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20세기에 들어와서 선교라는 말이 약방의 감초처럼 놀라울 정도로 많이 사용되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론 20세기만큼 선교 실천에 대한 비판이 많았던 적도 없다. 한편 서구에서 선교란 말은 혐오스럽고 부끄러우며 입밖에 내기 힘든 말로 생각되었다. 서구적인 선교의 개념을 바탕으로 실천된 선교 사역이 선교의 위기를 낳고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 기독교의 선교개념과 실천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촉구되었으며,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우리 나라 교회도 선교가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선교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 같다. 따라서 먼저 선교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고 그 다음에 바른 선교관을 제시하고자 한다.
선교를 고정된 개념과 불변하는 실체로 이해하는 그릇된 생각이다.
선교는 어떤 하나의 성경본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하나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좌우되어서도 안된다. 선교는 ‘변화하는 선교’(transforming mission)이다. 20세기말의 위대한 선교신학자인, 그러나 아쉽게도 1992년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남아공의 데이비드 보쉬는 선교 개념을 불변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그에 의하면 선교는 “전환과 검증과 재정립과 폐기의 연속적인 과정”이다. 변화하는 선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활동이요, 동시에 선교 그 자체가 변화되어야하는 계속적인 필요를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선교는 자연히 다차원적이며 복합적으로 개념이 규정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선교란 “증거, 봉사, 정의, 치유, 화해, 해방, 평화, 전도, 교제, 교회 개척, 상황화 등의 다면적인 사역”이다. 이런 정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그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한 면만을 선교의 전부로 규정하는 것은 무한한 것을 제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며, 일방적인 측면을 강조하거나 축소주의에 빠지게 된다.
선교를 교회나 선교 단체가 주체가 되어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임을 늘 고백해야 한다.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이다. 영어로 선교를 이야기할 때 단수(mission)와 복수(missions)로 구별한다. 전자는 ''하나님의 선교''를 이야기하고, 후자는 교회와 선교회들의 구체적인 선교 활동과 실천을 언급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어떤 신학자의 창작물이 아니다. 성경이 그것을 제시한다. 이차세계대전 이후에 선교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성경은 선교의 책이요 야훼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선교도 ''하나님의 선교''이다. 성경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모든 족속이 복음의 능력과 평안을 누리도록 초대하고 기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역사를 섭리하는 하나님은 또한 약속의 하나님으로서 아브라함을 약속의 백성으로 선택하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 2-3) 말씀하였다. 이것은 구약적인 계시의 의미, 즉 "현재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미래에도 그의 백성의 일에 개입하시는 사건"이란 뜻에서 볼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를 계시하신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로부터 축복 받은 한 민족 이스라엘을 선택함은 하나님의 선교적 경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백성이요 선택받은 종이다. 아브라함이 선택받고 이스라엘이 약속의 자손이 된 것은 그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 것이다. 선택의 목적은 봉사하는데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로서 사명과 본분을 다할 때 복을 받고 그러하지 못할 때 고난과 수치를 맛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과 이방인 룻의 증손인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선교''의 절정이요 선취적 완성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 체험을 한 제자들에게 그것으로 "이제 되었다, 가서 외쳐라" 하지 않으셨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24:49, 행1:4 비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성령을 말한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δυναμις)을 받고 증인이 되는 놀라운 복을 얻는다. 이제 ''하나님의 선교''는 성령 하나님의 구체적이며 현시적인 사역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곧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일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로 다시는 선민 사상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민족 우월성이나 사상 등에 가두어 버리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아니된다. 성령이 선교의 주창자요, 영감자요, 인도자요, 집행자며, 열매맺게 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온 누리의 모든 민족과 인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누리는 것으로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가난한 자, 갇힌 자, 소외된 자, 착취당하는 자는 물론이고 이 땅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도 천국 잔치의 밥상에 우리와 함께 둘러앉아 영적이고 육적인 온전한 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선교는 멀리 떨러진 낯선 곳, 오지에 가서 하는 복음전파와 교회개척이라는 좁은 선교관이다.
