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의 기술(1)

토마스 하트가 말하는 온전한 치유 9가지의 교육과 방법 그리고 상담을 보면 우리 중 상담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신과 그 환경을 살펴보며 그들의 길을 발견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하여 유용한 기본 원리들을 교육받아 왔다.

그러나 기술들을 배우기 전에도 우리 중 다수는 기독교적인 삶의 통찰력의 기초를 익혔으며. 또 심지어는 상당한 정도의 신학교육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여전히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치료적인 면과 신학적인 면. 이 두 가지 측면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과 상담할 때 이 양면이 모두 충분히 효과를 보게 하는 일이다.


흔히 우리가 받는 훈련은 최소한의 도움밖에 되지 않는다.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보통 상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또한 상담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들은 신학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으며 역시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목회 현장에서 그 둘을 연결시켜야 할 때가 되면 우리 스스로의 방법대로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도하는 바는 바로 우리에게 자신의 문제를 들고 오는 사람들의 상황 속에서 그 영적 차원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것과 내가 치료에 있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하나님

첫째로 하나님은 모든 경험 중에서 가장 깊은 차원이 되신다. 이 원칙은 하나님의 실재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 원칙의 취지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를 말하려는 데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고. 세상의 행로를 인도하며. 결국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모든 실체의 근원을 의미한다. 성경에는 이 초월적 신비가 다양하게 상징화되어 있는데. 남성, 여성, 중성의 비유 등 인간 경험에서 비롯된 암시적인 비유의 형태로 나타나 있다.


성경의 어떤 책이나 본문에 초월의 상징적 제시가 어떻게 나타나든지 간에. 성경 전체를 통해 개인의 종교적 경험에 토대한 하나의 확신이 흐르고 있다. 즉 이 모든 사물의 신비한 근원은 인격적이며 우리에게 자비로우시며 우리 각사람과 대화를 나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 첫번째 원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실체가 현재하며 편안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그 실체가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털어놓기 시작할 때. 이 원칙은 우리나 그들이 알건 모르건 간에 하나님께서 이미 현재하시며 그들의 삶 속에서 활동중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외계에 계셔서 우리가 불러들여야만 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비활동적이거나 행동하시도록 설득해야 할 필요가 있으신 분은 아니시다. 즉 그분의 임재는 기도나 종교의식. 성경읽기 같이 하나님을 접하는 특별한 종교적 활동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미 여기에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경험의 밑바닥에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과 의혹과 노력과 갈망의 가장 깊은 차원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도전들과 선물들 모두의 가장 깊은 영역이시다. 하나님을 찾아야 할 장소는 위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고 바로 우리 안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바로 그 배경이시며. 우리가 가는 곳마다에서 만나게 되는 분이시다.


개인의 삶

둘째로 하나님은 개인의 삶의 활동이 있는 곳에서 가장 현재적이시며 활동적이시다. 사람들이 보통 우리에게 가지고 오는 것은 위기상황들이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 어떤 일이 발생했다. 10 대의 자녀를 다루기가 너무 힘들다. 어떤 사람이 마약중독에 빠졌다. 우울과 고독이 삶을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한다 등.

이 원칙이 주장하는 바는 이같은 여러 위기상황들 속에서 바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의 삶 속에 가장 현재적이며 활동적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런 질문들이 제기된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의 소명은 무엇인가. 이러한 상황이 제시하는 도전과 기회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여기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여기 서있게 하셨는데. 그러면 무슨 치유와 성장이 있는가.

나는 내담자가 이야기를 털어놓는 동안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본다. 나는 또한 내담자에게도 그 질문들을 던진다. 왜냐하면 나는 내담자들이 그들 관심사의 이 깊은 차원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발생한 문제에 대해 함께 토의함에 따라 아마 우리는 각각 이러한 질문들의 대답이 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대답들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더 명확해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일단 우리는 두사람 다 문제를 깊은 차원에서 생각하게 된다.


신앙적인 사람들에게도 이 원칙을 상기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출석. 성경읽기. 개인기도 등을 하나님과 만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우리가 처한 삶의 상황들. 특히 위기상황들 또한 하나님과 만나는 지점이라는 것을 간과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들에서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며 우리 자신이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까를 결정하는 매우 중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생성(shaping)해가고 있는 것이다. 위기상황들 속에서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의 결과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의 궁극적 목적과 직결된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것에 관심을 갖고 계시며. 때문에 현재하시며 활동적이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그분이 의도하고 있는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중 한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생명

세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며 우리의 친구이시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것을 향유하게 하려는 것이다. 치유와 해방. 성장이 있는 곳마다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을 발견하며 그들이 이룰 수 있는 최대의 성취와 행복에 이르고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활동도 그 목적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압제와 제한. 고통을 일으키는 모든 것과 싸우시며 우리에게 해방과 치유. 화해. 조화와 기쁨을 주려고 애쓰신다.

크리스챤들조차도 늘상 이것을 믿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전력을 기울이신 것이 특정한 생명계획. 즉 우리를 억누르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들을 자유케 하려는 것이었음을 알지 못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세상에서 이룰 하나님의 뜻과 일로 보셨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사역의 초점이 맞춰졌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명을 가지며 그것을 최대한 소유할 수 있도록 치료하시고. 용서하시며. 가르치셨다. 그분이 대항해 싸웠던 것은 자신을 죽음에 처하게 한 압제적이고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체제들이었다. 그런데 그 체제들이 그분을 죽음에 처하게 한 것은 그분이 하시는 일로 인해 자기들이 손실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분이 사셨던 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활동이 가장 명백히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비극적 죽음에서 우리는 인간의 죄악이 낳은 그 비극까지도 하나님께서 참으실 수 있음을 보는 것이다.

