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크 예배회복운동 이해를 위한 회복의 신학에 대한 기초

Nyskc Movement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

"When the worship is restored, the church is risen,

the nation is renewed, and the family is revived"

GTA 연구그룹 정기모임 연구자료

나이스크 예배회복운동 이해를 위한 회복의 신학에 대한 기초

Theology of Restoration

Rev. Goshen Choi . Pastor

2016. 1. 11(월) PM 4:00

광의침례교회



Nyskc World Mission

<나이스크 예배회복운동 이해를 위한 회복신학에 대한 기초> ①

전체생명을 살리는 예배회복운동

- 회복의 신학적 입장에서의 접근 -

최고센 목사(Nyskc World Mission 대표)

I. 들어가는 말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의 실천운동이다. 이를 실제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개혁주의생명신학 선언문에서는 7대 실천운동(‘신앙운동’, ‘신학회복운동’, ‘영적생명운동’, ‘하나님 나라 운동’, ‘기도운동’, ‘성령운동’, ‘나눔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교단의 울타리를 넘어 그리고 교회의 담장을 넘어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운동은 범교단적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이처럼 이 운동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으며 확산되어 갈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생명을 교회가 회복해야 한다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성경적인 원리에 기초하여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본 학회의 주제인 “생명을 살리는 예배와 설교”는 참으로 시의적절하다고 보여 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회복은 바로 예배의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Nyskc Movement도 1993년 미국 뉴욕에서부터 시작된 예배회복운동이다.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When the worship is restored, the church is risen, the nation is renewed, and the family is revived")는 Theme를 중심으로 Nyskc World Mission을 세워 활동하고 있다. 성경적 본질에 합당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전제위에 Nyskc운동은 일어나고 있다.

그 안에는 4개의 기관으로 나뉘어 좀 더 구체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전교인들이 예배회복훈련에 참여하는 Conference이다. Conference

는 어린아이부터 시작하여 장년에 이르기까지 Family가 참여하는 예배회복을 위한 훈련 및 성회를 말한다. 또 하나의 기관은 Nyskc Learned Society이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다.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는 회복의 신학을 연구하는 곳으로 예배회복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신학적인 조망을 통해 일시적인 이벤트로서의 예배회복운동이 되지 않기 위하여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이론의 체계를 세우고 연구하고 있다. 그 안에는 예배분과, 선교분과, 교회분과, 교육분과, 구제분과를 두고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Pennsylvania Werren에 Goshen Theological Seminary 교육기관을 세워 GTS Academy Program을 진행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예배의 문화적 접근을 위한 일환으로 Miclot과 문서선교를 위한 학술지 및 각종책자를 발행하며 예배회복운동을 하고 있다. 이런 예배회복운동과 관련하여 본 글에서는 예배회복운동을 하게 된 이유와 동기,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 그리고 역사적 신앙고백을 살펴보면서 참된 예배와 거짓예배에 대하여 조명해보고 생명을 살리는 예배회복운동에 대하여 강조하고자 한다.

II. 펼치는 말

1. 예배와 회복

1) 성경에서 발견한 하나님께 받은 세 가지의 복

(1) 생명을 주셨다.

창조의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여섯 째날 동물과 사람을 만드셨다. 그런데 사람을 만든 것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고 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본질은 “흙”이었으며 만드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모양대로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 코에 생기를 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

(2) 땅과 모든 식물과 생물을 주셨다.

생육과 번성은 곧 땅의 충만이 되었고, 땅을 정복하라 하셨으며 하늘과 땅과 바다에 사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다. 뿐만 아니라 “온 지면의 모든 채소나 열매 맺는 나무를 주시면서 너희 식물이 되리라”하셨다. 예컨대 땅에 사는 동물은 물론 생물 그리고 나무와 채소까지 다 복으로 주셨다(창1:26-29).

(3)하나님과의 교제를 주셨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2:1).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다. 그리고는 “일곱째 날을 복을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창2:2-3)고 하셨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니라”(벧전1:16; 레11:44-45; 고전1:2; 히12:14; 계15:3-4). 하나님은 이날을 사람과 더불어 교제하시길 원하셨기 때문에 복을 주어 거룩하게 하였고 안식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생명과 땅(모든 식물과 생물)과 하나님과 거룩함으로 교제할 수 있는 기업을 주셨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였기에 예배회복운동을 하게 되었다.

2) 불순종하므로 세 가지 복의 상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사람으로 살게 하시면서 다스리면서 지키게 하시면서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하시면서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셨다(창 2:15-17).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하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 3:3) 하였다. 이렇게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 다 상실되고 말았다.

(1) 영혼과 육신의 죽음(생명기업의 상실) (창3:22-24, 롬6:23, 고전15:45-50)

(2) 땅의 저주(토지기업의 상실) (창3:17-18,23)

(3)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 (교제기업의 상실) (창3:8-10 창3:22)이 되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면서 동물과 다르게 복을 주어 생령 곧 생명을 주셨고 또 땅에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복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거룩한 날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죄가 되었고, 죄의 삯은 사망이었기에 이 모든 것들이 상실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받은 복과 그 복의 상실한 인간이 다시금 그 복을 회복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회복운동을 하게 되었다.

3) 회복의 도구가 예배인 것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므로 죄가 되었고 죄의 삯은 사망이었다(롬6:23).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게 되었다(창3:7).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었다. 그들은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낮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3:8).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책망하셨다(창3:9-13). 뱀은 저주를 받아 종신토록 배로 기어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게 되었다(창3:14-15). 그리고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4-20)고 하셨다. 또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하고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하여 나무 뒤에 숨어있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수도 없는 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창3:21).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보여주신 것이다.

(1) 가죽옷에는 생명을 바쳐 죄인들을 살리겠다는 예배가 있다. 죄 없는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 죽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 가죽 옷이다.

(2) 가죽옷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곧 예배 선언이다. 먼저 죄 없는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 피를 흘려 죽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 가죽옷이다.

(3) 가죽 옷에는 생명을 살리는 메시지가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죽는다.

이렇게 심각한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대신 피를 흘려 죽는 것이다.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4) 가죽옷은 생명의 옷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죄 없는 짐승이 아담과 하와의 죄 대신에 피를 흘려 죽었다. 피 값으로 만들어진 가죽옷은 ‘생명의 옷’이며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분의 모형이다. 그 날 하나님께서 옛 뱀 곧 마귀를 향해 심판을 선언하셨다.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 마귀를 진멸할 것을 선포하셨다.

(5) 가죽 옷에는 동물의 피 곧 생축을 드리는 예배가 담겨져 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면서(창4:1-4)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 되었다.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가인보다 더 낳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해여 증거하심”이라고 하였다(히11:4). 아벨은 양의 새끼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가죽 옷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회복의 의미가 있다.

(6) 영원한 가죽옷을 입히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셨다. 세례 요한의 고백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우리 죄 대신에 죽으러 오셨다. 아무 흠도 없고 죄는 알지도 못하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 대신에 피 흘려 죽었다. 그 피로 나의 죄가 사해졌다. 예수님의 피로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상징인 가죽옷을 입혀주셨다.

(7) 예배는 생명을 살리는 도구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시키신다.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피를 흘려 죽는 죽음을 통해 다시 사랑하실 것을 선포한 것이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강한 사랑을 쏟으신 것이다. 그렇게 우리 죄인들을 구원해 주셨으며 회복시켜 주셨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병든 육신이 치유되고 깨어진 교제가 회복된다.

4) 예배를 회복의 도구로 주셨다.

하나님이 죄인 된 사람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시지 않았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뭇잎으로나 혹은 나무 뒤에 숨어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음성조차도 두려워 떨어야 하는 사망의 삶이었다. 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동물을 잡아 그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혀주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 음성을 들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동물의 희생을 통하여 사람을 만나주시고 열납해 주시게 된다. 그러므로 제사 곧 예배는 회복의 도구로 주신 것이다. 아벨은 양의 새끼를 산 제물로 드리며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제사는 열납 되었다. 아벨이 하나님께서 열납 하실만한 희생에 제물이 없이 나갔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며, 가인처럼 열납되지 않는 제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회복의 도구임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예배회복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5) 회복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의 접근이다

교회들이 많이 쓰는 표어 중에 하나는 초대교회시대로 돌아가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은 그 정신이나 영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안디옥교회에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였기에 이방인들이 저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목숨을 버릴지라도 믿음을 버릴 수 없다”라고 하는 신앙의 신조가 있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다. 주님을 죽도록 사랑하였기 때문에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나는 주님의 것이로다”라고 신앙할 수 있었다. 얼마나 성령 충만한 모습이었는가 상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초대시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개혁(Reform)이라는 말을 하면서 과거의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 접근하려고 하였다. 현대 종교개혁자 중 하나인 네덜란드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성장할 당시인 19세기 중엽에는 16, 17세기에 걸쳐 네덜란드의 칼빈주의자들이 세웠던 6개의 대학 중 세 개가 없어졌고, 그 나머지 세 학교마저도 개혁신학이 아닌 자유신학을 따랐을 때였다. 그 시대 네덜란드의 교회의 모습은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신앙의 근본은 성경에 있다는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Martin Luther & Jean Calvin)의 주장처럼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지 과거지향적인 신앙을 강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회복이라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본질로의 접근”이라는 말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신앙은 시대의 상황과 현상 세대의 문화와 신앙의 현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되어”(요1:1),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심”(창1)등 성경을 중심으로 Protestant Reformation을 일으켰던 것처럼 Sola Scriptura(오직 성경)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오직 은혜) Sola Fide(오직 믿음) Soli Deo Gloria(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의 다섯 가지에서 볼 수 있듯이 “회복은 본질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개혁주의생명신학의 5대 솔라(Sola)이기도 하다.

6) 아모스 9장 1-15절의 말씀에서 회복을 보았다.

아모스서의 특징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가난한 자들의 삶을 짓밟는 기득권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있으나 예언자적인 말씀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에 대한 심판과 경고가 나타나 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그리고 주변국가들의 행위와 하나님에 대한 거짓된 경외와 경배 등 많은 주제들이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택한 선민들에게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라 하시면서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암9:11)라고 하였다.

여기서 다윗의 천막은 곧 성막인데 다윗이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 입성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 천막을 치고는 법궤를 지성소에 안치하게 하였으며,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다”(대상 16:4).

사울 왕 때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우상을 섬겼고 또한 형식적이고 거짓된 예배를 드려왔던 이스라엘 가운데 이제 예배가 회복된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천막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제사의 향기가 예루살렘에 넘쳤고 레위사람들로 세워진 찬양대의 찬양과 경배가 반차를 따라 계속되었다.

하지만 지금 아모스 선지자는 이와 같이 다윗 때 예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회복”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지금 안타깝게도 다윗의 천막 곧 성막이 무너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성막 성전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때로 회복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암9:11-15; 행15:15-18; 사61:4).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암9:11). 그래서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모스에만 국한 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주는 예배에 대한 메시지다.

16세기 종교개혁이후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신앙으로 화려한 나라가 건설되고 세계적인 선교국가로 발돋움 하던 유럽의 국가들 특히 독일이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스웨덴, 네덜란드, 영국이라는 나라들은 아쉽게도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로만 있을 뿐 실제 교회를 출석하고 교회로 모여 하나님에게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예컨대 독일이 2차 대전이 끝났을 때까지만 해도 아헨, 뒤셀도르프, 헤이델베르그 등 이런 지역들은 교회 십자가 보다 더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었고, 마을에 가장 좋은 자리는 교회당에 십자가가 세워졌지만 지금은 그 곳들이 모슬렘과 힌두 그리고 각종 연회가 베풀어지는 리셉션 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나왔던 네덜란드는 교회의 건물은 있지만 그 안에 모이는 사람은 거의 없는 상태이고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을 세우고 개혁주의 신앙을 담고 있는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신조(Creed)요 신앙고백을 만들어냈던 영국은 복음화율이 불과 2%라고 하는 통계를 생각하면 진정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7) 예배회복은 곧 기업의 회복이다

예배는 회복을 위한 도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예배회복을 통해서 회복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기업의 회복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기업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유산, 유업, 상속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영어로는 “inheritance”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에게 복을 주셨고, 그 복이 그 다음 세대에 상속되는 것을 기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 곧 기업이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고 그 상실된 기업을 회복하게 될 때 예배가 그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복을 알게 되었으면 상실한 복도 알게 된다. 예배가 그 상실한 복을 회복시킬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And God blessed them)은 자손대대로 이어지는 기업(Inheritance)이 되었다. 영원히 소유(everlasting possession)할 수 있는 기업이었는데(창17:8), 그 하나가 생명기업이며 다음은 토지기업이며 하나는 교제기업이다. 물론 이것은 창조의 순서에 따라 여섯째 날에 사람이 지음을 받고 생령 곧 생명을 얻었고, 그리고 땅과 땅에 모든 것을 충만하고 다스리는 관리권을 받게 되었으며, 그리고 칠일 째 안식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기업이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얻게 되었고,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생명기업을 상실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음성을 두려워하면서 교제기업이 상실되었다. 결국에는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또한 에덴동산에서 쫒겨나 얼굴에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살게 됨으로 토지기업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상실한 기업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동물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며 예배하도록 하셨다.

8) 예배는 여러 가지 회복의 요소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예배는 주일예배 혹은 교회공동체에서 드려지는 예배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교회가 오랫동안 정확한 예배에 대한 정의를 목회학적으로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예배와 기도 그리고 예배와 찬양처럼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배는 신앙의 종합이다(the synthesis of religious worship). 예컨대 예배 안에 들어 있는 요소를 보면 기도가 있다. 그리고 말씀이 있으며 찬양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예배드리는 날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약속이다. 예배를 드리는 날을 구약에서는 ‘안식’이라고 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교제 다시 말하면 내적인 것으로 말하면 성령의 교통을 의미한다.

