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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호준교수(삼중적 위치와 현대적 상관성)

십계명(十誡命) 그 삼중적 신학적 위치와 현대적 상관성


현대 크리스챤들에게, 특별히 감상주의적 복음주의자들로 변해 가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 '십계명'은 더 이상 매력을 주지 못하는 듯 하다.

챨톤 헤스톤을 연상시키는 '십계(十戒)'는 감동적으로 기억하면서도, 실제적인 '십계'는 구시대의 유물, '율법 조항'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이 지닌 십계명 이해가 아닐는지? '복음', '은혜', '찬양', '용서', '사랑' 등과 같은 '복음적'(?) 주제들로 일방적으로 옷을 갈아입은 지 오래된 우리들에게, '십계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과 어두운 색채는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마음의 상처를 죄보다도 더욱 중요시하는 현대인들에게, 권위보다는 평등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간절해진 현대적 크리스천들에게 십계명의 '하라', '하지 말라'는 독단적 교훈 방식은 빅토리아 시대적 전통주의와 고대적 가부장 제도의 사고방식을 반영해 주는 듯하다.

물론 이러한 추세는 시대정신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속박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의 독립적 성향들, 좀더 개인적인 성향의 취미 종교를 권유하는 할리우드적 세계관, 어떠한 행위를 '죄'라고 부르기보다는 '병'으로 부르기를 원하는 현대인들의 정신병학적 심성, 도덕적 훈화보다는 정신적 치료를 선호하는 나르시스적 인생관,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과학적 현대인에게는 적합치 못하다고 주장하는 세속주의, 세상에는 절대적 진리나 도덕적 규범이 있을 수 없다는 상대주의 등은 직간접으로 십계명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조장하여 왔다고 해도 지나친 진단은 아닐 것이다.


최근에 십계명에 관해 설교를 해본 경험들이 있는지? 아니면 들어본 경험이 있는지? 혹시 청중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지? 그들은 심한 죄책감에 억눌려 어깨를 늘어뜨린 채로, 아니면 분노와 울분을 삼키며 교회당을 떠나갔는지?

도대체 십계명을 어떻게 다루고 이해하여야 한단 말인가? 삼천 년전에 중동 지역의 한 산에서 모세라는 인물을 통해 특정한 민족 이스라엘을 위해 주어진 '열 가지 명령'들이 도대체 오늘 우리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십계명은 전 인류를 위한 보편적 규범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을 위한 특수한 규범들인가?

아니면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영속적 가치의 규범들인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계명을 두 개의 새 계명으로 요약해서 주셨다면, -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구약의 십계명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물론 이러한 다양한 질문들은 그것들 나름대로 독자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나는 특별히 세 가지 항목 아래 십계명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부제가 보여주듯이 십계명의 삼중적(三重的) 신학적 위치를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첫째, 십계명의 성서신학적 위치, 둘째, 십계명에 대한 개혁신학적 이해, 셋째, 십계명의 윤리신학적 중요성.



A. 십계명의 성서신학적 위치


이제 우리는 십계명이 주어진 역사적 정황을 살펴봄으로써 십계명에 관한 좀더 분명한 성서신학적 위치를 알아보려 한다. 먼저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중보자로 율법을 수여 받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지내 온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리라. 십계명 수여를 취급하고 있는 출 20장 바로 직전에는 일반적으로 '신의 현현(顯現) 본문'(theophany text)으로 알려진 출 19:1-25이 있다. 모세가 출 3장에 이어 두 번째로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신의 현현' 본문은 출 20장에 기록된 십계명 수여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위해 중요한 출발점이다.


