:12)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요일4;12)라고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선택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이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창18:2) 야곱에게도 나타나셨으며(창32:30)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나타나셨으며 이사야에게도(사6:1) 나타나셨던 적이 있었고, 모세에게는 떨기나무의 불꽃으로 나타나시지 않았던가?(출3:2)
즉 하나님의 "본질 자체"는 절대로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가시적인 창조물을 통하거나, 때로는 하나님의 사자로 일컬어지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자신을 다양한 모습으로 계시하셨음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현현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이라고 결코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외형적으로는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며 온전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모두 보여준 적은 결코 없다고 보아야만 하며, 어느 경우에 하나님의 사자가 곧 하나님이라고 표현되어졌다. 예를 들면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았을 뿐이다.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3)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다(요일3:2)
우리는 그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13;12)
하나님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 개념을 성경을 통하여 어렴풋히 이해할 수는 있다. 그 개념은 육체적인 형상의 개념까지도 안전히 배제할 수 없는, 또한 구체적이며 다양한 하나님의 속성과 본성을 의미하는 인격성, 자의식, 불멸성, 도덕성, 죄없음, 창의성, 자유성같은 다양한 영적 개념까지 모두 총괄하여 수반하는 전인적(全人的) 형상을 말한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인간은 타락하였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모두 잃지는 않았다고 보여지며 그리스도인은 그 형상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가는 연합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 얼굴과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분명한 인격적인 구별을 의미하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
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9)
바울을 포함한 우리의 현재는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이었으며, 장래에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이 되어질 것이다. 우리는 장래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우리의 부활은 새로운 신령한 몸을 갖게 되며, 이와 같게 될 것이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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