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신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
A Critical Analysis on Postmodern Understandings
of the Concept of God
I. 서론
포스트모던 신론에 대한 분석 비평의 우선적인 목적은 포스트모던 변증학적 신론을 후속적으로 제기하기 위한 것이다. 새 시대에 새로운 술을 새 부대에 담을 준비를 하기 위한 전초전(preliminary)으로서 포스트모던 신론에 대한 한계성과 문제점을 살피는 것이 주된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사실상 편안하고 당당한 신학적 시도라기보다는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전통적인 기독교 진리의 타당성을 전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신앙 공통체 안에서 이런 주제를 다루는 것은 벼랑 끝에서 곡예를 하는 것과 같은 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포스트모던의 사상적 내용이 논리적 정교함과 복잡성을 가지고 자리를 잡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벽 꼭대기에서 떨어질 위험이 있는 아슬아슬한 시도이기 때문에, 그저 멀리서 팔짱을 끼고 현대주의(modernism)의 이성중심적 오만(arrogancy of logocentrism)과 포스트모던의 과도한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 시도를 관망만 한다는 것도 왠지 올바른 태도라고 보여지지는 않는 것 같다. 이미 서양에서는 일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고, 지속적으로 벼랑 끝에서 씨름을 해야하는 힘든 노고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포스트모던의 흐름은 뿔이 달린 이상한 괴물의 움직임과 같은 적그리스도적(anti-Christ) 횡포라고 보기는 아직 어렵다. 역사-시대적(epochal) 입장과 사상적 조류의 맥락에서 볼 때, 포스트모던 사상의 흐름은 현대의 한계성을 디디고 일어서는 새로운 시대적 조류이며, 구습과 모순된 것들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으려고 몸부림치는 사상적 표출(emerging)인 것이다. 현대주의가 기독교에 아픔과 고마움을 함께 제공하듯이, 포스트모던의 사상적 내용도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한 면에서 포스트모던의 흐름을 무조건 거부해서도 문제이고, 여과 없이 수용하는 것도 아픔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신에 대한 이해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시대에 따라서 신의 옷은 다양하게 입고 여러 사람들에게 접근하였다. 신은 다양한 옷을 입으면서 신의 정체성 혹은 속성(attributes of God)을 더욱 잘 나타내 보임으로서 교회의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 기독교는 아픈 도전을 받았고, 포스트모던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변증적(neo-apologetics) 시도 없이는 기독교의 존재의 위기까지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서구 전통에서는 교회 성장이 정지한 상태이거나 퇴보하는 상태이고, 그의 결정적인 원인은 현대주의(modernism)의 도전에 대한 변증이 분명한 효과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모던 사상의 도전도 지구촌의 교회성장에 치명적인 장애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며, 이에 대한 심도 있는 변증학적 신학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에도 나타나기 시작했고,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실제적이고 적극적인 기독교 변증학이 없이는 전통적인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대주의의 도전은 인본주의와 이성중심주의에 입각한 신존재에 대한 도전이다. 신은 심리학적 환상(psychological illusion), 사회학적 산물(sociological outcome),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간의 마음의 투영(projection of human quality), 세상에는 물질만 있다고 믿는 유물론 사상(materialism), 그리고 신의 죽음까지 선언한 도전들이 있다. 신의 죽음은 사실상 기독교 신학자들 가운데에서 사신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높혔고, 포스트모던 해체주의 신론으로 연장 발전되었다.
이러한 현대주의의 도전에 대하여 복음주의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본주의, 이성중심주의, 언어적 형식주의에 대한 도전이 대표적인 것들로서 인간-우주론적 접근, 이성과 감성이 통합되는 성향, 언어적 형식주의를 넘어서는 탈형식주의 혹은 탈구조주의와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다시 기독교에 도전적인 것들로 나타나고 있다. 현대와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전이과정(epochal transition)에서 기독교의 변증을 다루는 차원에서 포스트모던 신론에 대하여 분석 비평을 시도하고자 한다.
본 논고의 범위는 포스트모던의 배경이 되는 현대주의와 현대주의가 기독교에 도전한 것과 포스트모던 사상의 도전을 비평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특히 포스트모던 맥락에서 제기되고 있는 신론에 대한 문제를 분석하고 비평하고자 한다. 따라서 내용의 구조는 첫째로 포스트모던 사상의 배경이 되는 현대주의의 핵심사상과 도전을 분석하고 그 오류를 비평적으로 지적하며, 둘째로 포스트모던 사상의 대표인 해체주의, 인간-우주론적(anthropocosmic) 형이상학, 등의 도전을 분석하고 오류를 비평적으로 언급하며, 셋째로 기독교 신론의 가능성을 변증학적으로 전개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리의 전개에서 기독교 사상의 중심적인 내용인 신론을 염두 해 두고 전개할 것이다.