출애굽 후 3개월만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른 곳은 척박한 땅, 시내 광야였다. 그곳은 그들의 지도자며 구원자인 모세가 이전에 야웨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았던 '그 산'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곳은 모세가 이방의 땅, 유기된 땅으로 알려진 그 사막에도 이스라엘의 언약의 신, 야웨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경험한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였다. 마치 모세의 경험은 훗날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야웨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사건을 예기케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 그런 신성한 역사를 간직한 채 태고적의 신비를 지니고 있는 그 산 아래서 캠프를 치고, 그곳을 잠정적인 체류지로 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출애굽기의 설화자의 관점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결코 우연한 결정은 아니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첫 번째 모세와의 대면에서 야웨 하나님은 고통하는 자신의 민족을 위하여 그를 구원자로 부르시고 그에게 확신을 심어 주신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출 3:12a).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분은 모세에게 출애굽의 목적을 분명히 하신다: "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b). 이처럼 출애굽은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압박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더 궁극적인 목적은 '야웨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애굽의 주권자 바로를 섬김으로부터 그들에게 새로운 주권자로 나타나신 야웨를 섬기는 일로 전환하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배 공동체'(worshipping community)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선택된 공동체의 탄생이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야웨 하나님만이 주권자이며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게 된 것이다. 출애굽기 저자는 이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모세의 소명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소명을 예기케 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본래적으로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선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예배 공동체로 삼으시고 후에 그들에게 '성막'(聖幕, tabernacle) 건립에 관해 길고 자세하게 말씀하신 것(출 25-31; 35-40)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주제와 연관하여, 우리는 시내산 밑에서 예배 공동체의 결성이 십계명 수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곰곰이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르게 되는 사건에 대한 설화자(narrator)의 보고는 독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린다. 첫 번째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사건이 출애굽의 원초적 원인이었다고 한다면, 두 번째 모세의 시내산 등정은 이스라엘을 향한 또 다른 신적(神的) 동력(動力)이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야웨 하나님을 처음 만난 이후로, 출애굽이라는 장엄한 신적 구원 행위가 수행된다.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바로 지금까지,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일방적이었다.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었고, 애굽의 신을 대항하여 저주를 내리고, 그들 목전에서 자신의 무서운 능력을 과시하셨던 분도 야웨 하나님이었다. 크신 손과 편 팔로 홍해를 가르고 육지처럼 마른땅을 건너게 하신 분도 야웨 하나님이었다. 척박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이신 분도 역시 하나님이셨다.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구원의 수혜자로서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일방적 관계가 점점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감지하게 된다. 두 번째 모세의 시내산 등정이 이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모세는 자신의 출애굽 사역에 결정적인 동기부여와 지속적인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던 시내산 사건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시내산에 도착한 그는 하나님을 만나리라는 강력한 기대를 가지고 시내산 등정 길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는 실망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께서 다시 그를 시내산으로부터 부르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처음 시내산에 올랐던 사건이 모세와 하나님 사이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수립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이제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모세가 두 번째로 시내산에 오르고 있는 사건을 기록하는 본 구절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새롭고도 획기적인 관계 설정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일반적인 은총의 수여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상대로 한 '언약의 상대자'(covenantal partner)로 새롭게 자리 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말씀에 잘 반영되고 있다: "자, 이제 너희가 내게 온전히 순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될 것이라. 온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 너희만 내게 대하여 제사장들의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출 19:5-6).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출애굽의 위대한 구원을 기억케 하신 하나님, 그분은 그들에게 그러한 구원이 야웨 하나님으로부터 온 '약속 성취'며, '전적 은총'인 것을 알리신 후에야 비로소 그들에게 '언약'에 관해 말씀하신다. 소위 '시내산 언약'의 성서신학적 자리를 분명하게 밝히시는 순간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자녀로서 지켜야 할 규례들과 규정들, 다시 말해서 '언약의 규정'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그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이후에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십계명의 전문(前文, preamble)안에도 분명히 명기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야웨니라'"(출 20:1). 다시 말해서 출애굽의 안목으로부터 바라다 본 십계명이라는 말이다. 메레디스 클라인(Meredith G. Kline)은 이 사실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십계명은 타락한 인류에게 진정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편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다. 십계명은 타락한 인류에게 구세주 되시며 주님되신 분에 의해 체결된 언약 안에서 시민(市民, citizenship)으로 살아가는 것을 지도해 주는 안내자로 제시된 것이다. 구세주시며 주인되신 그분이 누구던가? 그는 그분의 자비를 통하여 우리를 종 되었던 속박의 집으로부터 언약의 삶 속으로 이끌어 들여 함께 교제하며 살도록 이끄신 분이시다. 어떤 교제던가? 언약의 율법에 온전히 일치하는 삶으로 특징 지워지는 교제가 아니던가!



