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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종교의 예배와 계약종교의 예배 -허호익

안식일 개념의 예배 회복적 이해

- 제사종교의 예배와 계약 종교의 예배


허호익(대전신대 교수 www.theologia.pe.kr)



1. 예배 개혁의 여러 방식들


예배 개혁 혹은 예배 갱신운동은 하나의 시대적 조류가 되었다. 여러 방식의 예배 개혁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크게 4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1) 오래된 예배형식의 회복으로서의 예배개혁이다. 가장 고대적인 예배 형식의 원형을 단지 회복하려는 개혁운동이다. 초대교회의 예배나 고대교회의 예배 형식들을 발굴하고 그 예식들을 소개하고 오늘의 예배에 적용하려는 시도들이 종종 있어왔다. 특별히 장로교의 경우에는 칼뱅(J. Calvin)의 예배의 신학(theology)과 실제(practice)를 회복하려는 경향으로, 감리교의 경우에는 웨슬리(J. Wesley)의 주일예배를 복원하고 적용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입장은 흔히 왜 교회의 예배가 시대에 따라, 그리고 민족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달라졌는지에 대한 신중한 고려를 필요로 한다. 단순히 예배의 개혁을 “오래된 예배형식의 회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 예배의 개혁은 우리에게 진정한 희망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올바른 예배의 개혁은 “오래된 예배형식”을 발굴하고 현대에 적용할 것을 요청한다.

2) 에큐메니칼 추구로서의 예배개혁이다. 에큐메니칼적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즉, 천주교, 동방정교회,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루터교, 오순절교회 등 서로 다른 예배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교단들이 서로 예배에 대한 공통점을 발견하고 하나의 예배형태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한 부분으로 시작되어 1982년에 “세례 성만찬 사역(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이라는 제목의 문서가 발표되었고 이에 따라 “리마예식서(Lima Liturgy)”가 만들어진 것이 대표적 케이스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듬(mixed)방식의 예배는 우리들에게 신선함을 주기보다는 혼란을 주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예배순서”라는 극찬을 받았던 리마예식서(Lima Liturgy)는 어느 교단에서도 채택하여 그들의 예배에서 사용하고 있지 않다.

3) 토착화로서의 예배개혁이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문화”를 예배에 수용하려는 입장이다. 서구적인 예배의 틀에서 벗어나서 자기리 민족과 전통에 어우러지는 예배를 드리자는 것이다. 한국의 징을 우려 예배를 시작하고 국악기 반주와 국악찬송을 부르거나 한복 의 개량한 예배복을 입는 등 여러 에배의 토착화가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예배의 토착화는 어느 한 두 사람의 발명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토착화는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의 토착화는 접근방식에 있어서 신중한 고려를 필요로 한다.

3) 창조적 예배의 개발로서의 예배개혁이다. “예배란 언제나 새로운 것을 향해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전통적인 예배 형식의 파괴를 통한 “예배의 창조성”에 관심을 가진다. 그들은 예배당을 공연장처럼 꾸미고 강단의 십자가를 없애고 그곳에 대형 화면을 설치하거나 많은 나무들을 놓아 울창한 숲처럼 꾸미기도 한다. 크리스털로 강단을 만들거나, 아예 강단을 없애 버리기도 한다. 전통적인 예복이나 스톨 등을 벗어버리고 목회자는 청바지를 입거나 양복을 입고 설교를 하기도 한다. 찬송의 경우에도 전통적인 노래보다는 새로운 장르의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창조적 예배는 현대의 기술문명과 연결되면서, 멀티미디어, 인터넷예배 등, 다양하게 발전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창조적 예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자신들은 형식의 무의미성을 버리고 기독교의 신앙적 내용에 충실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논지이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들이 정작 결과물로 만들어 내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형식이라는 점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가운을 입지 않은 것만이 형식이 아니다. 목회자가 평상복을 입었다는 것이 형식의 파괴가 아니다. 그것은 평상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하는 “또 다른 형식”일 뿐이다. 따라서 오늘의 창조적 예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은 언제나 “우리가 이 새로운 형식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가?”를 끊임없이 물어야만 한다.

