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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NYSKC 심포지엄 강의안:목회철학 Pastoral Philosophy

주제:


때: 주후 2006년 4월 24일-26일


장소: 죠지아 아틀란타


강사: 최인근목사(서북미본부장)(시애틀빌립보장로교회 담임)



N Y S K C W O R L D M I S S I O N



목회철학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 세계에는 ‘철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쉽게 말해 세상을 살아가는 방도라 하겠습니다.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고 진실한 삶을 살겠다는 사람의 “정직”은 그런 사람의 철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회를 하고 있는 우리 목회자들에게도 분명 철학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쉽게 말해 “목회철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신념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학문과 신학과 신앙으로 접목시키느냐에 따라 한 평생의 목회가 성공적일 수도 있고 반대로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은퇴를 하고 난 다음에야 크게 깨달음을 가지고 지나 간 세월을 후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어진 짧은 기회를 복되게 선용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그것은 바로 바른 목회철학의 결여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에게는 바론 목회철학이 무엇보도다 소중한 것입니다. 세상에 권세 있는 사람들의 부름을 받아 나라나 회사나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도 보람있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거늘 우리 목회자는 하늘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종들일 진데 그 영광이 과연 얼마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귀한 삶을 고통과 한숨 속에서 보내야 한다면 그것보다 더 슬픈 일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목회철학은 오늘 우리들의 삶을 그리고 사명을 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목회의 근본이 될 것이므로 그렇게도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철학의 개념


우리는 대학을 다닐 때부터 철학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 왔고 또한 공부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철학이라는 학문은 어떠한 것입니까?


철학은 Philosophy로 헬라어 Philein(사랑하다)이라는 말과 Sophia(지혜)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일반적인 의미로 ‘사물의 제반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물의 제반 원리를 탐구하려면 구체적으로 그 대상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그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각 철학의 구분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헬레니즘과 로마철학 - 인간의 실천적 문제를 대상으로 삼았고

중세철학 - 신을 그 연구 대상으로 삼았으며

근대철학 - 인간의 인식에 대한 문제를 그 연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합리론과 경험으로 이해한다는 경험론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합하려고 한 것이 바로 칸트의 철학이나 그 또한 인식이라는 중심주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식’이라는 문제가 바로 오늘날의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습니다.


헤겔과 마르크스 - 역사를

니체와 베르그송 - 生을

키에르케고르와 야스페르스 및 하이덱거 - 인간의 실존을 철학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와 같은 철학의 대상을 중심으로 방법론 또한 다양하게 발생하게 되었는데 각 철학자의 입장에 따라 귀납적 방법, 연역적 방법, 선험적 방법, 변증법적 방법, 현상학적 방법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철학과 신학은 과연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관심사입니다. 철학과 신학은 사실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호 대립관계 또한 유지해 왔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인간의 실천적 문제를 대상으로 삼고 있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진입하자 말자 대립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부철학에서는 기독교의 변증을 위해 철학적 사변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대신학에서도 칼바르트는 신학에서 철학을 철저하게 배제해야 한다고 강조하나 헤겔의 영향을 받은 비데르만은 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반목과 질시 긍정과 부정을 통한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통해서 볼 때 철학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신학에 영향을 미쳐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와중에서 어떻게 철학을 목회에 접목시켜 바른 목회철학을 도출해 낼 수가 있을까요?

2. 목회철학의 개념


그렇다면 목회철학은 우리들이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면 목회철학은 ‘목회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학문’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사실 학문적인 차원에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 보다 목회 일선에서 헌신하고 있는 우리 목회자들에게는 실천신학의 차원에서 목회철학을 논하는 것이 보다 더 현실적이고 목회 활동에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목회철학’을 학문적인 접근보다는 실천적인 접근을 통해 목회자의 ‘목회신념’적인 차원에서 이 강의를 이끌어 가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목회란 교회와 교인들을 상대로 하나님 앞에 선 한 사람의 목사로서의 삶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다양한 학문적인 배경과 인격, 신학과 신앙, 능력과 자질 등 다양한 요소가 필요한 광범위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철학이 대상과 방법론에 따라 다양하고 광범위한 영역을 가지고 있음과 같이 목회철학 또한 그 보다 더 광범위한 범주에 속해 있는 것이므로 최대공배수를 따른 각 범위 내에서의 공통분모를 찾아 함께 나눔으로서 목회활동이 보다 활성화되고 구체화되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교회에는 성장의 목표를 달성하며 개인 목회자의 삶이 보람과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함께 의논해 보고자 하겠습니다.


