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대 구약학 교수/박경철

Yelding for manna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너희는 각자 먹을 만큼씩만 거두라"(출 16:16)

세자르 프랑크(Cesar Franck)의 저 유명한 ‘생명의 양식’(Panis Angelicus)의 아름다운 선율이 파바로티의 고운 목소리로 거실 가득히 흐른다. 성찬식 때 성가로도 많이 쓰이는 곡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때 우리는 곧잘 “우리에게 하늘의 만나를 내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서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 이들에게 내려주신 하늘의 ‘만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만나’가 단지 축복의 상징인 하나님의 은혜만인가?


‘만나’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양식으로 알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만나’는 ‘하늘의 양식’이요,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은총’으로만 알기 쉽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성서가 본래 말하고자 하는 ‘만나’ 이야기의 본래 핵심이 빠진, 아주 잘못된 인식이다! 이제 성서의 ‘만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현 정경의 모습이 보여주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기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현 정경이 보여주는 본문의 배경


이스라엘 백성이(많은 혼혈족[에레브]들도 함께! 출 12:38) 이집트에서 탈출한 지 두 달하고 보름이 지난 때였다(16:1). 그들이 양식을 얼마나 갖고 이집트를 떠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들이 데리고 나온 집짐승들을 잡아먹었는지, 아니면 누룩을 넣지 않은 빵 반죽만으로 끼니를 대신했는지(12:38-39)는 정확치 않다. 그러나 이집트를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충분한 양식을 준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12:39). 또 가나안 땅까지 무려 40년이나 걸릴 것이라곤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현 성서의 정경의 형태로 보면, 13장에 가서야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가는 길을 돌려(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홍해(갈대바다 - 얌숩)로 가게 했다는 기사가 나오기 때문이다(13:17-18).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에서 구원의 기적 사건을 경험한 후(14장), 구원의 기쁨도 잠시, 물 없는 사흘 길의 광야를 지나 ‘마라’에 이르러 쓴 물맛으로 인해 ‘불평’하고, 단 물이 되는 기적을 경험한다(15:22-26). 그 뒤에 신 광야에 도착해 굶주림으로 인해 또 다시 ‘불평’하는 내용이 ‘만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16장의 시작이다. 여하튼 두 달 반이 지나자 이스라엘 백성에겐 먹을 양식이 다 떨어져 굶어 죽을 지경까지 갔고, ‘이스라엘 온 회중’(콜-에다트 브네-이스라엘)은 결국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한다(16:2).


이스라엘 광야 유랑기의 핵심 주제를 흔히 ‘불평주제’(murmuring motif)라고 부른다. 광야 생활 중 곤경에 처할 때마다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어서 그렇다. ‘갈대바다’ 앞에서 뒤를 좇는 바로의 군대로 인해 두려워할 때 그랬고(14:11-12), 마실 물이 너무 써서(마라) 그랬고(15:22-26), 물이 없을 때는 ‘불평’을 넘어 대들기도 하고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했다(17:1-7).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민 13장)에,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불평’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국 하나님은 저들이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까지 말한다(민 14:26-35).


그런데 이상의 ‘불평주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시험’이라는 것이다. 갈대바다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시험’(낫사)했다는 말도 없다. 그런데 ‘마라’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법도’(호크)와 ‘율례’(미쉬파트)를 정하시고 “거기서 그들을 시험하셨다”(붸샴 닛샤우)고 밝히고 있다(출 15:25).


그러나 그 시험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되었던 ‘므리바’의 기적 사건에서는 반대로 이스라엘이 야훼를 ‘시험’한 것으로 나온다(17:2b,“어찌하여 야훼를 시험하느냐?”). 그들의 ‘시험’ 내용은 “야훼가 우리 중에 계시는지, 그렇지 않은지”였다. 야훼를 ‘시험’(낫사)했다고 하여 이 장소의 이름을 ‘맛사’라고 부르게 된다(17:7). 가나안 땅 정탐 후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그들이 광야 생활 내내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말하고, 결국 ‘불평’과 ‘시험’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이 취소되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민 14:22-23). 모압 평지에 이르러 모세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하신 것과 규례를 삼가 지키라”고 권고한다(신 6:16-17).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준 교훈이 바로 이스라엘 광야 유랑기에 나타난 ‘불평’과 ‘시험’에 관한 이야기라는 셈이다. 이것이 광야 유랑기에 얽힌 현 오경의 구성이다. 그런데 ‘불평’과 ‘시험’의 이야기인 ‘마라’ 이야기(15장), ‘만나’ 이야기(16장) 그리고 ‘맛사’ 이야기(17장)를 연속적으로 배열하고 있는 현 정경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것도 시내산 도착(출 19장) 이전에 말이다. 현 오경의 최종형태 구성이 보여주는 것은 모든 법률과 율례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으로 나온다(출 19장-민 10:10).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한 것이 출애굽기 19장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도착하기 전 이미 광야에서 ‘법도’와 ‘율례’를 주었다고 보도하는(출 15장-‘마라’ 이야기) 현 정경의 순서는 무슨 뜻일까? 또한 출애굽기 16장 ‘만나’ 이야기는 아직 ‘증거판’이 마련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만나’를 ‘그 증거판’ 앞에 두라고 말하고 있다(16:33-34). 이런 본문들 때문에, 학계에서는 현 본문들은 별도의 이야기 단편들이었던 것이 후대에 편집되어 현 자리에 끼워 맞추어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왜 이 자리일까? 시내산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법률’과 ‘율례’를 주었고, 이미 ‘증거판’이 마련되어 있는 ‘마라’와 ‘만나’의 이야기를 출애굽기 19장 이전으로 옮겨 놓은 그 의도는 무엇일까? 지금 최종형태 성서본문이 보여주는 그 구성의 의미가 무엇일까?



