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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e fixe

요한복음서 9장은 그 전체가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요한은 그 이야기의 많은 분량을 기적 자체보다는 그 기적에 관한 논쟁에 할애한다. 요한복음 9장에 포함된 전체 41절 가운데, 치유 자체는 오직 두 절로 제한되어 있고, 나머지 대부분이 눈 먼 사람에 관한 눈 뜬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그 고정관념에 대한 예수의 비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표면상으로는 '이적 이야기'같이 보이나, 실제로는 '논쟁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눈 먼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은 아무리 이야기 해봐야 눈 뜬 사람 대부분에게는 피부로 와닿지 않을 것이다. 눈 먼 사람을 보면서, 최소한의 연민의 정조차 갖지 못하고, 오히려 "이 사람의 눈이 먼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라고 질문한 당시 눈 뜬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여기에 문제로 표출되어 있다. 불행한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도움이 될 일이 없을까 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는커녕, 그를 논쟁의 대상거리로 삼고, 지금까지 가신들이 전해 받은 지식과 익히 들어 왔던 고정관념을 확인하기에 급급했던 눈 뜬 사람들의 그 냉혹성이 여기에 크게 부각되어 있다. 이들의 고정관념을 예수는 단호히 거부했다.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오직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다"(9.3). 더구나 예수에 의해 치유된 그 사람을 보고, 기뻐하기는커녕, 그 치유의 주체와 과정만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다가(9.8-34), 결국 그를 "욕하고"(9.28), 그를 "내어쫓아버린"(9.34) 눈 뜬 사람들의 비인간적인 시각을 예수는 혹독히 비판했다. 따라서 9장이 "논쟁이야기"라면, 그 논쟁은 고정관념에 관한 것이고, 그 논쟁을 통해 예수가 반박하려는 것도 고정관념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고정관념에는 사회적, 문화적, 지역적인 것 등 여러 종류가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인종적 고정관념이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형태 중 하나이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우월감이라든지, 또는 흑인에 대해 백인이나 아시아인이 갖는 우월감, 그리고 흑인이나 아시아인에 대해 백인이 갖는 근거 없는 우월감 등이 그런 종류에 속한다. 인종적 고정관념은 무엇보다도 '관념'을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관념을 사람보다 더 중시함으로써 파생된 역사상의 참혹한 수많은 경우들 가운데, 유대인들에 대한 히틀러의 대규모 학살이 가장 현저한 예가 될 것이다.

자그만치 육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쓰레기처럼 취급당하고 있었을 때, 세계는 일부 독일인들의 그 고정관념에 묵시적으로 동의하면서 침묵하고 있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유의 위대한 수호자였다. 그러나 그가 한번은 "왜 당신은, 각 방면에서 집단 가스 처형장으로 유대인들을 수송하기 위해 연결시켜 놓았던 철길들을 폭파하지 않았습니까?"하는 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하루에 꼬박꼬박 수천,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살해되어가고 있었던 그 내막을 루즈벨트 자신은 이미 상세히, 그리고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모른 척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유대인들의 절친한 친구라고 자처하면서 유대인들을 안심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가 다 남의 일처럼 보고 있었다. 아마 당시 유대인이 아닌 많은 사람들은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내가 유대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하며 어쩌면 감사의 기도까지 드렸을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유대인들, 죽을 짓을 했으니 죽었겠지"하는 냉혈 인간도 간혹 있다.

세계의 소극성, 무관심, 중립성이 그 살인자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원조가 됐다. 히틀러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사람들 가운데는 변호사, 철학자, 의사, 기타 각 분야의 박사들이 수없이 많았다. 심지어는 신학박사들도 대거 가담했다. 루드비히 뮐러 감독이라든지, 비텐베르크 신학대학 학장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히틀러에 열광적으로 동조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나치스 신학을 표방하고, 그 속에서 나치스 교회론, 나치스 기독론, 나치스 기독교 윤리 등을 세부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들은 구약성서를 유대인들의 책이라 해서 아예 인정하지 않았고, 신약성서도 그 안에 담긴 유대교적 요소는 모두 제거시키려고 애썼다. 물론 틸리히나 바르트 또는 본회퍼처럼 히틀러에 항거한 신학자들도 있었으나, 그 수는 그 살인을 직접, 간접으로 지원한 수에 비하면 대단히 미미한 것이었다. 철학분야에서도 야스퍼스와는 달리, 하이데거는 히틀러 지지쪽으로 선회했다.

