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의 전야이자 여명기에 해당하는 현금 인간의 전 생활 영역 안에서의 다원주의에 대한 각성이 돌이킬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지구촌으로 좁혀진 세계 안에서 인류는 한편으로는 상호 의존성과 유대성을, 또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종교‧사회‧정치‧경제 등의 여러 생활차원에서 다원성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인류는 상이한 이념체계 및 사회체제와 가치관의 갈등과 대립, 혼합과 조화 등을 겪으며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새로운 천년기를 바야흐로 맞으려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학계와 사상계 안에서도 '80년대 이래 다원주의가 열띈 논쟁을 야기시키는 쟁점으로 부상한 것도 이러한 시대상황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차제에, 우리는 여기서 다원주의의 실상을 일반적으로 밝혀 보려고 한다. 먼저, 다원주의의 개념규정과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 근거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다음에, 현금의 역사적 대전환기에 처한 세계 안에서 더 이상 극복할 수 없이 보편화된 다원주의 현상 일반을 간략히 일별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피력된 다원주의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서술한다. 끝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관점에서 바람직하게 나타나는 다원주의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한다.
I. 다원론의 개념과 근거
모든 인간들이 하나의 세계 안에서 생활하면서 궁극적인 하나의 보편 진리를 올바로 알고자 추구하는 데에서 하나의 보편적 세계관과 인생관이 있어야만 하는데, 실제로는 상이하고 상반되기까지한 다수의 생활양식과 사상체계들이 존재한다. 생활양식과 사상체계의 다원성에 직면하여 다원주의의 개념 규정과 근거를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 차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1. 다원론의 개념규정
다원론(多元論, Pluralismus)은 철학적으로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실재가 하나의 유일원리로부터 도출되지 않고, 서로 근거가 될 수 없는 여러 층의 존재근거로부터 생겨났다고 파악하는 입장이다. 다원론은 사람이나 사물 등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실재들 사이에 실제적인 다수성이 있음을 말할 뿐아니라, 이 모든 실재를 포괄하는 상위질서의 단일 원리를 배제하면서 근본적으로 질적 상위성을 지니는 다수의 차원들과 질서들이 있다는 것을 주창한다. 이를테면, 다원론은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실재들을 설명하기 위해 다수의 본질을 수용한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세계 안에서 사람이나 사물들을 통하여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참신함과 기회를 실질적으로 부정하는 관념주의적 일원론(一元論, Monismus)을 배격하면서 철학적 다원론을 주창하였다. 그는 일원론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세계가 하나의 원리로부터 설명된다고 보지 않고 서로 상관없는 수많은 독자적 영역들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제임스에게 있어 세계는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다수의 세계이다. 실재 세계 안에서 무한한 양의 제약적인 사실과 관계, 그리고 체계들이 지속적으로 유동적인 상태에 처해 있으며, 항시 새로운 관계와 구조들이 형성되고 있는데, 이들을 인식하는 데 확정된 범주와 기준들이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전망적 정향점들만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유동상태에 머물고 있는 세계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능력들을 본연의 의미에서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되어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들어설 공간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현실 세계가 무생물과 식물 및 동물 등 다종다양한 수다한 실재들로 구성되어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생물학, 고고학, 천문학 인류학, 역사학, 물리학과 화학등 제과학의 경이적 발달에 의거 우주와 세계의 역사가 지난 세기까지 알려진 기간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장구하다는 사실을 인류가 인지하게 되면서 우주와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하나의 유일한 원천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하기 보다는, 이들이 구조적으로 서로 통하지 않는 다수의 원천들로부터 유래하여서 이들을 지배할 수 있는 하나의 체계 안에 환원시키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시인하는 입장이 많은 계층의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수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실재의 다원성은 엄연한 역사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세계 안에서 점차 광범하게 확산되는 다원주의는 실재의 다수성과 상위성을 인정할뿐만 아니라, 이에서 더 나아가 이를 환영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여기에 다원주의의 규범적 내용이 담겨있다. 지구촌으로 변모한 세계 안에서 다양한 문화와 역사적 배경을 지닌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다원주의를 불가항력적으로 밀어닥친 운명적 현상으로서 체념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상이한 기능을 수행하는 가운데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자유롭게 계발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로소 동등하게 향유하는 호기로 대해야 한다는 입장이 형성된 것이다.
2. 실재이해의 다원론적 근거
실재이해의 다원성이 인간의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 구조에 의거하여 형성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실재이해의 다원성이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에 기인한다고 본다.
인간은 자신의 원의나 인식과는 상관없이 세계 안에서 피투되어 존재한다. 그는 다른 인간들과 함께 사회 공동체와 자연 세계 한가운데서 살고 있다. 인간이 이렇게 세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현존하고 있음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기정 사실이다. 자신의 원의와 무관하게 특수한 시공간에로의 피투됨으로써 인간 존재가 근본적으로 제약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세계 안에서의 인간 존재는 그 자신의 실존적 자기 성취보다 앞서 주어져 있는 기본 소여성이다. 그러나 인간은 세계 안에 피투(被投)되어 있는 유한한 존재이면서도 그에게 주어진 자연 세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이 피투된 일차적 자연 세계 안에서 단순히 현전(現前)하지 않고, 문화로 드높여진 이차적이고 삼차적 세계 안에서도 현존(現存)하고 있다.
인간의 세계내 현존양식은 영육합일체로서의 그의 존재구조에 상응한다. 인간 안에서 육신과 정신은 서로 매개되어 있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에 환원되어 흡수되지 않고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두 소인이 동시에 작용한다. 인간은 정신적 존재로서 실재 일반에, 즉 타인과 자연사물 그리고 자기 자신에 개방되어 있으며, 이들을 특정 양식으로 모두 수용할 수 있고 여기서 그의 세계초월적인 정신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육신성 때문에 이들 실재들과의 구체적 접촉과 해후를 통해서만 자신의 인간 존재를 구체적으로 실현 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구체적인 자기 실현은 육신의 차원에서 유형적으로 발생한다. 이렇게 육신과 그 동작은 인간 정신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재구조는 본시 상징적(象徵的)이다.
일반적으로 표징(標徵, signum) 또는 상징(象徵, symbolum)이란 여기서 지금 가시적으로 현존하지 않는 하나의 실재를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특정한 표시를 의미한다. 인간 사회에서는 여기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실재를 있다고 합의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한 주권국가를 나타내는 국기나, 거리에 있는 신호등은 바로 그러한 비실재적인 상징들이다. 그런데, 하나의 표지가 자체적으로 표지하는 바를 실제로 현존케 할 경우에 ‘실질표징’(實質標徵, signum reale)이라고 일컬어진다. 인간 존재구조의 상징성이란 바로 ‘실질 표징’을 의미한다. 인간의 육신과 그 개별 동작은 비가시적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현존하는 정신실재(實在)의 충만한 표지라는 의미에서 ‘실질표징’이다. “몸은 영혼의 현현인데, 영혼은 그 몸을 통하여 그리고 그 몸 안에서 자기자신의 본질을 실현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표지는 표시되는 것을 작용시키는 양식(樣式)이 됨으로써 표시된 것에 대한 하나의 원인이다.”
인간 정신은 육신 안에서 그리고 육신을 통하여 존재에 이른다. 인간 존재의 자기 실현 속에서 발생하는 상징적 표현은 이전에 먼저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것을 단순히 표시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정신은 육신과 불가분리적으로 일치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적인 모든 실재는 필연적으로 육신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게 마련이다. 여기서 육신적 표현(表現)과 정신의 현실화(現實化)는 서로를 동반하고 보완한다. 육신의 유형적 표현은 정신행위로 하여금 자신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질료적 지원을 하고, 정신작용은 유형적 표현에 외형과 의의를 부여한다. 그래서 유형적 양식으로 성취되는 인간의 구체적인 활동은 그 표현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이미 별도로 존재하고 있는 다른 정신적 실재를 단순히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지금(hic et nunc) 성취되는 구체적인 활동이 바로 인간 정신존재의 실재 자체인 것이다.
