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적 패러다임을 넘어서서 개인, 공동체, 생태계를 살리는 신학적 의의-
I. 왜 성령신학의 성령이해인가?
오늘 “성령”과 “성령운동”에 대한 관심이 교회는 물론 학계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이 현상은 먼저 현대사회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회로 변화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절대적 가치관, 이데올로기의 지배시대로부터 다원적이고 상대적인 가치관의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다원적인 현대사회에서는 다양한 가치관에 맞게 다양한 신앙적 삶이 관심되고 있고 이 다양한 신앙적 삶에 적절하게 다양한 능력을 베푸시는 “성령의 활동”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 현상이 반영되어 오순절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곳에서 생동감 있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다.
다른 한편 절대적인 가치관의 상실과 다원화된 사회는 개인의 무한 경쟁을 불러일으켰고 개인의 삶은 “의미 있는 삶”의 추구가 아니라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삶”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성령의 생동감 있는 능력과 위로 속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한 성령운동의 생동감 있는 영성이 이기적인 개인주의에만 머무르는 무의미하고 황폐한 삶에 회의하면서 성령운동의 영성이 공동체의 윤리적인 영역에서도 실현되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영성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태신학적 측면면에서도 “성령”이 관심되고 있다. 생태계의 구원을 신학적으로 구상하는 생태신학이 형성되면서 “성령”이 새롭게 이해되고 있다. 생태신학에서는 자연이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라 발전하며 완성하는 영적인 존재로 파악되고 여기서 “자연의 발전성”이 범재신론(Panentheismus)에 근거하여 성령의 창조적 활동이라고 구상되고 있다. 이 자연이해에서 새로운 “성령”이해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성령”과 “성령운동”에 대한 관심을 신학적으로 구현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90년대 이래 몰트만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령신학”이다. 이 신학은 “성령”을 전통신학과는 다르게 새롭게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신학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성령신학은 성령운동의 긍정적인 측면인 “개인”을 살리는 생동감 있고 영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기초로 하여, 성령의 이해 지평을 공동체적 영역으로 확대하여 공동체를 살리며, 성령의 역할을 생태계에게 적용하여 생태계를 살리는 신학적 과제를 수행하고자 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사회적 상황에 적합하면서도 우리의 미래적이고 공동체적인 과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 과제 앞에서 이 글은 성령신학이 오늘의 상황과 어떻게 관계되는지, 옛 패러다임인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은 왜 문제인지, 성령신학은 어떻게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가치관을 수용하면서도 넘어서는지, 어떻게 생태위기를 극복하는 자연이해를 제시하는지, 어떻게 “성령운동”의 긍정적인 점을 계승하면서 부정적인 점을 극복하고자 하는지를 성령신학의 성령이해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성령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패러다임을 넘어서면서 개인, 공동체, 생태계를 살리는 그 신학적인 의의를 규명하고자 한다.
II. 오늘의 사회적 특성과 그에 상응하는 신학적 패러다임의 내용
우리는 먼저 성령신학이 생겨난 토양이며 성령신학에게 신학적 임무를 부여하는 오늘의 사회적 특성을 분석해 보자.
1.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오늘의 사회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회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종의 시대정신이나 세계관인데, 이 이론은 문학과 예술분야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철학, 정치, 경제, 사회, 자연과학, 신학 등으로 확대되었다. 철학이나 역사이론에서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은 흔히 포스트구조주의, 경제영역에서는 포스트맑스주의, 경영의 영역에서는 포스트 포드주의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을 정의 하기란 그것의 다양성 때문에 쉽지는 않지만, 각 분야에서 나타나는 그것의 특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근대 이래로 철학은 진리나 지식의 어떤 절대적이고 확실한 근거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예를 들어 로크나 흄의 경험주의, 칸트의 합리주의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어느 한 핵심적 이론에 기초하여 삶의 현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가령 헤겔의 정신현상학, 하이데거의 해석학,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그리고 스미스나 리카르도의 자본주의 이론 등이 바로 그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개별이론의 절대성과 거대화이론에 회의하고 상대적인 가치만을 지닌 개별적 이론으로 철학적 이론을 평가한다. 경영의 영역에서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생산과 판매방식 대신에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다양화와 특성화가 고려되고 있고 자연과학에서는 자연과학의 엄밀하고 객관적인 방법이 확실하고 절대적인 결과를 도출한다고 생각되어 왔으나 토마스 쿤의 페러다임 이론 이후 과학적 이론은 한 시대에서만 유용한 패러다임으로 인정되고 있다.
신학의 영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종교다원주의로 표현되는데, 종교다원주의는 한 종교의 절대성, 일원성을 거부하고 다원성을 기초로 하여 종교를 문화에 따른 상이한 형태로 인식한다.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은 제 학문들 속에서 다원성, 복수중심주의 (복수 중심주의라는 말은 하나의 세계에 하나의 중심만이 존재하는 단일 중심주의에 반대하는 용어로써 하나의 세계에는 많은 중심이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등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2. 신자유주의(Neo-Liberalismus)
“신자유주의”가 경제정책에 대한 이론으로서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이 이론은 사회윤리적 차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어떤 이는 이를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발생하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 이론의 사회적 가치, 혹은 파급효과를 논하지 않고 그 이론이 반영하고 있는 사회적 가치관에 대해서 관심하려고 한다.