II. 포스트모더니즘의 배경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이후시대의 사상적 흐름이라는 말로서 포스트모던의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현대주의이다. 그리고 현대주의의 핵심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과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런 사상의 시작은 합리주의의 선구자인 데카르트(Rene Descartes)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세상의 궁극적 실체를 객관적 실재(objective reality)와 형상적 실재(formal reality)로서 이원론적으로 보았고, 객관적 실재는 몸(res extensa)에 해당되는 것이며, 주관적 실재는 마음(res congitans)으로서 생각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몸과 마음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는 피조된 실체적(substance) 존재이다. 피조되지 않은 것은 오직 스스로 존재하는 신만이 자존적 존재로서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rationalism)는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습득을 위해서는 회의주의(skepticism)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떤 지식을 안다는 것은 회의적인 것을 넘어서야 진정으로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감각에 의해서 기만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악한 존재가 매순간마다 기만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든지,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게 되고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의심하고 있는 주체적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의심하는 주체적 존재는 바로 생각하고 있는 나로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유명한 명제가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의심하는 주체로서 회의적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것이다. 사고의 주체를 우선적 진리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고하는 주체이며, 인간을 자율적인 합리적 주체로 보았던 것이다.
이성을 중요시하는 합리주의는 과학적 세계에서도 발전하였다. 뉴톤(Isaac Newton)이 제공한 과학적 세계관은 인간의 마음은 세상의 법칙과 규칙성을 터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사고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과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과학적 지식을 폭발적으로 얻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우주의 비밀을 캐내고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자연에 대한 정복을 시도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지식은 좋은 것이고, 확실하고, 옳은 것이며, 객관적인 것이고, 인간이 이론적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현대주의는 사고의 주체인 "나"를 믿는 개인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궁극적인 도덕적 기준은 자아에서 형성된(self-generated) 가치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도덕적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도 인간 자신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현대주의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합리주의의 산물인 계몽주의의 유산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autonomy of human reason)과 인간의 권리(human rights) 그리고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equal society)의 실현을 위한 노력들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계몽주의는 기술문명의 발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사회의 발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계몽주의의 영향은 인간의 이성과 마음을 최상으로 중요시하면서, 외적인 세상에 대해서 정복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대주의에 입각한 세속주의(secularism)는 기독교에 대한 도전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네 가지만 간추려서 정리하고자 한다. 세속주의정신의 대표적인 것은 첫째로, 현대주의의 특징인 인간의 자율성(autonomy)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며, 역사는 인간의 자율적 행위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로, 일시성(temporality)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의 기반을 시간으로 보는 것이며, 세상은 시간 안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셋째로, 세상은 주어진 세계자체를 초월할 수 없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는 상대적(relativity)인 것이다. 역사주의라는 것도 결국 상대주의(relativism)의 산물로 보는 것이다. 사회 정치적 구조와 사상이 그 시대를 결정하는 것이다. 넷째로, 세상을 우연적(contingency)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세상은 원인과 결과의 원리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우연히(accidental) 생겨난 것이다. 세상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무질서하고, 비합리적이며,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역사의 산물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주의적 세속주의 사상은 기독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도전하고 있다. 첫째로,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한 세속주의는 신을 믿으려고 하는 것은 병리학적(pathological) 현상이라는 견해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병든 사람이 무엇이라도 잡아보려고 하는 것처럼 심리적 위축감과 불안감에서 기인한 종교적 현상으로서 종교행위는 보편적인 정신 질환적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정신병리학적 이상을 가지고 있는 징표로 보는 견해이다. 정상적인 인간은 종교가 필요하지 않다는 인간중심주의적 입장이다.
둘째로 신을 믿는 것은 미신(superstition)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보는 견해이다. 종교라는 것은 문명의 발달이 미숙한 유아기에 필요했던 것이지, 이제 성숙한 문명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더 이상 종교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성숙한 문명의 세계에서 신을 믿는 것은 미신적 행위로 보는 것이다. 언어적 틀과 의미의 원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셋째로 종교적 명제는 비지성적(unintelligible)이라는 것이다. 분석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주장하는 것으로서 종교적 주장은 인식론적 가치가 없다(no cognitive value)고 보는 것이다.
