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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Gamble의 칼빈해석 방법론 고찰

갬블은 그의 두편의 소논문인 '간결함과 쉬움: 칼빈의 해석학 이해에 대하여'와 '칼빈에게 있어서 해설과 방법'에서 칼빈의 해석방법을 '간결함과 쉬움'으로 정의한다.

갬블은 이러한 자신의 정의의 근거를 1540년에 출판된 칼빈 최초의 주석인 [로마서 주석]의 헌정사에서 찾는다. 칼빈은 이 헌정사를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3년 전 우리가 가장 좋은 성경주석법(optimum enarrandae Scripturae genus)에 관해 서로 긴밀하게 심사숙고했을 때, 당신을 기뻐게 했던 그 방법(ratio)이 나에게도 역시 다른 것들보다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둘 다 주석가의 주된 미덕(praecipua interpretis virtus)은 간단명료함(perspicua brevitas: 명료한 간결함)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그의 [= 주석가의] 거의 유일한 임무(prope unicum illius officium)는 [저자가] 설명하기 위해 취한 저자 [자신]의 정신(mens scriptoris)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가 [= 주석가가] 독자들을 그것[= 저자의 정신]으로부터 이탈시키는 만큼, 그만큼 그는 그 자신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하거나, 혹은 분명히 어느 정도 그 자신의 한계들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이런 연구법으로 신학을 돕도록 예비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쉬움(facilitas)을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애호가들로 하여금 장황한 주석들(prolixi commentarii)에 지나치게 붙들리지 않도록 저술하는 사람이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여기서 갬블은 칼빈이 말한 '주석가의 목표로서 성경저자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호소하면서, 이 목적의 성공은 '독자를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게 하는 불필요한 요소'의 제거'에 달린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갬블은 추구되지 말아야 할 주석방법과 추구되어야할 주석방법을 다룬다. 갬블은 로마서 헌정사에 나타난 칼빈의 판단을 중심으로 칼빈이 왜 멜랑흐톤과 부써의 방법론을 따르기를 거부했는지를 설명한다. 즉 칼빈은 한편으로 주제를 따라 다룬 멜랑흐톤의 주석방법이 너무 간결하다는 점에서 거부했고, 반면에 부써의 주석방법은 너무 장황하다는 점에서 반대했다는 것이다.


갬블에 의하면, 칼빈은 '간결함과 쉬움'이라는 자신이 선호한 주석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에 위의 두 사람의 주석방법은 거부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이 선택한 '간결함과 쉬움'의 주석방법은, 비록 그의 해석방법에 끼친 인문주의의 영향과 '간결함'이란 개념이 고대 수사학에 빚진 점을 인정해야함 불구하고, 칼빈의 '간결함'이라는 주석방법은 결코 인문주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수사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발견되는 성경적 수사학(biblical rhetoric)에서 비롯된 것임을, 갬블은 강력히 주장한다.

나아가, 갬블에 의하면, 칼빈은 이와 같은 자신의 방법론이 다른 동료개혁가들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방법론보다 우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점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신학적 방법을 '중도 (via media)'로 제시한 베틀즈(Battles)의 예를 따라, 갬블은 칼빈의 해석방법을 '결핍(defect)'과 '지나침(excess)'의 '중도(via media)'로 정의한다.



우리는 여기서 갬블의 주장이 안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들 제기함으로써, 그 주장이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지 시험할 것이다. 첫째로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칼빈이 과연 그리나에우스에게 바친 [로마서] 헌정사에서 자신의 주석의 유용성을 변호하기 위해 주장한 '간결하고 쉬운 주석법'이 당시 동료 개혁가들의 주석법 보다 우수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자신의 주석법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동료 개혁가들의 주석을 비판했는가? 갬블의 평가에 의하면 그 대답은 '예'이다. 그러나, 칼빈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아니오'이다. 만일 우리가 칼빈이 동료개혁가들의 주석에 대한 평가를 주의 깊게 저자인 칼빈의 의도에 따라 갬블에 의해 인용되지 않은 부분까지 세세하게 읽는다면, 자신의 주장을 위한 갬블이 인용한 칼빈의 말과 그것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칼빈 자신의 의도와 거리가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요약에 대한 사랑(amor compendii: 단축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어질 수 없습니다. ...