이것은 소위 지리상의 발견이후의 서구기독교 왕국 중심의 선교이해이다. 서구는 이미 기독교화 되었으니 저 멀리 지구 저편에 있는 ''야만인''들을 문명화하는 것과 서구식의 예배의식과 신앙생활 양식으로 바꾸는 것이 선교로 이해되었다. 사실 바울시대와 콘스탄틴 이후의 로마 국교화 시대의 기독교의 선교는 도시 중심의 선교였다. 그래서 비기독교인을 일컫는 말이 이교도(pagan)였다. 그런데 이 이교도라는 말은 라틴어 파가누스(paganus)에서 온 것으로, 이 파가누스는 ''시골사람''이란 뜻이다. 대부분의 시골시람, 농촌사람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서구 기독교 제국의 식민주의와 선교가 밀접히 연결되었기 때문에 최근까지 선교는 멀리 정글과 오지에서 하는 것이 참 선교요 순교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선교사로 보는 이데올로기가 생겼다.
"미안하지만, 선교의 전선이 바뀌었습니다 !" 지난 1980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선교지는 도시, 그 중에서도 대도시이다. 이제 선교의 최전선은 도시라는 말이다. 1989년 마닐라 대회에서 복음주의자들은 도시 선교를 앞으로의 선교의 최대 과제로 천명하였다. "도시 선교"라는 선교 잡지가 있는 데 이것은 1984년부터 발간된 것이다. 마닐라 선언문 제2부 10항에 도시선교의 역사적 중요성과 전략적 의의를 표현한 것을 보자. "1900년도에는 세계 인구의 9퍼센트만이 도시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2000년에는 50% 이상이 도시에 살게 될 것이다. 세계 각처에서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고 있으며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이주''라고 불린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 선교에 주요한 도전이 되고 있다. 한편 도시에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여러 민족이 우리의 문턱에까지 와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복음으로 민족의 장벽을 분쇄하는 우주적 교회들을 발전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다른 한편, 많은 도시 주민들은 가난한 이주민들로서 복음을 잘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와 같은 도시 빈민 공동체 속으로 다시 들어가 그 사람들을 섬기며 도시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선교 현장을 특징짓는 것은 도시화 현상과 함께 나타나는 세속화와 전 세계적인 차원의 이주자 문제 및 도시 빈민가 슬럼가, 청소년과 여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러한 때에 교회는 안주하거나 움직이지 않는 동상처럼 되어서는 아니된다. 사실 교회는 그 태동기부터 움직이는 교회였다. 방랑하는 전도자와 전출되는 군인들과 무역상인들, 팔려간 하인들 등 순례자와 외국인과 나그네로서 삶을 산 사람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형성되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교회의 큰 미덕이었으며 교회의 한 징표였다.
중세에 있어서의 평신도의 개혁운동 가운데 왈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운동''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그 당시 교회가 부패하고 쇠퇴하는 기운이 있었는데, 그런 부패와 타락의 시기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갱신을 주도하는 사람을 일으켰다. 아주 순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일으켰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왈도라는 사람이다. 왈도는 비록 제도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정죄 당하고 박해 당하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는 설교를 계속하고 많은 추종자들이 따르게 되고 프랑스 남부지역을 비롯해서 유럽 중앙지역까지 12-4세기에 이어서 2, 3세기 동안 강력한 운동을 일으켰다. 오늘날까지 일부 왈도파들이 이어져오는 데, 신학자로는 그 배경을 가진 사람이 칼 바르트의 좌파 계통의 맥을 잇는 베를린 자유대학의 마크바르트(F.-W. Marquart)라는 신학자가 있다. 이 왈도파 개혁운동의 특색은 첫째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 둘째로, 로마가톨릭, 당시의 기성교회의 신앙과 생활에 대한 비판을 했다. 세 번째로, 로마제국의 언어인 라틴어를 사용하는 미사를 반대했다. 미사에서 소수의 사제들만 라틴어를 이해할 수 있지 대부분의 평신도는 이해할 수 없었기에 라틴어 사용을 반대했다. 네 번째로, 아주 큰 특색은 지도자들 가운데 남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도 많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이 새로운 개혁운동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또 하나의 특색은 이 갱신 운동은 거대한 조직교회와는 다르게 변두리로부터, 소외된 지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3세기 중엽으로부터 왈도파가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지금의 체코지역까지 많이 확산되었는데, 특별히 16세기 종교개혁 직후에 로덴시아에 이 운동이 확산되어서 그곳에 라폰드라는 한 지도자가 나타났다. 라폰드는 학생들과 같이 먹고 자면서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의 학생가운데 한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 개혁자 깔뱅이다.