이 외에도 예배 안에서 우리 주위의 세상과의 연대를 표현하는 충분한 요소들이 표현되어야 하며, 예배의 행위들과 일상적인 삶 사이를 연결 강화하여햐 한다는 주장과 개인주의적인 예배가 아니라 공동체 성을 회복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그리고 예배에서 남성의 주도권과 남성언어로 되어있는 예배언어들을 양성적이 것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여성주의적 개혁운동이 포함된다.

그러나 전통적인 예배 형식을 회복하든, 에쿠메니칼적인 예배의 모범을 정립하든, 문화적 취향에 맞게 토착예배 형식을 도입든 그리고 시대의 조류에 맞게 새로운 예배 형식으로 창의적으로 도입하든 중요한 것은 그러한 예배 형식의 갱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지 그 목표가 분명하여야 한다. 다시 발하면 예배를 통해 표현하려고 하는 “신앙의 내용”을 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의 새로운 예배가 기독교적인 예배로서 역동적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2.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의 갱신이라고 했을 때 어떤 예배가 바른 예배인가하는 개념의 정립이 요청된다. 예배에 대해서 대체로 다음 4가지 정의가 제시된다.

1) 예배는 제사이며 반복되는 의식이다. 유대교의 성전 제사나 동방교회,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사의 경우처럼 이러한 예배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예배의 장소, 예배의 시간, 그리고 예배하는 방법이었다. 즉, 정해진 시간(교회력)에 정해진 특별한 장소(예배당)에서 정해진 사람(제사장, 사제 등)에 의해서 정해진 방법(예배서)에 따라 집례되어지는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의식의 재연으로서의 예배는 자칫 내용이 없는 형식만의 예배가 되어버리곤 하였다. 사람들은 예배에는 참여하였지만,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체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예배는 예배를 드리는 지극정성의 공로 그 자체가 예배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효적(事效的, opus operantum)인 예배관을 함축하고 있다. 종교개혁가들이 반론을 제기하기 전까지 의식의 재연으로서의 예배 는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2) 예배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배는 말씀을 사모하여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듣는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예배의 모든 순서들은 하나님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예배에서 설교의 비중을 극대화하고 라틴어로 드려지던 예배를 모국어로 바꾼 것 등은 이해로서의 예배를 추구한 당연한 결과였다. 말씀과 성례가 예배의 중심이라 했지만, 성례도 보이는 말씀으로 말씀의 종속되는 부차적인 의미로 퇴화되었다.

설교는 우리에게 언제나 올바른 믿음에 대해 가르쳐주고, 그 믿음대로 살아갈 것을 격려하곤 하였다. 설교 중심의 예배는 설교에 대한 이성적인 이해를 강조하기 때문에 반복되고 지루한 설교는 갈수록 설교에 대한 집중을 느슨하게 만들고 예배의 영적 역동성은 약화된다. 지적인 이해의 차원을 넘어 영적 갈급함을 채우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이러한 영적 갈급함을 채우려기보다는 설교에 대한 집중을 높이기 위해 교인들이 들어야 할 설교보다 듣고 싶어 하는 설교를 통해 듣는 자들의 귀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설교의 타협과 왜곡이 생겨나고 신앙의 세속화가 가속된다.

설교가 하나님을 아는 이성적인 반응을 강조하다 보니 삶을 전인적인 영적 반응과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게 되고, 설교와 삶의 괴리가 형성된다. 지적인 차원의 만남이 아닌, 즉 마음과 머리에 새기는 정신이 아닌, 그들의 영에 무엇인가를 갈급히 채우고 싶어 하였기 때문이었다.

3) 예배의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회중의 감정적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배관은 경건주의(pietism)운동과 부흥운동(revival movements)과 그리고 오순절(Pentecostal) 교회 등의 예배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종교 개혁가들이 설교를 통한 인간의 이성적인 부분(이해의 차원)만을 예배에서 강조하였던 데서 기인한 반작용일 수 있다. 감성적인 체험은, 후에 좀더 구체적으로, 성령의 가시적인 체험으로 연결되었으며 최근에 이르기까지 가장 왕성하게 발전하여온 예배관이 되었다.

