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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설교일 : 2014년 1월 주일

설교자 : 강효열 목사

본문말씀 : 창세기 4:1-7


가인은 예배를 드리고 망한 사람입니다.


예배를 안 드려서 망한 게 아니라 예배를 잘못 드려서 망한 사람입니다.

예배를 잘못 드렸다는 게 뭡니까?

자기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예. 분명히 하나님께 드린다고 드리면서 자기를 살피지 않음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많은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고 변한 게 없는 예배자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수록 더 악해졌습니다.

가인의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예배는

결국 스스로 악한 존재임을 드러낸 예배였습니다.


오히려 오늘 말씀의 예배를 통해서

그동안 누르고 있었던 그의 악한 성품이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자기 열심으로 감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드린 마지막 예배가 실패하자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게 된 후를 보십시오.


그 순간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인격자가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됩니다.

더욱더 깊이 보이는 거룩하지 못한 자기 자신의 한량없이 부족함 때문에 우는 사람입니다.


가인을 보십시오.

그 속에 끓고 있던 분노가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로 들에서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서 얼굴 빛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웃을 죽였습니다.

예배 잘못 드린 것이요, 실패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3-24절은

사람이 예배의 자리에 나온 것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어떠한 그릇, 어떠한 인격의 그릇으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수록 오히려 더 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평생 예배드려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라 내가 드리고 싶은 예배를 드린다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감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과 자기 방식의 예배가 몸에 배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의 예배가 몸에 배어져서 습관화될수록 그 사람은 더 악해집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정직한 마음, 정직한 땅을 가진 사람과 같습니다.

그 땅은 우리의 마음 밭을 의미하지요. 땅은 아주 정직합니다.

그래서 땅은 심은대로 거둡니다. 그 땅에 좋으면 30, 60, 100배 열매 맺습니다.

그러나 나쁜 땅은 심어도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이것이 땅의 정직함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성공자는?


1. 죄를 해결 받는 예배자가 되어라. 3-5절을 봅시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결국 하나님이 받고 안 받으시고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드리는 자의 마음밭에 문제가 있을 때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물리치는 거짓된 예배가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생각도 없이 예배를 많이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습관적인 땅이 되어서 묵은 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렘 4:3-4절>

"너희 묵을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5절을 봅시다.

‘가인과 그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제물은 그 다음 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엔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로 인간의 죄를 덮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범죄하기 전엔 하나님 앞에 바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벌거 벗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난 후엔 하나님 앞에 그냥 나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안 받으십니다. 부끄러움, 수치를 가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고 난 후에 가죽 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한 짐승이 죽었구요.

참된 예배에는 반드시 그 안에 죄를 가리는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피를 흘리든지, 가죽으로 덮든지 인간의 죄를 덮는 요소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주신 방법입니다.


아벨은 짐승을 잡았습니다. 짐승의 기름을 하나님 앞에 태웠습니다.

그의 마음 밭은 옥토 밭이었고 정직했습니다.

정직한 자의 예배는 주님 앞에서 내 존재를 깨닫는 예배입니다.

‘하나님 나는 말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그가 드린 제물 속에 이 고백이 들어있습니다.

정직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리워진 상태의 마음입니다.

거짓이 뭐에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거짓입니다.

정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직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의식이 조금도 없는 예배는 실패한 예배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을 보십시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제사에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 제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입니다.

그 제물이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예배가 어떤 것입니까?

먼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드리는 제사를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삶의 현장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온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예배자의 삶일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고 몸부림쳐 본 사람이 아니고는

절대로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아파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 제물 가운데 하나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그리고 죄사함의 은혜와 회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 그렇기에 예배가 성공한 사람의 현상은?


1) 더 큰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을 깊이 알아갑니다.


2) 더 밝은 소망이 생깁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묶이지 않고

오늘 감사와 함께 미래의 기대감을 갖습니다.


3) 더 깊고 넓은 사랑이 생깁니다.

예배가 성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을 더 사랑하고 섬기고 싶어지게 됩니다.



