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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회복에서 조직신학의 필요성

들어가는 말


예배학은 원래 실천신학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의 한 부류로 구분되어 예배학을 연구하고 학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을 보면 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조명하고 나서 보면 예배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있나 하는 생각이 들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전체가 사람의 삶의 목적이라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는 것인데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배하고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예배에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조직신학적으로 조망하면서 접근한다면 결코 예배가 비신앙적으로 흘러갈 수 없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편리나 혹은 사람을 위한 예배형태를 띄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신학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며 꼭 필요한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신앙인들은 "복음주의"를 내세우며 또는 "성경중심주의"를 내세우며 조직신학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의 이유는 조직신학의 체계를 세우는데 필요한 "이성적 요소"와 "철학적 사고"를 신앙과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속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문에 신학의 전반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조직신학을 외면서 신학을 세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관한 것 역시 이와같이 정리하며 접근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예배회복을 말하려면 우선 가장 기초적인 것이 성경적으로 접근하면서 조직신학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올바른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체계가 갖추어져야 하고 개인의 주관에 의해 수시로 변하는“치우치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컨대 편협적인 신앙을 보면 자신의 체험과 경험을 너무나 우선히 하다가 성경의 말씀도 버리게 되고 신학적인 것도 무시하면서 교리까지 거부하는 사태까지 가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위험을 벗어나기 위하여 다시 말하면 "치우친 신앙"의 가능성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기독교의 진리를 체계화시켜 교리를 만들고 그 교리를 변호할 목적을 가지고 있는 조직신학을 반드시 알아야 하고 인용해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회복운동(Nyskc Movement)에서 조직신학은 꼭 필요한 학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배회복에 조직신학이 필요한 이유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예배는 신앙에 가장 기초가 되면서 동시에 신앙생활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곧 예배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서 신론이라고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배워야 하며 인간론이라고 하는 사람을 모르고서는 왜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와같은 것을 다루는 조직신학을 배움으로서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과 에배를 정립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어떤 신앙인들은 "이상하고 마술같은 신앙"을 참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나가는 두 사람이 대화하다가 A라는 사람이 "지난 밤에 회사일로 인해 밤을 세웠더니 참으로 피곤하군요"하고 말하니 그 말을 듣던 B라는 사람이 "그러십니까? 그러면 기도하세요. 기도하면 피로가 싹 가실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 피상적으로 보면 B라는 사람의 신앙이 대단히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B라는 사람이 가진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는 기도를 무슨 소원이든지 이루게 하는 "마술 지팡이"쯤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무노동 유소득”이 될 것이라고 하는 가장 나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를테면“무노동 무소득”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신앙을 가지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준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어찌보면 아주 좋은 신앙인 것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한탕주의자로 전락해버립니다


우리들이 이땅에 살면서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라 하신 말씀은 결국 아무 일이나 노력도 하지말고 즉 무노동하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해석과 자기편리에 따라 해석함에 따라 하나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잘못된 신앙행위를 인식하고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행위를 육성하기 위해 조직신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균형잡힌 예배는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예배예식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는데 모이는 것부터 시작하여 기도 말씀 찬송 신앙고백과 예물 드림등 조직신학은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연출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조직신학은 각 교파의 교리를 수호하는 역할만을 해서는 안됩니다.


조직신학이 각 교파의 교리를 수호하는 도구로 전락될 때 그것은 "치우친 신앙생활"을 조장하는 것이 됩니다. 이제까지 조직신학이라는 학문이 때때로 여러 신앙인들의 배척을 받은 이유는 바로 조직신학이 "기독교의 교리"를 수호하는 넓은 차원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교파의 교리"를 수호하는 좁은 차원에만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장로교에서 오랫동안 믿음 생활을 하면 목이 굳어져 누가 부르면 목만 돌아가지 않고 몸도 돌아가게 되며, 주일 성경공부가 오히려 예배보다 중시되는 경향이 있는 침례교에서 오랫동안 믿음 생활을 하면 머리가 두 배로 커지게 되고, 자세히 살필 겨를도 없이 무조건 손을 내밀어 안수하기를 좋아하는 오순절교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 손이 두 배로 커지게 되고 감리교는 너무나 자유로워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농담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조직신학은 자기 교파의 교리를 수호하려는 목적이 있기도 하지만 타 교파의 교리도 인지하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의 기본진리에 어긋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타 교파의 교리도 수용하려는 목적을 가짐으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도모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조직신학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파괴하거나 슬며시 왜곡하는 이단을 방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예배에도 전통적인 예배와 현대적인 예배로 나누려고 하는 의도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별별 이름이 붙은 예배의 형식이나 혹은 예식에 관한 순서부터 혹은 예배의 요소들이 각기 다르게 주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것이 진정 성경적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혼란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스도인의 기준입니다