그러나 영적 갈구와 감정적 경험을 혼돈하였다. 참된 영성은 가시적 감정적 체험을 넘어서는 차원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감정적 체험을 강조한 예배는 결국 무엇을 믿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감정의 격앙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고, 삶이라는 현장을 떠나 감정적 황홀경(ecstasy)만을 찾아다니게 하는 고립화를 초래하곤 하였다.

그리고 예배에서의 성령의 가시적 체험을 강조하다보니 예배의 역동성을 회복할 수 있으나 불가시적인 성령의 역사를 가시적인 것으로 협소화시키는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4) 예배는 새로운 예배 참여자를 동참시키는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열린 예배나 구도자 예배 등에서 추구하는 바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예배에 참여시키기 위해 처음 나온 예배에서조차도 불편함이나 어색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비자가 다시 그 물건을 사러 오듯이, 예배의 현장을 다시 찾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만족을 추구하는 예배신학은 예배순서뿐만 아니라 여러 부분에서 다양하게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좋은 화장실을 꾸미어 놓는다든지, 아이들을 위한 예배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예배자가 자신의 아이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한다든지, 주차장을 새로운 사람들이 편하게 접근토록 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심벌들이나 심지어는 십자가와 같은 심벌조차도 사용하지 않고 극장과 같은 예배당에서 평상복이나 청바지를 입고 예배를 진행하며, 그들에게 익숙한 음악의 장르들을 골라 찬송을 부르는 예배의 형태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예배신학 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자 중심의 사고는 소수, 혹은 개인의 생각과 취미 등을 맞추어 나가는 개인주의적이고 탈세대적인 형태로 발전되고 있다. 과거 수백 년 동안 불리어졌던 찬송가들을 새로운 세대가 모른다고 하여서 폐기되고 새로운 노래들이 수없이 나오고 사라지는 형국이 되었다. 교회의 전통이 사라지고 상황과 현장에 민감한 예배의 인도자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혹은 구도자들)에게 만족감을 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도록 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듯하다.

이러한 예배의 개념과 정의는 예배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에 제한되어 있다. 물론 예배는 제사이고 말씀의 선포이고 하나님의 대한 영적 체험이고 불신자들을 예배공동체로 불러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통해 이루어야 할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새로운 질문이 요청된다.


3. 예배의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질문은 앞에서 살펴본 예배의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통해 표현하려고 하는 “예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의 새로운 예배가 기독교적인 예배로서 정체성과 정당성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예배를 통해 복을 받겠다든가, 예배를 통해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얻겠다거나, 예배를 통해 죄책감을 해소하겠다는 거나, 예배를 통해 자신의 특기와 취미를 살리겠다거나 등등 세속적인 욕구는 현대 생활이 복잡하고 경쟁적일 수록 등가속하는 것이다. 다라서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세속적인 대체예배가 부가가치 높은 신흥 산업으로 등장한지 오래이다. 마인드 콘트롤, 초월명상, 요가, 단과 기 훈련, 뇌호흡 등등이 세속사회의 새로운 대체예배로 각광을 받고 그 수요와 공급이 급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 이러한 세속적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고, 영리한 교회와 목회자는 발 빠르게 이러한 욕구에 부합하도록 예배를 리모델링하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욕구 충족은 예배의 부차적인 목표이기는 하지만 예배의 본래적인 목표라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현대에 와서 다양하게 갱신과 개혁이 시도되는 예배의 형식과 내용을 통해 표현하려고 하는 “예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배의 진정한 위기는 예배의 형식과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목적을 혼동하는 것이 예배의 위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가들은 “중세교회의 예배가 잘못된 신앙과 신학을 표현하고 있으며 따라서 올바른 신앙에 의해서 예배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을 포함하여서 개신교도들이 말하는 예배의 개혁과 관련한 모토는 따라서 “lex credendi, lex orandi (the rule of belief a norm of prayer)”로 바뀌어 진다. 즉, 올바른 신앙의 내용(belief or faith)이 예배의 형식을 주장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서에 나타난 예배의 진정한 목적을 창세기와 십계명의 안식일 개념과 성막의 지성소 개념에서 재조명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주로 십계명의 안식일 개념만을 다루려고 한다.


