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도시의 영적부흥

세무서장이었던 삭개오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복음으로 한 사람이 변화 받았습니다. 새로운 삶의 목표와 가치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니 그토록 소중했던 것들이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니 행동이 바뀌었습니다. 행동이 바뀌니 삶이 달라집니다. 삭개오가 변했을 때 모르긴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삭개오를 보며 놀라움과 도전을 동시에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토색이라는 말은 돈이나 물건을 억지로 빼앗는 것을 말하는데 세금을 못낸 사람들에게 강제로 물건을 빼앗아 온 것이 있었는데 그들을 찾아다니며 4배를 갚는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한사람이 변화 받을 때 이 변화를 주위에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된다면 주위의 사람들은 우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바울이 '에베소' 라는 도시에 복음을 가지고 들어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어느 누구도 바울에게 관심을 별로 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에베소가 한사람 바울에 의해서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가르칠 때 몇몇 사람들이 훼방을 놓습니다. 도저히 말씀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나 두란노라고 하는 서원을 임대해서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10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복음을 가르친 지 두 해 동안을 했다고 했습니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기간동안 말씀을 가르쳤을 때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에베소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해 왜 에베소가 변화를 받았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에베소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입니다.

에베소는 현재 터어키 지역으로 당시에는 소아시아의 수도였습니다.

에베소는 정치적으로 로마의 자치 도시였고, 상업적으로는 세계적인 무역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이곳은 이스테르 강 어귀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이 지역에 성행하는 무역을 관장할 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몰려 온 상인들이 온갖 상품을 거래하는 동양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습니다.

이곳에 세계 7대 불가사의중의 하나인 여신 아데미의 신상이 있었습니다. 이 아데미 신상은 높이가 128m이고 폭이 66m나되는 거대한 신상이었습니다. 이 신상은 주후 263년에 고트족에 의해 파괴되어서 지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에베소에는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시민들을 위한 위락 시설로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이 있었고 5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실내경기장이 있어서 이곳에서 경마와, 칼싸움, 씨름등 운동경기가 행해졌고, 죄수 사형시키고 사람과 짐승이 싸우는등 잔인한 일들이 벌어진 곳입니다. 지식들을 위해서는 도서관과 학교가 있었습니다.

세계의 많은 여성들이 에베소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후 수시로 에베소에 들러 보석과 화장품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에베소는 번화 도시였습니다.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던 살기 좋은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인간 중심의 도시였고 쾌락문화가 발달한 도시였고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도시였습니니다. 그러므로 에베소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바울이 복음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현장 속에서 증명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 가까이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시켜야 합니다.

믿음과 참된 예배는 교회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보여져야 합니다.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의 삶을 함께 공유해야 합니다.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하는 것을 본 베드로는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삶의 현장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무대는 산꼭대기도 광야도 아니었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무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보고 세상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에도 가고, 유대에도 가고, 사마리아. 땅 끝까지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위로부터 부으시는 성령의 힘을 얻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길 힘을 가지고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날 오래된 크리스챤 중에서 세상 친구가 없는 것이 문제 아닌 문제입니다. 그들 주변에는 오래된 집사, 장로들이 많습니다. 불신자들과 잘 사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세상사람들의 곁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의 복을 충만히 받고 이 충만한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생명수를 세상으로 끌어가기 위해 송수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이 송수관이 되십시오 축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충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있습니다. 이 충만한 복음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성공하시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주변과 이웃과 이 땅에 축복을 흘러 내보내는 송수관이 되십시오.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할 곳은 교회와 세상 속에서입니다. 삶이 예배가 되게 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을 실천할 곳이 바로 세상속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에베소에 들어가서 한 일을 생각해보겠습니다.

1)제자들의 성령충만을 위해

사도행전 19장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성령받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이라는 말 자체도 처음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기도하며 안수합니다. 6절의 말씀을 보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하고 예언도 하니..라고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나 먼저 성령받은 사람들은 우리 지체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서로 관심을 가지고 함께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성령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성령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요16:7-8)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깨닫게 해 주십니다. 죄를 지으면 죄짓지 말라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주십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악의 유혹을 뿌리치고 거룩을 유지하며 살도록 힘과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의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사용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의 육신적인 생각을 영적인 생각으로 바꾸어 보게 하십니다. 성령 충만하면 예수님이 행하셨던 능력이 우리에게도 나타납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오시면 우리가 비젼을 가집니다. 성령은 우리가 믿음이 흔들릴 때 우리를 위해 간절히 탄식하며 기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성령님이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앤드루머래이는 성령충만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성령 충만에 대하여 잘못된 인식을 갖지 않도록 나는 그것이 고도의 흥분상태나 절대적인 완전함,혹은 더 이상 성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그 어떤 성숙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나의 모든 본성을 성령의 능력에 굴복시키는 것을 뜻한다. 나의 전체를 성령께 복종시킬 때 하나님 자신이 나를 충만케 하실 수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지배와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성령에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성도를 만났을 때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함께 기도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받길 원합니다.


