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주는 것이다. 그런 기준에서 주의 깊게, 다른 사람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일이야말로 숭고한 사랑의 실천이다." (David Hubbard)
1. 기도의 태도
'기도하는 양태'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승구 교수는 이러한 기도의 양태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바뀔 수가 있다고 한다. 신약에 들어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후 유대인들은 주로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고 초기 기독교인들 역시 동일한 장소에서 드리기도 했다. 또한 일부는 가정집에서 이루어진 예배의 형태를 '처소' 혹은 '각처'라는 말로서 대신한 것을 엿보게 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나중에 기독교인들을 유대 회당에 발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다. 이단이라는 말과 함께 자신들의 신변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늘 그러한 위협을 느끼고 살았던 기독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에서 기도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당부한다. 신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그의 편지에는 피와 땀이 녹아 있다. 그는 힘들 때 위로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 것에 감사하고 감사했다. 그러나 그는 늘 외로웠고 배고파야 했다. 그것도 감옥에서 말이다. 제 삼자가 볼 때는 가히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다. 무엇이 그를 추위와 고통에서 방치했는가? 그래도 그는 예수를 쉬지 않고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예배하고 있었다. 그에게 장소와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중요했다.
사도 바울은 살아 있는 동안 교회 혹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7~18)고 당부한다. <기독교 강요>의 저자 칼빈 역시 "모든 사람이 언제, 어느 때, 어떤 일에서든지 만사를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고, 모든 일로 그를 찬양하면서 자기들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기를 바울은 바란다"고 사적인 기도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 개인이 진심 어린 마음으로 간구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들어주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여기에는 '지속성'이 추가된다. 또한 '인내'가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기도와 예배를 쉬지 않았다. 기도의 우선순위를 아는 것이다. 그는 순교했다. 결국 그의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기도는 없었다. '자신의 잔을 옮기어 달라는 기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예수와 한 몸이었기에 그의 영광이 예수의 영광과 일치하는 순간이다.(요17:22)
다니엘은 3주 동안 기도 응답을 기다렸으며,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의 예레미야 역시 열흘을 기다렸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가서 엿새를 기다린 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고 예수의 응답의 기도 역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요2:4)을 강조한다. 특히 예수는 십자가의 쓰라린 고통과 기도의 잔을 끝내 하나님 뜻에 맞추어 피하려는 개인의 욕심이 드러난 기도를 지속하지는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글 중 하나는 "비는 나쁜 자에게나 선한 자에게나 여전히 오늘 동일하게 내린다"라는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기도의 응답과 부재 역시 동일한 장소에서 '응답' 혹은 '응답 없는 응답'으로서 이 땅 위에 동일하게 내린다.
2. 사적 기도와 공적 기도
칼빈이 언급하는 두 가지 기도가 있다. '예배 차원'의 기도는 '사적인 기도와 공적인 기도'가 늘 동일하게 흘러간다. 기도에는 끊임없는 연속성을 가지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사적인 기도 즉, '개인 기도'가 있다. 이와는 다르게 우리가 가끔 함께 모여 드리는 다수의 공식적인 '공적 기도'는 쉬지 않고 하기보다 일시적인 기도이다. 기간을 요하는 시간과 공간적 상황과 마주하는 '공적인 기도'는 일시적이면서도 공동체적 상황이 주기적으로 주어진다. 물론 요즘 공기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릴레이 기도'를 하는 곳이 늘어나는 풍토이지만 대부분은 일정 시간과 한 장소에 모여 함께 기도하게 된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에 의미를 너무 많이 부여하여 그곳에 참석하지 못한 자들에게 출석을 강요하거나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말하는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승구 교수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영적인 무지가 있다고 해야 할까? 바울이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고전 14:40)라고 표현한 것처럼 모든 일이 교회 안에서 잘 이루어져야 한다고 칼빈은 이에 대해 예견한 듯하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져 버린 후 우리는 예배 장소에 대한 장소적 개념을 받아들여 처소적 예배의 의미로서 여전히 구약 개념을 갖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교회라는 '처소' 혹은 '성전'이라는 의미는 인간이 만들어낸 장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늘날 '교회'라고 하는 예배의 처소는 사람이 필요한 대로 짓고 정해진 시간에 함께 모여 유익한 나눔과 영적인 예배를 드림으로 진정 하나님나라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곳이다. 칼빈은 특히 '성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나름대로의 비밀스런 성스러움을 꾸며 놓았다고 한들 기도가 더 거룩해지거나 혹은 하나님이 특별히 들어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 간혹 교회 안에서 맨 앞자리와 맨 뒷자리와의 관계를 은혜의 높낮이로 표현하는 것이 이에 해당되는 말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장소적인 예배'가 아닌 우리 자신이 참된 예배의 처소이자 성전임을 이승구 교수는 칼빈의 저서를 인용하며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성전이고 성령이 거하는 곳이 바로 예배 장소이자 그 성령이 거하는 우리 자신이 성전이다. 이제 교회 건물이 과거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는 아니다"라고 이승구 교수는 말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사라졌고 그 이후에 생겨난 공동체가 세운 것이 교회이다. 우리 공동체가 교회이고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점이 적용된다.
문득 사마리아 성전과 예루살렘 성전을 비교하여 어느 곳이 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제구실을 하는지 물어보는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생각났다.(요4:21) 칼빈처럼 말하는 근거는 바로 예수가 여기서도 저기서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그것은 사실로 되어 오늘날 필요에 의해서 우리가 임대하든지 땅을 구입하여 교회 건축을 했다. 그러한 장소는 결코 예배의 참된 장소가 아니고 심령 깊은 곳에서 폭발하는 내 안에 움직이는 기도와 예배하려는 마음이 진정 예배의 중심지다..