3. 십계명 새로운 이해 : 이중 구조에서 삼중적 구조로


기독교의 신앙의 원초적인 진술을 담고 있는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다. 흔히 구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고 신약은 오신 메시야의 약속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 약속(testament)의 성서적 표현은 계약(berith, covenant)을 뜻한다. 구약의 옛 계약은 시내산 계약을 지칭하는 것이고 신약의 새 계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에서 지칭하는 개념이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계약은 시내산 계약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급 후 시내산에 머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그들을 선택하여 이집트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를 새롭게 설정한다.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로 하여금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출 19:6)으로 삼고 자신들의 그들 즉 “히브리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자”는 계약인 것이다. 구약성서에는 많은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등 여러 인물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일이 기록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계약은 공동체적이고 쌍무적이며, 역사적이고 인격적 계약이라고 할 수 있는 시내산 계약이다.

시내산 계약조문인 십계명은 두 돌 판에 쓰여졌다는 것에 착안하여 이중적 구조로 해석하여 왔다. 1~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고, 5~10계명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서구의 이원론적 시각에서 본 것이고, 오히려 삼중적 관계로 설명하여야 할 것이다.

계약조문인 십계명의 구조 역시 천지인의 조화라는 삼중적 삼중 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1~3계명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라는 계명이고, 5~7계명은 동료 인간과 바른 관계를 가지라는 계명이고, 8~10계명은 물질 또는 자연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라는 계명이다.


■ 십계명의 삼중적 구조

1. 대신관계의 계명(하나님과의 바른 수직적 영성적 관계)

1계명:다른 신 예배금지

2계명:신의 형상 제조금지

3계명:야훼 이름 오용금지

2. 대인관계의 계명(이웃과 바른 수평적 연대적 관계)

5계명:부모에 대한 저주금지

6계명:살인금지

7계명:간통금지

3. 물질관계의 계명(물질 또는 자연과 바른 순환적 친화적 관계)

8계명:절도금지

9계명:허위 고발금지

10계명:탐욕과 탈취금지

4. 삼중적 관계의 계명(삼중적 삼중 관계의 지속 회복 강화)

4계명:안식일 노동금지

1)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기 위해 하나님께 경배함

2) 온 집안 모든 사람과 함께 모여 하나님께 경배하고 함께 쉼

3) 모든 일에서 쉬고, 육축과 땅도 쉼


물론 8-10계명이 물질에 대한 관계로만 되어 있지만 물질은 자연과 상응 관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 아니고 자연도 마찬가지로 구원의 대상이다. 레위기는 계약신앙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이 모든 계약을 지키면 자연을 통한 축복이 주어질 것임을 단언하였다 (레 26:3-4).

이러한 계약신앙에 기초 해 있는 예언자들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자연 사이의 계약이라는 창조신앙을 새롭게 설정하고 있다. 특히 호세아는 종말의 새 날에는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까지도 하나님과 더불어 계약을 맺게 될 것이고 따라서 땅에서 전쟁이 그칠 것이라고 선언한다.(호 2:18)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언약이 사람과 단독적으로 맺은 언약이 아니고 ‘숨쉬는 모든 짐승들’을 포함한 생태학적 언약(ecological covenant)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1-22)


그러므로 성서 전체에서 조망해 볼 때 계약신앙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물질) 사이의 삼중적 삼중 계약관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양 신학은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십계명을 이중적인 구조 즉,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종교적 의무와 사람을 상대로 한 사랑의 의무로 구분한 전례를 따름으로서 물질과의 관계와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생태학적 의무를 간과하였다. 그래서 근세의 서구 기독교는 역사상 두 가지 큰 위기에 지면하게 된 것이다.

