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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형성과 방법론(1)

쉴라이어마허와 바르트를 중심으로


1. 생애

신학자의 신학 형성과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쉴라이어마허는 종교개혁자들의 복음적 그리스도교가 개신교 정통주의 정신으로 변해 신학을 체계화시킨 교리와 신조들이 계시와 신앙을 대신하거나 동일시 될 때 종교의 공통근거는 경건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경건을 인간의 직접적이며 근본적인 그리고 선험적인 ‘나’라는 주체의 자의식으로 이해 하였다. 이것은 아는 것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식으로 나타나는 감정인 ‘하나님 의식’과 ‘절대의존의 감정’이다.

바르트는 쉴라이어마허이후 현대신학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서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말씀의 신학’(Theology of the Word)을 주창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교회 교의학」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던 키에르케고르나 쉴라이어마흐등의 관념론적인 철학용어들을 새로운 신학용어들로 바꾸어버렸다. 이로써 그는 성서교의학의 주창자가 되었으며 신학 방봅론으로는 변증법적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가 사용한 대표적인 신학용어들로는 예수는 승리자(Jesus ist Sieger), 절대타자(Der ganz andere)등이다.


1) 쉴라이어마허

쉴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 1768-1834)는 계몽주의가 한창 꽃을 피우던 18세기에 태어나 활동을 하였다. 독일 브레스라우(Breslau)에서 헤른후트파인 경건한 군목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고전을 공부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죄인이 받을 형벌의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가 15세 되던 1783년 니스키(Niesky)에 있는 모라비아 학교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즐기는 감정적 기쁨을 경험하였다.


그는 1785년 바르비(Barby)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철학적 토론에 몰두하다가 퇴교를 당했으며 할레(Halle) 대학에 가서 그리스철학과 칸트 연구에 전념하였다. 1790년 신학시험에 합격하여 개혁파 칼빈주의 교회(Reformed Calvinistic Church)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 당시의 관습에 의해 백작의 가정교사 일을 하면서 교양있는 부인들의 모임을 만들어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는 도덕주의 적인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1793년 교사자격을 획득한 후 베르린(Berlin)으로 이주하여 자선병원에서 6년 간 설교를 하였다.


1798년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이라는 책을 무명으로 저술하였다. 이 책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신앙적 윤리의 문제들이었다. 쉴레겔(F. Schlegel)과 노발리스(Novalis)등과 함께 낭만주의(Romanticism)의 입장에 서서 그는 자연적 본능과 생명, 자유, 개인적인 취미, 자발적인 창조와 명상 등 인간성 본연의 모습을 신학적으로 서술하려 하였다. 생명의 신비로움을 가지고 자연과 인생을 보았으며 권위를 무시하고 개인적인 자유를 강조하는 운동에 그는 앞장을 섰다. 그의 평생 과제는 자신이 자란 경건주의 적인 종교적 감정과 자유스러운 사고와 비판주의를 어떻게 결부 시킬 것인가 이었다.


베르린을 떠나 슈톨페에서 2년간 운둔하며 궁중목사로 일을 하였다. 그곳에서 플라톤 번역을 시작하였으며 프러시아의 루터파와 칼빈파를 접근 시키시 위한 소책자들을 출간하였다. 1804년 할레대학의 교수로 초청을 받아 강의를 시작하였다. 구약학을 제외한 전과목을 강의하였다.


그의 강의들은 신학전반, 변증법, 철학사, 윤리학, 교육학, 국가학 등이었다. 이때 강연집과 플라톤 번역 그리고 디모데전서의 비판적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디모데전서는 영어로 번역이 되었다.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비스마르크(Bismark)로 하여금 견신례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1807년 베르린으로 돌아와 헬라철학에 관한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1810년 베르린 대학이 개교되면서 지도적인 교수의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성 삼위일체교회(Holy Trinity Church)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이 강단을 통해 사람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정열에 불타는 애국자이기도 하였다. 프랑스에게 점령당하고 있는 동안에는 프랑스 대장 다보스(Davoust)에게 불려가 경고를 받은 적도 있다.

오랜 세월동안 저술과 설교 하루에 3시간 강의를 계속하면서 종교와 과학주의를 융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종교와 지적 생활이 분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경건 이라는 말이 무지라는 말로 대치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몇 분간의 묵상으로 강연준비를 끝낼 만큼 탁월한 자유주의적 성격 때문에 교수의 직을 박탈당할 뻔하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종교론」(Ü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ächtern, 1799)과 1822년에 출간된 「신앙론」(Der Christliche Glaube nach den Grundsätzen der evangelischen Kirche im Zusammenhang dargestellt)이있다. 그는 칸트와 헤겔의 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조화하여 합리적인 것을 만들어 그 시대에 소개하려 하였다. 그의 사후 편집된 저술들은 약 30여권으로서 신학 13권, 설교집 10권 그리고 철학의 분야가 9권이 있다.


2) 바르트의 생애

카알 바르트(K. Barth, 1889-1968)는 스위스 베른의 신약신학자 프르츠 바르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베른, 베를린, 튀빙엔, 마부르크에서 수학하고 자펜빌(Safenwil)에서 1911-1921년까지 10년 간 농촌목회를 하였다. 삶과 성서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1919년 「로마서 강해」를 출판하여 세계적인 신학자가 되었다.


1921년에 괴팅엔대학의 교수로 초빙을 받아 교수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25년에는 뮌스터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1930년에는 본(Bonn)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히틀러가 집권하여 교회까지 장악하려 하자 고백교회에 참여하여 교회 투쟁 지도자의 한사람이 되었으며 독일 민족주의와 히틀러에 반대하는 신앙고백서인 「바르멘 선언」을 기초하였다.

독일에서 스위스로 돌아와 바젤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82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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