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Translation
약 B.C 8세기 중반에 또다시 중요한 예언자 계열이 구약성서에 나타난다.
그들 가운데 가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아모스인데, 동시대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아모스보다 조금 어린 호세아가 등장한다. 아모스는 여로보암 Ⅱ세 (B.C 787-747) 통치기간에 활동하였는데, 그가 통치하는 동안 북왕국은 국제적으로는 평화적 분위기와 국내적으로는 안정을 이루었다.
엘리야 이후 대략 1세기가 지나서, 우리는 또다시 예언자 계열의 출현을 듣게된다.
이제 전승의 외적인 형태에 놀라운 변화가 있게된다.
고대 예언자들에 관한 보다 길거나 짧은 설화들이 우리에게 있긴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예언자들의 말은 중요하지 않게 보이게 된다. 이제 우리는 비록 그것들이 전달된 적절한 환경과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예언자가 말한 것들을 온전히 수집한 모음집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관심은 메시지 그 자체로 분명 방향 전환되었다.
이러한 방향전환이 가져온 결과는, 우리가 구약 예언자들의 말과 사상에 대해서는 꽤 잘알고 있지만 반면에 그들의 삶과 운명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보다 후기 예언자들, 특히 예레미야 시대에 와서야 이런 개인적인 문제들이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8세기 예언자 계열에서 최초의 예언자는 아모스인데, 그는 예루살렘 남쪽의 작은 도시 드고아 출신의 양치기였다. 그러나 이런 정보만으로는 우리에게 이상한 어려움이 있다.
아모스는 예언자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그러나 아마샤 제사장이 벧엘 성소에서 아모스와 논쟁을 벌일 때, 아모스는 예언자 자격을 부인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아들도 아니다. 나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다."(암 7:14)
우리는 여기에서 제도권에 있던 예언자 집단과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예언자들 사이에 긴장관계를 엿볼수 있다. 원칙적으로 양자간의 대립은 없었지만, 제도권적 예언자 집단과 독자적인 예언자들 사이에 간헐적으로나마 친밀한 접촉도 있었지만, 그리고 예언자 집단은 이스라엘의 다양한 종교적, 종교정치적 역학의 흐름 속에 계속 말려들었지만,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예언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그들의 독립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모스는 그의 적대자가 시도한 차별에 맞서, 그가 받은 직접적인 신탁에 독자적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주께서 나를 양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 내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예언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모스는 어떤 집단이나 조직체를 벗어나 직접 피할수 없었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예언자로 임명받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한 예언자의 소명이 생기기전까지의 내적인 투쟁과정을 현재에 다시 재현할 수는 없겠지만, 아모스 3장 8절에서의 그의 발언으로 미루어 그가 겪었던 근본적이며 동시에 불가항력적인 힘에 대해서 몇 가지 단상을 얻을 수 있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데, 누가 겁나지 않겠느냐? 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모스의 모든 말과 태도는 그에게 내려진 것, 즉 그가 선포해야만 하는 어떤 근본적인 힘과 불가항력적인 성질을 암시하고 있다.
아모스는 아마도 모든 구약성서 예언자들 가운데 가장 철저하게 일관된 '심판의 예언자' 일 것이다. 그는 왕과 모든 이스라엘의 여론에 대해 자신의 재앙 메시지를 가지고 무섭고 일관되게 직면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분명 엘리야와 비슷하다.
왕가에 보낸 메시지는 아모스 자신에 대한 사적인 공격을 야기하였다. 아모스는 벧엘의 국가 성소에 자신의 예언을 가지고 나타났다. 아마도 꽤 많은 군중이 모여들곤 했던 벧엘에서 거행되는 대규모 순례여행 축제 기간중에 말이다.
예언자가 이와 같은 축제 기간 중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그리 낮설은 일은 아니었다. 추측컨데 예언자의 메시지가 축제행사 중에 정규적인 프로그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이 모여든 군중을 향하여 비판적인 말을 계속하고 재앙을 예견하며, 또한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재고해 주기를 촉구했다는 것은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분명 훨씬 멀리 나아갔다. 그는 이스라앨 전체에 급박하고 피할 수 없는 재앙 즉, 하나님 백성이 빚은 피할 수 없는 결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자신이 주권적으로 명령했던 재앙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아모스는 매우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대언의 형태로 백성들에게 선포하였다. "내가 칼을 들고일어나서 여로보암의 나라를 치겠다" (암 7:9) 그것은 분명 왕에 대한 공개적인 반란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아마샤 제사장은 분명 벧엘 국가성소의 책임자 였기 때문에, 왕에 대한 아모스의 무법적인 행동을 기록하였고 동시에 그 나라를 떠날 것을 그에게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아마샤가 아모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마샤가 그 사건에 대해 의무적으로 기록한 이후에, 왕의 박해로부터 그를 보호코자, 따라서 도망을 권유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주석가들 사이에 이견(異見)이 남아있다.