만나 - 하나님의 ‘시험’


앞서 살펴보았듯이 ‘마라’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법률’과 ‘율례’를 주셨다고 했다. 그러나 시험의 내용도, 준수해야 할 법 조항들도 나오지 않는다. 지금 성서의 모습 그대로를 읽는 독자가 그런 궁금증을 갖고 있을 때,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만나’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에서 조금 전 읽었던 ‘마라’에서의 상황과 동일한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즉, 이스라엘이 ‘불평’했다는 것과, 하나님이 ‘시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만나’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의 ‘시험’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만나’는 배고파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의 양식을 거저 주신 것이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규칙이 있었다. 아니,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 하는지 안 하는지가 바로 하나님의 ‘시험’이었다. ‘만나’의 규칙, 하나님의 ‘명령’이요 그 ‘시험’의 내용은 ‘각자 먹을 만큼씩 거두라’는 것이다(16:4,16,21,22).

당시의 상황을 한번 그려보자. 광야에 내몰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더욱이 앞으로 얼마나 더 굶게 될지도 모르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하늘에서 양식이 비처럼 내린다는 것이다. 누구나 광야로 나가면 지천에 깔린 양식을 보게 될 것이었다. 마구잡이로 주워 오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언제 또 양식이 떨어져 광야에서 굶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아무리 무거울지라도 가능한 많이 주워오려는 게 모두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남보다 더 빨리 광야에 나가려 했을 테고, 남보다 더 많이 가져다 자신들의 장막 안에 차곡차곡 쌓아 놓으려 했음에 틀림없다. ‘선착순’의 논리가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자,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지 아닌지 ‘시험’의 장이 열렸다. ‘시험’ 문제는 이렇다 : 1) 하루치의 양식만을 가져올 것, 2) 누구나 똑같이 각자 먹을 만큼만(한 오멜=약 2리터 정도) 취할 것, 3) 다음날까지 남겨 두지 말 것 등이다.


당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이보다 더 힘든 ‘시험’이 있을까? 물론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은 이들이 생겨났고, 하나님의 ‘시험’에 불합격자들이 생겨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더 많이 가져와 다음날까지 남겨 놓은 양식은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서’ 아무도 먹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16:20). 하나님의 명령은 또한 ‘장막에 있는 사람 수만큼 취하라’는 것이었다(16:16). 광야로 나간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먹을 만큼인 한 오멜만을 취한 게 아니라, 광야로 나올 수 없었던 이들의 몫까지 챙겨 와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시험’과 함께 주신 ‘법’과 ‘율례’의 근본은 함께 나누고 더불어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남보다 더 힘이 있는 자에게, 광야에 먼저 나간 자에게 더 많은 양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힘이 없는 자, 몸이 불편하여 광야에 남보다 더 일찍 못 나가는 자, 선착순에서 늦는 자들, 아니 아예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없었던 자들에게도 똑같이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것이다.


성서의 주된 관심은 선착순의 논리와 구조에서 뒤쳐진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다는 데 있다. 구약성서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사회의 약자들이었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곧 율법으로 정해졌다. 신명기 24장에 보면 혹 누군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나 포도원에서 수확할 때에 몇을 빼먹고 수확하지 않고 돌아왔거든 그것을 다시 가지러 나가지 말라고 나온다. 이는 가지지 못한 자들, 사회 기득권에서 멀리 떨어진 자들, 사회의 선착순에서 뒤쳐진 자들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었다.


‘만나’이야기의 핵심 내용은 단순히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만이 아니라, 오히려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 더불어 먹고 살 수 있는지의 하나님의 시험이며 명령이었다. 각자 먹을 만큼씩! 그리고 양식을 구하러 나가지 못하는 연약한 자들의 양식을 거두어 오는 더불어 함께!의 시험과 명령이요, 대대로 보존해야 할 규례인 것이다.


