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아포라’(adiaphora)에 대하여
어떤 성도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이웃집에서 제사를 지낸 후 음식을 나누기 위해 떡을 정성껏 담아서 가져왔다. 이웃이 정으로 준 것이라 감사한 마음으로 받기는 했지만, 제사 음식임을 알고는 영 꺼림칙해서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경우를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었다.
이런 것이 아디아포라와 관련된 전형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성경에서 확실한 대답을 해주고 있다.
이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옳고 그름과 관련된 질문이다. 곧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사회의 문화 그리고 사물들에 대해 옳고 그름으로 판단이 되는 것인지? 그렇지 않고 판단이 유보되는 중립지대가 있는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규범에 관한 문제로서 먼저 성경적인 답변부터 제시하는 것이 논의를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독
교적 세계관에 있어 규범의 궁극적인 기준은 다음의 3가지를 전제로 한다.
첫째 ; 하나님 자신이 규범이다.
둘째 ; 하나님의 말씀이 규범이다.〔여기에는 자연과 역사를 통해 오는 말씀과 인격으로 오신 말씀(그리스도)이 포함된다.〕
셋째 ; 정경으로서의 성경이 규범이다.
곧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세상을 향한 가치 판단은 위의 3가지 기준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우리의 믿음의 전제 하에서(기독교적 세계관)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세상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우리는 위의 3가지 기준이 진리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이다.
이런 기준을 바탕으로 하여, 위의 질문에 대한 결론적인 기독교적 대답은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옳고 그른 것의 하나로 판단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적인 것, 곧 아디아포라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아디아포라적인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합니다.
1. ‘아디아포라’는 무엇인가?
가. 용어의 의미
용어적으로 ‘아디아포라’(adiaphora)는 “차이가 없음”, “무관함”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 옳지도 그르지도 않은 행위나, 성경이 권하지도 금하지도 않는 행위를 언급할 때 또는 도덕적 중립성에 관련된 것을 언급할 때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나. 아디아포라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
교부들 가운데서 이 용어는 고기를 먹는 것과 같은 행위에 적용되었는데, 그 자체로 옳지도 그르지도 않은 행위에 적용되었다.
- 종교개혁 기간에 루터는 이 용어를 로마의 예배 형식에 적용하였다. 그는 성경이 권하지도, 금하지도 않는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한 양심을 믿는 사람이라면 행할 수도 있다고 보았으나, 나중에는 개신교도가 로마 가톨릭 지도자가 제정한 교회 의식을 묵인할 수 있는가에 관한 논쟁으로 발전했다.
1930년대 말에 미국 장로교 안에 분열이 있었는데, 그 분열은 ‘기독교인의 자유’와 일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성경이 완전한 금주를 요구하는가 아니면 알콜 사용이 아디아포라인가’와 같은 것이었다.
다. ‘아디아포라’의 용어상의 문제점
한 마디로 아디아포라는 모호하며 오해하기 쉬운 개념이다. ‘아디아포라’는 헬라어로 중성 복수이다. 이 단어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1) “무관한 사물”(indifferent)을 나타내며 일반적으로 ‘사물’에 관해 말할 때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고리, 탁자, 의자와 같은 사물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사물들’을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창조물이 모두 좋다고 한 말씀에 배치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사물에 대해 좋은 것과 나쁜 것 또는 무관한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창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
딤전4:4,5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2) 인간의 행위와 관련하여 옳지도 그르지도 않은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성경의 말씀과 배치된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무관한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에 있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적 행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인간의 행동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좋거나 나쁘다고 평가받는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지 않은 행위는 잘못된 것으로 평가받게 된다는 것이다.
롬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은 모든 것이 죄니라” → 우리의 행위가 믿음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에게 정죄의 대상이지 중립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 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이 문제야 말로 소위 신앙 좋다는 그리스도인이 걸려넘어지기 가장 쉬운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우리의 행위나 말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일지라도 그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 분의 힘을 입지 않고 행해질 때 곧 나의 열심과 나의 자아로 행해질 때 그것은 영적으로 전혀 무가치할 뿐 아니라, 또한 좋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3) 성경에서 옳고 그름을 말씀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을 ‘아디아포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잘못된 성경 이해로서 성경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해 말씀하시며 어떤 것에 대해서도 침묵하지 않는다. 바로 2)항의 고전10:31 말씀과 롬14:23이 이를 다루는 중요한 말씀이다.