종교개혁 후에도 유럽 곳곳에서 종교적, 정치적, 인종적 피난민과 망명자들이 속출하였는데 이러한 이주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고 이러한 선교적 활동을 통해 새로운 교회가 태동하였다. 예를 들면 진젠도르프 백작을 중심으로 시작한 모라비안 교도들의 형성과 선교운동이다. 그 당시에 체코나 모라비아부터 종교의 자유를 찾아 방랑하고 유리하는 사람이 많았다. 진젠도르프는 이런 피난민과 망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으로 자기의 영지를 기꺼이 개방하고 함께 나누어 먹으며 정착하도록 도와주어 공생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그의 영지에 수백명이 모여 살면서 그곳을 ''헤른 후트(Lord Watch) 즉 주님이 지켜주시는 보호처''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역사상 위대한 모라비안 교도들이 교회사의 한 물줄기를 형성하였고, 이러한 모라비안 교도들은 가장 열정적인 선교적 교단이 되었으며, 러시아, 시베리아, 남미 등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이 모라비안 교도들은 종교개혁이후에 개신교를 정화시키는 촉매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 이 모라비안의 부흥운동이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웨슬리는 1735년에 북미의 죠지아주로 가서 영국인 정착촌에 있었고, 인디언 선교에 힘을 쏟았으며, 아프리카에서 팔려왔던 흑인 노예들에게도 선교를 했다. 후에 영국에 돌아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을 바탕으로한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공동체를 형성했는데, 그것은 형식적이 아니라 사랑과 나눔과 섬김과 친교의 선교적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다. 웨슬리 두형제는 새로운 지도자 유형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곧 기득권 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변두리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들이 일으킨 감리교는 주로 도시 노동자들을 그 선교의 대상으로 하였다. 오늘날 영국에서 정규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3-10%에 지나지 않는다고 영국 선교의 위기를 진단하는데, 그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가 영국 교회가 중상류층을 섬기는 종교로 바뀐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감리교도는 그 출발이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선교하여 왕성하게 부흥한 교회였는데 그 처음 사랑의 대상자들로부터 외면당해온 것이 쇠퇴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지적된다. 아무튼 감리교 운동은 좁은 운동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등으로부터도 많은 개신교나 성공회의 사람들이 모여든 넓은 개혁운동이었고, 노예 매매를 반대하는 사회개혁운동이었다. 후에 영국이 국회에서 개혁을 일으키게끔 원동력이 되었던 운동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세계의 이주자(자연재해, 인구급증, 취업,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차별, 구조적 불의, 군사적 갈등 등으로 생긴 망명자와 방랑근로자, 이민자, 외국인 노동자 등)에 대한 선교는 새로운 선교 전선이다. 이들에 대한 선교가 오늘의 세계에서의 기독교 교회의 살아있는 징표로 보여져야 한다. 당연히 이들에 대한 선교는 통전적인 선교관에 따르는 선교여야 한다. 즉 복음전도와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는 것과 아울러 인권 보호와 건전한 시민으로 살아가게 하는 일이다.
