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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회복 (1)

예배를 잘 드려야 한다는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배이다."라는 책의 저자 A. W. Tozer는 거의 모든 면에서 일취월장(日就月將)한 현대 교회는 위기 곧 중대 국면(Crisis)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는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예배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온전한 예배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찾은 성도들에게서 기쁨과 감격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온전한 예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프로그램 곧 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순서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배의 순서를 정하는 일은 꼭 필요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순서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대신, 이 프로그램 개발에 온통 관심을 쏟아 붓는 안타까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반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가장 많이 제공하는 교회가 가장 인기 있는 교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개발된 프로그램이 다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까지와는 다른 또 하나의 형식과 의식을 만들어낼 따름입니다. 그 형식과 의식이 예배의 핵심 중에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릴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생명력을 잃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해진 형식에 따라 똑같이 반복되는 상투적이고, 무의미한 자세로 드리는 예배를 경계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최고의 헌신을 드려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자신을 낮춰야합니다. 생각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소로 만들어야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격과 환호성이 있는 향기로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몸부림쳐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성도 각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게 된다면,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로 거듭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가져야할 비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예배를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예배회복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산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크게 두 부분(1-11장, 12-16장)으로 나눌 수 있는 로마서는, 앞부분에서는 범죄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서만 의로우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교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리스도인은 예배자가 되어야 하며 인류에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너희 몸"은 "너희 자신"(yourselves)이라는 뜻으로, 우리의 인격 전체를 형성하는 모든 요소와 함께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표현되는 삶의 형태까지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거룩한"(하기오스 : hag'eeos)은 "신성한, 흠 없이 순전한, 봉헌된"등의 뜻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서 구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산 제사"에서 "산"(조산 : dzosan)은 "생기 있는, 살아있는"등의 뜻으로, 현재 분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는 전 인격을 다 동원해 몸과 생애 전체를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생애를 통해 계속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에 힘쓰는 제사를 말합니다.

구약 시대의 동물 제사처럼 구별된 다른 무엇인가를 대신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바로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장소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생활 자체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생각이나, 진심이나, 이상이나, 정성을 바치는 것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자기 자신을 바치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한편 "영적"(로기콘 : logikon)은 "합리적인, 논리적인"등의 뜻으로, 본 절에서는 "합당한"(reasonable : KJV), "진정한"(공동번역) 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치는 제사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가장 합당하고 진정한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될 사실이 있습니다. ① 먼저 한번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것은 제사를 드린 사람이 아니라 제사를 받으신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몸 곧 전 존재가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각종 제사를 드린 우리는,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실 차례라고 외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드렸으니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요구가 맞습니까? 하나님께 그렇게 요구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채우고 말고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사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채우고 싶으시면 채우시고, 그럴 마음이 없다면 굳이 채우지 않으셔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왜 채워주지 않는 것이냐고 따지거나 물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b)고 말씀을 통해,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당신과 같은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기회는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조건을 갖추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부정해야합니다. 자신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해야하는 것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로마 시대에 행해진 형벌 중 가장 잔혹한 것으로 고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철저한 자기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죽여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붙어있는 한 지속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이유는 이 사실을 너무 자주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바쳐야하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잊기 때문에 신앙 생활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② 우리는 또 하나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쳤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관계된 모든 것들을 결정하시고, 그 책임까지 하나님께서 떠맡으실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돌보실 것입니다.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환난과 시험 속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께 전 존재를 온전히 제물로 바친 우리가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결정하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에 따른 책임까지 다 떠맡으시라고 강요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에게 다 결정하고 책임지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 세상을 따르느냐, 잘했느냐 못했느냐, 알고 있으면서 했느냐 못했느냐는 우리의 책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쳐진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책임지고 달려가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립된 존재인 저와 여러분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당신의 뜻을 따르고, 당신께 항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당신 편에 서기로 결정하고, 그것에 따르는 고통까지도 감수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참된 성도들의 삶의 현장은 피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는 피와 땀과 눈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고백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는 삶을 살겠다"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결론 암울하던 시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까지 불리 우며 하나님 편에 굳게 서 있었던 믿음과 열정의 사람 엘리사는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도 침상에 엎드려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늘 위협해 오던 아람을 진멸시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앞둔 자신을 문안하기 위해 찾아온 요아스에게 활과 살을 들라고 말했습니다. 활과 화살을 든 요아스의 손에 안찰 한 그는 그것을 동편 창을 향해 쏘라고 말했습니다.


동편 창을 향해 쏘자 계속해서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왕하13:17b)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곤 또 화살로 땅을 힘껏 내려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요아스는 세 번만 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크게 분노하며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 만 치리이다"(왕하13:19)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주어진 기회인데, 그렇지 않아도 매달리고 부르짖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했어야할 기회가 주어진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성의 없이 세 번만 치고 그만둘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분노한 엘리사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받은 은혜인데 그것을 과소 평가하느냐는 것입니다. 헛되이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더 이상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말고 삶 자체가 예배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전 존재를 다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바쳤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 곧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십니까?


철저히 자신을 죽이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곧 예배를 드리기 위해 뜨거운 열정을 쏟아 붓고 있습니까?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처음 은혜 받았을 때의 그 감격과 뜨거운 열정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예배가 되고 있습니까?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전 존재를 다 바쳐 예배드리는 삶을 사십시오.

삶의 현장에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십시오. 삶이 살아 있는 예배가 되게 하십시오.

이것이 예배회복(Nyskc)입니다

예배회복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을 말하는 것입니다 산제사를 드릴 수 있는 분이 되었다면 이미 예배회복이 시작된 것이니 Nyskcian(W세대(worshiper))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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