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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기독교강요 교회론에 나타난 성령의 일치 사역

The Unifying Work of the Holy Spirit

in Calvin's Ecclesiology of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배본철

Bonjour Bay


Abstract

The doctrine of the work of Holy Spirit was one to which John Calvin gave high importance and which he labored to clarify in his well-known writings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The fourth Book of the Institutio, which dealed with the external means or aids employed by the Holy Spirit to put us in communication with Jesus Christ, was altogther centered in the matter of Ecclesiology.

The true universal Church is invisible; its members, the elect of God, are known to God alone by the work of Holy Spirit. The thought of 'communion of saints' and spiritual communication were strongly emphasized by Calvin in order to maintain the unifying work of Holy Spirit in his Ecclesiology. The most important subject in Calvin's Ecclesiology that we need to apply to modern Church will be the thought of 'union with Christ through the work of Holy Spirit'. Applying this, we can develop the fullness and spiritual maturity of Christian Church as the one body of Christ.



1. 여는 글: 기독교강요 개관


성령론은 기독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로서, 성령론에 대한 정립이 없이는 삼위일체론이나 구원론 그리고 교회론 등을 포함한 기독교 신학 전반은 물론, 신자의 영적 삶의 근거에 대한 타당성 있고 깊이 있는 접근이 힘들게 된다. 특히 개신교의 성령론은, 성령론에 대한 다양한 교리적 노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John Calvin이 일구어낸 신학적 전통에 크게 신념의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칼빈의 대표적인 저작인 「기독교강요」(基督敎講要;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속에 나타난 성령론의 내용을 살펴 보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칼빈의 라틴어로 된 「기독교강요」 초판은 1536년 바젤에서 출판되었다. 이 때 이 책은 명쾌하고도 논리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개혁의 이념을 폈기 때문에 그 당시 개혁사상을 따르는 수십만 명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이후 1539년에 재판이 나왔으며, 이 책은 초판에 비해 거의 3배나 많은 내용으로 증보되었다. 그후에도 1541년, 1543년, 1550년에 걸친 개정판에 이어 최종적으로 1559년에 결정판이 나왔는데, 이 책에서 우리는 가장 완숙된 칼빈의 사상을 접할 수 있다.

그 후에도 1560년에 칼빈은 극도로 쇠약한 상태에서 불어 번역판을 내어놓았지만, 칼빈 자신의 감독과 수정 없이 번역자에게 주로 의존한 번역의 내용은 Opera Calvini의 편집자들과 G. Lanson 등에 의해 부실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1559년의 라틴어로 된 개정판은 매우 일관성이 있고 체계적이어서 이전의 여느 개정판보다도 그 내용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1536)과 결정판(1559)을 서로 비교해 볼 때 양자 사이에는 큰 사상적인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초판은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변증하기 위해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으나, 결정판에서는 그 입장을 성서, 교부, 중세 신학자들의 주장을 인용하여 좀더 구체적이고 소상하게 증명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교부 중에서도 Augustine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쓰게 된 처음 목적은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서문’(Praefatio ad regem Galliae)에 기록된 대로 신자들에게 참 신앙의 도리를 가능한 한 간결하게 해설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재세례파와 급진적 개혁자들에 대한 1535년의 박해와 추방의 여파가 전체 개혁파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을 때, 그는 이 책을 개신교 옹호의 책으로 사용키로 결심하였다.

「기독교강요」는 내용적으로 보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 즉 주님에 대한 이중적 인식(duplex cognitio Domini)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칼빈 자신의 글에서도 잘 나타나는 이같은 언급에 의해 「기독교강요」를 두 부분으로 구분 짓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이렇게 보면 제 1권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제 2권부터 제 4권까지는 구주 되신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강요」는 사도신경의 배열을 따라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 등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 가장 전통적인 구분이다. 이렇게 넷으로 구분 짓는 것은 우선 이것이 사도신경의 배열에 적합하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또 하나의 이유는 칼빈의 「기독교강요」(1559)가 총 네 권으로 되어있다고 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칼빈은 제 4권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교통케 하기 위하여 성령이 취하시는 외적 수단이나 외적 보조물에 관한 문제를 교회와 연관지어 다루었다. 여기서 그는 로만 캐톨릭과 인문주의자들의 노선과는 달리, 성서에 의존하여 교회, 성례전, 세례, 성만찬 등의 주제를 개혁적 신념으로 확립하였다.

