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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브라스카 지부장 김수익목사

일조전납 (NYSKC: C=comprleat offering)


들어가는 말


NYSKC는 신앙생활의 신조이자 행동강령이며 예배회복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열매이다 그중에 가장 우리로 하여금 민감하게(Sensitive)반응하는 것이 있다면 싲일조에 관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인류가 타락한 후에 나타나 가장 소중하고 우상으로 섬기며 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 볼 때 물질주의 세계에서 우리로 하여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 형이상하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헌금에 관한 것들이 인터넷의 기독교의 게시판에 가면 열렬한 토론이 벌어지는 장면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 체험적으로 보면, 그러한 토론이 대부분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곳에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고 숨기며, 한국교회의 십일조를 비난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소위 이단으로 불리는 자들이 십일조를 비난하는데, 이러한 비난은 오히려 일반 교인들의 많은 동조와 동감을 얻게 되며, 그들이 노리는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십일조자체를 비난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전체적인 비난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서 자신들의 전체적인 이단 교리와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교회에서 일체의 헌금이나 연보, 헌물등을 받지 않을까?

그들은 단지 십일조라고 불리는 용어의 헌금만이 없을 뿐이며, 헌금을 모두 받는다. 특히 이단들의 경우 더욱 많은 헌금을 받음으로 상당한 피해를 보게 된다. 이러한 자들이 앞장 서서 일반 교회의 십일조를 비난하고 있다.


구역성경 레위기 25;23절을 보면 “토지를 영영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지었다

그러니 토지 뿐 아니라 우리 자신가지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을 지으신 뒤에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며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복을 받았다고 시인하는 사람은 당연히 도리(reason)를 다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십일조는 율법이기에 드리는 것보다 당연히 받은 축복에 감사해서 드리는 도리(truth)인 것이다 즉 축복을 받은 자가 당연히 행하는 도리(propriety)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타락이후에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서 받기를 원하시기에 시간과 물질 정성을 바칠 것을 법으로 제정하셨던 것이다


여호와는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요 만왕의 왕이신 분이다

왕이라고 하는 것은 법 위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법에 의해서 선출된 사람이기에 법에 저촉을 받고 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여호와는 왕 중에 왕이요 왕을 세우시는 왕이시니 법의 본체요 법을 제정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분이 만든 법이 십일조요 십일조는 만왕의 왕께서 축복받은 것을 깨닫고 살게 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NYSKC에서 말하는 C: complete offering는 예배회복이 이루어진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게 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이비들 이단들은 오히려 축복의 도리가 되는 십일조를 비난하고 있다

이에 대한 십일조에 대한 비난을 몇 가지로 살펴보면서 대응하는 차원에서 십일조의 뜻을 알아보자


본론


1) 십일조는 율법이므로 폐하여졌다는 주장:

십일조를 비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주장중 첫번째는, 십일조는 율법이므로 폐지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율법이 폐지된 적은 없다. 율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의 완전을 위하여 오셨으며(마5:17) 예수님은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5:18)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율법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며, 그러한 개념이 폐하여졌다는 것이다.

제사율법은 변역되었다....변역이란 바뀐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사도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제사의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만일 제사가 폐하여졌다면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아니고, 우리도 더이상 제사장이 아니다.... 율법은 그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관점과 의롭게함이라는 관점에서는 폐하여졌으나, 죄를 깨닫게하고 그리스도로 안내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기능은 아직 갖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재해석하셨으며, 완전케 하신 것이다.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지 못하지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0)


그렇다면 십일조는 율법일까?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았느니라"(히7:6)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기 전에도, 십일조는 있었다.

그리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빔을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 십일조를 드리면서 복빎을 받을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구약뿐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어떤 교회에서 십일조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친다면, 그 교회는 이단이라고 불러도 좋다. 어떤 정통교회도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율법을 지킴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정통교회도 없듯이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율법은 지켜야 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를 내야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십일조는 그리스도인의 자발적인 의무라고 가르친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일조

마태복음23장 23절과 누가복음 11장42절은 십일조에 대해서 모두 똑같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

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눅11:42)


신약에서 십일조는 마23:23, 눅11:42와 눅18:12에서 다시 한번 언급되어지며, 히브리서에도 십일조는(개역성경:십분의 일로 번역되어짐) 언급되어진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

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

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

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2-14)


전자의 성경본문은 형식만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탓하시는 것이지, 십일조 자체를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후자의 성경본문 역시, 하나님은 형식적인 십일조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된다.