넷째로 기독교 유신론은 세상의 악의 문제(problem of evil)와 대치되는 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악이 존재하는 것은 신은 전능하고 모든 것을 선으로 인도한다는 말과 대치되는 것이다. 잭 엘룰(Jacques Ellul)은 기독교 이후시대(post Christian era)는 세속주의 시대라고 보고 있으며, 사회는 더 이상 종교적이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도전들에 대해서 기독교는 변증학적 대응을 보면, 앤드류 그릴리(Andrew Greeley)는 성스러움(sacred)의 도래는 끊임없이 현실화되는 것으로 믿고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와 종교적 기능은 후기빙하기(late Ice age) 이후에 변한 적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화론이나 사회주의나 역사주의는 궁극적으로는 성공적이라고 볼 수 없지만, 종교와 현대는 결국 조화를 이루게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분석철학이나 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종교언어의 무의미성 문제는 상징 은유 기호 언어게임 등으로 극복될 수 있는 문제이다. 악의 존재의 문제는 신의 창조질서의 원리에서 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질서와 무질서, 가라지와 알곡이 공존하는 것이며,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같이 존재하는 것이다. 악의 존재는 더 근본적인 조화와 선의 조건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III.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사실상 현대주의의 도전에 대한 반응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공헌과 가치를 부분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성중심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구조주의의 문제점을 공격하고 인간중심주의를 배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맹렬한 공세를 기독교적인 측면에서도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성이 주도하는 진리의 세계관은 감성과 직관의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이고, 사람중심의 우주관은 자연과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사상의 대표적인 것은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로서, 그것의 핵심적인 내용은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언급하고 있는 언어적 기능주의(linguistic functionalism)에 대한 도전이다. 언어적 문법을 중심으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기존의 언어적 틀을 해체하고 새로운 맥락과 조건에 따라서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체주의는 "구조주의"(structuralism)를 비평하면서 표출된 것이다. 구조주의라는 것은 모든 사회와 문화는 변함이 없는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혹은 선사유적(pre-reflectively)으로 불변의 관계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의미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고, 무의미한 세상에서 의미를 구조주의적인 차원에서 찾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사물에 대한 경험을 하면, 그 경험에 대한 의미는 문학적 구조에 나타나는 범주와 개념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주의를 부정한 후기구조주의(post-structuralism)는 해체주의로서, 의미가 텍스트의 구조 속에 있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의미는 텍스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사람이 텍스트를 만나서 대화를 하게 되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결국 의미라는 것은 텍스트를 읽는 사람의 견해(perspective)에 따라서 형성되는 것이며, 해석자가 여러 사람으로서 견해가 다양하다면, 의미도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는 읽는 사람의 견해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론이 우주 존재론에도 적용이 되면서, 사물의 이해는 그 사물을 해석하는 자의 견해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데리다는 실재에 대한 존재론적 묘사와 "현존의 형이상학(metaphysics of presence)"을 부정하였다. 왜냐하면 실재의 세계에서는 초월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인간이 알아 가는 과정 속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실재를 해석하는 사람의 견해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데리다에 있어서 세 가지 개념이 중요하다. 차이(differance), 공간(spacing), 그리고 보완(supplement)이다. 차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차이의 개념과 차이가 있다. 언어의 의미는 표현된 것(signified)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의미라는 것이다. 공간이란 완전히 없는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공간으로서 부정된 현존(negated presence)과 같은 것이며, 말없는 상태에서 의미가 서려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보완이란 본래의 텍스트의 일차언어에서 빠트린 것이나 불충분한 것을 보완하는 해석이나 묘사로서 신학적 작업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서양의 기독교 신의 개념은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에서 기인한 것이며, 신학의 주제가 되는 신적인 언어(divine word)나 인간의 언어(human speech)는 인간학적 주제(the subject matter of anthropology)로서 초월적 신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초월적으로 표현된 (transcendental signified)것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서 그리스-기독교(Graeco-Christian God) 신이 허구의 신에 지나지 않는다는데 까지 주장하고 있다.
푸코(Michel Foucault)는 구조주의를 그의 철학에 적용하면서 언어의 질서(order of words)가 사물의 질서(order of things)보다 중요하게 철학과 세상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모든 이론적 학문은 그 안에 서려있는 인간주의(humanism)를 제거하고, 한 시대의 언어 안에 담겨져 있으면서 어떤 정해진 주체가 없는(without a subject) 익명의 사상적 시스템(anonymous system of thought)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저자가 전해주는 의미는 맥락이 변하면서 찾을 수가 없는 것이며, 객관적인 의미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고, 결국 저자의 죽음(death of the author)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식에 근거한 모든 주장은 힘(power)의 사용의 결과로 보면서, 모든 해석은 힘의 원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사회적 기관들은 자신의 이해를 강요하고 있으며 사실상 폭력적인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결국 언어 속에서 힘을 사용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주의을 제거하고, 익명의 사상적 시스템을 알아가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는 전통적인 진리론을 부정하였다. 세상에는 완벽한 설명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고, 다만 설명하는 사람이 주어진 맥락에서 설명하는 것이 맥락에 맞는 것뿐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형이상학적으로 일어난 철학적 전제에 의한 진리의 명제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통상적인 진리론에 있어서 객관성에 근거한 상응론(correspondence theory)과 내적 부합성에 근거한 부합론(coherence theory)를 부정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나 언어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며, 어떤 선험적인 전제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언어 속에 담겨있는 진리는 근본적인 신뢰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적 이해를 통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작업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해체하고, 해석하는 작업에만 충실하자고 주장하였다. 진리를 발견하는 작업보다는 지속적인 대화(conversation)와 해석을 모색한다는 차원에서 조직철학 대신에 교화철학(edifying philosophy)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의 유기체적 철학은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 우주론적 접근을 하는 포스트모던 사상이다. 인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우주의 궁극적 실체는 과정(process)으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고 있는(be-ing) 것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실체론(substance)이 과정론으로 변한 것이다. 이 과정철학에는 이러한 우주를 운행하는 원초적 본질(primordial nature)을 가지고 있는 신과 우주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참여하여서 관행하는 결과적 본질(consequent nature)을 가지고 있는 신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 사상가들의 주장은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다르며, 중심이나 기준이 없고, 일치된 것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객관적 일치성이나 부합성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지식을 더 이상 좋다고 볼 수 없는 것이며, 진리가 확실하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믿었던 현대주의의 세계관을 무시하고 전체주의(wholism)를 따르는 것이다. 객관적인 지식을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지식은 상대적이고 비결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식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 없으며,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문화적으로 중립적이라는 입장이다. 진리의 경험은 지속적인 해석에서 경험하는 것이고, 인간이 참여하고있는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공동체의 번영을 위한 기능적인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감성과 직관에 의해서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의 상대성을 따르는 것이며, 초문화적이고, 보편적이며, 항구적인 진리의 세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들떠보려고 노력을 해도 결국에는 헛수고라는 주장이다.