하지만,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육신의 표현으로 정신의 실상이 일회적으로 완전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않된다. 인간 개인의 육신의 표현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그때마다 정신 실재도 달리 드러나는 때문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육신적 제약성과 정신적 성취력은 인간 존재의 실현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육신과 영혼은 긴밀한 상관 관계 속에서 하나의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다.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육합일체인 인간의 현존은 개방된 세계 안에서의 개방된 현존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인간은 세계 안에서 단독자로서가 아니라 다른 인간들과 사회공동체, 그리고 자연 세계 한가운데에서 생활하는 때문이다. 인간은 생활공간으로서의 세계, 즉 인간으로서 생활하고 존속할 수 있기 위해 사용하고 조형하는 자연사물의 세계와 자신의 동료인간사회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인간은 누구나 공동체 안에서 출생하여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그 안에서 완성을 향해 성장한다. 따라서 인간은 소속된 사회의 언어를 배우고 관습을 익히며, 정신과 문화활동에 참여하게 마련이다. 이 모든 요인들, 각기 다양한 문화, 종교, 사회, 경제, 정치, 군사, 지리, 심리적 요인들이 개별인간의 현존을 결정적으로 규정한다. 개별 인간의 삶이 이와 같이 다양한 외적 관련성 안에서 영위되는 가운데 바로 인간의 인격적이고 내면적인 삶인 정신적 삶이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적 생성과 성장 그리고 성숙과 계발은 외적 주변환경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인간은 주변세계와 관련을 맺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가운데 이 외부세계를 자기 의식(意識)의 내면성 안으로 수용하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타자와의 관련 속에서만, 즉 타자에게로 나아가 자신 안에서 타자를 수용하는 가운데서만 자아를 실현하고 풍요하게 할 수 있다. 인간은 인식하면서뿐만 아니라, 원하고 행동하면서 외부 실재와 관련을 맺는다. 인간은 외부 실재를 규정하고 조형하면서 이에 개입한다. 인간은 자신이 세계 안에서 이룩한 작품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계획과 목표와 결의들을 실현하고 대상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 정신의 내면이 세계의 내면 속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인간의 작품, 구현된 표현, 그리고 의미의 표징으로 서술된다. 이리하여 1차적 자연사물적 세계가, 인간에 의하여 조형되고 새로운 의미로 채워지게 되는 2차 내지 3차적 문화적 세계가 된다. 같은 종에 속하는 동물들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유형의 존재와 행동 양식을 보여주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십인십색(十人十色)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며, 지적 수준과 인격의 성숙도에서 다양하기 그지없는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유일무이한 인격성을 지니며 원천적 삶을 주어진 사회 안에서 자율적으로 살아간다. 인간은 개인으로나 집단으로서 스스로 의미있게 나타나는 특정한 가치 확신과 행동 견본을 계발하고 삶의 목표와 도정과 관련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 그런데 인간의 자기 규정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조건의 제약적 요소들 때문에 그 내용과 형식들 역시 역사적으로 제약되어 있고, 아무도 제약되지 않는 진리 요청을 내세울 수 없기 때문에 다수의 상이한 확신과 행동 양식들이 인류의 역사 안에서 생성된 것이다.
2. 실재의 다원성에 대한 상이한 견해는 인간의 인식론적 구조와 상관한다고 볼 것이다. 실재이해의 다원주의적 현상은 진리를 인식하는 인간존재의 역사성에 기인한다. 진리가 다른 시대와 장소, 그리고 문화와 사회에 속한 인간들에게 상이하게 파악된다는 진리의 역사성에 대한 통찰은 19세기 이래 이상 취소할 수 없이 광범하게 확산되어 있다. 진리의 역사성은 특히 진리의 언어연관성과의 관계제시를 통해서 적절히 드러난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가 진리를 ‘존재의 개현’(Lichtung des Seins)로 규정하고 이 존재가 인간에게 언어와 역사성 안에서 드러난다고 갈파한 이래 언어가 오늘날 진리 자체가 인간에게 다가오는 ‘틀’로 인지되고 있다.
인간은 출생과 함께 일회적으로 완성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 다른 실재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성취하는 현존재로서 살아간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성취하기 위하여 본질적으로 의존하는 다른 실재와의 관계가 언어를 중재로하여 형성된다. 일차적으로, 인간은 세계 안에서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테면, 세상에 새로 태어난 아기는 제일 먼저 어머니와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이어서 다른 가족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게 된다. 아기는 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언어를 배워 익히며, 언어를 통하여 부모를 인식하고 세계를 인식하게 되고 자기 혼자서는 알거나 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 안에서 만나는 다른 실재들을 인식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존재의 성취가 애당초부터 언어에 본질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사실상, 인간의 모든 체험이나 인식 행위는 언어의 중재 안에서 성취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언어는 통교 일반이나 학문의 단순한 도구에 그치지 않고 인간존재와 원천적으로 유대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존재의 표출이면서, 인간을 넘어서는 ‘무엇’인가의 표출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고, 언어가 인간존재와 함께 인간에게 소여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마땅하다. 언어는 인간들에 의하여 인식될 수 있는 하나의 보편적 문법을 지닌다. 언어는 통교의 매체로서 구문론적 법규로 이루어진 하나의 표징체계라고 규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언어는 구체적으로 선세대(先世代)로부터 전승된 것으로서 수백년 또는 수천년의 오랜 세월을 흘러온 한 사회의 기억이라 할 수 있다. 언어 속에서 개별 인간은 선세대의 실재이해가 함께 담겨 있는 실재이해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동시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선세대 인간들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언어는 인간의 모든 실재이해의 초험적 전제(超驗的 前提)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언어가 유한적이고 역사적이기는 하지만 순전히 임의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고 오랜 세월에 걸쳐 생활한 수다한 인간들의 상호 주관적 통교와 논증을 가능케 한 관계형식(關係形式)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언어의 구조에 상관없이 언어 안에는 순전히 언어적인 것 이상의 실재가 표출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理性) 외부에서 인식될 수 있는 실재가 따로 존재하지 안듯이, 언어 외부에서 인식될 수 있는 실재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이성이 무전제적이 아니라, 실재이해의 초험적 전제인 언어에 의존하며, 언어처럼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언어의 유한성과 역사성과 함께 인식능력으로서의 이성의 유한성과 역사성이 아울러 소여되어 있는 것이다.
언어는 한편으로 세계 안에 소여되어 있는 것과 상관하면서, 다른 편으로 인간적 주체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보다 깊이 자유의 영역에까지 미친다. 인간존재가 자유롭게 언어로서 표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유로운 언어적 표출 속에서 언어의 역사성이 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의 역사성과 함께 진리의 역사성 역시 아울러 개현된다.
언어가 특정 실재에 관한 진술을 하지만, 이 진술이 해당 실재를 모든 관점에서 완전무결하게 언어화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해당 실재의 진리 역시 특정한 관점에서 부분적으로만 개현되고 따라서 역사적으로 이해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이성과 언어의 역사성은 진리를 이해하는 데에서 진리 자체의 구조와 상관하기보다 진리이해의 양식(樣式)과 상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진리는 실재와 지성의 합치이다’(Veritas est adaequatio rei et intellectus)라는 고전적 진리 규정은 여전히 타당하다. 하나의 실재가 이성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이해되는 속에서 이 실재의 진리가 올바로 이해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무릇, 진리구조는 두 개의 구별되는 실재, 즉 자신을 현시하는 실재와 이를 이해하려는 인간 이성 사이의 관계를 내포한다. 이 관계는 이성과 언어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관계가 관계로서 의미있으려면, 실재 일반은 구별(區別)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관점에서 개현(開顯)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재 일반은 개현 가능성을 자체적으로 지니고 있다. 실재는 항상 이미 그리고 필연적으로 개현되어 있으며, 이성과 언어의 지평 안으로 들어와 있다. 실재 일반이 언어에 의하여 포착되며, 언어 안에 수용되고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실재의 인식이 이루어지는 일차적 장(場)은 ‘판단’(判斷)이다. 이른바 ‘인식적 진리’의 장이 판단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개현하는 실재를 대하고 “그것은 이러하고 저러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하나의 판단이 특정 실재에 관하여 “그것은 이러하고 다르지 않다”는 진술을 할 때에 타당성요청, 즉 진리 요청을 내세우게 된다. 한 진술이 참이고, 그와 반대되는 진술은 그릇되다는 판단은 절대적 타당성 요청을 내세우는 셈이다. 자신을 현시하는 실재를 대하고 “그것은 이러하고 다르지 않다”는 판단을 인간이 내리게 될 때에, 이 판단은 절대적으로 타당하다는 요청을 내세운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이 오류의 가능성을 전연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판단의 형식적 절대성은 판단 내용의 정당성이나 인식의 완전성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인식능력은 내용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제약되어 있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로서 감관적 감지능력에 의존하면서 추상적으로서만, 즉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을 일반적인 ‘무엇’으로서 인식하고 추론적으로만 사유할 수 있을 뿐이고, 결코 한 실재의 전모가 아니라, 항상 한정된 국면만을 파악하고 언어적으로 진술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개별 판단들처럼 가능한 모든 판단들의 총계도 결코 한 실재의 완전한 실상 파악에 이르지는 못한다.