어릴 때부터 독일의 작곡가, 바하와 베토벤과 브람스의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독일의 시인, 괴테와 피히테와 쉴러를 읽은 독일인들,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할 수 있는 강심장으로 돌변하게 했을까? 학살당한 희생자 육백만 명 중에 어린이가 백만 명이나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아무리 지독한 흉악범이라 해도 어린이 앞에서는 약해질 것이라고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어린이를 보면서 자기 속에 일부 남아 있는 어린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일반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 어린이의 경우는 완전히 달랐다. 유대인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그 살인자들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게 하지 못했다.

오래 전, 심장병에 걸린 두 명의 한국 어린이가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낸시 여사의 무릎에 안겨 미국으로 건너와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매스콤이 연일 보도했고, 잠시 온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두 어린이의 생명을 그다지도 귀하게 여겨준 미국에 감사했을 뿐 아니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자부심을 갖기까지 했다. 그러나 두 명이 아니라, 백만 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이 그것도 잔혹한 방법으로 죽어가는 데도 미국은 침묵했다. 아니,미국만이 침묵했다는 것은 공정한 평가가 아닐 것이다. 온 세계가 침묵했기 때문이다.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 가족들,오직 죽음 속에서나 다시 결합될 수 있는 수백만 가족들을 지켜보면서도 세계는 냉담했다. '석유'가 문제라면 전쟁도 불사하고 개입하겠지만, '사람'이 문제라면 뒷걸음질치고 외면하려는 것이 각국 외교 방향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집단 수용소에서 당시에 처형된 예후다 랑후수라는 유대인이, 죽기 전에 숨겨 두었던 쪽지가 최근에 발견되었다. 당시 그 참혹한 모습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반영한 이 쪽지는 우리를 전율시키고 있다. 나치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 중 하나이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보스톤 대학교의 엘리 위젤(Elli Wiesel)교수가 공개한 그 쪽지 중 일부를 소개하면 이러하다.


나는 첫 번째 수용소 가까이에 있는 뼈들로 가득한 무덤 안에 '추방'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숨겨 놓았다. 그리고 같은 건물 남서쪽에 널려 있는 뼈들 밑에다는 '아우슈비츠'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숨겨 놓았다. 나중에 그와 비슷한 글을 또 한번 다시 쓰고 또 보충해서 두 번째 수용소 쪽에 있는 뼈가루 속에 묻어 놓았다. 나는 나중에 이것들이 모두 발견되어 '살인자의 광란'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를 바란다. 우리 중 일부는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다. 이번에 끌려가는 그 그룹은 백칠십 명이다. 그들은 모두 발가벗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섯살 난 여자 어린이가 살인자의 명령에 따라 영문도 모르는 한 살된 자기 동생을 발가벗기면서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무서워하지마, 아마 괜찮을거야." 한 젊은 여인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결코 여기서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우리를 기억할 것이고, 우리를 영원히 살아 있게 할 것이다."…… 1944년 유월절, 프랑스 비텔에서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한 그룹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끌려왔다. 그 중 랍비, 렙 모이쉬프리드만이 끼어 있었다. 그는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너희 잔인한 살인자들아, 너희들이 유대민족을 완전히 말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유대인들은 영원히 살 것이다. 반면 너희 살인자들이야말로 지상의 영역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날짜가 가까이 왔다. 우리의 피가 그 심판을 위해 소리칠 것이다." 그가 소리치자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 후 그가 큰소리로 울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따라 울며 반복했다.