보편적 진리로서 도 혹은 태극이나 천리의 개념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동양 철학의 근본적인 자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도나 천리를 허구의 개념으로 몰아 부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구조주의의 문제점 때문에 단번에 보편적 진리의 세계를 버리는 것은 성급한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의 보편적인 질서와 원리는 실제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던 사상에서 우주의 근원적 데이터(original data)를 부정하고, 세상의 이치와 기존의 의미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말 자체도 거짓말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논리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을 묵살시키기에는 너무 성급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의 횡포(tyranny of language)는 사실상 현실적으로 완전하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그의 논리적 모순을 극복하기는 힘든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실존적인 면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존적으로 볼 때에 인간의 성품으로서 정(情)이 존재하는 것이고, 정이라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계에서 자연적으로 형성(氣質之性, existential nature)되는 실제적인 현상이다. 인간의 본질적인 면을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본연지성(本然之性, essential nature)은 회복해야하는 것으로서 성(性)은 존재론적 존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있다(being)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포스트모던 사상 측면에서 과연 정이나 성에 대한 언급을 힘의 행위(act of power)라고만 볼 수 있는 것인가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인본주의를 제거하는 것은 성리학과 포스트모던의 사상이 만날 수 있는 긍정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면이다. 왜냐하면 성리학에서 인욕(人慾)을 버리고 천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인본주의적인 것을 넘어서 근본적인 우주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인본주의를 지양하려고 하는 것은 서로 긍정적인 대화의 길이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인위적인 기질을 버리고 본질적인 성을 추구하는 것에서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윤색되지 않은 근본적인 원리를 모색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탈세속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고상한 성인 군자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바른 삶을 모색하는 것이다. 인본주의를 지양한다는 것은 인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한다면 인간의 이성과 인간적 범주를 넘어서는 이해는 어려워지기 때문인 것이다. 성리학이든 포스트모던 사상이든 간에 인간 중심적인 것을 넘어선다는 것은 기독교에 도전적인 인본주의 사상을 넘어서 복음의 시대적 수용성에 도움이 되는 면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신학은 무신학적 신학으로서 신학적 타당성과 신학의 목적인 분명하지 않은 어려운 점이 있으며, 텍스트를 부정하는 어려운 도전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
IV. 포스트모던 신론
포스트모던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신학적 작업은 이루어지고 있고, 그러한 신학적 작업 속에서 포스트모던 신론은 대체적으로 해체주의적 신론, 과정신학적 신론, 해방신학적 신론, 다원주의적 신론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해체주의적 신론은 구조주의의 모순을 넘어서 전통적인 신학적 구조를 무너뜨리고 무신학적 신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과정신학적 신론은 인간중심주의를 넘에서 인간우주론적(anthropocosmic) 접근을 시도하는 포스트모던 신론이다. 해방신학적 신론은 인간의 자율성과 개인주의를 중심으로 한 현대주의 신학을 넘어서 공동체적인 악의 이해와 해결을 다루는 차원에서 포스트모던 신론이 된다고 본다. 다원주의적 신론은 견해주의에 입각한 맥락과 여건에 따라서 형성되는 신학적 이론에 의해서 나타나는 신론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신론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고 비평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포스트모던 신론중에서 해체주의의 신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해체주의 신론은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니체(F. Nietzsche), 올타이저(Thomas J. Altizer), 테일러(Mark C. Taylor)의 생각에서 해체주의적 신론을 발견할 수 있는 정도로 보인다. 이중에서 포스트모던 해체주의 신론의 대표적인 것은 테일러(Mark C. Taylor)가 주장하고 있는 무신학적 신론이다. 테일러의 신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이론의 배경이 되는 생각들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포스트모던의 대표적인 사상인 해체주의의 선구자는 니체로 알려져 있다. 현대 해체주의 신학자 테일러는 데리다를 연구하엿고, 데리다는 니체를 연구하였기 때문이며, 그러한 면에서 니체의 도전을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니체의 인식론적 접근은 일단 견해주의(perspectivism)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과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니체는 세상에 존재하는 고전(the classics)은 원전(original text)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에서 니체의 언어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이 시작되었다. 각 종교의 텍스트는 여러 텍스트 조각들이 모여서 된 것이며, 경전으로 채택되는 과정은 역사연구와 원문 비평 그리고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해서 논의한 결과로 경전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원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입장이다.