“신자유주의”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하이에크, 프리드먼, 뷰케넌 등이 개발한 이론인데, 이것은 정부가 어떤 이상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것의 달성을 위해 노력하는 “결과 지향적 정책”을 세우는 것에 반대한다. 그래서 이 이론은 집단주의, 절대주의 이념에 저항하고 절대주의적인 경제정책인, 경제성장정책, 산업정책 등 국가간섭주의를 배격한다. 대신에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율적 결정에 의한 “자생적 행동질서”를 세우는 경제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자생적 질서는 질서 속에 있는 개별 인간들 그리고 인간 그룹들이 참여하여 만들어 가는 질서로서 구성원들의 생각들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목표도 바뀌어 지는 질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미래에 대해서 열려있는 질서이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는 개인 각자의 목표를 중시하고 개인들의 목표의 조화적 결합 혹은 다원적 결합을 정책방향으로 설정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경제정책에 있어서 무한 경쟁을 유발하고 이 경쟁시스템을 이용하여 사회의 발전을 꿈꾸는 이론이다. 사람들은 오늘의 이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으며 이것은 공동체 속에서 가치 있는 삶의 추구를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3. 전체주의(Holismus)
(여기서 전체주의는 일사분란한 행동을 요구하는 정치적 의미의 전체주의가 아니라 생물들이 개별적으로 혼자만 성장하거나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서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발전한다는 의미이다. 전체주의(Holismus)란 말은 남아프리카의 법학자 Jan Christian Smuts(1870-1950)으로부터 유래하는데 그 이론의 대표자들로는 영국의 물리학자 John Scott Haldane, 독일 자연철학자 Adolf Meyer-Abich, dmltk Viktor von Weizsäcker가 있다. 전체주의 이론에 대해서는 K. M. Meyer-Abich, Wege zum Frieden mit der Natur. Praktische Naturphilosophie für die Umweltpolitik, München, 1984 제3장을 참조.)
오늘 우리의 시대는 생태계의 위기시대이다. 생태위기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인간 중심적으로 인간만을 생각하며 자연을 잘못 파악하고 잘못 상대한 결과이다. 사람들은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보는 반면에, 자연은 반복운동만 하는 존재로 규정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을 인간에 의해 인식되고 인간 마음대로 이용되는 재료로 자리매김했으며 착취적으로 지배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우주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전체주의”가 여러 학문분야에서 주목되고 있다. 전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중심이 아니라 한 부분일 뿐이고 전체에 참여하는 모두가 각각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체는 부분들이 모여서 구성된 것으로 전체 속에서 부분들은 상호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조화롭게 관계하며 그 전체를 구성한다. 여기서 전체주의는 인간 단일 중심주의를 포기하고 모든 개체가 중심이 되는 복수중심주의를 주장한다. 우리가 “전체주의”를 윤리의 영역에 적용하면, 윤리의 영역은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사회가 아니라 우주전체를 포괄하는 “자연의 공동체” (K. M. Meyer-Abich, Über eine “Praktische Naturphilosophie” des Menschlichen Handelns im Ganzen der Natur, in: Dürr/Meyer-Abich/Mutschler/Pannenberg/Wukeits, Gott, der Mensch und die Wissenschaft, Augsburg, 1997, 175)
로 확장되고, 우리가 그 전체주의적 조망방법을 이성과 감성의 영역에 적용하면, 우리가 어떤 것을 판단할 때 이성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또한 감성을 열등하게 여기지도 않으며 이성과 감성을 동등한 판단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4. 오늘의 세계의 가치 특성에 상응하는 신학적 패러다임
지금까지 우리는 오늘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신자유주의, 전체주의의 특성을 통해 오늘의 세계관, 가치관을 살펴봤다. 이러한 세계관과 가치관의 특성들은 신학의 패러다임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에 상응하여 새로운 신학의 패러다임 구축에서 중요한 기준들이 될 내용들을 정리해 보자.
첫째로 오늘의 신학은 거대한 한가지의 신앙목표를 절대시하는 것보다는 개인의 다양한 현실 속에서 형성된 다양한 작은 목표들을 신앙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신학적 구조를 형성해야 한다.
둘째로 다양한 작은 목표들은 하나님과 개인이 만나는 다양한 개인적 인격적 만남 속에서 형성된 것이고 이 다양한 만남 속에서 하나님은 개인들에게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주며 다양한 형태의 신앙적 행동들을 기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개인의 인격적인 만남이 신앙의 중요한 계기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개인들의 다양한 역할들의 조화, 개인들의 관계,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을 새롭게 규정하는 이 “관계성”을 신학은 신학적으로 구상해야 한다.
넷째로 감성의 역할이 부각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이성만이 학문적 판단방법으로 사용되었으나 이제는 감성도 주요한 판단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감성에 의한 감성을 위한 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다섯째로 “개인”의 부각이 공동체주의 속에서 반성되고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공동체적 개인주의로 발전되는 학문적 틀을 형성해야 한다.
III. 옛 패러다임으로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
그러면 우리의 과거 패러다임인 그리스도 중심적 패러다임은 어떤 패러다임이고 왜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규정되고 우리의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어떠한 한계를 가졌는지 살펴보자.
1.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역사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은 20세기 초 자유주의의 문화기독교와의 논쟁 속에서 칼 바르트(K. Barth)를 중심으로 발생했다. 자유주의는 인간 이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했고, 이성을 통하여 인간이 유토피아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파괴성 앞에서 사람들은 인간이성에 의한 유토피아 건설을 회의하게 되었고, 이 때 바르트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이데올로기에 대립하여 인간의 근본적인 타락성을 논증했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전적인 차별성, 하나님의 전적인 초월성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계시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인식, 인간의 자유, 하나님의 구원사건,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모든 신학적 사고의 출발점과 표준으로 삼았다.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이해는 다음 절에서 다뤄진다.
칼 바르트에 이어서 비서트 후프트(W. A. Visser't Hooft)는 1961년 뉴델리 WCC 대회에서 WCC 대회의 역사는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변천사와 패러다임 전환의 역사를 담고 있다. WCC는 세계의 신학들이 현실적으로 논의되는 장이었고 사회의 제반문제 및 사회의 조류와 대화하며 사회변혁의 구체적인 활동을 수립하는 실천의 장이었다. 따라서 현실의 상황과 문제에 하나님의 응답을 주는 것이 신학이라 한다면 그 신학이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민감하게 반영된 곳이 WCC대회이다.
