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을 좇아 기도함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눅 22:39)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의 유명한 결단의 기도를 드리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시간은 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밤에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다니신 기록은 별로 나오지 않는데, 이때가 예수님께서 일생일대의 매우 중요한 기도를 드리시는 시기였기 때문에 제자들과 동행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바쁜 사역 중에도 늘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시며 그 시간들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바치신 것이 예수님의 능력 있는 생애의 비결이었습니다. 이날도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좇아 기도하러 감람산에 가셨던 것입니다.

I. 경건한 습관이 주는 유익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기도생활에 있어서 습관의 문제입니다. 이 습관적인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많은 폐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습관적이라는 말이 붙으면 다 안 좋은 것입니다. ‘습관적인 예배생활’, ‘습관적인 성수주일’, ‘습관적인 신앙생활’, 이런 것들은 모두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다 쏟아 붓지 않아도 몸에 익숙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행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이런 습관이 되어 익숙해진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 안에 무엇인가 반드시 깃들여야 할 중요한 것을 빠지게 만드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습관적’이라고 하는 것은 빈번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습관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꼭 필요한 기초들을 제공해주기도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연습을 계속함으로서 도달되는 것이 습관입니다. 습관 그 자체가 신앙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아니지만, 습관이 되면 언제든지 그것을 딛고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습관은 굉장히 중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말을 타고 숲 속을 산책하다가 하나님의 찬란한 임재를 보고 칼빈주의자가 되는 영적인 체험을 하는데, 그의 일기 속에 ‘습관을 따라서 건강을 위해서 말을 타고 숲 속에 들어가 산책을 했다. 그러다가 거기서 갑자기 하나님의 임재의 찬란한 영광 앞에 굴복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경건한 습관은 내용이 좀 모자란다고 하더라도 그 습관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습관이라고 하는 발판을 밟고 그 습관을 뛰어넘는 진정한 내용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시작하기만 하면 자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앉을 때도 수면에 방해받지 않는 자리를 택합니다. 그리고 설교가 시작되면 지적인 활동의 스위치를 끄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은 수면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누가 무엇을 말하든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전자의 사람보다 변화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많은 것입니다. 물론 예배가 예배답지 못하고 말씀의 내용이 없으면 그렇게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봐야 얻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습관은 여전히 고귀한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그런 습관이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II. 습관을 좇아 기도함 : 일정한 기도생활

기도에 있어서 이러한 습관은 더더욱 필요합니다. 공적인 예배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기도생활은 공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기도 안 나왔다고 전화하는 경우도 없고, 기도생활은 개인적인 것이기에 개별적으로 어디서든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하루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갑자기 이변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정해놓고 기도해야할 필요가 점점 더 증대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견고함이 없는 것입니다. 일정하지 않은 기도생활은 기도생활을 뿌리 내리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새벽미명에, 그리고 깊은 밤에 기도하신 것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사역시간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순수한 인간의 육신을 지닌 참 사람이셨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예수님도 철저하게 고정된 기도시간과 그것에 대한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서 새벽 기도의 습관과 밤 기도의 습관이 생기셨고, 그 습관이 몸에 배어있어 이날도 습관을 쫓아서 감람산으로 기도하기위해 올라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몇 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가 기도시간이냐고 물을 때 그 시간을 이야기 할 수 없는 사람은 90%이상 기도생활이 견고하지 않습니다. 할 때는 열심히 한다고 해도 기도생활이 인격과 삶 속에서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정해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이 있다는 것은 그 기도하는 시간에 대한 헌신과 집착이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 속에 어떤 것들을 정확하게 습관에 맞춰서 집어넣는 것은 하루아침에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습관을 좆아 하는 기도의 모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해진 시간이 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새벽이 제일 좋지만 그러나 꼭 새벽일 필요는 없습니다. 특수한 형편으로 도저히 새벽이 안 되는 사람은 밤이라도 괜찮습니다. 그것도 안 되는 사람은 직장이나 학교에서 점심시간이라도 좋고, 퇴근할 때라도 좋습니다. 