세상에는 악이 자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겐 자유가 주어져있기 때문에 종종 타락하여 멸망을 낳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우리 앞에 앉거나 서거나 누울 때. 이 원칙은 그것이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기 원하고 계신 생명임을 말해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과 함께 말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다. 즉 그들을 괴롭히는 악의 편에 서시지 않으시고. 그 악에서 그들을 해방시키며 그들의 치료와 성장을 촉진시키는 편에서 일하심을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선을 이루도록 그들을 돕기 위해 거기 계신다. 상담자나 영적 지도자 또는 임상의사로서 우리도 이와 똑같은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 수고한다. 그것은 우리의 협력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다.


비극과 고통의 처리

네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비극이나 고통에 처하게 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 비극과 고통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이 원칙은 앞의 원칙의 논리적 귀결로서 명백히 유추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삶의 다양한 고통을 다룸에 있어 이 원칙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성적 학대를 당하게 하거나 그것을 의도하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암이나 AIDS에 걸리게 한 것도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이혼을 하게 하거나 고독에 빠지게 하거나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기로 작정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다.

그러면 그처럼 우리에게 깊이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상황들이 벌어졌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의 고통을 슬퍼하고 계신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셔서 우리가 당하는 악으로부터 모든 가능한 선을 낳게 하고 계신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실체의 근원에 자리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은 자신과는 순전히 구별되는 세상을 만드시는 것이었고. 그래서 세상을 자유롭게 창조하셨다. 이 자유는 존재의 사닥다리의 맨 아래 있는 가장 단순한 행위자에게도 미칠 정도로 주어졌으며. 특히 인간에게 광범위하게 주어졌다.


이러한 자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발생하게 하거나 발생을 막는 등 통제하실 수 없는 것이 많이 있다. 그래서 특히 인간은 그들이 하는 결정에 의해 멸망과 고통을 초래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엄격히 금하실 수 없으며 단지 창조된 대리자들을 통해 부추기고. 권유하며. 때로는 대항하게 하실 수 있을 뿐이다.

이 원칙의 중요성은 우리에게 악한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는 문제의 정의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항하시기보다는 우리 편에 서계신다.

바로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비극이 발생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슬픔과 갈등 속에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것들로부터 실현될 수 있는 모든 선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신 것이다.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

다섯째로 고통에 대응하는 크리스챤의 바른 자세는 그것에 대항하고 극복하려는 태도이며.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희망을 갖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원칙은 신구약 성경 모두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억누르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해 끝없이 일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애쓰셨다. 그분은 심지어 그분 자신의 구속과 처형에도 일단은 저항하시고. 그 후에야 그것을 받아들이며 자기의 사건을 하나님께 위탁하셨다.


고난은 선이 아니고 악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대응은 그것을 제거하려고 애쓰는 본능적인 대응과 꼭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 원칙의 두번째 부분은 우리가 최선을 다한 그 상황 속에 여전히 고통이 남아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희망은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 중에 함께 하셔서 그것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는 최선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에게 있어서의 위험은 이 원칙의 두번째 부분을 첫번째에 놓고 그 고통에서 선이 나올 수 있으므로 고통이 정말 선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시로 높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나쁜 것이 선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결코 상처입은 사람에게 “이것은 너에게 선이다” “이것은 네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고통을 보는 즉시 그것을 제하시고 곧바로 그것을 경감시키셨다.

우리가 상담자와 임상의사. 그리고 영적 지도자로서 인간의 고통을 다룸에 있어 우울은 분명히 악이며 가능한 한 극복되어야만 한다. 고독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갈라놓는 관계들은 악이며. 바로잡아지거나 끝나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영적 기회와 초청의 많은 부분은 그것들의 수용이 아니라 그것들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데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을 때에만 개인성장을 위한 기회가 그 수용에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칭찬의 위력

저자 소개 제리 D. 트웬티어 - 저자는 사립, 공립하교 일반 직장 등에서 환경 훈련 경험을 20년이나 하였다. 또한 작가, 상담원, 전문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텍사스 공과대학에서 교육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40권 이상의 저 있으며 현재 주요 기관들을 위해서 인간 관계 훈련. 자기 훈련 등의 강사로 일하고 있다. 목 차 제1부 더 나은 삶을 위하여몇 칼

온 가족이 드려야 하는 가정 예배

“가정예배는 복의 근원입니다” ? 제임스 W. 알렉산더(1804-1859) 청교도들은 가정을 작은 교회로, 아버지를 그 교회의 목사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자기 가족을 감독하며 목양하는 것은 아버지의 의무였다. 사실 오늘날처럼 그리스도인 가정에 가정 예배가 절실이 필요한 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 예배에 대한 개념은 우리들 주변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가정 예배론

가정예배와 영성형성 개인예배와 가정 예배를 교회에서 드리는 공동예배와 통합하는 한 유익한 길은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를 공동예배의 구조를 따라 조직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일을 위해 특히 중요하다. 본 장은 독자들에게 가정예배의 면모를 소개하고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모범적인 예전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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