WCC는 1948년 네델란드 암스텔담에서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기적(Man's Disorder and God's Design)”이라는 주제로 창립대회를 가졌고,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소망(Jesus Christ-the Hope of the World)”이라는 주제 하에 제2차 대회를,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Jesus Christ - the Light of the World)“이라는 주제 하에 제3차 대회를 열었다. 이 세 대회에서는 한편에서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의 실현 노력, 다른 한편에서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에 따라 그리스도의 제2격 신성이 강조되고 그리스도를 우주의 창조자인 하나님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다른 이름은 없다(Kein anderer Name)”라는 주제강연을 통해 “그리스도 중심적 우주론(Christozentrischer Universalismus)”을 제시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적구조에서 제2격에 해당하는 “하나님”이고, “우주를 지배하는” 하나님이다. 후프트는 이 우주론을 토대로 종교혼합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증언인 그리스도 중심성을 포기하지 않고 타종교와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W. A. Visser't Hooft, Kein anderer Name. Synkretismus oder christlicher Universalismus?, Basel, 1965 참조.) 그는 이 우주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서만 유일한 중심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몸이며 타종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한 주(主)이다. 기독교의 선교는 상황에 적합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것이 종교혼합주의적으로 되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계시를 다른 사고형태들과 혼합해서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다른 문화 속에서 적합한 선포형태를 취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본질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바꿔서는 안 된다.
콘라드 라이저(K. Raiser)는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Christologie von oben)”이라고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은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과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Christologie von unten)”으로 구분되는데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의 구조 속에 있는 제2격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사변적으로 논증하며,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우주 혹은 세계의 구조를 설명한다. 그와 달리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난한 자, 약자 그리고 소외된 자를 위하여 삶을 산 세계의 정의와 평화의 “모범자”로 본다. 그리고 이 이론은 그 모범자의 삶을 이 땅에서 따라 살고 그가 말한 윤리를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다. (K. Raiser, Ökumene im Übergang, 1989, 94ff.)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은 1960년대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에서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으로 전환된다. WCC 제4차 대회는 196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보라 내가 세상을 새롭게 하노라(Behold, I will make all things new)”라는 주제 하에, 제5차 대회는 1975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케 하시고 연합하신다(Jesus Christ Frees and Unites)”는 주제로, 제6차 대회는 1983년 케나다 벵쿠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생명(Jesus Christ - Life of the World)”이라는 주제로 모여서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적 주제들의 실현을 논의했다.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의 세계관을 반영하여 세속화 신학, 신 죽음의 신학,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발생된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은 종족주의와의 투쟁, 정의로운 분배,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에 대한 연대적 활동의 참여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신학계에서는 “생태위기”가 신학의 주제가 되면서, 90년대 이래로 그리스도론적 문제보다는 성령론적 주제가 다뤄지게 된다. 그 이정표는 몰트만의 책 “생명의 영”으로 표시될 수 있다.
그때부터 신학에서는 자연의 유기체적 이해가 부각되었고 사람들은 이를 반영한 과정철학과 과정신학에 관심을 갖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자연을 새롭게 이해하는 생태학적 창조론들이 구상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생태학적 창조론들은 자연이 자신을 발전시키는 “생산성”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자연이 인간과 “파트너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들을 신학적으로 논증했다. 몰트만은 이 ”자연의 생산성“을 설명하기 위해 쉘링(Schelling) 쉘링은 자연의 특성을 “natura naturata(자연의 재생산성)”와 “natura naturans(자연의 생산성)”로 구별하는데 이와 유사하게 몰트만은 자연의 재생산적 측면과 생산적 측면을 구상하고 범재신론적으로 자연의 “재생산성”을 자연의 “피조물성”으로, 자연의 “생산성”을 신의 내재를 통한 자연의 “창조성”으로 구상한다. 이에 대해서는 쉘링의 책, (K. F. A. Schelling(Hrsg.), Friedrich Wilhelm Joseph v. Schellings sämtliche Werke, Band IIIÖ Erster Entwurf eines Systems der Naturphilosophie, 1799, 284와 289. 그리고 몰트만의 책,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한국신학연구소, 1987, 251f을 참조.)처럼 범재신론적으로(Panentheistisch) 자연을 이해했다. 그는 성부 하나님은 초월되어 있지만 성령은 내재되어 자연의 생성, 발전, 완성을 이끈다고 보았다. 여기서 새로운 성령이해가 발생하게 된다.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계기는 또한 유럽 이외의 대륙에서 나타난 성령운동과 교회의 성장이었다. 이 운동은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는 달리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점 보다는 살아 있는 ”성령“의 활동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련 사회주의 정권의 몰락 이후 커다란 이데올로기적 주제 보다 작은 개인적 주제들이 선호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분위기 속에서 개인적인 다양한 상황에서 만나는 성령이 더욱 관심되었다. 이러한 성령에 대한 관심 속에서 제7차 대회는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성령이여 오소서. 온 피조세계를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생태위기에 처한 사회에 대한 문제를 다뤘고 제8차 대회에서는 1998년 짐바브웨의 하라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소망 가운데 기뻐하자(Turn to God - Rejoice in Hope)”라는 주제로 열렸다. 이 대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완결을 나타내는 의미의 주제로서 신중심적 사고를 지시하는 성부 하나님을 주제로 삼았다.
결국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이 대답해 주지 못하는 현실적 상황으로부터 생겨난 성령에 대한 관심은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옛 패러다임으로 규정하는 근거로 된다.