누구도 다른 모든 사람들을 억지로 자기 자신의 법칙 아래 예속시키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참으로 이 사람은 [= 독자는] 각기 자신의 판단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결함(brevitas)을 좋아하는 우리가 성경(Sacri libri)을 주석함에 있어서 보다 방대하고(copiosus) 방만한(fusus) 사람들의 수고를 배척하거나 경멸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 [= 방대함을 선호하는 주석가들] 역시, 비록 그들이 [우리의 주석을] 지나치게 압축되고(pressus) 간결한(concisus) 것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우리를 용납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갬블의 주장대로 칼빈이 간단명료한 주석법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주석법이 다른 주석법에 비해 배타적인 우수성을 지닌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칼빈은 두 주석법이 독자의 선호도에 따라 선택될 수 있고, 서로는 서로를 거부하거나 멸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심지어, 칼빈이 동료 개혁가들의 주석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곳에서조차도 그 자신의 주석방법이 상대적인 우월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대한 암시를 찾을 수 없다.

칼빈은 자신의 동료들의 작품에 대한 언급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저는 선진들 [= 고대 주석가들]에 관해서는 침묵하겠습니다. ...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 살아계신 분들 [= 주석가들]도 모두 거명하여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뛰어난 저술을 제공한 사람들에 관해 제가 생각하는 바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칼빈이 멜랑흐톤과 불링거와 부써를 당대의 어떤 다른 주석가들 보다도 뛰어난 사람들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될 수 없다. 이어서 칼빈은 이전의 주석가들에 비해 뛰어난 멜랑흐톤의 학자연함을 칭송하고, 불링거의 주석이 가진 특징인 '교리에 대한 쉬운 해설(conjucta cum doctrina facilitas: 교리에 연결된 쉬움)'을 칭송하고, 마지막으로 부써의 학자연함과 그의 주석을 최선의 단어들로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심지어 칼빈은 이와 같이 훌륭한 동료 주석가들과 '경쟁하기를 원하는 것(velle contendere)은 지나치게 고약한 질투심(nimis improba aemulatio)'일 뿐이라고 경고한다.

칼빈은 자신이 자신의 [로마서주석]을 기록하게 된 동기가 '교회의 공적 선(publicum Ecclesiae bonum)'을 이끌어내는데 있다고 설명한 다음 조심스럽게 동료 개혁가들의 주석에 대해 논평한다.


칼빈은 이 논평에서 세 사람의 주석 가운데 멜랑흐톤과 부써의 것만 다루고 있다. 칼빈에 따르면, 멜랑흐톤의 주석이 가진 단점은 '최대한 필수적인 주제들(maxime necessaria capita)'만을 다룬데 있고, 부써 주석의 단점은 바쁜 사람들이 읽기에는 너무 장황하고(prolixus), 주의력이 없는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지나치게 심오하다(sublimis: 탁월한)는 점이다. 즉 부써 주석의 문제점은 독자들이 짧은 시간에 읽어내기(exiguo tempore perlegere)에는 지나치게 방대하다(fusus)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단점들을 감안하여 시간을 크게 빼앗기지 않고도(non magna temporis iactura: 시간의 많은 희생 없이) 읽을 수 있도록 간결하게 주석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을 자신의 주석의 특징으로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한편으로, 주석가들에 의해 성경이 해석의 다양성(interpretationum varietas)으로 분열되지 않토록 경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해에 있어서 '영구적인 일치(perpetua consensio)'를 기대하는 것 역시 거의 불가능한 것임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단 한번도, 개인이 모든 부분에 걸처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들(plena perfectaque omni ex parte intelligentia)을 구비할 만큼, 그와 같은 큰 축복으로 자신의 종들의 자격을 인정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계획에 따라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그 분께서, 먼저, 우리를 겸손(humilitas)에, 다음으로, 형제의 교제를 위한 열심(communicationis fraternae studium)에 붙들어 두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글에서 누가 과연 칼빈의 동료 개혁가들의 주석에 대한 평가가 갬블이 해석하는 것만큼 부정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헌정사에 나타난 칼빈은 자신의 주석법의 상대적 우수성을 주장하는 변증적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을 감추기 위해 노력하는 수줍은 아이와 같은 겸손한 모습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칼빈의 의도는 결코 오해될 수 없다.