3. 목회철학의 방향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목회철학은 목회의 방향설정과 방법론의 개념으로 목회자 자신의 굳은 신념과 결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목회의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목회의 선험자로서 우리들의 영원한 모델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예수님의 목회는 ‘치유목회’였습니다. 예수님은 죄는 정죄하셨지만 죄를 지은 사람은 용서하여 구원해 주셨고, 육신의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치료하시어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선한 목자가 되시어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의 목회철학이었습니다.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고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시고 넓은 길로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좁은 길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 주님의 그 목회철학은 바로 ‘치유’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목회자들이 지향해야 할 철학을 정리하면 이것이 바로 오늘의 목회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4. 목회철학의 범위


무엇보다도 목회의 다양성을 통해 목회철학의 범위를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목회자만큼 다양한 기능을 지닌 직종도 없을 것입니다. 목회자는 설교자요 교육자요 상담가요 집필자요 행정가요 재정가요 인류 최대의 세일즈맨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모든 직종을 능히 소화해야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철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로 목회철학의 범위 또한 목회자의 직능만큼이나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 목회자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목회 자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군 다윗은 자신이 엄청난 권세를 지닌 왕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연약한 한 마리의 양임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16:1-2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고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늘 발견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먼저 설정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 목회자가 먼저 받지 않고는 험악한 이 세대에 담대히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다윗의 모습을 다시 한번 더 보겠습니다.


시16:8-9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 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 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여기에 목회자의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하여서 요동치 아니하는 담력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심령의 평안과 기쁨, 육체의 건강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목회자의 기본적인 요건이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만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의 최우선 과제는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인 것입니다. 이는 목회자가 자의적인 지식과 지혜와 경험으로 목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목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하였습니다.


요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의 우선 과제는 이처럼 우리 목회의 보고이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의로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공급하신다고 하셨다면 오늘 우리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2. 목회자는 모든 이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군에 가면 조교가 언제나 시범을 먼저 보여줍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신병들이 따라 가도록 훈련합니다. 이는 우리 목회현장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 목회자는 모든 평신도들의 모델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이 감동 받고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먼저 모델이 되시어 모범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요13:13-15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 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 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고 말입니다. 이처럼 목회자는 독경생활이나 기도생활이나 헌금생활이나 봉사생활을 막론하고 평신도들의 모델과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자신을 미워하는 장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곳에서 제대로 된 목회가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러므로 목회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목회자 자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을 성도들에게 “실천하라, 순종하라”고 아무리 외친들 그 말씀에 열매가 맺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모든 매사에 평신도들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서울 내수동교회에 담임하시던 박희천목사님은 매일 성경을 4시간씩 읽는데 구약 2시간 신약 2시간씩을 읽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어쩌다 몇 달 몇 년을 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고백하시던 그 때까지 36년 동안을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을 보고 “성경을 열심히 읽으십시오.”라고 해야 그 말씀이 성도들에게 먹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목회자는 헌금생활에서도 성도들보다 더 많이 해야 하고(액수가 아니 수입의 퍼센트로 계산할 때), 기도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변함없는 목회철학이 되었을 때 그는 존경받는 목회자요 사랑 받는 목회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설교를 잘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김의 최고봉은 예배입니다. 또한 예배의 최고봉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최대의 사명은 설교입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타락하고 때묻고 이기주의로 변질되어 버린 그들의 영혼을 말씀으로 치유하고 회복시켜야 다음 한 주간을 마귀와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와 같은 상태에 놓인 성도들을 회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오직 여호와의 말씀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 말씀을 충분히 감동 받을 수 있도록 전달하는 행위가 바로 설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도록 잘 전했을 때 비로소 성도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성되는 것입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 았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들이 전하는 설교말씀을 통해 세상을 이길 믿음이 생겨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믿음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우리들을 너무나도 황홀하게 하고 또한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이렇게도 목회활동 중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니 이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 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 야 할지니라


4. 각 종 회의는 간소하게 교제는 길게 하라


목회활동 중에서 목회자가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회의를 주제하는 것입니다. 당회, 공동의회, 제직회 및 기타 수많은 회의를 조제하면서 목회자는 진을 빼는 것입니다. LA에서는 심지어 당회를 하러가지 전 꼭 우황청심환을 먹어야만 하는 목회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를 편하게 그리고 길게 오래 하려면 회의를 아예 하지 않는가 하더라도 가장 간편하게 해야 합니다. 목회와 교회발전은 회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제와 봉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함께 모여 교제하며 봉사할 때에는 신바람이 나고 즐거우나 모여서 진부한 토론이나 상반된 의견을 절충하는 회의를 통하여 은혜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괜스레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회의라고 하다 보면 의견이 상충되고 마음이 갈리어져 은혜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개척하여 23년 동안 지내 오는 동안 당회, 정기제직회 등 회의를 일체 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모이면 교제하고 봉사하며 사랑의 떡을 떼는 신나는 일은 자주 합니다.