2.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성령이해 - 칼 바르트의 경우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령은 철저히 초월해 있는 존재이다. 이 초월성이 이원론적 사고의 기틀이라고 비판되기도 하지만, 바르트는 자유주의의 인간이성에 대한 신뢰와 인간의 자율적인 유토피아 건설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분명히 반대한다. 이것은 자유주의의 “내재성 이론”에 대한 반대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신을 대신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의미가 보다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초월적 성령 (바르트가 말하는 “성령의 초월”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K .Barth/H. Barth, Zur Lehre vom Heiligen Geist, Beiheft 1, Zwischen den Zeiten, München, 1930)은 구원의 활동성에서 본다면 과거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사건을 현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계시인 그리스도의 오심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고 (K. Barth, KD. II/2, 874)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도록 계시의 수신자인 인간에게 능력을 부여한다. (K. Barth, KD. I/2, 222)
그리고 성령은 그리스도를 인식한 사람들에게 성화의 삶을 살도록 이끈다. (몰트만, 생명의 영, 대한기독교서회, 21f)
인간이 성령을 통해 성화될 때, 이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칭의와 함께 이루어진다. 즉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 일어난다. 인간은 성화의 삶을 살 의지도 능력도 없다. 다만 성령이 인간의 영에 종말론적으로 현존하는 데에서 인간의 성화는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성화를 통해서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상이 사라지거나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구원되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성령을 통한 것일 뿐 인간 자신은 죄악적 본성을 그대로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성화는 인간의 점진적인 발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성령은 인간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즉 계속적인 창조를 이루는 창조의 영이 아니라 다만 구원시키는 영으로 규정된다. 정리하면 바르트는 성령과 피조물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중재하는 자로, 구원사건의 영으로 규정한다. (몰트만, ibid., 20f)
3.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특성과 한계
이와 같은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이 오늘 우리의 상황과 부합하는가? 첫째로 현대 기독교 신학사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은 “인간 중심적 신학”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설정에서는 신본주의적인 시각을 갖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속에서는 인간 중심적이다. 그 신학은 인간중심적으로 인간을 세계의 왕으로, 그리고 자연을 인간을 위한 존재로, 그래서 인간의 이용대상이라고 본다. 이 신학은 나아가 인간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인간의 사회에서만 실현되는 나라로 암묵적으로 한정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피조물의 나라가 아니라 인간의 나라로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은 “인간중심적 신학”이다. 전체주의적인 사고(Holistisches Denken) 이래 이러한 인간중심적인 성격은 옛 패러다임의 한 모습으로 평가될 수 있다.
둘째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은 성령의 역할을 제한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세 번째 위이지만 삼위의 관계 속에서 독자적 자기역할을 가지지 못하고 제2격인 그리스도의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에서 성령은 과거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 구원사건을 현재화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이해에서 성령이 모든 피조물 안에 계시고 그 피조물들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세계사적 차원은 침묵된다.
셋째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은 자연에 대한 파악이 없고 자연의 창조적 발전을 설명할 신학적 구조를 가지지 못한다. 오늘날 생태신학은 자연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하는데 하나는 자연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 그래서 피조물로써 자연은 하나님의 구원대상이 되며 하나님의 구원인 종말의 완성에 참여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면서 자신의 생산성을 실현한다고 본다. 즉 자연은 자신을 똑같이 만들어 내서 자신을 유지하는 “재생산적 측면(Reproduktiertwerden)”과 자신을 발전 시켜서 새로운 존재로 만드는 “생산적 측면(Produktivität)”을 가지고 있는데, 자연은 이 생산적 측면에 의해 종말론적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생태신학은 여기서 자연의 완성을 성령의 역할로 구상하는데, 성령이 자연에 내재되어 자연의 영을 이끌어 완성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생산성을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은 구상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신학은 피조물의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새 창조를 설명할 신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은 분명한 절대적 목표를 세워두고 그 목표실현을 향해 달려가는 신학이다. 주변의 작은 다양한 목표들은 그 절대적 목표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는다. 만약 작은 다양한 목표들이 두드러지게 된다면, 그것은 절대적 목표의 “절대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다양한 목표들이 제시된다면, 그 절대적 목표는 “상대적인” 하나의 목표로 평가 절하되기 때문이다. 그 절대적 목표를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에 따르면 인간사회의 정의와 그를 통한 평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회는 다원화된 사회이다. 상대적인 수많은 가치들이 병존하는 사회이다. 개인들이 느끼는 문제와 개인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들은 다양하다. 각자의 상황에서 본다면, 그들의 다양한 가치와 목표들은 다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늘 교회의 현실은 그 다양한 개인적인 목표들을 조화시켜서 복수 중심적인 목표를 구성해야한다. 게다가 개인의 목표들은 고립되거나 독특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연결되어지는 목표들이고 적대적인 목표가 아니라 상호 보완하는 목표들이다. (미하엘 벨커, 하나님의 영, 성령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995,, 53) 신학이 이 다양하고 복합적인 목표들이 상호 존중되도록 그 역할을 해야 한다.
다섯째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패러다임은 주객의 이원론적 관계성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패러다임이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분명히 구분하면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객이원론에 따른 관계성의 패러다임은 근대의 데카르트 이래로 사회를 지배해 왔고 사회에서의 모든 관계성의 모형이 되어서 하나님과 인간, 남자와 여자, 인간과 자연, 어른과 어린이 등 모든 관계에 위계적으로(hierarchisch) 적용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에서는 절대적인 지도자 상으로, 생태적으로는 자연의 지배자 상으로, 가정에서는 가부장상이 고착된 것이다.
그러나 생태주의와 전체주의적 사고(Holistisches Denken) 이후 그러한 주객의 이원론은 지양되고 관계에 참여하는 모든 요소들이 상호 인정하며 보완하며 대화하며 사귄다고 인정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V.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성령신학의 성령이해
옛 패러다임으로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한계는 분명해졌다. 이제 우리는 성령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적 특성들을 성령이해를 통해 분석해보자.