하나는 물질에 대한 바른 관계의 위기로서 등장한 것이 바로 산업화 이후 생산의 효율성만을 극대화한 자본주의의 이기주의적 물질관과 분배의 정당성만을 강조한 공산주의의 강요된 이타주의 물질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빈익빈 부익부의 자본주의적 양극화의 물질관의 한계와 모두가 못살게 되는 공산주의의 하향 평준화의 한계를 모두 극복할 수 있는 “많이 거둔 자도 남지도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은” 만나의 경제신학적 대안의 필요가 절실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근대의 인구증가와 산업발달과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창세기의 가르침을 극대화하여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겨온 기독교의 잘못된 자연관으로 인한 자연 생태계의 위기인 것이다. 따라서 자연정복의 인간중심적 자연관에서 벗어나 자연친화적인 생태주의적 자연관의 대안이 요청되고 있다. 십계명의 삼중적 삼중 관계론은 서구신학의 이러한 물질관과 자연관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적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4. 안식일 개념의 예배 회복적 이해


제 4계명은 안식일에 관한 것이다. 이날에는 자연의 저주에 의해 땀 흘려 수고했던 인간이 그 수고로부터 쉬며, 상호 소외된 인간이 한 자리에 모여 멀리했던 하나님을 다시 섬기라고 가르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 4계명은 세 대목으로 요약된 아흡 계명을 다시 하나로 묶어 천․지․인의 조화를 말한 것이다. 안식일은 천지인의 조화를 통해 이 삼중적 삼중관계를 회복하고, 지속하고 강화하는 날이다.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의 바른 예배를 회복하자”는 나이스크 운동(Nyskc Movement)의 5가지 지침을 정하고 있다.


(1) 새로운 생활 (New Life) - 영혼의 호흡인 새벽기도/ 회복의 시간 (first hour with God)

(2) 하늘의 만나 (Yielding for Manna) - 영혼의 양식인 성경애독/ 회복의 양식 (nurture)

(3) 구령생활 (Salvation for one by one) - 성도의 열매인 개인전도/ 회복의 방법(evangelism)

(4) 주일성수 (Keeping for Lord's Day) - 성령의 교통이며 성수주일/ 회복의 날 (shalom)

(5) 온전한 헌금생활 (Complete Offering) - 축복의 도리요 헌신인 일조전납/회복의 모습 (devotion)


구약성서에서 예배신학의 근거가 되는 안식일 개념을 통해 나이스크의 정신인 말씀의 회복, 기도의 회복, 찬양의 회복, 전도의 회복, 특히 경건의 회복과 관련하여 새롭게 조명해 보려고 한다.

1) 우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날이다.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하늘의 만나(Yielding for Manna)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서 하나님과의 바르고 편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 지속하고 강화하는 날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어 주일성수 (Keeping for Lord's Day) 오직 예배, 전도, 찬양, 봉사에만 전심을 다함으로서 새로운 생활 (New Life)을 회복하고 지속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2) 안식일은 모든 백성이 성회로 함께 모여 교제하고 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남녀 노소할 것 같이 주인이나 종이나 손님들도 함께 하는 날이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기 위해서 믿지 않는 이들을 예배에 함께 참여시키는 전도의 회복(Salvation for one by one)이 중요한 것이다. 전도의 목적은 모든 백성이 함께 예배드리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웃과 바른 관계를 가진 후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뜻도 포함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마 5:23-24)고 하였다. 모든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는 그들이 예배 안에서 하나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이 날에는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날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물질이 많거나 적으나 하나님 주신 것으로 여기고 감사하는 물질에 대한 바른 관계를 맺는 날인 것이다. 온전한 십일조 드리며,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생활화하자는 나이스크 운동의 다섯째 지침인 온전한 헌금생활(Complete Offering)은 안식일의 개념의 주요한 핵심인 것이다.

3)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노동으로부터 편히 쉬는 날이다. 이 날에는 가축도 쉬는 날이며, 땅도 쉬어야 한다. 자연과 바른 관계를 맺는 날인 것이다. 온 우주를 회복하는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

이러한 안식일 정신에서 생겨난 안식년(레 25:5)이다. 매 7년째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하고, 씨뿌리는 일이라든가, 열매를 거두는 일, 그리고 만일 휴식 중인 경작지에 자생(自生)의 열매가 생기면 그 땅의 주인이 아니라 빈민의 식물(食物)로 할 것이 규정되었다. 본래 토지는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토지도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해야한다는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해에는 채무(債務)의 탕감도 행해졌다(출 23:10, 11, 레 25:1-17, 신 15:1-12, 31:10-13).