인간은 실재의 한정된 국면만을, 실재의 부분진리들만을 인식하고 진술할 수 있을 뿐이다. 한 실재의 어떠한 국면이 시야에 나타나는가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자연환경등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제약되게 마련이다. 이처럼 실재의 인식 내지는 이해 일반이 국면적으로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을 현시하는 실재에 대한 인간의 인식 일반이 역사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인간을 위시한 개별 실재에 관한 구체적 내용의 지식이 인식자의 입지와 환경에 따라 달리 파악되고 표현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대단히 많은 국면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일상적이고 학문적 영역에서 이들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개별 사물들과 실재 전체에 관하여, 시간의 역사적 변천이나 역사적 동시성 안에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면서 다원주의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II. 다원주의의 보편적 상황과 교회의 입장
다원주의의 현금의 세계 안에서 보편화된 현상을 일별하고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비추어 알아 보기로 한다.
1. 현대 세계의 다원주의 보편화 현상
현금, 인류는 다원주의가 거의 보편화된 세계를 살고 있다. 문화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 차원에서의 다원주의의 실상을 간략히 일별하고 종교다원주의의 입장을 서술하고 신학적 다원주의의 성격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지난 세기까지 존속되어온 전통사회는 근본적으로 실재의 다원성을 용납하지 않는 폐쇄적 획일적 사회였다. 거기서는 하나의 지배적인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가치관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를테면, 500여년간 지속된 조선왕조 시대에는 유교가 국가의 통치 이념이자 종교로서 사회 안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 시대에도 불교나 무교와 같은 다른 종교전통들이 온전히 멸절되지는 않았지만, 유교적 통치이념으로부터 배척받고 멸시되거나 기껏해야 묵인되는 사회의 저변 내지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러한 전통사회에서 하나의 지배적 통치이념 체계는 거의 도전받지 않은채 절대적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통과 통신수단의 경이적인 발달로 말미암아 일일생활권으로 변모한 현대 세계 안에서 어느 누구도 외래 문물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고도와 같은 폐쇄된 사회 안에서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과거부터 친근한 인접 문화와 사상의 영향뿐만 아니라, 소원하고 이질적이었던 과학기술 문물과 정신사조들이 삶 속으로 침투하며, 실재의 모든 영역과 관련된 방대한 분량의 새로운 정보들이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현실 세계 속에서 전통문화와 사회질서가 근본으로부터 동요하고 새로운 사회풍토가 형성되는 상황이 야기되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지구상의 어떠한 개별문화권 안에서도 모든 구성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고 추구하려는 단일적인 이상적 목표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단일적이고 폐쇄된 사회질서를 해체하고 고유한 이해관계와 확신들과 행동양식들을 지닌 문화, 종교, 가치, 사회, 정치의 다원주의 등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원주의는 과거의 정적이고 폐쇄적 사회질서를 탈피하여 약동적이고 개방된 질서를 이룩한 현대 세계의 시대적 특징이라고 지칭될 수 있다.
2. 문화적 다원주의는 하나의 사회 안에 둘 이상의 문화의 존재를 포함하거나, 하나의 주도적인 문화 안에 둘 이상의 하급문화들이 존재하는 것을 포함한다. 문화적 다원주의의 중심문제는 상이한 문화 집단들이 그들의 특유한 생활양식을 보전할 수 있는 권리이다. 오늘날 하나의 사회가 문화적으로 반드시 단일적이어야 한다고 주창되지 않으며, 문화의 상이성을 허용하고 격려할 수 있다는 입장이 보편화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하면 상이한 문화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사회적 다원주의는 동일한 문화에 속한 사람들의 집단안에 분리된 구조의 기초가 되는 상이한 사회 신분이나 종교, 경제적 위치와 교육 수준이 있는 경우를 뜻한다. 사회적 다원주의에서 관건이 되는 핵심문제는 사회적 상위성의 기초가 되는 차별이다. 한 사회 안에서 특권적 집단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더 이상 독점하지 않고 다른 집단들이 이에 접근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 안에서 이해가 상충되는 집단들은 작업분업적 구조를 통하여 상호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의 집단 영역 안에서조차 상이한 이해관계와 확신들은 제각기 인정을 받으려 한다. 그런가하면 이들이 대외적으로는 다른 집단들의 이해관계나 확신들과 경쟁관계에 있다. 인간들에게서 갈등의 해소가 본능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집단적인 자기파멸의 위험도 전혀 없지 않다. 위험을 모면하기 위하여 갈등들을 인간적이고 정의롭게 처리하는 일반적인 구속력이 요청된다. 때문에 사회 안에서 절대적 다원주의는 현실적으로 결코 바람직하지도 실현가능하지도 않다.
정치적 다원주의는 현대 세계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다수의 정치적 집단들이 제도화된 결정과정에 이르기 위한 기본합의의 기반에 입각하여 영향력과 타당성 확대를 둘러싸고 자웅을 겨룬다. 여기서 상이한 세력들이, 이를테면 노동조합과 경제인연합회, 학문기관과 종교와 정당, 그리고 여러 시민운동 단체들이 내세우는 주장과 수행하는 기능이 상이한 가운데에서도 근본적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도정 위에서 정치적 과정에 개입하는 데 있어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 정치적 다원주의 사회 안에서는 정치적 결정들이 모든 정치적 논란보다 선행하고 모든 참가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의 일반적인 규정으로보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여러 집단들이 상호 조정을 통하여 다수결에 의한 합의에로 이끄는 새로운 연합을 지향하여 이루어진다. 정치적 다원주의는 두가지 전제들에 입각하여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한편으로 모든 정치적 집단들이 공적 토론과 정치적 의지 형성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한다. 다른 한편으로 공동선이 동등한 집단들의 이해관계의 조정을 통하여 실현된다. 상이한 이해관계를 지니는 개인이나 사회집단들의 다수성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를 보장한다. 정치적 다원주의적 사회는 단일적 사회보다 자유로우며 법치국가적 민주주의의 주요한 구조요소임에 틀림없다. 개인적 자유권, 정치적 참여권, 그리고 사회적이고 문화적 권리들로서의 인간 권리들은 근본적으로 동등한 인격체들의 상호 인정의 조건들과 표현들이다. 그때문에 이러한 권리들은 인간 각자에게 불가침적으로 해당된다.
3. 다원주의는 종교 안에서, 광범한 종교 전통들 안에서 존재하는 역사적 사실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으며 많은 종교적 언어들이 있다. 한국 내지 아시아의 종교 현실은 애당초부터 다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80년대 이래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신학의 종교다원주의는 단순히 여러 종교들이 현실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문화적이고 역사적 상황을 지칭하는 가치중립적 개념으로 머물지 않고, 종교적 다원성을 극복해야 할 장애로서 파악하지 않고 하느님과 실재 일반의 진리를 보다 깊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호기로 간주하면서 특정한 개별 종교가 배타적으로 보편적 진리체계를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입장으로서 그리스도교계에 충격을 자아내고 있다.
존 힉(John Hick)이나, 폴 니터(Paul F. Knitter), 스텐리 사마르타(Stanley J. Samartha)와 레이몬드 파니카(Raimond Panikkar) 등의 신학자들은 신학 ‘패러다임’(paradigm)의 전환을 요청하면서 전통적이거나 현대 신학에서의 ‘그리스도교 중심적이고 배타적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 패러다임’으로부터 ‘신(神) 중심적 신학 패러다임’에로의 전환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언급되는 ‘패러다임’ 용어는 미국 물리학자이자 과학사학자 토마스 쿤(Thomas Kuhn, 1912)이 1962년에 간행된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안에서 급변하는 과학의 발전을 혁명적 과정으로 해명하고자 시도하는 과정에서 핵심개념으로 사용된 바 있다. 그는 정확한 의미를 둘러싸고 학계에서 많은 논란을 야기시킨 ‘패러다임’ 개념을 그의 저서 초판 발간 후 7년째 되던 해에 발표한 “후기(後記)-1969”(Postscriptum 1969)에서 ‘일정한 공동체의 성원들에 의해서 공유되는 믿음, 가치, 기법 등의 전체 구성체’(an entire constellation of beliefs, values, techniques, and so on shared by the members of a given community)라는 포괄적 의미로 정의하고 있다. 쿤의 패러다임론에 따르면 결정적으로 새로운 과학의 가설(假說)이나 이론(理論)들은 단순히 재래에 실험적 검증경위를 통해서라기 보다는 기왕에 과학계에서 통용되어온 설명모델 내지 패러다임들이 새로운 설명모델 내지 패러다임에로 전이(轉移, transference)를 이룩함으로써 형성된다고 한다.
