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배의 본질
(i) 교회는 일차적으로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교회가 하나님에게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 정체성과 목적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가 지적한 것처럼, "오로지 예배할 때 신자들의 교제가 실체화된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의미에서 "예배는 현실적으로 교회의 진정한 실체이다." 교회 생활에서, 예배는 "집중점"이며, 회중이 함께 나누는 비전의 장이다(지오프리 웨인라이트). 따라서, 교회와 개인 그리스도인의 영적 건강과 능력이 그들의 예배에서 반영된다.
(ii) 신약에서, 예배를 의미하는데 두 단어가 사용되었다. proskuneo는 "머리를 숙여" 존경과 감사를 표현한다는 뜻으로서, 요 4:20-24에서 정의된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즉 영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머리 숙여 절하는 배례(拜禮) 행위이다.
한편, latreuo는 "종"을 의미하는 latris에서 유래하였다. 이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영광을 돌리는 섬김의 행위이다. 하나님이 여러 방식으로, 즉 희생과 기도, "성결과 의"(눅 1:75), "경건과 두려움"(히 12:28), "청결한 양심으로"(딤후 1:3),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으로"(빌 3:3) 섬김을 받는다.
예배는 주일 예배시간에만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드려진다. 그러므로, 롬 12:1이 가르치는 "영적 예배 logike latreia"가 궁극적이고 종합적인 형태의 예배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스트라쓰만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제사 형식의 성경 역사가 여기 나타난 내면화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그것은 또한 종합적 외형화이기도 하며, 신 10:12절 이하에 기록된 최초의 예언적 언급을 재현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롬 12:1 이하에 기록된 바울의 말은 이 모든 발전 과정의 면류관이다."(TDNT, IV:65)
예배의 성경적 용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예배의 대상은 배타적으로 삼위 하나님에게 제한된다.
(2) 예배의 계기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거룩과 능력과 직면하여 자기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함과 능력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때, 그리고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와 경이를 체험할 때이다.
(3) 예배의 자세는 사랑과 경외로부터 나오는 즐거운 의지에서 절대적 복종의 표현으로서 머리를 숙이는 신체적, 영적 복속이다.
(4) 예배의 방법은 제사와 헌신, 찬양과 기도, 말씀과 성례,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명령들에 대한 순종이다. 그리고
(5)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iii) 예배의 정의는 예배의 실행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기독교 예배의 독특성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기독교 예배를 설계하고, 준비하고, 인도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사활을 가름하는 실천적 도구이다."(제임스 화이트)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사랑이 기독교 예배를 야기하며, 그것이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진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이 예배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사건의 재현(알멘)이며 재시(웨인라이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과거 사건의 회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완성의 종말론적 희망이기도 하다(몰트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섬김으로부터 시작하지만,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과 코이노니아이며, 나아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가족이 모이는 잔치이며 즐거운 축제이다. 중보자인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이며 예배의 진정한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성령이 유효하고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지도록 회중을 인도한다.
나아가, 예배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정체성과 목적 의식을 갱신하며, 삼위 하나님과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재각성하고 재충전한다. 그러므로, "회중의 자기 몰입"과 "거룩을 상실한" 일부 현대 예배는 참된 예배가 되기에는 근본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iv) 기독교 예배의 대상은, 니케아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이 고백한 바와 같이, 배타적으로 그리고 동등하게 삼위 하나님, 즉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다. 심지어 사도들도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강력히 거부하였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행 14:14-15) 그뿐 아니라, 천사들도 예배 받는 것을 거부하였다: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 22:9)
(v) 영어 단어 worship은 두 개의 중세 단어 weorth와 scipe의 결합에서 유래하였는데, 그것은 경배 드릴 가치(worth-ship)가 있다는 뜻이다. 독일 단어 Gottesdienst 또는 영어 단어 service는 성경 용어 latreia에서 유래하였다. 한편, 종합적인 개념인 liturgy는 그리스에서 시민들이 도시와 국가를 위하여 수행하는 의식을 의미하는 leitourgia에서 왔다. 종교적 예배는 문화나 문화 형성에 있어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cult ritual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사회적으로 수용되어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종교적 본질의 행위를 가리킨다.
2. 예배의 다양한 형태
(i) 구약에서 유대민족 종교생활의 중심이었던 성전 예배는 두 가지의 구성 요소, 즉 제사 제도와 찬양 및 기도의 대중적 축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후자는 바벨론 시대 이후의 회당 예배에서 보다 완전하고 독립된 형태로 개발되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회당 예배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에게 회당 예배가 기독교 예배의 모델이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것은 세 부분, 즉 찬양, 기도, 그리고 말씀으로 구성되었다. 초대교회는 단순히 여기에 세례와 성찬의 성례를 추가하였다.
