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교회가 아니라 싸움터요 분쟁을 일으키는 사단과의 전쟁이라며 피흘리까지 싸우라고 하신 말씀이나 영적전투에서 승리해야 할 군사로 성경은 표현하시고 있다
갈5:20에 소개된 육체의 일들 중에는 '당 짓는 것'이 있다.
NIV 번역본에는 'selfish ambition'으로, NRSV 번역본에는 'quarrel'로 나온다. 헬라어로는 '에리데이아(eritheia)'로서 '이기적인 야망, 다툼, 분개'란 뜻이다.
이기적인 야망을 내세우는 곳에는 당연히 파당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난다. 교회의 분쟁 중에 바로 파당이 갖고 있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에게서는 전혀 파당을 생각할 수 없는가?
고전11:18-19에서 파당의 불가피성을 말하고 있다: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바울이 말한 바는 어떤 뜻인가? 바울은 파당을 지지하고 있는가?
사람들 가운데 내재된 죄성은 언제 어느 때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나타낼지 모른다. 이 땅에 사는 자들은 그러한 성향의 잠재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사람마다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진 않기 때문에 어떤 목적을 따라 가느냐에 따라 자기중심적인 성향의 정도는 달리 나타나며, 결과적으로 파당은 불가피해진다. 동시에 옮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도 필연적이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 것을 알았다.
자기 중심적인 삶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한 순간에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이 세상에 온전한 나라가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자기 중심의 삶을 '완전히' 벗어버린 사람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현실은 파당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옳다 인정을 받은 자들이 나타날 때 그 무리에 속해 있어야 하는 것임을 말했다.
옳다 인정을 받는 것은 옳다고 여겨지는 자기 생각이나 타인의 생각을 주체적으로 '택하여' 행동한 결과를 말하진 않는다. 이것은 또 다른 자기주장의 결과일 수 있다. 옳다 인정을 받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먼저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혀 수동적이 되라는 말인가.
자기 삶을 포기하란 말인가.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되라는 말인가. 모두가 아니다.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앞서 진리가 말씀하는 바를 '주체적으로' 경청해야 한다.
이 자세는, 현실을 진리 안에서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길 때까지 행동하기보다 주 앞에 서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사람의 다수나 환경의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진리 안에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쪽을 따라 살아가는 것보다 더 확신 있는 주체적 행동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중심적인 야망은 잃어버린 자들이지만 좌절한 자들은 아니다.
그들의 야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회심과 더불어 '진리의 야망'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진리의 야망은 무엇이며, 진리 안에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옳은 쪽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을 곧잘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이기 보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정말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살아왔을 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런 후 비로소 확신이 생길 때에 그 사람의 말에 마음을 열 준비를 한다. 무엇을 시사하는가. 삶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람의 말은 아무리 하나님의 음성을 빌어서 말한다 해도 힘을 갖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정말 삶이 신실한 사람의 입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은 진리 안에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옳은 쪽을 알게되었다는 말인가. 그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 그것을 검증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사람은 어떤 생각에 몰두하다보면 그 생각대로 상황을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그 사람이 그와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또한 무엇인가. 저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 우리는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진리의 옳은 쪽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파당의 한쪽을 쫓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에겐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더 객관적인 성경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
개개인뿐만 아니라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인간의 야망이 아닌 진리의 야망을 쫓을 수 있기 위해서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성경적 지침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파당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으며 진리의 옳은 쪽을 따르는 확신을 대다수가 가질 수 있다.
성경이 보이는 객관적인 기준은 여러 가지겠으나 그 중 대표적인 것을 제시한다면 다음의 구절일 것이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약 3:13-16)
선행은 곧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으로 말미암아 진리 안에서 야망을 가질 때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결과인 반면 악한 일 곧 인간의 시기와 다툼이 자아낸 결과는 그 배후에 인간의 야망이 숨어 있음을 암시해 준다.