이승구 교수는 "장사하는 곳이 나의 예배처소요, 모인 곳이 우리들의 예배 처소요, 사업하는 곳 즉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예배 장소"라고 힘주어 말한다. 나는 늘 다음의 기도 제목에 대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러한 기도가 올바른 것인가 아닌가 말이다. 특히 과거 어느 날부턴가 사람들의 기도에서 공통적으로 잘못된 한 대목을 본다. "내가 세상에서 죄를 짓다가 이제 주일을 맞아 하나님 전에 기도하러 나왔습니다…"라는 말이다. 과연 그런 마음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기도의 가치관일까? 이는 잘못된 기도이자 진정한 예배의 주체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구 교수는 이에 대해 잘못된 기도라고 꼬집으며 "우리의 마음과 심령의 통곡이 바로 예배의 기도 자세로 마음에 있다"라고 말했다.
칼빈 역시, '마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기도의 본질은 마음(롬8:27)에 있으며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쏟아 부어진 마음속의 어떤 감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골방'은 마음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마음을 살피는 '성령의 기능'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 탄식과 하나님의 뜻을 살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은밀하게 우리 마음속으로 끄집어내려, 외식자들과 달리 문을 닫고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성령과 교통해야 하는 것이 기도에 대한 정석이다. 이는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기도의 '내면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외부적인 예배 형태를 이내 내부로 끌어들여 외부에 들어나는 것보다는 '내면에서 솟아나는 외면성'에 대한 기도의 본질이다.
우리의 기도 자체는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야 하며 이와 반대로 기도에 사용하는 소리나 노래가 마음 깊은 느낌에서 솟아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도 유익도 없고 급기야 입술 끝에서나 목 줄기에서 솟아나는 이 소리는 하나님의 진노만 부추길 뿐이라"고 칼빈은 강요한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청소년 때 번민 속에서 기도 모임을 하면 기도하다가 딴 생각이 나고 고민에 휩싸였던 것을 돌이켜보면 과거 '하나님의 진노'가 내 머리 위에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찬양하면서도 스스로 다른 문제와 씨름을 하느라 가사를 잊고 멍하니 바라보는 예배자로서, 오늘도 수없이 많은 고통의 자녀들이 치열한 전쟁에서 한판승 벌이는 게 오늘날 현실이다. 과연 무엇이 기도인가를 곰곰이 살필 시간과 고뇌가 필요하다. 기도는 중얼거린다고 입 속에서 무언가 튀어 나오는 요술램프가 아니라는 것은 다 안다. 그래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바라기에.
교인들 모임에서 기도할 때, 다 같이 한 목소리, 한 입으로 같은 마음으로 예배하면서 함께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공적인 기도'이다. 혼자서 기도하고 자신과의 문제로 씨름하는 것과 다르게 공적인 기도에서는 중언부언할 수 있는 방언은 문제가 된다. 마치 과거 천주교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람들이 있는 곳에 '라틴어'로 기도하다가 또 라틴 사람들 속에 헬라어로서 예배하거나 기도했던 것처럼,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기도하는 건 함께 이룩해가는 협력의 의미를 잃고 두서없는 메아리가 될 것이다. 과거 천주교는 이러한 혼란스러움을 초래하는 언어적 방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어서 칼빈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이들이 수정했다고 이승구 교수는 말했다.
말에는 내면을 바꾸는 힘이 있듯이 우리에게 혀가 있기에 함께 노래하고 말을 알아들어야 전도가 되는 것이 방언의 참된 의미이다. 방언이 시간 때우는 것으로 전락한 오늘날 기독교 현실에서 전도와 방언이 함께 가야한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물론 방언은 중요하다. 방언으로 몰랐던 하나님의 뜻이 어느 한 곳에서 퍼져 나가 순간 근처에 있는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방언이 무엇인지 곰곰이 살필 수가 있다.
참다운 예배 형태를 이룩하게 되면 한 몸 안의 영으로서 은혜가 넘치게 될 것이다. 이승구 교수는 "방언은 개인 기도 시간에 필요할 것"이라고도 한다. 나와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하늘의 언어'로 말한다면 아름다운 서시가 될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공적인 기도 혹은 사적인 기도 모두가 마음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받지 않는다.
혀로서는 무당도 하늘에 제사 올릴 수가 있다. 어느 정도는 그 무당의 기도에도 힘이 들어가 있고 혹은 땀과 정성이 배어있어 혀로 기도하는 우리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말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하나님 존재 여부에 따라 판단된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신이 없으며 우리에게는 유일신 '하나님'이 존재하기에 우리 내면에서 발산되는 기도에는 헛된 노력이 없다. 기도는 우리가 하고 결정은 하늘에 맡겨야 한다. 우리 안에 내재한 '초월성'을 전제로 영원무궁함을 갖춘 '하늘에 계신 하나님' 말이다. 목회자이자 시인인 제럴드 맨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가 자신의 시집 "The Poems" 에서 발표한 <I Wake and Feel the Fell of Dark>의 한 대목을 옮긴다.
"… cries like dead letters sent. To dearest him that lives alas! away."
"가장 사랑하는 분, 그러나 슬프게도 너무 먼 곳에 사는 이에게 배달되지 못할 편지를 부치듯 그렇게 부르짖습니다."
사실 내 편지를 '받은 이', 늘 내 안에 있는 예수를 잊기도 한다. 또한 세상은 늘 그와 반대로 흐른다. 그럼에도 그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언제나 내 마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