선교를 일방적으로 편협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선교를 전도와 복음화로 보는 보수적 복음주의 이해는 개인영혼 편중, 교회 이식과 확장을 곧 선교의 전부로 생각하는 일, 종교의 사회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에 대한 소극적 자세, 타종교 문제에 대한 배타적주의적 의식, 교회와 사회의 이원론적 구분 등이 문제로 드러났다면, 인간화를 강조하는 하나님의 선교는 복음의 보편화, 사회적 개혁과 질서가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극단적 생각, 선교의 사회 갱신가 해방적 의미에서의 편중,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편파적 선호, 이에 따른 기구적 교회에 대한 소홀 등이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양극화의 경향이 지양되고 선교 이해의 통합적이고 통전적인 경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선교는 개인 영혼 구원과 사회 개혁과 봉사를 구분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은 인간과 사회 및 모든 피조물을 포함한 자연이 온전한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샬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울러 이 샬롬의 건설은 성령의 파송을 통한 화해와 새 창조의 실현으로 완결된다.
개인 구원이란 말이 더 이상 관심을 끌 수 없는 이유는 첫째, 그것은 인간을 이분법으로 보고 둘째, 오늘의 세계에서 중요한 문제인 가난, 기근, 억압, 착취, 전쟁, 조작 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는 영혼만 아니라 전인적인 문제를 포함하는 구원, 인간을 그 충만한 실재 가운데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구원을 강조하는 통전적 구원을 선호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복음은 "사랑과 자비의 복음"이었다. 예수님이 억압받고 약탈당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신 것처럼, 그리고 사도들을 그러한 사람에게 가서 축사하고 치유하게 하신 것처럼, 선교사들도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돕고 섬겼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바쳐서 까지 헌신하였다. 신앙의 순교자가 있었듯이 기독교 자비와 사회 봉사의 순교자도 있었다. 따라서 선교는 봉사, 정의, 개발, 평화의 문제를 다루었고, 구조의 변화에 관심을 가졌다. 통전적 구원으로서 선교 목표는 한마디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샬롬"의 건설로 표현되며, 세상에 대한 책임으로 나타난다.
1989년 세계선교와 전도대회 산 안토니오 대회에서 선교 개념의 두드러진 특징은 교회의 창조세계의 보전에 대한 책임을 부각시킨 점에 있으며, 이것을 교회의 선교에 포함시킨 점이다. 그리고 인종, 계층, 국적, 종교, 문화 등으로 갈등하고 있는 인류사회의 공동체 추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적 삶에서 찾으며, 기성 교회들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선교는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며, 고난받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하나님의 선교에의 참여에서 고난과 투쟁"을 경험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주의 대 에큐메니즘이란 이원론을 창조적, 생산적으로 극복하고 양 흐름의 선교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전 교회가 전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할 것이다.
통전적 선교란 하나님의 선교 정신에 입각해서 복음전도(케리그마)와 양육(디다케)과 사회봉사(디아코니아)와 사귐(교제 코이노니아)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통전적 선교관에서 어떤 요소를 우선시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없지는 않다. 우리는 예배하는 교회 공동체인 교회가 하는 선교는 말씀 선포(케리그마)를 우선적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20세기에 열린 세계교회의 공식적인 협의회나 지역 대회와 국제 선교대회에서 공통된 견해에 도달한 선교의 본질을 화란의 선교학자 요한네스 페르꿰일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선교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로서,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커뮤니케이션하는데에는 네 가지 차원이 있다. 선포, 봉사, 교제와 모든 종류의 불의에 대항해서, 그리고 의와 평화를 위해서 싸우는 투쟁에의 참여이다. 둘째, 이 과제는 육대륙의 모든 교회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은 육대륙에서(in), 육대륙으로부터(from), 그리고 육대륙으로 향하는(to) 것이다. 셋째, 우리 모두는 신학 발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와 봉사와 교제와 불의와의 투쟁과 정의와 샬롬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서로 협력해야 한다. 이러한 선교는 미완성 과업으로서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 추진되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위임이다. 이렇게 보면 선교는 자연히 다차원적이며 복합적으로 개념이 규정되게 마련이다.