인간의 야망은 내재된 생각을 지나친 열의(熱意)로 변화시켜 악한 일을 낳는다. 그리고 그 열의는 시기와 질투를 일으킨다. 자신의 질투만이 아니라 주위의 질투까지 유발한다.
내 안의 질투는 다른 사람의 부각된 모습을 볼 때 생겨나며, 타인이 나를 향해 가지는 질투는 내가 나의 것을 매우 부각시킬 때 생겨난다. 자의든지 타의든지 질투는 어디까지나 내 안에서 혹은 나로 인해 생긴다.
질투가 일어날 때는 대부분 이기적인 야망이 이미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출발은 좋은 꿈이었다 하더라도 이미 변질된 인간적 야망이 생각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 야망은 자기의 것을 더 이루려 하든지 다른 사람의 것을 이겨보려 하는 야망이다. 그러니 질투를 유발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러면 왜 사람의 생각은 언제 이러한 인간적인 야망으로 발전하는가? 그 시작점은 언제인가? 그것은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모든 사람들을 인격체가 아닌 성취로 정의하기 시작할 때이다.
이 모습은 겉으로는 매우 열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영적으로는 병든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 뿌리에는 자치적(自治的)인 자아가 있다. 이 자아는 삶의 의미를 자기 행동으로 찾으려 하며, 방향이 그릇된 열의를 내게 만든다.
예수님의 해결책은 '종이 되는' 것이다(마 20:26-28). 종이 되는 곳에는 시기가 사라진다.
그러면 종이 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도대체 왜 종이 돼야 하는가. 이 질문은 차치하고, 종이 되어서 모든 시기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해도 얼마나 그것이 힘들 것인가. 그래도 자의적인 노력으로 가능하다면 해 볼만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노력으로 가능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 더 심하게는 기독교 없이 자신을 낮추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도 선한 야망을 쫓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목적을 깨달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자세이다:「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28).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굽히는 삶은 굴종이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인식은 철저한 소속감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땅을 향해 가지시는 목적은 창조 세계의 회복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이기 때문이다. 무익한 야망은 소속을 모르는 자들에게 생긴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19-20).
이처럼 한 인간이 자신의 열정을 버리고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참된 소속을 발견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러면 이 일은 언제 시작되는가. 그것은 회심 때이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때이다. 그러한 자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 이후는 성령의 야망이 그를 이끌어 간다. 우리의 야망은 우리의 열정이 변하여 하나님이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과 일치됨을 통해서 구속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은 순간에 변하지 않는다.
처음 회심 후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서 행하고 살면서 계속하여 자신을 다시 이겨 나가는 체험을 한다.
이것은 자기 증오가 아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갈 5:24) 자기 정체성을 부인하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다.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 자치적으로 살아가려 하는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심판하실 때 그것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남보다 앞서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유혹을 포함한 모든 육체의 욕망과 행위를 중지하며 하나님의 판단에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자기 절제의 열매가 생긴다.
자기 절제는 곧 하나님의 의지를 깨달은 인간이 그것에 반응할 때 생기는 열매다.
자기 절제는 전인적인 자아를 조화 있게 해서 우리로 우리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 낳는 부산물이다.
끊임없이 성령의 야망을 쫓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목적 곧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복음전파와 자신의 참된 소속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성경의 참 신앙인들을 볼 때 그들의 선한 야망만을 보는 것은 한 쪽만을 보는 것이다.
한 쪽의 시야는 우리에게 성경의 인물을 보면서도 육신의 야망을 꿈꾸게 한다.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야망 뒤에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소속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인식을 삶에 투영하여 삶을 창조적으로 이끌어 가는 담대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선한 야망은 삶을 이끌며, 그렇게 이끌리는 삶은 그 선한 야망을 지켜간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회심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 주신 선한 야망이 어떻게 영성의 표현이 되어서 매일의 삶 가운데 자기 인식과 자기 훈련의 중요한 특질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