(ii)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계급적인 성직자주의가 자연히 성례주의(sacramentalism)를 개발하면서 예배의 균형을 상실하였다. 종교개혁은 그 균형을 회복하고자 시도하였으나, 로마 카톨릭의 강조에 대한 반동으로 개신교회는 전반적으로 성례를 약화시키고 말씀을 강화시키는 변화를 보였다. 경건주의와 웨슬리안 운동은 예배에서 찬양과 기도가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데 공헌하였다. 현대에는 오순절 운동의 역동성과 함께 대중문화의 영향이 예배 문화를 재형성하고 재활성화시키고 있다.
(iii)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은 회당 예배에 참석하라고 명령하거나 의무화하지도 않았으며,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대로 종합적인 기독교 예배 형식을 창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성도의 모임에서 수행할 예배의 몇 가지 행위가 따로 따로 지시되었다.
첫째로, 새 언약의 성례를 재림까지 계속 시행하도록 명령되었다. 성찬식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제정되어 교회에게 명령되었다: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또한, 세례의 시행이 교회에게 위임되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
둘째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여호와 공동체의 오랜 전통으로서, 메시아의 오심으로 그 정점에 도달할 것이다(눅 24:53, 행 2:47).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에서 자발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기쁨의 소리를 지르거나 춤을 추는 행위로 표현되었으며, 이는 교회에게 명령되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셋째로, 개인 기도와 함께 공중 기도가 명령되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18-19)
중보 기도와 축복 기도가 초대 교회에서 풍성하게 발견된다. 넷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가르치고 선포하는 행위가 기독교 예배에서 본질적이고 필수적인데,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들의 예배가 성령에 의해 조명된 말씀으로 응답되기 때문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골 3:16) 그러므로, 이 네 가지 형식 혹은 요소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의 회집에서 하나씩 개체적으로 혹은 함께 집합적으로 예배의 본질을 형성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iv) 바울은 정기적인 매주 헌금을 권장하였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1-2) 그것은 구약시대에 실행된 바와 같이 하나님에게 헌금한 것이 아니라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연보였으나,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며"(고후 9:7)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13) 때문에,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던"(고후 8:5) 마게도니아 교회의 모범을 따라 예배의 한 형식으로 인정되었다.(고후 9:7)
(v) 오순절에 교회는 "매일" 모여 예배를 드렸으나(행 2:46), 후에는 안식일을 예배일로 정하고 회당 예배에 참여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교회가 분리된 공동체로 형성되면서, 특별히 유대 공동체를 정죄하며 분리된 후에는(이그나티우스, 마그네시아인에게 보낸 편지 9), 주일이 예배일이 되었다(디다케 14) 청교도 안식일 회복운동이 주일예배를 강화하였으나, 율법주의를 도입하는 대가를 치루었다.
(vi) 기독교 예배는 고전 14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로고스와 프뉴마의 역설적 통일에서"(블뢰쉬) 또는 질서와 순발성의 역동적 조화에서 올바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기도 시간과 교회력의 구조적 개발이 한 면으로 치우치는 획일성을 결과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오순절 운동과 복음주의 운동의 자발성이 상실되었던 균형과 조화를 회복하고 있다.
3. 교회속의 문화
(i) 이방인 선교 과정에서 초대교회는 심각한 문화적 갈등을 경험하였으며, 이는 최초의 세계교회 회의인 예루살렘 회의를 소집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성령이 인도한 결정에서, 교회는 드디어 복음을 문화와 분리하게 되었으며 문화적 다원주의 또는 상대주의가 기독교의 문화 원리로 수립되었다. 이 문화의 자유는 바울에게서 가장 잘 표현되었다:
고전 9:19-23"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 (tois pasi gegona ta panta)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ii)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가 로마 문화를 배타적으로 숭상하여 문화적 획일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가, 종교개혁이 성경의 문화적 다원주의를 회복하였다. 마르틴 루터는 예배와 교회의 문화가 아디아포라의 영역에 속한다고 선언하였다.
감리교회의 신조에 고백된 것처럼, "예배 형식이나 의식이 모든 곳에서 동일하거나 정확히 같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항상 달랐으며, 민족과 시대와 생활 방식에 따라 계속 변화될 수 있다."(22) 그러나 후에는 개신교회조차 자기의 전통에 고착되었고 문화적 자유와 유연성을 상실하였다. 이와 같이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고 상황화하지 못하는 무능과 자기 자신의 문화를 절대화하는 제국주의적 우월의식에 반대하여, 세계교회 협의회는 "어떤 문화도 다른 문화보다 그리스도에게 더 가깝지 않다"고 선언하였다.