"의인"(의롭다함)의 조건은 마당에 심은 풀과 같이 자신의 소득에 대한 정확한 액수의 십일조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믿음에 달려 있다.

그러나 만일 의롭다함의 조건이 십일조에 달려있다고 가르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일 것이 될 것이다.


3) 연보와 십일조

또 제가 또 하나의 성경을 인용하면, 십일조를 비난하는 분들께서는 분명히 "그것은 십일조가 아니라 연보이다"라고 말할 것이 뻔하지만 성경을 잘 찾아 보면, 연보와 십일조는 서로 구별되어지거나 다른 것이 아니다.


고전 16장 1절과 2절등에 사용된 "연보"란 단어는 "모금, 수집"(collection)이라는 뜻의 헬라어 "로기아"로 되어 있고, 고후 8:2에서는 "기쁨으로 드린다, 관용"이라는 의미의 "하플로테스"로 되어 있고, 고후9:5 에서는 "좋은 모금, 아름다운 말과 칭찬, 봉헌, 은전"이란 뜻의 "율로기아"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성경말씀에서 "연보"란 번역상 연보라고 표기되어 있을 뿐, 십일조나 헌금. 모금과 전혀 다른 용어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가 십일조를 형식적인 면에서 벗어나, 자발적인 기쁨으로 드려진다면 그것이 곧 연보와 같은 개념이 되어진다.


또한 그 증거로 역대하34장9절과 14절의 "연보"란 용어를 보자.

구약에서는 십일조를 포함한 성전세등을 포괄하여 성전에 들어간 돈을 연보(히브리어: 보, 여호와의 성전에 입고된 돈)라고 기록하였다.

바울은 고후 9:13에서 "후한 연보"(하플로테스)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아직도 헬라어 원어를 믿지 못하겠고 십일종는 "연보"와 엄격히 다른 용어라고 말한다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십일조 봉투에 십일조라는 말을 지우고 연보봉투라고 고쳐서 내거나 "기쁜 헌금"이라고 고쳐서 내면 된다.

연보는 성경적이라 가능하고, 십일조는 폐하여졌으니 비성경적이라는 주장은 가당치 않다. 십일조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니 십일조의 의미를 잘 깨달으시기 바라며, 주님은 결코 십일조가 폐하여졌다고 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발적인 마음으로 즐겨 내시는 사람을 기뻐하시며, 십일조는 결코 폐하여진 적이 없다.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

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12:41-44)


예수님은 액수에 많고 적음이나 정확한 액수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으며, 오직 자발적인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내면적인 믿음을 중요시하였다.


4) 십일조의 유래와 의미


성경에서 십일조가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창세기 14장 17-20절이다.

아브람이 롯을 구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자,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에 등장하는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28장 야곱의 서원에서 나오게 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를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개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

나이다 하였더라" (창28;20-22)


즉 십일조는 제사적인 의미도 아니며 율법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미 율법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으며, 야곱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서원한 것이다.

그것은 복을 빌어달라는 조건의 약속이다.

단, 그것은 강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었다.


"매 삼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 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9)


다시 말해서 구약의 십일조란 일차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에 대한 개인적인 성취적인 제물로 사용되었다.

후에 십일조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종사하는 사람들, 즉 분깃이 없는 레위 제사장들을 부양하는 목적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와 부양에도 쓰였다는 것이다.

이 십일조의 대상은 종교적인 레위인의 부양도 포함되었지만, 성중에 거하는 객과 과부와 고아같은 비종교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이단들과 사이비 교회에서는 십일조나 헌금이 모두 교주나 지도자 개인에게 돌아간다.

특히 종말론을 주장하던 교회들은 종말이 오니 모든 재산을 교회로 바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은 정당하기 때문에, 목회자들의 개인적인 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목회자의 생계와 생활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또 우리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구제사업을 할 수도 있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선교비로 사용할 수도 있으며, 공동체적인 교회를 위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5) 신약의 십일조


여러분이 흔히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등장하는 구절인데, 마태복음23;23-24이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

도다"(마23:23-24)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음식의 향을 내기 위한 아주 작은 풀이다.