영국 신학자 존 힉은 쿤과 같은 의미에서 신학 패러다임의 ‘코페르니크스적 전환’을 제창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ios, * 70년경)의 지구중심적 천동설(天動說)에서 코페르니쿠스(Nikolaus Kopernikus, 1473-1543)의 태양중심적 지동설(地動說)에로의 전환을 비유로 들어 전개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는 다른 혹성들이 지구의 주위를 공전하여서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으로 간주되었던 것처럼, 이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제종교세계의 중심으로 간주되어서 타종교들이 그리스도교의 주위를 맴돌면서 그리스도교와의 원근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의해 태양계의 우주 중심에 있는 것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지구중심적 우주관이 포기되었던 것처럼, 신학에서도 그리스도교 중심적 입장으로부터 신(태양) 중심적 신학에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힉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변선환(邊鮮煥, 1927-1995) 박사가 1984년 이래 신학적 종교다원주의의 입장을 피력하면서 아시아적 종교성과 절대빈곤의 문제는 서구 신학의 기존 입장으로는 해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신학 패러다임의 새로운 코페르니크스적 전환이 요청된다고 보았다. “아시아의 기독교는 과감하게 서구신학이라는 프토레메우스적 시각(지구중심)에서 아시아 신학의 관점(태양중심)에로의 급격한 전환이 요청되는 전환기를 살고 있다. 우리는 아주 새로운 신학의 새 패러다임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변 박사는 새로운 종교다원주의의 한국적 상황 안에서 벽에 부딛힌 서구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힉이나, 니터, 그리고 파니카와 사마르타 등과 같은 신학자들처럼 ‘신중심적 비규범적 그리스도론’이라고 부른다. 변 박사와 입장을 함께하는 파니카는 60년대에는 그리스도중심적 포괄적 성취론의 입장을 견지했었다. 즉, 비그리스도교의 종교전통 안에서 발견되는 구원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충만에 이른 구원진리의 사전 준비단계에 머문다는 입장이 그에게서 피력되었다. 그러나 파니카는 1980년대에 이르러 신중심적 종교다원주의의 입장으로 수정하면서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보편성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다원주의와 역사의식의 실재를 통하여 변화된 세계 안에서 재해석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면서 구원의 보편적 상징으로서의 그리스도가 객관화될 수 없고, 따라서 나자렛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 안에 한정될 수 없다고 본다. 이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의 궁극적 형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보편적 그리스도가 가능한 모든 대리인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고 실현하면서 세계 종교들을 포용한다고 본다. 이제 이들에게서 종교간의 관계는 ‘동화(assimilation)의 관계도 대체(substitution)의 관계도 아니고 (후자는 ‘개종’을 잘못 표현한 것이다), 서로가 풍요로워지는 관계(mutual fecundation)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러한 통찰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배타적 절대 규범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변 박사는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피력한 때문에, 1992년에 소속 대한 기독교 감리교 교단으로부터 출교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3. 신학적 종교다원주의의 등장에서 확인되듯이 신학적 다원주의도 오늘날 현실적으로 넘어설 수 없는 기정 사실이 되었다. 신학적 다원주의란 신학적 사유의 전제, 출발점, 이해지평, 표상모델들과 명제들이 매우 상이하여 간단히 양자택일에로 이끌려져 정확하게 평가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처지를 뜻한다.
과거에도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상이한 입장을 견지하는 학파와 노선들이 없지 않았기에 신학적 다원주의가 존재하였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런데 상이한 학파나 노선들은 문화적으로 동일한 서구 세계에서 상이한 언어로 분리되어 있었다. 여기서 확인되는 언어상의 상위성(相違性)은 교리적 정식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개신교회의 ‘성서 홀로’(sola Scriptura)와 ‘신앙 홀로’(sola fide) 언어와 가톨릭 교회의 ‘성서와 성전’, 그리고 교회의 교도권 교리 언어 사이에 차이가 있다. 교리상 공통적 전통 안에서도 성서 영감 교리에 대한 이해에서 상이한 입장, 이를테면 프로테스탄트의 자유주의대 보수주의 관계나 로마나 독일 튀빙겐, 정치신학 학파등 여러 가톨릭 신학 학파들 사이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서 대립되는 명제들은 서로 대치하며 경쟁하였지만, 전제와 개념, 문제의 방향들이 서구 그리스도교계라는 문화적 공통 지평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입장을 달리하는 학파와 노선들은 각기 상대방의 입장을 알며, 이해한 전제로부터 출발하면서 상대방에게 다른 입장을 피력하는 까닭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현금의 신학적 다원주의는 이전의 서구신학적 다원주의와는 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새로운 유형의 다원주의는 세계적 교회의 다수의 지역 교회 안에서 형성된 상이한 신학적 입장들 사이에 이전과 같은 공통의 이해지평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에 기인한다. 어느 한 편의 입장이 다른 상대편에게 지극히 소원하며, 아울러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출발점으로부터 시작하고 대화자료를 제공함으로써 대화가 종결에 이르지 않고 중간에 단절되기에 이르고 만다. 또한 신학이 작업해야 할 자료 역시 과거에 비해 방대하게 증가하여서 개별 신학자가 홀로 이를 처리할 수 없으며, 당사자도 이를 알고 있다. 신학의 개별 영역의 방법들도 복잡하게 되어서 어느 한 개인 신학자가 이 모두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신학자가 고려해야 하는 철학이 다원적이 되어서 철학 자체를 지배하지 못하고 특정한 철학에 의존하여 작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날 신학자는 철학이외에 다른 학문들, 이를테면 역사적 정신과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사회과학과도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대화에 임해야 하는데, 한 신학자가 이를 온전히 수행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교파의 신학입장에 대해서도 간단히 긍정과 부정을 말하기가 불가능한 처지에 이르렀다. 신학적 전선들은 오늘날 부분적으로 교파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있는 실정이다. 요컨대 신학적 사유의 전제와 원리, 방법, 철학, 과학의 공통 세계가 소멸되고 이러한 요소들의 급격히 상이한 복합물이 점진적으로 형성되고 상이한 의식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면서 신학의 다원주의가 돌이킬 수 없게 정착하기에 이른 것이다.
2. 가톨릭 교회의 입장
다원주의 현상에 대한 가톨릭 교회는 미묘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는 비가톨릭적이고 비그리스도교적 사상과 문화체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교황 요한 23세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는 다원주의와 민주주의를 긍정하는 결정적 돌파를 감행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1.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반포된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Gaudium et spes)과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진리가 다원주의의 원리와 내용적으로 가깝다는 것이 제시되고 교회와 신앙인들이 다원주의를 존중할뿐만 아니라, 이를 수호하고 실현하기 위해 투신해야하는 책무를 지닌다는 입장이 천명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가톨릭 교회가 보여주는 다원주의에 대한 우호적 자세는 20세기 후반 서방 문명의 특징을 이루는 보편화된 문화적 다원주의의 한 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변함없는 진리 요청과 다원주의 기본조건으로서의 사회적 자유와의 관계는 양의적(兩意的)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한편으로는 서구 세계에서에서 다원주의와 민주주의를 준비하고 이끈 결정적 세력들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특히, 인격적 인간관과 교회와 국가 사이의 동열성을 통해서 열린 정신적이고 정치적 자유의 공간은 그리스도교가 서구에서 역사적으로 이룩한 결정적 기여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다원주의의 유일한 결정적 수호세력이라는 주장을 내세울 수는 없다. 그리스도 교회 외부로부터 추구된 계몽주의, 시민 혁명, 정치적 자유주의, 자유적 사회주의의 노선들이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근거가 되는 역사적 요소들이다. 교회의 종교 재판은 그리스도교가 한시적으로 인간 존엄성과 자유, 그리고 다원성에 대적하는 편에 서 있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리스도교의 일치의 와해가 사회 체계와 정치적 조직의 최종 기준으로서 개인의 자유의 원칙을 일반적으로 발휘케 한 터전을 마련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의 비극적 전환점이었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교파간의 전쟁들이 한세기 이상 유럽을 충격에 몰아넣은 후에 개인적 자유의 원칙과 다소간에 진전되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묵인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의 종교적 뿌리에 대해서 독자적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교황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중인 1963년 4월 11일에 만민의 평화가 지상에서 이룩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반포하였다. 그는 모든 시대의 인류가 갈망하는 지상의 평화가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를 존중할 때에 회복될 수 있다는 기본입장을 천명하면서, 평화가 무력에 의한 획일적인 양식으로가 아니라 다양한 개인과 집단들의 불가침적 기본권이 존중되는 상호 연락과 협상들을 통하여 실현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지상에서 평화로운 공동생활이 이루어지기 위해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생존과 품위있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절대적 권리, 윤리적이고 문화적인 가치에 관한 권리, 종교 자유에 관한 권리, 신분 선택의 자유에 관한 권리, 경제적 문제에 속하는 권리, 집회와 결사의 권리, 이주와 이민의 권리, 정치참여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설립된 「국제 연합」(The United Nations)에서 1948년 12월 10일에 승인된 “세계 인권 선언”이 ‘사실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성대하게 인정하고, 각 사람에게 진리를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는 권리, 도덕의 규준들을 따르고, 정의의 의무들을 이행하고, 인간으로서의 품위있는 생활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끝으로 이상 말한 것들과 관련되는 권리들을 시인’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국제 연합」이 ‘인간의 권리들을 효과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시기가 올 것을’ 염원하였다.
