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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남부본부

참된 예배자의 삶의 태도

렘 7:1-15


들어가는 말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을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아멘


렘 7:1-15을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성전 바깥뜰에서 안뜰로 들어가는 여러문 가운데 어느 한 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2절) 그리고 예레미야가 이 설교를 했을 때는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성전예배를 드려야 했던 삼대명절(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주전 627년경에 소명을 받고 예언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렘 1:2) 흔히 예레미야 1장에서 6장까지의 내용을 예레미야의 초기 선포사역(주전 627-622년)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며, 7장 이후는 예레미야의 두 번째 기간(주전 608-597)에 속하는 기록이다

이같은 예레미야의 활동연대표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약 14년간, 즉 주전 622년부터 608년까지 활동을 하지 않은 공백 기간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당시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시작한 해가 주전 622전인데, 예레미야는 그 해부터 요시야왕이 죽던 해 주전 609년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요시야왕이 세상을 떠난 것이 계기가 되어 예언자로 재등장하여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예레미야가 약 14년동안 칩거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그 침묵을 깨고 한 설교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본문(렘 7:1-15)이다. 이 설교가 참으로 놀라게 한다. 격한 말로 이 설교는 '목숨을 건 설교'라 할 수 있다. 사실 예레미야는 이 설교로 인하여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계속해서 박해를 받게 된다.(렘 26장)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는 예루살렘성전과 그 당시 성전예배를 비판하였으며, 나아가서는 예루살렘(시온성)의 멸망을 예언했다. 시온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거주하시는 장소이기 때문에 이방 나라가 공격을 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유다백성의 신앙이었다.(시 132:13-14, 시 46) 즉 시온(예루살렘)은 유다민족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상처를 낸 것이다. 유다사람들에게 이같은 것이 용납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여러분 죽음의 위협에 처하게 되고 계속해서 박해를 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그토록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 개했을까 무엇이 그토록 간절하길래 생명을 담보하면서까지, 즉 생명을 걸고 설교하게 했을까

예레미야의 이러한 절박함과 간절함, 그리고 그의 안타까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예레미야의 성전설교가 결코 옛이야기만은 아니며 지금 우리를 향해 동일한 말씀으로, 특히 이 땅의 교회를 향해 무섭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으로 들려지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의 고통과 번민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이스라엘의 불의(不義)에 있었으며, 그들은 공의를 멀리하고 단지 성전제사(예배)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신앙과 삶이 분리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예레미야는 참된 예배의 부재를 본 것이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5-7절)고 한 것이다.


이같은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이스라엘이 왜곡된 삶을 살고,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지 않고, 이방인(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지적한 말씀이라 하겠다. 선지자는 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죄악들을 지적하고 있다. "너희가 도적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쫓는다"(9절)고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이웃들)사이에서 불의를 행하면서 성전에 들어와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증한 짓이고, 너희들은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다.(11절, 막 11:17)고 질책을 하며, 너희를 이 성전에서 좇아내 버리겠다(15절)고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로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같은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를 통해서 교회현실과 우리들의 예배행위를 비추어 보면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정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어떤 예배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예배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향해 먼저 그들의 행위를 바르게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3)고 한다.