1. 성령운동을 통해 나타나는 “생의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성령
성령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크게 둘로 대별되는데, 하나는 형이상학적이며, 사변적인 삼위일체의 구조 속에서 이해하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적 추구 속에서 성령을 말하는 신비주의적, 비이성적인 이해이다. 전자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구조이고 후자는 감성적으로 하나님을 느끼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인식하게 해주지만, 철학적 체계에 따라 신을 설명하는 이성중심적 교리신학이다. 그러므로 감성에 의하여 형성되는 하나님과 개인의 체험적이고 내면적인 인격적 관계의 구축과 그를 통한 영적인 활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반면에 후자는 중세 신비주의-경건주의 -웨슬리안주의 -오순절주의로 계승되어 왔는데, 하나님과 개인의 신비적 만남을 통해 인격적이며 내면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그 관계를 통해 감정적 “기쁨”과 “감미로움”을 느끼게 하지만, 신학의 형이상학체계가 약화되어 있다. 이를 반영하듯이 17세기 독일 경건주의는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영적 혼인”의 관계로 구상하여 “신랑 때문에 마음은 달콤한 기쁨으로 가득 차고, 묵상의 생수가 그 위에 흐르고, 영혼은 사랑으로 인해 녹아나고 기뻐하며, 애정과 갈망은 뜨거워지고, 사랑이 불이 붙고, 마음은 즐거워하고, 입은 찬양과 영광을 드리고, 서원을 하며, 영혼의 모든 능력은 즐거워하게 된다” (요한 아른트, 진정한 기독교, 은성, 1988, 335)고 말했다. 독일 경건주의 전통은 이러한 “영적 혼인”을 통해 사람들을 기쁨과 감미로운 사랑 속에 빠지게 하고 이를 통해 중생하게 하고 성화에 도달하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성화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실제의 “삶”이 만족할 수 있다고 경건주의는 보았다. 그래서 경건주의는 “가슴의 종교”를 지향한다. (주도홍 편저, 독일의 경건주의,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 31)
그러나 이 신비주의적인 전통은 마치 하나님과의 내면적인 관계가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신비주의에 몰두하게 했다. 그리하여 좀더 황홀경에 이르는 만남만을 갈구하게 하여 타계주의적인 세계관을 갖게 했고 하나님을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오늘날 성령운동은 이러한 신비주의 전통 속에서 하나님과 개인이 만나는 수직적 관계를 중시하는 긍정적인 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성령을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하는 면이 약하다는 점과 수직적 만남을 통해 변화된 개인들이 세상 속에서 변화된 삶을 사는 수평적인 윤리적 실천의 면이 약하다는 점에서 비판되고 있다.
이러한 성령운동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에 있어서 성령신학은 먼저 하나님과 개인의 일대 일의 깊은 만남을 중요하게 고려한다. 이 만남 없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할 수 없고 또한 자발적이고 생동감 있는 신앙인이 될 수도 없다. 사람들은 이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고 희망을 갖게 된다. 이 만남에서 성령은 지쳐있고 쓰러져 있는 개인을 일으켜 살린다. 이것은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고려이고 성령신학이 발생하는 하나의 계기였다.
나아가 성령신학은 성령의 형이상학적 특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성령신학은 전통적 종교개혁적, 변증법적 신학의 관심사인 “위로부터”, 곧 하나님의 신성을 형이상학적으로 논증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형이상학적 체계 속에서 이해함 없이 순간적으로 느끼는 기쁨 혹은 감정만으로 서술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성령신학은 형이상학적 이해를 인간경험의 형식에 근거하는 현실적 이해와 연결하여 추상적인 규정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영역 속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성령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해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성령신학은 하나님과 개인의 일대 일의 만남을 그 수직적인 차원의 만남으로 종료시키지 않는다. 그 만남이 수직적 만남으로 그친다면, 인간 공동체는 경시되고 윤리적 실천이 약화되고, 그리하여 수직적 만남을 통한 중생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성령신학은 분명히 하나님과 인간의 개인적이고 수직적인 만남을, 다음절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수평적이고 공동체적 영역으로 연결시킨다.
2. “복합적 경험”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현실적 존재로서의 성령
성령신학은 형이상학적 지평에서 이해된 성령을 경험을 통해 인식하려고 한다. 이 말은 형이상학적으로 하나님의 삼위의 구조 속에서 설명된 성령을 삶의 영역에서 현실적으로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참조. 미하엘 벨커 ibid., 3f) 이 경험은 일차적으로 개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개인경험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개인경험이 주관적이고 탈공동체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신학은 삶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을 입체적으로 구상하여, 성령운동이 이기적 개인주의의 영역 속에 가두는 성령의 능력을 공동체적 지평으로 확대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때, 경험에는 개인적 차원의 경험, 공동체적 경험, 그를 넘어선 역사적 경험 등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인 경험은 개인의 상황 속에서 개인적으로 성령의 활동과 도우심을 깨닫는 경험이다. 개인적 경험들을 극단적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과 관계없는 경험 일 수 있다. 개인들은 주관적이고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미시적 의미에서만 타당하다. 동일한 시대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그 관계성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고자 하고 그 시대 속에서 동일한 상황 가운데 있으며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즉 개인들은 서로 관계 속에 있으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 따라서 개인들의 관계성과 개인의 경험은 뗄 수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개인의 경험이 공동체와 연결된 경험이라는 사실을 논증한다.