2. 자신을 이긴 예배자가 되라.


5-7절을 보십시요.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누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일까요?

세상을 정복하기 전에 하나님께 정복당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다스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예배가 거절당했다는 것을 안 순간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 순간 숨겨져 있었던 급하고 악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에 악하고 급한 감정이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그 예배가 안 드려졌기 때문에 악이 올라온 것이 아니라,

이미 그는 악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배가 실패한 것입니다.

그 순간에 갑자기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의 마음은 대적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아들 함이 하루 아침에 아버지를 엎신여긴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의 인격은 항상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실수를 발견한 순간 아버지를 공격하고 대적하는 것을 보세요.

그것이 한번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심으로 예물을 바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됨으로 덮여있었던 거짓 평안이었습니다.

그가 정직한 사람이요 경건한 사람이었다면

그는 하나님이 안 받았을 때 자기를 바로 돌아보아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혈기를 부리고 얼굴빛을 바꾸고 분을 내었어요.

그리고 예배에 성공한 동생을 시기하고 질투했어요.

그리고 동생을 죽이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큰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곧 그가 드리는 예배는 자기를 위한 제사였음을 알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은 그는 하나님 중심,

하나님이 기뻐하시게 드렸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언제나 그의 삶이 자기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편하고 좋으면 그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 중심의 예배는 안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하려면 불편합니다.

예배는 여러분을 편한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주는 시간이 아님을 기억하세요.


진정한 예배에는 결코 여러분의 편의를 봐주지 않아요.

집안에서도 어른을 한 분 모신다는 것이 그리 쉬운지 아세요?

예배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요, 드림입니다.


그렇기에 예배는 그 시간에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만을 위한 시간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완전한 제물이 되어지고 죽는 시간입니다.

그러한 예배자가 되었을 때 부어 주시는 은혜가 큰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가 살아서 오히려 하나님을 자기 만족을 위한 도구로 삼았어요.

언제나 자기 Need, 자기 필요중심으로 사는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정당하게 나를 대하지 않을 때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항의하실만할 정도로 불공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거부하셨다면? 반드시 그럴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지않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의 특징은 온전한 제물을 드리지 못해요.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인격도 이웃을 배려하기 보다는 치고 때리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때 나를 돌아보고 회개하고 바른 예배로 하나님께 나가면 됩니다.

그러나 분노가 생겼습니다. 분노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분노라고 하는 것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없어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공적인 예배자가 될 수 있어요?

어떻게 내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예배자가 됩니까?


“뱀의 후손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 것이요,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결국,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께서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를 위한 완전한 화목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 우리의 죄를 해결할 구원의 길은 여인의 후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정해 주신 제물과 방법과 내용이 길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자가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완전한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번제, 화목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를 완전하게 드리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고 온전하여

거룩한 제물이 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스림 받아야 합니다.

그분에게 다스림 받는 자만이 성공적인 예배자입니다.

그 분은 장차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3. 예배를 통하여 죄를 이기고 선을 행하는 예배자.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우리의 예배가 실패하게 되면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죄는 강력한 집착과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이긴다는 것은 죄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다스리는 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 밖에 없습니다.


'선을 행하며' -야타브(히)는 '바르다. 옳다'는 뜻입니다.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


7절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는 인격체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렇기에 사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네가 옳은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죄(사단)이 엎드려 있다는 것입니다.

엎드려(라바쯔)는 맹수가 먹이를 공격하려고 움츠리고 있는 자세입니다.

그렇기에 네가 바르게 살려고 하지 않으면 사단이 너를 공격하려고 움츠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먼저 공격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단을 불러 들입니다.


왜요? 우리 자신이 이미 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이미 더러운 태도와 악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옳고 그름을 다 알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지 못해요.

언제나 악과 결탁해서 나오는 악한 인격을 보세요.


말씀을 배운 사람들은 다 알아요.

그런데 알면서도 올은 길을 가지 않고 그른 길을 가요.


여러분이 옳은 것을 모르시나요? 다 알아요.