두 번째로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갬블이 주장하는 것처럼, 칼빈이 자신의 '간결함과 쉬움'을 '성경의 수사학적 방법'의 요약으로 이해했는가하는 점이다. 칼빈이 자신의 주석 방법론을 '일종의 성경적 해석학'으로 간주함으로써 자신의 방법론을 다른 주석가들의 방법론과 차별화했는가? 갬블은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써 인문주의자로서의 칼빈과 성경주석가로서의 칼빈 사이의 불연속성과 칼빈이 말한 '무익한 수사학(rhetorique frivole: 천박한 수사학)'과 '간결함과 쉬움'의 극단적 대조(stark contrast)를 든다.

첫 번째 근거를 세우기 위한 논증은 강력하지 못하며, 또한 반대 의견인 연속성을 뒤집을 수 있는 충분한 자료를 제시하지 않는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두 번째의 근거에 있다. 갬블이 지적한 것처럼 칼빈은 성경이 '보다 화려하게 빛나는 웅변(splendidior eloquentia illustrata)'구성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수사학자나 철학자들이 지닌 '웅변의 힘(vis eloquentiae)'보다 '훨씬 강력한 진리의 힘(potentior Scripturae sacrae vis veritatis)'을 발휘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마도 '성경의 수사학(eloquentia Scriptae sacrae)' 혹은 '성령의 수사학(eloquentia Spiritus sacri)'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갬블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칼빈은 이 성경의 수사학(eloquentia)이 문체나 말의 단순함보다는 '성령의 위엄(Spiritus maiestas)'에서 찾는다. 즉 칼빈은 가운데 문체(dicendi genus)가 웅변적(elegens)일 뿐만 아니라, 화려한(splendidus) 선지서들 뿐만 아니라, '거칠고 세련되지 않은 문체(rudis et crassus stylus)'로 된 선지서들도 '수사법(eloquentia)'에서는 동일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또한, 갬블이 칼빈의 디모데후서 1장 설교에서 인용한 '경박한 수사학'이란 용어는 일차적으로 성경의 기록이나 성경주석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설교'와 관련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용어는 교사와 목사의 가르침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방법을 논하는 문맥에서 나타나며, 또한 칼빈이 그 용어를 '효과적인 말'로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갬블은 '천박한 수사학'을 세상의 수사학으로 정의하며, 그것을 성경적 수사학과 정 반대의 것으로 대립시킨다.

그는 마치 세상의 수사학 자체가 성경의 진리를 대적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그것은 확실히 논리의 비약이다. 왜냐하면, 칼빈은 어디에서도 수사학 자체를 복음과 대립되는 것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은 칼빈의 일반은총론의 차원에서도 재고되어져야 할 것이다.



아마도, 갬블은 칼빈이 스스로 간결한 주석방법을 선호했으며 주석가의 거의 유일한 미덕이 저자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근거로 칼빈 자신이 자신의 방법만이 저자의 의도를 바르게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것임을 확신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따라서 갬블에 의하면, 칼빈 해석방법론에 관한 다음과 같은 파커의 견해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방법은 단지 목표에 이르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최종적인 요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이해되고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설명되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이다.