예를 들어 히브리인들의 출애굽과 해방경험의 지평은 민족적 지평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처음에는 개인적 지평의 측면, 개인의 해방의 지평을 가지고 있고 그 개인의 해방의 지평이 복합적 관계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형성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 지평이 개인적 지평을 포괄하고 개인적 지평의 경험은 공동체적 지평에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개인의 경험들은 공동체의 경험이 되고 공동체에게 영향을 주며 공동체를 이끄는 경험이 된다. 또 공동체의 하나님 경험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대들에게 반복하여 이야기됨으로써 전달되는데 (몰트만, ibid., 46), 이 공동체의 경험은 개인에게 가치관을 세워주고 미래에 대한 활동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끌어 미래에 대한 공동체적 기대를 갖게 한다. 그리하여 개인적인 경험의 지평과 공동체적 경험의 지평은 상호침투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경험은 공동체적 지평 아래에서 공동체의 경험의 빛에 의해서 재형성된다. 그리고 급진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이용되는 경험은 공동체의 빛 속에서 반성된다.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살아있는 역사적인 하나님을 경험한다. 역사적 하나님 경험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경험을 말한다. 사람들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공동체를 구원시키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이 경험되는 역사적 현실로, 우리의 역사를 하나님의 경험으로부터 생성하는 역사로 생각한다. 역사적 하나님 경험은 언제나 과거의 하나님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미래의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그 사이에 존재한다. 하나님에 대한 회상과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 역사적 상황에서 경험하게 된다. (몰트만, ibid., 63)
그리하여 경험의 영역에서 성령을 이해한다는 것은 수직적인 개인의 경험과 수평적인 공동체의 경험의 상호침투적 관계 속에서 성령을 이해한다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서 개인도 살고 공동체도 사는 것을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성령은 이러한 경험의 입체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성령의 경험적 이해에서 개인의 경험은 기본적인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개인적이고 유한하고 사멸적인 인간 위에 임하며 그를 사로잡으며 감동시킨다. 이것이 옷니엘, 기드온, 입다, 사울에 대하여 명시적으로 보고된다. 미하엘 벨커, ibid., 93
개인의 경험과 상관없는 공동체 경험은 개인에게 있어서 추상적인 경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경험은 역사적 사건으로 현실화되지 못한다.
요즈음 흔히 성령운동이 범하기 쉬운 오류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경험만을 성령의 경험으로 한정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경험이 공동체의 경험의 빛에 비추어서 재평가 혹은 재형성되지 못하고 또 공동체의 경험으로 확대되지 못하여 역사적 경험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개인의 경험은 입체적 이해의 과정을 거쳤을 때에만 진정한 성령의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의 경험은 세계 속에서 영의 능력을 발휘하며 교파적 한계를 지양시키고 교회일치를 이루는 역할을 할 것이고 역사발전의 거대한 사건으로 나타날 것이다.
3. “새 창조”를 이루는 성령
전통적인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성령을 새 창조의 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성령은 내재하여 피조물을 나날이 발전시키는 계속적인 창조를 행하고 새 창조에 도달하게 하는 새 창조의 영이 아니었다. 필리오크베(Filioque) 선택에서는 성령이 단지 그리스도의 영으로만 이해되고 성부의 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구원하는 영일 뿐 창조하는 영이 아니었다. 몰트만, ibid., 23
바르트에게서도 성령은 새 창조를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일어난 구원을 인식하게 하는 단순한 역할을 가진 영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성서에서 보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 점점 새로운 삶으로 진일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새롭게 창조해 가는 모습이다. 구약에서 모세가 호렙산에서 가진 하나님 경험은 바로 새 창조를 행하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고, 예언자의 외침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점진적으로 교정시키는 점진적인 발전 혹은 새 창조의 활동이다. 신약에서도 병과 사탄으로부터의, 사회적 억압과 모욕으로부터의, 무신적 세력으로부터의, 죄의 굴레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의 경험들은 점차적으로 인간의 삶을 완성으로 이끄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경험이다. (몰트만, ibid., 139-140) 즉 하나님은 초월적으로 존재하면서 한번의 사건으로 피조물을 구원시키기도 하지만, 성령을 피조물에게 내재시켜 피조물을 점차적으로 변하게 하여 새 창조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새 창조는 개인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새 창조된 개인에 의하여 공동체적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래서 개인과 공동체는 점차적으로 발전한다. 새 창조의 활동은 인간사회의 영역에만 한정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성령은 피조물 전체의 우주적인 새 창조를 이루는 분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고 새 창조의 대상이다. 성령은 전 피조물에게서 언제나 새로이 피조물들의 현재와 관계하면서도 미래를 바라보며 발전하도록 능력을 베푼다. (미하엘 벨커, ibid., 20) 이를 통해 모든 피조물은 창조의 완성에 도달한다.
4. “내재적 초월” 개념으로 파악되는 성령
성령신학이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창조하는 성령의 역할을 구상할 때,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내재가 전제된다. 여기서 내재는 하나님의 다른 모습인 하나님의 초월성을 손상함 없이 내용적으로 하나님이 피조물 속에서 피조물을 이끈다는 의미상의 내재를 말한다. 하나님의 내재를 몰트만은 “쉐히나(Schechina) 이론” (몰트만 ibid., 74-80) 으로 설명한다.
“쉐히나 이론”에 따르면 성령은 피조물 안에 거주하는데 그는 피조물과 함께 고통을 당한다. 성령은 피조물 속에 거주하면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근심에 빠지며 상처를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은 피조물의 영과 달리 하나님을 향하여 무한히 동경하고 하나님께 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까지 피조물과 동반하며 피조물의 발전을 이끈다. 피조물인 우리가 우리 속에 거주하는 성령의 작용 속에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면서 살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행복을 느끼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더 완성되어 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피조물 속에 내재한다고 해서 피조물 속에 있는 영과 성령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피조물 속에 내재하여 피조물을 이끄는 분이 성령이지만 피조물의 영적 측면이 곧 성령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의 모든 피조물과 그의 피조된 에너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 있고 그 한계를 벗어나서 계속 발전하도록 이끄는 영이다. 그것은 창조자이고 피조물의 영을 역동시켜서 피조물을 완성으로 이끄는 영이다. 다만 피조물 속에 거주할 뿐이다. 성령은 내재되어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초월되어 있다.