또한 제사에는 제물이 필요하듯 예배에는 예물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빈손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씀은 율법이라고 말하기 전에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질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희생의 제물은 예배자의 준비된 마음이며 동시에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에게 향한 사랑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예배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며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모여 하나를 이룬 것이기 때문에 예배는 신앙의 모든 것을 모은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기도를 영혼의 호흡(New Life)이라고 말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것과 같다고 한다. 출애굽 광야 생활하는 백성들이 하늘로서 오는 떡 만나를 먹음으로 광야생활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이자 영혼의 양식(Yielding for Manna)으로서의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양식을 받아먹는 사람들은 자기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찬양하고 전파(Salvation One by One)하는 것으로 구원받은 백성의 삶을 살아야했다.

또한 하나님께 나가 예배하는 날을 지킨다는 주일성수는 어쩌면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개신교의 마지막 보루(fortification)다. 왜냐하면 이 날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이며 성령과의 교통(Keeping for Lord's Day)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임재 속에서 만나 교제(Communion)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정성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Complete Offering) 구약에서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 1년 동안 흠 없게 기른 짐승을 드리며 번제가 되었던 화목제나 속죄제나 속건제로 드리는 자세일 것이다.

9) 예수님은 구원자시자 회복자로 오셨다

성경은 예수님을 구원자(Redeemer)로 말씀하신다. 또한 성경은 예수님을 치료자(I am the LORD, who heals you)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을 회복자(Lord, wilt thou at this time restore again the kingdom to Israel?)로 말씀하신다.

구속사(History of Redemption, Heilsgeschichte)란 하나님께서 주권적 의지와 계획에 따라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구원하실 일을 계시하시고 교회운동을 통하여 성취해 가시는 역사적 진행과정을 말하듯이,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고 부활 승천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세상을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라고“하셨다(요3:17). 또한”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예컨대 예수님은 역사의 주인이며 주관자 그리고 운행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라도 통달케 하실 수 있는 분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메시아로 오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롬10:13; 요5:24, 10:28-29; 요일5:12-13). 구원은 영원한 구원(히5:9)으로서 한번 구원받음으로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누구도 우리를 주님의 손과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또한 예수께서는 회복자로 오신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시고 눈먼 자와 앉은뱅이와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마귀 들린 자를 회복시키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눅5:31; 마9:12; 막2:17)라고 하시면서 회복자임을 밝혔다.

10)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의 개혁(Reform)과 회복(Restoration)

개혁교회의 신조는 장로교회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개혁교회의 신조인 벨직신앙고백, 도르트신경,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개혁신앙 표준문서들이 회복을 위한 지침을 우리에 주고 있다. 따라서 각 교단에 새신자를 위한 교육이나 혹은 신앙생활의 기초 등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교회에 처음으로 출석한 초신자를 상대로 가르치는 교리에서 기도와 말씀, 전도, 성수주일,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 등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초가 된다.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는 영혼의 호흡(new life)과 양식(Yielding for manna), 성도의 열매(Salvation One by One)와 헌신(Communion)과 봉사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주일성수의 경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7항과 8항은 그리스도 교회의 안식일인 주일과 주일성수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위하여 적당한 분량의 시간을 구별해 바치는 것은 자연법칙에 합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적극적이고 도덕적인 영구한 명령으로 요구하신 것이 있으니, 곧 모든 시대의 인류로 하여금 이레 중 한 날 을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히 지키도록 하신 것이다(출20:8,10-11; 사56:2, 4,6-7 참조).

이 안식일이 창세 이후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이레 중 마지막 날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활 이후부터는 이레 중 첫 날로 바뀌었다(행20:7; 창2:2-3; 출31:17; 고전16:1-2 참조). 이 날을 주일(主日, The Lord's Day)이라고 하며(계1:10), 이 날은 그리스도 교회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지켜져야 한다(마5:17-18; 출20:8,10 참조).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을 위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나니, (1) 그들은 마음을 준비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데 지장이 없도록 일반적 사업을 미리 정돈해 놓고, (2) 세상 사업과 오락에 관한 말과 생각과 행위를 일체 중단하고 안식할 것이며(사58:13; 출 16:23, 25-26, 29-30, 20:8, 31:15-17; 느13:15-19, 21-22 참조), (3) 그날의 모든 시간은 공예배와 사적 예배를 위하여, 또는 부득이한 책임과 자비 시행을 위하여 사용해야 된다(마12:11 참조).

주일성수의 중요성은 첫째, 예배의 중요성과 더불어 하나님과의 교제(Communion)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주일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교제(Fellowship)하는 거룩한 날로서 예배드리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공적 예배를 위하여 구별된 날이기도 할 뿐 아니라 성령과 교통하는 날로 지켜야 한다.

이것은 법적인 문제 이전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신앙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중에 115-121문까지 제4계명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제115문: 제4계명은 무엇입니까?

답: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제116문: 제4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4계명이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정하신 날 곧 이레 가운데 온전히 하루를 하나님께 거룩하게 지키는 일입니다. 그 날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까지는 제 칠일이었으나, 그 이후로는 매주 첫째 날이 되어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며, 신약성경에서 ‘주의 날’(주일)이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제117문: 안식일 또는 주일을 어떻게 거룩히 지켜야 합니까?

답: 안식일 또는 주일을 성수하려면 통상적으로 죄악된 일들뿐만 아니라, 평일에는 타당한 세속적인 직장 일이나 오락을 이 날에는 행치 아니하고 온 종일 거룩하게 쉴 것이며(부득이한 일과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일이 아니면), 공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모든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마음을 준비해야 하고, 미리미리 부지런히 절제하고 조절하며, 우리의 세속적인 일들을 적절히 정리하고 처리함으로써 그 날의 의무들을 위해 우리가 더욱 자유롭고 여유가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주일성수 뿐 아니라 기도와 말씀, 전도와 십일조 등은 개혁된 신앙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교회에게 있어서 언제나 회복되어야 할 마땅한 이슈가 된다. 예배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지면 나라와 가정이 무너진다고 할 때 성경적 의미를 보더라도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일상에서 따르고 행하여야 할 신앙고백과 더불어 생활에서 이와 같은 고백적 행위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열 가지의 이유와 동기로 예배회복운동을 하는데, 이 운동은 개혁주의생명신학에서 본 생명을 살리는 예배와 매우 일맥상통한 것이다.

2. 참된 예배와 거짓예배

하나님은 사람을 예배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세움을 입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배란 사랑하는 것이다. 성경 구약과 신약을 보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련되지 않은 내용이 없다. 그래서 성경의 시작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31)하시며 피조하신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신 것처럼,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영광과 존귀를 돌리며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

참된 예배의 시작은 예배의 대상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조금도 변치 아니하시며 영원 진리가 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예컨대 참된 예배와 거짓된 예배를 정의 할 때 예배의 대상과 예배자의 자세로 참된 예배와 거짓예배로 나눌 수 있다. 성경은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예배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고, 그 예배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과 멸망의 백성도 함께 나뉘게 된다. 신구약에서 참된 예배의 모형을 찾아 비교한다면 그 결과는 다른지 않다. 물론 나타난 행위로서는 다르겠지만 그 영적인 의미는 같다. 예수 자신이 “내가 그노라”(요4:24)한 것처럼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요4:25)라고 했다.

1) 참된 예배

요한복음 4장에 나타난 예배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참된 예배의 근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된 예배의 모형은 크게 신약에서는 수가성의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정의한 예배를 중심으로, 구약의 아벨의 제사와 신약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무덤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1) 하나님은 영이시다.

참된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영이시다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갖고 있는 "신적인 특성"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고유하신 본질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은 무한, 영원, 불변하시므로 한계나 제약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며 영원 자존하시고 시작도 없도 끝도 없으시다(왕상8:27; 시139:7-10; 출3:14; 롬11:33; 창17:1).

성경은 그 영이신 하나님과 대비하여 유한한 사람들을 가리켜 ‘육적인 존재’라고 한다(딤전1:17, 6:15-16).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죄인된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형적인 존재며(요1:8; 골1:15), 하나님은 영이시니 비물질적 존재이므로 물질로 사람이 만든 우상과 구별되어야 하며, 물질로 형상을 만들거나 섬기는 것을 금하셨다(출20:4-5).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의미는 만물과 인생에게 ‘생명과 힘’의 근원자가 되심을 보여주는 말이다(창2:7; 겔37:10). 그러므로 사람이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하려면 육으로 난 육으로는 연합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살 수 있게 거듭 나야 영이신 하나님과 연합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요, 비로소 영이신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수가 있는 것이요, 하나님은 이런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2) 거듭남의 예배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성 여인이 가지고 있는 예배의 개념은 구약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곧 예루살렘 성전과 조상들이 산에서 드렸던 단 제사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1,23)라고 했다.

이제까지는 정해진 장소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제물을 가지고, 세워진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렸지만 지금부터는 ‘영과 진리’, 곧 하나님이 보내신 흠 없는 어린양(요1:29)이며 대제사장(히5:10)이며 하나님의 성전(요 2:21)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게 됨을 선언한 것이다. 신약시대의 모든 예배는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예수로 말미암아 드려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불가능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와 같은 예배가 선언된 이상 공동의 예배에 있어서 약속된 장소와 시간과 절차와 질서가 반드시 존재할지라도 율법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하였다. 따라서 교회에서 약속된 예배의 절차와 질서를 형식과 법에 얽매이는 것으로 오해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더욱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도바울은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는 행위를 거칠게 다스렸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3:6)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나 혹은 사회에서는 항상 예배하는 자세를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3) 의로운 자의 예배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 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11:4).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롬10:17).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전해온 믿음이다. 아담으로부터 전수 받은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다.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고, 사람이 있었고, 말씀이 있었고, 죄지은 후에 희생 제사가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인류 최초의 불순종에서 죄로 사망으로 만들어진 사건을 통해서 어떻게 구원받게 되었나를 분명히 전해 주었을 것이다. 죄를 범하고 하나님이 두려워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어있을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들의 죄를 물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벌거벗은 몸을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창3:9, 21).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첫 기록이다. 가죽옷은 인류의 죄를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표이다. 아벨은 아담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아벨의 믿음은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다. 아벨의 제물은 양의 첫 새끼를 희생제물로 드렸는데 그것은 예배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실 때 희생제물보다 희생제물을 드리는 예배자를 먼저 보신다. 하나님의 눈은 사람이 제물을 드릴 때에, 제물에 먼저 눈길이 것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에 먼저 눈길이 가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shaah)하셨다. 아벨의 제사는 'A More Excellent Sacrifice'이다. 더욱 힘써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 해도 늘 부족할 뿐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고 했다. 우리가 더욱 힘쓰고 최선을 다 해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의 최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곧, 우리의 몸을 드리라는 것이다.

(4) 예배자의 자세

예배는 형식보다는 “영과 진리”로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의 태도가 그들의 삶이자 생활이다. 이 말은 예배는 곧 사랑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예배하는 것처럼,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예배 자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몸을 정결케 하고 악한 행실을 버리고 악에서 손을 떼라고 했다(사1:15-17).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들을 비롯한 내 이웃들의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단순히 휴머니즘적인 입장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많은 여인들 그리고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한 여인이자 예수의 사역을 도운 여인이다. 그녀는 일곱 귀신에 들린 채 고향을 떠나 살았기에 그녀의 생활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눅8:12). 많은 괴로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마리아를 방황의 길로 몰아넣던 일곱 귀신이 예수의 능력으로 떠나가고 깨끗이 고침을 받아 순수하고 온전한 신앙생활이 시작된다(눅8;3).

예수님을 만난 이후 마리아는 늘 주님의 곁을 따르며 자신의 소유를 모두 바쳐 그 사역을 돕는다. 주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과 충성은 누구보다 컸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일관된 사랑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한 위기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의 자리에 동참한다(마27:55-56).

예수님이 있는 곳이라면 무덤이라도 따라갈 만큼의 사랑이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예수의 무덤을 찾아가게 하였다(마28:1). 그 후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알고 제자들에게 달려가 고하고(요20:2), 무덤 밖에서 울고 떠나지 않고 있던 중 무덤에 있던 천사와 대화를 한다(요20:11). 그리고는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류 가운데서 처음 만난 여인이 되었다(요20:14-17). 그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이 되어 증거하였다(요20:18).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어두움에서 밝은 빛으로 구원의 능력을 입게 되었다. 그의 인생은 회복이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신 예수님이 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이다. 그래서 그녀는 “안식 후” “첫 날” “새벽미명”에 무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예배를 회복한 여인이 되었다. The first day of the week cometh Mary Magdalene early, when it was yet dark, unto the sepulchre, and seeth the stone taken away from the sepulchre(John20:1).

예배가 회복된 사람들이 특징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다는 것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니 이 때라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한 것처럼, 부활의 예수가 그녀를 찾아주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배자의 자세에 대한 롤모델이다. 예배하는 자가 이와 같은 자세를 갖고 예배에 임한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반드시 체험하고 성령의 충만함이 임할 것이다.

2) 거짓된 예배

거짓된 예배의 모형은 구약의 가인의 제사와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의 제사, 그리고 신약에서는 가롯유다의 제자생활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예배를 향한 자신의 태도가 문제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회복의 통로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이 예배, 즉 제사에서 꽃을 피웠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광야 사흘 길을 가서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한다”는 목적으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광야의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집 곧 성막을 세워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시작하고 그 뒤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단을 세워 제사드리고 정복 시대를 거쳐 예루살렘에 솔로몬 성전을 건축한 이후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제사장이 입을 옷, 성전에서 사용할 기구, 제사 드리는 절기와 방법 등등, 제사에 관한 수많은 규정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의 나라나 왕권이나 혹은 가정들을 보면 예배가 왕성할 때는 나라가 부강한 것은 물론 백성들에게 평화와 기쁨이 넘쳤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아니할 때는 나라가 어려움에 빠졌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으나 그 제사가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예배인가 아니면 거짓된 예배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바뀌었음을 아모스나 말라기 선지자들은 지적하고 있다(암5:21; 말1-4장).