복음주의자로 알려진 영국의 선교학자인 존 스토트에 의하면 선교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계 속으로 보내어 하게 하시는 모든 일을 포괄하는 말"로서 복음화와 사회적 책임, 즉 복음 전도의 동반자로서 사회활동을 포함한다. "양자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 애타게 봉사하려고 하는 사랑의 진정한 표현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트는 복음화의 우선권을 강조한다. 아울러 그는 한 개인이 양자를 동일하게 개입하고 동일하게 실천하기는 불가능하니 각자의 사명과 은사에 따라 해야 할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각기 다른 사명을 주셨고 각자에게 각자의 사명에 적합한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확실히 모든 기독교인은 기회 있는 대로 자기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각자가 받은 소명과 은사에 따라 가난한 자를 돌본다든지 병든 자를 치료한다든지 개인적으로 전도한다든지 가정 복음화를 도모한다든지 지방자치나 국가 정치에 개입한다든지 지역 사회봉사나 인종문제나 혹은 교육이나 기타 자선 행위 등 특수 분야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지역 교회는 개인과 다르게 지역사회 전체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을 제안한다.
선교를 전도자 혹은 선교사의 입장에서, 그것도 주는 자와 시혜자로 의식하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보는 오해이다.
교회에 대한 이해는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여러 각도에서 이야기되어져 왔다. 최근의 교회론 중에 주요한 것 중의 하나는 교회를 구원의 표지와 기구로, 또는 하나님 나라의 표지 내지는 기구로 보는 것이다. 이런 입장이 개신교에선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서 대변되었는데 특히 1968년 웁살라 대회 이후로부터 1980년 멜버른의 세계 선교 및 복음화 대회(CWME) 이후에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이런 교회관의 최초의 건축자는 독일의 신학자요 나치에 저항하다 순교한 본훼퍼이다. 본훼퍼는 교회란 이웃을 위하고 남을 위할 때 참된 교회가 된다는 의미에서 "타자를 위한 교회"(Kirche für andere) 라는 슬로건을 제창하였다. 본훼퍼는 옥중서신에서 교회의 교회됨에 대한 본질을 외치고 있다. "교회는 남을 위해 존재 할 때 만이 교회이다... 교회는 보통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세속적인 문제들을 함께 나누어야 하며, 지배하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고 섬겨야 한다." 교회가 국가 권력과 결탁하고 정부의 시녀 노릇을 하며, 소외되고 힘없는 백성들을 돌보기는커녕 울타리 안에서만 거룩을 외치고 불의한 편을 든다면,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한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전후의 새로운 상황에서 본훼퍼적인 교회관에 대한 이의가 제기 되었다. 그것은 곧 본훼퍼가 성장한 배경으로부터 문제의 핵심을 제기하는 것이다. 웨스트(West)나 준더마이어(Sundermeier)는 본훼퍼가 전형적인 자유-인문주의적 부르죠아 환경에서 자라났다고 지적하고 그의 신학적인 사고도 그 환경의 틀 안에서 형성되었기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본훼퍼적인 서구 그리스도인은 무엇이 남을 위해 좋은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오류 내지는 자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서구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스스로를 타자를 위한 호위병으로 선포하는 오만함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것들이 "타자를 위한 교회"라는 구호의 밑바탕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하면 그리스도인은, 특히 서구의 그리스도인은 주는 자요 베푸는 자로서 선교의 주체이며, 그 외 사람들은 받는 자요 혜택을 입는 자로서 객체라는 말이다. "타자를 위한 교회"라고 할 때 그 때의 타자가 대상화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준더마이어는 이러한 ''누구를 위하는 존재''가 가지는 돕는 자 신드롬(증후군)"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참된 공존의 가능성을 위협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타자를 위한 교회"(church-for-others) 대신 타자와 함께 사는 혹은 "타자와 함께 삶을 나누는 교회"(church-with-others) 라는 구호를 제창한다. 미국의 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은 이러한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가 참으로 돕고자 하는 마음 없이 한갓 동정으로 선교를 한다면 그런 선교는 실패한다. 우리는 아프리카인, 아시아인과 더불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려들기 일쑤였다." 새로운 선교적 교회관은 타인을 위하는 교회로부터 타인과 더불어 함께 사는 교회로, 대리존재(pro-existence)로부터 공생존재(coexistence)로 변화되었음을 말한다. 참된 교회의 지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교회의 회원은 "우리에게로 오라!" 