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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글 (관상기도) (1)

아래 글은 한국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관상기도에 관한 글입니다

그러나 이글을 소개하면서 문제점을 제기하여 잘못된 것임을 밝히려고 하는 의도에서 실린 글이며 또한 성도들의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지식적 전달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관상기도는 신학적으로나 혹은 성경적으로 옳다고 볼 수 없는 것이기에 Nyskc Movement를 하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참고 하셔서 대응하셨으면 합니다 구지 이러한 내용을 소개할 필요가 없으나 그러나 너무나 많은 질문에 일일이 답할 수가 없어 이 글을 올릴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잘못된 신앙의 방향임을 확인하시면서 더욱 Nyskc Movement에 힘을 쏟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곧 두번째 글을 올릴 때와 세번째 올릴 때는 지금 신학계에서 비판하는 글들을 함께 올려 여러분에 이해를 도우려고 합니다


대표회장



관상(觀想)기도


요즘 한국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교회의 프로그램 중에 관상기도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물론 현재 미국의 일부 한인교회가 이러한 관상기도를 통해서 새벽기도를 인도하며 영적부흥은 물론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도모하고자 애쓰고 있다


관상이란 것이 무엇인가

관상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응시이다.

관상은 생각과 말과 감정들을 뛰어넘어 궁극적 실존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모든 인식활동이 활짝 열려 있을 때, 그것이 곧 관상의 상태이다.


관상기도란


관상기도는 전적인 침묵을 요구하는데 언어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과 의지까지도 침묵을 요구한다. 관상기도는 나를 철저히 비우고 하나님이 알아서 채울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자기가 아닌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기도하신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세계만이 기도자들에게 들어와 빈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떤 명령이 떨어질지 항상 준비하는 자세요, 명령이 떨어지면 그대로 순종하는 자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내면 안으로 들어오도록 자유롭게 자신을 열어놓는 상태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신비가 자기 자신의 내면에 부딪쳐 옴으로서 기도의 주체자와 객체자가 하나가 되는 일치경험 상태이다. 그 상태는 지성적인 냉냉함이 아니고 가슴으로 느끼는 경험이요, 정감적인 경험이요, 직관적인 경험이다. 관상기도자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모든 관계를 성찰한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다.



관상기도의 종류


관상에는 완전 관상과 불완전 관상 그리고 추리적 관상이 있다.


1) 완전 관상(주부적 관상) : 일체의 상상이나 이미지가 멈춘 순수한 어두움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일치경험을 하는 것이다. 관상경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의 상상력이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제거하여 감각의 어두움과 영의 어두움에 이르러야 한다.

모든 피조물과 인간의 개념 속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이미지나 속성들을 하나씩 하나씩 부정해 가는 영적 여정을 가게 될 때에 결국 인간의 모든 개념이나 언어는 잠을 자게 되고 깊은 침묵의 심연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상태가 순전한 영의 세계로서 하나님과 일치의 경험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 관상기도법은 갈멜수도회의 전통이다.


2) 불완전 관상(획득적 관상) : 상상력이나 갖가지 이미지가 관상적인 체험에 이르는 매개체가 된다는 것이다.

가장 하찮은 피조물로 부터 가장 고상한 하나님의 속성을 단계적으로 관상해 가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영적 여정의 패턴을 말한다. 이 관상기도법은 예수회의 전통이다.


3) 추리적 관상 : 초자연적 진리를 꿰뚫어 보고, 그것을 사랑하며 은총의 도움으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것에로 마음을 돌려 추리하는 것이다.


* 완전 관상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하나님의 현존의 체험이다. 본성적 노력으로는 신비체험을 할 수 없다.

- 관상 중에 누리는 하나님께 대한 체험적 지식은 명확하거나 뚜렷하지 못하고 모호하고 혼잡스러운 것이다.

- 주부적 관상은 관상가가 하나님의 활동 아래 있다는 확신을 그에게 준다.

- 수동적 관상은 관상가가 은총 가운데 있다는 윤리적 확신을 준다.

- 신비체험을 서술할 수 없다. 신비적 일치는 변화와 동요을 가져온다.

- 신비체험은 흔히 신체에 반응을 일으킨다.신비적 기도는 흔히 기능 정지나 결박을 가져온다.