B. 십계명에 대한 개혁신학적 이해: 율법의 세 가지 용법을 중심으로


율법과 그의 핵심적인 요약으로서의 십계명에 관해 말하는 우리로서는 개혁주의적 전통, 특별히 칼빈적 전통에 따라 율법의 세 가지 용법에 관해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특별히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 있는 한국 교회들로 하여금 우리의 역사적 신학적 전통을 상기하게 하려는 권고이기도 하다. 더욱이 율법에 관한 한 한국 교회는 세대주의적 율법 이해나, 아니면 루터적 율법 이해에 많이 편중되어 있다는 인상을 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율법 대(對) 은혜', '복음 대(對) 율법', 심지어 '구약 대(對) 신약' 등과 같은 대칭적 구도를 통하여 성서신학을 이해하는 흐름이 상당수의 목회자와 신학도, 그리고 평신도들 사이에 편만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 아닐 수 없다. 종교개혁신학의 전통 가운데 서 있는 한국 교회, 특별히 장로 교회들이 신앙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율법에 대해 불확실한 입장을 갖고 있음으로 해서, 그러한 무지나 오해가 실제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실천적 삶(소위 '영성'이나 혹은 '경건'이란 불리는 신앙의 영역)에 모름지기 지대한 영향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끼치고 있다는 것이 나의 관찰이기도 하다. 율법의 세 가지 용법 가운데 우리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 세 번째 용법이다. 나는 독자들이 이점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은 율법의 세 가지 용례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칼빈은 율법의 첫 번째 기능으로 '정치적 용법'(usus politicus) 혹은 '시민적 용법'(usus civilis)이라 불리는 율법 이해를 제시한다. 이 용법은 일차적으로 불신자들을 위한 '율법'의 기능으로, 사회 안에서 외형적인 훈련과 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일이 주요한 임무이다. 법이 준수되고 공평하게 시행되어야 할 이유는, 다시 말해서 법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인간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고 보존하는데 있다. 율법의 이러한 용법은 궁극적으로 창조질서의 규범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 위에 설정하신 '세계 질서의 원리'(독, Weltordnung), 혹은 창조규례(영, Creation Ordinance)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용법의 궁극적 목적이 있다면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 위에 재수립하는 것이다. 보다시피, 율법의 첫 번째 용법은 창조신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칼빈이 이러한 기능을 성부 하나님의 사역으로 관련지어 말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율법의 두 번째 기능으로 '경책적(警責的) 용법'(usus elenchticus)을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알고 있는 율법의 기능이다. 이 용법은 교육적이며 신학적 용법으로서, 이 기능 안에서 율법은 우리들을 벗기며, 우리의 죄들을 드러내며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추구하게 한다. 이러한 용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칼빈은 '거울'이라는 은유를 사용한다.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율법의 명령들 안에서 '온전한 의로움의 거울'을 소유하게 된다. 이 거울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들의 연약함들을 살피고, 이 연약함으로부터 오는 불의를 생각하게 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불의로부터 오는 저주를 생각하게 된다. 마치 거울을 통하여 우리가 우리 얼굴에 있는 더러운 점들을 보는 것과 같다.' 율법의 이러한 기능을 성자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을 짓고 있는 칼빈의 입장은 매우 돋보인다.


마지막으로, 율법의 제 3의 용법이 있다. 이러한 율법 이해는 종교개혁이 우리들에게 남겨 준 커다란 유산 중의 하나로서, 일명 율법의 '규범적 용법'(usus normativus)이라 부른다. 이러한 사실은 유럽의 개혁주의 교회들의 중요한 신앙고백문서 중의 하나인 '하이델베르그 신앙문답서'(Heidelberg Catechism)의 구조를 살펴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하이델베르그 신앙문답서는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 1부에는 인간의 비참(misery)을, 2부에서는 인간의 구원(deliverance)을, 제 3부에서는 인간의 감사(gratitude)를 중요 주제로 다룬다. 놀랍게도 16세기 하이델베르그의 신학자들은 십계명에 관한 신앙문답 내용을 제 1부가 아닌 제 3부에 집어넣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율법 이해가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십계명을 중심으로 하는 구약의 율법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은 신앙 공동체가 그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한 '원리'로서, 삶의 원리로서 이해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십계명의 현대적 의미를 논의할 만한 충분한 역사신학적 근거를 제공해 준다고 하겠다. 요약적으로 우리는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이 구원 공동체의 샬롬을 위한 하나님의 '처방전'(prescription for Shalom)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독자들은 유럽과 북미의 개혁교회의 주일 예배 순서 안에는 십계명 낭독 순서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예배 공동체로서 교회의 구성원들이 예배 시에 십계명 낭독을 듣는다는 것은, 십계명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 그들의 삶을 위한 삶의 원리로서 받아들인다는 신학적 이해이기도 하다.