필자가 논문의 주제로서 특히 칼빈의 교회론에 나타난 성령의 일치 사역을 중시하는 것은 현재 사분오열되어진 개신교의 분파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복음적 치유점을 찾기 위해서이다. 필자는 이를 위해 칼빈의 교회와 성례전의 주제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를 일치시키는 성령 사역의 중요성을 살펴본 후, 결론에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하나된 몸으로서의 성숙한 교회론이 구현되는 알찬 21세기 개신교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기로 한다.


2. 교회와 성령


교회의 목적과 기능

교회의 목적은 신자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기 위한 도구이자 또한 신자의 성화에 필요한 수단이 된다. 복음의 전파와 성직자의 임명은 신앙을 불러일으키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들로 하여금 ‘믿음의 교제’ 즉 믿음과 외부 사회와의 합치를 이룸으로 집단적 성화를 이룩하는데 그 의도가 있다.

한편 성례전의 주요 기능은 신자들의 신앙을 계속 유지시켜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개별적 성화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타락한 인간성으로 끊어져 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잇기 위하여 성육신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셨던 것처럼, 자신이 믿음의 은사를 내려 주셨던 이들의 성화를 도우시기 위하여 세속적 수단을 분명히 사용하신다.

이러한 세속적인 수단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부여하신 여러 가지 역할과 의무를 구성한다. 그러한 수단들은 지상에 영광을 실현하실 그리스도의 역사로 완성하기에 가장 적합한 수단으로써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우리는 교회를 믿는 자들의 공동체라는 면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직자들 및 그들의 임무 면에서 생각할 때 거룩한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점진적으로 신앙에 장성케 하시기 위하여 교회의 양육을 활용하신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사들이 행하는 복음의 설교는 믿음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한 정상적인 수단이다. 참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영혼 속에 역사하게 되는 것은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설교에 있어서 목회자가 외적 사역을 한다고 한다면 성령께서는 내적인 사역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비록 신체 기능의 작용을 통해 설교를 듣고 이해하게 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안에 신비로운 믿음을 생기게 하신다. 이처럼 말씀을 듣는 이와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교회는 우리와 관계없는 조직체가 아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교회의 일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역사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스스로 완전성을 유지할 수는 없으며, 오직 여호와께서 교회를 보존하기 위하여 만드신 수단에 의하여 완전성을 유지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께서는 만물을 완성하고 충만케 하기 위하여 승천하셨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 수단이란 하나 님께서 임명하신 자신의 종들을 통하여 자신의 교회에 여러 은사를 분여하심을 의미한다. 심 지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성령의 힘으로써 효능을 부여해 주심으로써 교회에 자신을 현현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선택된 자들로만 이루어진 불가시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불가시적 교회는 가시적 교회가 사악한 자들을 수용하여야만 한다는 점에 있어서 가시적 교회와는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개의 교회가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오직 하나의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하고, 그 분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 관해서만 주로 다룬다. 이와 같은 교회의 단일성에 의해서 우리는 불가시적 교회를 기준 삼아 가시적 교회를 판단할 수 있다.


교회의 계율

교회의 역할 중의 하나는 교회의 일원들을 인도하고 도와서 성화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만일 교회의 설교가 헛되지 않고 성례전이 효과적으로 신자들의 신앙을 강화할 수 있으려면 교회는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거쳐 모든 잘못을 피해야 할 것이며, 또한 교회에 속한 자들의 문제에 관한 어떤 계율도 사용해야만 할 것이다. 교회가 교리 및 교회의 일원들의 행실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무질서나 추문을 묵인하여서는 안된다. 계율을 강조하는 생각은 실제로 신자들과 그리스도를 일치시키고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스도의 존엄성을 인정케하는데 필요하다.

칼빈과 Bucer는 모든 교회 조직이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 및 성령의 은사로부터 직접 비롯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조직이나 계율 등을 상황적 요구에 따라 변화시킬 수는 있으나, 개인은 물론이고 어떠한 공동체라도 교회의 조직에 관하여 마음대로 그 조직을 수정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심지어 교회 조직의 세부적인 사항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의 지시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 성경의 지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효능을 지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교회 직임

성직의 다양성은 그에 해당하는 성령의 은사와 모든 기독교인들의 만인제사장직에 근거한다. 가장 중요한 성직은 목사와 교사로서 그들에게는 성서의 교리를 가르치고 설명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다. 이 둘은 서로 혼용될 수 있는 것으로써, 결국 모든 것은 개개인에게 주어진 은사에 달려 있다.