4) 루터교 신학자 로버트 프레우스(Robert Preus)는 아디아포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 자체로는 도덕적으로 옳지도 그르지도 않고 기독교인의 자유의 문제인 행위나 교회의 의례이다”
이런 정의는 ‘아디아포라’ 그 자체에 관한 용어 정의로는 옳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이라는 수정구를 유의해야 한다. 이는 이런 행위가 어떤 상황에서는 옳고 그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디아포라’나 ‘옳지도 그르지도 않은’이라는 구절을 사용하여 이런 사실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런 부류에 들어가는 행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옳거나 그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아디아포라’는 다양한 개념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도덕적 중립성이라는 의미는 매우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그런 중립성을 거부한다.
2. 아디아포라의 유용성
아디아포라라는 개념이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또 도덕적 중립성을 의미하는 경우는 매우 비성경적인 개념으로서 성경의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디아포라라는 개념은 기독교인이 인간의 종교적, 윤리적 율법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표현하는데는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물론 성경은 인간에게 윤리적 기준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위해 인간의 법에 순종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러한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권위는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계시와 상충될 때는 도전받아야 한다.
벧전2:13-16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順服)하되 ~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3. 성경의 사례
<로마서에 나타나는 사례 ; 먹는 것과 절기의 문제 (롬14:1-15:13)>
- 문제점 ; 교회 안에서 먹는 것과 절기와 같은 문제로 인해 한 무리에게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고, 다른 한 무리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14:2절 ; 강한 사람은 모든 것을 먹고 약한 사람은 채식만 한다.
5절 ; 어떤 사람은 특별한 날을 존중하며 또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문제는 무리가 서로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약한 자는 강한 자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강한 자는 약한 자에게 영향을 주어서 그가 죄를 짓도록 만들게 되며, 약한 자는 자신의 양심을 거스리게 됨으로서 결과적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 문제의 해결 ;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강한 자의 입장에 선다. 즉 말씀의 진리를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권면함으로써 강한 자의 입장이 약한 자를 이겨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4: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 할 것이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강한 자나 약한 자나 서로를 멸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형제로 대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서로의 모순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4:3절 이하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 ”
14:17 이하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
- 결론 ; 여기서 바울은 아디아포라에 관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해 주고 있다.
14:6절에서 바울은 겉으로 보면 양측이 다 옳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 먹는 자도(강한 자)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약한 자)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따라서 이것이 형식적으로는 아디아포라의 형식을 띄고 있다.
그러나 그 말씀에 “주를 위하여”라는 전제 조건이 따르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곧 이 말은 우리의 모든 행위가 “주 하나님 아래”에서 믿음으로 행해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따라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날이나 음식과 먹는 것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권위 있게 가르칠 수 있으며 결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고전 8-10장 ; 이방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문제 >
- 문제점 ; 시장에서 이방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 팔리고 있다. 이는 당시 고린도 교인으로서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상숭배에 관한 문제가 발생했다.
먼저,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바울이 우상숭배를 특히 먹고 마시는 것과 연관해서 강하게 정죄하고 있으며(10:1-22), 또한 주님의 만찬에서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과 비슷하게 희생물에 참여함으로써 demon과 성례적으로 연합할 수 있을 가능성에 관해 경고하고 있다는 것이다.(10:16-21, 11:27-34 참조) 이를 전제로 이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과 관련해 교회 안에서 로마서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한 무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이들은 지식이 없었고 약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1, 7, 9, 10-12절), 또 다른 무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 다툼이 있었다.
- 해결책 ; 바울의 해결책은 역시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강한 자가 옳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4절 이하),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이시기 때문이다.
8: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그러나 여기서 정말 중요한 점은 우리가 먹는 일과 같은 것에 있어 demon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행위에 대해 권위를 가지신다. 따라서 이런 것이 ‘아디아포라’ 곧 ‘무관심’이나 ‘중립’의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는다면 그 행위는 선하다.(10:31)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먹는다면 그것은 결국 악마와 동맹을 맺는 셈이다. 그것은 음식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 때문이다.
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4. 결론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러나 이런 지식(yada)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야다'의 지식이 없이 흉내내는 것은 어리석고 위선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우리는 양심을 위반해서 행하지 않아야 하며, 자신의 행위로 인해서 다른 형제에게 거치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또한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을 멸시할 권리도 우리에겐 없다.
중요한 것은 피조물이 아니라 나의 행위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위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행하느냐!, 그리고 옆으로는 형제에 대한 참 사랑으로 행하느냐 !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 지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아디아포라가 있을 수 있지만, '나의 그것'이 하나님에게 무엇이냐? 하는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잘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직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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