그 쪽지의 내용은 더 계속되나 여기서 줄인다. 아무튼 그의 증언에 따르면, 유럽 전역에서 끌려온 유대인들, 죽기 직전 빵 한 조각을 달라고 애걸하기도 했던 그들을 빵은커녕, 야비하게 때린 후 죽였다는 것이다. 무엇이 나치 살인자들을 이토록 잔혹하게 만들었을까? 다름아닌 유대인들에 대한 그들의 편견으로 고착된 생각이었다. 그래서 유대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편견을 제거하는 일이 원자를 쪼개는 일보다는 훨씬 더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의 상당한 부분이 크리스천들에게서 나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시킨 편견으로 가득 찬 일부 변질된 기독교 서적들이 유럽의 마을들과 도시들에서 읽혀지지 않았다면 그 집단 학살은 그 강도가 다소라도 누그러졌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유대인 처형의 책임을 크리스천들도 나누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은 세계 도처에서 지칠줄 모르고 노골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소위 '적극적 사고방식'을 주창한 노먼 빈센트 퍼얼 목사마저, 오늘날 세계가 맞고 있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위기들을 모두 유대인들의 조작과 책임으로 돌리려는 무지막지한 편견을 굳세게 지속시키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유대인들을 미화시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유대인들도 나름대로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특히 율법은 아직도 사람을 판정하는 그들의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는 바,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 역시 너그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인종적 편견 때문에 생명까지 살해하는 일은 그것이 어느 편에 의해 수행되든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의 가치는 그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로도 말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이나 행동은 당시 사회적으로 거의 의심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한 고정관념들을 깨뜨리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는 당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영접한 후, 어떤 종교적 교리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고정관념의 희생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예수는 사회적으로 주변 인생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았다. 예수와 그들 사이에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관이라는 장애물이 없었다. 그는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긴다.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그는 그들을 그냥 불쌍히 여겼다. 그들의 불행이 그들의 죄탓이라든지, 그들의 부모탓이라든지 하는 당시의 사회적인 고정관념(9.2)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했다. 무슨 뜻인가? 굶주린 사람들은 가치가 없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뜻이다.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에게 익숙하게 전해 내려오는 격언이 하나 있다. "구걸하는 거지들을 무시하지 말라, 하나님은 자신의 천사들을 거지들로 변모시켜 우리의 믿음을 시찰하신다."

예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요한복음서 9장 39절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들은 눈 먼 사람들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그 대칭적인 두 범주를 역전시켜 주었다. 눈 먼 사람은 보는 사람이 되고, 소위 본다는 사람은 그들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한, 눈 먼 사람이나 다름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적으로 무심코 통용되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해 예수는 이처럼 범주를 역전시키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선한 사람'의 범주에 속해 있었던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은 갑자기 나쁜 사람으로 격하되고, '나쁜 사람'의 범주에 속해 있었던 당시 사마리아인은 예수의 말씀에 의해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격상된다. 성서에는 이런 범주의 역전이 곳곳에 나온다. "먼저된 사람이 나중될 것이요, 나중된 사람이 먼저될 것이다." 또는 "누구든지 생명을 잃고자 하는 사람은 얻을 것이요,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다"하는 선언들 등은 모두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지금 가난한 사람, 지금 주린 사람, 지금 우는 사람이 복이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고, 배부를 것이고, 웃을 것이며, 대조적으로 지금 부요한 사람, 지금 배부른 사람, 지금 웃는 사람은 그 반대가 되리라는 선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이런 역전을 그의 시작에 빈번히 도입했다. "장미여,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릴케는 장미의 잎사귀 뒤에 숨겨져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봄으로써 장미에 대한 고정관념, 곧 '장미는 아름답다'는 식의 관념을 거부하고, 장미를 실존적인 고독과 불안의 범주 속에 예속시킨다. 고대 인도의 종교 서사시,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에서도 이러한 역전이 자주 소개된다. 거기서, 요가의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으나 깨어 있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깨어있는 것 같으나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정의가 아닌가 싶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고정관념에 무의식적으로 굴복하고 있기 때문에 여간 맑은 정신이 아니고는 거기서 벗어나온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다.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예수의 선언들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자칫 또 다른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기 쉽다. 가령, 예수가 당시 깨끗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던 바리새인을 위선자로 전락시키고, 당시 더러운 사람으로 인식되었던 세리를 선택된 사람으로 부각시켰을 때, 그 뜻은 바리새인은 원래부터 위선자이고 세리는 원래부터 선택된 사람이라는 것을 확정지어 주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의 그 선언은 바리새인은 무조건 깨끗한 것이라는 고정관념, 세리는 무조건 더러울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뜻이다. 이 점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예수의 선언은, 고정관념을 어렵게 깨뜨리고 나서 다시 새로운 고정관념을 하나 더 만들어낸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오해될 것이다.

요한복음서 9장도 소위 보는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과 소위 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예수의 선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의 위치를 역전시킴으로써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은 예수가 세상에 온 목적으로까지 천명된다(9.39).

더구나 9장 마지막 절이 결정타를 가한다. "차라리 눈이 멀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너희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41절). 예수의 이 선언은 소위 '본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사람들을 겨냥한다. 말을 바꾸면, 이 선언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오만한 편견과 편협한 판단과 뒤틀린 입장을 절대시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정확히 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경고이다. 사람과 대상 사이에 알게 모르게 들어와 자리잡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고정관념은 예나 지금이나 물리치기 가장 어려운 품목 중 하나일 것이다. 오직 생각과 마음이 자유로운 극소수의 큰 사람들만이 고정관념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 아니, 그 역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고정관념을 물리치는 사람들만이 큰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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