흥미 있는 사실은 칼빈은 '규범적 용법'이라는 표현 대신에 '거듭난(重生) 자를 위한 용법'(usus in renatis)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 용어가 암시하듯이 율법의 제3의 용법은 특별한 방법으로 성령의 사역과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그 원래적 목적에 따라 이해되고 경험된다면, 즉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선물과 안내로서 율법을 바라다보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율법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고 새롭게 형성시키는 성령의 특별한 기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율법의 역할을 강조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왜 칼빈이 루터와는 달리 '성화론'(sanctification)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었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도록(성화) 하는 성령의 '독특한 기관'(器官, a peculiar organ)인 셈이다. 결국 성령 안에서의 삶이란 율법 안에서의 삶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을 읊조리고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 사람의 유일한 특성이라고 유명한 지혜시(시편 1장)는 말하고 있으며, 지혜와 율법시의 결정판이라 불릴 수 있는 시 119장은 긍정적이고 유익한 '토라-경건', 혹은 '토라-영성'에 관해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누가복음 15:33이하를 찾아보신 경험이 있는지요? 내가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던 어느 주일 주보에, 그날 설교 본문으로 누가 15:33을 올린 적이 있었다. 미리 와서 성경을 찾아보던 교인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었다. 물론 누가 15:33은 성경에 없었다. 그 유명한 '고통하시는 아버지'(일명 탕자의 비유)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누가복음 15장은 32절에서 그 끝을 맺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날 나의 설교 제목 역시 교인들에게는 독특하게 보였다: "돌아온 그날 그 이후…."


나의 신학적 요점은 분명했다. 돌아온 탕자가 '아들'로 다시금 칭함을 받았다는 사건도 중요하지만(교의 신학에서 '칭의론'에 해당한다고 가정한다면), 열려진 끝으로 막을 내리고 있는 이 비유는 주의 깊은 독자들로 하여금 돌아온 탕자는 '그 날' 이후로 어떠한 삶을 살았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생각하게 한다. 용서의 감격을 간직한 채 아버지의 '율법' 안에서 감사의 생활을 계속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돌아온 탕자에게 매우 중요한 실존적인 문제였을 것(교의신학에서 '성화론'이라 불리는 항목)이다. 아버지와의 화해뿐만 아니라, 형님과 화해, 그리고 소원했던 동네 사람들 모두와 새롭고 건강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바울 신학이 바로 누가복음 15:33이후에 대한 신약신학적 강론(!)이라고 믿는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성령의 율법' 안에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바울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지 않는가? 예를 들어, 성령 안에서의 삶을 다루고 있는 갈라디아서 후반부(갈 5-6장)는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C. 십계명의 윤리신학적 중요성: 지붕 위의 바이올리니스트


탁월한 문필가이며 윤리신학자인 루이스 스미스(Lewis B. Smedes)는 십계명의 후반부 계명들에 관한 탁월한 강해서에서 현대인들의 도덕적 감각에 대한 문제를 '지붕 위의 바이올리니스트'(Fiddler on the Roof)란 표상(表象, image)을 통해 제기한다. 독자들은 "Sunrise, Sunset"이란 제목의 음악으로 더 잘 알려진 '지붕 위의 바이올린 주자'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러시아의 어느 시골 유대인 마을에 살고 있는 한 가족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소재로 삼은 감동적인 영화이다. 영화 중 영화 제목을 그대로 재현하는 매우 인상적이고 상징적 장면이 나온다: 어떤 이름 모르는 사람이 지붕 위에 올라 석양을 배경으로 한쪽 다리를 든 채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이다. 긴 연미복 차림의 초록색 코트를 입고 뾰족한 모자를 쓰고, 경사가 급한 지붕 위에서 한쪽 다리로만 선 채로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 인상적인 장면은 그 영화 전체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집약해 놓은 회화적 언어이기도 하다. 어떻게 균형을 잃지 않고도 아름다운 음악을 켜 낼 수 있을 것인가? 위험천만한 상태에서도 어떻게 그처럼 감미로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인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풀어 가는 인생의 숙제인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지붕 위의 바이올린 켜는 그 사람은 우리들 모두일지도 모른다. 두 다리로 균형을 잡고 설 수 있는 평지를 상실한 채 깎아지른 듯한 지붕 위에서 한쪽 다리로만 선 채로 일상생활로부터 어떤 의미 있는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우리네들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양 각색의 딸들을 가진 주인공 아버지 테베(Tevye)는 서막을 여는 그의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 "우리 모두는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들입니다. 한편으로는 지붕에서 떨어져 목을 부러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상쾌한 음악을 켜느라고 애쓰는 그런 사람이랍니다." 어떻게 균형을 잡느냐구요? "내가 말씀드리지요.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전통(tradition)입니다! '전통'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고 있는지 압니다!"


