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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의 종교개혁

들어가는 말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다가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면죄부"란 것을 만들어 돈을 받고 파는 엄청난 잘못을 교회가 자행하고 있었다.

참으로 말도 안되는 일을 하였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는 것인데 사람이 면죄부를 줄 수 있다니.... 그것도 돈을 받고 판다니.... 돈만 있으면 아무런 죄를 지어도 걱정할게 없다는 것이 아닌가.... 돈이 최고라는 말이 된다. 돈의 힘이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깨우고 교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촉구한 운동이 바로 종교 개혁 운동이다. 진리대로 살자는 운동이다.그러나 교회는 오히려 이들 개혁 운동자들을 정죄하고 처벌하며 회개할 줄 몰랐다. 그래서 종교 개혁의 취지를 따르는 교회와 그렇지 않는 기존 교회로 양분되었다.


종교 개혁을 부르짖으며 기존 교회에 "대항하고 항의하는 사람"이란 뜻으로「Protestant」라 불리워진다. 이「Protestant」들이 바로 신교이다.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남아 있는 교회들이 바로 구교 곧 「Catholic」천주교라고 한다.


1.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진 개혁이었다.


본문 3절에 "왕이 대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하니라"고 했다.

왕과 온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지켜 이루리라는 언약을 세우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로마서 14: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창조함을 받았다. 어떤 물건이던 만든 이의 뜻에 따라 바로 사용되어질 때 제 값어치를 나타내는 것이고 아름다움이요 행복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인간 행복의 여러 가지 조건을 얘기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안이다. 그 평안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을 때 참된 평안이 주어지게 된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때 두려움이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본문에 나타난 요시야 왕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해, 달, 별 그리고 그모스, 아스다롯,밀곰, 몰랙에 미혹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고 자기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던 중 율법책을 발견하고(왕하22:8) 그 율법책을 통하여 자기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


여호와의 특별한 사명을 가진(왕상13:2) 요시야의 가슴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뜨겁게 불타 올랐고 이방 신들의 산당과 신상을 불태우고 그 섬기는 제사장들을 징벌했다.

하나님을 저버린 삶,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삶, 이런 잘못된 삶을 바로잡고 개혁을 한 것이다.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롬1:23)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자는 것이다. 그 영광을 위해 살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 창조 목적에 맞게 사는 삶이다.

오늘을 사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못하고 자신의 영예를 쫓는 잘못된 사람들이 있다. 저 바벨탑을 쌓던 무리들처럼 자기 이름을 높이고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안에서 최고 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다.

최고가 되어야 한다.

국내에서 최고, 동양에서 최고, 세계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 그러는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은 뒷전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돈을 쫓아가는 사람이 있다. 명예, 권력, 향락을 쫓아가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다 개혁되어져야 할 사람들이다.

어쩌면 우리 각자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 없애는(아가2:15) 내 마음 속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겠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개혁있었다.


본문 3절에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하니라"고 했다.

본문 25절에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고 했다.

『요시아 왕의 종교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룩되어졌다. 성전 수리 중 발견한 율법책을 통하여 자신들의 지금까지의 삶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율법책을 통하여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였고, 자신들의 추한 모습을 보게 하였고, 죄악으로 더러워진 삶을 박차고 일어설 수 있는 결단을 내리게 하였다.

요시아의 개혁은 그의 성전 수리 도중에 발견된 모세의 율법책으로부터 시작된다(왕하22:4-7, 8. 요시아의 성전수축에 관한 분석적인 연구는 필자의 졸고 "요시아의 성전수축에 관한 일고" 『구약논단』제5권을 참고하라). 퇴락한 하나님의 성전을 수축하는 과정에서 제사장 힐기야에 의해 발견되고 서기관 사반에 의해서 전달된 그 율법책의 내용을 접한 왕 요시아는 처절한 회개와 더불어 전면적이고 파격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열왕기하 23:4-20에 기록되어 있는 구체적이며 다양한 개혁조치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다 왕조시대 전반에 걸쳐 형성되고 확장 발전되어 온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들을 거부하고 타파하여 본래의 야훼 예배의 모습을 회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비야훼적인 가나안 종교의 전통 요소들이 얼마나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과 예배에 깊숙하고도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바알과 아세라로 대변되는 가나안의 전통종교 요소들은 일월성신 종교와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내부에서 발견되고 있다(23:4, 11-12). 가나안의 전통적인 풍요신앙의 산물인 미동의 집이 성전 경내에서 발견된다(23:7).


솔로몬의 성전 뿐 아니라 유다의 각 지방에서는 역시 가나안의 종교적 전통의 산물인 산당 중심의 신앙이 일반적인 종교행태로 고착되어 있었다(23:5, 8, 9, 13). 심지어는 고대 지중해 동부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인간제사도 당시 유다의 종교에 낯설지 않은 요소였다(23:10).