일곱 번째 안식년 다음 해인 희년(레 25:10-13, 27:18a, 21, 민 36:4)도 이러한 정신에서 생겨난 것이다. 희년에는 팔렸던 토지나 가옥은 원소유주에게로 무상으로 돌아가고, 노예는 모두 무조건 해방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희년은 물질과 바른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가장과 세계를 회복하는 기쁨의 해였던 것이다. 안식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이며 이를 통해 예배가 살면 교회가 살고, 가정과 나라가 살게 되는 것이다. 안식년과 희년의 가정과 나라를 살리는 회복의 신학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안식일 개념에서 비추어 볼 때 예배는 하나님과 바른 수직적 영성적 관계 , 이웃과 바른 수평적 연대적 관계, 그리고 물질 또는 자연에 대한 바른 순환적 친화적 관계를 회복하고 지속하고 강화하는 거룩한 예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식이 말씀의 회복, 기도의 회복, 찬양의 회복, 전도의 회복, 그리고 경건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5. 제사종교의 예배와 계약종교의 예배


존 캅(J. Cobb)은 종교를 크게 대별하여 눈의 종교와 귀의 종교를 구분하였다. 전자는 보여주는 종교로서 제사종교이고 후자는 들려주는 종교로서 말씀(계약)종교라고 하였다. 모세의 종교에 의하면 하나님을 본 자는 죽지만 그의 말씀을 들고 순종하는 자는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 보다 낫다”(삼상 15:22)는 초기 이스라엘 종교제도의 이상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고대근동의 원시 주술적 제사신앙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계약공동체의 계약신앙 차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계약공동체의 계약신앙 고대근동 자연종교의 제사신앙

들려주는 귀의 종교 보여주는 눈의 종교

진리와 사랑과 정의의 인격적 계약신앙 풍요와 다산과 기복의 주술적 제사신앙

전인적인 인격적 응답의 신효론(信效論) 제사 행위 자체의 도구적 사효론(事效論)

영속적 계약 갱신 신앙 일시적 일과적 순응 신앙

삶의 전역에 걸친 통전적 생활신앙 일상적인 삶과 별도의 신앙생활

공동체적 역사적 신앙 개인적 자연적 신앙


결론적으로 어느 종교이든 예배가 존재하고 그 다양한 형식과 내용은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없다. 핵심은 예배의 목적이다. 최초의 예배라고 할 수 있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관한 창세기 기사에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단지 겉으로 보이는 제물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신앙 인격을 먼저 보시므로 “아벨과 그 제사를 열납”(창 4:5)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도 박회와 근채와 회향의 십일조도 행하어야 하지만 율법에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으니 공의(의)와 인자(정)과 신실(지)은 진선미의 전인격성을 지칭한다.

존 캅이 잘 지적한 것처럼 제사종교에서는 예배행위 그 자체의 화려함과 역동성과 장엄함과 그리고 거기에 솓아붓는 지극정성이 인간에게 많은 종교적 세속적 혜택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사효론(事效論)에 근거해 있다. 그러나 계약종교의 경우 예배는 전인적인 인격적 응답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몸으로 거룩한 산제사를 들이는 것이다.(롬 12: 2-3) 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거룩한 산 제사로서의 예배는 우리의 삶의 전 영역을 통해 통전적으로, 일평생을 동해 지속적으로 그리고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신 6:5) 전인적으로 하나님과 바른 수직적 영성적 관계, 이웃과 바른 수평적 연대적 관계, 물질 또는 자연과 바른 순환적 친화적 관계를 지속하고 회복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예배학자인 버크하르트(John E. Burkhart)는 "기독교 예배란 하나님께서 하신 일, 하고 계신 일, 그리고 하시기로 약속하신 일에 대한 인간의 흥겨운 응답"이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 하고 계신일, 그리고 하기로 약속하신 일을 이러한 삼중적 삼중관계의 회복과 지속과 강화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식이 말씀의 회복, 기도의 회복, 찬양의 회복, 전도의 회복, 그리고 경건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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