5. 심방은 요청이 있을 때만 하라


이민교회는 종종 심방으로 인한 시비도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괜스레 원치도 않는 심방을 하여 교인들의 마음을 언짢고 불안하게 하는 경우도 많고 성도들을 차별하여 사랑하는 것 같은 인상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들 피곤한 이민생활에 시달리고 있는데 비정기적으로 찾아가 심방을 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오히려 불편함과 부담을 안겨줄 수 있는 경우도 많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심방은 반드시 심방신청서를 비치하고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하는 때에 간단하게 함으로 심방의 효율을 극대화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대신 질병으로 입원을 했다거나 건강상의 문제가 있을 때는 최우선적으로 심방하고 위로하며 소망을 심어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6. 내 자식은 내 젖으로 키우라


교회의 기능 중에서도 교육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구역공과에서부터 각 종 성경공부의 교제나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청년대학부와 장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성경클레스를 통한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아무 생각 없이 부교역자들에게나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교제를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옛 말에도 “내 새끼는 내 젖으로 키워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애 양은 내 젖으로 먹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당회장 목사가 교제를 직접 만들어 부교역자나 교사들이나 구역장들을 훈련시킨 다음 그들이 그 교제로 양무리들을 가르치도록 함이 오랜 세월이 지났을 때 혼란 없는 자신의 철학과 신앙과 신학에 맞는 일꾼들을 동일한 수준으로 양육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7. 진실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최고의 덕목은 진실입니다. 우리 주님은 복음서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진실”은 바로 헬라어 원문에는 “아멘”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진실이요 아멘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을 닮아 그 주님을 따르고 그 주님을 가르치는 우리 목회자들의 생명은 어디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바로 “진실”이요 “아멘”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목회를 하다 보면 약속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덜 중요한 사람과 한 먼저 약속을 더 중요한 사람의 나중 약속 때문에 바꾸거나 취소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비록 그러한 때라 할지라도 진실한 목회자는 먼저 한 약속을 바꾸거나 취소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과 목회자 자신만 아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진실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교황의 명령으로 시스나티 성당의 천장 벽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천장에 매달려 4년을 바쳐 벽화를 그렸습니다. 그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한 채 거꾸로 매달려 하던 고된 작업 탓에 살이 빠지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딱하게 여긴 친구가 찾아와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그 때로는 천장에 매달린 채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구석진 천장의 그림을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말했습니다. “이 친구야 그 구석의 그림을 누가 자세히 보나, 그리고 자네가 그린 그림을 남이 어떻게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알기나 하겠나, 그러니 대충하고 내려오게나.” 그랬더니 다빈치가 간단하게 한 마디 했습니다.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안다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목회자는 아무도 몰라도 자신만은 아는 진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진실에 목숨을 거는 신실함의 덕목이 목회자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8. 대접하기를 잘 해야 합니다


대체로 목회자들이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대접받기를 많이 해서 섬김 받고 대접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성도들은 결코 봉도 아니고 갑부도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들과 똑 같이 세상 살아가면서 아쉬움이 있고 모자람이 있고 사랑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라고 해서 그들로부터 대접과 섬김을 받기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섬기고 대접하는데 그들보다 앞서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들의 모델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하시고 본을 보여 주신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待接)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 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律法)이요 선지자(先知者)니라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9. 끝까지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늘 설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만하면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목회자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겸손하지 아니하고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남보다 조금 더 크다든지, 사례를 남보다 더 받는다든지, 뭐 하나 남보다 나은 것이 있으면 어느 구석에서든지 교만하게 처신하게 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 날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인간 관계도 흐트러지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목회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10.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 하면서 상처 입거나 좌절하거나 낙심하게 되는 최대의 변수는 바로 사람을 믿었던 까닭임을 거의 모든 목회자들이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가장 믿었던 사람,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되면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당하게 되고 삼손이 사랑하던 여인에게 당하였으며 예수님께서 재정을 맡겼던 유다에게 당하셨던 모든 일들이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믿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케이스를 통하여 교훈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끝까지 이에 대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되며 사람은 사랑의 대상일 뿐 결코 믿음의 대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가슴에 명심 또 명심해야 합니다. 가깝다고 함께 운동을 하거나 믿고 마음의 문을 열어 보이거나 사사로운 대화를 함부로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만 명심하면 한 교회에 오래 있더라도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면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음을 언제나 기억하고 차라리 사람 앞에서는 외롭고 하나님 앞에서는 친밀한 그런 목회자의 머나먼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2006년도 NYSKC 아틀란타 심포지엄 건의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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