물론 이스라엘의 종교와 신앙은 여타 종교 및 신앙들과 마찬가지로 그 주위에 존재하는 여러 인접한 다양한 종교와 신앙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 발전되었다.


비록 우리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주위와는 전혀 구별되는 독특한 것이라고 믿고 싶을지라도, 그들의 신앙이 역사 문화적인 진공 속에서 생성되고 전승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본래 존재하던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의 한 가운데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역사를 꾸려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가나안의 전통종교들을 자연스럽게 발전적으로 수용하고 토착화했다고 너그럽게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다원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인들의 이러한 생각은 성경에서는 별로 설 자리가 없다. 요시아의 개혁은 모세의 율법책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요시아는 성전에서 발견된 모세의 율법을 모든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공포하고 그 율법을 매개로 하나님과 백성들간의 계약을 재확인한 후(23:1-3)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유다의 종교를 개혁한 것이다.


가나안의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모두 파하며(신12:2), 그 제단을 헐고 주상과 아세라를 깨뜨리며(12:3), 오직 야훼께서 지정하실 한 곳에서 예배드리라는 가르침(12:5, 11)이 그 개혁의 핵심이다. 요시아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이러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행한 이스라엘 역사상 몇 안되는 왕들 중 하나이다. 결국 요시아가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가르친 바대로 예배하고 행하였다


문제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느냐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종교제도 혹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의 제도 또는 권위와 어떤 관계를 갖느냐 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제도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정도의 권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현실이 그렇게 되어 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칼빈이 교회 개혁을 주장한 상황이었지 않은가? 대대로 전래되어 오던 선친 왕들의 예배와 신앙의 전통이 그 자체로 독자적인 권위를 갖게 되어 모세의 율법책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망각 속에 묻어버린 상황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만 의존하여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한 요시아의 경건은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요시아 왕의 종교 개혁』의 대열에 모두 함께 하며 이제까지 섬기며 숭배해 왔던 이방 신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놀라운 힘과 능력이다.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말이 지니는 힘이 달라진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담겨져 있다. 요시야 왕 이전까지 우상숭배가 온 나라에 극성이었음에도 누구 하나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두가 다 순종하였다.


16 세기에 일어난 종교 개혁 운동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사람이 죄 사함을 얻고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롬3:22)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돈주고 면죄부를 사서 의롭게 될 수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으로 우리 성도가 가슴 깊이 간직해야 될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가 한편 많은 폐단을 가져오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잘못 사용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면죄부의 판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가 아니었을까....

문제는 지나친 열정이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 가는데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뜨거운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앞지르는데 있다.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친 베드로드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서, 주를 위한 충성이 지나쳐서 생기는 문제도 많다. 베드로 성당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고져 하는 뜨거운 마음이 잘못되어 면죄부를 판매하기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대한 예수교 장로회"란 이름 아래 100이 넘는 교단이 있다고 한다. 저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께 충성하며 살려니 어쩔 수 없었다는 분리의 이유들이 진정 주의 영광을 수놓는 아름다운 오색실일까....


세월이 흐르고 나름대로의 자리가 잡히면 동질성을 얘기하고 형제 교단 운운한다니.... 함께 할 수 없어서 해어진 이들이 연합 운동이란 이름 아래 한 자리에 모여 같이 찬송하며 함께 기도하고 아-멘 한다. 그러면서 왜 하나가 되지는 못하는 것일까....

한 자리에 모여서 같이 찬송하고 함께 기도하고 한 목소리로 아-멘 하며 예배 드릴 수 있는 이들이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 앞에서 진정 어떤 이유일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데 그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영광일까....


우리 성도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삼고 있는지를....

행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면서 그 영광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 있지나 않는지.... 우리의 창조된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 이 사실을 명심하고 내 가슴 속에 이루어야 할 종교 개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3. 요시야의 개혁은 절명절대의 개혁이었다.


한 가지 반드시 지적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요시아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올바른 예배와 신앙을 회복하는 그 자체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는 그 자신의 신실함과 경건함을 입증하고 만대의 성군으로 길이 기억되는 데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신앙과 예배행위는 유다의 국가 민족적인 존폐가 달려있는 문제인 것이다.


요시아는 발견된 모세의 율법책을 대한 후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라고 탄식하고 있다(왕하 22:13). 이는 신명기 28:15-68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반영하고 있다


:"내가 만일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곳에서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우상을 섬길 것이라"(신 28:15, 65). 이것은 신학적 도덕적인 차원일 뿐 아니라 문자적으로 생존차원의 문제이다. 북왕국은 이미 이 저주의 말씀의 본보기가 된 상황이다(왕하 17:7-18참고).