일찍이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이 그것인데, 이스라엘은 이때부터 계약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계약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준수해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님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래로 사람을, 즉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시로 열심히 성전 예배를 드리고 제물을 드리는 행위를 하지만,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이 그 예배와 분리되는 것을 지적하고 책망을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명절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2절) 그들 백성들은 마치 미신적으로 주문을 외우듯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4절)하며 외치고 있다. 이러한 외침에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기 때문에 이 성전은 안전과 평화 그리고 번영을 보장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단호하게 거짓말이라고 하며, 그것을 믿지 말라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계속해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또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영원무궁히 살 수 있게 해주는 일에는 대단히 중요한 조건이 따른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3)는 말씀이다. 그들이 이 곳, 즉 약속의 땅에서 계속해서 살 수 있는가의 문제는 그들이 이 곳에서 바르게 사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인데, 그 삶이란 왜곡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며 기쁘신 뜻에 따라 사는 삶을 말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b) 하셨다. '산제사'란 짐승을 잡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사실이라면 이것에 대한 영적의미는 '삶으로', '생활로' 드리는 예배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영적 예배'란 것은 합리적인 예배, 참 예배, 온당하고 합당한 예배란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온당하고 합당한 참 예배는 몸으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임을 로마서는 말씀하고 있다. 그 삶은 곧 말씀적인 삶이다. 하나님 앞에서와 역사 앞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의(義)롭게, 옳게 바르게(正)하는, 즉 공의(公義)와 정의(正義)롭게 사는 삶이다.


사람의 세상은 옳게 바르게, 공의와 정의롭게 살기가 퍽 어려우며 또한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 현대를 무한경쟁시대라고 말한다.

무한경쟁은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명암을 더욱 짙게 나타나게 된다. 자유로운 경쟁의 한쪽에 부(富)가 있다면, 다른 한 쪽에는 가난과 소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쟁의 기본적인 원리는 철저하게 승자 중심적이라는 데에 있다. 과정과 동기보다는 결과와 업적에 집중 생각하고 따라서 부와 이득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사람들은 서로를 기만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부정적인 측면만 보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와 같은 불의한 삶 속에서 바른 삶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 세상이 기만과 거짓으로 난무할 때 교회는 묵묵히 공의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 세상이 부정적인 방법으로 득세할 때 교회는 정의로운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예배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제사이며, 삶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온당하고 합당한 예배)가 되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참된 예배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삶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한다면, 합당한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인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6) 여기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보는 삶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둘째로, 참된 예배는 영적 약자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눔의 가치

율법에 의하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는 사회적 약자이므로 이들을 소홀히 대하지 말고, 특별히 이들을 배려해 주어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출 22:22, 신 10:18, 14:29, 16:11)

신약에서도 가난한 자, 힘없는 자, 소외된, 소외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리고 실천적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에는 참다운 경건이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약 1:27) 즉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하였다. 또한 야고보서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이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약 2:15-17) 하였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두 가지의 가치를 추구하는데 하나는 '가짐의 가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눔의 가치'라고 말한다. 가짐의 가치를 추구하는 자는 평생토록 전생을 소유하기에 욕심과 탐욕을 부리며 사는 자이고, 나눔의 가치를 추구하는 자는 가진 것을 감사하며 이웃에게 나누어주며 베풀며 일생을 복되게 산다는 것이다

누가 참으로 복있는 사람인가

두말할 것없이 '나눔의 가치'를 추구하며 평생토록 이웃들에게 베풀며 사는 자가 참으로 복된 자이며 예수님께서도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다.


성경 안에서 '소유의 가치'만을 추구하다가 '나눔의 가치'를 추구한 사람, 삭개오라는 세리장을 잘 알고 있다 사실 그는 가짐의 가치, 소유의 가치를 추구하기에 혈안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부를 축적하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의 혈세를 받아냈어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어는 한편으로 보면 남에게 토색할 만한 일을 일삼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보면 토색할 일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으로 영접한 이후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즉 그 변화는 곧 '나눔의 가치'로 변한 것이다.

삭개오는 주님 앞에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으며,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다"고 회개하는 결단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오히려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축복을 받았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이같은 나눔의 삶을 실천한 교회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비 그리스도인들이 구름떼처럼 교회에 모여 들었고 교회는 날로 부흥 하였다.


조금도 손해 보기를 싫어하는 인색한자가 되어 버린 우리가 한번쯤 초대시대 교회들처럼 그리삶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인들은 자그마한 이 일에 너무나 민감하고, 자기 것을 챙기기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이같은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 큰 사랑과 은혜를 받은 우리들, 이제는 받은 것들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면서 이웃을 돌봐주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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