교회의 기준이며 신앙의 기준입니다 따라서 예배에도 기준이 성경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대적 현상이나 문화적 조건을 따라 마음대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예배회복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바로 예배가 무너졌다고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배의 무너짐은 예배 형식이나 예식에서 머물른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원천적인 것은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드려지지 않고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복해야 한다는 근거도 성경이며 그 성경을 체계화 하여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 신학이며 그중에서도 조직신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나는 어떤 파도 아닌 예수파이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의 신앙을 은근히 자랑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입장에서 다 "예수파"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각 교파가 기본진리의 토대 속에서 나름대로 세운 조직신학적 체계를 우습게 여기는 언행은 삼가해야 할 언행입니다.

왜냐 하면 그러한 언행은 가장 신앙적인 모습인 것처럼 보이지만 상대방에게 영적 교만이 가득찬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예로 역사상 이단으로 단정되었던 몬타누스주의와 재침례파 등이 그러한 주장을 했었고 우리 주변에서도 보면 몇몇 의심 가는 그룹에서 그러한 주장을 하며 자기 그룹만이 최고의 신앙을 가진 것처럼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신학은 입술로만 "예수파"임을 주장한다고 하여 그 밖의 모든 이상한 주장조차 진리로 생각하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즉 어떤 단체가 입술로 "예수파"라는 것을 주장한다고 하여도 내적으로 성경이 밝히고 있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어긋난 주장을 한다면 조직신학은 그러한 주장이 오류임을 밝혀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은 이단을 방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학문입니다.


넷째, 조직신학은 넓은 범위로 말하면 기독교계 내에서 그리고 좁은 범위로 말하면 교단 내에서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만 옳다고 주장한다면 얼마나 모순입니까

어느 교파가 자기들만이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다며 다른 교파를 무시한다고 혹은 이단시 한다면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러나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조직신학은 필요합니다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들어서면서 전 세계교회는 자유로운 예배가 한창 유행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와 교파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배의 형식과 예배 속에 들에 있는 요소들이 가차없이 무시되고 또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였습니다

강단에 경건이라는 말은 율법으로 치부되었고 거룩이라는 말은 과거의 거추장스러운 옷으로 취급되어 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찬송가가 무엇이며 복음성가가 무엇인지등 구별이 없어졌고 그동안 교회에서 불려졌던 찬송들은 휴지통으로 버려지는듯 고리타분한 것으로 교회를 이미 벗어난지 오래 되었고 세상과 거의 흡사한 음악과 리듬들이 교회 안에 자연스럽게 정착되었습니다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 수 있는 성가들이 교회를 장악해 버렸습니다 성령에 충만인지 혹은 음악에 리듬에 의해 춤을 추는 것인지 모를 만큼 해갈리는 찬송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옳다 또 틀리다고 하는 것은 참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에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신학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배에서 조직신학은 필요한 것입니다


또 어떤 기독교 공동체에 10개의 그룹이 있다고 가정을 합시다. 그 중에 한 그룹이 자기의 주관적인 계시에 의해서 "92년 10월 28일 휴거설"을 주장한다면 나머지 그룹이 그렇게 주장하지 않을지라도 그 공동체는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자체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얼마지 않아 곧 공중 분해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 “온전한 기독교 공동체”와 “신령과 진정이라는 예배”란 어떤 것인가 빗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나 혹은 벗어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조직신학은 필요한 것입니다.


다섯째, 조직신학은 아름다운 신앙심과 참된 예배를 지속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역사상 수많은 이단이 명멸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단은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졌지만 어떤 이단은 꽤 오래도록 영향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이단이라고 한다면 여호와의 증인, 통일교, 몰몬교, 안식교 등은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는 이단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는 이단들은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그들 나름대로의 체계화된 조직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조직신학의 역할을 살펴볼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체계화시키지 아니하면 그 아름다움은 지속되고 발전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형제회(Brethren Church)"라는 교단이 있습니다.