요한 23세 교황이 소수 민족들에 대한 처신을 규정하는 본문에서 언어, 문화, 풍습, 경제적 활동의 다원성을 존중하는 자세가 역력하게 감지된다. “소수 민족의 성장과 생활력을 억압하고 잠식시키는 어떤 정책도 정의에 대한 중대한 침범이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두는 바이다... 반면에 국가의 위정자들이 소수 민족의 발전을 위해 효과적으로 그들의 언어, 문화, 풍습, 경제적 활동이나 기럽들에 기려하는 것은 정의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 계급과 여성들의 권리 증진, 약소 민족의 독립쟁취를 통한 지배-종속 관계 지양, 만인의 평등성 인식 확산을 통한 정신적 가치의 의식심화 현상 등을 현대의 특징으로 긍정적으로 보면서, 인간들이 인간성을 초월하고 위격을 갖춘 하느님을 더 잘 인식하는 데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 것다. 요컨대, 그는 온 인류가 진리와 정의, 사랑과 자유에 의거하여 세계 평화를 위해 상호 의존하고 협조하려는 분위기 안에서 ‘시대의 징표’의 특징을 읽고 이를 하느님의 섭리의 결실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 요한 23세의 평화 회칙의 정신을 반영하는 1965년 12월 7일에 반포된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과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을 통해서 다원주의적 질서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은 각 인간의 동등한 정신적이고 사회적 권리, 특히 양심과 그 행위의 자유, 바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인류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포함하는 인간의 존엄성으로부터 다원주의적 질서가 요청된다고 밝힌다. “본 바티칸 공의회는 인간이 종교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선언한다. 이러한 자유는, 각 사람이 개인이나 사회적 단체나 그밖의 온갖 인간적 권력의 강제를 받지 말아야 하며, 그와 같이 종교문제에 있어서도, 그 누구도 자기의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며, 또 사적 혹은 공적으로, 단독이나 혹은 단체의 일원으로 정당한 범위내에서 자기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데 방해를 받지 않음에 있다. 그 위에 종교자유의 권리는 실로 인격의 존엄성 그 자체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유한한 인간 본성이 진리를 추구하면서도 진리를 궁극적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진리 인식이 오류의 가능성을 포함하여 관점들의 다원성을 지니는 사실로부터 다원주의가 생겨날 소지가 자연스레 소여되어 있는 것이다.
“현대 세계 내에서의 사목헌장”은 문화적 다원주의 원리가 교회의 기본 이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현대 세계 안에서 “여러 민족과 사회 집단 사이의 교류가 증대됨으로써 여러 형태의 문화재가 모든 사람과 각 사람에게 널리 제공되며, 이렇게 보다 보편적인 문화 형태가 마련되어 간다. 이 새로운 문화 형태가 여러 문화의 특색을 보전하면 할수록 인류의 일치는 더욱 촉진되고 표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는 사회학적이고 민속적 의미에서 상이한 인간 공동체들의 본연의 자산으로 파악되어 있다. 헌장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다른 장소와 사람들에게 적합한 양식으로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문화의 빈번한 교류가 각 공동체의 생활을 혼란시키거나 선조들의 예지를 파괴하거나 각 민족의 특성을 위태롭게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 헌장은 신앙과 문화의 관계에 있어 결정적 입장을 천명한 역사적 사실을 대변한다. 초기 교회 안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히브리 생활양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 쟁점은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명백히 해결되었지만 역사를 통해서 교회를 괴롭혀 온 문제이다(사도 15,1-35 참조).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 양식을 하느님의 의지와 계시와 일치하려는 강한 경향을 지닌다.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서 선교사들이 신앙에 대한 그들 자신의 특수한 문화적 표현을 다른 사람들에게 부식시키려고 시도한 시기가 없지 않았다.
문화의 중요성과 인격의 동일성과의 깊은 관계에 대한 민감성에 대한 점증하는 이해가 소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 대륙의 여러 지역출신 신앙인 안에서 그들의 문화 배경에 대한 자부심을 각성시켰으며, 특수한 서구적 문화체계를 부식하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이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도래한 탈식민주의의 확산과 함께 강렬하게 일기 시작한 것이다. “사목 헌장”은 이러한 시대의 징표에 부응하는 입장을 천명하고 피선교지역의 고유 풍습과 실천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킨 것이다.
이 헌장에서 그리스도 교회가 특정한 문화와 배타적으로 동일시되지 않고 여러 형태의 문화와 개방된 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입장이 명백히 천명되고 있다. “교회는 모든 시대의 모든 백성들에게 파견되었으므로 어떠한 민족이나 국가에도, 또 어떠한 특수 관습이나 고금의 어떠한 생활 습성에도 불가분의 배타적 관계로 얽매이지는 않는다.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보편적 사명을 의식하고 있으므로 여러 형태의 문화와 접촉할 수 있고 또 그로써 교회와 여러가지 문화가 함께 풍요해진다.” 여기서 이 헌장은 인간 인격 안에서의 하느님의 모상의 충만을 위해서 문화의 발전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 문화를 통하여 인류를 무지의 질곡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기도 한다.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가톨릭 교회는 일관되게 신앙생활을 위한 문화적 다원주의의 중요성을 인정하여서 상이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신자들이 그들의 전통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4년에 반포한 회칙 「당신의 교회」(Ecclesiam Suam)에서 다양한 정신적 윤리적 가치들을 존중하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 우리는 다양한 비그리스도교들의 정신적, 윤리적 가치들을 존중하며 인정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교적 자유, 인류의 형제애, 가르침과 양성, 사회복지와 시민적 질서 등의 영역 안에서 공동적 이상을 촉진시키고 수호하는데 있어 그들과 함께 협력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나누려고 하는 이 위대한 이상들에 대해서 우리는 대화를 가질 수 있고 진지한 상호존중 안에서 우리의 제안이 신의로 받아들여질 때마다, 그것을 위한 기회를 반드시 제공하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발표한 아시아 민족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세계적 종교들의 요람인 아시아에서 종교 상호간의 대화가 증대되기를 바라는 열망을 피력하면서 비그리스도교 문화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모든 종교들과의 접촉과 대화 안으로 들어가야 할 깊은 필요성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종교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많은 윤리적 가치들과 아울러 전체 사회의 전통과 문화들을 그토록 깊게 각인시키는 영적인 활력에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각 인간의 그지없이 소중한 존엄성을 믿는 선의의 모든 남녀와 손을 서로 맞잡을 것입니다... 아시아는 영성을 매우 존중하며 종교적 감성이 깊고 천부적인 대륙입니다. 이러한 귀중한 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만인의 공동과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4년 11월 10일 반포한 교서 「제삼천년기」(Tertio Millennio Adveniente)에서 교회의 많은 성원들이 인간 존재의 다원성을 부인하고 자행한 역사적 과실에 대한 진실된 참회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음은 주목할만하다. “교회의 자녀들이 참회의 정신으로 되돌아보아야 할 역사의 또 다른 고통스러운 장은, 특히 어떤 세기들에서, 진리에 봉사한다는 미명아래 불관용과 폭력 사용마저 묵인하였던 부분입니다.”