열왕기하 22:13에 담겨진 요시아의 현실인식은 바로 이러한 국가와 민족의 존폐의 문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시아에게 종교개혁은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행하여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선택이었다.


4. 이러한 개혁을 위해 지도자의 중요성이 다시금 인식되어진다.


이쯤에서 우리는 요시아의 종교개혁에서 보이는 지도자의 중요성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나타나듯이,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왕 요시아의 위대성이다. 열왕기하 22:3부터 23:25에 이르기까지 성경본문을 구성하는 5개의 주요 기사들은 모두 요시아가 그 행위의 주체로 등장한다:"요시아가 보내며 가로되"(22:3), "왕이 명하여 가로되"(22:12; 23:21), "왕이 보내어…모으고"(23:1), "왕이 명하여"(23:4). 그리고 그가 주체가 되어 실행한 개혁의 결과 그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23:25)는 최상급의 칭송을 얻는다.


물론 그의 개혁이 결국 실패로 끝나지 아니하였는가 라는 질문은 타당하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그의 급작스러운 서거(23:28-30)로 인해 그의 정책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된 역사적인 상황 전개에서 찾아볼 수 있다(23:31이하 참고).

그리고 성경은 요시아의 신실함과 경건함도 그의 조상 므낫세의 죄악으로 인한 야훼의 진노를 돌이킬 수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다(23:26). 그 이전에 축적된 배교와 죄악이 너무 심각했다는 지적이다. 결국 유다는 멸망하고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대로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25:1-7).


이런 점에서 요시아의 개혁은 실패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위로부터의 개혁이 갖는 한계에서 찾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요시아의 개혁은 힐기야를 정점으로 하는 그를 추종하는 예루살렘의 제사장 집단과 관료집단, 그리고 궁정 예언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중앙의 지지세력을 주축으로 하여 지방의 여러 전통세력들을 제압한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내지는 정치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올바른 종교와 신앙에서 지도자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지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유다의 멸망을 초래한 하나님의 진노는 유다의 열왕들의 실패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있는 유다의 열왕들도 결국은 산당을 폐하지 못한 실패를 안고 있다(참고, 왕상 15:14; 22:43; 왕하 12:3; 14:4). 그리고 므낫세의 배교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지 않았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의 타락과 그로 인한 파괴적인 결과에 대한 지도자의 책임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그래서 다소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곧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다(시 2:7; 삼하 7:14 참고). 그리고 친히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포함하는 일체의 예배제도를 조직 관장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에서 종교의 타락 및 회복 여부는 왕의 책임 하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칼빈의 관찰 한 가지를 언급해야 한다. 요시아가 모세의 율법을 보존하고 전승하는데 신실했다는 점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칼빈은 한편으로는 당시 제사장들의 직무유기를 지적하고 있다. 모세의 율법이 한 동안 잊혀져 있다가 성전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은 제사장들이 마땅히 담당해야 할 직무를 소홀히 한 결과라고 칼빈은 보고 있다(『기독교강요』1.8.9).

이 역시 종교 지도자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우리는 요시아의 개혁을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지도자의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측면은 여전히 우리가 교회의 개혁을 말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사항들이다.

교회의 제도 및 전통이 성경의 권위를 잠식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본인들이 인정하든 아니하든 마땅히 감당해야하는 직무에 소홀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저주의 대상이 되는 신앙과 예배 속에서 멸망을 향해 달음질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교회의 개혁, 그리고 우리 신앙과 예배의 개혁은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신앙을 갖기 위해 개혁을 해야한다는 생각도 사실은 우리에게는 어찌 보면 사치스러운 여유일지도 모른다. 당장 우리 앞에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 결국 국가와 민족의 파국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즉 우리 교회는 물론이고 국가와 민족 전체의 생존을 위해서 우리 교회는 말씀 중심으로 그리고 지도자들의 거듭남으로 개혁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개혁되어져야 한다. 말로써가 아니라 말씀을 바탕으로 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목회자가 개혁되어져야 한다. 목회자가 말하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바탕으로 한 말씀의 선포이기에 권위가 있어야 한다.

세상의 필요성에 의해 요청되어진 개혁이기 다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개혁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개혁이 없이는 한국교회가 서양의 교회처럼 텅빈 교회당만 남는 교회가 되지 않는다고 누구 장담할수 있겠는가. 교회가 원하고 하나님께서도 원하는 이러한 교회의 개혁은 시대적 사명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혁의 중심에 요시야가 있었고 오늘날도 이러한 교회의 지도자 있다고 본다. 만약 없다면 우리들이 이러한 작은 불씨가 되어야 하겠다.

개혁은 한번이 이루어지 않는다. 개혁되어졌다고 할찌라도 다시 개혁되어져야 한다. 개혁되어지 않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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