그들의 경건생활과 신앙적 태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범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교단은 가장 급속도로 쇠퇴하는 교단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 하면 이들은 "신앙심과 그 신앙의 열매만 아름다우면 되지 조직신학은 무슨 필요가 있는냐? 그것은 진리를 상자 안에 가두는 것이다"고 하며 조직신학을 우습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신앙을 지속시키고 발전시킬 체계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배회복운동(Nyskc Movement)을 전 세계적으로 펼쳐나가면서 조직신학으로 조명하지 않거나 혹은 조직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변증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얼마 가지못해 사이비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을 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배회복운동의 신학적 기반은 무엇인가 하고 물을 때 당연히 회복의 신학을 말하게 됩니다 즉 회복이라는 체계화시켜 조직신학적으로 설명한 회복을 말합니다


만약 이러한 것이 없다면 그것은 신앙 뿐 아니라 예배에 밸런스가 깨지는 편중된 예배의 형태를 띄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예배회복에서 그리고 회복의 신학에서 조직신학은 아주 당연히 깊이 다루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종교의 타락에서부터 왔다고 하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좀 더 적극적인 입장에서 보면 개혁자체가 본질회복이라는 이유가 있다는 보는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왜곡 시켜 자신들의 편리와 이익에 사용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벗어난 성경해석에 따른 사이비종교로 전락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루터는 16세기 초 종교개혁에 불을 붙였고 시작되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캘빈은 개혁을 부르짖는 형제 자매들이 잔인한 박해를 받는 것을 차마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개혁을 외치며 군중을 자기편으로 이끌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박해받는 형제 자매들을 변호하기 위해 바젤시에서 조용히 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펜을 놓았을 때는 기독교 사상 가장 유명한 "기독교 강요"라는 책이 태어났습니다.

1536년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캘빈의 나이 겨우 26세였습니다.

칼빈이 26세에 저술한 이 "기독교 강요"는 기독교 문헌 중 가장 귀중하고 영원히 남아야 할 책으로 지적이며 영적인 깊이와 능력을 소유한 천재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기독교 강요"가 나오자 세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즉시 복음주의 신앙의 대표적 인물들 가운데 최상위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개혁파 교회의 아리스토텔레스이며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기독교 강요"가 개혁주의 교리를 변호하는 조직신학 책으로 개혁파 장로교회가 이 책을 토대로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장로교와 그에 따른 예배가 지금까지 기독교계에 심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은 이처럼 아름다운 진리와 신앙심이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조직신학은 신앙과 예배 그리고 여러 가지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경 자체를 연구하는 "주석신학자"들은 "조직신학자"의 연구를 신앙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조직신학자"들은 "주석신학자"들의 연구를 편협된 자기 중심주의가 개입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원래는 학문적으로 주석신학은 조직신학의 한 부분에 속해 있었는데 18세기 중엽 조직신학에서 주석신학이 분리되면서 서로의 학문이 경쟁관계에 서게 되었고 그래서 조직신학자들은 "주석신학은 기초가 없다"고 주석신학을 헐뜯고 주석신학자들은 "조직신학은 내용이 없다"고 조직신학을 헐뜯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을 참으로 불행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석신학과 조직신학은 동등하게 중요한 것입니다.

주석신학은 성경 자체를 상세히 해석하는 것이고 조직신학은 성경로부터 취한 진리를 통해 신앙의 뼈대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이 주석신학보다 성경을 덜 이야기한다고 해서 조직신학이 주석신학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조직신학과 주석신학은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주석신학이 조직신학을 멸시할 때 이상한 논리가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시편 14편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이 구절의 처음과 끝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없다"라는 구절만 인용한다면 "하나님이 없다"는 해석이 가능해져 버립니다.

성경을 이런 방식으로 마음대로 주석해서는 안됩니다. 앞에서 소개한 예는 극단적인 예이지만 역사상 많은 이단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의 일부분의 구절을 자기의 주장에 맞는 대로 해석하였습니다.


반대로 조직신학이 주석신학을 멸시할 때도 이상한 논리가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조직신학과 주석신학은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즉 조직신학을 연구한다고 하면서 성경 구절에 대한 자세한 연구도 없이 성경의 한 두 구절을 이용해서 교리화시켜서는 안됩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성경에서 마태복음 27정 5절의 "유다가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누가복음 10장 37절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또한 요한복음 13장 27절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조합시키면 "너는 가서 자살하되 되도록이면 빨리 자살하라"는 교리가 되어버립니다.


또한 “ 한 두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리라” 하는 말씀을 가지고 교회를 가지 않아도 사도의 가르침이 없어도 우리 두세 사람이 모여 예배드리면 된다는 교리로 정착화되어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교회를 약화하려는 오류는 성경을 잘못 인용한 사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직신학이 꼭 필요한 것이지만 항상 주석신학과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조직신학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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