이러한 풀에 속하는 것은 십일조의 규정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이러한 식물들은 그 당시 집의 뜰에서 길러지던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서기관이나 율법사들은 이러한 규정까지를 십일조에 포함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이렇게 까다롭고 철저한 당시의 율법과 계율에 대한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대한 비평일수도 있으며.......

둘째 이렇게 작고 우리 집안에서 키우는 풀의 열매까지 우리는 정확한 액수를 내고 있다는 자랑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겉치례에 대한 비평이다.

그들은 내면적인 믿음보다 십일조를 내는가 안내는가에 대한 것을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집안에서 기르는 풀까지의 정확한 십일조를 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작은 것까지 지킨다는 외부적인 평가를 받기위한 전시적인 쇼맨쉽을 비판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한 해석은 곧 하루살이를 걸러내고 실제로는 약대를 삼키는 행위를 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작 내야할 큰 소득에 대한 십일조는 내지 않았고, 아주 적은 것에 대한 십일조는 정확하게 내고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던 예수그리스도는 "버리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어서 율법의 지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의미를 파악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십일조의 형식도 중요한 것이며 그 내면적인 의미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구약의 십일조에서 가장 처음 언급된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자.

히브리서 7장은 이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멜기세덱은 과연 누구인가? 창세기에서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되어 있다.

살렘의 왕으로 되어 있는데 이 살렘이란 뜻은 "평화로운, 충만한, 완전한..."이란 의미가 있다.

이 멜기세덱은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를 축복해 주었다.

히7장3절에 보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4절 "가장 좋은것"을 주었고 7절에는 "낮은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낮은 자로서 높은 자인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았고 자신이 가진 물건 중에 가장 좋은 것을 바친 것이다.

이것은 레위라는 제도가 있기 전에(즉 율법이 있기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십일조는 율법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멜기세덱은 단지 축복을 하였을 뿐이며 "달라"거나 "십분일"을 말한 적도 없고 "가장 좋은것"에 대하여 말한 적도 없다.

이 멜기세덱은 바로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모형인 것이다.

우리의 십일조는 바로 우리 주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자발적으로 드려져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의 살과 피로써 우리에게 큰 축복을 내려주셨고 우리는 자발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합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물질이나 액수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드리는 마음이다.


"여기서는 죽을 자들이 십분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히7:8-10)


예수그리스도도 십일조를 비난하지 않았으며 금하지 않으셨다.

단지 예수님은 그 내면적인 것을 더욱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을 뿐이며, 사랑과 공의로 믿음으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십일조를 주님은 말씀하셨다.


우리 교회는 그 물질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그 물질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위하여 쓸수도 있으며, 목회하는 분들에게도 써질수도 있으며 구제하는 일에도 사용되어질 수도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선교비로 사용되어질 수도 있다.

반드시 내야한다는 형식도 중요한 것이며 버릴수 없는 것이지만, 자발적이며 내면적인 믿음이 더욱 중요하다.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좋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찾을수 없다.


6) 말라기에 대한 잘못된 비판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십일조에 대한 말라기 말씀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것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10)


본인은 두가지의 비판을 하려고 한다.

하나는 성도들이 정확한 액수의 십일조를 내야만 복의 근원이 된다는 주장이며, 하나는 이 말라기 말씀이 오직 제사장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이다.

이 문장을 그 당시의 "제사장"에게 해당되는 말이라는 후자의 견해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

즉 말라기는 그 대상이 제사장에게 하는 말씀인데, 한국교회가 그것을 성도들에게 해당된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곳이 있다.


말라기 2장은 분명히 그 대상이 "제사장"이다.(말2:1)

그러나 말라기 3장6절부터는 그 대상이 "제사장"이 아니다.

3장6절은 "야곱의 자손"들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대상으로 "돌아오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3:7) 제사장들만이 야곱의 자손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인가?

과연 말라기의 십일조에 대한 경고가 오직 제사장에게만 해당되어질까?

그 대상은 온 이스라엘 백성, 너희 온 나라인 것이다.