성직에 임명할 자를 선택하는 행위는 이중의 근거, 즉 천상의 근거와 지상의 근거에 입각하여 행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개개인에게 합당한 은사를 분여하시며, 또한 성직자에 대한 참된 선택을 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선택된 자들이라고 해서 매사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성직 임명에 있어서 필요한 조건은 그 공동체에 의해 정식으로 선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와 교사 다음으로 칼빈은 두 가지의 순수한 평신도직으로서 장로와 집사 직을 말했다. 장로가 해야 할 주요 임무는 교회의 이름으로 계율을 행하는 것이다. 칼빈은 교회의 계율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장로는 칼빈의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장로들은 목사들에 의해 선출되어야 했고, 또한 목사들처럼 도덕 및 계율을 감독할 임무가 있었다. 때때로 장로의 역할은 목사가 함께 담당할 수도 있었다.


교회의 법

그러나 어떠한 힘에 의해서 교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가? 여기서 칼빈은 영적 힘(spiritual power)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곡 국가에 속한 세속적 권력과도 유사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영적 힘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교리의 재판권, 입법권 및 성문법이라고 보았다. 영적인 힘의 이 세 가지 측면은 상호 보완관계를 행사하고 있다.

교회의 힘 특히 교육의 힘에 대한 칼빈의 설명은 성서만이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게 된다. 참으로 교회의 교리적인 힘이 과거 로마 교회가 범하였던 것처럼 전제주의로 흐르지 않으려면 교리에 대한 엄격한 제약이 필요하다. 교리를 제한할 수 있는 권리는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져서는 안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러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 오직 성경만이 교리 문제에 있어서 무오류적(infalliable)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철저히 성서적 근거를 따라야 한다.

칼빈의 성령론이 개신교신학에 특히 큰 공헌을 한 부분은 성경의 권위와 연관된 그의 사상이다. 캐톨릭교회에서는 교회의 해석에 의하여 성경 내용의 권위가 지지된다고 했으나, 칼빈은 교회의 해석도 아니요 또 다른 합리적 요소도 아니요 오직 성령의 내적 증거만이 성경 권위의 궁극적인 기반이 된다고 보았다. 칼빈은 성령의 증거가 이성보다 우월하다고 보면서, 성경을 읽거나 듣는 이의 이성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확신을 부여한다. 선지자와 사도들을 감동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한 성령께서는 또한 성경을 읽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하여 성경 말씀의 진리됨을 깨닫게 하신다.


비록 그(성경) 자체가 권위를 지니고 있지만, 오직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영혼 속에 증거를 주실 때에 비로소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고 하는 확신은 우리 자신의 증거나 또 다른 이들의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 에 의해 비췸을 받게 될 때 얻게 된다.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계시는 확실하고도 완전하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후예들이나 교회 공의회를 통하여 추가되는 것은 조금도 신성한 권위를 지닐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교회의 교육적 힘은 성서의 교리를 형식화하고 설명하는 동시에 반대자들로부터 그 교리를 보호하는데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입법권에 관해서, 칼빈은 세속적인 입법에 관한 문제보다는 교회 스스로 제정한 교회법에 관해서 주로 관심을 두면서 이 둘 사이를 구별하였다. 교회 재판권에 대해서도 칼빈은 영적 재판과 세속적 재판 사이의 구별을 하였다.


영적인 치안 유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영적인 치안 유지자는 세속적인 치안 유지자와는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교회의 재판권과 시민 재판소의 재판권 사이의 차이점은, 교회는 강압적이며 권위적인 힘을 사용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구성원 사이에 선한 질서를 보호하여 주고 그들을 교육함으로써 그들에게 봉사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교회가 시민 재판소와 상호 보완 관계에 있음은 분명하다. 두 법정은 각각 독립된 영역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서로 도와주는 관계에 있음이 분명하다.


교회의 일치성

교회를 설명함에 있어서 칼빈은 특히 가시적인 교회의 개념을 전개하였으며, 이 개념의 보다 협의적인 의미로서는 한 국가 혹은 일정한 지역에 국한된 교회를 의미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견해는 그가 지역적인 교회를 잘못 판단하여 전체적인 교회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칼빈은 가시적 교회의 일치성(unity)이라는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치성은 관습이나 의식이나 조직의 차이를 불문하고 순수한 복음에 근거를 둔 모든 교회들 사이에 존재하였다. 심지어는 교리의 다양성조차도 이러한 일치성을 깨뜨리는 필연적인 조건이 되지는 못했다. 교회의 일치성에 대한 강조를 인하여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키는 분파주의와 투쟁하게 되었다.