피조물은 내재된 성령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발전과 완성을 향해 간다. 그리고 발전이 완성에 이르면, 그 때가 이 세계의 종말이 되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시점이 될 것이다. 이 종말론적 시간적인 발전을 몰트만은 인간의 “초월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완성된 존재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피조물에 내재하여 피조물을 초월시킨다. (몰트만, ibid., 20-21)
이 “내재적 초월”은 개인 안에서도, 인간 공동체 안에서도 그리고 자연공동체 안에서도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 안에 계시고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 자신이 모든 것을 자기의 방법으로 경험하고 구원과 새 창조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 안에 있는 내재적 초월은 유한한 것 안에 있는 무한한 것, 시간적인 것 안에 있는 영원한 것, 지나가는 것 안에 있는 지나가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이미 그것의 내적 초월을 전제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피조물에 대한 창조자의 권리를 인정한다. 그래서 우리가 파악하는 그 피조물의 가치규정을 떠나서 우리의 동료 피조물의 고유한 권리를 인정하게 된다. (몰트만, ibid., 59)
5. 삼위의 “사귐적 관계” 속에 있는 성령
피조물 속에 내재하여 발전 혹은 초월과정을 이끄는 성령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삼위 중의 한 위이고 하나님은 삼위의 일체로서 설명된다. 이 삼위일체적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전통적인 신학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에 따라 삼위의 관계를 주객도식적으로 성부를 주로, 성자와 성령을 객으로 규정했다. 이를 모형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전적인 구별이 주객도식적으로 규정됐다. 희랍철학의 영육이원론과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형성된 이 주객관계의 패러다임은 영혼에 대한 육체의, 인간에 대한 자연의, 이성에 대한 감성의 가치를 열등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간 전통신학은 이러한 주객관계의 패러다임 아래에서 삼위의 관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파악했다.
그러나 성령신학은 삼위를 내재적 삼위일체로만이 아니라 경륜적 삼위일체로도 파악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구원과정 속에서 삼위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역할의 분담 차원에서 삼위의 관계성을 본다. 몰트만은 이 삼위의 관계성을 사귐의 관계로 정립했다. 그에 따르면 삼위는 공통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나 인격은 다르다. 여기에서 인격은 대체될 수 있는 현상적인 것이 아니라 대체될 수 없고 대리될 수 없는 실체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격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삼위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과정신학의 이해와는 구분해야 한다. 과정신학이 하나님을 과정 속에서 형성되어 종말에 하나님도 완성되는 존재로 이해한다면, 몰트만은 삼위의 활동 속에서 삼위 각각의 특성과 역할이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독립적인 성격을 인격은 가지고 있다. 독립적인 삼위는 각각 특성이 있고 다른 것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고 서로 간의 사귐 속에서 상호 보완적으로 일체를 형성하며 피조물의 구원을 행한다. 일체의 형성을 위한 사귐 속에서 삼위는 서로 소유하지 않고 서로 인정하며 서로 존경한다. 몰트만, ibid., 291
이 삼위의 사귐적 관계에서는 삼위의 “인격의 특성”이 전면에 오고 “본성의 단일성”은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주객도식은 포기되고 상호주체성이 받아들여진다. 각각의 본질적 주체성이 강조되면 삼위는 삼신론으로 흐르고 그 본질적 차이가 부정되면 똑 같은 일을 행하는 삼중론으로 흐를 수 있다. 몰트만은 “공통본성” 개념으로 삼신론적 특성을 견제하고 “인격의 실체적인 특성”으로 삼중적 특성을 거부하는 사귐의 삼위일체론을 통해 이 두 가지의 위험을 극복하면서 삼위의 독립적이면서도 관계적인 성격을 규정하고자 한다.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166-190 참조.)
이 사귐은 무감각한 결합이 아니라 상호를 살리는 조화적 사귐이다. 왜냐하면 삼위는 상호 의존관계에서 그 의존을 사귐적으로 실현하여 상호 교통하고 보완하고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 사귐의 관계가 더 풍부하고 복합적으로 전개되면 될 수록 사귐에 참여한 개별 주체들은 더 생동적으로, 더 풍요하게 자기를 전개한다. 따라서 사귐의 삼위일체적 개념은 통일성 안에 있는 다양성을 전제하며 상호 보완과 조화의 사상으로 귀결되며 상대를 통하여 살려진다는 관계의 사고를 제시한다. 이 사귐적 관계는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간의 사귐, 인간과 자연의 사귐의 모범으로, 즉 살리는 사귐의 모범으로 제시된다.
6. 그리스도의 모범적 삶을 따라 “성화”를 이루는 성령
우리가 성령신학을 성령운동의 긍정적 신학화라고 볼 때, 우리는 그간의 성령운동의 부정적인 모습, 즉 극도의 개인주의, 신비주의, 현실도피주의, 물량주의적 축복론, 값싼 은혜, 그리스도교 윤리의 실천의 약화 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신학은 이러한 염려를 직시하면서 성령운동의 공동체적 지평과 윤리적 지평을 확보하고자 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성령신학은 개인적인 하나님의 경험의 지평을 공동체적 지평으로 확장하여 해석한다. 그리고 성령신학은 사회 윤리적 실천문제들을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내용을 수용하여 구상한다.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내용을 다만 개인과 성령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생동감 있게 실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실천을 다양한 개인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실현하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오늘의 현실에서 개인의 자율적인 판단은 강화되었고 사회적 윤리의 내용과 실천방법은 다원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적 윤리의 실천을 위해 성령신학은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을 결합한다. 이 결합은 성령에 대한 경험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주의와 성령중심주의를 넘어서서 하나님 중심주의에서 그들의 특성을 재구성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적 시각이 포기되고 타계적인 성령론이 회피되며 두 이론을 포괄하는 삼위일체의 구조의 틀 속에서 신학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으로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파악하면서 성령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성령을 새롭게 발견한다는 것은 성령의 활동을 하나님의 삼위의 역할 구분 속에서 독자적인 역할로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 역할 속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는 일을 한다. 그 성령의 완성 작업을 통해 사람들은 점점 더 성화된다. 성화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윤리를 삶에서 실천한다. 여기서 성령신학은 칭의를 약화시키려고 하지 않지만 성화의 의미를 중요하게 고려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의 성화를 통해 성령신학은 인간의 윤리적인 실천을 구상한다. 따라서 성령의 내재는 성화를 위한 내재이고 이는 윤리적 실천으로 표현된다.