위의 표상적 예화를 통하여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드러나게 된다. 위험천만한 삶의 현실 가운데서 삶의 균형을 잡고 살면서 의미있는 생명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일, 그리고 무엇이 균형 잡힌 삶을 위한 기준이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a. 균형 잡힌 삶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균형 있고, 질서 있고 조화스럽게 운행되기를 원한다. 수많은 위험과 유혹의 순간들로부터 보호되고 안전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의 뜻과는 반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타락되고 오염된 세상이라는 것 역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유혹의 세상,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는 세상, 생명이 온전한 상태로 유지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천만한 세상, 적대적 세계이기도 하다.


위험한 지붕 위에서라도 균형을 잡으면서 잔잔한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일은 타락하고 오염된 세상 가운데서도 건강한 삶을 창출해 내면서 사는 것에 대한 또 다른 표현법이라 말할 수 있다. 죄와 오염, 타락과 위험 가운데서도 우리는 깨끗함, 온전함, 건강함을 원하지 않는가? 깨어진 에덴의 샬롬을 다시 회복하면서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죄의 세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수없이 고백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해 얼마나 많이 고개를 숙였던가? 아니 그것들을 경배한 것이 아니던가? 보이지 않는 것들, 예를 들어 영생, 약속, 구원, 샬롬 등과 같은 것들에게 우리의 삶의 무게를 싣는다고 하면서도 가련하게도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얼마나 강한 집착을 보여 왔던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욱 복되다고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는 보이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다고 강변하면서 수많은 각종 우상들을 만들어 내지 않았는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조작하거나 그분이 이름을 남용, 혹은 이용한 적은 얼마나 많았던가? 삶의 진정한 안식을 추구하면서도 안식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감히 남의 이야기로 돌려버릴 것인가? 통계학적 사고 방식에 깊이 물든 그리스도인들은 육일간 버는 돈보다는 칠일간 버는 돈의 액수가 분명히 많다고 확신하고 살지 않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삶을 풍요하게 하는 날이 아니라 비참스러운 날일지도 모른다. '고르반'적 신앙 때문에 부모 봉양의 의무를, 하지 않아도 될 피치 못할 행운(?)으로 치부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 안에 없다고 할 사람이 있겠는가?(참조, 마가 7:9-13). '권위주의'에 의해 찌들어 본 경험을 핑계삼아 권위에 대한 부정을 합리화시키려는, 잘못 적용된 민주주의 주창자들은 신앙공동체 안에 없는지?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알면서도 사람의 '생명성'에 대해 경외심을 가져 보지 못한 채로, 사람의 생명을 대치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유물론적 가치 체계가 그리스도인 공동체 속에 없다고 부정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생명이 단순히 목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로되, 인간다운 삶을 부정하는 모든 행위들이 살인적 악마의 행위라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성적 관계는 결혼과 가정 안에서만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적이며 상대주의적인 도덕관에 따라 간음을 단순히 '성적으로 활동적'(sexually active)인 행위로만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 없는지? 순결과 정조는 이미 고어(古語)가 되어 버린지 오래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순결하고 깨끗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가리켜, '언제부터 그렇게 성자가 되었느냐!'면서 비아냥대는 소리들을 우리는 자주 듣게 된다. 도덕적 부도를 내고 파산에 들어간(moral bankruptcy) 사람들이 많아진 사회 속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매우 외롭고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출발하는 온갖 종류의 절도 행위들로부터 면제받을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나보다도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좋은 직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분노와 시기를 가져 보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역시 우리는 죄악의 씨들이요 가인적 피를 물려받은 아담의 자손들임에 틀림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진리를 굽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진실을 밝혀 주는데 앞장서 본 일이 있는지? 물론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상의 모든 계명에 있어서 독선주의자들이 될 것을 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들 모두 이러한 계명들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십계명이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잇는 이유는 무엇일까?