그것은 요약(compendium)에 의해서처럼 장황한 주석들에 의해서도 충실하게 설명되어질 수 있다.' 갬블의 문제는 여기서도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의 배후에는 칼빈이 스스로 자신의 방법만이 저자의 정신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했을 것이라는 갬블의 전제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칼빈 자신이 선호한 간결한 주석방법은 단순히 방법만의 문제가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을 의미해야한다. 또한 칼빈이 자신의 방법이 다른 동료 개혁가들의 것보다 우수하다고 판단했더라면 분명 그는 불링거의 주석방법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불링거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비판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칼빈은 불링거의 주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다음으로는 불링거인데, 그도 역시 자신의 공로로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교리와 연관된 간결함을 사용했기 때문인데, 그는 그것[=간결함]으로 크게 인정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리와 연관된 간결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칼빈이 이상적인 주석방법으로 간주한 '간결함'의 방법의 범주에 불링거의 주석을 포함시켰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만일 이러한 가능성이 어느 정도 인정될 수 있고, 또한 칼빈이 불링거와 동일한 방법으로 자신의 주석을 저술한 것이 아니라면, 칼빈이 생각한 '간단명료한 방법'은 칼빈 자신이 추구한 방법만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아마도 칼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생각한 그 방법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이룩한 것만이 자신이 생각한 이상적인 것의 표본으로 간주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전에 그리나에우스와 함께 논의했던 그 이상적인 주석방법론을 자신의 [로마서주석]에서 성취했다고 확신하지도 않았고, 또한 그것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추구와 성취는 분명히 어느 정도 구분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도 갬블의 평가는 칼빈의 의도를 넘어선다.


결론

[로마서주석]에서 뿐만 아니라, 1539년판 [기독교강요]의 독자서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칼빈이 '간결함'을 자신의 주석방법의 원리로 삼고자했던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는 이 원리를 그의 로마서주석에 뿐만 아니라, 다른 주석에도 적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원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단지 장황한 교리적 논쟁을 삼간다는 점과 모든 주석가들의 상이한 주석을 인용하지 않는다 점 외에 달리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칼빈은 자신이 깨달은 '간단명료한 주석법'만이 성경적 주석방법의 원리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칼빈 편지의 내용으로 보면, 파커의 지적대로, 주석방법은 부차적일 수 있다.

칼빈이 주석가라면 반드시 성경저자의 의도를 곡해시키는 일만은 피해야 하며 가능한 간단명료하게 주석하는 것이 교회에 많은 유익을 가져온다고 믿었지만, 그 방법이 성경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최선의 성경적인 방법이라는 식으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오히려 칼빈에 의하면 어떤 방법으로 주석을 하든, 만일 그들이 저자의 의도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주석가들은 서로를 서로를 인정해야 하며 서로 비난하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심지어 칼빈은 경건한 주석가들 사이에도 해석의 차이는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가! 칼빈의 이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갬블은 자신의 글을 통해 크라우스와 파커의 견해를 기초로 '간결함과 쉬움'의 방법을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칼빈 자신의 특징적인 해석 방법론으로 확정짓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을 위해 갬블이 선택한 방법과 논증은 성공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갬블이 가정하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칼빈은 자신이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한 '간결명료한 주석법'을 자신의 저술한 로마서주석의 방법과 동일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곳에서도 그것을 성취했다고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이상적인 주석방법이 성경적 수사학에서 도출된 것으로써 최상의 방법이라고 암시하는 곳도 찾아볼 수 없으며, 나아가 자신의 주석방법이 다른 어떤 것보다 (특별히 멜랑흐톤과 부써의 방법보다) 우월한 것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증거를 발견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갬블의 주장과는 달리, 동료 개혁가들, 특별히 멜랑흐톤과 부써의 주석 방법에 대한 칼빈의 평가는 지나치게 비판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칼빈은 독자들의 입장을 어느 정도 감안한 이상적인 주석법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 원리에 따라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자신의 주석이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유익을 끼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논하고 있을 뿐이다.

거기서 칼빈은 멜랑흐톤과 부써의 주석방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결과 자신이 로마서주석을 기록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경쟁하려는 마음이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자신의 주석에 대한 정당성을 경쟁이 아니라, 또 다른 측면에서의 기여의 가능성에 호소하고 있다.

왜냐하면 칼빈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도 완전하고 충분한 지식을 허락하시지 않았고, 따라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얼마든지 후배들이 선배들의 작업을 다듬고 보충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결코 자신의 것만을 고집하는 좁은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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