III. 실재의 다원성과 보편적 일치의 중재 유형
개별 실재의 현실적 다원성과 보편적 실재이신 하느님 안에서의 일치와 완성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관점에서 지지되고 장려되며, 촉구되어야 할 입장의 성격을 분명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 신앙은 삼위일체적 한 분 하느님과 그분의 세계창조와 완성을 기본진리로 믿는 때문에, 실재 일반의 상호 연관성을 일체 부인하여 결과적으로 세계의 혼돈상태를 지향하는 다원주의와는 결코 부합될 수 없다.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정립될 수 있는 입장은 실재 일반의 조화와 일치를 일체 부인하는 절대적 다원주의와 폐쇄된 체계로서의 절대적 일원론의 양 극단 사이에 위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중재질서는 개체이거나 집단으로서의 개별 실재의 자유와 평등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을 통한 개방적 질서의 양식으로 존재할 것이다.
먼저, 소극적 입장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입장에서 동일시할 수 없는 일원론의 입장과 그 문제성을 제시하고 이어서 적극적 입장에서 추구되어야 할 질서유형을 삼위일체적 하느님 신앙에 의거 모색하기로 한다.
1. 절대적 일원론의 문제성
그리스도 신앙은 한분 하느님에 의한 세계 창조와 완성을 고백하면서도 사상사에서 등장한 철학적 일원론의 주장과는 거리를 지닌다. 철학적 일원론(一元論, Monismus)은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 볼프(Ch. Wolff, 1679-1754)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서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이 수량적으로 다수이고 질적으로 상위성을 지니는 가운데에서도 모두 하나의 유일무이한 무한한 포괄적 원천으로부터 유래되고 규정된다고 파악하는 철학적 입장이다. 그런데 일원론은 고전적이거나 약동적 일원론으로 구별된다.
1. 고전적 일원론은 다종 다양한 다수의 존재자들이 오직 하나의 절대적 원리로부터 생겨난다고 본다. 이러한 일원론이 고대 그리스 철인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기원전 540-470)에게서 피력된다. 그는 존재하는 만물을 근본적으로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동요하지 않는 ‘하나’(一者: εν, hen)라고 파악하였다.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수다한 존재자들이 ‘하나’로서 절대적으로 동일한 유형의 실재라는 것이다. 존재자의 다수성과 상위성은 감각의 인상에 기인하는 순전한 상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실재에 대한 본연의 의미의 지식에 비해서 감각세계와 관련된 상념은 하나의 사전단계로 치부됨으로써 현상세계는 경시되는 입장이 피력된 것이다. 스피노자(B. Spinoza, 1632-1677)에게서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실체(實體, substantia)로서 자기 스스로에 의해 존재하고 스스로를 통해서 파악되는 그 자체의 원인이 되는 필연적 존재이다. 물질적 실체(res extensa)와 정신적 주체(res cogitans)는 다 같이 이 하나의 실체의 속성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기타의 시공간적 규정들과 의식행위들은 이 속성들의 양식들외에 다른 것이 아니어서 다수의 시공간적 규정들과 표상들은 바로 이 하나의 실체의 현현(顯現)들로 파악된다.
이러한 일원론의 기반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통찰들이 자리잡고 있다. 각 실재는 다른 실재들과 구별되고 질적으로 판이하여서 비교할 수도 없고 교환될 수도 없는 하나의 개체(個體, individuum)이다. 그런데 개별적 실재 안에는 다수의 본질요소들로 구성된 하나의 신체와 같은 적극적 단일성과 함께 다른 실재들과 구별되는 이타성으로서 ‘저 사람(것)’아닌 ‘이 사람(것)’과 같은 의미의 소극적 단일성을 뜻하는 단일성이 소여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단일성은 수다한 실재들의 전체와의 연관성을 배제하지 않으며, 각 실재가 모든 다른 실재들로부터 함께 규정되는 생성세계를 부인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여된 단일성과 함께 생성세계에 속하는 각 존재자에게는 아직 실현시켜야 할 단일성이 자신의 생성목표로서 부과되어 있기도 하다. 자신에게 부과되어 있는 단일성을 개별 존재자는 자신의 목표로서 지향한다. 이 부과된 단일성의 구체적 내용은 형식적이고 단일성의 개념으로부터 도출된다.
그리고 한 실재의 개체성 개념에는 ‘여기 있는 이’ 하나의 개체만 해당되지 않고 다른 모든 실재들도 해당된다. 개념 ‘이’가 실재의 단수성과 유일무이성을 나타내면서도 의미의 형식과 적용 면에서 최고의 일반성과 보편성을 지닌다. 또한 상위성(相違性, differentia)의 개념이 내용상 한 실재의 특수성과 상이성, 그리고 구별성을 표현하지만, 형식적으로는 하나의 일반개념이다. 하나의 실재는 다른 실재와 관계하는 가운데에서만 자신의 상이성을 드러내기에 상위성 개념이 자체적으로 관계성 내지 유대성을 전제로 한다. 다수성의 개념이 사물들의 수량화 가능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물들이 헤아려지기 위한 전제로서 동일한 법칙성에 부응하는 일정한 단일성이 요청된다. 동일 유형의 단일성의 첨가는 단일성 상호간의 관련성을 전제하고 하나의 새로운 단일성의 유대에로 이끄는 것이다.
실존(實存, existentia) 개념 역시 하나의 보편적 기반을 지시한다. 각 개체가 하나의 존재자이고 실존을 가짐으로써 ‘실존’은 철저하게 일반적인 실체이다. 실존은 자체적으로 존속하지 않고 현존의 일반적 배경으로부터 실재하는 것으로서 등장하게 된다. 현실적으로도 각 존재자는 수량적 국면에서 특정 범주에 속하는 다수의 존재자들로서 다수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이’(또는 ‘저’나 ‘그’) 존재자로서 단수로 드러내야 하며, 질적인 국면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타자와 구별되는 존재자로, 양식적인 국면에서 실존적인 것으로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일원론적 논증들은 순전한 일반성과 만사관련성을 제시하는 오직 유일무이한 원리만을 인정하는 일원론을 주장한다. 이러한 일원론에서는 실재하는 것의 다수성과 상이성이 실제적으로는 부인되거나, 아니면 단순한 현상(現象)이거나 외양(外樣)으로 간주되고 만다. 다수적인 것은 단지 유일한 원천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서 원천에 철저히 종속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본연의 실재이자 진정한 실재는 ‘하나’(一者)임에 비해 ‘많은 것’(多數)은 본연의 실존이 해당되지 않는 비본래적인 것이고 외양적인 것으로 폄하(貶下)된다.
2. 약동적 일원론은 존재자의 영역이 서로 다름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비슷하여 유비적(類比的)이라고 간주하면서, 이 유사성의 기반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의 단일성을 상정한다.
약동적 일원론의 대표적 유형이 독일 관념론자 헤겔(G.W.F. Hegel, 1770-1831)의 사상에서 발견된다. 헤겔은 존재자의 다수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이를 자기 자신 안으로 수용하여 자기 자신 안에서 대치하는 실재의 단일성을 상정한다. 그에게서 “참된 것은 전체적인 것이다.” 헤겔은 여기서 시작단계로부터 출발하여 계속되는 발전 속에서 개현되는 실재의 단일적 전체성을 주장한다. 헤겔은 전체로서의 참된 것을, 유한한 것과 유한한 사고가 지양되어 있는 바 절대정신(Absoluter Geist)의 자기사유로 파악한다. 그런데 그에게서 절대정신의 절대성은 경직된 절대성이 아니라 포괄적 절대성으로서 단일성과 비단일성의 단일성으로서 생명과 운동이다. 헤겔에게서 역사의 모든 잠정적 단계들은 그들의 내적 모순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지양하도록 충동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자기 자신의 부정이 이루어지는 속에서 드러나게 한다. 헤겔에게서 진리발생이 하나의 변증법적 역사단계로 이해되고 있어서 뒤따르는 보다 높은 단계가 선행하는 단계의 모순들을 단일성으로 결합시키고 잠정적인 전체를 내포하는 양상을 드러낸다.