장소도 교회가 제일 좋지만 교회가 아니면 골방이든지, 베란다에 기도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도한다든지, 직장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 점심시간에 가서 기도한다든지, 아니면 퇴근할 때에 교회에 들러서 기도한다든지, 집에 있는 지하실에서 기도한다든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해진 시간이 꼭 있어야지만 몸에 배인 습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몸은 본래 영적인 일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신령한 기도생활에 헌신하기 싫어합니다. 이 몸이 움직여주지 않으므로 기도생활을 못하는 것입니다. 몸이 움직인다고 해서 신령한 기도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몸이 움직여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습관에 익숙해지도록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새벽기도 시간이면 눈이 떠지는 사람, 하루에 성경 4장을 읽지 않으면 밤에 잠을 잘 수 없는 사람, 사람들에게 하루에 한번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빚진 것 같은 부담감이 들어 슈퍼라도 달려가 무엇이라도 사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과 같은 이런 습관이 있으면 반은 이기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계속 자극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일매일 우리들이 일정한 기도시간을 지켜서 실천을 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반복된 자극이 되는 것입니다. 일정한 취미생활이나 고정적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습관을 빠트리면 자기 존재가 확인이 안 되는 혼돈에 빠집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 억압받으며 못하게 되는 경우, 심하면 병이 나고 그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어서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습관이 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와 기도 한마디 못해도 왔다가 가는 것은 여전히 의의가 있습니다. “주님 저 이제 처음 예수를 믿어서 기도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 한마디만 하고 가도 그 사람의 그 기도는 신앙이 깊은 사람의 청산유수 같은 일만 마디의 말보다 주님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나쁜 습관이 들었다면 그것이 패역입니다. 자기 자신이 나빠서라기보다 자기 안에 있는 나쁜 습관과 성향들이 강력한 지배력을 가지고 계속해서 내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습관이 우리 몸에 배면 어떤 유익을 줄까요? 우선 사람이 성결해 집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하나님과 대면하고 싶은 것인데, 기도의 습관이 붙었다는 것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정해진 시간에 대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의 성향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습관입니까? 여러분들이 하루를 살면서 자기를 성찰하는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를 대면해야 되니까 가장 강력한 성찰을 가져다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거룩하시며...”하고 부를 때 자신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않은 것을 깨닫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하고 기도할 때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거스르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내 재주와 돈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과정 자체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깊은 성찰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매일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가장 중요한 표지입니다. 그런 습관이 배어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귀하고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런 경건한 습관이 몸에 배겠습니까? 물론 “하나님 그런 습관이 내 몸에 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습관화되기 위해서는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 반복되어서 실천을 낳고, 실천이 계속되면서 습관을 낳고, 습관이 계속되면서 인격을 형성하고, 성품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격과 성품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 사람의 장래의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성품이 불같고 아주 까다로우면 이러한 사람들의 인생은 대부분 험난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시집가면 시어머니와 부딪히고, 직장에서는 상사와 부딪히고, 동업하면 동업자와 크게 싸우고, 세 들어 살면 주인과 싸우며 살 것인데, 그 사람의 인생이 파란만장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전문적으로 관상을 공부하지 않아도 간단합니다. 성격이 까다롭고 칼날 같은 사람은 “참 험한 세월을 살아오셨군요.”하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험난한 세월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성품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 대해서 너그럽고 천성적으로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껏 까지 살아오면서 인덕이 참 많으시군요.”하면 “그것을 어떻게 아시느냐”고 하겠지만 사람의 성품이 좋으니까 누구와도 부딪히는 사람이 없고 그러니까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성품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습관이 어떻게 성품을 결정하는지 보십시오. 우리에게 어떤 습관이 있을 때 그 습관이 계속되면 될수록 습관과 성품 사이의 격차가 사라지게 됩니다. 습관적으로 꼼꼼하게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일을 하는 동안 치밀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습관화되어가고 있는 어떤 습관을 통해서, 지금은 습관과 성품 사이에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습관과 성품이 같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되지 못한 어떤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대해 교육받고 주위에서 신앙의 권면을 받기를 ‘하나님의 일은 굉장히 거룩하고 중요하다. 그래서 세상일보다 더 깔끔하게 완벽하게 잘해야 한다. 그리고 일하면서 항상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아직 이 사람의 성품 자체에 불같은 충성스러움은 없어도, 하나하나를 아무렇게나 하지안고 마음과 뜻을 다해서 해야 한다는 사실은 마음에 품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하는 것처럼 일 할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하면서 습관이 되는 가운데 그 사람의 성품이 충성된 성품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되는 비결은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을 경험함으로서 가능한 것인데,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의 요구에 매일매일 순종하는 실천을 통해서 그 사람이 점점 더 분투하게 되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습관이 그 사람의 성품까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III. 습관을 좇아 기도하려면 : 정한 기도 시간과 장소

