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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월삭 예배 "왜 예수님께서 이처럼 과격하게 행하셨나".... '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마21:..

5월은 가정의 달 기도합시다.

기도는 생명입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성전 곧 아버지 집에 오는 이유는 기도 하기 위하여.!

헤롯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BC20년에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해서,AD63년 알비누스 총독 때에 완공합니다.

성전이 ‘46년 동안 지어지고 있다’는 말의 시점을 AD26년이 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때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 왕이 BC3년에 죽었으니까 적어도 예수님은 BC3년 이전이 됩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이 보신 것은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해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양과 소를 성전에서 내쫓으시며, 환전상들의 돈을 쏟으며, 상을 뒤집어 엎으시고, 비둘기를 파든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2:18)고 합니다. ‘대답하다’라는 원문의 뜻은 ‘대들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성전 청결’을 행하시자 대들면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그 요구에 요2: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도 유대인들에게 대드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성전에서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며 유대인들과 예수님이 논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그 대답에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사십육 년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2:20)고 하며 비웃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성전 된 자기 육체’(요2:21)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알지 못 합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에야 이 말씀을 깨닫게 되었음을 요2:22절에서 말씀합니다.‘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그럼 왜 예수님께서 이러한 성전 청결을 행하셨을까요?

그렇습니다 성전 곧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것을 그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뿐만아니라 이땅에 오셔서 의 분은 내신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입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이 보기에는 과격한 행동을 보시셨지만 그것은 더 이상은 안돼 하는 싸인이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 기도하지 않은 교회 기도하지 않는 가정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과감한 권면이 필요합니다

과격한 태도가 필요한 것은 기도는 영혼의 호흡인데 호흡이 멈추려고 하는 사람, 호흡이 멈춘 사람에게는 가슴을 주먹으로 가격한다든지 혹은 전기 충격기를 빌려 호흡이 다시 돌아오게 하듯이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하도록 강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배경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입니다.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모세의 인도아래 출애굽을 할 때에 애굽에 내린 10번째 재앙인 장자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린양의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입니다. 문설주란 문을 달 수 있는 기둥을 말하는 것이며,인방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말하는데, 문틀의 위아래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집 문틀 좌우와 위아래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10번째 재앙인 장자의 죽음에서 벗어날수 있습니다. 그렇게 어린양의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잡은 어린양의 고기를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고 구워 만든 빵)과 쓴 나물을 함께 먹으며, 허리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는 것이 첫 번째 ‘유월절’의 모습이었습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은 곧 죽음으로부터 구원 받는 유일한 길이며, 유월절 어린양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림을 하나님은 제사라는 제도를 통하여 매일 접할 수 있게 하십니다.

성전이라는 것은 그러한 그림들을 담아놓은 틀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유월절을 지킬 때마다, 제사를 드릴 때 마다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어떤 일을 하실 뿐인가를 인식하며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그림자의 실체가 오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에 예수님이 성전에 올라 가셨다는 것은 때에 실체와 그림자가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보여 주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며, 돈을 바꿔주는 일들을 합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말하기를 당시에 절기 때마다 장정만 약 13만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족들을 합치면 약 100만 명의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6-8만 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절기 때마다 100만 명의 사람들이 일주일 동안 북적인다면 얼마나 혼란하겠습니까?

거기에 절기 때마다 25만 마리의 양을 잡아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답니다. 일주일 동안 예루살렘은 피 비린내에 고기타는 노린내가 진동했을 겁니다. 그러한 모습을 통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보내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하실 뿐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열심히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였고, 유대인들을 바로 가르치고 인도해야할 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은 돈 벌이에만 눈이 멀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과 가까이 있는 감람산에는 4개의 가축 시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은 먼 곳에서 오는 순례자들이 가져온 제물을 판정하고, 제사를 드리는데 자신들이 관여하는 가축시장의 가축이 아니면 이런 저런 핑계로 퇴짜를 놓기 일 수였습니다. 사람들은 대제사장이 관여하는 가축상에게 가축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드려진 제물들을 뒤로 빼돌려서 되파는 일들까지 행합니다. 그것으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게다가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유대 화폐로 성전세 반 세겔을 내야합니다. 반 세겔은 그 당시 노동자들이 이틀치 임금에 해당하는 작지 않은 돈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유대 화폐인 세겔로 내야 합니다. 그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된 로마의 화폐나 헬라의 화폐에는 황제의 형상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겔로 환전해야 하는데, 환전 수수료가 반 세겔의 50%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환전 상들을 누가 관리하느냐?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산헤드린 공회 역시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정작 성전이 감당해야할 일을 감당하지 못한 성전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2:16)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이 성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을 올바로 이끌어야할 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의 지도자들은 돈에만 마음과 생각이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소와 양들을 쫓아내며,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 놓으십니다. 그 모습을 본 유대인들이예수님께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2:18)하며 대듭니다. 이 말

은 ‘네가 이렇게 하는 권세가 어디 있느냐? 그 권세의 표적을 보이라!’는 요구입니다.


이렇게 대드는 이유는 신명기18:22 근거로 합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신18:22) 유대인들은 선지자는 표적으로 증명되지않으면 참 선지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네가 선지자 처럼 행동하는데, 네가 선지자인 증거를 되라!’는 요구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고 말씀하십니다.왜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성전은 14절에 나오는 성전과 다른 단어입니다. 14절의 성전은 ‘히에론’이란 헬라어인데, ‘신성한 영역으로서의 성전’을 의미합니다. 성전과 그에 딸린 부속 건물들, 나아가 이방인의 뜰과 여인들의 뜰, 더 넓게는 성전 부근의 감람산 부근까지 포괄적 의미에서 성전을 말합니다.


그러나 19절의 성전은 ‘나오스’란 헬라어인데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성전 건물’만을 말합니다. 그성전은 곧 예수님의 육체를 말합니다. 그래서 21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그 성전(나오스)를 헐라, 파괴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잘

못되고, 형식적이며, 본질을 잃어버린 옛 성전의 모든 것들’을 예수님이 끌어안으시고 죽으시겠다는 겁니다.그리고 새로운 성전을 지으시겠다는 겁니다. 그것을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곧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겁니다.


새로운 성전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곧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청결사건을 행하신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옛 성전의 모든 죄악을 품에 안으시고 죽으시고, 새로운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우실 새로운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을 만들려고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AD70년에 로마의 10번째 황제가 되는 티투스 장군에 의해 눈에 보이는 성전을 아예 파괴해 버리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형식적이며, 잘못되고, 본질을 벗어난 옛 성전을 예수님이 품에 안으시고 죽으셔서, 자기 육체를 통하여 새로운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전 청결사건이라기보다는 성저파괴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성전을 세우셨는데, 그 새로운 성전이 무엇이라고요? 바로 예수를 영접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바로 새로운 성전입니다. 그러면 성전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고린도전서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6:19-20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 시발점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4:23-23 ‘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새로운 성전 만드신 것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하는 삶을 통해 거룩하게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가시는 5월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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