헤겔이 파악하는 전체는 시작과 이것에서부터 도출되는 모든 것의 설명근거를 형성한다. 유한한 개별 존재자의 도출과정은 그것의 근거정립 경위이기도 하다. 발전과정은 시작원리 안에 함축적으로 함께 생각되고 소여되어 있는 것의 명시화 과정의 성격을 지닌다. 이 두개의 대립적인 것의 일치는 시작과 종말, 체계근거와 명시적 체계가 부합하게 되어서 시작단계로부터 완성된 명시적 체계로서의 발전이 동시에 관념의 지평 안에서 이루어지는 체계의 명시화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헤겔에게서 내적 대치와 단일성 안에서의 대립의 지양은 분열된 것, 즉 자기 자신의 타자로서 다수와 상이한 것의 재결합의 양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헤겔의 일원론은 단일성을 단일성과 다수성으로부터의 단일성으로 상정하여 전체를 구성하는 충만된 단일성으로 표상한 것이다.
헤겔은 그리스도교적 유일신론을 재정식화한 바 있다. 그에게서 모든 모순과 잠정적 체계들을 포괄하는 절대정신이 절대적 하느님이다. 신적 유일자(唯一者)는 세계와 외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신이 자신의 영원한 자기존재 안에서 자신을 외현화(外顯化)하여 자기 자신의 타자가 됨으로써, 외현화된 세계의 이 타자 안에서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서 다시 발견하고 비로소 자신을 온전히 실현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세계는 더 이상 신적인 것으로부터의 추락으로서 이해되지 않고, 하느님의 통합적 존속부분으로 하느님께 속하여서, 여기서 자신의 완성을 체험한다. 이렇게 이해된 절대가 어느 것도 자기 밖에 가지지 않고 만사를 자신 안에 포함하는 전체를 대표하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체계 안에서 일원론은 완성에 이른듯이 보인다. 일원론이 존재론적 국면에서 다수를, 그리고 인식론적 측면에서 잠정적 지식양식들을 하나의 자기해설 안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헤겔은 착각한다. 이 관념체계에서는 세계 안에서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형태의 우연적이고 자의적이며, 상호 모순되는 사건들을 통하여 야기되는 예측불가능한 실재의 새로운 차원이 고려되고 있지 않기에 결국 허구적 관념체계로만 머물뿐이다.
2. 개별실재의 다원성과 하느님 안에서의 일치의 중재양식
그리스도 신앙은 한분이신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위격으로서 역사하심을 믿는다. 세 신적 위격이 다른 위격보다 높거나 낮지 않고, 앞서거나 뒤따르지 않고 동일한 신적 본성과 본질, 실체를 지닌다는 것이 그리스도 하느님 신앙의 핵심 요지이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에 의거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격적 주체에게 부과된 다른 실재와의 일치와 조화는 결코 주체적 요소들의 자유로운 인격을 억압하고 부인하는 획일적 통일로 성립되지 않고 상호 구별되면서 동시에 고유한 자아 속에서 전체를 지니는 무수한 주체들의 사랑 안에서의 화합과 일치 양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입장을 좀 더 부연하기로 한다.
1. 개별 실재의 보편적 일치와 다원성을 수용하는 그리스도교적 입장 안에서는 한편으로는 질서체계의 완결 가능성과 다른 편으로는 지평의 개방성, 그리고 양자 사이의 관계로서 전이(轉移)나 운동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양자 사이의 전이나 운동이 반드시 지속적인 것일 필요는 없고, 인류의 역사 안에서 실제로 발생한 바와 같이 질적으로 새로운 도약이나 기존 질서 내지 체제의 전복 양식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최대 가능한 단일성과 완결성을 목표로 하는 고전적 일원론들과는 다른 구조를 마땅히 지닐 것이다. 반면에 여기서 고려되는 개별실재의 다원성과 모든 실재의 보편적 일치의 중재는 모든 개별적 실재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하나의 포괄적 질서를 요청할 것이다. 그런데 다수의 실재와 하나의 보편적 질서, 유한한 다수의 개별체계와 무한한 지평 사이의 중재질서로서 두가지 유형을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은 먼저 ‘인과율적 귀결의 질서유형’, 다음으로 ‘자유로운 선택 귀결의 질서유형’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 두 유형으로 생각될 수 있다.
첫번째 ‘인과율적 질서유형’의 한 실례로서 일반적인 덧셈 법칙에 따라 규정되는 자연적 숫자배열이 꼽힐 수 있다. 이 정식으로 표현된 구성지침은 작업진행 사실과 양식을 규정한다. 덧셈의 법칙은 임의로 수를 늘릴 수 있기 때문에, 이미 도달되었거나 앞으로 도달된 숫자들은 동일한 구조, 단일성으로부터 이루어진 종합적 단일성의 구조를 드러낸다. 이 숫자배열의 질서는 뒤따르는 질서가 앞서 진행된 질서를 함축하고 단일성을 확장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 정식은 수량적 가능성들의 열린 장이 합리적으로 지배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법칙을 표현한다. 달리 말하면, 하나의 유한한 구조가 무한한 영역의 실상을 간파할 수 있게 한다. 그때문에 실천적으로 몇 단계 뒤에는 셈을 중단하고 ‘기타 등등’으로 대치한다. 이 ‘등등’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기대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한다. 전체적 귀결이 미리 알려진 법칙에 의거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선택귀결의 질서유형’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여기서는 앞선 단계로부터 뒤따르는 단계에로의 전이(轉移)의 사실(事實, factum)은 확정되어 있으나 전이의 양식(樣式, modus)은 정해지지 않는다. 전이의 유형양식은 매 단계에서 새롭게 결정되어야 하기때문에 여기서는 무한한 실재가 각 단계의 무한한 귀결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구성양식이 관건이 된다. 그래서 이 맥락에서는 ‘기타 등등’이 이전 맥락에서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앞의 경우에는 선험적으로 모든 것이 조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 끝까지 추적하는 것을 포기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구성의 본질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명제의 정립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구성작업이 실제로 무한히 진행되어야 한다. 그때문에 이 후자의 구성양식에서는 합리성과 높은 단계에서의 사전 간파가능성의 특성이 결여되어 있다.
부분영역들의 구조 내지 구성원리들을 전체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가 여부는 부분과 전체의 두 영역 안에 동일한 구조들이 존재한다는 전제하에서만 통용된다. 이 전제들은 부분들만이 전이상태에 처해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 자체가 하나의 전이의 지체가 되는 개방된 체계 안에서 사실로 드러날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지되어 있는 고전적 진보상념은 하나의 진보를 보다 포괄적인 체계로 파악하여서 전대의 수준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상념을 의문에 처하는 또 다른 진보내지 발전상념이 오늘날 강력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2. 미국 물리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인 토마스 쿤(Thomas Kuhn)은 이미 앞에서 거명한 그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 안에서 ‘패러다임’ 개념에 의거하여 급변하는 과학의 발전을 혁명적 과정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통찰은 개별 실재의 다원성과 보편적 일치의 중재 양식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통상적으로 과학 문제들은 일정한 ‘모델’(models) 내지는 ‘범례’(examples), 또는 ‘견본’(samples)의 채용을 통하여 해결된다. 여기서 과학적 문제 해결을 위해 채용된 ‘모델’, ‘범례’ 내지는 ‘견본’들이 과학적 지식의 구성체로서의 ‘패러다임’(paradigm)을 의미한다. 패러다임을 통하여 인정받은 법칙이나 이론, 적용이나 도구화 등을 포함하는 과학연구의 사례들은 일관성있는 하나의 과학전통을 발생케 하면서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 형성된다. 그래서 정상과학은 일련의 정설(定說)을 설명하고 성공적 응용사례를 들어 해설하며, 이들 적용사례와 관찰, 실험의 보기들을 비교하여서 실재 세계와 관련된 여러 측면들의 행태를 설명하고 조절하려는 시도를 통해 패러다임을 명료화하고 발전시킨다. 정상과학의 종사자들은 연구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패러다임 안에서 퍼즐 풀이하듯 연구를 진행한다. 정상과학은 새로운 종류의 현상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보다 패러다임이 이미 제공한 현상이나 이론을 명확히하는 데에 연구를 집중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상과학을 수행하는 과학자들이 종래의 지식의 구성체로서 더 이상 해명할 수 없는 명제나 반증과 같은 변칙성을 인지하게 되는 경우들이 발생하고는 하였다. 통상적으로, 정상과학 종사자들은 이러한 변칙 현상을 인지할 때에, 이들을 변칙 사례로 간주하고 기왕에 통용되고 있는 기존 패러다임을 확장하거나 수정을 가하였다. 그러나 임기응변적 조치들만으로 해명될 수 없는 문제들이 누적되기에 이르면, 정상과학이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쿤은 이러한 전환기적 상황에서 기존의 패러다임과는 질적으로 판이한 성격을 띄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여 기존 패러다임과 경쟁하게 되고 마침내 기존의 전통적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치 되는 소위 ‘과학혁명’이 발생한다고 갈파한 것이다.