습관은 반복되는 행동의 실천에 의해 형성됩니다. 어떤 실천이 반복되지 않고는 결코 습관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 속에서 멈춘 습관은 생각하는 습관만을 만들뿐입니다. 말하는데서 그친 습관은 말하는 습관을 결정할 뿐인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실천하는 습관은 계속 반복되는 행동이 있을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것은 기도에 있어 실천적인 행동하는 습관입니다. 실제로 움직이면서 행동하는 이 습관은 행동의 실천을 통해서만 형성되는 것이지 아무리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도 그것들이 기도의 습관을 형성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한 누군가의 말을 옮겨서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가르쳐준다고 할 때, 말은 능란해질 수 있고 잘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에게 또 하나의 습관이 생기게 됩니다. 바로 일주일에 한 번씩 사랑하는 구역식구들을 만나면 기도에 대해서 말하는 버릇은 생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입에서만 이루어지니까 거기까지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하는 실천적인 습관은 행동에 의해서, 그것도 반복되는 행동에 의해서만이 형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구체적인 기도 시간과 장소를 정하기를 강력하게 촉구 합니다. 새벽기도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동네 가까운 교회를 정해도 되고, 베란다에 담요를 깔고 기도하기로 정해도 좋고, 지하실이나 다락, 어디든지 정하십시오.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장소를 구하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장소와 실천하는 행동의 습관이 밀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소와 함께 시간도 정하십시오. 그러면 반성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규범을 정해놓으면 그것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가책이 생깁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음에 대한 말씀을 접하게 될 때, ‘나를 향하신 말씀이구나’ 하며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갈 지점이 있으십니까? 습관이 없는데, 돌아갈 시점이 있습니까? 철칙처럼 생각하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자기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운동하고,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 약수도 떠오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오염된 산꼭대기의 한 방울의 물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기도하기 위해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기 힘들면 집에 돌아가서 다락을 치우고 방석하나 갖다 두고 책상 하나 놓고 ‘만민을 위한 기도의 장소’라고 써 붙이십시오. 그리고 새벽마다 올라가서 기도해 보십시오. 장소가 결코 없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있습니다. 실상은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마음이 없어서 문제이지, 우리가 마음을 고정시키고 주님께 기도하려고만 하면 시간과 장소를 왜 정할 수 없겠습니까? 생활이 불규칙하다고 하는데, 생활이 불규칙하니까 더더욱 기도생활은 규칙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다니엘만큼 바쁩니까? 한 나라의 재상이 되었고, 그 엄청난 땅덩어리를 다스리는 국무총리가 되었지만 습관을 좇아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창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환경이 변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중하기 때문에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그 의무의 실천들이 자신 속에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되어서, 주님과 대면하는 고상한 기도의 습관이 몸에 배어 환경도 그 어떤 것도 흔들어 놓을 수 없는 것이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경건의 습관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요즘 계속 기도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 말씀으로 인해 가책을 받을 것 입니다. 가책을 받고 돌아가 월요일, 화요일까지는 ‘기도생활 해야지’다짐하지만, 또다시 느슨해진 생활을 하다가 주일에는 또 뜨끔하고 갑니다. 그런 생활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참으로 여호와를 온전히 따르는 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영혼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때 가책을 느낄 수 없다면, 그를 목양한 목회자가 그런 사람을 만들어 놓은 것을 인해 가책을 느껴야 합니다. 기도할 일들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몇 시간을 엎드려서 기도해도 기도의 제목들은 다시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처리하지 못한 일거리처럼 산더미로 쌓여 있습니다. 누군가가 기도해주어야 할 지체들과 기도할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것을 두고 태만하게 살아가면 그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정하십시오. 사람은 무엇인가 목표를 가지면 별 방법이 다 나옵니다. 방법이 없어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 새벽기도’는 하는데 ‘특별 숨쉬기’라는 말은 있습니까? ‘사십일 숨 몰아쉬기 대회’ ‘일주일 새벽 숨쉬기 대회’를 하고 숨 한번 쉬었다고 도장 찍고 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오죽 실천을 안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기도는 성도의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호흡하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호흡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하면 죽는 것이고, 생명 없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해보십시오. 마음속으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변명해보십시오. 