아무튼 아모스는 그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실천에 옮기는데 방해하는 수작을 보고 그의 요구가 납득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실랄한 비판으로 아마샤 제사장에게 대응했으며, 이스라엘의 파멸에 대한 예언을 선포하였다. 우리는 이 논쟁의 결말을 끝까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또한 아모스가 얼마나 오랫동안 예언자 활동을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어떤 학자들은 그 예언 활동기간이 그 고유한 축제 보다는 길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이 아직 미해결로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의 예언적 메시지의 윤곽을 상당히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다른 모든 구약 예언자들처럼, 아모스는 혁신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그는 고대 이스라엘 전통을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사실상, 아모스가 그 전통들을 일관되고 논리적으로 심사숙고한 결과 내린 결론은 당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익숙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요지중 하나는, 아모스가 분명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표현했던 바, 자신의 동시대인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이 택한 특별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그들의 의식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모스는 놀라운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신앙항목을 취한다. "나는 이 땅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서 오직 너희만을 선택하였으나, 너희가 이 모든 악을 저질렀으니 내가 너희를 처벌하겠다." 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씌어있다.(암3:2)
아모스는 하나님 앞에서의 이스라엘의 특별한 위치를 확신하지만, 아마도 당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들의 행동과 무관한 특별한 은혜와 하나님의 자비와 영속적인 확신을 주었다고 추론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모스는 그 선택을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의무와 책임감을 일깨우는 것으로 생각한다. 바로 그 이스라엘의 특별한 위치 때문에 하나님은 특별한 기준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특권적 위치라는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모스 9장 7절 말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스라엘 자손아 나네게는 너희가 에디오피아 사람들과 똑같다.
나 주가 하는 말이다.
내가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블레셋 족속을 갑돌에서, 시리아 족속을 기르에서 이끌어 내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다른 열방들도 이끄셨다. 따라서 아모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역사적 체험을 토대로 자신이 다른 열방보다 훨씬 훌륭한 민족이라고 생각할 권리를 이스라엘에게 부여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아모스는 새롭고 놀라운 방법으로 이스라엘 종교전통의 기본골격을 형성했다.
그 결과 그것이 그의 동시대인들에게는 전통적인 사상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였음이 틀림없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택사상을 그 본질적 성격의 관점에서 오직 올바른 입장으로,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성 영역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그는 단호히 이스라엘 선택 사상의 정치적 팽창과 대결하였던 것이다.
아모스는 전통과 함께 또 다른 중요한 사항을 다루고 있다. 옛 전통적 사상의 강성함에 대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나타내실 '약속의 그날'을 고대하였다.
이 "야훼의 날"은 일반적으로 적대자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최종적 승리로 이해되었으며, 따라서 기쁨의 날로 기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아모스는 그와같은 어떠한 견해도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주의 오기를 바라는 자들아, 왜 주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날은 어둡고 빛이라고는 없다" 그리고 절망적인 마음으로 아모스는 그날이 가져 올 재앙의 불가피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사자를 피하여 도망가다가 곰을 만나거나 집 안으로 들어가서 벽에 손을 대었다가, 뱀에게 물리는 것과 같다."(암 5:19) 일반적인 자족적인 낙관론과는 대조적으로, 아모스는 권능 현현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형태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비판적인 경계심을 불러 일으킬 하나의 상(像)을 제시한다.
아모스서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큰 주제가 또 하나 있다.
그의 비판가운데 가장 날카로운 말들은 우리가 현재 '사회적'이라고 부르는 영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아모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 착취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법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과부와 고아들을 부당하게 대하고, 중량(重量)을 조작하고 다른 부정한 장치를 이용하여 부당이득을 취하고, 뇌물을 주고 법정에서 영향력 있는 증언을 함으로써 정의(正義)를 왜곡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렬히 비난하고 있다.
이 모든 비난의 말들은 분명 어떤 부유층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또한 그 말들은 대도시의 상황과 관련된 사람들 중 검소하고 때묻지 않은 사람의 사회의식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어왔다.
그러나 그 비판의 근원은 훨씬 깊은 곳에 있다. 권리와 정의, 가난한 자들, 과부들과 고아에 대한 관심의 요구는 이스라엘 법의 가장 오래된 토대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요구들은 특히 이스라엘 전통이 스며있는 구약성서 법전의 여러 부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거룩한 예배시에 엄숙하게 그것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법'으로 선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모스가 여기에서 새로운 사회적 요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동시대인들을 죄에서 빠져 나오게 했던 그와 같은 일관성을 가지고 그들의 행동을 심판할 하나의 기준인 이스라엘인 자신의 기본전통을 나타내고 있음을 분명히 고찰해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시대가 안고 있는 상당히 구체적인 문제들에 관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모스가 출현했던 시대는 대외적으로 평온하고 국내적인 문제에서는 안정의 시대였다.