- 완전 관상은 덕행 실천에 큰 충동을 준다. 관상가의 영혼에 초자연적인 것이 엄습한다.



관상적 체험의 다양성


1) 중세 영성가의 대표자로 알려진 성 프란시스의 관상적 체험

성 프란시스는 자연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자연 그 자체를 사랑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자체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우정과 사랑에 찬 자연의 관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란시스에게 자연은 자신의 형제이요, 자매이요, 친구였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자연 속의 모든 만물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 있다면, 자연 안에서 역시 '형상'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흔적' 혹은 하나님의 '발자취'를 느낄 수는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프란시스는 철저히 청빈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감상적인 고행주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내적으로 외적으로 비울 때만이 자연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부요를 맛볼 수 있으며, 부유하신 그 분과의 풍성한 만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청빈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지극했다. 그에게 있어서 청빈은 곧 풍요였던 것이다.


2) 트라피스트 수도사 토마스 머튼은 수도원에 들어간 후 평생 3번의 외출만 하고도 세상을 변화시켰던 관상기도의 대가였다.

그는 관상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고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세상을 함께 보았다.

진실로 관상기도하는 자들은 세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대로 봉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비젼을 보는 자들은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일하지 않을 수가 없다. 관상기도자는 이 세상의 고난과 죄악의 문제와 절망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이웃을 하나님과 함께 보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가 값비싼 것임도 알게 되는 것이다.


관상기도의 세단계


관상기도는 아무나 조용히 앉아서 긴장완화 훈련을 하는 그 정도가 아니다. 먼저 영성 기도훈련의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


1) 통성기도로서 소리내며 통성으로 주님을 찾아야 한다. ' 예수의 기도'로서 집중적인 기도를 말한다.

2) 침묵의 기도훈련이다.전결합하여 의지까지 멈추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받을 뿐이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어린 정신 집중이다.

3) 영상의 기도이다. 마음 가운데 하나의 상이 일어나게 하는 상상력과 계획적인 성찰과 합리적인 조작을 중요하게 여기며, 내면의 모든 사고와 의지와 계획까지도 단절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완전히 자신을 비워 자신의 생각, 상상, 영상, 중보기도나 어떤 기도제목도 버림으로 세상과 단절해야 한다. 이런 내적 단절 외에 외적인 모든 세상 사건과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한다.

이처럼 관상기도에서 단절과 분리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관상기도는 내 . 외부적인 모든 방해물과 단절하거나 분리시킨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한 ‘기다림’이다. 기도자는 청원이나 간구 등을 할 수 없다. 전적으로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과 자신이 완전결합하여 의지까지 멈추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받을 뿐이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어린 정신 집중이다.

그리고 관상기도 할 때는 세 가지 기본적인 단계를 밟아야 한다.


1) 첫 번째 단계는 ‘마음의 평정’이다.

그것은 우리가 정신이 통일되거나 마음이 온전히 하나될 때까지 그저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을 뜻한다. 마음의 평정을 이루려면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모든 긴장과 걱정을 내버리는 것이다. 그 다음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 보라.

걱정거리가 생기거나 정신이 산만해지면 그것을 다만 아버지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맡기라.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풀어 버리는 것이다. 마음의 평정이란 내버리는 것이며 풀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장 삐에르 드 꼬싸드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자기 포기”, 즉 적극적인 굴복을 말한다.


2) 두 번째 단계는 ‘고요의 기도’이다.

마음의 평정을 통해 마음 속의 온갖 방해 요인들과 정신을 분산시키는 것들과 의지를 박약하게 하는 것들을 모두 내버리기 때문에 내적으로 하나님의 움직임에 민감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의 존재 중심에는 요동하지 아니하는 고요함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고요함이다. 우리의 영혼이 바짝 긴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방심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상태가 된다. 마음 속에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마음의 응시가 있는데 그것은 때때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는 주님의 뜨거운 임재를 체험하며 주님의 가까이 계심과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3) 세 번째 단계는 영적인 신비 체험으로 황홀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일이라는 점에서 앞의 두 단계와는 아주 다르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열어 놓고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은 비판을 위한 소개의 글일 뿐임을 알려 드립니다 곧 이어 두번째 관상기도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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