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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超越)의 하나님에서 포월(匍越)의 하나님으로

"신에게 솔직히"(존 로빈슨)


들어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는가?

그는 어떤 하나님이시며 어디에 계시는가?등등 우리는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살아간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눈물을 주시기에 하나님을 고백한다. 인간은 눈물의 존재이다. 우리네 생의 처음을 우리는 눈물로서 이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또 생의 끝을 타인으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끔 하기에 인간은 눈물의 존재이다.

그 눈물을 가지고 신학을 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외면하시지 않으신다. 우리네 인생이 지치고 힘겨울때면 하나님은 방관만하시고 우주의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느라 분주하시기에 그래서 너무나 바쁜 나머지 우리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 한방울 한방울속에 함께 계신다.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눈물,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필자는 하나님을 믿는다.


갈수록 다양화 되어가고 다변화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올바르게 변호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선상에서 종교적 물음들, 적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물어질 수 밖에 없는 질문들을 당연히 물으면서 그리고 그것이 적어도 그리스도를 믿는 본질에 대한 도전이 아닌 오늘에 널브러져 있는 종교라는 틀 속에 갇혀 숨막혀 있는 그리스도를 살리는 길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그것은 그 물음이 어떤 물음이든지 간에 신 앞에서 솔직한 물음인 것이고 거기에 누구든지 솔직히 답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존 로빈슨 주교의 '신에게 솔직히'는 참으로 많은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제 이 두껍지 않지만 그러나 심오한 내용이 들어 있는 이 책을 정리하면서 신 앞에선 단독자 혹은 상관자의 모습에서 정직해 보려고 한다.


B. 초월(超越)의 하나님에서 포월(砲越)의 하나님으로


1. 원치 않는 혁명(Reluctant Revolution)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신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리고 그 신은 어디에 있는가?

위에 있다, 밖에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로빈슨은 이런 고민을 공개적으로 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그는 틸리히, 본회퍼, 불트만을 인용하면서 이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틸리히는 그의 설교집 '흔들리는 터전'에 실린 설교인 '실존의 깊이'라는 설교에서 전통적 종교적 상징방법이 '높이'의 표현에서 '깊이'의 표현으로 바뀌어질때 어떠한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틸리히는 '신은 그 존재성을 파악하려고 우리가 애써야 하는 따위의 저밖에 있는 어떤 투영이나 하늘 저쪽에 있는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의 기반(ground)이다'라고 말한다.


본회퍼는 그의 '옥중서간'에서 '종교없는 기독교'라는 말을 소개를 한다. 본회퍼는 하나의 물음을 제기한다. '만약에 사람들이 종교라는것 없이 개인의 구원에 대한 염원도 없이 죄의식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느끼면 신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본회퍼의 대답은 이렇다. 성 바울이 1c사람들에게 할례라는 조건 없이 기독교를 요구한 것 같이 신도 20c사람들에게 종교라는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기독교를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회퍼는 비종교화론을 제기를 한다.


붙트만은 '신약성서와 신화'라는 제목의 논문을 41년도에 썼다. 여기서 그는 신화적 요소는 복음의 역사가 순수역사 이상의 것이라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의 초역사적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서 신약 성서 기자들은 전존재성, 성육신같은 신화적 용어를 썼다. 그래서 불트만은 이것을 비신화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빈슨은 이러한 문제제기들을 다루면서 이런것들이 큰 반향을 불러오리라 믿으면서 그것을 '원치않는 혁명'으로 표현하고 있으면서 다만 끝까지 하나님에 관해서 정직하려는 자세를 지닌다.


로빈슨은 이 세 신학자를 토대로 해서 유신론의 종말이라는 제목하에 다음의 세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논의를 심화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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