2)말씀 양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7절에 보면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12명쯤 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성령받은 12명 중심으로 제자훈련을 시작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3년동안 제자들과 동거동락하시면서 12제자를 양육한 것 같이 바울도 에베소에서 말씀으로 양육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를 채워나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갖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대한 자긍심도 갖지 못한 채 많이 들 위축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깨닫고 성장해야 합니다.


10절에 말씀에 "이같이 두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모아서 두란노의 서원에 들어가 2년 넘게 날마다 복음을 가르쳤을 때 나타난 결과가 모든 사람들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들었습니까?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서입니다.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의 수가 많아짐으로 도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훈련받고 세상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훈련은 우리의 영혼을 강건케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사마리아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틀동안 사마리아에 계시면서 그들을 말씀으로 깨우치시매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부흥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과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셋째, 에베소 사역의 결과를 살펴보겠습니다.

1)사람들의 의식변화(회개)가 일어났습니다.

새로운 영적인 지식을 깨닫고 나니 문제가 안되던 것들이 문제라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돼지머리에다 고사를 지내던 사람이 복음을 듣고 난 후부터는 그런 것들이 부질없는 행동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아데미 여신을 모방한 작은 신상을 하나씩 사다가는 집에다가 놓고 신주단지 모시듯이 숭배를 했는데 사람들이 더 이상 우상을 사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9장 24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아데미의 은감실을 제작해서 판매하던 자들이 바울 때문에 우상판매량이 급격히 감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계수단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고 소동을 일으킵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보니 우상숭배가 허망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의식을 변화를 가져옵니다.

어느 목사님이 기도원에 가서 한 건장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첫 인상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인상이 참 무섭구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얼굴에는 온통 칼자국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팔에는 온갖 종류의 시퍼런 문신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접근하기가 부담되었지만 목사님은 형제에게 다가가 인사했습니다.

“형제님, 안녕하세요?”

두 눈이 목사님을 향할 때 또 한번 놀랐습니다. 매서운 눈매 주변의 칼자국에 멈칫했습니다. 서로를 소개한 후 기도원에 온 이유와 그곳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연을 나눴습니다. 처음에는 머리를 흔들며 어색해 하더니 마음을 열어 자신의 과거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습니다. 고아원에서 생활하면서 그의 마음은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타올랐다고 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싸우는 일이 매일같이 반복되었습니다. 그가 고아원을 나와 전전하다 들어간 곳이 폭력 조직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잔인하게 상대를 때려눕히는 그의 실력에 모두가 감탄했다고 합니다. 상대 조직에서 자신이 속한 조직을 훼방하거나 건드리면 그날 당장 긴 칼을 가지고 쳐들어갔답니다.

처음에는 많이 얻어맞기도 하고 칼에 찔리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의 잔혹한 행위는 수위를 더해 갔고 살기(殺氣)로 뒤덮이기 시작했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잔인한 행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했고, 그는 급기야 어느지역에서 가장 큰 폭력조직의 행동대장으로 진급(?)했다고 합니다. 감히 아무도 그를 넘볼 수가 없었답니다.


그때 자신 속에는 누구든지 자기를 막는 자들은 모조리 때려 눕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단순한 폭행이 아닌 상대를 죽이는 것이 목표였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경찰에 잡혀 구속되기를 수 차례에 걸쳐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감옥에 가면 그는 황제(?)대접을 받았답니다. 감옥에 가면 다양한 계급이 있답니다. 잡범으로 잡혀 온 사람을 쥐털, 어느 정도 전과기록이 있는 사람을 개털, 그리고 폭력 조직의 상당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범털이라고 한답니다. 그의 위치는 항상 범털이었으며, 감옥에서까지 자신의 부하들이 철저히 시중들었다고 합니다. 그 누구라도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면 그는 가차없이 그 상대를 때려 눕혔다고 합니다.


감옥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이 감옥에서 말하는 종교행사가 있는 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 가볼까 생각하다 목사님이 와서 설교하는 곳에 가보기로 결정했답니다.

설교 중에 목사님이 그러시더랍니다. “여러분도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날 밤 혹시나 해서 기도를 하려고 흉내를 낼 시도를 했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람이 웃었나 봅니다. 그날 밤 그는 칫솔을 콘크리트 바닥에 갈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새벽에, 웃었던 사람의 눈을 찔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일 후에 그의 마음에 죄책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누굴 찌르거나 때려도 한번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는데 그 날, 기도하려고 흉내냈던 그 날부터 그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며칠 후, 자신이 갇혀 있는 감옥의 동료들을 집합시킨 뒤 “지금부터 화장실 청소는 내가 할 테니까 아무도 청소하지 마! 말 안 들으면 죽을 줄 알아!”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날부터 그는 화장실 청소, 작업 등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며 일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교회에 나가 설교 말씀을 들었습니다. 감방에 들어오면 모포를 뒤집어쓰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한 후부터 한번도 누구를 때리거나 눈을 찌르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완전히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수년동안 감옥에서 모범수로서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적인 생활을 했답니다. 이로 인해 6월 6일 현충일 특사로 풀려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또다시 폭력세계로 나가지 않기 위해 출옥한 날, 자신을 마중나온 조직의 후배들을 물리치고 기도원으로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죄악의 세상에 살아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답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할 마음으로 기도원의 청소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나에게 예수 믿으라고 말해준 사람이 한 명만 있었어도 내가 일생토록 그렇게 큰 죄악을 범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는 울었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행한 큰 범죄들에 대해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한 가지 부탁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주십시오. 제발 그들을 살려주십시오!”