(1)형식적인 제사

가인의 제사에서의 문제점을 볼 때 가장 우선되는 것이 예배의 자세였다. 그가 제물을 들고 나갈 때 그의 마음이 어떠하였는가를 보면 악한 마음을 가지고 준비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3;6-7)하였다. 그가 제물을 준비하고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모든 행위가 그 시작되는 순간부터 악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가인이 농산물을 제물로 삼고 제사를 드리던 혹은 동물을 희생의 제물로 제사를 드렸던 상관없이 그는 제사가 열납될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다 같은 제사요 제물에 차이가 있을 뿐, 그는 농사짓는 사람이니 당연히 그에게 있는 것 수확한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의 제사는 거짓되었기에 받지 않으신 것이다.

“소돔 관원들아, 야훼의 말씀을 들어보아라. 고모라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 보아라.”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 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사1:10-17). 심지어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행위조차 귀찮다고 했다. 제사행위자체를 거부했다. 제사의 방법이 틀려서 그렇게도 하였지만 그보다 먼저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의 태도와 자세가 문제였다.

문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태도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든지 하나님 앞에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과 불의와 사악함,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배반한 것이 문제였음을 말한다. 그러나 저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범적인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안식일, 매월 초하루, 유월절, 초막절, 칠칠절 등등, 많은 종교절기를 그들은 성실하게 지켰으며 제사를 드릴 때마다 희생의 제물까지 드리고 있었지만 다 형식적으로 행한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구원받을 수 없다. 또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세상의 정의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다. 하나님을 믿을 때 의에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비로소 구원을 얻는다. 이렇게 믿음으로 예배드려야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자 원칙이다. 신앙의 편의주의가 되면 사람의 업적이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으며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참된 믿음이 될 수 없고 사람의 편의를 위해 믿음을 이용하는 것이다.

제사의 행위로만 종교행위는 완성될 수 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삶에서 말씀을 제거한 것이다.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릴 때 하나님이 찾으시게 되는데 진리를 제거하고 제사적 행위만을 할 때 그들의 예배는 형식적인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형식적인 예배의 특징은 사람의 열심이 지나치게 비중을 차지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거짓예배라 하고 싫어한다고 하셨다. 너희가 기도해도 내가 듣기를 거부하겠다고 까지 했다.

(2)거짓된 예배자

Judas Iscariot는 어떠하였는가? 그는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였던가? 처음 그가 부름받을 때부터 주님을 사랑해서 따라나선 것같이 보이지만, 결과를 보면 그는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시몬의 아들이며(요6:7), 주께서 택한 열두 사도 중에 한 사람이며(막3:14; 요6:70) 돈궤를 맡은 자로서 부정을 행하였고, 베다니에서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지극히 비싸고 순수한 나드 향유를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부었을 때 가롯유다는 이 향유가 삼백 데나리온 나가는 것임을 알고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서 주지 아니 하였으냐 하고 비난했다(요12:4). 그러나 그도 제자들 사이에서 귀신을 쫒고 병도 고친 일이 있다(마10:1; 눅9:1). 그리고 지금까지 예수를 따랐던 것은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으나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예수가 로마에서 유대를 구원하지 않음을 보고는 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은 30개에 팔기로 하고 기회를 엿보다가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빠져 나가 팔아버렸다.

이것을 알았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을 때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했다. 이미 마귀는 그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던 것이다. 과연 가롯유다는 예수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은 자기의 이상과 목표를 위해서였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아니었다. “누구든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그 수단으로 찿는 자는 하나님을 발견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토저 박사는 말한다. 유다는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였을 때나 예수께서 기적과 이적과 표적을 나타내고 각색 병든자와 죽은 자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눈먼 자를 보게 할 때 다 현장에서 목격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거짓된 사랑은 변하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다다르게 되었다(마27:3-5; 시109:8; 행 1:18-20).

(3)사람이 만든 예배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Jeroboam은 에브라임 족속 스레다 사람 즈밧의 아들로 모친은 스루아이다(왕상1:26).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할 때에 역사 감독이 되었다가 그는 젊었을 때 솔로몬 왕에게 용맹과 부지런함을 인정받아 요셉족속의 노동 감독으로 임명받았다. 하지만 솔로몬의 가혹한 정치를 보고는 괴로워할 때 실로의 사람 선지자 아히야를 만났다. 아히야의 예언이 "네가 장차 이스라엘 10지파의 왕이 되리라" 하였다. 솔로몬이 이것을 알고 죽이려하므로 애굽으로 도망하여 시삭 왕에게 위탁하고 있었다(왕상11:27-40). 솔로몬이 죽은 소식을 듣고 돌아와서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기회를 차서 북방 10지파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왕상12:20).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것은 장차 자기를 배반할 염려가 있다하여 금송아지 두개를 만들어 하나는 북방 단에 두고 하나는 남방 벧엘에 두고 그것을 섬기게 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 여로보암 왕은 예배의 대상을 금송아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7월 14일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배하는 날이었는데 그는 날짜를 바꾸어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하여 예배하게 하였으며 북이스라엘은 제사장이 없었으므로 일반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워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예배였고 인간의 종교이자 거짓예배의 전형적인 모형이다. 가인의 제사가 결국 이스라엘의 악한 마음을 쫓아 여로보암의 종교로 이어진 것이며 이것은 인간의 화려한 종교로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거짓된 제사는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가 될뿐 아니라 백성들을 죄에 빠뜨리는 행동이 되었고(왕상12:25-33)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죽고난 후 제위 22년에 그도 죽었으며 아히야 선지자 말대로 왕조의 멸망했다(왕상14:17-20, 15:25-28).

III. 나가는 말: 생명을 살리는 예배회복운동

예수님은 우리의 구속자이자 구원자이며 회복자요 위로자이다(Redeemer and Savior, and the Recovery is Comforter). 이처럼 예수님에게 붙여진 이름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미를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이 사람의 옷을 입고 온 예수님은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끊임없이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고 하였다. “I am come that they might have life, and that they might have it more abundantly”(John10:10). 생명을 살리는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이다.

1. 생명되시는 예수님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기를 주어 생령이 되었으니 사람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 생명 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창1:27, 2:7). 이 사람 생명은 이 세상에서는 흙과 함께 살고 있고 분리될 수도 있다(민 16:22, 27:16; 마6:25, 10:28-33, 39; 요19:30). 모든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뜻에 의존하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하나님은 사람 생명을 사랑한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 상처입은 생명, 죽어가는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살릴 수 있다(사42:3; 요11:25-44). 하나님의 그 사랑이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셨다(요3:16-17; 딤전2:4). 하나님사랑이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십자가 고난과 부활 승천후,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성령부음을 통해 계속 볼 수 있게 하셨다(마16:17-18; 요14:21).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구원자요 질병과 죽음의 고통에 있는 생명을 치유하시고 살리는 회복자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요8:12; 마5:14-16). 생명의 빛으로(마25:31-46)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다(요8:12, 15:16, 사42:3; 막1:16-18, 29-31).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을 너무 사랑하셔서 사람의 아픔과 질병을 대신 짊어지시고 함께 아파하신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고, 따라서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며 그 생명으로 질병을 치유하고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요1:3-4, 3:16-17, 11:36, 14:12-14).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된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세상에서 소외된 세리와 창녀, 고아와 과부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섬겼으며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보호하시고 돌보셨으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사랑과 평화와 생명으로 회복시켰다.

2. 생명을 살리는 예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생명과 교제와 땅의 것을 다 상실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입히시므로 그들은 살게 되었다. 그로부터 그들은 하나님 앞에 희생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뿐 아니라 생명을 얻게 됨을 알게 되었고 땅에서의 형통함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동물 희생의 제사는 아벨에게 나타났으며 그리고 셋과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으로 이어졌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에녹에 의해 므드셀라, 라멕이 노아를 낳았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성경은 말한다(창5-6). 노아는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물의 심판이 끝난 뒤 그는 방주에서 나오자 바로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는 희생의 제사를 드렸다(창8:20-21).

노아 이후 셈으로 이어졌고 아브라함까지 계속되는 가계 속에서 하나님께 희생의 제사를 드리며 살아왔고 이삭과 야곱 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제사는 계속되었다. 성경 창세기 뿐 아니라 출애굽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켜주시고 광야로 나오게 하신 이유는 “사흘 길을 나가 하나님께 희생에 제사를 드리려 함”으로 말씀하고 있다. 레위기는 ‘하나님 앞에 희생의 제사를 어떻게 드리냐’가 나와 있으며, 민수기는 하나님을 예배하면 살고 하나님 외 다른 신을 섬기면 죽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신명기는 광야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곧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하는 가를 말씀하고 있다.

여호수아서 사사기를 보더라도 하나님 앞에 예배가 회복되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져서 백성들이 부흥하고 살며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면 멸망함을 보여준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하나님께 희생의 제물로 단을 쌓고 제사하고 성막에서 희생의 제사를 드리고 왕권시대에 성전중심의 희생 제사를 통해서 백성들의 생명을 하나님이 보장해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생명 되시는 예수님이 오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살리는 작업이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나이스크 예배회복운동 이해를 위한 회복신학에 대한 기초>②

Nyskc(나이스크)의 신학적 조망

1. Nyskc Conference 의 역사와 배경

NYSKC(예배회복운동)는 최고센목사(Goshen Choi, 뉴욕서광교회)가 1990년 초부터 연구한 예배회복신학을 접목하여 교회, 사회, 가정을 살리는 운동을 말한다. 1993년 그의 <요한복음의 연구 Theology of the Gospel according to John>에서 “회복의 신학(Theology of Restoration)”을 발표했으며, 이어 “기다림의 신학(Theology of Wait),” “전가(轉嫁)의 신학(Imputation),” “나이스크사상(Nyskcism),” 그리고 <기다리는 마음> (1, 2) 이라는 시집 등 많은 저술을 발표하면서 Nyskc Movement 가 체계화 되고 점점 강화되기 시작하였고, 예배회복사상이 북미주를 비롯하여 남미 유럽과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로 전파되어 가고 있다.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는 슬로건에서 잘 요약해 주고 있다.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켜서 옛적과 세우고”(암9:11)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회복하자는 운동이다. 이를 통해 교회를 개혁하고 성도의 믿음생활에 참다운 변화를 지향하는 것이 나이스크주의(Nyskcism)이다. 이는 실천적 사역이며 곧 예배로 승리하려는 예배회복운동이다. "예배가 없는 곳에서 예배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있는 곳으로"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 계시는 곳으로” 변화시키자는 것이다.

마태복음 28:19-20의 지상명제(The Great Commission)속에서 예배회복을 선교(Mission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삼아 세례를 줌), 교육(Education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구제(Ministration 막 10:45, 섬김과 희생)를 통해 전개하고 있다. 특히 도시선교 (Urban Mission)를 주력하여 매년마다 미국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가족 수련회(Family Conference)를 1993년부터 개최해 오고 있다. 3박 4일동안 회복의 예배자로 훈련을 받은 후 도시에 나가 노방전도를 실시하고 저녁에는 결신자들과 함께 지역 전도대회를 가져오고 있다 (New York, LA, Chicago, Atlanta, Baltimore, Denver, Portland, Toronto, Montreal, Hamilton, Osaka, London, Sidney 등). 각 교회 교사들을 Picture Bible Study로 훈련시키고 영재교육 (CERT Method)을 시키는 Teachers Colloquium을 매년 가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구제(섬김, 사랑, 희생)에 대한 Conference도 계획하고 있다.

나이스크는 Conference와 함께 학회(Learned Society)가 있다. 학회에서는 신학 전문 학자들이 회복의 신학(Theology of Restoration)을 연구하여 Nyskc의 신학을 조망(infrastructure & vision)한다. Conference는 예배회복(Restoration of Worship)이라면 학회의 과제는 회복의 신학(Theology of Restoration)이다. 전자는 실천신학 분야라면, 후자는 조직신학과 성경신학 분야에 해당한다. 본질로 회복하자는 슬로건아래 예배회복의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 실천적 체계를 정립하며, 교육분과, 선교분과, 예배분과로 나눠 회복의 신학을 세워나가고 있다. 지금까지 학회는 목회자 세미나(Seminar), 포럼(Forum), 심포지엄(Symposium)을 가지고 있으며, 교사들을 위한 교사 고등 수련회(Teachers Colloquium)을 지도하고 있다. 대표회장의 회복의 신학(기업 inheritance의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봄), PDP(Positive Dialectic Preaching 긍정을 위한 부정의 변증법적 방법) 성경공부 및 설교학, Picture Bible Study (말씀을 마음판에 사진을 찍어 관찰하는 성경공부법), 영적인 영재교육방법 (CERT Method = Christian Emothional Review Teaching), 기다림의 신학(Theology of Waiting), 전가(轉嫁 imputation)신학 알리고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개혁주의 교리 공부 교재도 제목별로 분류하여 65권으로 출판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계간지, 정기 학술지, 저술도 출판할 것이다.