존재론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니체는 같은 맥락에서 생각하고 있다. 실재(reality)의 세계에도 실재를 형성하는 원초적 자료(original datum)나 순수존재(pure being)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이데아(idea)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신(gods)도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사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끊임없이 무질서하게 흘러가는(chaotic flux) 것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언어의 의미는 맥락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지적(willful) 견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언어는 인간을 규제하는 것으로 보고, 그러한 규제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을 모색하면서, 니체가 결국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초월적 가능성을 보고 전통적으로 인간의 삶을 저지하는 언어나 종교적인 것을 거부하고 초인적(the superman, der bermensch) 사상을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 이 초월적 인간은 인간의 억압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초월적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으며, 인간이 초월적 존재의 모습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신의 죽음(the death of God)을 선포하였다. 니체가 주장하고 있는 신의 죽음에 대한 선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한 것이 사실이지만, 일반적으로 니체가 주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선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인간의 제한하고 횡포를 부리는 종교 역사 정치 도덕 종교 텍스트의 권위라는 것에 대한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을 진정으로 자유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자유론 즉 인간을 자유 하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바울의 탈율법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니체가 이해하고 있는 신은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신이며, 결국에는 짜라투스트라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신을 죽인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에 니체는 옳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존재가 아니며,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기독교의 신을 이용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회 심리학적 현상에서 비본래적인 색채로 윤색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을 니체가 잘못 이해한 것이다. 죄는 날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 중에 하나이다. 죄란 알려진 법에 대한 의도적인 거역으로서(hamrtia)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타난 죄의 행위는 그러한 이기적 속성에 의해서 나타난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니체와 사신 신학자들의 소신은 신의 개념의 정당성이 없기 때문에 엉뚱한 곳이나 허공을 예배하는 오류를 피하자는 것이다. 이들이 가지고 온 결과는 신학적 허무주의(theological nihilism)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이 존재하는 한 신앙을 해석하는 신학은 없을 수 없는 것이며, 신앙이 허무하지 않는 한 신학을 허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올타이저는 포스트모던 신학자이지만, 자신은 신학이 이루어지는 것은 전적으로 현대적인 것이지 포스트모던 적인 차원에서는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그의 입장을 묘사하고 있다. 중세신학의 재해석이나 교부신학의 재정립의 시도로서 현대 신학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순수한 차원에서 포스트모던 신학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물론 올타이저는 신의 세속화는 우리의 현실이고 결국 신의 죽음에서 신학을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올타이저의 신학은 포스트모던 신학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올타이저의 입장에서 보면 자아(self)에 대한 서양의 개념은 개인적이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되는 현상으로 발전되었다. 자아의 개념이 왜곡되면서 신에 대한 이해도 자아에서 멀어진 것으로서 다른 존재(Wholly Other)가 된 것이고, 결국 인간에게서 사라져버린(vanished)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올타이저는 여기서 끝을 내지 않고, 신의 전적인 현존(total presence)을 주장하고 있다. 역사는 변증법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인에서 공동체로 부재에서 현존으로 흐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신은 다른 자아(Wholly Other)가 아니라 전적 현존으로서 경험적인 차원에서 존재론적인 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테일러의 무신학적 신론은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이론을 기독교 신학에 적옹해서 해체주의 신학을 시도한 것이다. 테일러에게 있어서 네 가지 개념이 중요하게 거론되고 있는데, 그것은 서양의 신학적 전통에서 긴요하게 논의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하나님으로서 기록(God becomes writing), 흔적으로서의 자아(self becomes trace), 모순으로서의 역사(history becomes erring), 텍스트로서 책(book becomes text)을 언급하고 있다. 자아는 정체성이 없이 자유롭게 흘러가면서 흔적을 남기는 것이 진정한 자아이며, 무시간적(anachronism) 방황을 하는 역사가 제한성을 넘어선 진정한 역사이고, 고정된 책은 덮어버려야 아직 의미가 정해지지 않은 열린 텍스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의미는 여러 가지 텍스트의 사이공간에서 발견되는 것인데,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견해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면서도 안 존재하지 않은 비존재론적 신론을 다루는 무신학적 신학 혹은 신의 죽음의 신학이라는 테일러의 신론이다.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긍정하는 것도 아닌 새로운 종교관의 세계를 열어주는 생각의 세계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넘어선 것에 관심을 갖게 하는 신학적 작업이다.