라고 외치기보다는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자!"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선교의 일방통행(서구로부터 제 3세계로)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모든 교회, 모든 민족, 모든 곳이 선교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이상의 논의에서 살펴보았듯이 교회를 "타자와 함께 살며 삶을 나누는 것"으로 정의를 한다면, 그리고 교회와 선교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선교의 의미도 자명해 진다고 본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라는 사실은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교회는 보내는 자가 아니요 보냄을 받은 자로 묘사되어 있다. 이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은 이차적인 것이 아니다. 교회는 보냄을 받았음에, 그리고 선교를 (위)한다는 관점에서 그 자체를 세워 나감으로써 현존한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이해 할 수 가 있다. "선교적 활동은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니요 활동 중에 있는 교회이다." 교회와 선교의 관계를 이렇게 규정하여 볼 때 선교의 의미도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며 삶을 나누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순례자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이 땅에 찾아온 외국인 노동자와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참된 공생의 길을 선교 활동으로 구체화해야 한다(창12:1-3, 26:4, 28:14, 암9:7).
앞에서도 이미 이야기했지만 선교의 과제는 육대륙의 모든 교회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은 육대륙에서(in), 육대륙으로부터(from), 그리고 육대륙으로 향하는(to)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역교회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것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1970년대 이후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지역교회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역 교회가 있는 곳에 보편 교회가 있기 때문에, 지역 교회를 앞서는 보편 교회를 상정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의 추상이다. 교회는 지역 교회에서 증거(martyria), 예전(leitourgia), 교제(koinonia), 봉사(diakonia)가 일어나기에 교회라고 한다. 독일의 신학자인 몰트만은 "지역교회는 교회의 미래 소망이다"라고 하고, 영국의 인도 선교사요 선교신학자인 뉴비긴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에 의해 증거된 것으로 모든 인간사의 해결책이 되는, 그래서 모든 사람이 믿어야 할 이 복음이 어떻게 믿을 만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유일한 대답, 유일한 복음의 해석은, 이 복음을 믿고 복음으로 살아가는 남녀 성도들의 모임인 지역 교회뿐이다"고 하였다. 또한 뉴비긴은 "대중의 삶에 미치는 기독교적인 영향력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우선적인 실재는 기독교 회중(교회 공동체)이다.... 복음의 유일한 해석은 복음을 믿고 복음으로 사는 남녀 (성도의) 회중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특성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 말한다. 첫째 교회는 찬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둘째 교회는 진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셋째 교회는 자기 자체를 위하여 살지 않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넷째 교회는 세상에서의 제사장직을 실천하는 가운데 유지 (혹은 보존)되는 ...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벧전 2:9). 다섯째 교회는 상호 책임을 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여섯째 교회는 소망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벧전 1:3, 3:15). 여기에 두 가지만 더 덧붙인다면, 교회는 인종과 피부와 문화를 초월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와 머리로하는 형제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교회는 항상 자기 개혁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영동교수
부산대학교 철학과 (B.A.)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M.Div)
독일Berlin신학대학교(Dr.theol.)
전 인도네시아 선교사
현 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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