2. Nyskc Movement의 성경적 기초

나이스크 운동은 회복신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 장로교는 ‘구원’이란 문제에 집착하여 구속사, 구원사에 많은 연구가 있었다. 소위 ‘구원파’라는 이단 사상도 한국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 개혁주의 세계관은 창조-타락-구속-완성인데, 구속사(Redemptive History)에 입각한 세계관 중심의 신본주의는 보수 정통신학에 많은 공헌을 해 오고 있다. 이런 신학적인 기초하여 나이스크는 ‘회복’이라는 폭넓고 깊은 개념을 연구하고 있다. 회복신학은 구원(혹 구속) 대신 “회복”을 선호한다. 회복은 부활, 소생, 부흥, 개혁, 구원, 치유, 평화, 경건, 무름(redemption), 회개, 탕감 등을 포함한다. 현상(그림자)에서 본질(몸, 실체)로 회복하며,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회복하며, 상실에서 복구를 추구한다. 에덴동산에서 상실한 생명기업(inheritance of life), 토지기업(inheritance of land), 교제기업(inheritance of fellowship)을 회복하자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타락 이전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소명에서 사명으로 (토지기업 회복) : 장막절(초막절) 양육되어

사명에서 순종으로 (교제기업 회복) : 칠칠절(오순절) 성령받아

순종에서 헌신으로 (생명기업 회복) : 유월절(초실절) 희생하자

그래서 안식일을 회복의 날로 만들며, 이를 기초로 절기를 주셨다. 월삭, 안식년, 희년을 비롯하여 3대 순례절기(유월절= 생명기업 회복, 칠칠절 혹 오순절=교제기업 회복, 장막절 혹 초막절 = 토지기업 회복)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회복의 완성자로 십자가와 부활을 이루셨다. 복음안에서 모든 절기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회복의 신학(Theology of Restoration)이다. 골 3:16-17에 있는 대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오늘 목회현장에서 수없이 드려지는 모든 예배의 성경적인 본질로 돌아가자는 정신이 나이스크 저변에 깔려 있다. 롬 12:1의 “거룩하고 살아있는 영적 예배” (a holy living spiritual worship)를 회복하기 위해 신앙생활의 5대 신조이자 강령은:

N: New life(새로운 생활) = 새벽기도, 영혼의 호흡

Y: Yielding for Manna (말씀으로 양육) = 성경애독, 영혼의 양식

S: Salvation for one by one (구령생활) = 개인전도, 성도의 열매

K: Keeping for LORD's Day (주일을 거룩히 지킴) = 성수주일, 성령의 교통

C: Complete Offering (온전한 헌금생활) = 일조전납, 축복의 도리요 헌신

이 다섯 가지 강령에서 영어의 첫 자를 따서 N.Y.S.K.C.(나이스크)라 부른다.

이 다섯가지 강령은 예배 회복의 도구이며, 성경을 보면 다섯가지 문(door)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책 어느 곳을 열어도 회복의 도구(tool)를 발견할 수 있다. 성경책은 66권이 다 연결되어 있기에 성경을 반드시 창세기부터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고, 신약은 마태복음부터 읽을 필요가 없다. 성경책 어디를 열어도 회복의 말씀이요 예배의 말씀이다.

3. 회복의 신학

예배는 회복이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회복케 한다. 모든 관계성이 바르게 회복된다. 치유가 된다. 문제가 해결된다. 땅의 것을 바라보던 관점이 위의 것을 바라보게 된다. 인본주의 관점에서 신본주의로 바뀌게 된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예배만큼 중요한 가르침이 없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예배의 순서와 내용, 예배의 준비와 뒷처리, 예배의 시간과 장소, 예배의 목적과 정신 등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가르치고 있다. 바른 예배,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배를 자세히 가르치며, 반복적으로 드리는 예배이지만 드릴 때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드려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예배는 늘 갱신되어 왔으며, 생동감 있는 예배, 살아있는 예배가 강조되었다. 하나님 이외 다른 데 예배드리는 것을 가장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예배의 기초는 성경이며, 성경은 예배의 지침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스크 학회(Learned Society)에서는 성경에서 보여주는 예배의 원형을 찾아 오늘날 예배의 문제점을 시정하고 초대교회의 예배 정신을 회복한다.

교회는 예배의 공동체로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교회의 목적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성도들은 세상에 나가 예배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일도 예배의 연장이다.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 (히 10:24).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유일한 대상이다. 키에르케골은 말하기를 “예배의 회중은 연기자들이며 ... 하나님은 관중이시다. 예배 집례자들은 연기자들에게 찬양과 예배의 선을 그어주는 자들이다” (The congregation is the collection of actors ... God is the audience and the worship leaders are the prompters giving "lines" of praise and worship to the actors.)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아름다운 형식에 맞춰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의 목적은 (1) 궁극적인 실재를 만나 하나가 됨으로써 세속적 인간이 신성한 영역에서 정신을 재확인하고 거기서 안정을 찾고 (2) 교육적 목적-세속적인 것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예배를 통해 배울 수 있고 (신성, 경건훈련) (3)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궁극적 실체 앞에 자기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있어서 실존적 자아의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의식은 인간의 행위중 가장 숭고하다. 세속적인 것을 벗어버리고 숭고한 것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모든 종교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대한 체험(신비, 입신, 강령, 임재, 만남, 소명등)과 이 체험을 묘사하는 표현매체(신화, 의식)가 있다.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인간은 무한한 시간과 한없는 공간을 동경하며 모방하려는 본능이 있다. 모든 종교적 의식(儀式 Ritual)과 예배는 바로 궁극적 실재의 존재와 활동에 대한 인간의 행위적인 전인적(全人的)인 반응과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와 의식을 통하여 예배 공동체가 형성이 되며, 여기에 따른 언어와 행동이 수반된다.

예배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시도된 지는 불과 40년여년 지나고 있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 속에 있는 현대 교회에서 예배의식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면서 예배학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미국에서 시작된 구도자(seeker)를 위한 현대예배(contemporary worship)는 전통예배 형식을 지양하고, 현대 감각에 맞는 예배형식을 개발하였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교회음악도 현대 감각과 리듬에 맞는 음악으로 발전시키며, 몸으로 드리는 예배(body worship)라 하여 율동을 사용하고, 심지어 연극(판토마임, 단막극)을 공연하여 종합적인 예술로 예배를 드리는 일이 교회성장과 더불어 인기를 모았고, ‘열린 예배’라고 표현하며 예배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지만 이또한 유행처럼 사라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주의 구원에 참여하는 예배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교회개혁의 핵심부분이 예배에 관한 신학의 차이라면 (주의 만찬에 대한 이해, 성상-성화사용문제, 구원 신학 등), 캐톨릭적인 의식으로 복구하는 일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은 중세시대의 예배의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이며 초대교회의 예배 모습을 회복하여 현대에 적용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이스크 운동은 성경적 예배를 회복하고 있다. 예배회복을 통해 교회를 세우고, 살리며, 나라와 가정을 회복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운동(Movement)이다. 즉 기도와 말씀 그리고 전도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킴과 예물의 드림을 신앙의 신조로 삼고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자는 신앙의 사상이자(Nyskcism) 강령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회복운동(Nyskc Movement)을 뜻한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본질이듯이 교회 중심적 신앙의 자세는 예배에 달려 있으며 예배가 살면 교회가 살아난다.

암 9:11-15 말씀을 기초로 삼고 창 35:1-8, 사 6:1-8, 사 58:12, 렘 1:10, 겔 37:1-14, 요 4:21-24, 롬 12:1-2, 히 11:4 를 기초한 예배회복 운동이다. 암 9:11-15에 있는 동사 중심으로 정리하면, 회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있는 곳으로"

이를 외우기 쉽게 영어 번역의 첫자를 따서 ICRDPM으로. 이를 나이스크 행동(Nyscism Action) 이라 한다. 6가지 실천사항을 소개하면:

(1) In that day 기다리라 – 회복의 날을 기다리라(기다림의 신학)

(2) Close up 막으라 – 틈은 막아야 한다

(3) Raise up 세우라 – 무너진 것은 일으켜 세워야 한다

(4) Develop 건축하라 – 황무한 성읍은 건축하여 거해야 한다.

(5) Plant 심으라 – 포도원에 포도를 심어야 한다.

(6) Make 만들라 – 수확을 얻어야 한다.

(1) 형통 Prosperity – 에돔의 남은 자와 만국을 기업으로 주심

(2) 수확 Harvest – 심고 거둠(수확)사이에 농한기를 없애심, 심는대로 거두게 하심

(3) 뽑히지 않음 Salvation –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않고 거 하게 하심

이렇게 하면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암 9:12)이 바로 나이스크주의(Nyskcism)이다. 나이스크사상(Nyskc-ism)은 개혁적 Reformation(reform oneself) 회복 즉 내적인(Recovery) 것과 외적인(Revolution)의 총체적인 회복(Restoration)의 사상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회복신학의 4R이다. 옛사람이 변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뜻대로 예배회복자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변화’ Transformation (롬 12:2)이라 한다. 없는 곳에서 있는 곳으로 가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을 바라보고 그 관점으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의 관점, 시각이 변화될 때 우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관점의 전환 transformation(시대적 변화, 회복)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예배란 피조물인 인생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성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생과 언약을 맺어주시며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 (벧전 2:9)으로 삼으신다. 감사기도, 말씀낭독 및 선포, 찬양 (시, 찬미, 신령한 노래, 골 3:16)등이 예배의 본질들 이룬다. 기독교 예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회복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완전한 사역이 바로 성부를 진정으로 경배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제정된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구약시대 및 회당예배와 달라 성례식이 추가되어진다. 성례식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관되어 있다. 칼빈(칼뱅)이 주장한대로 떡과 포도주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signs)이요 보장(pledges)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새하늘과 새땅을 상징하는 성례는 종말론적이며 가시적이다. 공중예배 (corporate worship)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가시적, 유형적 표징들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선포하고 실행에 옮기는 행위인 것이다. 예배자는 믿음과 순종으로 참여할 뿐이다. 입술뿐만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드려야 한다. 예배를 통하여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에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며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복음은 천국의 회복이다. 회복이 없는 신학은 율법이다. 회복이 없으면 율법적이다. 복음은 하나님 관점을 회복하고 있다. 이것이 개혁신학이다. 16세기 유럽의 개혁자들은 성경을 회복했고 믿음을 회복했다. 신앙의 본질을 회복했다. 성경은 회복의 생명책이다. 말씀대로 하면 교회가 회복되며 믿음이 회복되며 예배가 회복된다. 회복신학에서는 이를 기업회복이란 관점에서 이해한다. 이신칭의(以信稱儀 justification by faith)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창 15:6, 합 2:4, 롬 1:17, 3:28, 갈 3:11, 3:24)은 믿음이 회복되면 생명기업, 토지기업, 교제기업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를 회복신학적으로 다시 읽으면 “복음 안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믿음으로(ek pisteos, from faith = 토지기업회복) 믿음에(eis pistin, to faith = 생명기업회복)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회복된 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ek pisteos, by faith = 교제기업회복) 살리라”

“본질로 돌아가자”는 구호인 ad fontes은 라틴어로 “원 샘물로” (return to the fountain or spring)란 말인데 “본래 자료(primary sources)로 돌아가서”란 르네상스 (文藝復興)인본주의자들의 모토(motto) 였다. 14세기부터 사용된 이 용어는 학문 연구에 있어서 원 자료에서 직접 연구하자(fundamental research and of consulting primary sources)는 구호였다. 지금도 학계에서는 이 정신이 지배적이다. 특히 박사학위 논문은 다른 글을 인용하는 것 보다 원래 자료에서 직접 연구하여 발표하도록 하고 있다. 이 구호가 16세기 Erasmus가 즐겨 사용했고, 기독교 개혁가들(루터, 칼뱅)이 채택하면서 기독교의 신앙의 뿌리를 가르쳐 주는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이다(the Protestant Reformation called for the return to the Bible as the primary source of Christian faith.) 캐톨릭의 교리나 교황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개혁정신이었다.

개혁주의는 회복을 가르치고 있다.

1)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회복이다(iustitia Dei 하나님의 의).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for the glory of God)이다.

2) 본질을 깨달으면 현상도 이해된다. 복음(십자가와 부활)의 본질(Theology

of Cross), 교회의 본질, 신앙의 본질, 예배의 본질을 회복했다.

ad fontes (본질/fontes) 성경, 초대교회, 바른 신학과 전통의 회복

현상: adiaphora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님, 갈 5:6, 6:15)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롬 14:17; 음식 롬 14:20

마 6:25-32

본질: diaphora (갈 6:15,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고후 5:17)

5:6,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롬 14:17 하나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 평강, 희락

롬 14:23 믿음을 따라 하는 것

마 6:33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함

본질 Essence – 회복의 역사 일어남

현상 Phenomena – 화려하나 변화가 없음

1. 본문 Text

배경 Context

2. 몸체 body (gospel. Christ) 신약

그림자 shadow (law, season/festival) 구약

3. 주석/석의 (exegesis)

주입/증명 (eisegesis)

4. 유형론 (typology)

우화 (allegory)

5. 내용 (content)

형식 (form)

6. 생명나무, 좁은 길, 반석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실과, 넓은 길, 모래

3) 하나님의 주권, 섭리, 신본주의(하나님의 관점 Theocentricism)를 회복했다.

4) 성경적 교회와 예배를 회복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1권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knowledge of God), 경건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 지식이 없다. 하나님을 알아야 경건을 알 수 있다. 4권에서 예배의 경건성을 잘 소개하고 있다.

5) 완전한 회복이 올 때까지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 모여서 예배드리고 흩어져서 봉사하자

- 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의 예배

- 신령과 진정(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

-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 (Theocentric) dialectic

1. 예배의 관점

예배가 신앙생활의 기본이며 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배가 신앙생활의 방향이며 푯대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배가 없는 선교, 예배가 없는 전도, 예배가 없는 교회설립, 예배가 없는 신앙성장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배는 절대적인 항복과 갈망의 표시로 하늘로 향해 두 손을 드는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다. 예배야 말로 하나님께서 작은 공간의 한정된 관점에 갇혀 있는 우리들을 들어 올려 그분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도록 하시는 방법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예수 = 예배

모든 신학을 예배의 관점에서 보자.