신의 죽음은 신의 개념에 대한 재해석의 길을 연 급진적인 기독론적 접근을 해야 이해할 수 있다는 테일러의 입장이다. 하나님은 기록(God as writing)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나타났으며, 말씀은 기록으로 읽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성서를 모든 존재와 비존재의 비원초적 근원(non-original origin)이 된다는 차원에서 기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말씀이 생성하고 파괴하는 놀이(play) 안에서 묘사되는 것이다. 이러 방법으로 이해될 때에 기록은 신적인 여건(the Divine milieu)으로 읽혀지는 것이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기록은 말씀을 뿌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록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러 텍스트들(intertextuality) 사이에서 서로 의미를 제공하고 받는 가운데 신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신학적인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계시나 텍스트를 통한 절대적인 대답이나 해결책은 없는 것이고, 끊임없는 모순 속에서 종교성을 상대적으로 발견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둘째로 포스트모던의 대표적인 신론은 화이트헤드적(Whiteheadian)의 유기체적 철학을 바탕으로한 범재신론(panentheism)이다. 즉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하고 모든 것은 신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중심주의에서 인간우주론으로 변화된 포스트모던의 접근 양상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흐름이 과연 종교적인 신론이냐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에는 형이상학적 신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화이트헤드는 세상에 존재하는 궁극적 실체(reality)는 무엇이 되어 가는 과정(process)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고, 그의 유기체적 형이상학(philosophy of organism)을 전개해가고 있다. 각 사실적 객체(actual entity)는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가장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한 객체가 다른 것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의 수는 무한하다. 그 중에서 결정적으로 한가지 가능성을 향해 변화되고, 나머지 가능성은 변화되는 순간에 소멸되어 버린다. 그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envisionment of infinite possibilities)하는 것이 바로 신이며, 원초적인 차원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존재이다.
세상의 사실적 실체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제한성은 가능성을 전제한 것이다. 가능성 속에 제한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적 실체가 무한한 가능성에서 구체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제한된 상태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한의 원리(principle of limitation)도 신이 되는 것이다. 우주의 다양한 데이터들이 흘러가면서 합성이 이루어지는데, 그러한 합성원리(principle of concrescence)가 또한 신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 포스트모던의 신론은 중남미 정치 경제적인 억압 속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 해방신학적 신론이다. 해방신학의 신론을 포스트모던으로 보는 이유는 사회구조적으로 비인간화되는 상황에서 삶의 조건에 대한 공동체적 개선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모색한다는 차원에서다. 여성의 평등을 주장하는 시대적 흐름도 포스트모던의 양상이며, 이러한 흐름에서 여성신학의 신론도 포스트모던 신론이 되는 것이다. 유럽중심주의에서 아시아의 가능성이 표출되면서 아시아의 응용신학도 포스트모던의 신학이 되는 것이다.
사회정치 경제적으로 억압을 받는 사람을 해방시키는 실제적인 하나님을 해방신학은 주장하고 있다. 사람 같은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를 선포하고,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되는지 의미를 알 수 가 없다는 것이다. 인위적 사회구조 속에서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눌린자의 하나님을 주장하고 있다.
넷째로 포스트모던 신론은 다원주의적 신론이다. 불교의 공(空)은 궁극적 실체이며, 만물의 기반으로 기독교의 신과 만나서 서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입장을 가지는 것이 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태극을 비결정적 기반으로 비교하여 생각하고, 그들을 신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동양철학의 우주의 근원적 존재는 태극(太極)으로서 주역(周易)에서 태극을 창조주적 존재로 보았고, 이것이 포스트모던 다원주의적인 비교종교철학에서 대두되고 있는 내용이다. 신은 한 가지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신에 대한 다원주의적인 이해가 타당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V. 포스트모던 신론의 문제점
현대주의의 모순을 넘어서 포스트모던 사상은 급진적인 양상을 띠고 허겁지겁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주랭낭(escape)을 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성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현대를 탈출하고 보자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결국 현대를 완전하게 넘어설(no counter-modernism)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흐름에는 뛰어넘는 것(skip)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역사란 과거를 조건적 요소로 해서 새시대의 본질적 모습을 이루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을 완전하게 버릴 수는 없는 것이고, 감성과 직관이 같이 모여서 살아야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정확한 방향도 변변히 설정하지 않고 일단 현대주의의 잘못된 수렁에서 뛰쳐나오고 보자는 생각으로 차있지만, 사실상 현대를 완전하게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는 면이 있다. 포스트모던 사상은 견고하게 정립이 된 상태가 아니며,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고, 또한 다원주의적인 차원에서도 한계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포스트모던 사상에서 신학적 이론을 전개하고 신론을 세우려고 하는 것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로 현대주의의 언어의 횡포와 구조주의의 한계를 지적하였지만, 포스트모던 사상은 사실상 언어는 인간의 주관성(human subjectivity)을 전달(convey)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해체주의의 선구자인 니체가 언어적 횡포를 무참하게 난도질을 하면서 언어가 기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로고스(logos)를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위험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이 거짓말이면 로고스도 거짓말 일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위험한 시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인간의 주관성을 담을 수 있는 것이고, 더욱이 로고스는 인간이 주관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주관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횡포에 