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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새벽, "부활을 넘어 생명까지 가는 성도 ...부활과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보라 빈 무덤" ... 부활과 생명 되는 예수님이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부활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이라 하셨습니다.

마르다의 고백 "마지막 날 부활 할 때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라고 해서는 안돼.

부활에 대한 마르다는 지식은 완전하지 못해.

부활은 "안다"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믿나이다" 믿음이 더 중요해.

"십자가는 생명이다.그러나 부활은 영생이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신앙을 고백하는 비슷한 표현이지만, 차이가 있다. 안다는 것은 믿는다는 표현보다 신앙을 고백하는 강도가 약한 표현이다. 이 말에는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 까지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부활에 관하여 믿음이 아닌 일반적인 지식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한다.  

마르다는 고백은 바리새인들이 가진 그 정도 수준에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부활과 자신의 삶을 함께 잇지 못하고 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당장이라도 자기 오라버니 나사로를 살릴수 있는 것으로 믿고 고백한 것이 아니다. 지금 그녀는 예수님이 메시야 되시며 신적 권능을 가지신 분으로는 믿고 있지만, 그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지금 살릴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 믿음은 없는 상태다.  

 우리의 믿음도 이 정도 수준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여기의 믿음은 없고 장차. 다가올 세상에서 내게 무슨 일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런 분이라 믿기도 한다.  


마지막에 대한 믿음은 있으면서 지금 여기 (Now, Here)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 마르다와 우리의 모습이 나닐까.

이런 마르다와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셨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막연한 믿음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 죽은 자를 지금 살릴 수 있는 생명의 주님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하시길 부활이자 생명이라 하셨다. 왜 예수님께서 부활과 생명 이 두 단어를 함께 사용했을까,

이 둘의 관계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적 관계에 있다. 즉 부활이 없으면 생명도 없고, 생명이 없으면 부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사람이 죽었다. 이 사람은 지금 사망의 단계에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제일 먼저 뭐가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명의 회복. 부활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살아난 사람은 가만두면 또 죽기 마련이다. 살아난 그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때 다시 죽지 않게 된다. 

 

우리에게는 이런 ‘부활과 생명’이 연관된 신앙이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이는 부활 하나만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에게 냉정한 지성이 필요하다. "부활 그 자체는 영생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부활한다고 해서 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부활한 다음 생명이 주어졌을 때 영생할 수 있는 것이다".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는 예수님의 권능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얼마 안 있다 곧 죽었습니다. 부활은 했지만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치유받은 나병환자 열 명에 관한 말씀을 보면 이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다라며 간구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열 명의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셨다. 그런데 이 중 한 명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께 돌아와 그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고, 나머지 아홉 명은 치유 받은 것에만 집중하여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갔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한 명에게만 이런 약속을 주셨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눅17:19)

그럼, 나머지 아홉 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잠시 나병에서 치유 받은 것으로 만족하며 살다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지지 않았다. 

 

한 해 한해 하나님이 건강 지켜 주셔서 잘 지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아픈 병에서 놓임을 받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이 땅에서 건강의 회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다. 우리는 그 일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집중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부활 하나만 보고 생명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라 할 수 있다. 어떤 교회는 신자들의 마음을 회복하고, 가정을 치유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고, 자녀들이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교육하는데 철저하지만 너무 현세적일 수 있다.  

사람들의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현재에 만족을 주기 위해 너무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신앙생활 하는 것을 즐거워한다.교회 가면 취미가 같은 분들이 모여 등산도 하고, 꽃꽂이도 하고, 회사생활의 어려운 점도 커피 마시면서 나누며 그런 일 때문에 행복해 한다. 저는 지금 신자의 정서와 영성이 회복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 곧 회복의 영성에 만 집중하고 생명을 등한시한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가 종말론적인 영성을 갖고,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죽은 영혼에 대한 갈망을 갖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는 것, 예수님이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걸어가셨던 고난의 발자국 들을 교인들이 기억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 곧 고난받는 성도와 교회의 모습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부활이 중요한 것은 그 부활 다음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 보다 하늘에서 인정받고 잘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하여야 한다


보라 심판과 더불어 종말에는 악인도 부활한다.  

심판받고 형벌을 받기 위해 부활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리기 위해 부활하게 된 것이지만 악인은 영원함 불 못에서 고통 당하기 위해 부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넘어 생명까지 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 말씀의 직접적 의미는 마르다가 막연한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닌, 구체적으로 예수를 생명과 부활의 주로 믿으면 나사로가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간접적으로는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생명의 부활을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분명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시다. 부활과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것은 마치 씨 안에 생명이 있는 것과 같다.

성도는 이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고, 그 속에 있는 부활과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예수님은 또 말씀을 이으며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했다. 

  

이 말씀은 성도가 믿음으로 얻는 영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는데, 이 영생은 이 땅에서 이미 성도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고, 육체적인 죽음을 맛 볼지라도 영원히 소멸되지 아니한다는 의미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영적인 차원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그런 존재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말하고 마르다에게 “이것을 네가 믿느냐”했다. 마르다는 부활에 대한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고백한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오늘 이 마르다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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