욥기를 예배의 관점에서 읽어보기 시작하자

사도행전을 선교로만 보지 말고 예배의 관점에서 읽어 보자 (특히 9장)

바알 선지자들이 발광함, 기다려 주라(대강절, 무조건 기다리지 말고 그 날을 생각하며, 그 시간까지 기다리면 된다.)

기다림의 사건 - 영점까지 내려가서 기다리라. 완전히 내려가자.

불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성도를 만들자. 그러면 주님께서 불을 주신다.

2. 영점의 가치

고전 1:2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점이 될 때 쓰시기 시작한다. 자신이 깡통이 되었다 = 내 것은 모두 다 비우다, 그리고 주님의 것을 채움,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나 사실이다. 그러면 주님의 것으로 채우기 쉽다.

죽음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목회를 못한다. 그 분이 없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고난이 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그대로 버려두신다.

욥의 영점이 어딘가? 세 친구의 공격에 자신의 정당성 변호(하나님의 세계 까지 침범), 엘리후, 자기 믿음을 자기가 지켰다는 의를 포기할 때까지 가다. 영점.

3. 확대의 법칙

하나님께서 직접 욥의 앞에 나타나심

욥 38:1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기상 악화시 조종사에게 고도를 높여라고 지시함

신앙도 낮으면 낮을수록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믿음의 고도가 낮을수록 위험하고 불안하다.

믿음의 고도가 높아지면 바라보며 날 수 있다.

예배는 그러한 환경에서 벗어나게 하는 고도를 높이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의 고도를 뚫고 기도와 찬양하니 상상치 못할 일이 일어나다.

예배자에게 확대의 가치, 법칙을 주신다.

돋보기를 통해 메뚜기를 보면 커 보인다. 그렇다고 메뚜기가 커지는 것이 아니다. 허상이다.

커보이는 것뿐이다. 하나님께 가장 커 보이려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 73:28)

큰 사람 옆에 가면 커 보인다.

magnify: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이 커 보인다. 확대의 법칙,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4. 예배와 생명

예배에 생명을 걸으라.

주님께서는 예배와 생명을 하나로 보심, 이 법칙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끌고 가신다.

52주 주일 예배를 멈출 수 없다.

52주 수요 예배를 멈출 수 없다.

매일 새벽기도회를 멈출 수 없다.

금요 기도회를 멈출 수 없다.

환경에 의존하거나 영향을 받지 말자.

모든 예배를 소중히 드리자.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자(요 4:22-24)

노아는 수천, 수만 세대의 사람들이 방주 밖에서 무참히 죽어갈 때 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을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8:1) 권념이란 돌아볼 생각을 했다. 기억하셨다 (Zaqar, to remember)

라합의 붉은 줄을 보고 군인들이 이 집을 보호(기억함).

Is

방주: 길이 135m, 너비 22.5m, 높이 13.5m

노아가 601세 되던 해 2월 27일, 땅이 완전히 말랐을 때 마침내 기다렸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여왔다. 16절에 “노아야 방주에서 나오라” 얼마나 듣고 싶었던 음성이었을까?

나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서 산 제사를 드렸다.


욥기서가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다. 예배론,

사탄은 동물들을 다 죽임, 하나님께 번제.

두 배의 동물을 주신 것은 예배를 마음껏 드리도록 산제물을 주심.

5. 접근의 힘 (약 4:8-10)

접근은 관계 문제이다.

가까이

예배는 회복의 도구이다.

예배가 중심 되는 목회,

예배가 중심 되는 목회자.

<기다림의 신학>

기다림은 약속을 간직한 사람에게 있다.

회복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자.

기다려 주라(대강절, 무조건 기다리지 말고 그 날을 생각하며, 그 시간까지 기다리면 된다.)

기다림의 사건 - 영점까지 내려가서 기다리라. 완전히 내려가자.

불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성도를 만들자. 그러면 주님께서 불을 주신다.

<나이스크 예배회복운동 이해를 위한 회복신학에 대한 기초>③

Nyskcism(회복의 사상)

에스겔 37:1-14

뮬러는 희망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 중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절망과 실패라는 깊은 골짜기 속에 빠지는 반복적인 모습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죄악을 범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70년 동안 이스라엘은 절망 속에 빠집니다. 그들은 소망이 없는 자들과 같이 낙심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하나님은 마른 뼈에 비유를 해주셨습니다. 뼈만도 소망이 없는데 말라 비틀어진 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생기를 불어 넣어줄 선지자를 세우셨는데 그가 곧 에스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골짜기에 있는 마른뼈의 이상이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골짜기를 말합니다. 이런 절망적인 광경을 바라본 에스겔은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요? 아마 욥이 자신의 집이 무너져 자녀들이 다 죽고 재산을 잃어 버린 광경을 보는 것과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인생은 때론 소망이 없는 안타까운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마른뼈와도 같이 아무런 힘도 없고 가치도 없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이 마른 뼈와 같다고 하여도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에게 어떻게 사용되어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앉은뱅이라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앉은뱅이였기에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소경이었기에 눈을 뜰 수 있었고, 죽은 자였기에 ?나사로야 나오너라? 는 말씀에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 시간 우리들의 이 모습 이대로를 주님 앞에 솔직하게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깁시다. 하나님은 마른 뼈를 바라보고 있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물었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에스겔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주 여호와 주께서 아시나이다? 에스겔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마른뼈가 살고 죽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믿고 그분의 처분에 맡겼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싶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려 주셔야만 살 수 있는 자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그러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를 향하여 외치라고 하십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절망 중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른 뼈가 살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절망 중에 빠진 자가 살 수 있는 비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능하다고 생각될 때 자신의 생각으로 된다? 혹은 안된다?를 결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났고,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 나왔듯이 절망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이 뼈들이 다시 살리라고 하십니다. 생기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11절"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 중에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외치지만, 그 때 하나님은 "너희로 살게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마른 뼈와 같은 존재들이지만 마른 뼈를 능히 살려주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들도 살려 주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마른 뼈를 살려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6, 13, 14절에서 모두 너희로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시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Nyskcian의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죄악의 구덩이에서 건져 내어주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뼈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회복의 사상에는 3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1. 뼈들이 서로 연락(come together)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뼈들에게 힘을 주시고 살을 입히고 가죽을 주리라고 말씀하시니 뼈들이 서로 움직여 연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열심히 움직이는 것을 말씀합니다. 서로 도와 하나님의 몸체를 이루는 것을 말씀합니다. 흩어져 제멋대로 돌아다니던 뼈들이 서로 만나 하나로 이루어져 나갔듯이, 우리의 흩어진 모습들이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로 뭉쳐지기를 바랍니다. 뭉치면 살 수 있습니다. 흩어져 있으면 마른 뼈와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는 Nyskc로 하나가 되십시다.

2. 생기(breath)가 들어오는 단계입니다.

흙으로 아담을 만드신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도록 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마른 뼈에게 생기를 불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생기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내 신” 즉 하나님의 성령을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Nyskcian 모두를 은혜 안에 거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나는 무능하여도 성령께서 나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성령은 기도할 때 임하십니다. 성령은 열심 있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성령은 받아들이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성령은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3. 마지막 단계는 살아 일어서는(stood up) 단계입니다.

10절에 보니 살아 일어서는데 극히 큰 군대(great army)더라고 했습니다. Nyskcian은 아주 큰 군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므로 하나님의 십자가 군병처럼 전진해 나갑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이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Nyskcian!

Nyskcism은 회복의 사상입니다. 즉 살아나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회복되어야 합니다.

낙심의 골짜기에서 일어납시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에서 일어납시다.

사람이 돕는 것이 아닙니다.

Nyskc를 살리는 분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실패의 두려움에서 일어납시다.

그리고 “너희 마른 뼈들아 들을지어다”라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Nskc를 맡깁시다. 우리들은 마른 뼈와 같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Nyskcian들을 연합하게 하신 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Nyskc Movement (예배회복운동)입니다. 예배가 살면 교회가 살아나고 가정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나이스크 예배회복운동 이해를 위한 회복신학에 대한 기초> ④

: 나이스크 예배회복 5가지 행동강령

Nyskc Creed


주성철 목사(GRI Leader, Daniel Kim)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한없이 사랑하시면서도 때때로 이들을 심하게 심판하실 때도 있었다. 하나님은 늘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번영을 허락하시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이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살았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에 가증한 것들을 가져다 놓고 이방신들을 섬긴 것이다. 이런 것을 보신 하나님은 이방 민족을 사용하셔서 이들을 경책하시고 이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보여 주신 것이다.

다윗의 무너진 천막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주님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란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예배란 것을 가르쳐 주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를 만드신 것이다. 이런 예배 (제사)를 통해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 후에는 성막의 시대가 찾아왔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거기서 내거 너와 만나고 너희가 할 일을 가르쳐 보이겠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궤”를 만들어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고 장막속에 있게하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거기에서 만났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의 상징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계획과 방법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을 떠나면서 광야 생활을 하는 가운데, 또한 심지어는 가나안 땅에 살면서도 이들을 하나님을 외면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각으로 이방신들을 하나님 대신으로 섬기면서 그 이방신들이 마치 자신들을 노예에서 해방시킨 신이라고 하면서까지 우상숭배를 한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을 세우고 레위인들을 세워서 예배를 인도하고 집례하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 말씀을 받고 있을 때에 모세가 더디 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여서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다. 이 때에 아론은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이면서도 불구하고 금으로 송아지 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송아지 상이 애굽에서 인도해낸 신이라고까지 한 것이다. 출애굽기 32장 4절부터 6절에,“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튼 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라고 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그 이후로는 수시로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방신들을 섬기게 되었고, 아론의 아들들, 즉 홉니와 비느하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들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께 향한 근본적인 예배의 자세는 무너져 버린 것이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보니 백성들도 영적인 분별력을 잃게 되고 결국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고 계시던 하나님은 어떻게해서든 이들을 돌이키려고 말로도 해보고, 가믐과 질병으로도 다루어보고, 심지어는 주변 국가들을 사용해서 경고도 했지만, 마지막 노예로 잡혀갈 때까지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암울한 시대를 우리는 사사시대라고 부르는데, 이 때에도 사람들이 곤경과 어려움을 당하고 나서는, 그것도 잠시 하나님을 예배하였지만, 곧 그들은 미혹되어 다시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이다.

그 이후에 왕정시대가 시작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분명 그들이 어떻게 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사는지를 말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요구하는 죄를 지었다. (삼상 12장)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께서는 하솔 군장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압 왕의 손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징계하셨는데 이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이들을 권케 하셨고, 하나님이 만왕의 왕 되심을 나타내심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계속 주님께 등을 돌린 것이다 (삼상 12:8~12).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상징인 “하나님의 법궤”를 잘못 사용하여 성막에 있어야 할 법궤를 전장터로 가지고 갔다가 결국 블레셋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법궤를 원수들에게 빼앗긴 이스라엘은 다윗이 왕이 될 때가지 찾지 못하고 결국 다윗 때에 하나님의 법궤 즉 하나님의 상징을 도로 찾아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전으로 다시 옮겨놓게 된 것이다. 이 일이 얼마나 즐겁고 기뻤던지, 다윗이 아랫도리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추었던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이다. 그 후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그가 하나님 앞에서 득죄하여 결국에는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남 왕국은 남 왕국대로 북 왕국은 북 왕국 대로 하나님 앞에서 득죄한 것이다. 특별히 북 왕국의 여로보암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에 초대 왕이 된 여로보암의 이야기이다. 그는 솔로몬이 죽고 난 후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때 북 왕국의 초대 왕이 된 자다. 그는 에브라임 사람인데 그 부친은 느밧이고 솔로몬 왕의 심복이었다. 그자 젊었을 때에는 그의 부지런함이 인정받아 솔로몬으로부터 요셉 족속의 노동을 감독할 수 있도록 임명되었다 (왕상 11:28). 그가 어느 날 길에서 실로사람 선지지 아히야를 만아게 되었다. 아히야는 그가 입던 새 의복을 열 두 조각으로 찢어 그 중 열 조각을 여로보암에게 가지게 하고 그가 이제 10지파를 지배하는 왕이 될 것을 예언 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했고, 그 이유로 여러보암은 애굽으로 도망가서 시삭에게 그의 몸을 맡긴 것이다 (왕상 11:29~40).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보다는 사람의 왕, 즉 애굽의 시삭을 의지하게 된 것이다. 만약에 르호보암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예배하는 자 였다고 하면 아마도 이스라엘 어느 곳에서 숨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보다는 사람을 더 의지해서 결국 애굽으로 몸을 피신한 것이다. 이것부터 그의 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었던 것이다. 솔로몬의 사후 그는 애굽에서 돌아와 회중과 더불어 르호보암 왕에게 가서 중세(重稅)와 노역(勞役)의 경감(輕減)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마침내 10지파와 함께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왕으로 옹위되었다. 그래서 아히야의 예언은 실현되었다. 아히야의 예언이 가시화 된 것은 사실이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북이스라엘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여로보암은 아히야의 예언에 있던 권고를 무시하였다. 그는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유다 왕의 꼬임에 자시의 백성을 잃게되고 그 백성을 잃게 되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을까! 백성이 없은 왕이 과연 왕이 될 수 있을까!란 염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서 떨어져 나가는 행동을 자행했던 것이다. 첫째로, 백성이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자기의 왕위가 위태로워 지지 않을까 하여 나라의 남북 양단(벧엘과 단)에 예배 중심지를 설치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숭배하였던 것이다(왕상 12:26-30).


Definition of Nyskc

(아모스 9:11-15)

11절.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절.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14절.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 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 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15절.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 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 그 날이 오면 내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고, 그 터진 울타리를 고치면서 그 허물어진 것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 집을 옛날과 같이 다 시 지어 놓겠다.