우리는 비록 그 집회가 여로 모로 결함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말씀의 순수한 역사와 성례전 의 정결한 집전 방식을 위한 집회라면 어떤 집회든지 이를 거부하여서는 안된다. 더구나 교 리나 성례전의 집전에 있어서 약간의 결함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결함 으로 인하여 우리가 타 교회와의 교통을 단절하여서는 안된다.


칼빈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상을 통하여 이와 같은 교회의 일치성을 호소하였다. 즉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근본이심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사로운 일들로 인해서 분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였다.


3. 성례전과 성령


성례전의 정의


칼빈의 성례론은 어거스틴의 영향을 그대로 반영한다. 즉 성례전은 이미 행하여진 거룩한 약속에 근거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례전이란 그러한 약속의 확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써 우리에게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더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례전은 그러한 약속 자체에 다른 약속들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약속을 믿게 해주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칼빈은 성례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정의하였다.


성례전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강건케 하기 위하여 선하신 뜻의 약속들을 우 리의 양심에 봉인하신 외적 징표이며,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으로서 믿는다는 것을 사람들 앞 에서처럼 그 분과 천사들 앞에서 공동으로 증거하는 외적 징표이다. --- 즉 성례전이란 신 성한 것의 가시적 징표, 혹은 보이지 않는 은사의 가시적 형태이다.


계속해서 칼빈은 성례전이란 말씀과 외적 징표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성례전이란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특히 설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례전에서도 성령께서는 내적인 사역자의 역할을 하신다. 성례전에 관한 말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말들은 사람들을 그 징표가 지시하는 곳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목회자에 의하여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설교되어야 한다.


성례전의 효능

한편 성례전을 집전하는데 있어서의 믿음의 필요성은, 그가 특히 예정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그에게서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그 까닭은 선택된 자들만이 믿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례전의 효능은 선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세례와 성만찬을 성례전에 포함하였는데, 이것이 오직 그것들만이 성서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계시하여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 두 가지 종류의 성례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요약하여 주는 것으로써 죄사함과 구속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설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례전의 경우에서도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례전을 용납하고 성례전 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더 나아가서 성령은 성례전을 통하여 우리가 신앙을 얻게 되면 동시에 얻게 되는, 즉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시작하고 또 심화시키도록 도와주신다.


세례의 목적


세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써 그 목적은 첫째, 그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강건케 하 기 위함이며. 둘째,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세례에 대해서 칼빈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루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입문식이라고 하는 성례전의 종교적 의식에 사람들의 주의를 모으는 것이다. 칼빈은 세례를 무엇보다도 먼저 죄사함의 표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세례가 단지 죄사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례의 두 번째 신앙적 중요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듭남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단지 그리스도를 모방하라고 권고하지만은 않는다. 즉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따라 현세의 모든 욕망을 버리게 될 것이며 또한 그분의 부 활을 따라 우리도 의로운 중에 소생하리라는 것만을 권고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그분 께 접붙여질 수 있음을 권고한다.


이처럼 세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아담의 죄로 인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사하여 주신다는 확신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여기신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볼 때 세례의 교리는 칭의의 교리와 연관된다.

칼빈은 세례에 관한 많은 장을 할애하여 재세례파에 대한 부당성을 공격했다. 제세례파는 로만 캐톨릭 사제들의 손으로 행해지는 세례에 대하여, 그 사제들이 참 세례를 주기에는 부족하며 무능력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 세례를 거부하였다. 칼빈은 이에 대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점이며, 세례를 집전하는 자가 어떠한 과오나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위한 거룩한 약속들은 충족된다고 대답하였다.


유아세례론의 문제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은 칼빈이 재세례파의 의견에 반대하여 유아세례를 옹호하고자 했을 때 더욱 심각해졌다. 칼빈은 유아세례의 근거를 교회의 전통 속에서 찾는 것은 스스로 허락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유아세례라는 관습에 대하여 성서적 증거를 발견하고자 노력하였다. 물론 칼빈이 이러한 문제를 다룬 최초의 개신교 신학자는 아니었다. 칼빈보다 먼저 즈빙그리가 이러한 문제를 다루었으며, 그도 역시 칼빈과 동일한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루터 역시 유아세례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으나, 그는 성서적 주장보다도 오히려 권위적, 전통적 주장에 호소하였다.