의한 인간의 삶의 왜곡에 대해서 심각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언어는 인간의 주관성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언어는 사실적 현상을 기계적으로 묘사해서 전달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것을 지시하고, 이름을 짖기도 하는 일반적인 언어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객관적인 언어의 기능에서는 그러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객관적 언어는 초월적인 종교적 현상을 묘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고스의 가능성은 언어게임 상징 은유 모델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주관성을 담을 수 있는 것이고, 영적 주관성(spiritual subjectivity)과 역동성(dynamics)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기호로서 텍스트 언어 자체가 인간의 삶을 안내하고 신앙적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포스트모던 신론의 문제점은 영성의 부재이다. 신의 속성 중에서 절대적 속성의 일차적 내용은 영성이다. 존재론적 영성이든 의식론적 영성이든 변증법적으로 경험되는 영성이든 간에 포스트모던 신론에는 영성의 부재가 종교적 신론을 구성하는데 결정적인 문제가 된다. 우주의 합성원리는 형이상학적 원리이지 영적 존재가 아니다. 무신학적 신은 영적인 면을 어떻게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해방자 하나님은 정치적 경제적 하나님이지 영적인 존재로 이해하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셋째로 포스트모던 신론의 문제점은 인격성의 부재이다. 종교는 실존적인 것이고 절대자와 인격적인 관계(personal relationship)를 갖는 것이다. 실존적인 문제를 다루는 차원에서의 종교적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 그러한 실존적인 모습을 떠나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라고 하기가 어려운 것이며, 철학 혹은 형이상학에 불과한 것이다. 실존적인 자아와 초월적 세계의 만남이 종교가 되는 것이고, 초월적인 세계에서 절대자에 대한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진정한대화와 종교적 승화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로 포스트모던 신론은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다. 포스트모던 신론은 일반적으로 범재론적적(panentheism)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범재신론은 신의 모습은 인간이 존경(reverence)과 경외(awe)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면 최고의 도덕적 관리자로서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또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두려움(tremendum)과 심판을 하는 도덕적 관리자가 없다면 과연 인간이 궁극적인 차원에서 도덕적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특히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형이상학을 바탕으로서 한 신론은 범재신론으로서 신을 합성원리로서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주론적 원리로서 신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원초적 창조주이며 연속적 창조주로서 과정신학에서 신의 원초적 본질과 결과적 본질의 모습과 유사성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포스트모던 과정신학의 신은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는 종교적 신은 아니다.
다섯째로 포스트모던 신론은 영적미학(spiritual aesthetics)의 대상으로서 가능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신앙 현상학(phenomenologia fidei)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영적인 현상을 묘사하는 미적 영역이 부재하다는 말이다. 21세기 신학의 유형은 여전히 미(beauty)를 추구하는 해석학적 신학과 진(truth)을 추구하는 철학적 신학 그리고 선(good)을 추구하는 경험적 신학이 지속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영적 미학은 미를 추구하는 해석학적 신학과 진을 추구하는 철학적 신학이 결혼을 해서 형성될 수 있는 분야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것은 해석학적인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고, 미학은 철학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범재신론적 이해나 해방자로서의 하나님, 다원주의적인 신에 대한 이해에서는 영적인 미학을 시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실적 존재로서의 영의 세계가 있어야 경험적인 영적미학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의식론적인 영적미학이나 변증법적인 영적미학도 같은 맥락에서 종교적 아름다움을 묘사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영적미학은 영적 체험에 대한 이해를 하는 데에 중요한 방법론적 시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심도 있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Yahweh)는 스스로 존재하는 절대성과 자존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며, 엘로힘(Elohim)은 힘을 상징하는 개념으로서 우주의 근원적인 전능한 존재로서 이해되어지고 있다. 주(adonai)는 관계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지는 개념으로서 주와 객의 관계에서 주( )의 의미을 내포하고 있다. 여호와와 엘로힘 그리고 주는 존재론적인 신앙의 대상이며, 인간의 내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영적인 존재이다. 절대자이며 전능자인 우리의 주인이 되는 하나님은 영성, 단순성, 거룩성, 완전성, 영원성, 창조성의 속성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단순성 혹은 완전성은 일치와 조화를 전제한 심미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거룩성은 깨끗한 것과 완전한 것을 나타내는 심미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테일러(Mark C. Taylor)가 말하는 무신적미학(a/theoaesthetics)은 비존재론적이고 무신학적인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서, 영적인 경험적 세계에서 이해되어지는 것을 해석하는 영적미학에서 이해되어지는 하나님과는 차이가 있다. 무신학적 신론은 신학을 완전히 버리는 것도 아니고 안 버리는 것도 아닌 차원에서 무신학적으로 이해하는 신론이다. 전통적인 신학을 따르지 않고 신을 알 수 있는 방법론적 접근이다. 한 아파트에 들어가 강간을 하고 돈을 빼앗고 달아나다가 잡힌 죄인이 재판관 앞에서 서있을 때에, 재판관이 말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을 해도 죄인은 모든 죄과에 대한 인식이 뼈에 저며오는 것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재판관의 침묵은 법정을 꽉 채운 의미(spacing)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말이 없어도 신을 인식하는 분위기와 맥락으로서, 말로 표현하는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무신학적 시도가 필요한 것이고, 그렇다고 그 맥락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는 차원에서 신학도아니고 그렇다고 안신학도 아닌 차원에서 시도되는 신학이다. 그러나 영적미학은 내면 세계의 사실적 변화를 체험(actual experience)하는 내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며, 무신학적 신론에서는 아름다움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언어적 한계성을 넘어서는 가능성은 있지만, 신앙적인 근본적인 아름다움의 세계에는 손을 쓰지 못하는 편협적인 신론이 되는 것이다.