여로보암 Ⅱ세의 장기 집권시기는 북왕국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아마 가장 번영된 시기중 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이스라엘에서의 사회적 관계들의 어떤 변화들을 분명히 고찰할 수 있다.
이전에 시민들은 저마다 자신과 가족부양을 위한 소유지 배당 몫을 받았었던 사실에서 보면, 거기에서 이제는 일부분 매매가 팽창함에 따라 그리고 일부분 소유권과 관련하여 왕들의 특정 정책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까지 보다 많이 재산을 축적시켰고, 명백히 이와 같이 함으로써 비열한 수단과 냉혹한 음모를 계속 자행하였던 토지 소유계급으로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리한 외적 상황의 부정적 결과로써 이스라엘의 사회적 삶의 토대가 파괴적으로 위협받았다. 이러한 국면에 예언자 아모스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사회질서는 아주 옛날부터 이스라엘 종교의 본질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 본질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 언약으로 인해 공동체 내부에서 폐쇠적인 사회적 관계가 이루어졌으며, 또한 언약의 두가지 측면은 분리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어떠한 사회질서 해체도 동시에 이스라엘 종교를, 게다가 그 살아있는 근본적인 뿌리까지 위태롭게 하였다.
아모스는 바로 그 위험성을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위험에 대처하는 가장 강할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아모스의 말이 지니는 힘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그 말의 궁극성에 당황하게 된다.
그 말속에 스며있는 예언자의 자신 만만함의 실체를 우리가 꿰뚫어 볼 수 없음을 의식한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종교의 걸출한 인물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수세기에 걸쳐 이스라엘 종교의 이미지 형성에 이바지하였고, 생명력 있는 종교로 만드는데 일조 했던 인물이다.
2. Response
기원전 8세기에 활동하였던 '정의의 예언자'로 불리는 아모스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불의와 부패에 맞서서 과감히 야훼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선포하였던 위대한 예언자들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야훼의 선택에 대해 무책임한 이스라엘을 향해 '정의'의 회복을 외치며 하나님의 심판을 전한 참 예언자였다. 그는 야훼 하나님의 구원과 계약의 은총으로 안전과 번영을 보장받았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그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정의를 땅에 내동댕이치며 공의를 쓴 쑥으로 바꾸어버린 부패한 시대에, 그 부패의 본질(本質)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던 진정한 예언자였다.
특히 그는 사회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야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사회정의(社會正義)를 부르짖은 예언자였는데, 당시는 도덕적으로, 그리고 종교적, 경제적으로 부패한 시기였기 때문에 그는 가난한 자들이 철저히 소외당하고 농락 당하고 있던 현실에 분개하였다.
그는 결코 사회적인 불의와 부정의의 구조적인 문제를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문제들과 따로 구별해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회정의의 왜곡 뒤에는 부패한 예배자들의 타락된 제의가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의 총체적인 타락과 제의의 타락을 구원사적 전승을 근거해서 철저히 비판했으며 사회윤리적 범죄로써 고발하였다.
특히 아모스는 선민 우월주의와 낙관적 민족주의 신앙에 빠져있던 이스라엘인들의 그릇된 사고를 비난하며 "야훼의 날"에 대한 심판과 저주, 경고와 욕설로서 북이스라엘에 임박한 종말을 예언한 예언자였다.
이스라엘 사회는 이제 더 이상 그 구조적인 병폐를 치료할 능력도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회를 위해서는 이제 '야훼의 심판'만이 남게 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그가 사회의 전반적인 타락과 제의의 타락을 보면서 외친 것은 "정의를 강물같이" 흐르게 하라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그는 야훼의 선택에 대해 무책임한 이스라엘을 향해 정의의 회복을 외치며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정의의 예언자였다.
정의(正義) 개념의 피안화(Verjenseitigung), 개인주의화(Individualisierung), 내면화(Verinnerlichung), 정신화 (Spiritualisierung)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 왜곡이라고 생각한다.
정의(正義)라는 용어는 단지 하나님의 속성만을 나타내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내적이며 현실 변혁적인 행위명사이며 동작명사이기도 하다.
정의(正義)는 대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 대상은 '세계(世界)'이다. '정의'는 정의롭지 못한 세계를 향해 야훼 하나님께서 정의롭게 하시는 사건이며, 심판의 사건이다.
아모스서를 통해서 이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정의는 구체적이며 현실적이다.
역동적이다.
"아모스의 비판 가운데 가장 날카로운 말들은 우리가 현재 사회적이라 부르는 영역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시대가 안고있는 상당히 구체적인 문제들에 관심하고 있다" 라고 렌톨프가 그의 글에서 지적하듯 정의는 철저히 역사내적이며 현실 변혁적인 사회 비판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모스의 시대에 아모스의 입을 통해 정의를 외쳤던 하나님은 지금도 그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의 정의의 사건은 유일회적인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도 아모스와 같은 인물을 통해서 당신의 정의로운 사건을 일으키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