이렇게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사역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일평생 우상숭배와 마술로 생계를 꾸려가던 사람들이 우상은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술을 행하던 자들이 주술 책과 도구들을 모아서 불사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책이 많았던지 그 책값을 계산해 보니 은오만이나 되었습니다.

은 한 냥은 성인 남자 고급인력이 하루에 벌어들일 수 있는 하루의 일당입니다. 하루일당 6만원으로 계산해도 30억원입니다.

무지하게 큰 금액입니다. 아깝습니다. 그러나 버려야 합니다.

이처럼 회개하면 때로 물질적인 손해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버려야 합니다.


2) 치유가 임했습니다.


11절,1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


11절에서 치유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병든 것을 치유하십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 기적이 있습니다.


(살전1:5)"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얼마나 많은 능력이 일어나는지 심지어는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가는 겁니다. 손수건이나 앞치마는 평범한 생활도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평범함을 기적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80세 노인의 몸을 지탱했던 꾸불꾸불한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었을 때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삼갈은 농부였습니다. 하나님이 농부였던 삼갈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시고 그 백성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그에게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는 농부로서 소모는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소모는 막대기를 들고 전쟁에 나갔을 때 하나님은 이 막대기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막대기로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아주 평범함이 주님의 손에 붙들려지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에게 특별한 것이 없다고요 . 너무 흔한 것 투성입니까? 그것가지고 충만합니다.


요사이 복음 통해 많은 기적들이 제일 많이 일어나는 곳이 남미지역입니다.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이런 곳은 사술과 마법, 악령숭배가 가장 센 곳입니다.

나라마다 기적의 유형이 다르다고 연구가 되고 있어서 흥미를 얻게 되는데, 브라질에서 제일 많은 기적의 역사가 "이 치료"입니다. 이제 이가 짐승과 싸워서 이가 빠지면 성인들은 이가 빠지고 나면 안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배 드리고 안수 받고 나면 이가 막 나오는 겁니다. 한 개, 두 개, 세 개가 막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르헨티나에서는 똑 같은 색갈의 이가 나오는데, 브라질에서는 이상하게 금니가 나온답니다. 여기는 원래 우리 이인데, 새로 나온 이는 금니랍니다.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브라질에서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는 그런 통계를 내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금니 사건이 하도 많이 벌어지니까, 브라질의 안드레스 아휘 아르 목사라는 분은 "금니 : 하나님의 표적"이라는 책도 냈습니다. 기적의 역사는 언제나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이 떠나고 병이 낫는 것을 본 사람 중에 자신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다가 봉변을 당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부흥이 일어날 때 이 부흥을 그대로 이용해서 돈벌이하려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귀신을 떠나고 병이 치유되는 것을 보고 마술사 시몬은 돈을 주고 성령을 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일이 생깁니다.


에베소에서도 마술하던 어떤 이들이 시험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불러 귀신을 쫓아내 보았는데 대표적인 인물들이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아들입니다.

그들은 호기심으로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악귀 들린 자들에게 귀신이 떠날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래서 도망간나요?

14절말씀을 보십시오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바울처럼 그대로 모방해서 귀신이 쫓아내는데 귀신이 도망가기는 커녕 봉변을 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예수의 이름으로 쫒아내었는데도 귀신이 나가지 않았습니까? 분명 예수의 이름에는 권세가 있고 치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앙은 주문이나 어떤 형식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이 아시고 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또 흥미로운 단어가 나옵니다. 빙자라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빙자 (憑藉)라고 하는 말은 " 어떤 부정적인 일이나 바람직하지 못한 일을 하기 위해, 그럴듯한 이유나 핑계로 내세우거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은 개인의 영달이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동일한 이름이라고 누가 부르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예수의 이름은 믿음을 가지고 불러야 합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다가 귀신에게 봉변을 당한 사실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예수의 이름으로 장난치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었고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은 누룩 같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적은 누룩이 밀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복음이 심겨진 세상은 변화합니다. 겨자 씨앗은 보잘것없이 작지만 생명이 있기에 자라납니다. 그래서 큰 나무가 됩니다.


큰 세력을 얻는 것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아직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가 끝날 때 까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세력을 얻는 것은 멈추지 않습니다. 오늘도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큰 세력을 얻습니다.

"복음을 심었습니다. 복음에 싹이 났네요 복음이 자랐습니다. 백배 맺었습니다."

심었습니까? 물을 주고 기다리십시오 당신이 뿌린 씨앗이 생명의 씨앗이면 자랍니다.


에베소에 바울이 들어간 것처럼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 우리가 이젠 복음을 들고 들어가야 합니다. 바울이 만나는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에 관심을 보인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는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과 말씀양육을 통해 우상문화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군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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