많은 시간동안 기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10분이고, 20분이고 자기의 형편이 닿는 대로 정해진 시간에 마음을 드려 하나님 앞에 목회자와 가정과 교회, 내게 붙여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길 권면하는데 못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대보라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입가에 뱅뱅 맴돌기는 하지만 가장 커다란 원인은 우리의 게으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부족입니다. 다른 단어로는 표현이 안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면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고백하지 않고 살 수 있겠으며 애정을 느끼는데 어떻게 만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고 매어 달리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둘 다 신앙생활을 한다면 똑같아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는 끌어줘야 합니다. “여보 가서 기도합시다. 당신이 교회 일꾼인데 기도하지 않으면 되겠어요?”, “당신이 집사인데”, “당신이 교사인데” 이렇게 서로를 권면하고 기도할 시간을 만들어 주면서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놓으면 그 기도의 시간을 꾸준히 지키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만나주시고 감동이 생기면 시간이 그렇게 없다고 하던 사람들도 계속 그 기도의 시간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늘어나는 만큼 쓸모없는 일들을 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며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급한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중요한 일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주일날 와서 예배시간에 몇 마디 기도하는 것을 가지고 때우려고 하는 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이 수없이 있어봐야 기도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평소에 기도생활 속에서 주님을 구하지 않고, 그 예배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예배에서 감격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에 대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브레이크를 거시고 실망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만을 바라보며 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IV. 예수님의 기도습관

예수님은 기도하러 나가시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힘들게 사역 하시면서도 그런 습관이 몸에 배셔서 그 밤중에 감람산에 올라가실 수 있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히브리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저절로 습관이 몸에 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와 싸우시며 기도에 자기를 바치신 반복적인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습관이 몸에 배어 그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습관을 좇아서 기도하러 나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곧 있으면 십자가를 지셔야할 시기였음을 생각해볼 때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서 기도하러 나아가실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까? 매일 매일의 실천이 없이 그렇게 되셨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의 실천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매일 매일의 실천하는 삶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기도하시기 위해서 감람산으로 가게끔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뒤를 따라 우리도 실천해야 합니다. 장시간을 기도해야한다는 것은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장소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무릎을 꿇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이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할 기도의 제목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시간과 건강과 여건이 허락하는 최소한의 기도의 생활이라도 영위하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을 지키지 못할 때는 가책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 새롭게 그 실천에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을 때까지 우리의 신앙의 길은 무릎으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V. 결론과 적용

하나님과 쏟아지는 은혜 속에서 깊은 교제를 하면서 살다가도 어느 날 들판에 버려진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영적인 곤궁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매순간 은혜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은혜를 유지하면서 살도록 그렇게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굳어진 신앙생활의 습관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생활을 실천해서 그것이 여러분들의 몸에 배이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속에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갈망이 항상 깃들도록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시간을 정하십시오. 생활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침범 받지 않고 가장 지속적으로 견지할 수 있는 시간을 선택 하십시오. 가끔 어기더라도 할 수 없지만 시간은 정해야 합니다. 목표를 정해놓고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그리고 기도 하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처럼 그 기도의 습관이 몸에 배어서 살아있는 날 동안 내내 헌신되게 기도에 충성하며 주님과의 교통 속에서 사는 그런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 안에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풍성하게 계시는 길이고 그럴 때 여러분들이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도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주를 위해 살아가는 삶도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아가야 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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