칼빈도 처음에는 유아들이 그들 스스로의 믿음을 부여받고 있다는 루터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아이들도 구원받고자 한다면 믿음을 지녀야 하며, 이러한 조건은 어린아이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는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필요조건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특히 재세례파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당한 후에, 그는 유아세례를 반대하던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칼빈은 유아세례가 거룩한 제도임을 입증하고자 노력하였다. 신약에는 분명히 유아세례를 외적 의식으로써 행한 증거가 없다. 그러나 외적 의식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칼빈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죄사함을 약속하셨으며, 금욕의 표징이자 의식으로써의 할례를 제정하셨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세례가 유아들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재세례파에 대하여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유아들이 미래의 믿음과 회개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면, 비록 우리가 외관상으로는 아무 것 도 볼 수 없지만, 그 씨앗은 성령의 숨은 역사하심을 통하여 유아들에게 심어지게 된다.


그러나 비록 세례가 유익하고 참으로 필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세례가 없으면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칼빈이 말하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죄하시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세례를 무시해도 좋다는 듯이 대해서도 안된다. 성례전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위한 단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따름이다. 성령이 그 수단을 반드시 필요로 하시는 것은 아니며, 또한 세례가 없이도 우리를 그리스도와 일치시킬 수 있다.

결국 칼빈은 유아세례에 관하여 명백하게 언급한 구절을 단 한 구절도 신약에서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그는 할례와 유아에 대한 그리스도의 축복으로부터 유도해 낸 간접적인 추론만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이로 인해 칼빈은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 점에 대해서 칼빈 자신도 자신의 해석 방법이 지닌 결함을 인식하였지만, 결국 유아세례가 교회와 신자의 신앙심에 유익한 것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성만찬 논쟁

1536년에 칼빈의 주된 관심사는 성만찬에 관한 로마 교리를 반박하는 것이었다. 성만찬의 많은 부분에 대한 설명을 Luther에게 의지하고 있었지만, 1536년 이후 적어도 한 가지 견해, 즉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라는 루터의 생각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게 되었다. 루터 이외에 칼빈의 성만찬 교리 형성에 가장 공헌한 이들은 바로 어거스틴과 부커였다. 어거스틴의 성례론은 칼빈 교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리고 부커의 기여 역시 많다는 점은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비록 칼빈이 이처럼 공감할 수 있는 성만찬의 개념을 루터와 심지어는 부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었지만 Zwingli에게서는 그렇지 못했다. 칼빈은 즈빙그리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칼빈은 루터의 저서를 읽고 난 후, 즈빙그리가 성례전에 관하여 단지 껍데기뿐인 허구적 상징만을 인정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은 입장이다. 즉 믿음이 성령의 역사하심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믿음의 대상이 없는 것은 아니며, 그 대상이란 바로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서에 내포된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 증거가 필요한 것처럼, 성령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기 위하여 성례전을 이용하신다. 성례전은 거룩한 제도이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택하신 그 수단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 1559년에 칼빈은 다시 한번 성례전을 단지 믿음의 증거로만 표현한 즈빙그리의 개념은 그릇된 것이라고 말했다.

성만찬의 의미는 약속들에 있다. 성례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신자들을 강건케 하고, 신자들에게 확신감을 주는 것은 바로 약속의 말씀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를 위하여 주어졌으며, 또한 우리의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은 바로 약속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우리가 나약하기 때문에 직접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다. 그리스도가 세속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함이다.

성례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행해진 약속은 동시에 물질적 표징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다. 상만찬은 우리의 불완전함 때문에 물질적 표징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상징화된다. 그렇지만 그 상징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성만찬의 진리와 본질을 결합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영적 실체는 결코 물질적인 성찬물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또한 그것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영적 실체는 물질적인 것들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다. 로마 교리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도 루터의 공재설(consbstantiation)도 즈빙그리의 상징설(symbolization)도 아니다. 성찬물과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의 관계에 관한 칼빈 개념의 역사적 선례를 찾아보면 오히려 부커의 교리와 가장 근접함을 본다. 신자와 그리스도 간의 일치의 동인으로서 성령의 매개사역을 중시함으로서, 그는 루터와 즈빙그리 사이의 성만찬 논쟁의 종합을 일구어내게 되었다. 신자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서의 상징인 떡과 포도주를 먹는다. 그러나 이는 단지 상징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된 몸이 공간적으로 무한하며 모든 것을 충만 시켜 준다고 생 각한다면, 분명히 그 몸의 본체는 폐기될 것이며 또한 신성과 인성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점 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오직 거룩하신 성령만이 편재성을 부여받았다. 이처럼 칼빈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불가시적인 유형적 임재에 관한 교리를 거부하였다. 그리스도의 현존을 강조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은 성령의 매개를 강조하는 일이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할 수 수 있으며 또한 ‘지금 여기에’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소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신비로운 성령의 중재를 강조하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

한편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의 물질적 원소들과는 아무런 국지적이거나 공간적인 관계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하늘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불가시적으로 성만찬의 여러 장소에 임재할 수 없다. 성령은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띠라고 하는 생각은 칼빈의 기본적인 전제였다.