(12) 그래서 에돔 족속 가운데서 남은 자들과 나에게 속해 있던 족속을 이스 라엘 백성이 차지하게 하겠다. 이것은 이 일을 이루실 주의 말씀이다.

(13)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 때가 되면, 농부는 곡식을 거두고서, 곧바로 땅을 갈아야 하고, 씨를 뿌리고서 곧바로 포도를 밟아야 할 것이다. 산 마다 단 포도주가 흘러 나와서 모든 언덕에 흘러넘칠 것이다.

(14) 내가 사로잡힌 내 백성 이스라엘을 데려오겠다. 그들이 허물어진 성읍들 을 다시 세워, 그 안에서 살면서 포도원을 가꾸어서 저희가 짠 포도주를 마시며, 과수원을 만들어서 저희가 가꾼 과일을 먹을 것이다.

(15) 내가 이 백성을 그들이 살아갈 땅에 심어서 내가 그들에게 준 이 땅에 서 다시는 뿌리가 뽑히지 않게 하겠다. 주 너의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아모스 9:11-15). (표준 새 번역)

나이스크란 무엇인가? 이미 여러 많은 강사들과 책자들 기리고 인터넷을 통해서 알려진바 된 것이지만,

첫 번째로, 나이스크란? 예배회복을 위한 도구(tool)인 것이다.

아모스서 9장 11절~15절을 중심으로 그 날에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는 말씀을 기초로 회복의 신학을 정립하고 예배 회복을 위한 신앙생활의 5가지 Creed와 Article of Faith로 새벽기도로 영혼의 호흡을, 영혼의 양식을 위하여 성경애독, 성도의 열매를 얻기 위해 개인전도, 성령의 교통을 위해 성수주일, 축복의 도리 곧 헌신을 위해 온전한 예물을 드림으로 예배를 회복하여 교회 회복을 이루려는 뜻이다.

또한 Nyskc는 신앙의 본질로서의 접근이다. 영적 교육 방법 (Spiritual Education Method)로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구원의 도리(Salvation)이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Principle of Action이며 예배로 승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비전이다. 그러므로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는 Nyskc Theme으로서 thought and ensign for the Restoration of Worship이다.

두 번째로, 나이스크의 대표적인 주제는 아모스서 9장 11절~15절에 기초를 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현대교회는 지난 18세기 19세기의 유럽 교회를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의 참다운 말씀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 보다는 교권과 권력, 부귀영화 등등, 즉 세속적인 가치관들을 세상도 아니고 교회 안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예배 속에서 형식과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려는 자세로 진행되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1) 우선 예배시간은 짧아야 된다. 그리고 설교도 역시 길면 안되고,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 속에서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예배가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야 현대 감각에 맞는다는 것이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다른 일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에 시계를 보면서 예배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일전에 미국 친구 목사와 이야기하는 가운데, 교회 안에서 두 부류의 교인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을 자동차 주차한 모습을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 머리를 제대로 주차한 사람과 자동차 머리를 바꾸어 주차한 사람, 즉 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헤드라이트를 출구 쪽으로 향해 주차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인 교회들을 보면 예배가 끝난 후 5분내지 10분이면 파킹장이 거의가 빈 것을 본다. 예배가 주일의 축제가 된 것이 아니라, 형식에 불과하여 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자신

들의 의무를 다 했다는 형식이다. (2) 자녀교육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참석하는 동기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올려 드리는 것 보다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교회를 출석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척교회나 아니면 중소 교회는 사람들이 오지도 않지만, 왔다가도 곧 큰 교회로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곳에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잘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그램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프로그램에 앞서서 본질인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부터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이민 교회에서 학생들이 자신들의 담임 목사가 누구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3) 헌신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로,“예배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는 질문에 현대 교회는 헌신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스크린으로 예배를 봅니다. 헌신할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것이 한국교회나 이민교회에 대명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보고, 오케스트라가 동반된 성가대의 찬양과 독창자의 기교있는 음악 솜씨를 듣고, 또는 드라마의 한 토막의 촌극을 보고, 간단한 말씀을 듣고는 그것이 예배를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보는 관점이 틀릴 수는 있지만, 어떤 이들은,“신약에는 십일조를 하라는 언급이 없기 때문에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니는데,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인색함이 없이 바치라고 한 말을 어떻게 풀어 내려가는지... 아마도 십일조보다도 더 많은 것을 주님께 드리라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성경을 신구약으로 나누어 보는 잘못된 가르침들이 현대 교회들 속에 속속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외에도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겠지만, 일단 현대 교회에서 예배가 무너졌다는 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는 신조가 우리들의 가슴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 21세기의 말세지말에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은 무너진 하나님의 장막을 다시 세우는 일이요, 터진 곳을 수축하고 새롭게 세우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나이스크는 적은 불씨와도 같은 것이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져나가 이제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것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나이스크는 예배 회복을 위한 도구이다.

예배 회복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원리로 되어있다. 나이스크의 5대 강령은 결국 행동 강령 (Principles of Action)을 만들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이 5대 강령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다 해 온 신앙 강령으로 다시 정리해서 새롭게 신앙의 표준을 삼고자 하는 것이다. 이 5가지 신앙 행동 강령은 Nyskc Creed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이 되겠지만, 참 예배자의 기본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어떤 형식으로 끝이 난다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이것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참 예배자의 모습이라고 했을 때, 목회자나 평신도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고, 그런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은총을 받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라고 했다.

믿음이란 기초가 마련되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믿는 자들의 증거가 무엇이겠는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예배를 드리는가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실질적으로 무엇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이 동반된 예배인데, 그 믿음은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다. 믿음이란 Infra가 구축이 되면 결국 집 모양을 달라질 수 있으나 기초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종종 “Do you have enough Chips?”란 말을 잘 한다. 여기에서 “Chips”란 도박할 때 쓰는 모의 돈을 이야기 하는데, 자신이 게임을 할 때에 넉넉함이 있느냐? 라는 말이 된다. 이 말은 종종 어떤 일을 계획하거나 게임에 임할 때에 내게 충분한 힘이 있느냐? 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물론 예배에 대한 믿음을 이런 Chips로 비유한다는 것이 유치한 말인지는 몰라도, 결국 우리들은 가장 기본적인 기초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본질 보다는 현상을 많이 추구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서 나이스크에서는 5가지 신앙의 행동강령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행동 강령을 좀더 구체적이고 실행적인 면에서 고찰해 보면서 행동이 동반된 원리를 강조할 때 우리는 진정한 예배 회복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것이다.

The Nyskc Creed

I. New Life (새벽기도-영혼의 호흡)

첫째로, 하나님의 능력은 새벽에 역사한다.

(1)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는 거의 모두 새벽에 역사 하였다. (출 14:21~31) 옛 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침(새벽)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에 특별히 적합한 시간으로 생각하여 왔다. 시편 5편 3절에,“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루가 시작되는 은밀한 시간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의무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해야 하는 고유한 특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 나만의 교제의 시간이다. 새벽기도를 통하여 그날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날의 첫 시간을 기도로서 시작하며, 새벽에 주님과 교제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권이고 의무이다.

(2) 새벽에 우리들의 온 영과, 혼과, 육이 하나님께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제일 큰 유익을 주는 행위이고, 사탄 마귀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잠시도 분리시키지 못하게 하는 은총의 순간 인줄 믿고 있다. 새벽 시간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몰두할 수 있는 최고의 좋은 시간이다.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이 없이는 한 순간도 버틸 수가 없다. 이것은 오직 새벽기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와 울부짖어 기도할 때 하루 온 종일 하나님과의 동행을 할 수가 있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또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영적으로 거지와 같은 신세가 되어서 인생의 찌꺼기와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서 날마다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 천국 잔치에 아름다운 영적 옷을 입고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풍성한 만나를 먹고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은 바로 새벽기도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간 입은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고,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생수를 마시면서 광야생활을 잘 하였다.(신8:4) 이와 같이 오늘의 우리들이 하루의 삶 속에서 아니 일생의 삶 속에서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으며, 양식이 핍절치 않는 가나안 정복의 기적의 역사는 바로 새벽 시간에 시작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왜 새벽기도를 해야 하는가? (필요성)

새벽 한 시간 나의 모든 것이 성령의 지배 아래 사로잡힐 때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세주이신 것”(마16:16)을 고백할 수가 있고 “내게 능력 주시는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하는 영적 자부심과 영적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1) 영적 자부심과 영적 자신감을 위해서 새벽기도를 한다.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로 시작할 때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어 나를 강하게 만들고 나를 붙들어 주신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힘있는 무기는 바로 영적 자부심이다. 물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또는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고 나온다고 해서 교만해 질 수도 있지만, 아침에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자신감을 허락하셔서 하루를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2) 새벽에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이런 말을 할 때에 혹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다. 하나님은 꼭 새벽에 기도해야만 들으시는가? 물론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기도하면 들으신다. 하지만, 말씀에 기록하시길 새벽에 주님께서 깨우셔서 주님께 부르짖게 하신다고 기록하였다. 새벽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새벽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만나를 내려 주신다.“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8) 믿는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치명적인 실수를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살인하고 강도짓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도하지 않는 죄이다. 이것은 가장 어설프고 형식적인 믿음이 되고, 기도 없이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3) 새벽을 깨우는 파수꾼이 되자. 새벽을 깨우면서 우리들은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생존경쟁에 있어서 뒤지지 않으려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본다. 요즘 새벽기도회를 가다보면 새벽 4시부터 교통 체중으로 힘들 때가 있다. 물론 이 모든 사람이 새벽기도회를 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 남보다도 더 일찍 일어나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통계를 보면 미국에서 100명의 천만장자 가운데 하루에 수면은 4시간 이상 자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를 섬기면서 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믿음의 권속들이 해가 중천에 이를때까지 자리에 누워 있어야 되겠는가! 새벽을 깨우는 파수꾼은 결국 가정을 깨우게 되고 국가와 민족을 깨우게 되고, 생동력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새벽기도를 하는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있고, 새벽기도 하는 성도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여호와여 새벽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새벽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셋째로, 새벽기도를 통해서 승리한 사람들

(1) 야곱은 새벽에 하나님께 매달리다가 은총을 받은 사람이다. (서원기도, 소원기도)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은 외삼춘 라반의 집에서 나와 가족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지난날 형 에서와의 관계에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강청한 일이 있다. 그는 가족과 모든 재물들을 얍복 강을 먼저 건네게 하고 혼자 얍복 나루에서 밤을 지세우게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했는데, 새벽녘에서야 그가 응답을 받게 되었다. 야곱은 밤이 새도록 씨름을 한 결과 새벽녘에 응답을 받아 야곱이란 이름에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2) 모세는 새벽에 홍해를 가르고 애굽의 군대를 무찔렀다. (기적, 승리, 위기에서의 구원, 보호)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시기 위해서 바로와 그 백성들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렸다. 그 마지막 재앙을 이기지 못한 바로는 결국에 이스라엘을 놓아 주게 되었는데, 놓아주고 나서 미련이 생겨 이스라엘 민족을 쫓고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매우 난감한 처지에 있었는데, 앞에는 홍해바다요, 뒤에서는 애굽의 군마들이 달려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왕좌왕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출 14:14)라고 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홍해 바다위에 놓으라고 해서 모세가 그렇게 했는데, 그 때가 새벽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새벽에 홍해바다를 가르시고, 그 가르신 홍해 바다 속에 애굽의 병거들을 모두 수장시키신 것이다. (출 14:27)

(3) 여호수아는 새벽에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다. (문제해결, 목적달성, 성공)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여리고 성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여리고성을 이스라엘 민족의 손에 붙이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데 있어서 사람의 방법으로 싸움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는데 그것은 말씀대로 따른 결과였다. 특별히 마지막 일곱 번째 날에 제자상자들이 양각 나팔을 불려고 나간 때가 새벽이었다. 여호수아서 6장 15절은,“제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 일어나...”라고 시작한다. 이스라엘이 당면한 문제 해결과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는 목적이 새벽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4)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시고 전도하셨다. 새벽 기도의 가장 좋은 본 보기는 우리 주님께서 새벽에 일어나셔서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했다. 왜 새벽기도회를 하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하셨기 때문이다.

넷째로, 새벽기도가 주는 도전

성도가 마지막 붙들고 의지해야 할 것이 바로 새벽기도이다. 새벽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도와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왜 새벽기도를 해야 하는가?>

◈ 예수님께서 하셨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처음 것을 기뻐하시므로 해야 한다.

◈ 새벽은 만나를 거두는 시간이다.

◈ 새벽은 난관이 무너지는 시간이다.

◈ 새벽은 전도의 능력을 받는 시간이다.

◈ 새벽은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받는 시간이다.

◈ 새벽은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막2:11, 요5:8) 고 하셨다. “참으로 의로운 나의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II. Yielding for Manna (성경 애독-영혼의 양식)

예배는 예배시간보다 삶 자체가 중요하다. 예배는 예배의 형식보다 예배자의 삶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은 틀렸다라고 하는 뜻은 아니다. 형식적인 예배 형식에 메인 예배 형식을 앞세우는 예배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예배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경배이다. 그것이 하나님이길 하나님은 바라신다. 그러나 예배를 드려도 실패할 수도 있다. 또, 성공할 수도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예배 속으로 들어가 보면 이 형제의 예배는 성공과 실패라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근본적으로 가인의 예배가 실패작이고, 아벨의 예배가 성공작인 이유는 무엇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제물이 차이가 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믿음의 차이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듣기의 차이였다.

첫째로, 무엇이 달랐던가?