먼저 말라기에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겠느냐?" 라는 문장을 보자.

이 영어성경을 보면 "Will a man rob God?"이다.

우리는 이 man 이라는 단어에 부정관사 a 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럴 경우, 의미는 한사람의 뜻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일반적이며 대표적인 의미를 말한다.

A horse is animal. 이 말은 한 마리의 말이 동물이다가 아니고 일반적인 명사 "말이라고 하는 것은 짐승이다" 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것을 훔친 사람은 제사장같은 어느 특정된 사람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의 모든 전체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How do we rob you? 라고 we 라는 복수가 곧이어 나오는 것이다.

다음 9절에서는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영어성경을 보면 " You are under a curse - the whole nation of you - because you are robbing me" 라고 되어 있다.

(- -) 라는 부호는 앞의 문장을 재설명하는 부호이다.

앞문장의 You 는 결국 the whole nation of you 라고 재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개역성경에도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라고 번역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말라기의 십일조에 대한 성경말씀은 제사장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근거가 있다.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일 You 가 제사장만을 말한다면 복을 주는 "너희"도 제사장을 말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복은 제사장만이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십일조는 일반 사람들이 내고, 복은 제사장만이 받는다는 이상한 모순이 되어 버리는것이다.

어느 문장을 보아도 You가 오직 제사장만을 가르킨다는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다.

2장에서 "너희 제사장들아..."라고 되어 있다고 해서, 모든 말라기가 다 제사장에게만 말하는 것이라고 할수는 없는 것이다.

말라기 3장에 들어서면서, 3장 3절에는 레위자손들을 "그들"이라고 삼인칭으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미 제사장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과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것이니라"


이 문장이 제사장에게 하는 말이라면 그들은 'They" 가 아니고 "You" 가 되었어야 한다.

6절에서는 "야곱의 자손들아"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도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리라"

레위족속 제사장만이 야곱의 후손이 아닌것이다.

야곱은 모든 열두지파의 조상인것이다.

즉 모든 이스라엘 지파를 여호와는 부르고 있었으며 모두에게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저주의 원인중에서 한가지를 알려줌으로써 복을 알려 주려고 하는 하나님의 배려인 것이다.


또 말라기에 대해서 정확한 액수(10%)를 내야만 복을 받는다는 주장이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다만 본인의 견해에 대해서 혹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물론 본인은 정확한 십일조를 계산하여 자발적이며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그 믿음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본인이 말하고 싶은 요점은, 소수점 이하 퍼센트까지 정확한 십일조를 내야만 복을 받는다는 주장에 대해서 반박하고 싶을 따름이다.

성경에서 "온전한 십일조"라고 번역되어진 10절의 말씀은 완전하고 정확한 금액의 액수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Whole tithe"(모든 십일조:히브리어 콜, all)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모든 십일조, 즉 모두 십일조를 내야한다는 것을 말하지만, 마당에 심는 박하와 휘향과 산채까지 포함시키는 정확한 십분의 일이라는 액수를 말하지는 않는다.

성경 본문은 이스라엘 온 나라, 모든 백성이 모든 십일조를 도둑질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자면, 유대인들은 남이 볼 때에는 박하와 휘향과 산채까지의 십분지일을 나는 낸다고 자랑하였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큰 소득에 대해서는 십일조를 아예 내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십일조를 냈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성경에서 십일조는 결코 율법적이 아니며, 폐지된 적도 없다.

다만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십원짜리까지 계산하는 정확한 10퍼센트의 액수만을 맞추는 형식적인 십일조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람직한 십일조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십일조는 결코 의의 기준이 되어지지 않는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

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5-7)


빌립보서 4장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에게 모금한 돈의 일부를 바울의 "쓸 것"으로 몇번 보내었다.

바울은 이것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그러나 내가 선물을 구하지 않는다고 사양한다.

그러나 18절에서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준 너희의 준 것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한 것이라" 라고 말했던 것이다.


또 다른 차원에서 보더라도, 십일조와 헌금이 없다면 교회가 유지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왜 십일조와 헌금을 비난하는가?

과연 십일조와 헌금이 없어도 물질적으로 풍성하여 남아돌아가는 교회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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