주 예수께서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사를 전하여 주심으로써 우리가 그분, 즉 그 분의 몸과 영혼과 하나가 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몸에 참여하는 것이 실제로 필요한 것 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치의 띠는 성령이시다. 성령이 우리를 함께 결속시켜 주면, 마치 도관과도 같이 모든 그리스도의 실재 및 그리스도가 지닌 것들을 우리에게 전하여 준다.


천상의 그리스도와 지상의 신자들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거리를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초월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오심을 느끼게 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임재하신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분께 가까이 가도록 역사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분 및 그분의 은사들과 교통케 한다. 물론 성령의 중재하심 하에 그리스도와 교통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신자뿐이다. 왜냐하면 불신자가 그리스도의 임재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분에게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분에게 연결된다면 그때는 이미 불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성만찬이 끝난다고 해서 그 관계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치는 믿음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성만찬 이전에도 성만찬 이후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성만찬은 하나의 도구로서, 성령은 이 도구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관한 확신감을 끊임없이 갱생시켜 주며, 또한 우리의 믿음을 강건케 하고 심화시켜 준다. 성만찬은 우리의 연약함에 합당한 물질적인 혹은 유형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말씀을 충만시키는 역할을 하며, 더 나아가서는 말씀의 역사하심을 배가시켜주는 것이다.


4. 닫는 글: 성령 안에서의 일치


칼빈은 하늘과 땅,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연결시켰는가? 그는 이것을 성 삼위(聖 三位)의 셋째 품격, 즉 성령에 의해서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성령은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것들을 연결시켜준다. 그리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달시켜 주는 매개(媒介)이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공덕과 희생의 효과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교회에 임재하며 또 실제적으로 신자들에게 전달된다고 보았다.

또한 성령은 자연히 믿는 자들 안에서만 역사하는 것이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그것을 합당치 않게 받는 자들에게도 주어진다고 하는 루터파의 가르침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썩어질 물질에 예속시켜 나타내는 것은 하늘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편재(偏在)한다는 개념은 단호히 거부되었다. 칼빈은 성만찬에 있어서 육체적, 장소적 의미 대신에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강조하였다.

이처럼 성령은 교회 안에서 신자들 사이의 진정한 영적 교제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연결해 주는 띠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교제의 수단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세례와 성만찬 등의 성례전을 주셨다. 그러므로 성례전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화합케 하며 또한 신자들의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수단이다. 그리고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었다면, 성령은 그 안에서 우리를 더욱 강건케 하여 마침내 그 분과 우리가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천국의 삶을 누리게 해주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영적인 생활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며 또한 교회의 하나되는 역사의 변함없는 근거이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의 생명과 성령에의 참여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일치 자체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일으키는 움직임이 시작될 수 있는 곳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며, 그러한 시작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로부터이다. "성령의 매는 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효과적으로 자신과 일치시키신다.“ 그리스도와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들 간의 일치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일치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은 칼빈의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일치’ 모티브는 곧바로 청교도들에게 직결되었다. 청교도사상에 있어서의 성령론은 전적으로 칼빈주의적 기반을 지니고 있다. 즉 성화는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주어지는데, 성령께서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화의 길을 추구해 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웨이크필드(Wakefield)가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다”라고 했듯이, 청교도들은 그들의 성례전이나 예배, 또는 설교 등 모든 교회 기능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교리를 중시하였다.

현대 개신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교회적, 사회적 문제가 바로 분파주의의 치유에 있다. 이를 극복하고 하나된 힘을 결집해야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요, 또한 주님이 주신 지상명령(至上命令)인 세계선교 또한 효과적으로 완수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시대적 요청과 함께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일치’ 중심의 성령론은 현대 교회의 분파주의를 치유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해 나가는 일에 필수적으로 적용되어질 21세기 교회론의 큰 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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