여러분이 정말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르시나요?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몰랐나요? 다 알았어요.

그렇게 해야 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을 모르세요?

그럴리가 없지요. 그런데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아요.


세상에서도 말하기를 '하지 않는 것이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악함 때문에 사단이 나를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그가 엎드려서 나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배 실패한 가인에게 뭐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오히려 네가 사단(죄)을 다스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자가 되어서 선을 행함으로 사단을 다스리라 하셨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로 서 있으면 사단은 덤비지 못해요.

그렇기에 우리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예배야 말로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합니다.


4.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이기고 죄를 이기는 선을 행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선을 행하면 낯을 들지 못할 이유가 없고

선을 행하면 분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선이 무엇입니까?


1)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선입니다.(회개, 방향)

우리는 절대로 내 자신과 죄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죄인임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과 말씀에 붙들립니다.

그때 우리는 창세기 1장 26-28절에 기록되어진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가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이룰 때 선을 이루게 됩니다.


2) 신령과 진정의 예배자가 되는 것이 선입니다.(예배자)

신령과 진정은 예배자의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23-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신령이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분에게 이끌리기를 소원하는 마음입니다.

진정이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것처럼 우리 자신이

말씀이 육신되기를 소원하고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함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요소가 무엇입니까?


(1) 장소: 넓은 장소와 좁은 장소의 의미-좁은 곳에서 드리는 예배.

출 25장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2) 시간: 내가 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3) 마음(몸): 마음과 성품과 뜻, 목숨을 다함 (신 6:5-6, 마22:37-39)


(4) 제물(예물): 제사에는 제물, 예배에는 예물.


하나님의 방법에 맞게 하나님께 나가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정하신 법대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마음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물을 준비해서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하는 것이 선입니다.

그 선함이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이웃에게도 온전히 선한 사람이 됩니다.

그 선한 자는 결코 자기 감정에 충실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격과 감정을 정말 믿으시나요?

여러분의 악함 속에 뭍어서 나오는 악한 인격을 모르세요?

그 감정에 섞여 나오는 말과 행동을 이기셔야 합니다.

만약에 매번 이기지 못하면 여러분은 언제나 불안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단에게 언제나 공격당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방법으로 예배 드려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자기 마음과 중심으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우상숭배에 불과한 것입니다.


곧 자기 생각, 자기 마음을 주인으로 섬기는 무서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무조건 예배 자리에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시간이 갈수록 주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셔야만 합니다.

예배는 내 자신이 살아 있는 제물이 되는 시간임을 잊지 마세요.


결국 가인은 선을 행하지도 못했어요.

왜요? 그 속에 악한 생각과 인격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끌어 오르는 죄악의 분노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죄를 다스리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죄에 사로 잡혀서 동생을 지켜야 할 자의 사명을 잃었습니다.


사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옆으로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물질과 시간과 몸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본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선입니다.


그것이 예배를 통과하면서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여러분 자신을 시험하는 시험대와도 같은 것입니다.

예배에는 성공과 실패만 있을 뿐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중간지대, 회색 지대가 없는 것처럼

예배에도 중간 지대, 회색 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냐? 안 받으시는 예배냐?

그렇기에 예배를 드리면서 즐기려고 하지 마세요.

예배를 위로 받는 수단으로 삼으려 하지 마세요.

그것은 예배의 일차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요, 다 드리는 것이요, 헌신입니다.


그 후에 우리의 예배가 성공된 후에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위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 그러므로 누가 죄를 이길 수 있습니까?

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1) 내가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라.

2)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라.

3) 은혜의 십자가 아래로 피하라.


그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죄 용서와

죄를 이길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놀라운 복은 예배를 통해 받는 것입니다.

아벨은 ‘예배는 살아있어야 하고 지켜져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순교했습니다.

예배가 목숨보다 중요합니다. 죄 용서가 있는 예배,

분노대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는 예배, 내가 원하는 방식과 인격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를 통해

죄를 이기는 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오늘도 예배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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