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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적 예배의 이해(3)

4. 고대 및 중세의 배경

A. D. 1-2세기의 예배를 뒷받침 해주는 다섯가지의 자료를 소개해보면, 로마의 클레맨트가 고린도인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 소아시아에 있는 비티니아의 로마 지방 장관인 플리니 2세가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편지, 보통 디다케로 불리는 열두 사도의 가르침, 저스틴 마터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에게 보낸 “변증문” 등이 있다. 고대 및 주엣라는 긴 시간 동에 다음의 두 가지는 언급되어여져야한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습은 유동적이라는 사실이다. 기독교 전체가 채택하고 있는 예배의 모범은 없다. 예배를 주제로 하고 있는 근대 문헌의 모든 경향은 현대 예배관습의 표준이 고대의 관습에 그 근거를 두고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예배절차는 항상 변화하여 왔다. 각 교파마다 자신들의 필요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예배의식을 채택하려는 실험적 노력이 계속되어져 왔다. 나머지 하나는, 예배에 대한 불만이 종교개혁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사리앋. 족욕핵은 정치, 경제, 사회구조, 교육, 또한 종교등 모든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를 총괄하는 큰 규모의 개혁운동으로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5. 종교개혁시대의 배경(16-17세기)

종교 개혁이 일어난 배경을 두루뭉실하게 묘사해보자면, 아마도 종교개혁 시대 이전에 종교상의 어떤 아쉬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개혁이 필요한 어떤 사실들이 그 배경에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분명이 예배는 그 중 하나이다. 중요한 종교개혁자의 사상을 통해 혹은 어떤 특정한 지역에서의 갱신의 경향을 살펴보는 것은 이 시대의 예배가 지향하고 있던 바를 효과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 그 중 루터는 설교와 성경봉독을 예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신약에 나타난 성만찬에서의 제자 개념을 되찾아 보려고 노력했으며, 미사 도중에 교리를 소리내어 말하는 것과 미사를 각 지방의 언어로 진행하느 것, 성만찬을 매일 모든 교회에서 기념할 것을 주장하였다. 루터에 의한 독일에서의 종교개혁과 함께 스위스 쮸리히에서는 쯔빙글리에 의하여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인문주의적 학문을 통하여 개혁운동을 추진했다는 사실이 루터와 구별되는 것이다. 그는 교황권과 미사, 성인들의 기원, 행위를 통해 인정받음, 금식, 축제, 성지순례, 수도원의 서열제도와 사제권, 귓속말로 고백하는 것, 죄상소멸, 면죄부, 고행, 정죄, 기타 로마 카톨릭 신조와 예배의식에 있어서의 독특한 특징 등 모두를 비난했으며, 쮸리히위원회 선언을 확고히 하여 상징을 사용하는 일과 미사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일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의 일반적인 주일 아침 예배는 성경봉독, 기도, 죄의 고백과 설교로 되어있으며, 성만찬이 있을 경우 설교후 성만찬에 필요한 성찬대를 준비한후 성만찬이 진행된다.


개혁된 예배에 관한 일중 가장 중요한 몇 가지의 일들이 일어난 곳은 스트라스부르그였다. 첫번째 개혁안이 디볼트 쉬바트쯔에 의해 만들어졌다. 예복, 무릎을 꿇음, 사제의 손씻기, 기타 예배의식 등은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 그의 개혁안의 특징이다. 그러나 미사를 희생적인 것으로 지칭하는 모든 것과 성자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원을 없애버리고, 미사곡을 소리내어 부를 수 있도록 했으며, 그 외에 여러 가지르 바꾸도록 하였다. 1530년 마틴 부처가 감독이 되 후 그 개혁의 진도는 더 앞으로 나아갔다. 부처 이후 예배의식에 관한 용어들은 과거 로마식 표현과는 다른 새로운 용어로 바뀌어 지게 되었다. 가령 미사라는 말 대신에 주의 만찬 또는 성스런 식탁으로, 사제 대신에 목사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이다. 칼빈 또는 다른 종교개혁자들은 종래의 예배의식에서 의식적인 행사, 창화의 단구, 한두 번의 응답, 성가대가 하는 수차례의 응답송, 수차례의 성구집 낭송 등을 제외시키고, 봉헌기도만큼이나 짧게 하도록 하는 등, 기도의 종류와 수를 줄이고, 예배의식의 기본적 요소를 모수 살리면서도 짧고 간단한 예배의식을 만들 수 있었다. 주의 만찬에 관한 한 칼빈과 루터의 의견은 일치되지 않는다. 종교 개혁의 결과로 영국 국교회에의 예배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그 실제 형식에 있어서는 개혁된 교회와 로마 교회 예배의 중간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영구 국교의 입장은 중간적인 것이었도, 또한 이것은 그들이 의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예배는 개신교도들보다는 루터주의와 비슷하며, 주의 만찬에 대한 해설은 쯔빙글리파와 보다 가까왔고, 심지어는 성만찬의 포두주와 빵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변화된다는 교리와 성찬중시주의도 거부하였다. 그들은 또한 성만찬을 단순히 객관적인 것으로 보다는 예배 참석자가 자신을 드리는 주관적 희생의 의미로서의 개념을 보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축성기도는 그대로 실행하는 한편, 봉헌기도를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하던 의미에 맞도록 바꾸었다.


6. 종교개혁시대의 배경(18세기-현재)

19세기 후반 부터 기독교 전체가 예배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교회의 이름이나 종파와 관계없이 모두 이 영향을 받았다. 예배의식의 회복을 위한 갱신의 움직임은 성소의 배치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술과 상징으로 성찬대를 장식했으며, 주의 만찬에 대한 의식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거의 예외없이 모든 종파에서 예전의 복고를 주장했던 이들은 주의 만찬을 매주 예배에서 행하는 데 동의하였다. 주의 만찬 외의 모든 순서는 단지 주의 만찬을 준비하는 것으로 의미지어졌고, 이를 위한 다소 길고 고정된 예배의식이 제시되었다.여기서는 성체 성사, 기도의 내용과 성찬 봉납, 회상, 축성에 중점을 두었다. 예배의 순서는 기도문, 설교 전의 기도, 기타 여러 종류의 인쇄된 기도, 여러 형태의 창화와 응답, 성구집 낭독 등 복잡한 순서가 많았고, 예배의 각 부분의 기도, 축복, 송영 등으로 따로 틀을 만듦으로써 길어지게 되었다. 목사의 기능과 목회의 이해에 변화가 생김에 따라 목회자의 의상이나 치장이 다양해지기 시작했으나 종교개혁이 그 절정에 다다랐을 19세기에 중세의 예배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는 역사의 역전을 말하는 것인가하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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