b. 균형 잡힌 삶을 위하여 제시된 기준


우리는 고백한다, 삶의 구심점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문의 첫 번째 질문과 응답은 이 사실을 감동적으로 표현해 준다: "삶과 죽음에 있어서 당신의 유일한 위안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잔잔하면서도 확신있게 답변한다: "사람과 죽음에 있어서 나는 내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계명의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부활절 신앙'(Easter faith)이다. 홍해의 이편에서 삶을 바라보듯이, 부활의 언덕 이편에서 삶을 바라보듯이, 우리는 새로운 세계, 성령에 의해 지배되는 새로운 세계 속에 살면서 이 생을 바라다보는 새로운 인종(new humanity)이다. 비록 새로운 세계는 아직 충만히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차 오는 충만한 세계를 이미 지금 이곳에서 미리 맛보며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부활의 눈을 통하여 장차 오는 세상을 미리 보고(시사회, 試寫會, preview) 사는 사람들이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는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새로운 가치관 안에서 세상의 모든 가치관들을 극복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기 있는 사람들이다. 샬롬의 맛을 미리 맛보며 사는 사람들이기에 우리들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과 정사와 권세에 대해 능히 이길 수 있는 영적ㅗ도덕적 힘을 부활신앙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공급받고 있다(참조, 엡 6:12). 십계명은 단순히 개인적 영성을 세워 가는 지침만이 아니다. 신앙공동체의 경건과 삶을 형성하는 유일한 원리이며 사회를 변혁시키는 도덕적 힘이기도 하다.


당신은 누구를 섬기는가? 누가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가? 주일 아침마다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당신이 드리는 신앙고백의 첫 번째 조항을 기억하는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나는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당신은 또 다른 주인을 쳐다보는가? 왜 당신의 마음은 두 갈래로 갈리고 있는가?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알과의 투쟁의 역사라고 까지 불린다는 사실을 당신은 기억하고 있는가? 야웨 경배자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간의 대결 사이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주춤거리는 모습을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왕상 18장). 이스라엘은 수많은 이방신들의 도전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해 왔다는 것이 성서 역사의 증언이기도 하다.


예배와 경배의 대상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이다. 이것은 단순히 유일신 사상에 대한 천명이 아니라 실존적인 요청이다. 첫 번째 계명은 후속 계명들의 초석이요 근간으로, 구원받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수립하는 가늠자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독점적인 관계를 요구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배타적 관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출애굽의 구원자로 드러내시려 하신다. 하나님의 요구는 결국 우리를 위한 구원의 은총을 계속적으로 확장시키시려는 호의이다. 우리는 삶의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에게 독점적 사랑을 요구하시던 야웨 하나님의 말씀은 부활절 후에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너는 이 모든 것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17)라고 질문하셨던 예수님의 말씀과 좋은 평행을 이룬다. 신앙공동체로서 교회는 감사와 보은의 마음으로 그분에게 '사랑'과 '충성'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십계명을 두 개의 위대한 '사랑-계명'(love commendments)으로 축약시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마 22:37-40; 막 12:29-31). 물론 많은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이 예수님의 위대한 두 계명들 -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을 마치 십계명의 두 돌판에 상응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첫 네 가지 계명은 하나님 사랑에 관한 계명으로, 나머지 여섯 계명들은 사람 사랑에 관한 계명으로 나누는 구분법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하면 이러한 구분은 그 정당성을 상실한다. 그분에게 있어서 '위대한 계명'은 인간 삶의 전체 영역 안에서 인간 마음의 동기이어야 한다. 하나님 사랑의 원리를 단순히 종교나 예배의 영역에 국한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주되심과 포괄적 왕권을 정당하게 취급하지 못하는 일이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체결된 언약 질서의 근간이요 기초인 야웨 하나님의 '주(主)되심'(Lordship)은 그의 백성 삶 전체를 요구하시고 계신다. 화란의 구약신학자 프리젠(Th. C. Vriezen)이 명쾌하게 지적하듯이, "십계명의 중요한 의미는 모든 삶의 영역을 야웨의 전적인 다스림 아래 놓았다는 점에 있다." 적어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는 성(聖)과 속(俗)의 구별이 없어진다. 예수님의 위대한 두 계명은 인간 삶을 서로 분리되는 두개의 영역으로 나누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상호보완적인(소위, 세속과 비세속의 영역) 삶 전체(whole life)를 언약의 주되신 하나님 앞에서 책임성 있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 어느 때보다 성결(거룩)한 삶이 요구되는 이 때에, 그리고 그 어느 시기보다도 정의로운 사회가 요구되는 이 때에,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고(출 19:6; 신 14:2; 벧전 2:9), 이 세상 안에 의(義)의 나무로 심기운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우주적이다. 언약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인들과 예배 공동체로서 교회들은 하나님의 샬롬이 온전히 실현될 때까지 그들이 율법의 수호자요 수행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은 십계명을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삶이다. 아름답고 의미있는 '삶의 음악'을 만들기를 원하는가? 십계명을 연주하시오! 당신은 결코 당신의 청중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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