(1) 하나님의 생각대로 제사를 드린 아벨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맘에 안 드시고, 아벨의 제물은 맘에 들어 하신 것으로 보일 수 있다.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인의 제물은 자신의 생각을 드린 것이고,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의 생각을 드린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과 같은 제물을 드린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이다.

(2)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즉, 가인은 믿음이 없이 드렸고 아벨은 믿음을 가지고 드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가지시는 생각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가진 자의 예배는 성공할 수 있다. 결국,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제물이 아니고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드린 예배는 성공할 수 있다. 반대로, 믿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실패하고 만다. 아벨이 드린 제사가 믿음으로 드린 것이라면, 가인이 드린 제사는 믿음이 없는 제사이다.

(3)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롬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믿음의 차이는 바로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의 차이이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4) 믿음대로 산다는 것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고, 믿음이 없다는 것은 자기 맘대로 산다는 것이다. 믿음의 반대는 자신의 생각이나 고집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고 자기의 고집이나 생각대로 제사를 드린 것이다. 반대로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생각대로 제사를 드렸다. 다만 그들이 드린 제물은 이런 생각들을 겉으로 드러낸 모습일 뿐이다. 제물의 차이가 아니라 믿음의 차이이다. 순종의 차이이다.

둘째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 차이점은 무엇인가?

(1) 제사로 인하여 가인과 아벨의 운명일 달라졌다. 실로 그 차이의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제사로 인하여 가인과 아벨의 운명이 달라졌다. 생각의 차이가 이렇게 사이를 갈라놓는다. 믿음의 차이가 영혼의 죽고 사는 문제를 낳는다. 순종의 차이가 하나님께 인정받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결과를 낳는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평가와 가치가 달라진다. 진정한 예배를 드린 자와 예배에 실패한 자는 그 결과가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만약 달라지지 않는다면 예배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2)예배는 아주 중요하다. 예배는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이 말씀은 진리이다. 예배에도 마찬가지의 원리가 적용된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고 높이는 것인데, 그런 예배를 드린 자가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가 바로 보상이다. 이것은 믿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이것보다 더 고상한 것이 있겠는가?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셋째로,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다.

(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2) 성경은 전체가 감동으로 되어 있다.

(3) 성경은 축자영감으로 되었다.

(4) 성경은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다.

(5) 성경은 절대로 모순이 없다.

(6)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은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을 통하여 온다.

넷째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가인과 아벨에게서 얻을 수 있는 예배의 결론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며 그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보게 된다. 아벨이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자신을 드러낸다. 가인이 자신을 드러낼 욕심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면, 결코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것 때문에 아우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III. Salvation for One by One (개인전도-성도의 열매)


첫째로, 왜 전도를 해야 하는가?

(1)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이다.“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말씀하셨던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마28:19)는 지상명령은 모든 교회의 모든 성도에게 구속력이 있는 것이다.”(죤 스토트) 영혼구원은 하나님의 열심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지상과제 이다. 우리는 조금도 이것에 소홀할 수 없다. 이 지상과제는 목사와 선교사 뿐 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해야할 사명이다. 윌리암 에반스(William Evans)는 그리스도인의 영혼구원 사역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알파와 오메가는 영혼구원이며, 또 그 처음 문자와 마지막 문자 사이의 모든 문자도 잃은 영혼을 찾으려는 정신으로 흥건히 젖어 있어야 한다.

(2) 예수님의 중심적 사역이다. 영혼구원 사역은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사역 기간 동안 중점적으로 감당하신 사역이다. 또 그의 사도들이 몸숨을 아끼지 않고 일생 감당한 사역이다. 또 우리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오지의 땅에서 질병으로 죽어가면서도 감당한 사역이다. 이 사역은 우리 구주 예수님과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에 의해 오늘날 우리들에게 계승된 사역이다. 이 사역을 계승 받은 것은 너무나 큰 영광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3) 구원 받은 무리들의 사명의식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 수많은 구원 받은 무리들은 이 주님이 주신 영혼구원 사역을 감당하고자 몸부림 치고 있다. 목회자는 강단에서 메시지의 선포로 이 사역을 감당한다. 또 길거리에서 메시지를 선포한다. 선교단체들은 자신들이 가진 독특한 방법으로 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특히 교회들은 총동원 주일 이라는 것을 만들어 이 사역을 감당하려고 하고 있다.

(4) 참다운 신앙인 없다. 그러나 문제는 교인의 수는 불어나며 신자라고 말하는 무리는 불어나는 데도,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비행기 위에서 보이는 교회의 종탑이 공동묘지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본회퍼는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의 값비싼 피의 대가를 싸구려 은혜로 바꾸어 버리는 자들 이 말은 예수님이 피의 대가로 우리를 사신 것은 거룩한 삶(제자의 삶)으로의 초청인데도, 신앙인은 구원의 표만으로 양심을 무마시키며 죄를 계속해서 짓는다는 것이다. 왜 신앙인이 이러한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교회의 현실의 문제는 무엇인가? 이것은 전도 인들이 교회로만 이끌고 오는 것에서 전도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양육하고 키우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돕지 못한다는데 있다.

둘째로,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1) 먼저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12제자를 사도로 양성한 완전한 일대일 성경선생이었다. 또 성경선생의 주 텍스트가 예수님 자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좋은 성경선생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을 잘 배워야 한다. 모든 성경선생은 예수님을 잘 알고 배운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지 않고는 성경선생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요한복음 15장 4,5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제자란 스승의 사상과 인격과 생활을 배우고 생활화 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스승의 버릇까지 흉내 내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어느 시인의 싯말 처럼 내 핏줄 가득 가득히 당신이 꿈꾸는 모습, 아니 꿈꾼다고 하기보다, 그 황홀함에 내가 취하는 것이다. 라는 고백이 나올 정도로 그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양성은 어떠했는가?>

본 논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양성 방법을 다 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주제만 해도 하나의 논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단하게는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일대일 성경선생으로서의 예수님은 분명한 교육목표가 있었다. 이 말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분명한 주 텍스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는 가르치는 자에게 없어서는 않될 중요한 요소다. 예수님은 영혼구원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 재생산 할 수 있는 완전한 제자로의 삶을 가르치셨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가, 대화의 방법이다. 둘째가, 강화적방법이다. 이 방법에 사용된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비유를 통한 방법, 귀납적인 방법, 사물을 통한 방법, 교육현장을 통한 방법 등이다. 셋째는, 생활을 통한 방법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직접 동거 하시면서 그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이셨다. 또 사건 사건을 통하여 그들을 교육하셨다. 또 질문을 하시며 그들의 생각을 정리하게 하셨다. 이렇게 제자를 양육하신 예수님의 교육원리는 지극히 인격적이요, 개인적이요,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또 영적인 권위를 갖고 하셨다. 예수님의 교육방법은 특별한 교재가 없고 그 상황과 사람에 따라 자유로우셨다. 일대일 성경선생은 무엇보다 이러한 예수님을 잘 배워야 하고 좋은 제자가 되어야 한다.

(2) 상대와 좋은 관계성을 맺어라. 일대일 개인전도의 시작은 한 사람과 관계성을 맺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좋은 관계성이란 한마디로 인격적인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죤 스토트는 우정까지는 못되어도 먼저 신뢰성이 형성되지 못하면 그의 영혼을 구원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공부가 전도를 한 즉시 이루어지지 않아도 관계성이 잘 맺어져 있으면 피전도자의 마음이 바뀔 때 언제든지 성경공부를 할 수 있다. 또 관계성이 잘 맺어져 있으면 피전도자가 영적인 소원이 없어 떠나 갔다 하더라도 언젠가 영적인 소원이 생기면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러므로 떠나는 사람일지라도 좋은 관계성을 유지하여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상대방과 좋은 관계성을 맺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예로 삼으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에 곧 바로 복음으로 들어가지 않으셨다. 먼저 여인의 관심사인 물에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물에서 부터 계속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도록 주의를 환기시키셨다. 마침내 여인이 남편 문제에서 예수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랄 때 메시야이신 자신을 보여주셨다. 오늘 날도 이러한 예수님의 지혜로 한 영혼에게 접근해야 한다.

(3) 상대방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상대방을 모를 때 상대방에게 알맞는 메시지를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상대를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피전도자의 성격과 그의 내면의 어두움 등을 깊이 파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며 상대방을 배우려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자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상대를 이해 할 수 있게 되고 자연스럽게 피전도자에게 맞는 복음을 전해 줄 수 있다. 성경공부 선생들이 잘 빠지기 쉬운 문제가 듣을 줄은 모르고 이야기를 할 줄 만 안다는 것이다. 이때 피전도자의 관심사와 주제가 빗나가고 이야기는 따분한 교훈에 치우치고 만다.

(4) 상대에게 맞게 치료를 해야 한다. Broad Spectrum (광범위 치료)라는 치료 요법이 있다. 즉, 병명을 정확히 모를 때 무조건 항생제를 투여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항생제가 거의 모든 병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다 그 항생제가 맞아 떨어져 병이 낫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잘못될 경우 그 항생제에 내성이 생겨서 더 강한 다른 약을 투여해도 듣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상대를 모르면 자연히 광범위 치료를 하게 된다. 혹 한 말씀에서 은혜를 받지 않을까 해서다. 그러다가 은혜를 받으면 좋지만 아무런 말씀도 그의 심령에 들어가지 않으면 오히려 상식과 지식만 생겨 신앙생활을 중단하게 하기 쉽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깊이 연구하여 정확한 말씀으로 그를 찾아야 한다. 또 도식화 된 성경공부 방법이나 공식적인 성경공부 방법은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양의 신앙에 맞도록 돕지 못하고 양을 성경공부방법에 양을 끼워 맞추려다가 양에 마음에 오히려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양을 잘알고 그의 문제에 알맞는 말씀을 제시할때 그는 결코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셋째로, 개인전도가 그 해결책이다.

우리는 이상에서 일대일 개인 전도의 정의와 중요성,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이 시대에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교회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일대일 개인전도의 방법으로 해결 할 수 있다. 일대일 개인 전도를 할때 성숙하고 건실한 신앙인으로 키울 수 있다. 이것을 연구하면서 느끼는 간절한 마음은 한국교회가 참으로 새로워지기 위해서 목회자들이 숫자 중심의 교회를 벗어나 일대일 성경공부 중심의 교회로 나아야 겠다는 것이다. 본회퍼의 말처럼 피로 산 값비싼 은혜를 싸구려 은혜 로 바꾸어 버리는 죄를 범하지 않는 교회들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의 지혜요, 예수님이 직접 모범을 보이신 인격적인 일대일성경공부로 참 제자를 양육하는 교회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소원이며, 하나님의 열심이다. 이것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일대일 성경공부 방법으로 우리는 이 시대에 복음의 일꾼을 키우고 복음을 섬기는 복된 자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말씀하신다.“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IV. Keeping for the Lord's Day (주일성수-성령의 교통)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 주신다.

Nyskc의 네번째 성수주일(K=Keeping's the Lord's Day)은 예배회복에서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예배회복에서 성령을 받는다든지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을 빼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예배의 성립에서 성령의 역사를 빼놓고는 예배가 드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1) 그러므로“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라야 하나님이 찾아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첫째로 기독교는 약속의 종교이다. 일반 다른 종교에서처럼 사람이 신을 찾아 나선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는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기를 원하여 찾아오신 종교이다. 이것을“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라고 하고, 한편 '임마누엘'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또한 약속의 종교라고도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고, 그 약속을 한 번도 번복하지 않고 그대로 지킨 하나님이시다. 오늘도 이 약속은 변치 않고 진행되고 있다.“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이다. 둘째로, 이 약속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종족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는 세계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 위에 오셔서 사람들을 만나시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시킬 뿐만 아니라, 저들과 계속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시다.

(2)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하셨다. 그 만남의 형식은 여러 가지 이지만, 제사(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 제사(祭祀)의 행위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와 연결되었다. 제사에는 반드시 <찬양>과 <감사>와 <제물>이 있어야 한다. 첫째로, 형통한 날을 보게 하신다. 이것이 정성된 마음으로 드려질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셨고, 형통의 날을 보게 하였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곳곳에서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라고 하였다. 여호와 앞에서 바르게 제사의 행위가 진행되는 동안은 나라가 부강했고, 백성들은 평안했고, 군왕들은 존경을 받았다. 둘째로, 경외(敬畏)란 공경할 경(敬)자와 두려워해야 할 외(畏)자이다. 문자풀이를 해보면, 공경함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뜻이다. 즉 지극히 존경하는 대상 앞에서 갖는 마음의 자세를 말한다. 가령 일반 가난한 서민이 대통령을 만날 때 어려워하는 것은 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를 경외하기 때문이라 본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도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이 예배의 행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예배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이다. 세 번째로, 이러한 행위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뜻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날을 구별되게 지킨다는 뜻이다. 이것은 정성된 마음의 표현을 의미한다. 대수롭게 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도문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아버지에게 존경심을 갖는 아들딸들이라면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이라면 부모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요즘 마지막이 가까운 세상이 되어 그런지 몰라도 세상의 아버지들의 권위가 상실되었지만, 그래도 자녀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본분은 부모에 대한 경외심이다. 아버지께 존경심이 없는 한 그 가정은 보나마나하고, 그런 자식이라면 역시 보나마나한 자식일 것이다. 아무리 민주화된 가정이요 대화가 있는 가정이라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무질서한 가정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기를 원하고 있기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그 날을 하나님의 날로, 주님의 날로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1)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것을 법으로 명령하였다. 그것이 안식일 제도이었다.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제 칠일은 안식의 날로 지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도 엿새 동안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제 칠일은 쉬었다. 그런 연유에서 하루는 구별되게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를 기쁘게 하며 쉬라고 하였다.