성령신학은 이 성화의 삶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한다. 이 성화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된 개인의 나라이기도 하고 완성된 피조물 공동체의 나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령신학은 종말론적 신학이다. 성령신학은 이 종말론적 특성을 통해 인간의 중생과 성화의 삶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안주를 극복하려고 한다. (몰트만, 생명의 영., 206)
V.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상황의 특성이 어떠한지, 그 특성 속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이 어떤 한계를 가졌는지, 그 한계 속에서 성령신학이 등장할 수 밖에 없었던 근거들은 무엇인지, 그 상황을 반영하면서 성령신학은 어떤 특징적 패러다임으로 성령을 이해하는지 살펴봤다. 이를 통해 성령신학은 오늘 시대의 문제에 대답하는 신학이고 포스트모더니즘과 생태위기의 시대 속에서 개인, 공동체 나아가서 생태계를 살리는 성령신학의 신학적 의의를 규명했다. 이를 정리하면
1) 성령신학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개인의 내면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을 토대로 하여 개인들의 삶의 영적 생동감을 확보하고 개인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개인을 살리는 신학으로 구상되며 다원적 사회 속에서 다양한 삶의 목표들과 가치관을 다원적으로 인정하는 신학이다.
2) 성령신학은 성령운동의 긍정적인 점을 신학화하고 오늘 개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재발견하고 나아가 신비주의, 개인주의, 기복주의, 윤리적 실천의 부재 등 성령운동의 부정적인 점들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 극복을 위해 성령신학은 성령운동의 개인적인 성령경험을 공동체적 성령경험 그리고 역사적 성령경험과 연결시켜, 그 경험들 간의 상호관계를 규명하고 개인적인 성령경험을 공동체적 영역으로 확장한다. 게다가 성령신학은 성령의 활동을 통한 성화의 삶, 즉 그리스도적 윤리의 실천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공동체적으로 활동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공동체를 살리는 성령을 논증한다.
3) 성령신학은 자연을 새롭게 이해하는 신학이다. 성령신학은 자연을 하나님의 구원대상인 피조물로 규정하고 범재신론적인 성령의 내재론을 통해 자연의 생산성과 자연의 종말론적 완성을 구상한다. 그리하여 성령신학은 오늘 우리의 미래의 존폐문제인 생태계의 보존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자연의 가치를 논증하고 모든 생태계를 살리는 성령의 역할을 인식한다.
4) 성령신학은 조화와 사귐의 관계성을 제시한다. 현대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로서 다원화된 시대이다. 이 시대에서 관계성은 중요한 문제이다. 다양한 것들의 다원적인 관계 속에서 그 다양한 것들은 충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령신학은 그 모든 관계성의 한 모델을 사귐과 조화의 관계로서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성령신학은 아직 더 발전해야 할 점들을 가지고 있다.
1) 성령신학이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는 신학이지만 성령의 임재 형태에 대하여 더욱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성령임재의 형태가 신비주의와 동일한 방법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령운동을 신학화한다고 해서 현실 도피적이고 신비적인 만남에만 집착하는 신비주의적 측면을 인정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신비주의와의 분명한 차별 속에서 신비주의를 극복한 성령의 임재 형태가 구상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신비주의를 극복하면서도 영적인 생동감을 주는 성령의 임재가 제시되어야 한다.
2) 성령신학이 성령을 통한 성화를 주장하지만 이것은 경건주의에서도 주장된 것으로 경건주의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중생하고, 중생은 곧 성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우리들은 사람들이 대부분 내적인 기쁨에만 안주하는 모습을 보아 왔다. 따라서 그 기쁨을 넘어서 성화로 이어가는 것에 대한 분명한 구상들이 있어야 현실적으로 작용하는 신학이 될 것이고 성령의 역사가 발생하는 신학이 될 것이다. 성령신학은 하나님과 개인의 인격적인 만남과 성화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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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Barth Kirchliche Dogmatik, II/2, Zürich 1975
Karl Barth Kirchliche Dogmatik, I/2, Zürich, 1975
(독 문 초 록)
Der Heilige Geist
in der Theologie des Heiligen Geistes:
Der Heiligen Geist rettet den einzelnen Menschen,
die menschliche Gemeinschaft
und die ökologische Welt.
Heute interessiert man sich an "dem Heilige Geist" und "der charismatische Bewegung" in der Kirche. Der Heilige Geist verwirklicht den pluralistischen Wert des einzelnen Menschen in der postmodernistischen Gegellschaft. Darüber hinaus wächst die pfingstliche Kirche quantitativ. Man wunscht in der Kirche, die spirituelle Dynamik und Fähigkeit zu erfahren. Und die heutige Gesellschaft ist die Gesellschaft der unendlichen Konkurrenz In der Gesellschaft wird nicht das bedeutungsvolle Leben, sondern das Leben zum Überleben in der Konkurrenz interessiert. In diesem Leben bekommt man die Fähigkeit und Trost durch den Heiligen Geist. Aber man bewert negativ, daß die charismatische Bewegung nur in dem selbstsüchtigen Individuellismus bleibt. Man wünscht, daß die lebendige Spiritualität im Bereich der gesellschaftliche Ethik verwirklicht zu werden.
Schließlich wird der "Heiligen Geist" in der ökologische Theologie interessiert. Die ökologische Theologie vorstellt die Produktivität der Natur, die durch den Heiligen Geist in der Kreatur verwirklicht wird. Der "Heilige Geist" ist in der Kreatur immanent und leitet da die Entwicklung der Kreatur.
In dieser Interesse formuliert die Theologie der Heiligen Geistes seit Anfang der 1990 bei J. Moltmann.
Diese Arbeit beweist, daß die Theologie des Heiligen Geistes durch das neue Verständnis über den Heiligen Geist den einzelnen Menschen, Gesellschaft und die ökologische Welt in der heutigen Gesellschaft rettet.
임홍빈(한신대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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