예컨대, 서기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 발전된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ios, AD 2세기)의 천동설적 천문학은 항성과 혹성의 위치변화를 성공적으로 예측하여서 천문학적 전통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혹성의 위치나, 춘분, 추분의 세차(歲差)에 관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예측이 시간이 흐를수록 차질들을 빚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면서 정상적 연구의 중요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특정한 차질이 나타났을 때에 천문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복잡한 원(圓)으로 구성된 일부를 수정함으로써 그 차질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천문학자들은 천문학의 복잡성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정확성보다 더욱 빨리 증가되고 있으며, 한 측면에서 수정된 차질이 다른 측면에서 또 나타날 가능성이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16세기 초기에 이르러 유럽의 유명한 천문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적 패러다임이 천문학의 제문제들을 해명하는 데 부적합하다고 간주하는 천문학자들이 증가하는 상황 속에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기존의 천동설의 패러다임을 거부하고 새로운 지동설의 패러다임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쿤에 따르면 과학발전은 먼저, 전과학의 단계를 거쳐 특정한 패러다임에 의거하는 정상과학의 전통이 수립되고, 다음에, 변칙사례의 등장을 통해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의 기능정지가 인지되면서 정상과학이 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마침내, 홀연히 출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 패러다임을 대치하는 ‘과학적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의 과정을 밟아 진행된다고 한다. 쿤은 과학의 진보란 주도적이었던 하나의 이론의 포기와 그 자리를 양립불가능한 다른 이론이 대체하는 혁명적 과정이라고 갈파한 것이다. 그는 과학사 안에서 등장한 과학의 패러다임들은 구조적으로 상호 측정가능하지 않으며, 상호 환원될 수 없음을 여러 사례들을 통해서 제시하였다. 상호 경쟁적인 패러다임들의 압박과 대치는 합리성의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비합리성의 기준을 통하여 정치혁명처럼 발생한다. 이들의 발전 기준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과학의 발전이 직선적 진보로 해석되지 않고 사전에 예측불가능하게 머문다는 것이다.
쿤의 견해는 과학사에만 적용되지 않고 정신사와 신학에도 적용된다. 원시적 마술-신화적 세계관으로부터 고중세의 철학적 세계관으로의 전이, 이 세계관으로부터 근세의 자연과학적 세계관으로의 전이는 직선적이고 지속적 발전이라기보다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자유로운 변형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상 더욱 타당하다. 현실적으로 진행되는 역사과정은 유기체적 성장이나 성숙과 혼동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역사는 인간 개인과 사회, 그리고 실재 세계가 상호 조정하고 침투하는 미리 예측할 수 없는 개방된 과정으로, 인간이 실재 세계 안에서 발견하고 개척해 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구현하는 개방된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역사는 완결되어 있지 않고 항상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역운과 사회와 자연세계의 처지가 변혁과 소요 속에 처해지면서 항상 새롭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 안에서 개별 영역의 진보와 발전이 이루어 지고는 있으나 역사 전체가 직선적으로 과정을 밟아 전진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인간의 가치들이 지속적인 상승과 하락의 운동 안에 존속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자의(恣意)와 폭력과 우연이 역사적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한다면, 역사 전체의 직선적 진보에 대한 믿음은 신빙성을 상실한다.
인격적 주체들의 자유와 자의, 자발성과 비규정성과 같은 개념에 정초한 자유로운 선택귀결의 고려는 구성개념이 인과율적이고 비인과율적 귀결을 포함하는 의미로 확장된다. 이 개념안에서 기능면에서 종(種)개념으로 표시되는 규정이나 법칙은 하나의 전이가 이루어질 것이며, 유대를 도모할 것이며, 일치가 이룩될 것이라는 내용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비규정적인 체계만을 드러낸다. 여기서 어떤 양식으로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가는 미리 확정되어 있지 않고 열려 있는 것이다.
3. 하나의 보편적 실재는 하느님의 실재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적 신앙세계 안에서 절대 진리가 시간과 상관없이 불변하는 진리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진리로 파악되고 있다. 여기서 절대 진리로서의 하느님은 인간 이성의 포착 능력을 벗어나서 역사 안에서 수시로 자신을 새롭게 현시하는 실재로 이해된다. 하느님 진리의 포착 내지 점유 불가능성은 이처럼 신적 진리의 역사성과 긴밀하게 유대되어 있다. 바로 여기에 이성에 의하여 포착되는 비인격적 사물진리와 질적으로 구별되는 인격적 실재진리의 고유성이 자리잡고 있다. 하느님은 우주의 사물적 근거로서 우주에 정적(靜的)으로 내재하기만 하는 실재가 아니라, 우주의 근거이면서도 우주와는 구별되면서 자유롭게 역사하는 인격적 실재인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진리는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완벽하게 포괄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에 관하여 단편적으로만 진술할 수 있을 뿐인 역사적 진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가 다원적 세계의 교회가 되는 정도로 하나의 보편적 실재이신 하느님께 대한 다수이며, 다양한 진술들에 의존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하신 분이기에 당신이 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신비를 계시하실 수 있으시며, 그것도 각기 다른 양식으로 계시하실 수 있는 자유로운 분이라는 사실이 중시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신앙적이고 신학적 진술들의 다수성과 다원성은 하느님 진리의 풍요성과 충만성, 그리고 참된 보편성의 표현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개별 실재들의 다원적 현실과 하느님의 영원한 보편적 실재 사이의 중재양식의 문제를 신-영원적이면서 인간-역사적인 그리스도의 존재구조에 상응하는 방향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상위성과 단일성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단일성과 상위성 안에서 가능성의 전제를 지니고 있다고 볼 것이다. 한 분이시면서도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 세 위격으로 구별되는 삼위일체적 하느님의 실재는 자신 안에서 단일성과 다수성을 중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영원한 신적 존재가 자체로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이자 실재임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영원으로부터 만인과 만사를 규정하는 보편적 실재이신 하느님이 당신의 삼위일체적 구조에 상응하여 신-영원적 차원과 인간-역사적 차원 안에서 단일적이면서 상이한 양식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데에서 다원주의로 말미암아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IV. 맺는 말
개별 실재들의 다원적 현실과 하느님의 영원한 보편적 실재 사이의 중재양식의 문제는 앞으로 신앙과 신학의 차원에서 보다 면밀하게 구명되어야 할 문제로 남을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앞에서 살펴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피력되는 교회의 정신에 따라서 앞으로 더욱 심화될 문화적이고 종교적 다원주의 현상에 대해서 삼위일체적 하느님 신앙에 의거하여 단일성 안에서의 다원성, 다원성 안에서의 단일성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여하한 형태의 다원주의는 다수의 개인과 개별 사회, 그리고 인류 전체가 세계내 다양한 실재와의 조화 안에서 추구하는 자유와 정의에 의거 정당성을 인정받을 것이다. 이해관계와 확신, 그리고 생활양식에서 상이한 개인과 집단들이 상호 인정과 함께 관용을 실천함으로써 정당성을 인정받을 것이다. 인간 자신이 영육합일체로서 자신의 내적 다원성에 대해 관용적이어야 하며, 자신의 구체적 본질을 하나의 간파된 지점으로부터 고정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바람직하지 않다고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용 안에서 다른 개인과 집단들에 대한 관용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물적이고 감각적이며, 정신적 차원으로 구성된 인간존재의 모순되기까지한 복합적 실재의 내적 다원성에 대한 관용으로부터 시작하여 문화와 종교와 관련된 다원성 안에서도 상호 존중과 인정을 요청하는 데에서 다원적 실재들을 포괄하는 보편적 단일성이 드러남에 주목할 일이다.
역사의 차원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 존재들에게 부과된 일치의 실현은 상호 존중과 관용을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서만 창출될 것이다. 사랑은 모든 다른 존재자의 상위성을 수용하는 데에서 성립되는 일치의 성취로서, 그래서 보편적 단일성과 다수 실재의 지속적 다원성 사이의 화해로서 이해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동등한 권리를 지닌 자유로운 집단들의 다수성을 강조하면서 상이한 관점과 행동 양식을 정의와 사랑의 정신으로 존중하는 다원주의적 자세를 한분이시면서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양식에 상응하는 처신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