만나 - 대대로 간직해야 할 모든 법률과 율례의 기본법

그런데 ‘만나’ 이야기에서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두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만나’ 이야기를 끝맺으며 남긴 마지막 말이다. 하나는 각 사람이 취하는 하루치 양식인 한 오멜의 만나를 ‘야훼 앞’에, ‘증거판’ 앞에 놓아 이스라엘 백성이 자손 대대로 간직하고 기억하게 했다는 내용이다(16:33-34).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는 맺음말이다(16:35).

첫 번째, ‘증거판’과 관련해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사항이 있다. 하나는 ‘만나’가 주는 교훈이 너무도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시켜 주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만나’를 대충 어느 정도 가져다 간직한 게 아니다. 한 오멜의 ‘만나’다! 누구나 똑같이 나누어 먹어야 했던 바로 그 ‘한 오멜’이다. 더불어 살기의 영원한 교훈을 하나님 앞에 두고 자손 대대로 기억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 법궤 안에 모시는 ‘증거판’ 앞에 ‘만나’를 둔다는 의미는, 모든 율법의 기본 정신이 곧 ‘만나’임을 알려주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율법의 근본은 곧 더불어 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앞에서 잠시 문제제기를 했지만, ‘증거판’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말씀을 기록한 판이었고, 이는 법궤 안에 모셔두게 된 것이다(출 25장). 그런데 이 ‘증거판’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 시내산 도착 이전인 광야에서 이미 ‘만나’ 이야기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 정경의 순서가 보여주는 것이다. 곧 모든 율법이 시내산에서 주어지기 전, 먼저 ‘만나’의 사건을 미리 언급함으로써 ‘만나’ 이야기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명령, 규칙, 그 ‘시험’의 내용이 곧 모든 율법보다 선행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구약의 모든 율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은 ‘만나’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광야생활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는 맺음말(출 16:35, 참고, 수 5:10f)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의 광야 생활에서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살게 됐다는 얘기만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남을 생각하지 않는 상황, 오직 자신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시험’을 늘 마주대하며 살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현대 사회를 가리켜 무한경쟁의 사회라고 말한다. 이 경쟁의 사회를 이끄는 바닥에는 ‘남보다 더 빨리, 더 먼저’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다. 기득권을 남보다 얼마나 더 많이 갖느냐 하는 것이 곧 이 경쟁사회에서 남보다 얼마나 더 잘 사느냐 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이런 경쟁의 사회를 키워내는 것이 어디 시장뿐이겠는가! 교육의 현장이 그렇고, 심지어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희망어린 시선에도 깔려 있는 건 아닌가! 그래서 자연스레 국가도 ‘침략 전쟁’ 앞에서 ‘국익’을 따지고, ‘국제 경쟁력’의 이름으로 농민의 함성에 물대포를 쏘지 않았겠는가! 기득권 쟁탈은 곧 행복(?)의 열쇠를 누가 더 먼저 갖느냐는 경쟁의 논리이고, 이를 우리는 ‘선착순’이라는 말과 연결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선착순의 사회란 남보다 ‘더 빨리’, ‘더 먼저’ 라는 논리가 지배적인 사회다. ‘선착순’에서는 뒤를 쳐다볼 여유가 없다. 뒤에 누가 넘어져도 개의치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러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선착순’의 사회란 피비린내 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자연스레 통용되고 오히려 권장되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의 한 구석, 아니 어쩌면 그 한복판에 오늘 교회마저도 서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서가 그런가?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교회를 향하여 ‘선착순’을 명하고 있는가? 미리 말하자면,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로 잘 알려진 출애굽기 16장은 ‘선착순’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 말이 ‘만나’이다.

‘만나’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 ‘만 후’의 아람어이다. 그 뜻은 “이것이 무엇인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전 처음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한 말이고(16:15), 거기서 그 이름을 딴 것이다. 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가리켜 ‘만’(무엇?)이라고 불렀다(16:31). ‘만나’는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선착순’의 지배 논리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도무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남보다 더 빨리, 더 먼저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이들에게 “각자 먹을 만큼만!”, 뒤처진 사람들을 위하여 취하고, 함께 더불어 나누고 살라는 ‘만나’가 주는 성서의 말씀을 오늘 무한경쟁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이것이 무엇인가?”고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만나’가 주는 교훈은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 것인지’의 시험 앞에 매일 결단케 하려는 것이다. ‘만나’는 먹는 양식 이전에, 어떻게 취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시험이다. 그리고 ‘만나’와 함께 걸어간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여정은, 오늘 우리 모두를 주님의 약속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 열 걸음 먼저 가기보다는 열 사람이 함께 한 걸음을 걷도록” 이끄시는 여정이다.

6 Powerful "I WILL" Promises of Jesus

praying in the spirit Christians are quite familiar with the “I AM” statements in Scripture. They are powerful and share much about the character of Christ. They share God’s will for His son and for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