중남미의 해방신학이나 흑인신학 여성신학의 신론은 누르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로 이원화된 상황을 전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에 대한 이해의 한계에 접하게 되는 어려움이 있다. 사회 정치적 경제적 해방자로서의 하나님은 성서의 인용에 있어서도 제한된 부분을 근거로 신학적 논리를 전개하는 면이 있고, 시대와 사회 경제적 조건에 따라서 형성되는 문제를 다루는 물렁물렁한 이론(soft theory)이라는 비평이 일반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오류는 영적인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점에 있어서 제한성을 들어내고 있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해방신학의 영성훈련은 의식화(conscientization)와 실천(praxis)을 집중적으로 강조하는 편협성을 가지고 있는 영성훈련이다. 신앙의 세계는 영적인 아름다움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어야 진정한 종교성과 신앙의 세계로 자리잡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제임스 콘(James Cone)이 주장하는 까만 색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고집하는 이유는 백인에게 끊임없이 차별 당하는 흑인의 한(恨, blues)을 생각할 때에 이해가 가는 면도 있고, 메리 데일리(Mary Daly)가 주장하는 하나님은 여자라는 말도 그의 여성해방을 위한 급진적인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는 말이다. 그러나 노란 사람이 살고 있는 동양에서 하나님을 하얗게 이해하거나 까맣게 이해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을 생각하였는지 질문을 제기하고 싶다. 여성 대명사가 없는 동양의 문화권에서 여성명사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안갈 수 가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보편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신학적 이론이 아닌가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까맣고 노랗고 하얀 색깔로 표현되는 존재가 아니며, 여성명사 남성명사로 한정적으로 표현되는 존재가 아니다. 성서의 내적 텍스트(intratextuality) 자체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로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내적 텍스트자체가 충분히 보편적인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고, 그 안에서 영적인 언어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VI. 결론
스텐리 그렌츠(Stanley Grenz)는 포스트모던 신학의 방향은 합리주의를 넘어서고(post-rational), 개인주의를 넘어서(post-individual), 영성주의(spirituality)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덴(Thomas C. Oden)은 시대적인 여러 가지 사상적 흐름과 세계관의 변화 속에서 기독교 진리는 지속적인 타당성을 지니고 존재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명목주의(nominalism)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rationalism) 출현과 함께 사라졌고, 그 합리주의는 경험주의(empiricism)가 도래하면서 꼬리를 내렸다. 뉴톤의 물리학은 아인쉬타인의 물리학과 상대성이론 그리고 양자론에 의해서 대치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기독교의 진리와 영성은 유구하게 항존하고 있으며, 그러한 변화를 경험하면서 나름대로 변증학적 역량을 가지면서 더욱 견고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현대에서 포스트모던으로 변하고있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기독교의 진리의 타당성은 변증되고 항존하게 될 것이다. 해제주의가 나타나면 기독교가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는 더욱 강건해지고, 결국 해체주의는 해체(deconstruction of deconstruction)되고 말 것은 역사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해체주의가 해체되는 것으로만 안주해서는 안되고, 포스트모던 재구조(postmodern reconstruction)의 변증이 시도되어야 한다. 역사적인 새로운 도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면역체 혹은 항체를 형성해야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변증학적 입장을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에 두고 기독교 진리의 타당성을 오덴은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 현실주의는 전통적으로 검증된 가치관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추상적인 합리적 시스템보다는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이 실제적으로 설득력이 있고 현실적이라는 이라는 말이다. 기독교 현실주의는 포스트모던 변증의 기본적인 틀로서 자리 메김을 할 수 있는 타당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렌츠와 오덴과 같은 포스트모던 변증학이 시도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것이며 다각적인 면에서 더 많은 노고가 요구되는 현실이라고 본다.
이성중심주의 시대를 넘어서 감성과 직관의 인식론적 가치를 상향조절해서 이성과 함께 균형 있는 신학적 전개를 시도해야한다. 개인구원을 중심으로 한 고백적 신학을 넘어서 공동체와 자연을 생각하는 신학적 작업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영성을 강조하는 영적 미학이 새로운 시대의 기독교 신학적 가능성으로 발전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포스트모던 해체주의가 신학을 무너뜨리고, 신에 대한 제사를 드리며, 신을 만나기 위해서 주변 공간이나 틈새를 맴돌기 전에, 신적 주관성(the Divine subjectivity)을 가진 사실적 의미을 가지고 있는 신적 언어(the Divine word)의 텍스트를 더욱 설득력 있게 선포해야 한다. 이성을 넘어서 의미와 인식이 가능한 직관과 감성을 통한 사실적 영(the actual Spirit)의 역사를 신앙이 견고하게 설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묘사해야 한다. 특히 영적인 미학을 기독교 변증을 위한 포스트모던 항체로 주입하는 것을 제안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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