(2) 안식일의 개념으로 바뀜. 그런 것이 주님 오신 이후 안식일의 개념은 바뀌어졌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이제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님의 날>로 지키게 되었다. 아직도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

(3) 유대교회에서 기독교회로 전환되어야 할 때이다. 또 안식교에서는 우리를 보고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한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이제 유대교회에서 기독교회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모세의 율법을 완성시킨 주님의 날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사람들은 이제 안식 후 첫 날을 주님의 날로 즉 주일(主日)로 지키게 되었다.

(4) 달력이 주는 의미. 여러분! 모든 세계 달력을 보면 토요일엔 청색으로 주일은 빨간색으로 표시하였다. 즉 이것은 주님의 피 흘린 거룩한 날을 지키라는 뜻이다. 또 빨간색은 주의를 환기시키는 뜻이 있다. 그래서 토요일에는 반나절만 일하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뜻으로 토요일은 반나절만 일하고 일찍 직장에서 내보낸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의 형편을 보면, 얼마나 하나님의 본 뜻과는 달리 주일이 없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주말(週末)이라는 용어가 더 실감이 나고, 일요일(日曜日)이라는 말로 통용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주님의 날>(Lord's Day)에 도리어 죄를 더 많이 범하는 날이 되어가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그러면 왜 성수주일을 하라고 하는 것일까?

셋째로, 성수주일 하는 자는 형통의 은혜를 주신다.

(1) 성수주일의 기본 틀이 무너지면 신앙 생활도 무너진다. 성수주일의 기본 틀이 무너지면 신앙생활이 무너지는 것이며 그것은 곧 예배생활이 무너진 것이며 이것은 모든 생활 분야에서 하나님이 밀려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생활의 변두리고 밀리기 시작하면, 사람이 먼저이고, 내가 먼저이고, 경제가 먼저이고, 육신의 일이 먼저로 자리를 잡게 된다.

(2) 하나님보다 더 먼저 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보다 내가 먼저이고,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일이 먼저이고, 하나님 믿는 신앙보다 물질이 앞서게 된다. 이런 삶 속에서는 안식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탐심과 스트레스와 미움과 갈등과 욕망이 있을 뿐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이다. 시편 119편 165절에,“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로다.”진실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항상 최우선 순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비록 사망과 같은 인생의 좌절의 골짜기를 통행할 때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잠언 22:4절에“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였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 주일을 잘 지키는 나라는 번영하고 주일을 안 지키거나, 주일에 전쟁을 일으킨 나라들은 모두 망해버렸다. 나폴레옹이 1813년 10월 17일 주일에 영국을 침공하였다가 웰링턴에게 망했고, 일본이 1941년 12월 8일 주일 미국을 침공했다가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고 망했고, 북한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주일에 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해방시키겠다고 하였지만 유엔군에 의해 폭탄 세례를 받았고 결국 이밥에 고기 국을 먹게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오늘까지 주일을 지키지 못했기에 굶어죽는 현상을 맞게 되었다.

개인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주일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잘 사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 삶에는 형통과 즐거움이 없이 지나게 된다. 즉 안식이 없습니다. 쉼이 없다. 늘 분주하게 일하고 바쁘게 살지만, 전도서의 말처럼 바람을 잡는 것 같이 다 빠져나간다.

<김천덕 장로의 간증>

평안남도 중화에 김천덕장로님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장사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내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주일에도 겉으로는 문을 닫고 안에서는 물건을 팔았습니다. 또 명절 대목장에는 문을 열고 장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장로가 된 후로는 정말 문을 닫고 장을 보지 않고 대목장도 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지만, 일년 매상고와 수입을 조사해 본 결과 장로가 된 후 문을 닫고 대목장도 보지않은 해의 수입이 남몰래 팔던 때 보다 5분의 2가 더 많았습니다.”라고 간증하였습니다.

(3) 정당화 하지 말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주일을 지킨다는 것을 현대 산업사회에 들어와서는 지키기 어려운 경우들이 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격일로 일하는 경우나, 아니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에 근무하는 분들이나,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나, 특수공무를 집행하는 공직자들이나, 이런 저런 경우에서 물리적인 시간관념에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일성수를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생활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주일이 있어야 한다. 성수주일의 개념을 그렇게만 생각하기보다는 생활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주일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엿새 동안은 육신의 일을 도모했다면 하루는 주님의 날로 지켜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물질의 소득 중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십일조의 정신이기도 한다.

모든 수입이 내 것이 아니다. 모든 수입이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모든 소득을 나 자신만을 위해 쓰지 말고 이웃과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와 과부를 기억하라는 뜻이다. 주일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생활 속에 주일이 없다는 것은 즉 다시 말하면, 생활 속에서 주님의 날이 사라지면, 모든 날이 자기 날 밖에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기 시작하면, 주말이 있을 뿐, 주일은 없어진다는 말이다.

(4) 주일을 지키는 것은 생활 속에 예배이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날자 적 개념에서 보다, 내 생활 속에서 예배가 사라지면 안된다는 뜻이다. 예배가 없는 생활은, 즉 주일이 없는 생활에서는 오직 나 자신의 날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되면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복을 내리겠는가? 주일을 지키는 자들에게, 지금도 하나님은 물질의 복, 건강의 복, 그리고 명예의 복을 허락 하신다.

넷째로, 성수주일 하는 자는 형통의 은혜를 주신다.

생활 속에서 주일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다. 나의 모든 날에서 주님의 날이 없다면, 그렇게 분주하게 보낸 생애에서 무슨 보람을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 이것을 후세에게 전해주는 부모들이 되기를 바라고, 이런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Nyskc (예배회복운동)에서 주님의 날이 거룩되게 지켜지는 교회, 나라, 가정이 되도록 하여야 할 줄을 믿는 것이다.

<John Wanamaker>

미국의 유명한 백화점 왕 <죤 워너메이커>에 대한 일화를 다 알고 있습니다. Keeping for Lord's Day 그는 성수주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재물의 부자이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에서도 부자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일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주일학교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주일이면 일찍 교회에 나가 학생들의 신을 정리하는 일을 맡아 봉사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람으로 여기면서 봉사했습니다. 사람들은 돈이 좀 벌어지면, 그런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워너메이커는 변함없이 그 일에 충실하였습니다.

어느 해 대통령으로부터 장관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거절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장관이 되면 교회에 나와 교사의 직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이었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으로부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이 났습니다. 그래서 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장관의 일이 아무리 바쁘고 분주했어도 주일에는 꼭 고향 필라델피아에 있는 교회로 돌아가 주일학교 교사의 일을 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V. Complete Offering (일조전납-축복의 도리)

“제사에 제물이 없다면 제사가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예물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요 실패된 예배요 하나님께서 열납지 않으시는 가인의 에배일 수밖에 없다". 일조전납은 (tithes)은 Complete Offering이며 흠잡을 곳이 없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이다(말라기 3:7~12).

(말라기 3:7~12)

7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 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 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 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절.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 니라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 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 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NYSKC는 신앙생활의 신조이자 행동강령이며 예배회복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열매이다 그중에 가장 우리로 하여금 민감하게(Sensitive)반응하는 것이 있다면 싲일조에 관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인류가 타락한 후에 나타나 가장 소중하고 우상으로 섬기며 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 볼 때 물질주의 세계에서 우리로 하여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 형이상하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헌금에 관한 것들이 인터넷의 기독교의 게시판에 가면 열렬한 토론이 벌어지는 장면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 체험적으로 보면, 그러한 토론이 대부분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곳에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고 숨기며, 한국교회의 십일조를 비난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 레위기 25;23절을 보면“토지를 영영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지었다. 그러니 토지 뿐 아니라 우리 자신가지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을 지으신 뒤에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며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복을 받았다고 시인하는 사람은 당연히 도리(reason)를 다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십일조는 율법이기에 드리는 것보다 당연히 받은 축복에 감사해서 드리는 도리(truth)인 것이다 즉 축복을 받은 자가 당연히 행하는 도리(propriety)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타락이후에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서 받기를 원하시기에 시간과 물질 정성을 바칠 것을 법으로 제정하셨던 것이다.

첫째로, 십일조는 율법이므로 폐하여 졌다는 주장:

(1)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이유. 십일조를 비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주장중 첫 번째는, 십일조는 율법이므로 폐지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율법이 폐지된 적은 없다. 율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의 완전을 위하여 오셨으며(마 5:17) 예수님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을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마 5:18)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율법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며, 그러한 개념이 폐하여졌다는 것이다. 제사율법은 변역되었다... 변역이란 바뀐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사도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제사의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만일 제사가 폐하여졌다면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아니고, 우리도 더이상 제사장이 아니다... 율법은 그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관점과 의롭게함이라는 관점에서는 폐하여졌으나, 죄를 깨닫게하고 그리스도로 안내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기능은 아직 갖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재해석하셨으며, 완전케 하신 것이다.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지 못하지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할 수는 있다.“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2) 그렇다면 십일조는 율법일까?“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았느니라.”(히 7:6)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기 전에도, 십일조는 있었다. 그리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빔을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 십일조를 드리면서 복비는 것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구약뿐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어떤 교회에서 십일조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친다면, 그 교회는 이단이라고 불러도 좋다. 어떤 정통교회도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율법을 지킴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정통교회도 없듯이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율법은 지켜야 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를 내야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십일조는 그리스도인의 자발적인 의무라고 가르친다.

둘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일조.

(1)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라. 마태복음23장 23절과 누가복음 11장42절은 십일조에 대해서 모두 똑같이“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마태복음 23장 23절; 누가복음 11장 42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 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한 것이다. 신약에서 십일조는 마 23:23, 눅 11:42와 눅 18:12에서 다시 한번 언급되어지며, 히브리서에도 십일조는 (개역성경: 십분의 일로 번역되어짐) 언급되어진다.

<누가복음 18장 12절~14절>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 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 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2절)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禁食)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十日條)를 드리 나이다 하고

(13절) 세리(稅吏)는 멀리 서서 감(敢)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 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罪人)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義)롭다 하심을 받고 집 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自己)를 높이는 자(者)는 낮아지고 자기 (自己)를 낮추는 자(者)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표준새번역)

(3) 십일조를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 전자의 성경본문은 형식만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탓하시는 것이지, 십일조 자체를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후자의 성경본문 역시, 하나님은 형식적인 십일조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된다. “의인”(의롭다함)의 조건은 마당에 심은 풀과 같이 자신의 소득에 대한 정확한 액수의 십일조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믿음에 달려 있다. 그러나 만일 의롭다함의 조건이 십일조에 달려있다고 가르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일 것이 될 것이다.

셋째로, 연보와 십일조

(1) 연보라는 말의 뜻. 고린도전서 16장 1절~2절과 고전 16장 1절과 2절등에 사용된“연보”란 단어는“모금, 수집”(collection)이라는 뜻의 헬라어“로기아”로 되어 있고, 고후 8:2에서는“기쁨으로 드린다, 관용”이라는 의미의“하플로테스”로 되어 있고, 고후9:5 에서는“좋은 모금, 아름다운 말과 칭찬, 봉헌, 은전”이란 뜻의“율로기아”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성경말씀에서 "연보"란 번역 상 연보라고 표기되어 있을 뿐, 십일조나 헌금. 모금과 전혀 다른 용어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가 십일조를 형식적인 면에서 벗어나, 자발적인 기쁨으로 드려진다면 그것이 곧 연보와 같은 개념이 되어 진다.

역대하 34장 9절과 14절. 또한 그 증거로 역대하 34장 9절과 14절의“연보”란 용어를 보자. 구약에서는 십일조를 포함한 성전세 등을 포괄하여 성전에 들어간 돈을 연보(히브리어: 보, 여호와의 성전에 입고된 돈)라고 기록하였다. 바울이 “후한 연보.”바울은 고후 9:13에서“후한 연보”(하플로테스)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아직도 헬라어 원어를 믿지 못하겠고 십일조는“연보”와 엄격히 다른 용어라고 말한다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십일조 봉투에 십일조라는 말을 지우고 연보봉투라고 고쳐서 내거나“기쁜 헌금”이라고 고쳐서 내면 된다.

(2) 연보는 성경적이라 가능하고, 십일조는 폐하여졌으니 비성경적이라는 주장은 가당치 않다. 십일조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니 십일조의 의미를 잘 깨달으시기 바라며, 주님은 결코 십일조가 폐하여졌다고 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발적인 마음으로 즐겨 내시는 사람을 기뻐하시며, 십일조는 결코 폐하여진 적이 없다.

<마가복음 12장 41절~44절>

41절.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 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절.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절.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41절)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對)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富者)는 많이 넣는데,

(42절) 한 가난한 과부(寡婦)는 와서 두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 께서 제자(弟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43절) 과부(寡婦)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절) 저희는 다 그 풍족(豊足)한 중(中)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寡婦)는 그 구차(苟且)한 중(中)에서 자기(自己) 모든 소유(所有) 곧 생활비(生活費)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표준새번역)

예수님은 액수에 많고 적음이나 정확한 액수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으며, 오직 자발적인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내면적인 믿음을 중요시하였다.

넷째로, 십일조를 드림으로 받는 축복의 내용들...

(1) 하늘문을 여신다.

(2)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주신다.

(3) 황충의 피해를 받지 않게 해 주신다.

(4) 토지의 소산을 풍성히 받게 하신다.

(5) 우리가 받은 복을 열방의 입으로 말하게 하신다.

(6) 땅이 아름다워 진다.

<물질 축복을 위한 십계명>

첫째 계명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필요한 물질을 주님이 공급하신다(마태복음 6:33).

둘째 계명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라(딤전 6:17).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며,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마태복음 6:21, 24).

셋째 계명은,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지 말라. 물질만 사랑하면 물질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가지고 있는 물질까지 빼앗긴다(딤전 6:10).

넷째 계명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모든 재물과 가족을 버리면,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