(iii) 오늘날 예배의 위기 상황에서 다양한 형태의 예배 갱신운동이 발생하였다.
첫째로, 고전 12-14장에 근거하여 고착화된 전통적 예배 형식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자유예배 운동이 오순절 운동에 의해 시도되었다.
둘째로, 구도자 예배 운동이 대중문화를 최대한 활용하여 구도자를 복음화하려는 목적으로 예배의 형식을 완전히 여는 문화적 전환을 시도하였다.
셋째로, 예전 회복운동이 교회연합운동의 부산물로 발생하여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교회 예배의 풍요한 전통들, 특히 초대교회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시도한다. 그것은 전통을 존중하지만, 세계교회 협의회의 BEM문서에서 보는 대로, 심도 있게 그것을 현대 문화에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넷째로, 예배언어 개혁운동은 장애자나 여성, 또는 약자 등에게 예민한 예배 언어를 재구성함으로서 현대의 사회적 변화를 반영한다. 나아가, 멀티 미디어 예배, 토착화 예배, 텔리 또는 사이버 예배, 또는 실험예배와 같은 새로운 예배 형태들이 변화하는 문화에 상황화하려고 시도된다.
(iv) 예배의 문화적 형식 그 자체는 예배의 목적이 아니며, 예배의 목적인 하나님과 교회의 성공적인 만남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예배형식이 그 목적을 실현하는데 실패한다면, 예배는 무의미하고 형식적인 것이 될 뿐이다.
포스트 모던 문화에서 프리 모던 형식의 예배는 그 적용성을 상실하며, 그 결과 효과적인 표현과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한다. 심지어 전통적 예배형식을 유지하더라도 현대적 해석과 문화적 조정이 필요하다.
폴 틸리히가 지적한 것처럼, "궁극적인 관심으로서의 종교는 문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체이며, 문화는 종교의 기본적 관심이 그 자체를 표현하는 형식들의 통전성이다."(문화의 신학, 42)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서의 문화는 인간의 존엄성을 승화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하는 문화적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창조성은 예술적 문화의 다양한 형식들을 개발하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비록 종교개혁자들이 성상파괴로 문화적 공백을 결과하는 실수를 범했지만, 교회는 즐겁고 의미 있는 문화 형식으로 예배의 시간과 공간을 채워야 할 문화적 의무와 특권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세계의 문화적 성화를 위해 대중문화라는 현대의 컨텍스트에서 문화목회가 요청되고 있다.
4. 예배 공동체의 구성
(i) 교회는 화해의 공동체로서 아무도 예배 공동체에서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편안한 동질적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상반된다. 예배 공동체를 분리하는 정당한 이유는 오로지 지리적 또는 언어적 불가능성이다. 바벨탑 사건은 언어에 의한 사람들의 구분이 세계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과 지혜임을 보여준다. 또한, 초대교회는 오로지 지역적 차이를 기준으로 분리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ii) 구약 교회는 여성과 아이들을 예배 공동체에서 제외하였으나, 그것이 신약교회에서는 정당화되지 못한다. 문화적 주도권이나 굴종적 사고는 예배 공동체의 역동적 전체성을 위태롭게 하고 교권을 장악한 그룹이나 세대의 문화적 편안함을 누리기 위해 교회의 다른 그룹이나 세대를 희생시킨다.
오늘날 교회가 성공적인 문화적 적응과 포용에 대부분 실패하기 때문에, 교회 어린이들의 과반수가 성장한 후에 교회를 떠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원래 문화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이므로 생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와 예배의 문제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예배가 성립되면 자연발생적으로 그 분화가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문화의 문제이기는 하나 저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와 교회 안에 문화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쨋든 이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혼합된 예배 형식이나 다세대 혹은 세대초월적 예배 형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Cf. Gary L. McIntosh, One Church, Four Generations: Understanding and Reaching All Ages in Your Church (Baker, 2002); Jackson W. Carroll and Wade Roof, Bridging Divided Worlds: Generational Cultures in Congregation (Jossey-Bass, 2002); Bob Whitesel and Kent R. Hunter, A House Divided: bridging the generational gaps in your church (Abingdon, 2000); Anthony B. Robinson, Transforming Congregation Culture (Eerdmans,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